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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사

티베트가 불타고 있다. 2009년 이후 2013년 2월까지, 107명의 티베트인이 자신의 몸에 불을 놓았다. 분신에 동조한 이들은 재판에 회부 되거나 구속됐으며, 14대 달라이라마(뗀진갸초, 78)는 자살 방조죄 혐의를 달았다. 인도 주재 티베트망명정부(총리 롭상상게, 45)는 2013년 정부 주요 정책을 ‘티베트와의 연대(Solidarity with Tibet)’로 정하고 티베트 사태에 국제 사회가 실질적으로 관여해 줄 것을 호소했다. 망명정부는 ‘종교의 자유’와 ‘달라이라마의 귀환’을 구호로 벌어지고 있는 소신공양 사태에 대해 현 중국 정부의 자치주 강압 실태를 반증하고 있다는 견해다. 외신은 3월에 열릴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를 앞두고 분신 사태는 더욱 악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티베트가 처한 현실을 외부에 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선택 된 소신공양. 다람살라의 난민들은 매주 수요일마다 추모의 춥바(티베트 전통 의상)를 입는다. 그들이 진정으로 희구하는 자유를 이루기 위한 지름길이었다고 이해하려 하면서도 동시에 무모한 희생이 아니었기를 바라는 기도다. 인도가 영국으로 독립하는데 200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현 티베트망명정부 54년의 망명사는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살피는 지혜가 없으면 출리심과 보리심을 수행하더라도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연기의 공성으로서 방편을 삼으십시오.” 달라이라마는 지난 인도 문곳에서 열린 <람림> 법회 기간 중, 세계인권의날과 달라이라마 노벨평화상 수상 기념일인 12월 10일을 기념한 행사에서 티베트 대붕사원에 모셔져 내려온 ‘법라’에 얽힌 전설에 관해 연설했다. 2천여 년 전 인도에서 티베트의 간덴사원으로 모셔진 ‘법라’는 14세기 쫑카빠 대사에 의해 대붕으로 옮겨 모셔진 것을 달라이라마의 인도 망명 당시 미쳐 챙겨오지 못한 일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법라’는 티베트의 불교와 미래를 수호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에 1959년 달라이라마의 인도 망명 이후 오랜 시간 더욱 큰 염려를 낳았다. 시간이 흘러 중국의 한 도굴단에 의해 대붕사원의 상징인 ‘법라’를 도난당하고 만다. 이후 외국의 경매시장에서 그 ‘법라’는 다시 등장하게 되고, 보통 물건이 아님을 알아본 한 불교도 재력가에 의해 고가에 낙찰되었다. 이후, 인도 다람살라 망명정부에 수립된 달라이라마의 궁전으로 ‘법라’가 공양물로 올려 지게 됨으로서 다시 달라이라마의 품에 되돌아오게 되었다는 한 편의 영화 같은 이야기다. 이날 노벨평화상 수상 기념식에서 달라이라마는, “이제야 비로소 그 ‘법라’를 본래 자리에 되돌려 놓게 되어 큰 시름을 놓았다”고 말했다. 이로서 티베트의 미래를 수호할 역할을 지닌 법라가 인도 문곳에 재건된 대붕라찌사원에 모셔지게 되는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더불어 이 곳 문곳에서 티베트불교의 수호를 위해 한국선방을 문 연 스님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티베트불교로 재 출가해 법명 뗀진외계(강봉 스님)로 수학중인 스님은 이번 <람림>법회에 맞춰 선방 다섯 채를 열었다. “청년 시절에 절 한 채 짖은 것을 끝으로 내 남은 평생은 화장실 한 칸도 안 지으리라고 다짐했건만, 달라이라마께서 법문을 하실 적마다 항상 ‘덴사’에는 선방이 없다고 하신 말씀이 계속 내 마음에 앙금으로 남더니만 결국 일을 냈지요.” 덴사란, 대붕·간덴·세라의 티베트불교 3대 사원을 통칭하는 말이다. 실질적으로는 대붕사원의 고망과 로셀링에도 밀교 수행을 위한 선방이 있다. 그러나 현재는 노장들만 머무는 곳으로 전락해 마치 양로원과 같은 분위기로 탈색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봉 스님이 선방 건립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에는 계기가 있다. 선방 건립에 대한 미련이 다 지워지지 않을 무렵, 갑상선 암 선고를 받은 한국의 한 보살이 수술을 받고 보험 해택으로 받은 한화 6천만 원을 선뜻 한국 선방 건립을 위해 보시한 것이다. 더욱이 공사 견적으로 인도 건축업자와 계약한 금액도 보시금과 딱 맞아 떨어졌다. 주변의 도반들도 선방을 건립하는 것은 스님이 할 수 있는 최상의 보시가 될 것이라고 독려한 것도 큰 힘이 됐다. 그리고 공사기간 1년 4개월 만에 준공되기에 이른다. 문곳의 2개월간의 몬순과 인도 경찰의 시비로 1개월간 공사가 정지된 것을 감안하면 원력의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문곳의 선방은 티베트스님 가운데 현교의 계율을 수학한 비구 스님을 대상으로 전액 무료로 운영된다. 티베트불교의 안거는 석사모니 붓다의 탄생일로부터 한 달 후인 5월 15일~8월 15일의 3개월 이지만 이곳 선방은 달라이라마스님의 법문을 제외한 1년 사철을 머물 수 있게 한다는 기본 방침을 세우고 있다. 무엇보다 식생활 개선에 중점으로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포부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선방 다섯 채에 이어서 다섯 채를 증축해 총 열 채의 선방을 완공할 계획이다. 이번 람림 법회 기간 중에 선방 건립 보시자들과 함께 달라이라마 스님을 친견하고 선방의 설립 취지를 보고 드린 스님은 달라이라마로부터 큰 격려를 받았다. 또한 스님은 본인이 마중물이 되어 티베트불교 수행을 위한 여법한 수행 공간이 마련되는 체계를 잡아 가기를 기대했다. (다음은 법문의 요지 ) 지금 여기 황금 법상에 달라이라마라는 이름을 지닌 한 노인이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달라이라마는 어떤 존재로 인식되고 있습니까. 저는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한 마리의 고양이와 같다고 비유하고 싶군요. 생사윤회와 열반은 마음에서부터 관찰해야 한다고 7대 달라이라마께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자성이 있다고 하는 차단해야 할 바를 여러분은 강한 ‘법집’으로 움켜쥐며 살아가고 있음을 스스로 아시는지요. 과연 중생이라는 대상과 법신이라는 대상에도 차이가 있을까요? 바깥 경계와 마음의 작용들이 마치 원래 그러하게 존재해 왔다고 여겨 왔기에, 단지 이름과 소리로서 붙여진 것일 뿐 독자적인 성립이 없다고 인정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공(空)은 일체의 견 함을 떠남이라.’ 용수보살은 <중론>에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我)’와 ‘아소(我所)’의 공함을 깨달아 무아를 통달하는 지혜를 논하였습니다. 열반의 문으로 들어감에 오직 하나의 열쇠는 무아를 보는 것입니다. 무자성으로 하여 공이며 그 성상이 일체 전도하여 해탈입니다. <입중론>에서, ‘무아를 깨달을 적에 항상 하는 생각이 없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보살이 바라밀다 수행을 행할 때에는 일체 법의 본체의 자상이 없는 무의법을 봐야 합니다. 이를 일컬어 ‘열반’이라고 하며 다시 말해 ‘승의제’라고 합니다. 전도된 의미로 범행을 닦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자성이 없다고 해서 논제의 꺼리가 되는 그 논제 또한 그러합니다. <현구론>에서, ‘사물의 현상은 무명의 혼미함으로 일어난다.’고 하였으니 이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부디 삿된 것을 멀리하십시오. 제법의 무자성이란 모든 사물이 모두 무자성 하다는 의미이니 무명을 가진 이가 자성이 있는 것처럼 허구하여 마치 자성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 경우입니다. 내외이 모든 법이 자성으로서 이루어졌다고 집착함이 바로 무명입니다. 무명으로서 제법을 탐착하니 생사윤회의 씨앗이 됩니다. 무명이란 생사윤회의 근본이자 살과 악연의 원인입니다. 법아집과 인아집 모두 무명입니다. 이 안에 두 가지 인과의 도리가 있으니 인과 연으로 생한 일체 공한 사물을 봐야합니다. 구름과 같은 희론을 거두십시오. 비로로 그 자리가 열반입니다. 바깥 대상으로부터 내 마음에 작용하는 것이 아닌 환과 같은 것임을 인식할 수 있어야합니다. 결코 자성으로 성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아십시오. 이 지구상의 많은 종교들이 지닌 근본 의제는 곤경에 처한 이들의 의지처입니다. 사랑과 자비 그리고 스스로의 만족 등은 오로지 이타를 위하는 종교의 사명입니다. 종교의 교리와 사상의 다양성 속에서 가장 핵심으로 삼는 것은 타인에게 헤를 끼치지 않는 ‘비폭력’입니다. 교리불교로 해석되는 부파불교에서도 근본 취지는 대승과 같습니다. 나와 남을 구분 지어 다름을 배척하는 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쫑카파 대사께서는, “누구의 귀에 닿더라고 모두를 적정케 하리다. 앞뒤의 모순에서 벗어나 모든 사상을 섭렵하고 근거와 타당성을 뒷받침해야 할 것이다. 삼선도와 해탈을 이루게 하니 환희심이 늘어난다.”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가르침 속에 다양한 사상과 교리가 있습니다. 중관학파의 귀류논증과 각각의 차이나는 교리와 사상을 유념하며 그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는 근기를 키워가야 합니다. 청변보살이 불호 보살의 주장을 반박하신 바가 그러하며, 월칭보살께서 청변보살을 다시 반박하신 바 그 또한 그러합니다. 지성의 힘으로서 이치를 아는 지혜로서 바른 사상을 바른 견해로 살펴보십시오. 사상과 견해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현재 내가 옳다고 믿어 따르는 교리에 있어서 맹신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진정한 말씀’이라는 확신은 신앙의 고착화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닝마와 까규 그리고 샤캬의 가르침에도 각각의 차이가 있습니다. 구별을 지어 보면 각각의 차별된 교리가 그러합니다. 내가 믿고 따름에 오직 이것만이 옳다고 여기기 전에 이치에 합당함을 바른 견해로서 살펴야 할 것입니다. 남미 아르헨티나 법회에서 한 과학자를 만났습니다. 그 과학자는, “본인이 전념하는 과학의 분야에 대해 집착을 갖지 않도록 스스로를 당부한다.”는 인상 깊은 말을 하였습니다. 과학자는 가능성의 실마리를 항시 열어 놓아야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불교 내 학파에서도 이와 같은 안목을 지녀야 한다고 봅니다. 쫑카빠 대사는 겔룩빠로서 황모를 상징체로 합니다. 우리가 오늘 <람림>을 주제로 하여 배움을 구하더라도, 까규의 마하무드라 수행법 혹은 닝마의 대원만 수행법 역시 두루 알아야 합니다. 정진하는 이의 근기는 매우 신중히 살펴져야 하는 까닭입니다. 배우고자 하는 의지로서 스스로의 경계에 한계를 고정 짖지 않는 것으로 수행의 단계를 향상시켜야 할 것입니다. 티베트불교의 역사에서 한 시기에는 닝마가 주류였으며 현재는 겔룩이 주류가 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추어 현명한 불교도라면 어느 한 부분에만 치우침 없이 두루 섭렵하는 관대한 수행자가 돼야 합니다. 우리는 화합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교도가 그 화합의 선봉자가 될 수 있다면 불법이 온 누리에 상생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열아홉 살에 ‘공성(空性)’에 대한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서른이 되어서 어렴풋이 ‘공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붓다의 성스러운 근본 지혜를 담은 용수의 <중론> 18품, 24품과 24품을 요약한 22품을 즐겨 봅니다. 생사 열반을 규명하는 이치에 대해 간략하게 논한 품입니다. 우리의 행위와 주체의 인과 작용들이 그 대상으로부터 자성이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제와 속제는 서로 모순이 됩니다. 존재하는 것을 두고 ‘있다’고 한다면 반드시 ‘없다’와 모순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붓다께서는 진제에 머무심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속제를 볼 수 있으셨던 것일까요? 붓다는 오로지 선정에만 머무시는 분이라고 여기시나요? 붓다께서 승의제의 선정에 머무심에 중생의 오온을 직접 보신 것이 아닌 속제의 모든 현상은 중생을 통하여 보셨습니다. <중관>에서 이르기를, ‘모든 경계의 없음을 관찰하라’고 하였습니다. 공성을 닦기 위해서는 일체 분별을 닦아야 합니다. 공성을 수행하는 이라면 무아의 경을 향해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오온의 형상들이 마치 대상에서 본연히 존재하는 것과 같이 느껴지지만 모든 것은 내가 여겨온 바와 같이 그 자체로 비롯된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일체는 공성을 본질로 합니다. 오로지 내가 이름 붙인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공성을 본 것과 같습니다. 왜 이것은 연기이기 때문에 공인가? 왜 이것은 공하기에 연기하는가? 모든 행위가 원인과 결과를 낳음의 인과에 대해서 틈틈이 사유하십시오. 자신이 반드시 마음에 와 닿는 글귀가 있다면 항시 간추려서 소지하며 틈틈이 사유하는 것도 좋은 습관입니다. 연기의 공으로서 보특가라의 자성이 안주하지 않음을 보십시오. 연기의 법을 근거로 자성의 유무를 규명하고자 할 때 하나 혹은 다수 그리고 사변에 벗어남에 대해 논리로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상호 의존의 존재성을 도출하기 때문입니다. 일체 법이 모두 이와 같음을 모두 알아야 하니, 마치 신기루의 물을 실제로 마실 수 없음을 알아야 하는 바와 같습니다. 나의 것이 없음을 알았으니 어찌 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인도 문곳= omflower@gagyo.org www.gagyo.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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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달라이 라마 방한추진 선포식 "방한은 불교계 권리" 석천사 2014.07.06 3551
» 문곳 람림법회_'무아(無我)를 보는 자, 희론의 구름을 거두리' 석천사 2013.11.18 36215
14 福田을 가꿈에, 의식은 지혜에 자비는 중생에게 두어라 석천사 2013.11.18 52028
13 믿음 안에서 행복한 당신을 위하여 석천사 2013.11.18 62727
12 8월 11일 런던서 티베트의 아리랑 울린다 석천사 2013.11.18 55022
11 삼동린포체와 함께한 세계불교도우의회 석천사 2013.11.18 51659
10 2011미국 아리조나대학의 티베트난민촌 "메인빠뜨" 의료 봉사 방문 비디오 석천사 2013.11.18 61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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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인도 다람살라의 불교소식] 달라이라마, ‘진실의 승리’를 믿는 지구별 유랑민 석천사 2013.11.18 7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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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달라이라마, 종교계 노벨상 ‘템블턴상’ 수상 석천사 2013.11.18 64467
5 '티베트의 분신 저항 인도 번질까 우려' 현실로 석천사 2013.11.18 42217
4 달라이라마, “티베트의 독립보다 티베트인의 자유가 최선” 석천사 2013.11.18 77287
3 2012년 보드가야 칼라차크라법회 “共業중생이여. 지혜의 등불 밝히는 곧은 심지 지니게” 석천사 2013.11.18 73683
2 플라톤 공부하며 느낀 갈증, 달라이 라마 만나며 풀었다 석천사 2013.11.18 69882
1 (스크랩) 배낭여행객 부르는 달라이 라마 가르침 석천사 2013.11.18 676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