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법집 책을 펴내며
언제나 수행의 성취자들께 의지합니다.
성인이 떠나신 지 오래되었고, 수만 리 떨어진 이곳 동방에 그분의 법이 전래된 이래로 1,600여 년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법이 풍전등화와 같은 말법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실오라기 같은 법맥을 겨우 유지하는 후말세에 태어난 힘없는 비구로서, 제 열정에 비해 방편과 지혜가 부족하였고, 말 법의 거친 업력에 휘말려 마음은 아프고 어지럼증만 더해질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스승을 찾아다니다가 나란다 전통의 대승법이 오랫동안 보존 되어 온 티베트 불교를 만나게 되었고, 그곳에서 수많은 공부인들을 만나는 이생 최대의 행운을 얻었습니다.
특히, 달라이 라마라는 위대한 성자를 만나 법을 듣고, 그분의 위로와 격려를 통해 겨우 수행자로서의 삶의 지표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성자 께서는 노구에도 불구하고 중생을 위해 세계를 누비며 전법하셨고, 부처님 보다 더 넓은 지역을 교화하셨습니다. 구순의 연세에도 전심전력을 다해 법을 전하시는 모습을 보며 제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의 흉내라도 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BTN 방송에서 1년간 대승 수행 교리 전반을 48회에 걸쳐, 1회당 45분씩 강설하였습니다. 제가 실력이 뛰어나서도 아니고, 말솜씨나 대중적 인지도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다만 한국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부처님 말씀을 접할 기회를 드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마치 맨살을 드러내는 것 같은 부끄러움을 감내하며 강의를 했 습니다. 존자님의 부촉과 말법 시대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 강의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책의 내용 중에는 여러 대중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설법을 받아 적은 구어체로 인해 읽는데 불편함이 있을 수 있으며, 논리적인 부분보다는 감성적인 부분이 강조된 면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설법 당시의 느낌을 최대한 그대로 전하고자 책으로 엮었으니, 많은 이해와 지도 부탁 드립니다. 저는 우리 불교의 현실 문제를 항상 염두에 두고 강설했기에, 이 책이 여러분의 수행과 공부 길에 조금이라 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뭇잎 한 장에도 범우주의 인연이 모여 있듯이,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 까지는 많은 분들의 공덕이 함께했습니다. 마하연 법우 황도진, 이정애, 최보란 도반과 여러 동참 불자들, 녹음을 풀어 자료를 정리해 준 김의연, 교정을 맡아준 윤금선 작가, 양승규 선생, 이인혜 선생, 그림을 그려준 이 준희 작가, 방송을 해 준 불교 TV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책은 염상훈, 김태림, 양주분의 법보시로 완성되었습니다. 이 모든 공덕으로 보리심을 발한 이들은 더욱 증장하고, 보리심을 발하지 못한 이들은 발심하는 인연이 되기를 간절히 발원합니다.
2024년 12월 20일 여수
퇴옹 진옥 합장
FOREWORD It has been for many years that I have known Ven. Jin Ok. During that time he has along with many Koreans come to India and has re quested me to offer them teachings from the Tibetan tradition. I've been happy to do so because Koreans have traditionally been a Buddhist people and I've been impressed by the deep interest those I've met have shown in what the Buddha taught. Ven. Jin Ok began his own training in a Korean monastery. Sub sequently, he broadened his practice and training by studying in the Tibetan tradition. He has taught extensively in Korea and I understand recently gave a series of weekly talks on Korean television. Materials from these talks have been compiled into this book in which he explains Buddhist ideas such as Altruism, the Four Noble Truths, the Law of Cause and Effect, the Four Immeasurable Wishes, and so forth. I believe the key point among all these is to remember that all sentient beings are the same in wanting happiness and joy, while seeking to avoid suffering. By cultivating compassion for sentient beings, we can make our lives meaningful. Compassion puts us at ease and that peace of mind brings inner strength. Therefore, warm-heartedness is a source of happiness for self and others. When you help others, you fulfil your own goals too. I welcome this book, ‘How to Practice’, in Ven. Jin Ok's Right Path series. I am confident that Koreans with an interest in Buddhism will find it helpful and inspiring.
14 October 2024

추 천 사
저는 오랫동안 진옥 스님을 알고 지내왔습니다. 그동안 스님께서는 많은 한국인과 함께 여러 차례 인도를 방문하셔서 저에게 티베트 전통의 법문을 설해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불자이며 제가 만난 분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기 에, 저는 기쁜 마음으로 법문을 했습니다.
진옥 스님은 한국의 한 사찰에서 수행을 시작하셨고 이후 티베트 전 통을 공부하며 자신의 수행과 정진의 깊이를 넓혀 나갔습니다. 스님께서 는 한국에서 폭넓게 가르침을 전하셨고, 최근에는 한국 TV를 통해 주간 강 의를 진행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편찬되었으며, 이타심, 사성제, 인과의 법칙, 사무량심 등과 같은 불교 사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가르침의 핵심은 모든 중생이 행복과 기쁨을 원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동일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함양하면 우리는 삶을 의미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자비심은 우리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그 평온은 내면의 힘을 증대 시킵니다. 선한 마음은 나와 타인 모두에게 행복의 원천이 됩니다. 다른 이들을 도움으로써 여러분은 자신의 목적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진옥 스님의 ‘정로’ 시리즈 중 하나인 이 책, ‘수행법’을 기쁜 마음 으로 소개합니다. 불교에 관심 있는 한국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많은 도움과 영감을 얻으리라 확신합니다.
2024년 10월 14일 달라이 라마
추 천 사
본질은 양극을 떠나 상대가 아니나 현상은 상대로서 서로 연기해서 존재 합니다. 중도의 본질은 언어와 이름을 떠났으나 그 본질을 설명하는 것은 상대법이기에, 이를 교리라고 합니다.
불교는 본질에 들기 위한 응병여약의 방편입니다. 저희 BTN불교TV도 부처님의 방편인 말씀을 전달하는 현 시대의 중요한 수단입니다.
진옥스님께서는 한국 불자들의 여망에 의해 세계 최초로 BTN이 전파를 송출할 때 처음부터 참여하여 신행 상담을 통해 불자들을 만나왔습니다. 그 이후 다시 행복수행론이라는 제목으로 대소승의 교리체계를 좀 더 쉽게 현실에 맞추어서 바른 법을 설명해주셔서 많은 불자들이 바른 법향을 향유하게 해주었습니다. 방송했던 내용을 다시 책으로 정리하여 영상과 함께 공부할 수 있게 해주어서 불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저자께서는 달라이라마 성하의 티벳불교를 접하면서 용수보살의 중도 공사상을 더욱 깊이 사유하여 교학을 설명함으로서 대승의 본 고향인 나란다의 전통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지침서가 되리라는 생각입니다.
많은 분들이 법보시의 수희 동참 대중이되어 한국 불교가 진보되는 공덕의 길이 열리기를 발원합니다.
2024년 12월 18일
BTN불교TV 대표이사 회장
무봉 성우 합장


1장
수행의 결과가 곧 행복이다
제가 법문을 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은 여러분의 행복한 삶에 얼 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실제 여러분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법문을 해야 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7세기 경 인도에 산 티데바(Śāntideva)라는 유명한 수행자가 계셨는데 『입보리행론』 첫머리 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설명하는 것 중에 이 전에 없던 것 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글솜씨가 뛰어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 에 남을 위한다는 생각도 언감생심입니다. 내 마음에 담아두기 위해 이 글을 씁니다.” 겸손하여 하신 말씀이겠지만 그보다는 당신의 글이 부처 님 말씀에 얼마나 부합하는가, 부처님 말씀에 상응하여 바르게 살 수 있 겠는가, 이런 생각에서 나왔다는 말씀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우 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길을 찾아갈 수 있겠는가, 이 점이 가장 중요합니 다. 우리 모두 부처님 말씀을 듣고 행복의 계단을 한 계단이라도 밟고 올 라설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뿐입니다. 다만 제 공 부가 모자라서 부처님 말씀을 제대로 전할 수 있을지 걱정을 항상 합니 다. 공부가 얕은 제가 성인의 말씀을 완벽하게 소화해서 전달한다는 것 에 한계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도 평생을 공부하며 살아왔기 때문 에 바르게 전달하려고 노력할 것이니 혹시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으면 알려주시고 같이 탁마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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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수행을 왜 해야 합니까? 수행이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생긴 이 래 우리는 지금까지 완벽한 행복을 발견한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부처 님만이 완벽한 행복을 아셨고, 실제로 체험하셨으며, 그것을 말씀으로 남 기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처님 말씀을 근간으로 설명해나가려고 합니 다. 아울러 도를 성취한 제자들의 말씀도 같이 전해드리겠습니다. 중간 에 우리와는 다른 전통을 가진 불교 이야기도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티 베트불교입니다. 티베트불교는 인도 나란다(Nālandā)사의 전통을 계승 했는데 우리나라와 중국에는 전해지지 않은 가르침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와 다르다고 외면하지 말고 내용을 잘 살펴보면 우리 한국불교를 더 두텁게 하고 수행을 더 깊이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내가 마음을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바뀌면 말이 바뀌고, 말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업이 바뀝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바뀌지 않으면 이 세상의 그 어 떤 것도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나를 바꾸어 나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행복해질 수 있는 마음과 행복해질 수 있는 말과 행복 해질 수 있는 행동으로 자신의 업을 바꾸어 나가는 것을 불교에서는 ‘수 습(修習)’, 즉 ‘습관을 바꾸어 나간다’라고 합니다.
수행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불교란 무엇인가’부터 말씀드리겠습니 다. 불교는 2,600여 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깨달음 을 이루고 남기신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불교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인 류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던 완벽한 행복을 부처님께서 발견하셨죠. 그 완 벽한 행복에 들어가는 길을 ‘방편’이라고 하고 부처님의 ‘도(道)’라고 합니다. 도는 길이며 방법인데, 그 길을 어떻게 바로 알고 바로 갈 것인 가, 이것이 불교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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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으로 말하자면 불교는 꿈에서 깨어나듯 미몽에서 깨어나는 가 르침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각자(覺者), 꿈에서 깨어난 분이라고 합니 다. 중생은 아직 꿈속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혼미한 꿈속에 있다 해서 중 생의 상태를 ‘미몽’이라고 합니다. 거기에서 중생을 깨어나게 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다면 꿈은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말합니다. 우리가 세계라고 생각하고 있는 여러 가지 것들, 그것이 이상 적인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 돈이 됐든 권력이 됐든, 천국이 됐든 지옥 이 됐든, 이 삶 자체가 전부 꿈속의 세상과 같습니다. 꿈은 실체가 없음 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꿈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고통은 탐욕 과 분노와 시기, 질투 때문에 일어나고, 길을 알지 못해 잘못된 길로 가 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부처님께서는 고통을 이렇게 관찰하여 깨치고 나 서 삼독을 없애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독이 몸 속에 들어가면 큰 고통 을 일으키듯이 탐진치 삼독이 우리를 고통으로 몰고 가기 때문에 이 세 가지 독을 없애는 것이 행복을 찾아가는 길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독은 무엇 때문에 일어납니까? 영원한 ‘나’가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 일어납니다. 인도 사람들은 창조신 브라흐만(Brahman) 을 믿습니다. 실제로는 영원한 나라는 것이 있지 않고 나를 만들어낸 존 재도 있지 않은데, 우주를 창조한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그 속에서 나 온 ‘나’의 존재도 영원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이것을 인류가 만들 어낸 가장 큰 착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원한 내가 있다고 착각하면 그 것을 고집하게 되고 그 때문에 탐욕을 일으킵니다. 내 중심으로 돌아가 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내 마음대로 하기 위해 인과법에 어긋난 어리석 은 행동을 반복합니다. 반복하는 힘을 ‘까르마(karma)’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애쓰는 것을 집착이라고 합니다. 역설적인 예가 부처님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영원한 내가 있다는 착각에서 깨어나 욕망을 버리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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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해지셨습니다. 그것을 니르바나(nirvāṇa)라고 합니다. 번뇌가 사라 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구제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행복 도 실체가 없고 고통도 실제가 아닌 꿈에 집착하지 않고 깨어나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나’와 관련하여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 다. 태어나자마자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면서 “천 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것을 ‘내가 최고’라고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상을 없애라고 하 면서 어떻게 저렇게 아상이 높은가?’라고 오해합니다. 부처님께서 태어 나 첫 호흡이 터지면서 울었던 그 목소리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겠습니 까? “유아독존”이라는 말씀은 천상에서 지옥까지, 이 세상을 통틀어 살 아가는 삶의 주체이자 행복을 만들어갈 주체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 사람들은 브라흐만 신이 행복을 준다고 생각했습니 다. 어불성설입니다. 있는지 없는지 증명되지도 않은 그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겠습니까? 삶의 주체는 바로 나입니다. 나 말 고 다른 누가 행복을 주겠습니까? 어디에 빈다고 행복이 오겠습니까? 여 러분도 절에 가서 빌면 안 됩니다. 누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라고 하던데, 우리 스스로 구걸하는 이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조상한테 비는 사람도 있습니다. 조상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고 해서 뭘 지낸다고 하는데, 조상 이 어떻게 앞을 가로막겠습니까? 내가 부모라도 내 자식이 살아가는데 길을 터주려고 하지 가로막겠습니까? 그것은 잘못된 조상숭배입니다. 세 상을 주관하는 신이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도 거짓입니다.
행복을 만드는 것도 나이고 불행을 만드는 것도 나입니다. 그렇다면 행복을 만드는 것은 무엇이고 불행을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를 구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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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이것을 정견이라고 합니다. 행복을 만들어가는 것이 나라면, 나 의 무엇이 그렇게 합니까? 마음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시작하고, 말을 함 으로써 의지가 생기고, 행동을 함으로써 힘이 생깁니다. 운동선수에게 근 육이 생기듯이 우리에게 마음의 근육이 생기는 것입니다. 수행도 운동과 같아서 한꺼번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복할 때 근육이 탄탄해지고 어 려움을 극복할 힘도 생겨납니다. 근육을 키워 몸을 만들어가는 것처럼 행 복을 만들어가는 주체는 바로 나입니다. 내가 삶의 주체이기 때문에 불 교에서는 내가 가장 소중하다고 가르칩니다.
내가 가장 소중하니까 소중한 나는 빨리 죽으면 안 되고, 소중한 나는 돈이 많아야 되고, 소중한 나는 맛있는 것을 먹어야 된다는 말일까요? 그것은 애착이고, 애착을 갖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탐욕을 부리면 오히 려 내가 더 괴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내가 더 괴로워지고 더 빨리 병에 걸리고 더 빨리 죽게 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소중한 나 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수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수행은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남에게 수행을 권할 수는 있을지언정 수행을 하는 것은 자신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남한테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아함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여,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 라.” 죽음 앞에서는 나 혼자밖에 없습니다. 배우자나 자녀가 있어 물 한 그릇 떠다 준다 해도 물 한 모금도 안 넘어갈 지경이 되면, 그때 누구를 의지합니까? 불교는 행복과 불행이 오직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이야기합 니다. 그대가 수행한다면 행복의 길이 열릴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그전까지는 브라흐만 신에 의지하는 사회였으니 부처님의 이런 가르침은 대변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중요한 것은 ‘어디서 행복을 찾을 것인가’ 하는 공간의 문제 입니다. 우리는 극락세계를 서쪽에서 찾습니다. 육조 스님께서는 서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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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극락세계는 십만 팔천 리 서쪽으로 가야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비 유입니다. 더운 나라 인도는 저녁에 해가 져야 시원합니다. 해가 서쪽으 로 진 것처럼 번뇌가 사라져 시원한 곳을 서방정토 극락세계라고 했습니 다. 십만팔천 리에서 십만은 열 가지 악이고 팔천은 여덟 가지 삿된 생각 입니다. 그 반대가 십선(十善)과 팔정도(八正道)입니다. 열 가지 악을 벗 어나면 십만 리를 간 것이고 여덟 가지 사견을 벗어나면 팔천 리를 간 것 입니다. 십만 팔천 리가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먹 느냐에 따라 예토가 정토로 바뀌는 것이지 그 둘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육조 스님께서 “마음이 더러우면 십만 팔천 리를 가더라도 그대에겐 정 토가 없고, 탐진치를 떠나 그대 마음이 깨끗하다면 그 자리가 바로 정토 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아미타경』, 『관무량수 경』 등에서 비유를 들어 하신 말씀들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자 리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한국에 태어나서 각자의 가정이 있고 저마다 처한 위치가 있습니다. 그 자리가 예토가 되고 정토가 되는 것은 각자 어 떤 마음을 갖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이지 장소가 따로 있지 않습니 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다음으로 ‘언제 행복을 찾을 것인가’ 하는 시간의 문제입니다. 고대부 터 많은 종교에서 죽은 뒤에 좋은 곳에 간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 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지요. 아무리 힘들게 살아도 여기가 낫다는 이야기입니다. 『금강경』에서는 ‘과거심 불가득 미래심 불 가득 현재심 불가득’, 시간 자체도 자성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시간의 공 성을 안다면, 마주하는 시간 시간이 극락이 되지 않는다면, 따로 어디 극 락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극락과 지옥이 지금 여기의 나 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 순간 내가 하지 않고서는 아무 세계도 열 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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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지옥을 만들겠습니까? 누가 쓸데없이 남을 가두려고 지옥을 만 들겠습니까?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천상도 우리가 지은 업에 의해 스스로 만들어서 스스로 가는 것입니다. 100% 인과를 따라 가는 것이라 안 갈 수도 없습니다. 지옥은 자기가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교도소에서 법문 할 때 “이 교도소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니까 “법무부에서 만 들었습니다.” 합니다. “법무부에서 만든 게 아닙니다.” 했더니 “그러면 건 축업자가 만들었습니다.”라고 합니다. “건축업자도 돈을 주니까 만들었 겠지만 건축업자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했더니 “그러면 누가 만들었습 니까?” 묻습니다. “그대들이 만들었습니다.”라고 하니 “난 만든 적이 없 는데요?” 하더군요. 저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대들의 업이 만든 겁니다. 인과가 풀리면 교도소에서 누가 그대를 데리고 있겠습니까? 그 리고 그대의 업이 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담벼락을 넘을 수 있겠습 니까?” 그러니 전부 자기가 만든 것입니다. 이런 도리를 정토교에서는 ‘유심정토(唯心淨土)’라 하고 유식학에서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라고 합니다. 다 마음에 의해서 형성된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지금 탐진치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데 거기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방법이 무엇인가, 실제 벗어나면 해탈이 되는가, 부처님께서는 이 문제를 완벽하게 증명하셨습니다. 고통에 얽혀있는 것을 ‘걸려 있다’, ‘장애가 있다’라고 합니다. 그로부터 벗어난 것을 ‘니르바나(nirvāṇa)’ 또는 ‘해탈’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당신의 수행과 득도를 기초로 가 설을 세워 설명했고 그 후 많은 분들이 그 공식에 따라 수행하여 증명했 습니다. 팔만대장경이 모두 해탈하는 방법이고 그 길을 걸어서 해탈에 이 른 수많은 수행자의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니 2,600년 동안 증명된 것이 해탈법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지금의 과학과 비슷합니다. 인과법, 연기 법이 그렇습니다. 1 더하기 1은 2이지, 1 더하기 1이 3이 되지는 않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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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해탈의 방법, 그 정견을 잘 이해하고 깊이 기억 하고 수행하며 살아간다면 반드시 번뇌가 사라져 해탈의 경계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불교의 인과법이 수학과 같다고 말하곤 합니다.
과학을 한 사람들은 불교를 잘 받아들입니다. 지금 서양 사람들이 불 교를 잘 받아들이는 이유도 같습니다. 몇 년 전 ‘명상이 과학이다’라는 주제로 전 세계 1,200여 명의 과학자들이 모여서 세미나를 했습니다. 과 학과 의학 분야에서 여러 가지로 실험을 해보니 명상을 통해 평정심을 얻 거나 지복감을 느꼈다는 사례가 많이 나왔습니다. 관념만으로 그렇게 되 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것을 과학자들이 실험과 관찰을 통해 결과를 도출했습니다. 요즘 미국 사람들이 명상을 많이 합니다. 얼 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1,200만 명이던 명상 인구가 지금은 거의 2,000만 명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특히 IT업계는 사장부터 직원들까지 명상을 하고 있고 회사에서는 직원들을 위해 명상 여건을 만들어준다고 합니다. 숲속에 사무실을 차리고 명상실을 제공합니다. 실제로 효과가 있으니까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젊은 과학도들에게 인과법을 얘기하면서 앞뒤 를 따져 “이것이 맞는 이야기 아닙니까?”라고 하면 다 알아듣고 수긍합 니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께서도 “과학시대에 과학과 서로 얼굴을 맞대 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종교는 아마 불교일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심리학 분야에서도 융이 『사자의 서』에 서문을 쓸 정도로 불교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심리학 분야에서도 불교가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 다. 과학 등 학문의 영역에서 불교가 배치되지 않고 오히려 영감과 도움 을 주고 있다는 것은 불교가 그만큼 합리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수행은 오롯이 불교의 영역입니다. 개인이 해탈하고 세상을 평화롭게 만 들 수 있는 힘은 불교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의 현실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점도 있습니다.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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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할 때의 일입니다. 유네스코 담당자 가 찾아와서 심사를 할 때, 여태껏 왜 신청하지 않았는지 물어 우리를 부 끄럽게 했습니다. 문명사적으로 보나 정신사적으로 보나 이 세상을 구제 할 수 있는 내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외국인 들도 그 가치를 알아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빨래판 정도로 여겼던 시절 도 있었고 그저 구경이나 하고 말았습니다.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에 일본에서는 팔만대장경을 달라고 몇 번이나 졸랐습니다. 팔만대장경의 가치를 알아보았던 것이지요. 그러니 인류를 살릴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는 팔만대장경을 그저 보존문화재 정도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달라 이 라마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1968년도에 당신이 기증한 티베 트대장경 한 질이 동국대에 잘 보존되어 있다고 사진을 찍어 보여드리자 “이걸 보존만 하고 있었습니까? 먼지 부지런히 털고 번역해야 합니다. 그 래서 사람들이 많이 읽어야 합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무지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세상 사람 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불교가 많이 복잡한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는 매우 간결하면서도 실질적인 이야기를 하셨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우리가 거꾸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무 엇입니까? 돈 많이 벌고, 잘 먹고, 오래 살고,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 고 생각하며 여태 그것을 좇아왔지요. 지금 이 시간부터 어떤 행위를 하 면 어떤 심성이 쌓이는가, 이런 마음이 일어날 때는 어떻게 그 마음을 조 복 받을 수 있는가, 이런 것을 하나하나 정리해 가면서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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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남을 위하는 마음(이타심)
여러분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지내십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무슨 생각 을 제일 먼저 하십니까? 오늘 아침은 반찬을 무엇으로 준비할까, 그날그 날 할 일을 생각하며 살아가겠지요. 어느 기도처에 갔더니 도량에 기도 문이 걸려 있었습니다. 둘러보니 가족과 자신의 건강, 합격, 사업 번창, 이 런 내용들이었고 ‘모든 중생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발원은 하 나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입니까? 기도를 하 는 것도 결국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또 하나의 수단인가요? 그것을 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인류 보편의 철학과 사상이 될 수 있 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겠습니까?
티베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봅시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바 로 부처님 전에 공양 올리고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기도합니다. 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데 티베트 사람 서넛이 수십만 번, 수백만 번 절을 하면서 라싸(Lhasa)까지 순례하는 영상이었습니다. 인터뷰하는 사람이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합니까?” 물으니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기도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중에 어떤 젊은이는 “나는 일체 중생을 위해서 이번에 출가를 해야 되겠습니다.” 하는 모습을 보고 ‘아, 우리와 생각이 많이 다르구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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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이타적이지 않을 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기적일 때 행 복이 가능하겠습니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인류가 살아오면 서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행복을 구가한 적은 없습니다. 이기심을 채우 면 순간적인 즐거움은 있을지 몰라도 길게 봤을 때 진정으로 행복한지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남을 불행하게 만들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같이 잘 살자고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가정을 꾸려도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부인은 울화병에 걸리고 자녀들은 아버지 를 멀리합니다. 이기적일 때는 나도 남도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사람들 은 누구나 고통을 싫어합니다. 이 세상에 행복을 좋아하지 않는 생명체 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해바라기가 태양빛을 바라보면서 고개가 돌아가 듯이 우리는 행복을 좇아가는 행복바라기입니다.
행복이라는 말을 놓고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무엇을 행복이라고 합니 까? 즐거우면 행복한가요? 노래하는 것이 즐겁더라도 하루 종일 부르면 목이 붓고 어지러울 것입니다. 짜장면을 좋아하는 사람도 매일 그것만 먹으라고 하면 고역이겠지요. 그래서 『초발심자경문』에 “세락후고(世樂 後苦)”라 했습니다. 세속의 즐거움을 행복이라고 느끼면서 사는데 그 뒤 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온다는 말입니다. 생일에 ‘Happy Birthday to you’를 부르지만, 그 뒤에는 후렴으로 장송곡을 넣어야 됩니다. 내가 어 느 법회에서 “생일 축하합니다”를 부르라 하고 그 뒤에 양쪽으로 나눠 서 한쪽에서는 “아이고, 아이고”를 부르라 했더니 우스워 죽겠다고 합니 다. 우스운 그것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행복이 될 수 없는 것을 행복이라 생각하면서 산단 말입니다. 태어나는 것이 행복하다고 그러면 죽는 것을 어떻게 하며, 먹는 것이 행복하다고 그러면 살찌는 것은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하면 행복할 것이다.’라면서 자꾸 다른 곳을 바 라봅니다. 수천 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길을 제시했지만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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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에는 완벽한 행복을 발견한 이가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당신이 불교도니까 부처님밖에 없다고 하는 것 아니냐?” 그러는 데 논리적 비약 이나 모순된 주장을 다 덜어내고 실제만 놓고 보면 행복의 길은 불교 외 에는 없습니다.
행복으로 가는 데 있어서 제일 쉬운 방법이 무엇입니까? 남의 행복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적어도 사촌이 땅을 샀을 때 배가 아프면 안 됩니다. 우리는 남이 불행하면 “거 봐라, 그럴 줄 알았다.”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자기도 불행해집니다. 남도 그렇게 할 거니까요. 남 의 행복을 통해서 내 행복도 같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부처님의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불교 공부의 출발은 타인의 행복을 바라는 마 음부터 시작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천수경』에 나오는 기도문은 모 두 타인의 행복을 비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기도는 행복을 가 져올 씨앗이 되고 그것을 선(善)이라고 합니다. 착함이란 남의 행복을 기 원하고 도와주는 이타심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전부 행복을 바 라기 때문입니다.
선근을 심어놓으면 행복이라는 결과를 얻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은 생물학적으로 보나 인과적으로 보나 도덕 적으로 보나 옳은 얘기입니다. 초파일 때도 시장님, 국회의원님, 시의원님 들에게 “선거 때만 돌아다니지 말고 평소에 시민의 행복을 위해서 부단 히 노력하시오. 그러면 누가 찍지 말라고 해도 다들 찍어줄 겁니다.” 그 랬더니 그분들이 공감을 표했습니다. 정치인뿐 아니라 식당을 하더라도 돈만 벌겠다고 하면 식당이 망합니다. 손님이 이 음식을 맛있게 먹고 건 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그 식당은 100% 잘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곳을 바라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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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해진다는 것은 알겠는데, 남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데 “이게 다 너 잘 되라고 그러는 거야.” 하면서 때리 기도 합니다. 사실은 잘못하면서 자식을 위한다고 착각합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많은 상처를 입고 살아갑니다. 따라서 행복하게 하는 방법을 정확하게 알고 써야 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선물로 담배 한 보루 를 주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의 행복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행복하라고 줬지만, 건강에는 독을 준 셈입니다. 행복하게 하는 것은 대전제이되, 수 단과 방법이 정당해야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정당한 방법을 제시해주셨 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콩인지 팥인지 구분할 능력을 길러줍니다. 분 별력을 통해서 이제껏 나만을 위해 살아왔던 이기심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것이 참회입니다. 참회를 했으면 그 순간부터 이타적인 삶을 살겠다고 마음먹는데 그것이 발원입니다.
이기심은 탐진치로 나타나는데 그 바탕에는 ‘나’라는 고집이 있습니 다. 『금강경』의 가르침도 아집과 법집을 어떻게 극복하고 이타적으로 살 아갈 것인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는 어 떻게 살아야 됩니까? 무슨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합니까?” 이런 물음에 부 처님께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버려라.” 하셨습니다. ‘나’라는 것이 있다면 남의 불행과는 아무 상관없이 내 행복만을 위해 살아가게 됩니다. 보살은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교인들이 가장 비불교적 으로 될 때가 있습니다. 내 자식만을 위해 기도한다든지, 내 가족만을 위 해 기도한다든지, 나만을 위해 기도할 때입니다. 어떤 이는 “스님, 저는 저를 위해서 기도 안 합니다.” 그래서 “누구를 위해 기도합니까?” 하니 “내 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럽니다. 그 소리가 그 소리죠. 손톱만 큼 물러난 것이지만 근본 마음자리에는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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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교도 이기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남을 위할 때 그 사람도 감동 을 받아 남을 위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불교인 모두가 사회 전체 를 위해 노력할 때 불교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종교로 인정받을 수 있 습니다. 출가자도 재가자도 이기적인 모습만 보이면서, 기도만 하면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고 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 소원을 누가 들어줍 니까? 부처님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으니 그대의 인과를 어떻게 할 수 없 다고 했습니다. 그대가 하지 않는데 부처님이 어떻게 할 수 있고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우리 삶을 완전히 이타적으로 바꾸는 것에서 출발해 야 합니다. 이기적으로 살아가지고는 개인도 국가도 불행해지기 때문입 니다. 이생에 아무리 떵떵거리고 살아도 소용없습니다. 칭기즈칸의 몽골 제국이 어마어마한 무력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차지했지만 거기에 무슨 행복이 있습니까? 칭기즈칸은 죽을 때 적이나 원수들이 자기 무덤을 파 헤칠까봐 공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죽는 것도 숨기고 자기를 묻으러 갔던 사람들도 다른 부대 사람들에게 지시해서 다 죽였다고 합니다. 그 래서 그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진시황도 천하를 통일했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죽어서 산같이 큰 무덤에 묻혔지만 죽을 것이 두려워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국가도 개인도 이기적이 면 그렇게 됩니다.
대승불교의 시작은 이타심입니다. 수행은 마음을 이타적으로 바꾼다 는 뜻입니다. 육도중생은 모두 불행을 싫어하고 행복을 좋아합니다. 부 처님 법은 니르바나를 이루어 모두 다 행복해지는 데 있지 불행하게 만 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행복에 이르는 방법을 바로 알고 가르치셨기 때 문에 우리를 불행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많은 사이비 종교들이 선교라 는 이름으로 수없는 사람들을 모으지만 그들이 행복으로 갈 수 있느냐 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착각 때문에 오히려 고통 속으로 빠져들기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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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그동안 자신들이 구축했던 허구가 무너지는 괴로움을 맛보기도 합니 다. 불자들도 사람 모으는 것을 포교한다고 하지만 바른 법이 없으면 그 것은 사람을 끌어모으는 비즈니스지 포교가 아닙니다. 포교는 이타심에 기반하여 수행의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고 포교도 되지 않습니다. 불교의 포교는 한마디로 이타심과 자비 심이고 그다음이 지혜입니다. 그래야 바른길을 일러주는 권선(勸善)이 됩 니다. 이타심을 내게끔 해주는 선행이 권선입니다. 부처님 앞에서 기도할 때 이기심은 불교가 아니라는 점을 명료하게 알아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타심이 발로될 때 그것을 선행이라고 합니다. 불교에 여 러 가지 수행법이 있지만 참선을 하거나, 염불을 하거나, 절을 하더라도 이기심을 바탕으로 할 때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 점을 명념하시고, 기도 를 할 때 사람들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국가를 위해 내가 무엇 을 할 것인가, 저 살아있는 생명체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 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개를 한 마리 키우더라도 내 욕망을 위해 키운다 면 그 개는 피해자가 됩니다. 그 생명을 바라보면서 개의 행복을 위해 키 운다면 같이 사는 반려자가 됩니다. 그러니 무엇을 하든지 염념보리심, 생각 생각이 깨어있는 보리심이어야 합니다. 깨어있는 생각의 현실적인 내용이 자비심과 이타심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불교는 이렇게 좋은 법을 잘 일러주지 않습니다. 일 차적으로 나부터 시작해서 스님들이 잘못하여 생긴 문제입니다. 한국불 교는 1,600여 년의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1,400년, 1,500년 된 절이 도처 에 있습니다. 오래 존속해 온 절들만큼이나 우리의 의식 속에는 불교적 인 내용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말도 불교 용어입니다. 불교 가 들어오기 전에도 마음이라는 말이 있었겠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담아 철학적인 개념으로 확립된 ‘마음’은 불교용어입니다. 불교가 전래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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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서 마음은 문명을 전달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철학 용어 뿐 아니라 전국의 산 이름도 불교를 담고 있습니다. 지리산은 옛날에는 남악이라고 불렀지만, 문수사리자의 산이라는 뜻입니다. 지리산에는 호법신장인 천 왕봉이 있고 1,700고지에 반야봉이 있고 1,500고지에 노고할미 신장의 노고단이 있습니다. 화엄동 계곡, 천은동 계곡, 문수골 계곡 등도 불교로 지어진 이름입니다. 금강산은 화엄경에 나오는 산입니다. 금강산에 오만 명의 법계보살이 계신다고 하지요. 낙산사는 관세음보살의 거주처인 보 타락가산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붉은 연꽃 위에 앉아 계신 관세음보살님 을 친견하고 의상 스님께서 지은 절입니다. 이처럼 산하대지 곳곳에 대보 살들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또한 집을 짓고 묘를 쓰고 장례를 치루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불교는 전통의식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런 것들이 통일제국 신라를 만들고 고려를 만들었으며 문화적으로, 철학적 으로, 종교적으로 발전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 틀 안에서 행복감을 느끼 며 살아왔습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생겨나서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까지 전파되었습니 다. 인도에서는 부처님 열반 200년 뒤에 아쇼카라는 위대한 왕이 인도 전 역을 통합했습니다. 불교를 깊이 신봉했던 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제도를 설계하고 나라를 운영하면서 곳곳에 탑을 세워 부처님을 기렸습 니다. 이때 간다라 지역에 불교가 전파되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각들 이 만들어졌습니다. 지금도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에 가면 유명한 부처 님 고행상을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은 불교가 들어가면서 번역의 시기를 거쳐 당송이라는 큰 문화국가로 발전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에 불교가 들어왔고 중국으로 유학 갔던 스님들이 불교를 배워 와서 정 착시켰습니다. 통도사는 자장 스님이 모든 신라인에게 수계를 해서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세운 절입니다. 구산선문인 실상사나 태안사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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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 이 법을 가르친다면 사람들이 이익을 얻고 행복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하여 많은 선지식들이 공부를 하고 와서 교화를 펼친 결과입니다. 일 본의 아스카 문화도 마찬가지로 불교의 전파를 바탕으로 꽃을 피웠습니 다. 불교 전파의 역사 속에는 이타심과 지혜가 있습니다. 불교가 이기적 인 종교였다면 가는 곳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고 세계적인 종교 로 자리 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불교는 가는 곳마다 정신과 문화의 지평 을 넓히고 깊이를 다졌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정복전쟁을 통해 종교를 전파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불교는 2,600년 동안 단 한 번도 전쟁을 통해 포교하지 않았습니다. 본인들이 불교를 배워서 들여오고 100년, 200년, 300년에 걸쳐 수용되는 과정에서 국가와 민족이 발전하고 행복을 구가 했던 것입니다. 이런 역사를 놓고 본다면 지금도 우리 불교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대전제를 갖추고 있다 하겠습니다.
포교하기 좋은 방법은 자신이 직접 해보는 것입니다. 불교를 공부해 보 니까 마음이 편안해졌다든지, 잘못이 무엇인지 알겠다든지, 불행의 원인 이 무엇인지 알겠다든지, 행복의 조건이 어떤 것인지 알겠다든지, 그렇게 하나하나 정진을 해나간다면 포교하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경쟁할 필요 도 없습니다. 작은 새 한 마리도 먹이를 주고 해치지 않으면 날아와서 편 안하게 받아먹고 행복해합니다. 만약 죽이려고 하거나 쫓으면 보기만 해 도 놀라서 도망갑니다. 하물며 사람은 더 잘 압니다. 빛을 보면 밝은 빛 인 줄 바로 알고, 남의 말을 들으면 맞는 얘기인지 틀린 얘기인지 오락가 락한 얘기인지 분간합니다. 감각이 발달하고 머리가 좋아서 그렇죠. 우 리는 살아가면서 머리를 많이 굴립니다. 도둑질이나 사기 치는 사람일수 록 들키지 않으려면 머리를 많이 굴려야 하니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 면 무슨 일이 제일 쉽겠습니까? 남의 행복을 위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낮 이고 밤이고 아무 때나 해도 괜찮고 머리를 안 굴려도 할 수 있습니다.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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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를 안 굴릴수록 더 잘 됩니다. 누구에게 백만 원을 주려다가 40만 원 만 줄까 하고 머리를 굴리면 복잡해집니다. 남편에게 맛있는 걸 해주려 고 할 때는 생각을 낸 그대로 해야지, 하려다 말고 ‘어제 나한테 성질부 렸지?’ 하면 못 해줍니다. 선행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마음먹은 대로 하 면 되고 세상에 드러내놓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나쁜 일은 밤중 에 하고 숨어서 해야 하니까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선행은 상대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고 상대의 행복은 곧 나의 행복입니다. 부처님께서 보살에게 이렇게 하라 했습니다. “상대에게 베풀고도 베풀었다는 생각을 하지 말 라. 거기에 아상이 생긴다. 또한 베풀고 나서 받을 생각도 하지 말라.”
관세음보살 정근을 할 때 가장 마지막에 외우는 구절이 “원이차공덕 (願以此功德) 보급어일체(普及於一切) 아등여중생(我等與衆生) 당생 극락국(當生極樂國) 동견무량수(同見無量壽) 개공성불도(皆共成佛 道)” 입니다. 나에게 공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모두에게 회향하여 나와 중생이 극락에 가서 무량수불을 함께 뵙고 다 같이 불도를 이루겠다는 뜻입니다. 불교의 마지막은 회향입니다. 그래서 기도 끝에 “옴 삼마라 삼 마라” 보회향진언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에게는 어제 일을 묻지 말라 는 말이 있습니다. 나날이 향상하기 때문입니다. 늘 좋은 쪽으로 바뀌고 더 향상된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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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의지해야 하는 세 가지(삼귀의)
저는 인연이라는 말을 항상 깊이 생각하고 있으며 늘 좋은 의미로 사 용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난 사람 중에는 세속적인 인연이 많습니 다. 가족으로 만났거나 일로 만났거나 세속의 인연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중에는 지옥문까지 쫓아와 빚을 받아 갈 괴로운 상대도 있습 니다. 그런가 하면 법으로 만나는 인연도 있습니다. 만나서 법을 듣고 생 각을 나누고 토론을 통해 잘못된 생각을 고쳐나가는 자리가 승가이며 이는 법으로 이루어진 인연입니다. 이렇게 법으로 인연의 고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 좋은 일 가운데 가장 좋은 일이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최고의 가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불교의 의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삼귀의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지금도 어디서 무슨 의식을 하든지 제일 먼저 삼귀의를 합니다. 제일 소 중한 신앙행위기 때문에 매일 하는 것인데, 매일 하다 보니 소중한 줄 모 르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물이나 공기가 없으면 살 수 없지만 그 소중함을 잘 모르고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미세 먼지 문제가 나오고부터 깨끗한 공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듯이 혼탁 한 시대를 살아갈수록 삼귀의는 더없이 소중한 신행이라는 사실을 알아 야 합니다. 삼귀의는 삼보에 귀의한다는 뜻인데 삼귀의계라고도 합니다. 꼭 지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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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기본이라는 뜻에서 ‘계’를 붙인 것이니 삼귀의를 하지 않는 사람은 불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삼보’는 불법승을 뜻하는데 이 세 가지가 가장 보배롭기 때문에 삼보라고 합니다. 아무리 비싸고 귀한 물건이라고 해도 삼보의 가치에는 미칠 수 없습니다. 이 세 가지가 없으면 불교가 성립되 지 않고 삼보에 대한 정확한 믿음이 없으면 불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래서 붓다와 다르마와 상가에 의지한다는 뜻으로 삼귀의라고 합니다.
귀의에서 귀(歸)는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왜 돌아간다고 했을까요? 우 리는 딴 곳을 보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보고 살고 있나요? ‘나 는 평생 돈을 벌기 위해 살았다, 나는 평생 자식들을 보고 살았다, 나는 어쨌든 오래 살려고 살았다.’ 다들 이런 데를 보며 살기 때문에 허망함 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천국이나 극락에 가기 위해 살았다고도 합니다. 이 생에 고통을 견디고 희생하는 것은 천국이나 극 락을 가기 위해서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러한 잘못된 믿음이나 욕망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돌이킨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잘못 되었을 때 돌이킬 곳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곳이 삼보입니다. 누 가 불렀을 때 고개를 돌리듯이 방향을 돌린다는 뜻이기도 하고 고향으 로 돌아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귀의에서 의(依)는 의지해서 산다는 뜻입니다. 다른 데 인생의 가치를 두지 않고 불법승 삼보에 의지해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부처님 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 다.” 거룩하다는 단어는 성스러운 존재에게 붙이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이 무엇일까요? 욕심 없는 생각과 욕심 없는 말과 욕심 없는 행동, 그것 외에 거룩한 것은 없습니다. 즉 탐욕과 성냄과 무지 가 다 사라진 부처님께 귀의하고, 삼독을 없애는 법에 귀의하며, 그 법을 닦는 스승들께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를 보배로운 존재로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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듭니다. 부처님과 스승은 보배로운 존재이고 스승의 거짓 없는 가르침을 보배로 생각합니다. 탐진치가 없어져 성인의 위치에 오르신 분들을 우리 는 ‘성스러운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거룩함에 의지하는 것이 삼귀의의 기본이 됩니다.
잘못된 믿음에 의지하면 불행의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불자들은 다 른 데 의지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창조주 혹은 브라흐만 신에 의 지합니다. 그가 세계를 창조했다는데 창조한 근거도 없고 창조한 내용 도, 논리도 없습니다. 불자들은 다른 이들의 신앙을 존중하면서도 창조 주를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근래의 절 집안에서도 다른 것을 믿기도 합 니다. 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원래는 육도중생을 건지겠다는 뜻에서 예수재를 지내고 천도재를 지냈는데 이것이 잘못 전해져서 조상숭배가 되었습니다. 묏자리를 잘 쓰면 조상이 나에게 복을 준다고 믿습니다. 자 기가 짓지 않았는데 복을 줄 조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조상이 앞을 가 로막고 있기 때문에 예수재를 지내야 되고 천도재를 지내야 된다고 합니 다. 자기가 악을 짓지 않았는데 누가 가로막는단 말입니까? 잘못된 믿음 입니다. 태양을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인도에는 과거에 조로아스터 교가 성행했고 가섭 삼형제도 원래는 불을 숭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망원경이 발달한 지금은 태양이 불덩어리라는 것을 압니다. 태양의 에너 지로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지만, 태양이 우리를 창조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에 정령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무에는 목신이 있고 돌에는 석신이 있고 물에는 용신이 있고 산에는 산신이 있어서 각 자의 영역을 관장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모두 미신이며 진실과 거 리가 있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나는 오로지 ‘선인 선과 악 인 악과’를 믿을 뿐입니다. 내가 악행을 했기 때문에 안 좋은 과보를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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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내가 선행을 했기 때문에 좋은 과보를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 아닌가요? 복을 짓지 않았는데 기도만 한다고 누가 복을 주겠습니까? 산에 좋은 터를 잡아서 집을 지으면 자연 조건이 좋으니까 살기 좋겠죠. 그러나 거기 있다고 자기가 지은 업의 과보를 받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옛날에 신통력이 뛰어난 외도가 있었 답니다. 죽을 때가 되어서 한 사람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고, 한 사람 은 물 밑으로 들어갔는데 나중에 보니까 둘 다 죽었더랍니다. 신통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피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래 살겠다고 평생 신선도 를 닦는 도교 수행자들도 백 살을 넘기지 못합니다.
불교는 욕심을 모두 없애고 행복의 길로 가는 가르침입니다. 인류 역 사상 처음으로 이것을 깨닫고 우리를 행복의 길로 이끌어주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스승으로서 믿는 것이 불교입니다. 부처님이 주시는 행복을 우 리가 받는다는 피동적인 얘기가 아닙니다. 스승은 우리에게 방법을 제시 했을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소를 강가에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 고 안 마시고 하는 문제는 소에게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저 또한 여러분 을 이끌 수는 있지만 수행을 하고 하지 않는 것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 니다. 먼저 이 길을 발견하고 욕망을 버려서 지복감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근본 스승이 부처님입니다. 그래서 예불할 때 ‘시아본사 석가 모니불’이라고 합니다. 나에게는 지금의 스승도 계시고 용수보살과 같 은 대선지식들도 계셨고 수많은 도인들이 계셨지만 이러한 모든 스승들 의 스승이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나의 스승께 귀의합니다. 스승께 귀의 하는 것이 불교의 근본입니다.
『치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예불자 경불지덕야(禮佛者 敬佛之德 也)” 예불을 모시는 것은 스승의 덕망과 지혜를 공경한다는 뜻입니다. 그 러면 그 스승께서 가르치신 법이 있을 것 아닙니까? 법이란 행복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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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수 있는 방법론을 말합니다. 만약 깨닫고도 그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 다면 스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깨닫고 나서 열반에 드실 때까지 행복의 방법론을 가르치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마음이 편하 고 지복감을 느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모든 사람들이 서로 해치지 않 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지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듣고 따른다면 오늘날의 기후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기후위기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하여 에너지를 지나치게 쓰면서 벌어진 일이죠. 인 류는 지금 이것을 멈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쟁, 기아 등의 사회문제도 욕망으로부터 기인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욕망을 관찰하고 버리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 가르침을 신행으로 옮긴다면 욕망을 버 리고 최소한의 것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면 지구상에 지금보다 더 많 은 사람과 생명이 공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모든 존재가 행복하게 공존할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덕망과 지혜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냥 믿는 다면 미신이 되기 쉽습니다. 불상을 크게 만들거나 금을 잔뜩 발라 놓거 나 절과 법당을 크게 지어놓고 거기에 무슨 영험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면 안 됩니다.
금강경오가해를 하신 임부 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쇠로 만든 부처 는 용광로를 지나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을 지나지 못하고 흙 으로 만든 부처는 물을 건너지 못한다.” 저는 어릴 때 바깥에 세워져 있 는 불상이 비를 맞고 계시는 것을 보고 ‘부처님이 왜 비도 못 피할까?’ 생각했습니다. 법을 몰랐고 불상을 왜 만들었는지 몰랐으니까 불상에 무 슨 신통력이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법을 알고 법을 믿어야 불상 도 의미가 있습니다. 법을 믿지 않으면 부처님을 믿지 못합니다. 믿어도 미신이 되기 쉽죠. 그래서 옛 스승들은 법을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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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나라는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전파시켰고 티베트는 법의전파를 위해 문자를 만들었으며 중국은 수 세기에 걸쳐 불경을 번역했습니다. 법이 우 리의 정신을 이끌어주기 때문에 삼보 가운데 법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팔 만대장경을 모신 해인사를 법보종찰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모시고 있 는 것만으로 법보종찰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그 법이 해인 사와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 전파되어야 진정한 법보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단언합니다. 법이 우리들의 삶에 방법론으로 작동할 때 더 가치 있는 보배가 될 것입니다. 법은 항생제와 같습니다. 항생제가 나오기 전 에는 세균성 질병에 걸려 많이 죽었지만, 항생제가 나오고 나서는 세균성 질병으로 죽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릴 때 부처님께서는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을 제시하셨고 그 방법에 따라 역 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해탈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부처님께서 법이 라는 항생제를 개발하신 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법을 잘 이해하고 기억해서 실천하는 것이 법보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매일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 한 스승님께 귀의합니다.” 하면서 절에 가서 신수를 봐달라고 한다면 그 것이 무슨 귀의이겠습니까? 거짓 귀의입니다. 달라이 라마께서 이런 말씀 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회교도들이 알라신을 믿지만 테러를 하고 상대 를 죽인다면 그는 이미 알라신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알라 신이 언제 테러하고 죽이라고 그랬겠습니까? 절에 다니면서 불상에 절을 올리지만 복이나 빌고 법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가 어떻게 불자이겠습 니까? 절에 다니지만 이미 불자가 아니고 출가를 했지만 이미 출가자가 아닙니다. 불자라면 삼귀의를 할 때마다 심장이 멎을 정도로 자각이 있 어야 합니다. 항상 법문 듣기를 좋아하고 늘 귀를 열고 수백 번, 수천 번 듣기를 원해서 ‘법문무량서원학’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법에 의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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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불자의 자세입니다. 저를 비롯해서 법상에 올라있는 사람은 법을 제 대로 전해야 합니다. 서당의 혀 짧은 훈장님처럼 “바담 풍”이라고 해서 는 안 됩니다. 애들이 따라서 “바담 풍”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법 단에 올라 거짓말을 하거나 부처님 법이 아닌 것을 얘기하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승보는 세속 생활을 하지 않고 부처님 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 다. 그런 이들을 비구(bhikkhu)라 하는데 ‘거지’라는 뜻입니다. 세속적으 로 보면 밥을 빌어먹는 걸인인데 보통의 걸인과 다른 점은 걸인을 자청 하여 도를 닦는다는 점입니다. 도를 닦아서 아라한에 오른 성문과 초지 이상에 오른 보살을 승보라 하고 경배합니다. 예불문에 칠정례가 있는데 그 안에는 성인의 위치에 오른 분들이 들어있습니다. 시아본사 석가모니 불부터 영산에서 부처님에게 법을 받은 제자들과 대지 문수사리보살, 대 행 보현보살, 대비 관세음보살, 대원본존 지장보살 등 스승들에게 경배 를 드리는 것입니다. 깊은 수행으로 체득한 법을 ‘세속 생활 하느라 공 부할 겨를이 없는 우리에게 일러 주십사’하는 마음으로 승가를 존경해 야 합니다. 수행하는 집단은 철저하게 계율을 지켜야 하고, 경전의 말씀 을 잘 알아야 하고, 무소유로 살아야 하며, 법을 깨치기 위해 각고의 노 력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생을 위하는 마음이 지극해야 합니다. 언 젠가는 그들이 깨닫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법으로 이끌어야 합니 다. 이런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승가를 승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삼보에 의지합니다. 저는 20년 전쯤 다 람살라에 처음 갔을 때 하루 온종일 절만 하는 노스님을 뵌 적이 있습니 다. 히말라야의 찬바람을 피할 겨를도 없는 맥그로드 간지에서 토담을 쌓아 놓고 조그마한 방에 기거하셨습니다. 방에는 사과 궤짝을 탁자 삼 아 수건 하나를 깔고 그 위에 경을 얹고서 생활하고 계셨습니다. 하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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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끼도 제대로 못 잡수시니 얼마나 힘이 들까 싶어 마음이 아프고 눈물 이 쏟아졌습니다. “스님, 이 고생을 하실 건데 무엇 때문에 티베트에서 넘 어오셨습니까?” 하니까 대번에 “스승과 법이 없는데 내가 거기에 머물 이 유가 어디 있습니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우리들 은 아파트값, 땅값, 이런 돈의 가치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학군은 좋은 가, 의료시설이나 문화시설은 얼마나 되나, 이런 식의 기준을 갖고 있습 니다. 욕망이 시키는 대로 이익을 좇아 살 곳을 선택합니다. 그런 사람들 만 보다가 노스님 말씀을 듣고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 을 받았습니다. 위법망구(爲法忘軀)가 바로 이것이지요. 6천 미터 고지를 넘으면서 동상이 걸려 발가락을 잘라내면서도 법을 찾아, 스승을 찾아오 셨던 것입니다. 스승이 옆에 계시고 스승의 설법을 듣는 것만으로 얼마나 환희를 느끼시던지, 달라이 라마께서 법문하시는 날이면 뒷자리에 앉더 라도 그 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해서 듣고 정진하십니다. 그런 분 을 삼보의 귀의자라고 합니다.
우리는 삼보의 귀의자가 아니라 돈과 권력의 귀의자입니다. 심지어 승 가라고 하는 곳에도 그런 흐름들이 있으니 가슴 아픕니다. 삼보가 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삼보에 의지하여 그 법을 실천하면 분명히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삼보를 신처럼 의지하지 마십시오. 내가 스승을 따르는 것은 법을 배우기 위해서이고, 법을 배우는 것은 그 법을 따라서 공부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삼보의 귀의자가 아닙니다. 여러분께서는 언제나 첫 번째로 끊임없이 되새겨야 합니다. ‘부처님께 의 지하겠습니다. 가르침에 의지하겠습니다. 스승들께 의지하겠습니다.’ 이 마음을 내는 것이 삼보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저도 살아 보니까, 삼보 말 고는 의지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른 것은 허망합니다. 이 몸도 백 년을 가겠습니까, 천 년을 가겠습니까? 그렇다고 권력이 천 년을 가겠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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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 그러면 돈에 의지하겠습니까? 오래 사는 것에 의지하겠습니까? 잠 시 인연 따라 머무는 허망한 것들에 의지하며 살아가시겠습니까?
더 나아가 자성 삼보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깥으로만 의지하지 마세요. 내가 부처님처럼 똑같이 깨달을 수 있는 밝은 마음을 갖고 있으며 그 밝 은 마음을 개발해 거기에 의지해서 살겠다는 것이 내 마음 속의 불보, 즉 자성 불보입니다. 조주 스님께서 “진짜 부처는 내 안에 있다.”라고 하셨 습니다. 내가 깨달을 수 없다면 부처님이 계서도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탐진치를 끊어 없애면 바로 자성의 법보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육조 스님 께서도 “마음에 어지러움이 없으면 바로 그것을 선정이라 한다.”라고 하 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승가의 일원으로서 스스로 청정해져서 깨끗한 마 음으로 살아가겠다고 한다면, 재가이건 출가이건, 그가 바로 사부대중이 고 승보가 됩니다.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일상적인 일이어야 합니다. 삿된 것에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삼보를 삿되게 의지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삼보를 신처럼 믿고 복을 빌지 마십시오. 삼귀의를 할 때는 항상 이 생각을 깊숙이 안에 두고 의지해야 합니다. 삼귀의는 소승, 대승, 금 강승 할 것 없이, 중국, 일본, 베트남 할 것 없이 똑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남방불교의 삼귀의를 소개합니다. “Buddhaṃ saraṇaṃ gacchāmi, dhammaṃ saraṇaṃ gacchāmi, saṃghaṃ saraṇaṃ gacchāmi” 전 세 계를 다녀보아도 공통입니다. 그만큼 아주 중요한 수행절차입니다. 이 삼귀의가 잘못 되면 그 다음의 수행절차가 빗나가게 됩니다. 부처님을 하 나님처럼 믿거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절대적인 법이 있다고 믿거나, 승가 가 무엇을 해줄 것처럼 믿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한 삼보를 제대로 알고 그에 의지해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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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일곱 가지 행법(칠지공양)
불교를 믿고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신행이라고 합니다. 불교의 신행은 다른 종교의 신앙과는 다른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 어권에서는 종교를 religion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신과 관계를 ‘거듭’ 맺는다는 뜻으로 ‘re’를 붙여서 re-ligion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의 종교인들은 매일같이 신을 찬송하고 신께 기도하면서 관계를 맺어나 가고 그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불교의 신행에도 부처님을 찬탄하고 되 새긴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내용과 맥락은 전혀 다릅니다. ‘신행’은 ‘신·해·행·증’의 줄임말로, 수행의 첫 단계부터 마지막 완 성까지 전 과정을 포함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신(信)’으로서 불법승 삼 보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 생겨나면 그다음이 ‘해(解)’입니다. 법을 분 명하게 알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면 바 른 견해가 생기지 않아 생각이 비뚤어지기 쉽습니다. 비뚤어진 견해를 갖 고 있는데 수행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법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이유입 니다. 그러나 이해하고 끝난다면 그것은 철학입니다. 철학만 가지고는 번 뇌를 사라지게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이해했다면 ‘행(行)’, 즉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보시, 지계, 인욕 등을 실제로 해봐야 좋은 줄 압 니다. 좋다는 말만 듣고 이해로 그치면 그림의 떡처럼 배가 부르지 않습 니다. 행이 없으면 영양실조에 걸린 것과 같으니 실제로 먹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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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행의 결과로 체험을 얻는데 그것을 ‘증(證)’이라고 합니다. 사과 나무를 심었을 때 사과라는 결과를 얻듯이 수행한 만큼 결과는 자연히 따라옵니다. 결과를 얻을 때는 희열이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신·해·행·증의 불교 신행은 우러러 보면서 거듭 찬 탄만 하는 ‘신앙’과는 다릅니다. 물론 불교에도 찬불이 있습니다만, 그 것은 첫 단계일 뿐입니다. 『화엄경』에서도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元功 德母)’, 믿음이 도의 근원이자 모든 공덕의 어머니가 된다고 했지만 그 뒤에는 도를 얻는 과정으로서 신·해·행·증을 설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불법승 삼보를 믿는 것입니다. 스승과 멀어지지 않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수행입니다. 스승을 통해서 법을 배워야 번뇌에서 벗 어나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승을 공경하고 가까이하는 것을 ‘공양’이라고 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칠지공양(七支供養)이라고 하여 공양을 일곱 가지로 제시합니다. 몇 가지 공양물을 올리는 좁은 의미가 아닙니다. 부처님 전에 쌀, 향, 초를 올리는 것을 공양이라고 생각하는데 가장 중요한 스승과 법이 빠져있습니다. 법 공양이 빠지면 솔직히 말해 뇌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처님께 무엇을 올렸으니 봐달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공 양이 기복이 되면 철학적으로도 맞지 않고 자신에게도 실제로 도움이 되 지 않습니다. 공양을 협소하게 이해하지 말고 대승에서 제시한 넓은 의 미의 일곱 가지 공양을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 공양은 예경(禮敬)입니다. 부모님을 모실 때 아침에 일어나면 “어제 저녁에 잘 주무셨습니까?” “방은 따뜻했습니까?” 하고 인사를 드 리지요. 세속에서 어른께 매일 공경의 예를 표하듯이 승가에서도 아침저 녁으로 예불을 합니다. 스승께 예를 표하는 것이 예경입니다. 먼 스승과 가까운 스승, 돌아가신 스승과 살아계신 스승, 모든 스승에게 인사를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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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니다. 삼계의 도사이자 사생의 자부이신 시아본사, 나의 근본 스승이 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예경 올립니다. 영산회상 당시에 계셨던 수많은 아 라한과 성인들께 인사드립니다. 대지 문수사리보살과 대행 보현보살께 인사드립니다. 이렇게 지극한 마음으로 인사드리는 것이 예경입니다. 예 불을 하니까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는 불자들이 있습니다. “송광사 예불 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하는 이도 있는데 편하기는 하겠지만 예불이 신경안정제는 아닙니다. 예경을 하는 본뜻은 『치문』에 나오는 ‘경 불지덕야(敬佛之德也)’처럼 그분들의 공덕에, 그분들의 지혜에, 그분의 깨침에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집에 부처님을 모신 분들도 이런 점을 아시고 예불을 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집에 부처님을 모시면 귀신이 붙는다면서요?” 부처님이 계시면 귀신이 다 떨 어져 나갑니다. 전 세계 불교국가를 거의 다 가봤는데 집에 부처님을 모 시면 귀신이 붙는다는 곳은 한국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이 부담스러우면 절에는 어떻게 다니나요? 절에는 더 큰 부처님이 계시는데요.
두 번째는 공양물을 올리는 것입니다. 티베트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 면 부처님께 예경을 하고, 이어서 공양을 올립니다. 등불을 밝히고 차와 향을 올리며 불보살을 살아계신 듯이 대합니다. 예경과 공양이 그들의 일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활 불교입니다. 이렇듯 내가 스승과 멀어지지 않는 것이 예경입니다. 올리는 공양물은 여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등 으로서 불보살이 빛으로 여기 와 계신다고 생각하고 불을 밝힙니다. 그 다음에는 차 한 잔 올리고 향을 올립니다. 이것은 인도식 풍습이기도 하 고 티베트와 중국식 풍습이기도 한데, 향을 피워서 방 안에 밴 잡냄새를 제거합니다. 그다음에는 ‘부처님이시여, 스승님이시여, 잘 오셨습니다.’ 하면서 꽃을 공양합니다. 그다음에 점심때가 되면 마지공양으로, 밥을 올립니다. 밥은 ‘일종식’이라고 하여 매일 한 번만 올리는데, 부처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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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식을 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그다음에는 다과 와 과일을 올립니다. 일상에서도 손님이 오면 맹물 한 잔만 드릴 수 없듯 이 스승님께서 오셨으니 살아계신 듯 공경의 예를 표하는 것입니다. 이렇 게 공양물을 올리면서 내 마음속에 부처님과 스승들을 그리는 것이 공 양의 기본입니다. 공양을 올릴 때 미신으로 해서는 안 되고 축원을 할 필 요도 없습니다. 공양을 올리는 것이 이미 부처님과 만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부처님 앞에서, 스승 앞에서 참회를 하는 것입니다. 참회는 ‘정지(正知)’를 전제로 하는데, 이는 바르게 안다는 뜻입니다. 부처님 법 을 배우고 보니 지금껏 살아왔던 것이 잘못인 줄 알고 부처님 앞에서 참 회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뉘우치는 존재는 육도중생 가운데 인간밖에 없으니 참회는 인간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참회에는 이참(理 懺)과 사참(事懺)이 있는데, 정신적으로 내 잘못을 아는 것이 이참이고 절과 같은 행동으로 잘못을 참회하는 것이 사참입니다. 우리나라 불자 들은 소원을 이룬다고 절을 많이 하고 절해서 얻은 효험에 관해 책을 쓰 기도 하지만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그런 얘기를 갖다 붙여서는 안 됩니 다. 참회는 바르게 아는 기능입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고, 다시 는 그러지 않겠다는 자각이자 다짐입니다. 스승 앞에서 참회하는 것은 물건을 올리는 것보다 더 큰 공양이 됩니다. 여러분도 108배를 할 때 ‘내 가 이 세상에 중생으로 살아가는데 전생부터 지은 업이 많아서 좋지 않 은 결과가 왔습니다. 이제부터는 절대 반복하지 않고 보리심을 내서 잘 살겠습니다.’ 이렇게 반성하면서 의지를 다지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는 남의 선행을 보고 기뻐하는 수희(隨喜)입니다. 누구든지 착 한 일을 하면 그것을 보고 ‘참 잘한다, 어찌 그리 좋은 일을 했느냐.’ 하 고 기뻐하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착한 일이란 다른 사람의 행복에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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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을 주는 이타행입니다. 다른 사람이 선행을 하는데 ‘그까짓 거 뭐 하러 하나?’ 한다면 마음이 꼬인 사람이고 그로 인해 본인이 좋은 길로 나아 갈 수가 없습니다. 삐딱하게 꼬인 예는 정치에서 흔히 볼 수 있지요. 진영 논리를 가지고 저쪽에서 잘했는데도 잘했다는 소리를 하기 싫어합니다. 당이 그러면 당이 꼬인 것이고 개인이 그러면 개인이 꼬인 것입니다. 게다 가 저쪽 사람에게 잘못된 일이 생기면 좋아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하면 마음의 골만 깊어지고 서로가 힘든 건 물론이고, 국민 모두가 힘들어진 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잘한 일이 있으면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서 기뻐하고 동참해야 됩니다. 수희찬탄, 수희동 참이라고 하지요. 좋은 일을 보고 함께 기뻐하며 따라 한다면 스승을 버 리지 않는 일이 되니 그것이 공양입니다.
다섯 번째는 항상 스승에게 법을 청하는 청법(請法)입니다. 공양 가운데 가장 위대한 공양으로서 아주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법회를 열고 법좌를 만들고 스승을 초청하여 법을 청해야 합니다. 인도 남부 문곳(Mundgod) 에는 5천 명의 대중 스님들이 계신 대붕('Bras Spung)사원이라는 곳이 있 는데 그곳의 고망(Gomang)이라는 절에서 중론법회가 열린 적이 있습니 다. 달라이 라마께서 점심때가 되자 여러 주지 스님에게 각 절에서 먹는 밥과 반찬을 그대로 들고 오라고 말씀하셨고, 몇십 명의 주지 스님이 모 였습니다. 달라이 라마께서는 “거기는 왜 그렇게 성글게 먹느냐?” “그 쪽 은 잘 먹으니까 좀 나눠서 먹도록 해라.”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한 주지 스님에게 지금 그 절에서는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기도를 한다 고 대답했습니다. 무슨 기도를 며칠간 하는지 묻고는 다시 “거기서는 누 가 설법을 하느냐? 어떤 텍스트를 가지고 법을 얘기하느냐?”라고 묻자 “법사를 모시지 못해서 설법을 못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달 라이 라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러면 기도하지 마.” 법이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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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지 않는 기도는 삿되다는 말씀입니다. 삿된 기도는 소원이나 빌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를 할 때도 청법을 해야 합니다. 법사가 꼭 달변일 필 요는 없습니다. 말을 잘 못해도 법에 대한 진솔한 마음이 있으면 됩니다. 법사를 청해서 법을 듣는 것이 얼마나 큰 공양인지 아셔야 합니다. 가족 이 전부 모이는 행사에도 축하만 할 것이 아니라 법사를 모셔다가 잠깐 법문을 듣고 간단한 법회라도 여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가정법회, 가 족법회입니다. 결혼식도 법사를 모시고 좋은 법문 한 마디 들려주면 거기 모인 사람들이 그 인연으로 발심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하든지 행사 를 하든지 법이 중심이 되려면 법사를 청해서 법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 이 가장 큰 공양입니다.
여섯 번째는 법을 설하는 스승이 이 세상에 더 계셔주시기를 청하는 권 청주세(勸請住世)입니다. 부모님이 오랜 병으로 힘들다 해도 ‘차라리 빨 리 가시는 게 낫겠네.’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됩니다. 그분들이 가시면 여 러분은 고아가 됩니다. 늙은 고아가 됐건 젊은 고아가 됐건 고아입니다. 부모님은 내 뿌리입니다. 고목이 되어 상했더라도 뿌리가 있어야 줄기가 있고 가지가 있는 것처럼 스승이 계셔야 내가 의지해서 법을 배울 수 있 습니다. 부모님께 하듯이 ‘오래 살아 주십시오. 오래만 계셔 주신다면 어 떤 힘든 일이 있더라도 잘 견뎌 나갈 수 있습니다.’ 이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아난 존자는 부처님께 이 말씀을 안 드려서 나중에 아주 곤욕을 치렀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전에 쿠시나가르로 오시면서 3개월 전부터 “내가 가야 되겠다.”라고 하셨는데 아난이 더 계셔달라는 요청을 안 드렸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열반 후에 500 아라한들한테 크게 질책을 당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정수를 100세로 말씀하셨으니 20년 일찍 열반 에 드신 셈입니다. 부처님은 워낙 부지런한 분이라서 당신의 전생 인연을 다 돌보시고 후세를 위해 이야기할 것을 다 마치시고 ‘내가 이제 가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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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신 것입니다. 아난이 더 머물러 주십사 청했으면 좀 더 머물러 주 셨겠지요. 그래서 여러분도 항상 스승이 오래 머물러 주시기를 바라고 그 스승으로 인해 법이 이 세상에 오래 머물러서 많은 사람에게 이익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 주셔야 합니다.
일곱 번째는 내가 이룬 공덕을 모든 중생에게 회향하는 것입니다. 앞에 서 예경하고, 공양 올리고, 참회하고, 수희하고, 청법하고, 오래 머물러 주십사 청한 결과로 이루어진 공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내가 받지 않 고 모든 중생에게 돌리겠다는 마음입니다. 불상을 한 분 조성하더라도 ‘이 불상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발심해서 깨달음에 들어가소서.’ 그렇게 발원한다면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참선을 하건, 염불을 하 건, 공양을 올리건 일체중생을 위해 회향해야 합니다. 내가 쌓은 공덕이 니 나한테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기심의 발로이기 때문에 수행에 전 혀 도움이 안 됩니다. ‘나’를 강화시키기 때문에 오히려 독이 됩니다. 수 행은 나를 버리자고 하는 일 아닙니까? 원래 ‘나’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 다. 인연 따라 모여 있는 것을 잠시 ‘나’라고 할 뿐입니다. 이렇게 공성 (空性)을 알고 나면 내가 가져야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내가 받아야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내가 받을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회향하면 모두를 위한 일이 됩니다. 나를 위해서만 살면 절대 좋은 결과가 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일곱 가지 공양인데, 꽃이나 쌀을 올리고 끝날 것이 아니라 평 소에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항상 반복해야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 서는 비바시불부터 과거세의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공양성사 하셨습니 다. 예경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칠지공양을 쉰 적이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처음 발심하여 연등불을 만났을 때도 지극한 공경을 바쳤습니 다. 그중에 한 예가 연등불이 지나는 길이 흙탕물이라 급히 자신의 머리 카락을 풀어서 깔아드려 밟고 지나가시게 했던 일입니다. 공경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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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철저했기 때문에 스승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이 강력 할수록 스승의 가르침도 나에게 강력하게 옵니다. 마치 스펀지를 바짝 말려 놓으면 물을 쭉 빨아들이듯이 나에게 갈구하는 바가 있고 스승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집니다. 이 공양을 거듭거듭 반복함으로써 삼보와 멀어지지 않고 신·해·행·증의 길로 나아가게 되니, 그래서 공양을 신행의 기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행이 기복으로 되거나 자기 마음에 맞는 한두 가지만 하고 만다면 불법이 끊어져 버립니다. 한국의 불자들은 일곱 가지 공양의 전체 의미 를 파악하지 못하고 작은 의미의 공양만 생각합니다. 일곱 가지를 다 하 지도 않고 그나마도 따로따로 합니다. 예불은 절 행사에 왔을 때나 하 고, 참회는 병 고친다고 하고, 공양은 복 받는다고 합니다. 이래서는 원 만한 공양성사가 될 수 없습니다. 절에 오거나 집에 있거나 일상생활에서 일곱 가지를 빠짐없이 해야 신행입니다. 참회하지 않으면 잘못을 바로잡 을 기회가 없고, 회향하지 않으면 이기적인 상태에 머물러 남과 함께 살 아갈 수 없습니다. 청법을 하지 않아서 법이 끊어지면 스스로도 법을 배 울 수 없게 되니 그것은 말법을 의미합니다. 신행은 없어지고 이기심으로 기복하는 사람만 늘어납니다. 법이 후퇴하면 불교는 중생의 삶에 별 의 미가 없어지고 거죽만 남아 문화재로만 인식됩니다. 법이 살아나야 합니 다. 법이 살아나려면 욕심을 버리고자 부단히 노력해야 하고 그러기 위 해서는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일곱 가지 공양을 빠짐없 이 실천해야 합니다. 이렇게 정진할 때 우리는 법에 들어가고 스승과 법 이 세상에 오래 머물 수 있습니다. 법회에 왔을 때는 사부대중이 모여 공 양 올리고 칠지공양에서 빠진 것이 없는지 살펴 서로의 신행에 도움이 되 도록 정진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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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깨닫고자 하는 마음(보리심)
사실 불교의 자비란 눈물입니다. 눈물 없는 종교는 잘못된 종교입니 다. 기독교의 사랑도, 불교의 자비도, 일체 중생을 위한 눈물일 수밖에 없 습니다. 눈물만이 중생의 아픔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세상의 이치는 결정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결정되어 있다면 우리가 잘 살아야 되겠다고 마음먹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결정된 대로 살면 그만이겠지요. 만약에 영원한 ‘나’가 있고 고정불변한 자성이 있다면 그 대로 살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은 다섯 쌓임(五蘊)에 의해 형성되 었고 끊임없이 생성·변화되는 하나의 모습입니다. 우주의 물질이 새롭 게 생성되듯이 우리의 마음도 거듭 생성되는 것인데, 불교의 유식학에서 이 마음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째, 선한 마음입니다. 둘째, 선 한 마음 이전에 있는 악한 마음입니다. 왜 선한 마음 이전이냐 하면, 우 리는 무조건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살려는 생각에서 욕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악한 마음이 먼저이고 그 악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 선한 마음 이라는 가설을 세운 겁니다. 셋째,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 외에 이도 저 도 아닌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을 무기(無記)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그 냥 걸어갈 때의 마음이 무기입니다.
선한 마음은 남을 돕고자 하는 생각이고 자기보다 남을 우선하는 이 타적인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반론을 넘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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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마음이 무엇이겠습니까? 보석 같은 마음, 어떤 마음을 내더라도 그 이상이 되지 못하는 마음,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이 마음을 불교에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줄여서 ‘보리심(菩提心)’이라고 합니다. 이 보 리심을 내는 것을 ‘발보리심’, ‘발심’이라 하고 이 마음을 낸 이를 보살 이라고 합니다. 무슨 마음이기에 그렇게 중요할까요? 간단히 말하면 ‘나’라는 생각, 즉 아상을 버리고 중생을 위하겠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 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 생명체의 가장 위대한 모습이 ‘이타중생’입니다. 우리는 모두 윤회라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만약 중생이 윤회의 고통 을 겪지 않는다면 이 마음은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제일 근원적인 고통 이 나고 죽기를 반복하는 생사의 고통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죽 고, 축생으로 태어났다가 죽고, 아귀로 태어났다가 죽고, 천상에 태어났 다가 죽습니다. 천상에서 낙을 누리며 오래 산다 하더라도 결국은 죽습 니다. 윤회의 특징은 거듭 반복되는 고통에 있습니다. 이것이 가시에 찔 려서 느끼는 통증 정도는 고통이라고도 할 수 없는, 생사의 고통입니다.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안락하다는 착각 속에 잠시 머물 수 있을지 언정, 결국엔 어디에도 온전히 머물 곳이 없습니다.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발견한 분이 부처님이시고 그 길로 이 끌어주려는 마음이 보리심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생사의 고통에서 벗 어날 수 없습니다. 죽은 뒤에 천당을 가도 그건 죽은 뒤의 문제입니다. 그 렇다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길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전생담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그 마음을 처음 어떻게 내었느냐? 과거의 칠불 가운데 연등 부처님이 이 세 상에 오셨을 때 그 법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윤회 의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나도 당신처럼 될 수 있 느냐고 물어서 될 수 있다는 답을 듣고,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어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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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을 들었다. 가르쳐주신 대로 3아승지 겁을 닦아서 여래가 되었다. 그 때 ‘나도 당신처럼 깨달음에 도달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일으켰는데 그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일체중생을 위하는 마음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불의 길이란 모든 중생을 이끌고 간다는 뜻이지 혼 자 가는 길이 아닙니다. 혼자 가는 길은 ‘나’의 고집을 더 강화시킬 뿐입 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꾸 자아를 강화시킬 방법을 찾는데 그러면 더 안 좋은 길로 가게 됩니다. 무아의 가르침과 멀어지고 고집만 강해집니다. 모든 중생이 성불할 때까지 성불 못한 중생이 하나라도 있다면 나는 성 불하지 않겠다, 내가 맨 뒤에 성불하겠다, 그래야 무아가 됩니다. ‘내가 너보다 조금 빨리 되겠다.’ 그러면 내[我]가 생기는데 성불이 되겠습니까? 모든 중생이 다 성불하기를 발원하는 것은 무아가 된다는 뜻이고 그것 이 전제되지 않는 발보리심은 허구입니다. 보리심을 일으킬 때는 일체중 생이 고통 속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관자재보살 이처럼 중생의 고통을 깊이 관찰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아상이 강하다는 뜻입니다. ‘나’라는 고집이 강하고, 내 법집이 강하고, 내 욕심이 강하면 다른 것은 안 보입니다. 그런 이는 보살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교를 공부 할 때는 처음부터 ‘나도 부처님처럼 되겠다.’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저는 다람살라에서 많은 스승들을 뵈었습니다. 한 노장님은 한 번 결 사를 하면 10만 배씩 절을 합니다. 그것도 보드가야에 가서 하시더라고 요. 그분들은 이마를 땅에 대고 팔과 다리를 쭉 펴서 절하는 전체투지를 합니다. 그렇게 절을 할 때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절을 하시냐고 물었 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근본 스승이신 아미타 부처님을 정 수리에 모시고, 오른쪽 어깨에는 관세음보살님을 모시고, 왼쪽 어깨에는 대세지보살님을 모십니다. 이렇게 삼보를 모시고 오른손으로는 친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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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중생을 이끌고, 왼손으로는 외가의 인연중생을 이끌고, 허리로는 나 의 친척과 친구들과 지인들을 품고, 발로는 삼악도를 비롯한 일체중생 을 이끌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겠습니다.”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앞으 로 나아가면 뒤의 분들이 전부 따라오지 않겠습니까? ‘모든 중생이 다 성불할 때까지, 내가 골백번을 죽는 한이 있어도 이끌고 나아가겠습니 다.’ 이런 마음으로 매번 절을 한답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의 구호입니 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갑시다. 갑시다. 모 두 갑시다. 어서 빨리 갑시다. 저 깨달음으로.’
이렇게 정진할 때 중요한 마음 자세는 ‘평등심’입니다. 가정을 하나 해 봅시다. 우리 아들이 배고픈 것과 거지가 배고픈 것을 동일하게 볼 수 있 을까요? 거지가 배고프다고 구걸하면 귀찮거나 짜증이 나고 아들이 배 고프다고 하면 그냥 부엌으로 쫓아 들어가겠지요? 아프리카 아동들이 기아에 굶주려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있는데 내 자식이 배고프다고 하면 어느 쪽으로 마음이 더 크게 움직이던가요? 평 등심이 안 생깁니다. 이것이 발보리심의 가장 큰 적입니다. 평등심이 없으 면서 보리심을 내겠다고 말한다면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절대 신을 믿든 여러 신을 믿든 종교성은 평등에 있는데 대부분의 종교가 선민의식을 갖 게 해서 차별의식의 죄악을 저지릅니다. ‘내 자식’ 하듯이 ‘내 종교’를 가져서 그렇습니다. 불교는 ‘내 종교’가 아닙니다. ‘내 종교’를 생각하면 그때부터 그 종교는 망한 것입니다.
평등심이 생겨야 하는데 잘 안되니까 부처님께서 제시한 방법이 있습 니다. 모든 분들을 나의 어머니로 생각하는 관상법입니다. 여기서 모든 분들이란 사람뿐 아니라 지옥중생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말합니다. 백 중 때도 모든 존재가 나의 어머니였을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선망부모 와 지옥중생까지도 축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위패를 붙여도 아주 이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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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친정어머니, 친정아버지 붙여놓고 시어머니, 시아버지는 할까 말 까 망설입니다. 시어머니, 시아버지도 전생에 어머니, 아버지가 아니었으 면 지금 어떻게 지중한 인연으로 만났겠습니까? 길거리에 지나가는 강아 지도 오랜 생의 내 어머니였다고 생각한다면 강아지가 되어있는 그 모습 이 불쌍하잖아요. 더구나 내 부모였던 사람이 지옥에 가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어머니가 고통 받고 있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 을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가 베푼 은혜를 절대 갚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은혜를 알았을 때는 이미 돌아가신 뒤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인연들을 대할 때, 나는 항상 이렇게 생각하라고 권유합 니다. ‘어느 한 생에 틀림없이 어머니였거나 아버지였거나 형제간이었을 그가 지금 힘들어한다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산티데바 같은 수행자는 통렌(gtong len)수행을 하셨습니다. 주고 받 는다는 뜻의 통렌은 단지 불쌍하게 여기고 도와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 니라 ‘어머니가 받는 고통을 내가 대신 받겠습니다.’ 하고 내가 그 자리 를 대신한다는 뜻입니다. 어머니가 추운데 길거리에 나가 장사를 하고 계 신다면 내가 대신 장사를 하고 어머니가 감옥 갈 일이 있으면 내가 대신 가는 것처럼 어머니가 윤회 속에서 생사의 고통을 받고 있다면 내가 대신 받겠다는 것입니다. 오랜 생을 은혜 입고 살아왔는데 그 고통을 대신하 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랜 생을 윤회했다면 태어났을 때마 다 부모가 계셨을 것 아닙니까? 물론 지옥이나 아귀나 천상에 태어날 때 는 부모가 없겠지만 축생이나 인간처럼 욕계 중생으로 태어날 때는 부모 가 있습니다. 부모도 나도 천 번 만 번 태어났을 테니까 지금 만나는 모 든 분들은 다 한 생의 부모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가 고통 받게 할 수는 없잖아요? ‘전생의 모든 어머니들이시여, 이 자식이 공부하면서 당 신을 니르바나, 영원한 행복의 길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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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야 합니다. 나는 이 관상을 시작한지가 20여 년 됐는데 스스로 반성할 기회도 되었고 이기적인 생각이 많이 깨지기도 했습니다.
우리 절에서는 저에게 장을 보러 가지 말라고 합니다. 시장에 가면 할 머니들한테 가서 물건도 안 보고 삽니다. 그러니까 엉터리이거나 상한 것 을 사 올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사지 말고, 저 할머니한테는 사지 말 라.’고 하지만 전생의 내 어머니가 돈을 벌겠다고 그 뙤약볕에 나와 헝겊 을 뒤집어쓰고 앉아 계시는데 그걸 보고 어떻게 그냥 지나갑니까? 그분 을 장사꾼으로만 본다면 값을 깎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어머니라면 그럴 수 있을까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콩나물 팔러 나온 할머니한테 한 줌만 더 달라며 빼가는 것입니다. 철부지이고 욕심쟁이지요. 불교를 공부 하는 사람의 마음이 아닙니다. 나는 베풀고 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 리가 무엇을 베풀 수 있나요? 오랜 생 동안 어머니, 아버지, 형제, 친구들 에게 내가 여태껏 진 빚만이라도 갚으며 살아야 합니다. 은혜를 갚을 생 각이 없다면 그것은 종교의 가르침이라 할 수 없습니다. 깨달음에 도달 하려고 보리심을 내는 것도 보은의 마음입니다.
부처님께서 은혜 갚는 이야기를 해놓은 경이 『부모은중경』과 『목련경』 입니다. 은혜 갚는 이야기라면 유교적인 해석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이 경 들은 그것과 다릅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들이 육도윤회에 헤매고 있으니 그분들을 다 구제하겠습니다. 내가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고 내 모든 것을 바쳐서 당신들을 깨달음으로 이끌겠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목련존자의 어머니는 지옥에 계셨고 부처님의 어머니는 천상에 계셨는데 천상도 지옥도 다 윤회하는 곳입니다. 목련존자나 부처님이 자기중심적 인 생각에서 나만 성불하겠다고 했다면 자기도 성불 못하고 남도 구제하 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 연기적 관계로 이루어진 세상이기 때 문입니다. 이것을 알면 나보다 그들의 가치가 훨씬 소중해집니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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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중생을 깨달음의 세계로 모시고 가겠다는 위대한 생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염념보리심 처처안락국’, 생각 생각 일체중생을 해탈로 이끌 고 가겠다는 보리심보다 더 중요한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보리심 수행을 한국에서는 하지 않습니다. 요즘에는 『부모은중경』과 『목련경』도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僞經)이라고 합니다. 알지도 못하고 그런 소리를 하니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데요. 이 경들은 부처님 당시에 설해진 발심경입니다. 『목련경』은 『아함경』 속에 있고 『부모은중경』도 『입태경』이라는 이름으로 『아함경』 속에 설해져 있습니다. 내용이 같습 니다. 그러니 대승불교가 비불설이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대승 불교가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면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99%를 폐기처분해 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활 속에서 제일 먼저 할 일은 만나는 모든 생명을 나의 어 머니나 아버지, 형제나 친구라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관찰하면 그들이 고 통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요? 뭘 해주려고 보니까 정작 나에게는 능력이 없습니다. 능력이 있어야 방편을 써볼 텐데 그것은 수행을 통해 얻어집니다. 돈이라도 많으면 도움을 줄 텐데 그것도 안 되고 방편력도 없어서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참회해야 합니다. ‘내가 방편력이 없어서 중생을 구제하지 못하는구나.’, ‘내가 재 력이 없어서 보시도 잘 안되는구나.’, ‘내가 아는 것이 없어서 법보시도 잘 안되는구나.’ ‘내 마음이 허약해서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의지처가 되 지 못하는구나.’ ‘내가 인욕도 잘 안 되는구나.’ 이렇게 참회를 해야 그 다음에 개선해 나갈 방법이 생깁니다. 일체중생을 위해 발심했다면 관찰 과 참회가 꼭 필요합니다.
모든 중생을 위하는 마음을 냈다면 실제로 ‘통렌’ 수행을 해보라고 권 합니다. 통렌은 내가 저쪽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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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지사지’와는 다릅니다. 내가 머슴이 되고 그가 주인이 되게끔 위치를 바꾸는 것입니다. 굶는 사람이 있다면 먹다 남은 걸 조금 나눠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굶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어머니가 자식을 키울 때 자기가 굶는 한이 있어도 아기를 먹여 살리는 것과 같은 마음이 통렌 입니다. 이타심을 닦는 수행법 중에서도 매우 수준 높은 수행법입니다. 이 수행을 할 때는 조용히 가부좌하고 앉아서 눈을 지그시 반개(半開)하 고 모든 중생이 고통 받고 있는 모습을 깊이 관찰합니다. 그 고통이 검 은 기운이 되어 저 공중에 떠오릅니다. 공중에 떠있는 모든 중생의 아픔 을 내가 전부 흡수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표현한 것이 티베트의 따 라보살인데 『천수경』에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진언의 주인공인 준 제보살입니다. 탱화 속에 피부가 파랗게 된 보살이 바로 그분입니다. 관 상을 통해 일체중생의 고통을 다 흡수해서 그런 모습입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의 고통을 깊이 관찰했기 때문에 ‘모든 백성의 죄를 내가 대신 받 겠습니다.’ 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통하는 데가 있으니 기독 교 믿는 사람도 불교를 외전으로 공부하면 좋겠습니다.
이 수행법을 잠시 앉아서 해봅시다. 모든 중생이 힘들어 고통스러워하 는 모습을 떠올리고 그 어두운 업들이 공중의 검은 구름이 되면 내 입으 로 전부 흡수합니다. 그 다음 나의 밝은 기운과 따뜻한 사랑의 기운을 저 들에게 되돌려줍니다. 이것을 반복해서 수행합니다. 여러분이 명상을 할 때 일체중생이 나의 어머니임을 전제하고 은혜를 갚는 마음으로 수행하 십시오. 강아지 한 마리라도 그렇게 접한다면 만나는 모든 존재를 함부 로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앉아서 명상을 할 때나 일상생활을 할 때나 그 마음을 일으킨다면 그 마음이 보리심이고 그 사람이 보살입니다. 『금 강경』도 보리심을 이야기합니다. 『금강경』이 공성만 말하는 것 같지만 ‘일체중생을 위해 보리심을 낸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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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묻는, 보리심에 관한 경전입니다. 공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내 욕심과 집착을 덜기 위해서입니다. 공성 체험을 하고 나면 평등심이 일어납니다. 평등심을 내서 일체중생을 위해 하나하나 닦아 나가는 것이 보살 수행이 고 대승불교입니다. 자리와 이타는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이 마음을 내서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성불에 이를 때까지 모든 중생을 위해 3아승지겁 동안 수행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일생생활에서 내 생각부터 하지 말고 상대를 볼 때 나의 어머니였을 거라고 전제를 한다 면 무슨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모든 중생의 고통을 내가 대신 받고, 괴로 움에서 벗어난 길로 모시고 가겠다고 보리심을 발한 수행자가 되시기 바 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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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네 가지 사실과 여덟 가지 길
(사성제와 팔정도)
오늘은 부처님께서 깨닫고 나서 처음 하신 법문, 초전법륜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굴릴 전(轉)’,‘바퀴 륜(輪)’, 법륜을 굴린 다고 합니다. 바퀴는 모난 데 없이 원만하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굴러 가기 때문에 부처님의 설법을 바퀴에 비유했습니다. 법륜에는 초전, 중전, 상전, 3법륜이 있습니다. 설법을 세 번 했다는 것이 아니고 세 단계라는 뜻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이렇게 수준 에 맞춰서 단계별로 법을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단계별로 법을 설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직후 보드가야 주변을 지나가는 상인들에게 “이리 좀 와 보시오. 내 얘기 좀 들어보시오. 내가 특별한 경계를 얻었는데 여러분에게 설명을 좀 해드 리겠소.” 하니까 상인들이 공양을 올리고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부처님 께서 “모든 것은 자성이 없이 공합니다.” “이 세상에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좀 듣다가 “수행자시여, 우린 돈 벌러 가야 하는데 지금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고 겁을 먹고 도망을 갔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민에 빠지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중생들이 알 아듣게 이야기할까, 누구에게 이야기해야 알아들을까?’ 출가했을 때 가 르쳐주었던 스승이 떠올랐으나 그분들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알아들 을 만한 사람이 누구이고, 나와 인연이 깊은 사람이 누구인가 보니, 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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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때 함께 수행했던 교진여 등 다섯 비구가 생각났습니다. 부처님께서 고행으로는 번뇌를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고행을 중단했을 때 그 들은, 타락했다고 부처님을 떠나 녹야원 고행림에서 계속 고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드가야로부터 녹야원까지 먼 길을 걸어가 다섯 비구에게 설법을 시작하셨습니다. 실제로 이익을 주려면 고차원적 인 법문보다는 쉬운 것부터 하겠다고 생각하여 4성제와 8정도를 8년 동 안 말씀하셨습니다. 이 초전법륜은 팔리(Pāli)어로 전승되어 지금의 스리 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 전해졌습니다.
초전법륜 가운데 처음 하신 법문이 ‘수행자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고통에 관한 법문, 즉 사성제입니다. ‘고통이 어디서 비롯되는가? 중생들이 나[我]가 있다고 생각해서 탐욕을 부리고, 분노를 일으키고, 어리석은 짓을 해서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한 다. 이 고통을 어떻게 설명하여 개선하도록 할 것인가?’ 이것이 부처님의 과제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의사가 되어 중생의 병을 관찰하고 치료했습니다. 의사도 환자가 왔을 때 증상을 관찰하여 무엇이 원인인 지, 나을 수 있는 병인지, 나을 수 없는 병인지 진단하고 약을 주거나 주 사를 놓아서 치료합니다. 가끔은 고치지 못하는 병도 있고 코로나 같은 경우는 한동안 백신도 없고 치료제도 없어서 쩔쩔매기도 했지요. 진단과 처방이라는 점에서 부처님을 의사에 비유하지만 일반 의사와는 다릅니 다. 부처님에게 중생의 병을 고칠 방법이 없다면 부처님이 아닐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고통의 현상을 분석하고, 고통의 원인을 진단하고, 고통이 멸한 상태를 설명하고, 고통을 멸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중생이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말씀으로서, 성스러울 성(聖)에 진실 제(諦)를 붙여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고 합니다. 성(聖)은 욕심을 벗어나 깨끗하다는 뜻이고 제(諦)는 사실, 진실을 뜻합니다. 『금강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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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如來是真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誑語者 不異語者)”라고 했습니다. 여래는 진실을 말하는 분이 고, 사실을 말하는 분이고, 있는 그대로 말하는 분이고, 기만하지 않는 분이고, 다르게 말하지 않는 분입니다. 이 네 가지는 진실이니 명념하라 는 뜻에서 ‘사성제’라고 하셨습니다.
불자들 중에는 초전법륜과 중전법륜이 다르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데 다르지 않습니다. 또한 대승을 하는 사람들은 소승이 별 볼일 없다고 하고, 소승을 하는 사람들은 대승이 엉터리라고 합니다. 그것은 공부 안 하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이고 넓게 보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입니 다. 소승에 공성이라는 말이 없다고 대승과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까? 무아가 바로 공성입니다. 『반야심경』의 공성, 『유마경』의 불이법문, 용수 보살의 공성이 다 똑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대승을 공부하더라도 비구계 를 받을 때는 소승계를 받습니다. 기초는 똑같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에서 ‘1+1=2’를 배운 것이 기초가 되어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서 조금 더 추가될 뿐이지 덧셈의 원리는 그대로이듯이, 부처님 법문도 초전, 중 전, 상전으로 가면서 추가되는 내용들이지 다른 원리가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르침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시비 삼아서 한쪽 이 결핍되었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사성제는 대승의 어느 경론에 도 빠진 곳이 없는 법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성제의 기초를 잘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중에 첫 번째는 고제(苦諦)입니다. 윤회하는 이 세상은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원효 스님이 사복의 어머니 장례에 가서 설법을 했습니다. ‘태어나지 마라. 죽기 괴로우니. 죽지 마라. 태어나기 괴 로우니.’ 그랬더니 사복이 무슨 말을 그렇게 길게 하냐면서 ‘생사고’라 고 했습니다. 생명이 쉴 새 없이 윤회하는 것이 근원적인 고통이고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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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몸과 마음의 모든 고통이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언가 영원한 것이 있고, 머물 곳이 있고, 가질 것이 있고, 이 몸뚱이를 가지고 오래 살 거라고 생각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좋은 집 지어놓고 비싼 침대 사다 놓고 오래 살고 싶어 하지만 어림없는 생각입니다. 사업하다가 부도가 날 수도 있고 좋은 침대라도 두어 달 침대에만 누워있으면 나중에 일어 나지도 못합니다. 돈이나 물건에 애착을 가질수록 잃을 때의 고통은 더 커집니다. 변화하는 가운데서는 아무리 천상에 태어났더라도 잠시도 머 물지 못하기 때문에 순간순간 흘러가는 모든 것이 괴로움입니다. 내가 가 졌던 것들도 금방 사라지고 내가 고집했던 것들도 사실이 아닙니다. 아 름답던 얼굴도 늙으면 쭈글쭈글해집니다. 영원할 것 같은 이 지구도 온 전하지 않습니다. 비가 와서 난리가 나고, 땅 밑이 부글부글 끓어서 지진 이 나고, 화산이 폭발하고, 몇십억 년 뒤가 될지는 모르지만 결국에는 가 루가 되어 다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의지하고 머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집착했던 것이 무너 지는 데서 오는 괴로움(苦苦), 모든 것이 변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壞苦), 존재 자체의 괴로움(行苦), 이렇게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괴로움의 원인에 관한 설명, 집제(集諦)입니다. 시간과 공간 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 절대불변은 없습니다. 『금강경』에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 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 라는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인데 우리가 관념적으로 구분지어 생각 하는 것 뿐이지 실재가 아닙니다. 공간도 이 세상에 절대적인 어떤 공간 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생각으로만 있는 것이지 실제로는 없습니다. ‘나’라는 것 도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존재가 아닙니다. 젊었을 때의 나와 60, 70이 된 나는 다릅니다. 이렇게 무상하고 무아이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이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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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은 괴로움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은 뒷면에 불행을 달고 옵니다. 세상 뒷면의 괴로움을 보는 눈, 이것이 ‘고제’입니다. 고통인 줄 보면 잠시 달콤한 세상에 머물지 않고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운가? ‘내’가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 다. 나에 대한 애착으로 탐진치가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 다. 언젠가 제가 달라이 라마 존자님께 “달라이 라마라는 것이 무엇입니 까?” 하고 여쭤보자 “이름입니다.”라고 답하셨습니다. 제가 또 여쭤봤습 니다. “전생에 달라이 라마, 13대 달라이 라마, 14대 달라이 라마는 같습 니까, 다릅니까?” “같다고 해도 안 되고 다르다고 해도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전생과 이생은 바뀌었으니까. 상속되어 바뀌었으니까.” “그러면 현 재 달라이 라마는 누구입니까?” “그냥 한 사람의 비구일 뿐입니다.” 비 구로 산다는 말씀입니다. 이름은 그냥 이름일 뿐, 이름이 곧 자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유교 전통에서 살아온 한국 사람들은 이름을 중 시합니다. ‘내 이름에 먹칠을 했다.’는 말까지 합니다. ‘나’라는 것이 실 체가 없는데 그것을 가리키는 이름에 실체가 있겠습니까? 나에 대한 집 착 때문에 욕심이 생기는데, 욕심에 맞으면 잠시 좋아하지만 욕심대로 안 되면 분노를 일으키고 삿된 생각을 일으킵니다. 이것을 매일 반복해서 좋 지 않은 결과를 맞는 것이 대다수의 삶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생사윤회의 고통이 ‘나’라는 고집에서 시작하여 탐진치를 반복하는 사이에 끝없이 이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오온의 실체가 무자성이 아니라 영원한 나가 있 다고 집착하는 것이 집제입니다. 색수상행식의 모임 자체가 아를 집착하 고 고를 발생시킵니다.
세 번째는 고통이 없어진 상태, 멸제(滅諦)입니다. 아집과 삼독에 의해 형성된 고통에서 벗어나면 그것을 니르바나(nirvāṇa)라고 합니다. ‘니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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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졌다는 뜻이고 ‘바나’는 바람이라는 뜻인데, 업의 바람과 번뇌의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은 ‘나’가 있다고 착각합니다. 인도에서는 나를 아트만(ātman)이 라고 하는데, 이 아트만을 영원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반면, 부처님은 처음부터 아트만을 부정하고 무아를 가르치셨습니다. ‘나’라는 미몽에 서 깨어나면 그곳이 열반입니다. ‘나’가 있다는 고집이 사라지고 거기에 붙어있던 모든 번뇌가 사라진 상태입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아, 공성, 불이를 명료하게 가르칩니다. 만약에 무아, 공성, 불이를 말하지 않 고 영원한 무언가가 있다거나 죽은 뒤에 행복한 곳에 간다고 얘기하면 불 교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경전을 볼 때, 무아와 공성 얘기가 나오면 부처 님 말씀인 줄 알아야 합니다. 불교인들은 불교의 울타리 속에 들어와 있 어도 무아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교인을 부처님의 자식이라는 뜻에서 불자(佛子)라고 하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서 실행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무아와 공성을 알고 미몽으로부터 깨 어나는 것이 불교이고, 미몽에서 깨어난 상태를 니르바나라고 하는 것입 니다. 여기에는 고통이 없기 때문에 멸제(滅諦)라고 합니다. 누구나 멸제 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열반을 믿지 않는다면 불자가 아닙니다. 병원에 가서 ‘내 병이 안 낫는다.’고 얘기하는 환자와 같습니다. ‘의사 네가 백 날 해봐야 내 병 안 낫는다.’ 그러면 낫기가 힘들겠죠. 세상을 살면서 우 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전부 고통을 유발시키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지 않고, 고통이 사라진 경계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 또한 없다는 말씀입니다.
네 번째는 고통을 없애는 방법, 도제(道諦)입니다. 도(道)는 길이라는 뜻인데 방법입니다. 그렇게 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병을 고치고 열반으로 가는 데 여덟 가지 바른 길이 있는데 이를 ‘팔정도(八正道)’라고 말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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셨습니다. 그중 첫 번째는 ‘정견(正見)’입니다. 정견은 생각을 바로 갖는 것 으로, 첫 생각이 잘못되면 엉뚱한 길로 갑니다. 세상을 창조한 분이 계시고 그 분이 전지전능하시니 그 분만 믿고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물질이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돈을 신처럼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 자본주의가 그렇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 신도 없고 마음이라는 것도 중요치 않고 물질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유물론자 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 었고 고통을 당했습니까? 지금도 그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잘못된 생각은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고통을 유발합니다. 그래서 정견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불자의 입장에서 얘기하면, 부처님의 가르침, 그 중에서도 사성제를 잘 이해하는 것이 정견입니다.
둘째, ‘정사유(正思惟)’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해서 바른 생각 을 가졌다면, 그것을 항상 생각하고 잘 기억하는 것이 정사유입니다. 우 리가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을 외울 때 ‘오온이 공하다’는 말을 알고 새기면 외우는 동안에 사유가 됩니다. 『천수경』도 부적이나 신통으로 읽 지 말고 그 안의 내용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거듭 읽고 외우며 ‘중생 무변서원도, 번뇌무진서원단, 법문무량서원학, 불도무량서원성’의 뜻을 기억하고 나도 그렇게 되고자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셋째, ‘정어(正語)’는 부처님 말씀과 같은 말이 바른 말입니다. 거짓말, 악 담, 이간질, 쓸데없는 말, 이 네 가지가 구업인데 이것을 하지 않는 것이 정 어입니다. 정견과 정사유에 이어서 정어가 나오는 것은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했다면 말도 바르게 나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생각과 말이 따로 놀 면 안 되겠지요. 생각이 곧 말이고 말이 곧 생각입니다. 또한 말이 곧 행 동이고 행동이 곧 말이니 말과 행동이 따로 논다면 그것도 문제가 있습 니다. 그러므로 진실에 입각해서 말을 바로 해야 합니다. 특히 설법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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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인과와 연기와 공성에 관해 제대로 이해하고, 이해한 대로 이 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도 법단에 오를 기회를 얻은 것이 매우 도움 이 됩니다. 말을 바로 하려고 애를 쓰니까요. 여러분도 자녀들한테 이런 말을 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엄마, 말한 거 하고 다르네? 절에 다닌다 더니 왜 그래?’ 그러면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을 바로 하도 록 늘 살피고 자녀들에게 공감을 얻을 만한 부처님 말씀을 전하도록 노 력해야 합니다.
넷째, ‘정업 (正業)’은 바른 행위입니다. 살생이나 도둑질 같이 나쁜 행 위를 하지 않고 부처님의 진실한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정업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술 먹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경전 속에 술을 먹어도 된다는 말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술 때문에 생기는 폐해가 엄청나기 때 문에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안 먹는 생활이 정업입니다.
다섯째, 정명(正命)은 바른 생활입니다. 생계를 위한 직업과 삶의 태도 를 바르게 가지라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직업이 필요하지만 돈 을 버는 과정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직업을 택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을 비롯해서 여러 나라의 방위산업체, 무기업체들 있지 않습니 까? 세상에서 좋은 직장이라고 알아주지만 거기서 만드는 무기가 한꺼 번에 많은 사람들을 죽입니다.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지금도 핵미 사일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무간지옥에 갈 업을 짓는 일입니다. 나의 생 존이 다른 생명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지 잘 살피면서 먹고 살아야 합니 다. ‘나는 평생 돈을 벌기 위해 살았다.’ ‘나는 미모 때문에 살았다.’ ‘나 는 평생을 살았는데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르겠다.’ 그러면 한 평생 살 아놓고 얼마나 기막히고 한심하겠습니까? ‘일체중생을 위해 살겠다.’ 이 렇게 삶의 목적이 분명하고 삶의 태도가 바람직해야 목숨을 이어나가는 명근(命根)에 정당성이 부여되니, 그것이 정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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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정정진(正精進)’은 바른 노력입니다. 번뇌를 끊기 위해 부 처님이 가르쳐주신 방편을 열심히 닦는 것이 정진입니다. 정진한다고 새 벽부터 일어나서 죽자 살자 ‘정구업진언’을 큰소리로 외우는 사람이 있 다고 했을 때 식구들 잠 못 자게 떠들어놓고 우리 가족 잘 되기를 기원한 다면 식구들은 성질나겠죠. 부지런히 관세음보살 염불을 하던 노보살님 이 계셨는데 어느 날 보니까 아미타불을 부르고 또 어느 날은 지장보살 을 부르셨습니다. “왜 그리 바뀝니까?” 물었더니 어느 게 닿을지 몰라서 그렇다고 하더군요. 이 절에 가니까 관세음보살을 하라고 그러고 다른 절에 갔더니 돌아가실 때가 됐으니 지장보살을 하라고 그러고 다른 절에 가니까 지장보살보다 어른이 아미타불이니까 아미타불 하라 그랬다는 겁니다. 정진을 이렇게 하면 안 되고 하나로 집중해야 합니다. 부처님께 서 가르치신 방법을 정확하게 따라서 번뇌를 떨어뜨려 나가야 바른 정진 이 됩니다.
그 다음이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인 ‘정념(正念)’과 ‘정정(正定)’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고서는 깨달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명상이라 고 하면, 건강에 좋다든지 마음을 가라앉힌다든지 하는 효용성을 얘기합 니다. 번뇌를 끊는데 집중하지 않는 것은 정념, 정정이라고 하지 않습니 다. 정념은 깨어있는 생각이며, 정정은 번뇌를 끊는 집중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여덟 가지 방식으로 니르바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팔정 도의 가르침입니다. 의사가 처방약을 줄 때도 하나만 주는 게 아니라 기침 약도 주고 해열제도 주고 여러 가지 약을 주듯이 부처님께서도 여덟 가지 약을 섞어서 처방을 해주셨습니다. ‘고집멸도’ 이 네 가지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사성제는 고(苦)를 건널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가르 침입니다. 불교만큼 고통의 문제를 정확하게 가르쳐주는 곳은 없습니다. 사성제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자 수행의 근간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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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반복하는 여섯 가지 길(육도윤회)
『아함경』에 ‘세상은 불타고 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탐욕에 불타고, 분노에 들끓고, 어리석은 생각으로 계속 휘몰아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번뇌가 들끓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이 세 계도 복잡하고 위태롭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홍수가 나고, 코로나19도 있고, 경제 상황도 변화가 심하고, 남북문제도 복잡합니다. 우리에게 고 정된 삶이란 없고 계속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살아갑니다. 부처님께서는 삼계육도 가운데 잠시도 머물 곳 없는 중생의 삶을 가엾이 여기시고 윤 회의 실상과 윤회를 벗어나는 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입니다. 욕계는 욕망으로 이루어진 세계입니 다. 인간을 포함한 지옥, 아귀, 축생, 천상의 일부 신들이 이 범주에 속합 니다. 색계는 감각적인 욕망은 벗어났지만 물질적 형태가 남아있는 세계 입니다. 욕망을 벗어나 선정에 든 존재들이 이 범주에 속합니다. 무색계 는 물질적 형체 없이 정신적 상태만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이곳에는 오직 의식만이 존재합니다.
삼계 중에 욕망으로 존재하는 욕계는 마치 꿈같이 존재하는 세계라고 합니다. 우리는 꿈인데도 꿈인 줄 모르기 때문에 깨어나지 못하고 그 안 에서 쫓기기도 하고 욕심을 부리기도 합니다. 욕계의 특징은 욕심이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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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면 많을수록 어두워진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채워지지 않으면 화가 나 고 어리석은 짓을 반복해서 탐진치가 두터워집니다. 점점 어두워지기 때 문에 비유를 하자면 엎어지고, 넘어지고, 깨지고, 부딪혀서 고통당할 일 이 많습니다. 그래서 ‘고통의 세계’라 하고, 그 중 고통이 제일 심한 곳 이 지옥입니다. 예컨대 분노라는 번뇌 때문에 지옥을 갔다면 거기는 화탕 지옥입니다. 경전에 의하면 거기서는 죽을 수도 없습니다. 펄펄 끓는 화 탕지옥에 집어넣었는데 건지면 또 살아있는 식으로 고통이 반복됩니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은 행동을 평생 반복하면 지옥에 간다고 하지만 어 쩌면 여기 사는 지금 이 순간에 이미 지옥에 가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죽 고 난 뒤에도 꿈속처럼 존재합니다. 『구사론』에 보면 고통을 받는 시간 이 한 생각 동안에 만생만사, 만 번을 죽고 만 번을 태어나는 모습이라 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 자꾸 다투는데 그게 문제가 아 닙니다. 실제로 내가 만들어서 내가 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장 심한 지옥은 어떤 일로 가느냐 하면, 살생을 했을 때, 그중에서도 부모를 죽이 는 등 오역죄를 범했을 때 가게 됩니다. 그것은 아무리 본인이 잊어버리 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죄악이고 헤어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고통이 끊 일 사이가 없다는 뜻에서 그곳을 무간지옥이라고 합니다. 고통에 잠시 까무러쳤다가도 정신을 차리면 바로 기억이 살아나 고통을 잠시도 떠날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지옥은 믿으면 있고 안 믿으면 없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이 탐진치로 살아온 결과 도달하는 극악의 상태를 말합니다. 거기는 일단 가면 빠져나오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왜냐하면 한 생각에 만생만사 한다는데 인간이 백 세에 36,500일 산다고 하면 지옥은 적어도 3만 년 이상을 살아야 나온다는 말이 됩니다. 자기가 3만 년의 감 옥을 만들어서 스스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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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은 아귀입니다. 지옥은 탐진치로 지은 악업 때문에 이루어지지 만 그 가운데 탐욕이 강할 때는 아귀가 됩니다. 아귀는 배가 산만큼 크 고 목구멍은 머리카락만큼 좁은데 항상 배가 고파서 허기에 시달리다가 허겁지겁 물이라도 한 방울 마시면 목이 찢어지고 뱃속에서 불이 난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평생 내 욕심만 부리고 살았다면, 다음 생에 그 업을 받을 때, 배만 엄청 크고 소화 시킬 능력은 없는 아귀에 떨어진다고 합니 다. 내가 사람들한테 “욕심 부리지 마소. 다음 생에 과보를 받을 때, 그 대가 아귀에 떨어졌을 때는 수천만 생 배고픔의 고통을 면치 못합니다.” 하면 “그런 건 꿈이잖아요?”라고 합니다. 실제로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것도 꿈입니다. 서산 스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서산 스님께서 길을 가다가 어느 부잣집 행랑채에 어떤 객과 같이 주무셨답니다. 그 객이 아침에 밥 얻어먹고 가면서 주인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해준다고 “어제 저녁에 꿈을 꾸었는데 이 집에 서기가 비추더군요.” 했답니다. 서산 스님 이 듣고서 시를 썼는데 “꿈속에서 꿈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했습니다.
인간도 다른 차원에서 놓고 보면 꿈꾸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 면 실체가 없이 계속 변화해 갈 뿐이니까요. 돌아가시기 직전에 있는 분 들과 얘기해 보면 하나같이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 내가 80 평생 살 아온 것이 다 꿈입니다. 내가 추구해 왔던 게 지금 이 자리에 놓이고 보 니 정말 아무것도 쓸 데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지옥에 가지 않는 것 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고 기원하시며 모든 중생이 지옥이나 아귀에 빠지 지 않을 방법을 내놓으셨습니다. 그것이 열 가지 계율, 즉 십선계입니다. 그러니 “전지전능하신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저를 지옥에 가지 않게 해주 십시오.” 그럴 것이 아니라 십선계를 잘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금강산 팔만 암자 백일기도 드리지 말고 타관객지 외로이 떠난 사람 괄시를 마 소.” ‘강원도 아리랑’에 이런 가사가 있지요. 외로운 객지 사람 괄시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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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이 찬물 뒤집어쓰고 백일기도 드리는 것보다 낫다는 말씀입니다.
그다음은 축생입니다. 지구에는 60만 종 정도의 동물이 있는데 그 숫 자는 얼마나 되는지 모를 만큼 많습니다. 유전학적으로 보면 사람과 DNA가 비슷한 동물도 있어서 마운틴고릴라의 경우는 사람과 98%가 일 치한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사람만이 도구를 사용한다고 생각했지만, 연 구 결과 동물도 도구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풀을 가지고 흰개미를 잡아먹고, 딱딱한 먹이는 돌로 까서 먹고, 싸울 때 막대기를 가 지고 싸웁니다. 인간이 미사일 갖고 싸우는 것과 똑같습니다. 심지어는 초파리도 인간의 유전자와 60%가 같답니다.
몸이 있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인간과 별 차이가 없지만 인간이 되고 축 생이 되는 것은 어리석은 정도의 차이에서 비롯합니다. 축생의 가장 큰 특징이 어리석음이니 그만큼 대뇌의 기능이 약하다는 뜻입니다. 코끼리 는 그렇게 덩치가 커도 인간의 대뇌 기능에 비해 훨씬 떨어지고 침팬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뇌 기능이 약하면 기억력과 창의력이 발달되지 않습 니다. 그보다 큰 문제는 잘못을 알아차리는 정지(正知) 기능이 없는 것입 니다. 동물들은 잘못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축생에 떨어지면 벗어 나기가 힘이 듭니다. 코끼리는 80년에서 100년 살고 갈라파고스 쪽의 바 다거북이는 150년에서 200년 가까이 살지만 문제는 그 삶을 유지하기 위 해서 많은 업을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초원의 최강자인 사자도 자기가 살려면 사흘에 한 번씩은 다른 생명을 죽여야 합니다. 살생이 죄업이 되 는 줄 모르고 25년을 산다고 하면, 사자가 사는 동안 초식동물 몇 마리 를 죽여야 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동물들은 잡아먹힐까 봐 항상 불안합니다. 매일 깜짝깜짝 놀라서 숨고 도망가는 것이 기본이라 인간보다 훨씬 고통스럽게 살아갑니다.
이렇게 지옥, 아귀, 축생은 업이 무겁고 과보가 심하기 때문에 삼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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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합니다. 삼악도에는 떨어지지 말아야 문제가 덜 발생합니다. 불교 수행은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부처님께서 십선계 를 닦으면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이것을 잘 닦아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행은, 언뜻 보면 남을 위해서 하는 것 같지만 사실 나 에게 도움이 됩니다. 내가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선행을 해야 합니다. 일단 삼악도에 떨어지면 나오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 무서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윤회를 부정하고 내 삶을 돌아볼 기회를 잃어 버리게 됩니다.
그다음은 사람입니다. 밑으로는 지옥, 아귀, 축생이 있고 위로는 수라 와 천상이 있어서 여섯 갈래 중에 중간입니다. 삼악도는 고통이 심하고 수라와 천상은 즐거움이 많은데 사람은 중간이라 반은 즐겁고 반은 괴 롭습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이 섞여 있는 것을 다들 경험할 것입니다. 아 들 낳아서 미역국 먹고 생일에는 파티도 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키워 놓으니까 아들이 살림을 다 말아 먹기도 합니다. 좋아서 결혼했는데 살 다 보니 이혼도 합니다. 돈을 많이 모았다가도 부도가 나서 힘들다고 합 니다. 거지는 부도가 나도 깡통 하나밖에 잃을 것이 없지만 돈 많은 사람 은 부도가 나면 잃을 것이 많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거지가 돈 많은 사람 보다 편할 수 있습니다. 있다가 없으면 더 힘든 법입니다. 여러분도 이 몸 을 받아서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지만 죽으려면 힘들지 않겠습니까? 인 간의 삶은 반고반락이라, 조금 더하고 덜한 차이는 있지만 근원적으로 는 같습니다. 결혼을 했어도, 돈을 많이 벌었어도, 이래도 후회, 저래도 후회, 인간은 그런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특성 가운데 조금 희망적 인 것은 욕심을 부렸다가도 욕심을 버릴 줄 안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괴 로운 결과를 가져오는 줄 알아차리는 정지(正知) 기능은 육도에 윤회하 는 중생 가운데 인간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보리심을 내서 부처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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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는 것도 인간만이 가능하고 천상이나 수라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다음은 아수라입니다. 수라는 인간 위, 천상 밑에 있어서 천도 아니 고 사람도 아닌 비천비인이라고 합니다. 수라는 복이 많은데 싸움을 잘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수라장, 아수라장도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탱화 를 보면 큰 말을 타고 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 함경』에 의하면 수라는 탐진치 중에 화(瞋)가 많다고 합니다. 화를 참지 못해 싸움이 납니다. 삐끗하면 싸울 생각을 해서 제석천과 항상 싸우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세계로 치면 권력을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이나 독재 자 같은 부류입니다. 미사일 만들고 핵무기 만들고 하는 것을 보면 미국 의 네오콘 사람들도 혹시 수라 출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위는 천상인데 천상도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구사론』에 의하면 천 상은 지옥과는 달리 수명이 길어서 인간의 일생이 천상의 하루밖에 안 되니 인간을 하루살이로 본다고 합니다. 그들은 오래 살 뿐만 아니라 편 하고 즐겁답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아무리 잘 사는 사람도 먹고 씻고 생 활이 번거롭지만, 그곳에서는 생각만 해도 원하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이 게 먹고 싶구나 하면 저절로 먹게 되고 싶은 것이 앞에 온답니다. 향기도 나고, 입을 다시지 않고도 배가 부르고, 똥오줌도 안 누고 배가 싹 꺼집 니다. 옷도 무게가 없습니다. 탱화를 보면 천의, 하늘의 옷은 가볍게 표현 되지요. 그렇게 잘 살다가도 시간이 지나가면 별 볼 일 없어집니다. 우리 가 볼 때 천상의 수명이 길다는 것이지 그들의 느낌에는 인간이 100년 사 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의 단점은 복이 닳고 수명이 다하면 추 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옷이 낡아서 저절로 떨어져버리고 몸도 더 러워져서 콧물이 나오고 허리도 아프고 그렇답니다. 수명이 다하면 주로 인간세계에 떨어지는데 귀한 데 태어나기는 해도 복이 하나도 없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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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된다는 것입니다. 선행을 짓고 복을 받아서 존재하는 세계지만 여기도 복이 다하면 떨어지는 복진타락(福盡墮落)입니다. 타락이란 위에 있다가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높은 단계의 생각이나 업을 갖고 있다가 밑으로 뚝 떨어져버리는 것입니다. 인간과는 달리 그들에게는 잘못을 알아차리고 보리심을 내는 기능이 없기 때문에 받은 복을 누리기만 하다가 때가 되 면 타락합니다. 이것이 천상의 문제입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삼계 중에 서 밑의 세 가지는 악행으로 인해서 고통받는 세계이고, 위의 두 가지는 선행을 해서 즐거움을 누리는 세계이고, 가운데 있는 인간은 고통과 즐 거움이 반반인 가운데 보리심을 내서 성불하려는 세계입니다.
지금까지 욕계의 여섯 갈래, 육도윤회를 말씀드렸습니다. 부처님께서 는 이 육도윤회를 벗어나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윤회 가운데는 잠시 도 머물고 쉴 곳이 없습니다. 끝없이 변화하는 특성을 가졌기 때문입니 다. 천상에 가서 태어났더라도 결국은 복진타락하고, 지옥에서는 수없는 고통을 당하고, 인간으로 태어나 한 80년 살면서 고락을 겪고 결국에는 죽습니다. 가만히 따지고 보면 지금도 계속 죽고 살고 합니다. 우리 세포 가 죽고 살고, 생각이 죽고 살고, 그렇게 윤회의 수레바퀴가 계속 도는 데, 윤회를 벗어난 곳이 있고 벗어나는 길이 있습니다. 도로에 가다보면 나들목이 있듯이 윤회에도 나들목이 있습니다. 그것이 해탈법입니다. 윤 회를 벗어난 것이 니르바나이고 멸도이고 깨달음이라고 부처님께서 말 씀해놓으셨는데 윤회가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 니르바나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한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반복하는 것을 일념생사, 즉 한 생각의 윤회라고 합니다. 오늘 하루를 살고 내일을 살고 모레를 살아 가는 것도 하루하루의 윤회라고 합니다. 이런 것을 살펴보지 않고서 윤 회가 없다고 단견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윤리가 없다는 견해를 가진다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해탈법이 허구가 되고 대장경도 다 헛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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됩니다. 깊이 생각하면, 윤회가 모든 불교의 밑바탕이 되는 줄 알게 됩니다. 왜 냐하면 윤회를 반복하는 가운데서 일체중생을 건지기 위해 뛰어드는 이 를 보살이며 아라한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윤회하는 중생이 없다면 불 교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자발적으로 그 윤회의 흐름 속에 뛰어들어 중 생을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하겠다는 것이 보살의 서원이기도 합니다. 마 치 홍수가 나서 생명체가 떠내려오면 건지기 위해서 물에 뛰어드는 것과 똑같습니다. 물에 떠내려오는 생명체가 없다면 내가 거기에 들어갈 이유 가 없지 않겠습니까? 보디사트바의 철학은 지옥과 천상을 떠돌며 윤회 를 반복하는 중생을 건져주기 위한 데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서 성불하셨고, 윤회를 완벽하게 벗어나는 길을 알았고, 당신이 왔던 길 을 일체중생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윤회가 없으면 성불도 없고 보살도 없으니 윤회는 모든 부처님 가르침의 바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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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반복의 법칙(윤회의 방식)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가, 다른가? 일주일만 놓고 봐도 하루하 루 변화해 온 결과가 오늘의 나이고, 앞으로도 계속 변화해 갈 것입니다. 불교에서 윤회라고 할 때, 사람들은 변화 속에 있는 나를 어떤 영원한 실 체가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그 실체가 오늘과 내일과 모레로 또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의문을 갖습니다. 오늘은 무 엇이 윤회하고 어떤 방식으로 윤회하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불교는 2,600년 전에 이미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경전 속에 윤회에 관한 이야기가 다 있으니 공부를 더 해보면 이미 해결된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불필요한 의문을 갖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윤회라는 말은 부처님 이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습니다. 고대 인도에는 다양한 종교와 철학이 있 었는데, 그 중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이 브라흐만교이고 그 속에 윤회 설이 있었습니다. 브라흐만교는 기원전 1300년, 지금부터 3,300년 전에 지금의 이란 지역에 살던 아리안 족이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에 침략해서 세운 종교입니다. 브라흐만교에서 처음 생긴 경이 리그베다이고, 그다음 에 삼마베다, 야주르베다, 아타르바베다가 성립되었습니다. 4베다가 성 립되고 그다음 삼림서 시기를 거쳐 우파니샤드 경전이 기원전 800년에서 600년 사이에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태어나기 직전까지 범아일 여(梵我一如)를 주장하는 이 철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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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흐만이라는 창조주가 있고 그 창조주에 의해서 모든 것이 창조되었 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경우, 브라흐만신의 머리로부터 태어나면 바 라문이고, 옆구리로 태어나면 왕족이고, 배꼽으로 태어나면 평민이며, 발 바닥으로 태어나면 천민입니다. 제사장, 왕족, 평민, 천민이 브라흐만교 의 4계급 제도인데, 각각의 계급 안에도 많은 차별이 존재합니다. 왕족도 왼쪽 옆구리로 태어나면 서자가 되고,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나면 적자가 된다는 식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되는지, 창조주 브라흐만과 사람은 어떤 관계 에 있는지, 4계급은 어떻게 생겼는지, 이 문제를 브라흐만교는 이렇게 설 명했습니다. 영원한 브라흐만이 있는데 거기서 무언가가 떨어져 나왔다, 영원한 것에서 떨어져 나왔으니 그것도 영원하다, 그것을 ‘아트만’이라 불렀습니다. 그것을 중국의 역승(譯僧)들이 ‘아(我)’, 또는 신아(神我)라 고 번역했습니다. 사람에게 불변의 영혼이 있어서 이것이 보고 듣고 생각 하고, 눈, 귀, 코 등의 몸은 이 아트만을 둘러싸고 있는 허구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파니샤드 시절에는 브라흐만과 아트만은 같은 것이라는 ‘범아일여(梵我一如)’를 주장하고 이 사상에 의해서 수행방법 론을 전개했습니다. 아트만이 브라흐만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사람이 되었다면, 이 몸이 만들어진 자체가 죄악이고 수행을 통해 정화해야 된 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고행과 선정, 두 가지 수행 방법입 니다. 고행을 얼마나 하는가 하면, 그야말로 죽도록 합니다. 부처님도 6 년 동안이나 고행을 하셨습니다. 부처님 고행상을 보면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고행을 하거나 아니면 선을 깊숙이 닦습니 다.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깊은 선정, 예컨대 비상비비상 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 드는 것입니다. 상(想)은 생각이니까 비상은 생 각이 없는 상태이고, 비비상이라 했으니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상태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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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니까 생각이 있는 상태인지 없는 상태인지 모를 정도로 선정에 들어서 호흡을 한 시간에 몇 번밖에 안 한다던지 하면, 거의 뇌사 비슷한 상태가 될 것 아니겠습니까? 고행과 선정을 통해서 거의 죽음의 상태에 이르면 해탈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브라흐만에서 떨어져 나온 아 트만은 각각의 업에 따라 윤회하는데 고행이나 선정을 통해 더러운 이 몸을 정화하면 브라흐만 천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 그들의 윤 회사상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런 윤회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윤회가 없다는 얘 기지 윤회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깊이 공부하지 않 고 윤회가 없다고 자꾸 혼란을 일으키는 얘기들을 하는데 잘못된 생각 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브라흐만교의 윤회설을 타파하고 윤회를 완전히 다르게 설명하셨습니다. 2,600년 전에 이미 논파된 내용이 많은 경론에 다 나와 있으니 따로 비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윤회하는 가? 부처님 말씀처럼 사람의 몸과 의식을 가지고 설명해보겠습니다. 우 리에게는 감각기관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눈이 가장 많은 정 보를 받아들입니다. 눈을 뜨면 저 멀리까지 한눈에 보입니다. 그 다음에 귀가 있어서 소리를 듣습니다. 귀는 항상 열려있고 어느 정도 멀리까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목(耳目)을 집중한다’는 얘기는 거의 눈과 귀로 80~90%의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냄새를 맡는 코는 그보 다 범위가 작아서 가까이서 나는 냄새만 맡을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맛 을 보는 혀와 촉감을 하는 피부는 몸에 닿아야 느낄 수 있습니다. 눈· 귀·코·혀·몸, 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전5근(前五根)이라고 하는데 이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외부를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생물학으로 설명하자면, 우리 몸의 진화과정에서 처음 단세 포 생물이 다세포가 되면서 세포와 세포 사이를 연결해주는 것이 생겼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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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이것을 신경세포라 하는데 망의 형태로 몸의 곳곳에 연결되어 있습 니다. 단순한 동작도 신경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걸 어 다니려면 다리가 길게 나와 있어야 하고 다리는 척추와 연결되어 있어 야 합니다. 척추 부근의 터미널이 다리 신경과 연결되었습니다. 인간이 직 립을 해서 걷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뇌가 명령을 해야 설 수 있고 걸을 수 있습니다. 지금의 인류 호모사피엔스는 20만 년 전도 지금과 크 게 다름이 없었습니다. 대뇌가 발달하면서부터 감각을 통해 들어온 정보 를 취합하게 되는데 그것이 안·이·비·설·신·의 6근 중에 ‘의(意)’ 입니다. 의는 전5근에서 받아들인 시각 자료나 청각 자료 등을 통합하고 정리합니다. 눈으로 바깥에 있는 사물을 보면 신경에 의해서 뇌에 전달되 는데 뇌에는 그 정보를 처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은 시각 자료를 컬러로 처리할 수 있고 다른 동물 중에는 컬러 처리가 안 되는 경우도 많 습니다. 카메라를 보면 영상을 보관하듯이 대뇌의 주름 부위가 기억을 담당한다고 합니다.
눈은 왜 생겼으며 무엇을 보기 위해 생겼고 어떻게 해서 볼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눈은 빛을 보기 위해 있습니다. 빛이 없으면 눈은 생기지 않 았을 것입니다. 석회동굴 속에서만 살아온 어떤 생명체는 눈이 퇴화했습 니다. 이렇듯 눈은 빛을 보기 위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눈만으로는 세 상의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소리라는 파장을 받기 위해 안테나를 두 개 붙여놓은 것이 귀입니다. 눈은 빛이 강할 때 닫으려고 눈 꺼풀을 만들어놨고 귀는 충격에 괜찮으니까 열어놨습니다. 코는 냄새를 맡아야 되는데 대부분의 냄새는 밑에서 위로 올라옵니다. 그래서 콧구멍 은 밑으로 뚫려있습니다. 혀는 맛을 보는데 여러 가지 맛을 느끼라고 영 역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피부는 춥고, 덥고, 부드럽고, 껄끄러운 갖가지 촉감을 받아들입니다. 다섯 가지 감관이 바깥의 다섯 가지 대상을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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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면 뇌의 의식이 그 대상들을 컴퓨터처럼 통합해서 처리합니다. 빨간 색을 보았거나 밥 냄새를 맡았다면 안에서 빨간색, 밥, 이런 식으로 분류 하여 정리하는 것입니다. 5근이 받아들인 자료를 처리하는 것이 의(意) 고, 의에 의해 처리된 것을 법(法)이라고 합니다. 색·성·향·미·촉· 법의 그 법을 말합니다.
이제 의식이 대상을 처리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어떤 것은 좋아하고 어 떤 것은 싫어합니다. 그것은 ‘나’라는 주관적 의식이 발생하면서 그렇습 니다. 자의식은 본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고 대뇌에 의해서 일어난 착각입 니다. 서양 사람들은 자아를 개발하고 강화시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 재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개발하고 강화한단 말입니까? 착각입니다. 의 식이 생기고 ‘아(我)’가 생기는 것까지를 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 가 생기고 나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정보처리를 나 위주로 하기 시작합니 다. 나한테 좋은 것, 나한테 나쁜 것을 구분합니다. 친구 사귈 때도 여기 서부터 시작합니다. ‘저 친구가 참 잘해주더라.’ 하면 좋고, ‘저 친구가 내 돈 떼먹었지.’ 하면 싫습니다. 싫고 좋은 것이 나라는 착각으로부터 일 어나고 내가 있다고 집착합니다. 있는 것을 집착하는 건 괜찮지만 없는 것을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그것을 전도몽상이라 합니다. 뒤집어진 생 각, 꿈과 같은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여기 성냥이 있습니다. 지금은 불이 없습니다. 성냥을 그으면 불이 일어납니다. 훅 불어서 끄면 불이 없어집 니다. 불은 유황, 성냥개비, 내가 일으키고자 하는 생각, 이렇게 인연에 따 라 발생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도 그렇습니다. ‘나’라는 것도 인연 에 따라 발생한 것입니다. 인연 따라 생겼다가 잠시 머물다 없어지는 것 이 아니라 영원한 나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죽어서 화장한 다음 재를 휘적휘적하여 그 ‘나’를 찾아보면 찾아지겠습 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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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착각에서 문제가 비롯되고 이것을 자각하면 윤회의 업으로 부터 벗어날 길이 열립니다. 중생은 내가 있다는 착각 때문에 나에게 좋 은 것은 자꾸 하려고 하고 나에게 안 좋은 것은 자꾸 피하려고 합니다. 이 렇게 반복하다 보면 가속이 붙고 파워가 생기는데 그것을 까르마, 업력 이라고 합니다. 20~30km로 달릴 때와 가속이 붙어서 100km로 달릴 때 와는 힘이 달라집니다. 중생은 업을 가속시키면서 살아갑니다. 술도 처음 에는 한 잔 마시다가 좀 있으면 두 잔 마시고 몇 년 지나면 몇 병으로 늘 어납니다. 도수가 약한 술은 맛없다고 갈수록 센 술을 찾다가 결국에는 알코올에 중독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좋은 쪽이든 싫은 쪽이든 다 가 속이 붙습니다. 싫은 것을 반복하게 되는 것도 자꾸 싫은 마음을 내서 그 렇습니다. 결국은 자기가 만든 업에 의해서 그렇게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감관을 통해 들어온 외부 경계를 색, 밥 냄새 등으로 파악하는 것 이 제6의식의 기능이었다면, 내 위주로 좋고 싫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따로 분리해서 제7식, 마나스(manas)라고 하는데, 이 식 때문에 우리는 싫어하고 좋아하고를 반복하면서 살아갑니다. 싸움을 하는 것도 나에게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친했던 사람이 원수가 되고 가장 원수 같던 사람과 한 편이 되기도 합니다. 은원관계가 전부 나로부터 발 생한다는 얘기입니다. ‘나’가 원래 있는 것이라면 없애지 못하겠지만 착 각해서 일으킨 것임을 알면 평정심을 찾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도를 닦는 것이니 공성을 보고 무아를 알게 됩니다.
‘나’라는 착각에 의해서 좋고 싫은 마음이 일어나고 그것을 반복하는 업이 힘을 형성합니다. 사라지지 않은 이 업이 어딘가에 있지 않겠습니 까? 불교에서는 업을 담아두는 장소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아뢰야 식’, ‘장식(藏識)’, 즉 저장식이라고 했습니다. 서양심리학에서는 근대에 들어와서야 무의식이라는 말을 쓰는데 불교에서는 이 ‘장식’이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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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사용한 것이 2,300년 전입니다. ‘장식’ 안에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사 이에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좋아하고 싫어했던 모든 것들이 기억되 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에 ‘정신적 DNA’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그러면 이 ‘장식’이 영원한 ‘나’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몸의 DNA가 생 물학적으로 영원성을 갖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DNA가 영원성을 갖고 있다면 엄마DNA와 아빠 DNA를 같이 받아서 자식이 나올 수가 없 습니다. 영원불변한 것이 어떻게 다른 것과 합할 수가 있겠습니까? 정신 적 DNA인 ‘장식’에는 내가 반복해왔던 여러 가지 습(習)이 저장되어 있 습니다. 습관이 사람을 만듭니다. 도둑의 습으로 나아가면 도둑이 되고 수행의 습으로 나아가면 부처가 됩니다. 그래서 티베트 사람들은 수행을 수습(修習)이라고 합니다. 습관을 바꾸고 업을 바꿔서 중생의 업에서 보 살의 업으로 바꿔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이 정신적 DNA는 에너지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의학에서는 심폐기능 이 정지되면 사람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심폐기능이 정지되었다고 해서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닙니다. 다 살아있진 않아도 부분적으로 가슴 을 중심으로, 뇌를 중심으로 살아있습니다. 이때 마지막까지 살아있는 것이 무의식을 담당하는 부분입니다. 심지어는 한 3~4시간 살아있기도 합니다. 티베트에서 수행을 오래 하신 분들은 뚝담(thugs dam)이라고 해 서 약 한 달이나 보름 정도, 뇌파는 나오는데 몸의 기능은 모두 정지된 상태입니다. 지금도 뚝담에 드신 분들이 종종 나옵니다. 우리나라의 경 우, 기록에 확실히 남아 계신 분은 보조국사 지눌 스님입니다. 마지막 설 법을 하시고 7일 동안 뚝담에 들어서 앉은 채 그대로 계셨습니다. 수염 도 나고 그대로 썩지 않고 살아있는 듯이 계셨습니다. 인도의 남부에는 매우 고온다습한 기후에도 한 달 동안 뚝담에 드신 분들이 계십니다. 마 지막에 무의식인 ‘장식’이 빠져나가지 않은 상태여서 뇌의 그 부분은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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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있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가서 측정을 해보면 미세한 뇌파가 작동합 니다. 우리가 죽었을 때 그 의식이 최종적으로 빠져나옵니다. 빠져나와 있는 상태를 바르도, 즉 중음(中陰)이라고 하는데 다음 생을 받기 전까 지의 중간상태입니다. 늦더라도 49일 정도에서 다음 생으로 윤회를 합니 다. 물론 극선극악은 돌아가시는 순간에 바로 윤회가 이루어진다고 했 습니다만, 보통은 49일 안에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49재를 지내는 것입 니다. 불보살님에게 공양 올려서 바르도 상태에 계신 분들이 좋은 곳으 로 천혼되기를 기원하는 의식입니다. 의식만 하는 게 아니라 돌아가신 영 가에게 실제로 법문을 해주는 것입니다.
이 바르도 상태의 정신적 DNA가 업의 에너지를 담고 있는데 아직 과 학으로 증명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저는 증명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 습니다. 지금처럼 과학이 발달된 시대에는 망원경으로 백억 광년 바깥에 서 오는 빛을 측정하고 현미경으로 생명체의 미세한 단위까지 볼 수 있 습니다. 이 뛰어난 기술로 우리의 정신적 DNA를 측정하는 데 그렇게 오 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 다. 윤회를 경험한 보살들의 이야기가 이미 경론에 나와 있습니다. 수행 에 깊게 들어간 보살은 그 정신적 DNA를 통해 다음 생에 윤회할 위치까 지 선별해서 태어납니다. 전생을 기억하여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날 경 우에 그 정신적 DNA가 부모를 선택합니다.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본인이 부모를 선택해서 들어갔다고 증언합니다. 그 부모가 착하거나 수행하기 알맞은 부모라서 선택했다는 사례가 있습니다. 부모 의 태속에 들어갔을 때, 난자와 정자가 합류해서 줄기세포로 발현될 때 거기에 에너지 충격이 있는데 그것이 실제로 이 정신적 DNA인 ‘장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서 줄기세포를 깨울 때 전생에너지대 로 깨우고 사라집니다. 마치 빅뱅이 일어났을 때 힉스 입자가 물질의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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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을 주는 것과 같이 이 정신적 DNA가 우리 몸의 줄기세포를 업의 힘에 따라 깨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생의 굵은 업들이 그대로 연결됩니다. 그것이 아트만이 아니냐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깨우고 사라져 영원 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금강경』에서 보리심을 낸 자는 어떻게 마음을 먹고 어떻게 마음을 항 복받아야 하느냐고 수보리가 묻자, 부처님께서 아상(我相)이 있으면 보 살이 아니라고 대답하십니다. 불교는 무아를 얘기합니다. ‘영원한 나’라 는 것은 없고 윤회하는 과정 속에서 업이 다음으로 전달될 뿐입니다.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이어진다는 뜻에서 이것을 상속(相續)이라고 합니다. 브라흐만교에서는 영원한 창조신이 있어서 아트만이 거기서 떨어져 나 오고, 영원한 것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아트만도 영원하다고 보았습 니다. 불교의 스님들은, 영원한 것이라면 애초에 어떻게 떨어져 나왔느 냐, 영원한 것이라면 어떻게 다시 가서 붙느냐,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것 이라면 영원하다고 할 수 있느냐, 이렇게 범아일여 사상을 비판했습니다. 영원과 윤회는 관계가 없습니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변화하고 흩어지 고 모이는 연기법 속에 윤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생의 나와 이생의 나는 똑같은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 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100% 다른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업이 상속되기 때문입니다. 전생의 내가 그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윤회가 아니라 업이 이어지는 것이 윤회입니다. 그래서 보살은 다음 생에 가서도 중생을 위 하는 큰 업을 이어 나가겠다고 보리심을 내는 것입니다.
『아함경』에서 “5온, 12처, 18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일체법을 깊이 관찰하시고 무아와 공성을 통찰해서 내린 결론입니다. 여기에 영원한 나 같은 것은 없습니다. 5온, 12처, 18계 를 통해 감각하고 의식한 것들이 번뇌를 일으키고 그로 인해 업을 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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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쌓여서 윤회하는 존재가 중생입니다. 윤회를 끊으면 그것이 열반 입니다. 열반에는 유여열반, 무여열반, 무주처열반이 있습니다. 번뇌를 끊 었으나 몸이 아직 남아있는 상태, 몸까지 없어진 상태,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상태로 나눠집니다. 의식적으로 번뇌를 끊은 분을 아라한이라고 하 고, 윤회를 이용해서 중생을 건지는 분을 보살이라고 하고, 그 단계를 넘 어서서 완전히 윤회를 다 끊은 분을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열반 을 깊이 있게 생각하면 수행의 단계도 알 수 있고 불교의 윤회가 어떤 것 인지를 깊이 사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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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원인과 조건, 그리고 결과(인과법)
부처님 말씀처럼 세상은 고해입니다. 세속의 모든 것이 무상해서 잠시 도 머물지 않는 가운데 우리의 삶은 항상 괴로움과 즐거움이 교차합니 다. 오늘은 불법 가운데 매우 중요한 인과법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과법을 모르면 불법의 원리를 모르는 것이라서 수행 방법도 모르게 됩 니다. 인과는 불법의 원리일 뿐 아니라 세속법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인 과를 믿건 믿지 않건 간에, 대다수의 국가 헌법이나 법률은 인과법을 기 초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인과법을 부정하면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 아서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운 모습이 될 것입니다. 사회법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농사짓는 사람이 콩을 심어놓고 팥을 구한다든지 고구마를 심 어놓고 감자를 구한다면 성립이 될 수가 없습니다.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것이 정해진 이치이고 인과의 법칙입니다. 인과법 은 우리 생활 속에서 발견되는 바른 법입니다. 사실이냐 아니냐를 판단 하는 팩트 체크도 인과관계를 따지는 데서 시작합니다. 과학은 처음부터 인과법칙에 근거를 둡니다. H₂O, 물의 분자구조는 수소 두 개와 산소 하 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수소 두 개와 산소 하나가 합해진 것이 원인이 되어 물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수소가 하나이거나 산소가 두 개면 물이 안 됩니다. 아무리 빌고 빌어도 이 구성이 아니면 물이 되지 않 습니다. 이것은 수학 공식과 같아서 1+1=3이 된다면 세상은 온통 혼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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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것입니다.
불교 안에서 인과를 깊이 사유하지 않거나 인과를 무시하고 생활한다 면 그 사람은 불자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시에 성행하던 잘못된 인 과론을 비판하면서 정확한 인과론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인과 론이란, 예컨대 원인을 엉뚱한 데로 돌리거나 인과가 아예 없다고 주장 하는 외도의 논리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이런 외도들이 너무 많아서 간단 하게는 6사외도, 복잡하게는 62견이나 96종 외도로 분류합니다. 그 중에 자재천을 믿는 사람들은 중생의 모든 고락이 창조주인 자재천에 달려있 다고 보았습니다. 자재천이 기쁘면 육도중생이 즐겁고 자재천이 화가 나 면 육도중생이 괴롭다는 식으로 설명했습니다. 인과를 부정하는 외도들 은 다음 생의 과를 알 수 없고, 따라서 현생의 무엇이 원인인지도 알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자재천을 믿는 사람들은 고통을 줄이고 복 을 받기 위해 자재천에 비는 쪽을 택했고, 인과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두 려움 없이 마음대로 사는 쪽을 택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앞의 것을 사인 사과(邪因邪果), 뒤의 것을 무인무과(無因無果)라 비판하고, 세상의 모든 고락은 내가 지어서 내가 받는 자작자수(自作自受)라고 합니다.
내가 짓지 않은 복이 오기를 신께 빌어서 기대한다면 그건 불가능한 일 입니다. 창조주의 뜻이라면 바람이 부는 것도, 중생이 죽고 사는 것도, 바이러스가 온 것도 다 창조주의 뜻대로 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또 원인도 없고 결 과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부처님 당시 앙굴리마라의 스 승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의 위험한 사상이 앙굴리마라가 999명을 죽 이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유물론이 주류를 이루었던 서양의 근대에도 공산주의 국가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서운 일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지금도 핵무기를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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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시험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들은 정상적인 국가도 아니고 매우 위 험한 집단입니다. 인과법을 제대로 알지 않으면 무지 속에 살거나 위험한 존재가 됩니다. 잘못된 철학을 가지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불자들 중에도 이렇게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가서 빌면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고 기도처를 찾아가는 사람을 종종 보는데 누가 들어준다는 말입니까? 들어줄 대상도 없고, 부처님도 그렇게 해주지 않 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너희가 좋은 인과를 짓게 하는 가르침을 내가 줄 수는 있어도 너희가 지은 인과를 내가 어떻게 바꿔주거나 과보를 대신 받 아줄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집에 가서 실험을 해 보십시오. 콩을 심어놓고 팥이 나오기를 기도하는 겁니다. 만약 팥이 나 오면 부처님 말씀이 틀렸다고 하겠습니다. 기도를 들어주는 존재는 없습 니다. 기도의 목적은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이고, 기도의 가피란 그 다짐대로 행동하여 결과가 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기도를 해서 뭔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는 얘기입니다. 기복을 목 적으로 기도를 하느니 그냥 집에서 노는 게 훨씬 낫습니다. 그 안에는 종 교를 가지고 돈을 주고받는 부패의 고리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기복은 어두운 무명의 생각입니다. 인과법을 알고 내 정신을 밝혀서 바른 원인을 짓고 바른 조건을 주어서 바른 결과가 올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인과’라는 말을 쓸 때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들어있습니 다. ‘저 사람이 무슨 잘못을 했으니까 저런 과보를 받았겠지.’ 하면서 남 잘못되었을 때 비난하거나 핀잔하는 말로 쓰고 있습니다. 인과라는 말이 제대로 쓰이지 않고 오염되었습니다만, 원래 뜻은 이렇습니다. 인과는 인·연·과의 줄임말로, 원인과 조건과 결과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인+ 연=과’, 이것은 수학의 공식입니다. 수학에서 ‘1+1=2’라 할 때, 앞의 ‘1’ 은 원인이고 ‘+1’은 조건이고 ‘=2’는 결과입니다. 인, 연, 과 세 가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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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상 줄여서 인과라고 합니다. 인과법을 계산할 때, 원인+조건=결과도 있고 원인-조건=결과도 있습니다. 원인에 가해지는 조건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만약 내가 남을 도우려는 마음을 먹은 것이 원인이 되었는 데 거기에 선행이라는 조건이 더해졌다면 결과가 행복으로 다가옵니다. 만약 악행을 한 것이 원인이 되었어도 거기에 악행이 더 진행되지 않을 조건을 주면 불행의 결과가 적게 옵니다. 폭력을 휘둘러서 재판을 받다 가 법정에서도 폭력을 저지르면 괘씸죄까지 더해 벌을 곱으로 받습니다. 원인을 어떻게 짓고 어떤 조건을 더해야 행복해질 것인가, 어떤 원인에 어 떻게 마이너스를 해야 불행이 덜할 것인가, 인과법을 항상 생각하고 살 아야 행복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인과법을 이렇게 오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으면 반드시 그대로 받 는다는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콩 심은 데서 콩이 난다는 의 미로는 맞지만, 콩 심어놓고 물도 안 주고 보살피지 않으면 콩이라는 결 과가 안 나올 수도 있습니다. 원인+조건=결과의 법칙에서 조건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선악의 인과도 그렇습니다. 악행을 저질렀 어도 참회를 하고 그 일을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고 하면 줄어들 것이고, 악행에 악행을 거듭한다면 더 큰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선행을 해놓고 그다음에 악행을 한다면 마이너스가 되어 선행이 빛을 발하지 못할 것이 고, 선행에 선행을 보태면 더 좋은 결과가 올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과법 은 100% 지은 대로 받는다고 하지만, 내가 현재 어떻게 사고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집니다. 원인에 따라 틀림없이 그 결과 의 파장이 오긴 하지만, 그러나 작은 파장으로 없앨 것이냐 큰 파장으로 더 큰 파도를 만들 것이냐는 지금 내가 하는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 입니다. 전생에 살생을 했더라도 지금 살생하지 않고 다른 생명을 도와 주며 착하게 살면 그 살생의 과보가 많이 줄어들겠지만, 전생에 살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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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고 이생에 또 살생을 계속한다면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인 과론은 수행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세속의 법에도 적용됩니다. 근대 시민법인 헌법과 형법 등도 다 인과론에 근거합니다. 어떤 사람이 내 돈 을 안 빌려갔는데 내가 내놓으라고 법에 호소할 수가 없습니다. 저 사람 이 내 돈을 빌려가서 갚지 않으면 법에 호소해서 받아냅니다. 전부 인과 법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가 인과법 속에 살면서 인과의 원리를 모른다면 사회적인 문제가 많이 발생할 것입니다.
인과에는 시간성이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인과를 삼세 의 인과라고 합니다. 과거에 살면서 했던 것들이 원인이 되어 현재의 삶 이 되고 현재에 짓는 것들이 원인이 되어 미래에 결과로 올 것입니다. 그 렇게 계속 반복되는 것이 삼세인과입니다. 과거에 크게 잘못된 인과를 지 었다면, 예컨대 탐욕, 분노, 시기, 질투심, 어리석은 생각으로 일생을 살았 다면 사람과 같은 삼선도에는 태어나지 못하고 삼악도에 태어나게 될 것 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앞의 생에 지은 업이 진행되는 것이 지금 의 생입니다. 지금 내가 받고 있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전생에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기후를 전공한 사람들이 천 년 된 나무 안의 표본을 떼어 보고 900년 전에 여기 불이 났었구나, 800년 전에 홍 수가 났었구나, 700년 전에는 산소 농도가 어느 정도였겠구나, 알았다고 합니다. 나이테 속에 정보가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지금 사는 이 결과를 놓고 보면 전생에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지금 가난하다면 전생에 인색했던 것이 원인입니다. 남 에게 주는 바가 없었다면 이생에 자연스럽게 남이 나를 도와줄 조건이 안 생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장사를 해도 안 되고 직장을 구하기도 힘 이 듭니다. 그 사람과 과거에 인연 있었던 사람이라면 인색한 사람을 자 기 직원으로 뽑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에게 도움을 안 준 사람에게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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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을 주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지금 가난하다면 그 원인이 인색함 으로부터 시작됐고 베풀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리고 지금 또 인색함을 반복한다면 가난의 씨앗을 점점 키우기 때문에 다음 생에는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과는 막연하게 오는 것이 아니라 맥락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인색 한 과보는 가난으로 오고, 살생한 과보는 죽거나 아주 심한 병으로 옵니 다. 도둑질한 과보는 끊임없이 의심을 일으키게 하고, 도둑질 당한 사람 들이 자꾸 내 것을 가져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듭니다. 전부 자작자수 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 니다. 과거의 삶을 보려고 한다면 지금 그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 고,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려면 지금 그대가 살고 있는 모습을 보 라고 했습니다. 신통력이 생기고 천안이 열려서 전생을 들여다보라는 것 이 아닙니다. 지금 사는 꼴이 엉망인데 앞으로 더 나아지기를 기도한다 면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과에 관한 부처님 말씀은 비과학적인 주 장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심성을 거듭 안 좋게 쓰는 경우 는, 전에 안 좋게 쓴 결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어 좋은 마음을 쓸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심성 이 별로 좋지 않던데 지금 어떻게 부자가 된 것입니까? 그전에는 남에게 베풀었는데 지금은 무슨 이유로든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전생의 과를 받아서 돈이 많기는 한데, 지금 인색하게 살아서 다음 생은 어려워 질 것입니다. 이것이 도덕적 인과론인데, 도덕적 인과론은 마음이 바탕이 됩니다. 내가 베풀지 않았을 때는 상대가 나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습 니다. 오랜 생을 같은 인연 속에서 살게 될 상대가 나를 도울 리가 없습 니다. 그러면 같이 가난해집니다. 만약에 내가 살생을 저질렀다면 상대의 마음이 심하게 다칠 것입니다. 마음 다친 사람이 나를 도와줄 리가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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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도 나를 다치게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원리를 깊이 생각하 면 절대 함부로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이것을 자각할 수 있 는 것도 역시 육도중생 가운데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돌멩이나 나무 같은 것에도 인과가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결과가 나타나는 원리는 같습니다만, 마 음이 개입할 때는 인과법이라 하고 무기물의 경우는 연기법이라고 합니 다. 유정과 무정에 다 통하는 것이 연기법이고 그 중에 유정의 마음이 작 동해서 도덕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인과법입니다. 물론 연기의 반 복되는 흐름 또한 인과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좋은 마음을 일으켜 선행 을 해서 즐거운 과보를 받는 것과 수소와 산소가 결합해서 물이라는 결 과가 나왔다는 것을 구분해서 씁니다. 연기법에 대한 설명은 『아함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함으로 저것도 멸한다.” 연기법의 기본 공식입니다. 수소와 산소가 있으므로 물 이 있고 수소와 산소가 없어지므로 물이 없어진다는, 1+1=2와 같은 공 식입니다. 학교 다닐 때 수학 공식 외우듯이 불자들은 기본적으로 이것 을 머릿속에 넣고 있어야 합니다.
인과법도 연기법 안에 있는 것입니다. 불자들이 이 법을 정확하게 이해 하고 깊이 사유한다면 절대로 불행한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혹 여 전생에 몰라서 지은 것이 있다면 지금 살펴보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천안통이 다 열려서 알았지만 우리는 유추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비량(比量)이라고 합니다. 산 너머에 올라오는 연기를 보고 그 밑에 불난 줄 아는 능력입니다. 불은 직접 못 봤지만, 전생에 내가 지은 업은 못 봤 지만, 이생에 온 결과를 보니까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과의 원리를 생 각할 줄 알면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절에 다니면서 열심 히 기도하는데 왜 우리 집에 문제가 생겼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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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전능한 부처님께서 왜 복을 안 주고 벌을 줬을까, 부지런히 등도 켜 고 촛불도 켜고 인등도 켜고 다 했는데 왜 나에게는 이런 결과가 왔을 까?” 평소에 많이 듣는 얘기입니다. 어느 노보살님이 오셔서 “스님, 이 절에 40년 다녔는데 우리 애가 왜 아플까요?” 하십니다. 내가 뭐라고 대답을 하겠습니까? “저는 절에 50년 가까이 살아도 아픕니다.”라고 했습니다.
인과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을 낸 것이 원인이 되고 거기에 말과 행동이라는 조건이 붙어서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생 각을 갖고 사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부처님께서는 팔정도를 말씀하 시면서 첫 번째로 정견을 꼽으셨습니다. 바른 견해, 그 중에 중요한 내용 이 인과에 대해 정확하게 알라는 것입니다. 불자는 부처님의 제자라는 말 이고 깨어있는 정신을 뜻합니다. 인과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깨어있 는 정신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불자라고 말하면서 인과법을 믿지 않는 다면, 자신은 불자의 테두리 안에 들었다 생각하지만 그는 불자가 아닙 니다. 깨어있는 사람의 제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과법을 삼세인과론, 도덕적 인과론, 연기론 등 학문적인 말로 다양 하게 표현하지만 같은 내용입니다. 원칙은 같은데, 마음이 있는 생명체에 적용할 때는 도덕적 인과론이라 하며 육도윤회의 세계를 도덕적 인과론 에 의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일으킨 생각이, 내가 지금 한 말이, 내가 지금 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는가? 언제나 이것을 사유하 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자꾸 문제가 생깁니다. 인과론을 정확하게 알면 이것을 바탕으로 바로 알아차리는 정지(正知) 기능이 생깁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면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선한 생각을 하고 선한 말을 하고 선한 행동을 하면 행복한 결과가 오고, 악한 생각을 하고 악한 말 을 하고 악한 행동을 하면 괴로운 결과가 옵니다. 당장 집에 가서 실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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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습니다. 가족에게 한 번 성질 내보십시오. 대번에 안 좋은 말이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적 인과론을 아무 데나 적용할 수는 없습 니다. 예를 들어 코로나 같은 경우도 도덕적 인과론으로 해석하여 내가 뭘 잘못해서 바이러스가 오냐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이러스는 도덕적 이지 않습니다. 마스크 쓰고, 손 씻기 하고, 거리 두기로 차단할 수 있다 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입니다. 걸릴 조건을 만들어주면 걸릴 가 능성이 높아지고 걸릴 조건을 멀리하면 차단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이것 이 인과법이고 과학입니다. 원인과 조건과 결과를 가지고 생각한다면 코 로나로 인한 피해도 많이 줄일 수 있습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부처님께 서 바이러스를 제어해 주시리라는 잘못된 믿음입니다. 지금 부처님이 계 신다면, 당시에 그러셨듯이 위생법을 철저히 지키라고 하실 것입니다. 원 인과 조건과 결과의 법, 이것을 염두하고 수행하셔야 합니다. 부처님도 결국은 보리심이라는 원인과 육바라밀을 실행한 조건으로 성불이라는 결과가 온 것이지, 갑자기 뚝딱 성불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아시 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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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부처님 가르침의 윤리
우리가 부처님께서 남겨주신 법을 통해 만난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부처님과 우리 사이에는 2,600년이라는 시간과, 인도와 한국이라는 공 간의 차이가 있지만 법은 시공간의 거리를 단박에 뛰어넘는 힘이 있습니 다. 모든 경의 처음은 “여시아문 일시불재……”로 시작합니다. ‘나는 이 렇게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 어디어디에 계셨다.’ 여기서 ‘한때’는 몇 년, 몇 월, 몇 일이라는 시간적 의미가 아니고 부처님과 청중이 만난 ‘그 때’를 뜻합니다. 법의 문이 열리면서 많은 제자들이 그 정신세계에 들어 서 깨치고 니르바나에 이르렀던 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 이나 같은 법이니,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을 알면 우리도 똑같이 될 수 있습니다. 시공을 뛰어넘는 이 법에 들어가는 문에서 만난 지금을 소중 하게 생각하고 반갑게 맞아야 하겠습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지금 잘하고 있는가, 잘못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 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불교에는 인과법에 기초한 계율이 있고 세속 에는 헌법이 있습니다. 아무리 헐렁한 국가라도 헌법이 있어서 나라마다 ‘우리는 이런 정신으로 살겠습니다.’라고 합의해서 만들어 놓았습니다. 5,200만이 사는 우리나라도 그렇습니다. 개헌을 할 때도 반드시 사회적 합의를 거쳐야 합니다.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가 찬성하고 대통령이 제 안하고 국민투표에 붙여서 찬성을 얻어내야 합니다. 첫 번째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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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민주공화국이다.”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공화정이라는 뜻입니다. 이 틀은 새로운 합의로 다른 제도가 나오기 전까지는 깨지지 않습니다. 지 금 전 세계에 헌법 없이 대충 살자는 나라는 없습니다. 힌두교가 대세인 인도의 경우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고 1947년에 헌법을 만들었습니 다. 그때 법무부 장관이 암베드카르였는데 힌두교 사상으로 만들지 않 고 보편적으로 통하는 인과법을 기반으로 만들었습니다. 힌두교 사상으 로 만들자면 카스트 제도를 인정해야 하고, 따라서 계급이 낮은 사람들 은 당하고 살아도 법에 호소할 수 없을 것이니, 그래서야 국가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힌두교 국가이면서도 인과법을 적용해서 헌법을 만들었습 니다. 지금도 법이 미비하여 인권이 지켜지지 않는 나라가 있기는 하지만 전 세계의 거의 대다수가 인과법을 기초로 법이 제정되었습니다.
불법에도 기본 틀이 있습니다. 성불하는 데 도움이 되고 일체중생에게 도움이 되는 기본 윤리관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보편적인 인과법을 바탕으로 남과 내가 같이 행복해질 수 있는 율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 내용이 율장에 담겨 있는데, 모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 아무 도 손을 못 댑니다. 요즘에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한 스님이 계율을 바 꿔야 한다고 하는데 잘못된 발언입니다. 율장은 역사 이래로 2,600년 동 안 아무도 내용을 바꾼 적이 없고 바꾸려고 시도해 본 적도 없습니다. 왜 냐하면 부처님께서 중생에게 이익이 되라고 해놓은 말씀이고 예나 지금 이나 맞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2,600년 전에도 살생하지 말라, 지금도 살인하지 말라,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불자들이 기본적으로 가져야 될 규칙들이라서 달라이 라마께서도 계는 바꿀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청규 를 계로 착각해서 바꿀 수 있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청규는 바꿀 수 있습니다. 지역이나 문화 풍토에 따라 합리적인 방식으로 바꿀 수 있 습니다. 유명한 『백장청규』라는 게 있는데 중국 당나라 선원에서 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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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약입니다.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해서 당시 대중 생활에 맞게 만들었는 데 청규는 대중의 합의에 따라 만들 수도 있고 고칠 수도 있고 폐지할 수 도 있지만 부처님이 제정한 계는 절대 바꾸거나 함부로 해석해서도 안 됩 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 가지로 분류하여 결집해 놓은 것이 경율론 삼장 입니다. 경장에는 주로 교리와 수행에 관한 말씀이 담겨 있고, 율장에는 함께 살면서 지켜야 할 도덕적인 내용이 담겨 있고, 논장에는 법에 대한 철학적인 논의들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이 중에서 율장에 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느 사회건, 어느 집단이건 도덕이 무너지면 타락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승가가 무너지지 않도록, 그래서 법이 오래 가도록 율을 제 정해 놓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고 수행에 도움이 되는 규 범이 율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불자들은 계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계를 받을 생각도 안 하고, 받고서도 실행할 생각을 안 합니 다. 그저 복을 빌 생각뿐입니다. 계율을 지키는 자체가 복인 줄 모릅니다. 아무리 돈 많은 사람이라도 전생에 살생한 업으로 모진 병이 들었다면 돈과 상관없이 괴로움을 당할 것입니다. 빌어서 될 것 같으면 손이 발이 되도록 빌겠지만 빈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닙니다. 애초에 계율을 지키고 나쁜 짓을 하지 말아야 복이 옵니다. 계율은 도덕성을 지키기 위한 규범 이고 그것을 지킴으로 해서 너와 내가 같이 행복해집니다. 차를 몰고 가 는데 교통 신호를 안 지키면 나만 불행해지겠습니까? 나와 남이 한꺼번 에 불행해집니다. 음주 운전을 하면 자기가 다치는 건 둘째 치고 멀쩡하 던 상대편도 같이 다치니까 하지 말라고 법으로 정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율장도 마찬가지로, 상대와 내가 같이 고통당할 일을 하지 말라고 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율장의 원리를 이해하고, 인과법에서 봤을 때 계율을 어떻게 지켜야 괴로움을 안 당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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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혜를 삼학이라고 합니다. 세 가지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수행의 방법입니다. 출가자나 재가자나 계를 받아서 지키는 것이 수행입 니다. 계를 받으면 좋다는 소리를 듣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계 받는 신도 들이 있는데 이것도 잘못된 기복신앙의 단면입니다. 계를 안 지키면서 행 복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세속에 살면서 적어도 이 정도는 지켜야 큰 고 통은 면할 것이라 해서 부처님께서 제정해 놓으신 것이 오계이니, 신도들 은 오계를 받고 필히 지켜야 합니다. 살생, 투도, 사음, 망어, 불음주가 다 섯 가지입니다. 불음주계 같은 경우는 앞의 것들에 비해 무겁지 않다고 볼 사람들도 있겠지만 술을 먹는 데서 숱한 사고가 일어나기 때문에 가 볍다고 볼 수 없습니다. 술을 먹으면 중추신경이 흥분되어 싸움이 일어 날 수도 있고 운전대를 잡으면 큰일 날 수도 있습니다. 술, 담배가 원인 이 되어 각종 암에 걸리기도 합니다. 술, 담배만 안 해도 말년에 치매 걸 릴 확률이 줄어듭니다. 뇌에서 혈관이 터지거나 막히면 뇌경색이나 뇌출 혈이 일어나서 고쳐도 치매가 되기 쉽습니다. 재가인들 중에는 먹고살기 위해서, 사회생활 하느라 술을 먹는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거니 받거니 술을 권하는 것은 서로 죽으라는 소리입니다. 술과 관련해서 좀 우스운 얘기를 하자면, 요즘에는 출가자들도 간혹 술을 마십니다. 비구 계에 술 먹지 말라는 소리는 없기 때문에 먹는다고 합니다. 부처님 당시 에는 비구들이 술 옆에 가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난 적이 없 었습니다. 출가자는 아예 안 먹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에 비구에게 불음 주계를 마련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율장에 없다고 술을 마시 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우바새, 우바이는 오계를 받고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인과율에 맞고 수행하는데 필요한 일입니다. 계는 전쟁에 나가는 장수의 갑옷처럼 화살 과 칼로부터 우리를 지켜줍니다. 살생, 투도, 사음, 망어, 불음주, 오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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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면 수행의 장애가 없어집니다. 포도주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느냐 고 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모를까 불교의 계율에서 는 안 됩니다. 조금씩 허용하다 보면 나중에는 아무것도 안 지키게 됩니 다. 업보를 몽땅 받으면 됩니다. 받을 때 원망하지 마시고요. 어떤 처사 는 술을 한 40년 마시고 간암에 걸려 죽으면서 부인을 원망하더랍니다. 절에 가서 등불 켜라고 매일 돈 줬더니 소용없다고 말이죠. 내가 이 말을 듣고 기절할 뻔했습니다. 이건 지켜야 되고 저건 안 지켜도 되고 그런 것 이 아니라 다섯 가지 계를 다 받고 다 지키는 것이 재가자의 의무입니다. 재가자는 다섯 가지 이상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에 아주 맵게 과보가 올 수 있는 부분만 부처님께서 선정해놓은 것입니다. 그것도 안 지키고 살겠 다면 나도 할 말이 없습니다. 오계를 지키는 것이 수행이고 이것을 지켜 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미와 사미니는 10계를 받습니다. 출가자라도 7세에서 20세까지는 사 미, 사미니라고 합니다. 비구가 되어 구족계를 받기 전이라도 열 가지는 반드시 습관을 들이라고 10계를 주는 것입니다. 앞의 10가지는 중죄로 서 반드시 지켜야 하고 나머지는 소소계라 하여, 향과 꽃으로 장식하지 말라, 노래와 춤을 관람하지 말라, 높은 자리에 함부로 앉지 말라, 정해 진 때 아니면 먹지 말라, 금은 등의 보배를 간직하지 말라는 등의 내용입 니다. 열 가지는 사미, 사미니는 물론 모든 출가자에게 적용됩니다. 소소 계는 좀 실수를 하더라도 참회를 하면 되고, 앞의 것들은 인과가 너무 매 워서 참회가 잘 안됩니다. 어릴 때부터 10계를 기본으로 지키다가 구족 계를 받고 비구, 비구니가 되는데 이때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를 받습니다. 계는 출가자의 윤리관을 형성하는, 세속 같으면 헌법과 같은 것입니다. 구족계를 받고서 지키기를 서원했는지의 여부가 출가자의 수 행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비구계, 비구니계 안에는 재가 오계가 이미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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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재가자를 훨씬 뛰어넘는 엄격한 도덕성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율을 정해놓고 수행 집단을 이루고 사 는 것입니다.
출가란 세속으로부터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비구, 비구니는 첫 번째로 애정으로 연결된 고리를 끊고 출가합니다. 세속적 욕망을 추구하지 않고 무소유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비구, 비구니는 가족을 갖지 않고 독신으 로 살아갑니다. 일본에도 불교가 있지만 승려가 결혼을 할 수 있는 제도 라서 비구계, 비구니계를 받지 않습니다. 지금도 조동종이나 운문종 같 은 선종이 있다고 하지만 비구계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계법에는 비 구, 비구니가 출가자입니다. 비구는 원래 걸사를 뜻합니다. 세속의 것들 을 모두 포기하고 밥을 빌어서 먹는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소유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좌복, 발우, 가사 생활 일상 용 구 정도입니다. 통장에 돈을 모아도 안 되고 비싼 자동차를 가져도 안 됩니다. 그건 도둑입니다. 태국에 어떤 스님이 좋은 승용차도 있고 비행 기도 있고 호화롭게 사니까 승단에서 비판이 일고 신문에도 실렸습니다. 부를 추구하려거든 승복을 벗어라, 아니면 사회에 환원하라고 했습니다. 그 스님은 계속 비구로 살겠다고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비 구는 땡전 한 푼 없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복을 안 지어서 가난한 게 아 니라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다 회향한다는 뜻입니다. 비구는 재물에 대 한 욕심을 포기할 뿐 아니라 너다, 나다 하는 분별을 내지 말아야 합니 다. 비구는 누가 나를 때려죽이더라도 그를 죽이겠다는 생각이 안 나와 야 합니다. 달라이 라마께서는 누가 때리려거든 얼른 도망가라고 하십니 다. 원망하지 않고 죽을 용기가 없으면 도망가라고 했습니다. 출가자는 내가 죽더라도 생명을 해치지 않고 남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아야 합니 다. 내 생명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다른 생명을 존중하는 높은 도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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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향하는 사람이 출가자입니다.
비구계를 받은 다음에 보살계를 받는데 대승보살계는 우리나라에 들 어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대승보살계라고 하는 것은 원효 스님 때 들어왔던 비구계를 줄여 놓은 것입니다. 대승보살계는 『허공장 경』의 내용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으로, 이미 비구계를 받고 완성된 사람 이 대승보살계를 받는다고 되어있습니다. 비구계 받은 사람이 비구 보살 이 되는 것입니다. 대승보살계는 18가지 중죄와 46가지 소소계로 되어 있습니다. 티베트불교에서는 계를 받고 대승 보살의 수행에 들어가는데, 그때 계 받는 의식을 관정이라고 합니다. ‘관세음보살 허가 관정’ 이렇 게 말하는데, 관정(灌頂)은 이마에 물을 붓는다는 뜻으로 가톨릭의 세례 와 비슷한 의식입니다. 허물을 다 씻어낸다는 뜻에서 관정을 받는 것입니 다. 앞에 비구, 비구니계를 받고 수행하는 사람은 그 계가 다 형성되었다 고 보고 그 다음 보살계를 줍니다. 18가지 중죄의 내용 중에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보리심을 발했다가 후퇴하는 자, 남에게 보시를 하고자 했다 가 주지 않는 자는 중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살생, 투도 이런 얘기가 아 닙니다. 그런 허물은 이미 사라졌다고 보고 다음 단계로 보살행을 하는 데 필요한 계를 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금강승계가 있는데 한국에는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앞에 재 가 오계부터 사미·사미니의 10계, 비구·비구니의 구족계, 보살계를 통 해 모든 허물을 덜어내고 맨 마지막에 금강승 수행자를 위해서 금강승계 를 줍니다. 수행의 깊이에 따라서 지켜야 될 도덕성이 높아지는 만큼 계 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대승을 수행하려면 이만큼의 계율을 기본 바탕으 로 도덕성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금강승의 계는 주로 정광명, 차 크라를 열어서 기를 운행하는데, 에너지의 빛을 통해 다음 생을 윤회하 는 보살의 보리심을 완성시키는 방법론입니다. 그래서 금강승에서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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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몽정도 하지 말라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전체적으로 재가 오계부터 나아가 대승보살계가 완성되면 무주처열반을 통해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는 보살 10지에 이르는데, 그 문을 열어주는 계가 금강승계입니다. 계 가 이렇게 4단계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불 행히도 대승보살계가 들어오지 않았고 금강승계는 더더욱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신라시대, 통일신라 때 보리유지 스님이 와서 만다라 법회를 봉행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금강승을 수계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계 는 승단 전체의 도덕성과 연관되어 있고 수행이 깊어질수록 단계에 맞게 장애를 덜어내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재가불자는 오계만 지켜야 될까요? 지킬 수 있으면 10계까지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비구계를 받지 않았다 해도 비구계를 지킬 수 있 으면 더 좋습니다. 5계, 10계를 잘 지켜서 보살계를 받고 수행해도 됩니 다. 한국에서는 출가한 사람은 비구, 비구니밖에 없습니다. 재가와 출가 에서 받는 계를 모르면 자꾸 헷갈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계단 법은 부처 님 당시부터 엄격하게 정해진 법이기 때문에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오 뉴월 엿가락처럼 늘였다 붙였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겨울철 엿판의 엿가 락처럼 딱 떼면 딱 하고 떨어져야지, 질질 따라 붙어 있어서는 안 될 일입 니다. 계를 수행할수록 장애를 제거하기 때문에 고도의 수행자는 고도의 도덕성을 갖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거꾸로 고도의 수행자들은 걸림이 없 으니 술 한잔해도 괜찮고 담배 한 대 피워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비구는 집단적으로 서로 다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비구로서 자격을 잃게 됩니다. 여러분도 계를 안 지키고 복이나 빌 러 다니고 법문도 안 듣고 뭘 잘못했는지 모른다면 불자로서 자격이 없 습니다. 이 세상은 전부 인과로 돌아가는데 그 인과를 우리가 어떻게 제 어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불자로서의 삶을 영위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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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의 질서를 유지하고 수행자의 도덕성을 형성하는 것이 계입니다. 불교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계를 받아서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나의 행동 규범으로 삼아야 합니다. 한 생각 일으키거나 말 한마디 하거나 무슨 행 동을 하더라도 계에 맞는지 바로 알아차려서 하나하나 깨달음을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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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성인들의 가피
오늘은 가피(加被)에 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가피는 불교 안에서 자 주 쓰는 말이지만 현실에서는 뜻을 잘못 알고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 개는 신비한 약의 효능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가피를 어떻게 이해해 야 하는지, 가피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 가피가 나타난 사례를 말씀드 리겠습니다. 모든 것은 인과입니다. 이번에 코로나에서도 여실하게 드러 났습니다. 종교적으로 기도를 해서 바이러스가 소멸된다면 모두 교회나 절에 모여서 기도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한다고 모이면 문제가 더 커진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바이러스는 신이나 부처가 좌지우지하 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아무런 해결책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인과법을 기반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만이 합리적인 해결책입니다. 어떤 분은 명상을 하면 면역력이 높아져서 코로나를 이길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면역력이 높아지면 바이러스를 이기는 데 도움 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체가 치료법도 아니고 지금까지 검증된 방법 도 아닙니다. 명상으로 면역력을 끌어올리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얼 마나 깊이 들어가야 효과가 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럴 때는 명상이 마 스크 쓰는 것만 못합니다. 명상이나 기도를 통해 가피를 바라는 것은 과 학적 근거가 없는 미신입니다. 지금 절집에서 생각하는 가피는 본인의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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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만 하면 이롭다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가피를 잘못 이해하면 신행이 잘못되기 쉽습니다. 여러분이 절에 가서 불상 앞에서 짓지도 않은 복을 달라고 했을 때 가피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가 피는 더할 가(加), 입을 피(被), 말 자체가 불보살께서 주시는 가르침을 입 는다는 뜻입니다.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그 가르침대로 살다 보니 내 삶 이 행복해졌다, 새 삶을 살게 됐다, 고통이 덜어졌다, 내가 달라졌다, 그 것이 가피입니다. 따라서 가르침이 전제되지 않으면 가피가 성립되지 않 습니다. 사람들은 가피를 가르침에서 찾지 않고 외부의 신비한 힘을 갈 구합니다. 그러나 미신을 통해서는 가피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스님들한 테도 다른 어떤 힘을 기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님 손 한 번 잡으면 기 운을 받을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도 기운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가 피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어디 오래된 불상이 영험하다느니 불상을 크 게 조성해야 기도가 잘 된다느니 그런 소리들을 합니다. 그 앞에서 기도 했더니 주식이 많이 올랐다거나 병이 나았다거나 그런 것이 가피가 아닙 니다. 기도해서 병이 나았다면 의사한테 받은 가피가 더 많을 것이고 병 원이 이렇게 많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옳지 않은 말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 니.” 욕심이 없으면 행복이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그 말을 믿고 실제로 따르는 자에게 복이 옵니다. 불교식으로 해석하면, 욕심을 버림으로써 행 복해진 것이 가피이지 다른 것이 가피가 아닙니다. 살생하지 말라는 가르 침을 따랐더니 그 과보로 세세생생 비명횡사를 하거나 큰 병에 걸리는 일 이 없을 때 ‘부처님 가피 때문에 내가 건강하구나.’ 이렇게 얘기하는 것 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듣지도 않고 어디 기도발 잘 받는 곳에 가서 아이 합격을 빈다고 되겠습니까? 기도해서 될 일이면 공부를 왜 시킵니까? 가 피를 잘못 이해하는 데서 신행이 잘못되는 줄 알아야 합니다. 가피를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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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이해하려면 기본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 줄 명확하게 배 워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탐진치를 버려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그것이 가장 큰 가피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다가 조금이라도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갈 때 부처님께 고마움을 느낍니다. 부처님께서 깨 달으신 부다가야나 태어나신 룸비니 같은 곳에 가서도 ‘이 분의 가르침 때문에 이렇게 행복하구나.’ 하는 마음이 듭니다. 이것도 역시 인과를 바 탕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부처님의 존재가 원인이 되고 내가 말씀을 듣 고 따른 것이 조건이 되어 행복한 결과를 얻은 것입니다. 인과가 없이 빌 어서 무엇이 된다면, 도둑이 도둑질하기 전에 부처님께 참배하고 가피를 받으면 도둑질이 잘 되지 않겠습니까? 도둑질하는데 도와주는 부처님이 라면 나는 그런 부처님 안 믿겠습니다. 역사상 복을 주겠으니 자기를 믿 으라고 하는 사람은 다 사기꾼에 불과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전부 밑바 닥이 보이고 거짓말이 드러났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 적 이 없습니다. 자기가 짓지 않고서 오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피를 입으려면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내가 바뀌어야 합니 다. 내가 바뀌기 위해 스승 앞에서 예경하고 참회하고 공양하라는 것입 니다. 내가 바뀌지 않는데 무엇이 성취될 것이며 무엇이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 주겠습니까? 스승들께서 법을 가르쳐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좋 은 인과를 지어서 점점 행복해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으니, 그 가르침 을 받아들이고 따라야 내가 바뀝니다. 우리는 해인사에 가서 팔만대장경 을 참배한 뒤에도 그저 그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처님과 도 인들의 말씀이 담긴 경전을 보고서 내가 마음을 바꿔야 그것이 가피가 됩니다. 절에 가서 부처님 앞에서 내 한을 푼다거나 가피를 비는 것은 부 처님을 모독하는 반불교적인 태도입니다. 그런 것을 조장하는 일도 간혹 있는데, 착각입니다. 불교는 깨어있는 종교이고 자각하는 종교입니다.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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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가피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을 부를 수 있습니다. 중세에 흑사병이 번졌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진노해서 그렇다고 교회와 성당 에 모여 기도하다가 더 번졌습니다. 미신은 역사 속에 그런 오류를 남겼 고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리 불자들은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깨어있는 삶 속에서 가피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스승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가피에는 세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명훈가피입니다. 어두울 명(冥)자에 그을릴 훈(熏)자를 씁니다. 훈 제의 훈, 연기를 쐬는 것이 이 뜻입니다. 어두운 상황 속에서 스승의 이끌 어주심이 있었다, 그때는 스승인 줄 몰랐는데 나중에 공부를 좀 하고 보 니 아, 그분이 나를 이렇게 저렇게 이끌어 주셨구나, 하고 아는 것입니다. 대승보살들 중에 지장보살님 같은 분은 지옥에 가서 지옥중생을 건지는 데, 지옥중생은 그분이 보살인지도 모르고 이끌림을 받아서 점점 삼악도 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흐름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명훈가피라고 합니 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가피를 이루는 데도 손바닥 마주치듯 되어야 합 니다.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데 스승께서 이끌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 서 부처님께서는 소를 갠지스 강가까지 데리고 갈 수는 있으나 물을 마 시고 말고는 소에게 달려 있다고 비유를 들어주셨습니다. 내가 공부하고 자 스승을 찾고 법을 찾을 때 스승을 만나서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있 고, 내가 아직 스승을 알아보지 못할 때 불보살님께서 보이지 않는 곳에 서 이끌어 주실 수도 있습니다. 수행은 내가 하려는 데 달린 것이니 주체 는 나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할 때는 수동적인 태도보다는 강력한 의 지와 실천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신행을 하면서 불보살을 뵙지는 못하지 만 불보살님의 오랜 과거의 공덕과 지혜, 그리고 그것을 전수 받아온 제 자들에 의해 나도 모르게 서서히 이끌려온 것이 명훈가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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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다람살라에 갔을 때 리처드 기어라는 배우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나이도 많은데 배도 안 나오고 잘 생기고 연기도 잘하고 진짜 배 우더군요. 달라이 라마 오피스에서 존자님을 기다리면서 한 시간 반 정 도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달라이 라마를 언제 뵈었냐고 물어봤더 니 1987년에 뵈었다고 합니다. 달라이 라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 니까 아주 노련한 선생님이라고 하더군요. 달라이 라마를 따라서 오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스승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 저 유명한 사람, 좋은 사람 정도로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달라이 라마께서 이거 한번 해 볼런가 그래서 해보면 좋고 법회에 오면 칭찬도 해 주니까 좋아서 듣고 하다가 불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감리 교 신자인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명 훈가피를 얻었다고 하니까 그런 것 같다고 합니다. 불교가 어려웠지만 존 자님이 얼마나 노련한 스승인지 이 공부를 때려치울까 하는 생각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존자님만 보면 좋아서 법문 듣고 집에 가면 자기 전까지 하루 종일 생각이 난다고 합니다. 기운이 조금 빠질 때 도 생각나고, 연기할 때도 생각나고, 그렇답니다. 그런데 불교 얘기를 해 보니까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말을 얼마나 잘하던지 한국에 와 서 강연 한 번 해달라고 부탁하니 부끄러워서 대중 강연은 못 한다고 합 니다. 리처드 기어처럼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스승의 영향을 받는 것 을 명훈가피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몽중가피라고 하는데, 꿈속에서 불보살의 가피를 만나는 것 입니다. 우리가 꿈에라도 한 번 보고 싶다고 하지만 꿈도 그냥 꿔지는 것 이 아닙니다. 꿈속에서 불보살의 가피를 받으려면 수행이 되어있어야 합 니다. 여러분은 꿈속에서 부처님, 보살님을 뵙고 가피를 받으셨습니까? 우리는 꿈에 관세음보살님을 뵈었더라도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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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만 합니다. 주식을 사면 올라갈까, 이사를 하면 괜찮을까, 세속 적인 생각만 하고 법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합니다. 안 그랬으면 좋겠습 니다. 법은 행복해지는 방법론이니까 그 방법론을 명확하게 이해한다면 공부에 들어가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방법론을 안 가르칩니다. 그냥 술 먹다가도 바로 깨닫는다는 식으로 법을 이해합니다. 문제가 심 각합니다.
세 번째는 현전가피라고 하는데, 불보살님이 눈앞에 바로 나타나서 우 리 주위에 있음을 확인해주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대세지보 살 등 대보살들이 몸을 나투어서 우리가 직접 보고 공부로 나아갈 수 있 게 해주십니다. 현전가피는 우리나라에서도 몇 군데에서 일어난 적이 있 습니다. 신라 때 의상 스님은 중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서 부석사 를 세우신 분입니다. 의상 스님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할 곳을 찾아 동 해안을 따라 올라가다가 한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홍련암이 있 는 그곳에서 파도가 치면 물이 올라오는 바위에 관세음보살님께서 붉은 연꽃 위에 서 계신 모습을 친견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의 모습을 직접 보 았으니 믿음이 얼마나 강하게 일어났겠습니까? 우리도 눈으로 보면 100% 틀림없다고 믿지 않습니까? 관세음보살님께서 해조음이 들리는 그곳을 수행처로 점지해주시면서 의상 스님에게 대승의 보살, 10지 보살 등의 경계를 다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신심이 약하고 공부가 깊지 않 아서 그런 곳인지도 모르고 그저 전설의 고향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낙산사 홍련암은 성지 중의 성지입니다. 원래 관세음보살님의 주처가 보 타락가산(補陀洛迦山, Potalaka)인데 낙산사는 여기서 유래한 이름입니 다. 관세음보살께서 의상 스님에게 직접 응신해서 법을 펼치라고 인정해 주신 곳이니 얼마나 성스럽고 위대한 곳입니까? 저는 그곳에 갈 때마다 온몸에 전기가 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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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는 광경을 보러 오거나 기도하러 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곳에 적혀 있는 축원카드들을 보니까 “앙고 시방삼세 제망중중……” 글귀 아 래 합격이나 승진, 돈 많이 벌게 해달라는 소원들이 적혀있었습니다. 관 세음보살님께서 시끄러워서 그냥 가버리겠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이 몸을 보여주신 곳이니 거기 가서 기도를 하려면 ‘일체중생을 위해 보리심을 발 해서 저도 관세음보살님처럼 살아가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금산사의 진표율사도 현전가피를 받으신 분입니다. 『삼국유사』에 기 록된 이야기인데 진표율사께서 미륵보살님을 친견하고자 원을 세우고 선 계산(仙溪山) 부사의방(不思義房) 바위 위에서 좌복도 안 깔고 절을 하 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7일을 기약하고 시작했는데 친견하지 못해서 다 시 정진한 지 7일 만에 지장보살님이 나타나 계본(戒本)을 주셨는데, 그 때 율사의 나이가 23세였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다가 가만히 생각 해 보니까 미륵보살님 뵙기로 했으니 다시 영산사(靈山寺)로 자리를 옮 겨 기도했습니다. 무릎과 이마가 깨져서 흘린 피로 바위가 다 덮일 정도 로 정진했더니 그때 미륵보살님이 앞에 나타나 수행하고 참회하는 데 필 요한 목간(木簡) 189개를 주시면서 그중에 2개는 당신의 손가락뼈라고 하셨답니다. 율사는 이런 감응을 받고 금산으로 돌아와 법을 펼치셨습니 다. 그래서 금산사 쪽은 원래 율종이고 미륵보살 계통의 절들이라 지금 도 미륵보살님을 모셔놓았습니다. 금산사 미륵전에 모셔진 부처님은 진 표율사께서 친견하신 크기와 모양을 그대로 조성해 놓은 것입니다.
자장율사도 중국 오대산 북대(北臺)의 태화지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 셨습니다. 그곳에 ‘문수보살이 화현하신 곳’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 습니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님에게서 부처님의 가사와 사리를 받아와 사람들을 교화하셨습니다. 출가해서 도를 닦으려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 자 통도사를 창건하여 사리를 모시고 계단(戒壇)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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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사람의 80% 이상이 계를 받았다고 하니 그것이 신라 사람들의 도 덕성을 키우고 복된 삶을 만들어주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사 례가 여럿 있습니다. 의상 스님, 진표 스님, 자장 스님은 지극한 마음으로 일체중생을 위해 참회와 발원을 한 결과로 힘을 얻었기 때문에 보살들을 친견하게 된 것입니다.
가피는 법을 배워서 실행할 때 내가 바뀌면서 그 결과가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농부가 벼를 심어 잘 가꿔서 가을에 추수를 해 쌀밥을 먹을 때 자연의 가피를 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지 않았을 때 가피는 없습 니다. 내가 법을 배워서 배운 대로 해나갈 때 불보살께서도 가피를 통해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명훈가피, 몽중가피, 현전가피를 통해서 우리 앞에 나타날 때도 있고 안 나타날 때도 있지만 우리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호지(護持)하고 호념(護念)해주십니다. 호념과 호지도 피동적인 것이 아 니고 내가 능동적으로 할 때 불보살께서도 우리를 잘 이끌어주시고 바 꿔주십니다. 내가 행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 행하면서 빌면 잘못한 과보 때문에 부처님께서 어떻게 해줄 수 없 는 상황이 됩니다. 그러니 이 좋은 법을 자꾸 왜곡시켜 이상하게 만들면 안 됩니다. 지금은 가피를 너무 잘못 이해해서 수행도 하지 않고 바라기 만 하는데, 그것은 불교를 샤먼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부처님 의 바른 법에 들어가면서 이제부터는 이기적으로 살았던 것을 참회하고 일체중생을 위해 살겠습니다, 이렇게 참회와 발원을 해야 합니다. 번뇌를 끊고 선행을 쌓아서 모든 중생이 깨달을 때까지 그분들을 다 모시고 가 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알게 모르게 가피 를 입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께서 깊이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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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세 단계의 차제법문
오늘은 열반의 개념을 중심으로 초전, 중전, 상전, 삼전법륜에서 각각 어떻게 설명하는지 알아보고 이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짚어보려고 합니 다. 우리가 열반이라는 말을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있는데 열반의 개념 을 명확하게 정리해야만 수행하는 목표가 분명해지고 목표를 향해 나아 가는 힘도 강력해질 것입니다. 불교가 어떤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가에 관 한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 사성제와 팔정도의 첫 법륜을 굴리실 때를 초전법륜이라고 합니다. 초전법륜을 초기불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초기불교는 역사학자들이 불교의 역사를 시기별로 구분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역사 학자들의 구분으로는 부처님이 살았던 시대가 초기불교에 들어가니까 그렇다면 초전, 중전, 상전이 다 초기불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 초 전법륜을 초기불교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수준 에 맞춰서 세 단계로 나눠서 설법을 하셨는데 이 삼전법륜은 모든 부처 님이 똑같이 굴리신 가르침입니다. 나중에 미륵부처님도 오셔서 삼전법 륜을 굴린다고 하셨습니다. 그중에 첫 번째가 초전법륜으로 성문의 근기 를 위한 법문이고 최종 목적지가 아라한입니다. 성문 수행자는 수많은 번뇌를 없애가면서 차례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결과를 얻 는데, 이것을 성문4과라고 합니다. 이중에 최종 목적지에 다다른 아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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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번뇌가 다한 단계입니다. 이것을 아라한의 열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 무의식적인 번뇌는 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정신에는 무의식의 세 계가 있는데 무의식에 깊게 박혀있는 숙업(宿業)들은 제거하기가 어렵습 니다. 아라한도 아직 여기까지 간 사람들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이들을 위해 8년 정도 굴리신 법문이 초전법륜입니다.
두 번째는 대승의 수행자인 보살을 위해 굴리신 중전법륜입니다. 『유 마경』 『금강경』 등으로 시작해서 21년 설하셨다는 반야부 전체와 법화 부, 화엄부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의식에서 일어난 번뇌를 다 없애고 대 승의 법문에 들어간 수행자가 보살, 보디사트바입니다. 이 분들은 아라 한의 열반을 이미 이룩했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보리심을 일으켜 일체 중생을 건지기 위해 중생들과 생사를 같이하면서 윤회합니다. 지옥, 아 귀, 축생, 인간, 수라, 천상의 육도윤회를 반복하면서 중생을 구제하기 때 문에 사트바(sattva)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사트바란 중생이라는 말로, 돌다, 윤회한다는 뜻입니다. 보살은 윤회하지만 정신이 깨어있기(bodhi) 때문에 일반 중생과는 다릅니다. 아라한의 열반에도 머물지 않고 중생에 도 머물지 않는다는 뜻에서 보살의 열반을 무주처열반이라고 합니다. 보 살은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성불 못한 중생이 하나라도 있으면 성불하지 않겠다, 내가 마지막으로 성불하겠다, 이렇게 원을 다진 분들입니다. 보 살이 발심해서 수행해나가는 과정에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믿음을 내는 10신(信)으로부터 의지를 확립하는 10주(住), 여러 가지 행을 실천하는 10행(行), 닦은 공덕을 되돌려주는 10회향(回向)을 거쳐 견도에 들어서 토대를 마련한 10지(地)에 이르러 대보살이 됩니다. 문수보살이나 관세 음보살 같은 분들이 대보살입니다.
세 번째는 금강승 수행자를 위한 상전법륜입니다. 금강승에서는 10지 보살들을 다 부처로 봅니다.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이 보살들은 중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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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서 이 세상에 거듭 윤회하지만 그러나 부처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아라한의 열반과 보살의 무주처열반에 비해서 무의식 차원의 근본무명 까지 완전히 사라진 분을 부처라 하고 부처의 열반을 대반열반, 또는 무 여열반이라고 합니다. 무여(無餘)란 나머지가 하나도 없다는 말이고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제대로 알고 갔으면 하 는 것이 보살의 의미입니다. 보살은 수없이 많은 중생을 위해 보리심을 발하여 윤회하면서 자비를 행하는 대승의 수행자입니다. 그런데 한국불 교에서는 보살이라는 말을 절에 다니는 여신도를 지칭할 때 씁니다. 참 좋은 말이기는 합니다만, 그럼 실제로 보살행을 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 지 않습니다. 이름도 거룩해서 예컨대 진여행보살이라 하면 욕심이 없어 지고 마음이 공성에 들어서 평정심을 이룬 보살이란 뜻인데, 이렇게 어마 어마하게 높여준 칭호에 걸맞지 않게 살아갑니다. 절에 와서 부처님께 복 달라고 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로 깨달아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 는 사람도 있습니다. 보살의 뜻도 모르고 대승의 수행을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살 호칭을 붙이는 것은 그 성자들 을 비하하는 일이 됩니다. 대승불교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입니다. 대승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큰 수레, 큰 탈 것이라는 뜻입니다. 나 혼 자 번뇌를 없애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번뇌를 다할 때 까지 같이 가겠다는 뜻입니다. 이 대승 위에 부처님께서 상전법륜 금강승 을 굴리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얘기한다고 칩시다. 소승으로는 깨달을 수 없고 대 승만 최고다, 대승도 되지 않고 화두선이 최고다, 또는 대승도 별 볼 일 없고 금강승만 최고라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안 되는 법 문이라면 부처님께서 왜 하셨겠습니까? 그건 차제법문입니다. 우리가 학 교를 다닐 때 초등학교를 안 나오고 그냥 중학교에 가거나 중학교 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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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 고등학교로 바로 올라가거나 대학도 안 나오고 박사학위를 바로 따는 사람이 있습니까? 박사학위 딴 사람에게 초중고는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것이었습니까? 달라이 라마께 이렇게 여쭌 적이 있습니다. “금강승 이 대단하다고 사람들이 말하는데 그렇게 대단하면 소승이나 대승은 하 지 말고 금강승으로 바로 하시죠.” 하니까 “오, No. No. 그렇게 하면 외 도가 되어버린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소승으로는 깨닫지 못한다고 하면서 소승계인 비구계를 받고 사성제 법문을 하는 모순을 보 입니다. 소승이 바탕이 되어야 대승이 발로가 되고 조사선에 나아가 참 선을 하거나 금강승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육조 스님께서 “법무고하 인 유이둔(法無高下 人有利鈍)”이라고 했습니다. 법에는 높고 낮은 게 없고 다만 사람에게 영민하고 둔한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금 강승을 하니까 최고의 수행을 하고, 나는 참선을 하니까 최고의 수행을 하고, 나머지는 전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법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가 부처님 설법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논쟁은 용수보살 때 이미 끝났습니다. 만약에 대승불교가 부처님께서 직 접 설한 것이 아니라면 유식의 소의경전인 『해심밀경』이나 반야사상의 소의경전인 『금강경』도 불설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서양이나 일본의 일 부 학자들이 서지학을 연구해서 대승불교는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것이 아니고 뒤에 누가 지어내서 저작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불교의 전통은 누가 저작을 했을 경우, 자기 이름도 안 쓰고 부처님 경전이라고 써 붙여 서 대장경 안에 집어넣은 경우가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달라이 라마 라도 말씀을 경이라고 해서 대장경 안에 넣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저작 은 논, 소, 초로 분류하여 집어넣는 것이 전통입니다. 이를테면 『허공장 경』 같은 경우도 불설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 속에는 대승율장, 소승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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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함께 들어있습니다. 불설이 아니라면 대승율장도 전부 틀린 말이 되 어버립니다. 대승이 비불설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약합니다.
만약에 대승경전들을 뒤에 누가 저술했다고 하면 부처님께서는 『아함 경』만 말씀하신 것이 됩니다. 일체종지를 이루신 분이 그 말씀만 하실 이 유가 없습니다. 무의식 차원까지 근원적인 번뇌가 모두 사라지게 한 분 은 오로지 부처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대승과 금강승 경전에 다 설해 져 있습니다. 금강승 경전에 인도의 힌두교와 브라흐만교가 섞여 있다고 하는데, 이는 부처님께서 설법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방법을 이용해 번 뇌를 근원적으로 끊어내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윤회라는 말도 원래 브 라흐만교에서 쓰던 용어 아닙니까? 그러나 그 내용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부처님 말씀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 는 핵이 있습니다. 무아, 영원한 나라는 건 없다는 말씀입니다. 대승경전 어디에 힌두교 같은 유아론이 있습니까? 전부 무아와 공성을 말합니다. 소승에는 무아론만 있고 공성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고 하는데, 무아가 공성입니다. 용수 같은 논사들이 무아를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공성이란 개념으로 해석했을 뿐이지 경전 속에 이미 무아라는 개념으로 대소승을 관통해 놓았습니다. 연기, 공성, 삼법인, 사성제 등은 대소승을 관통하는 똑같은 교리입니다.
다만 대소승의 차이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대승은 중생무변 서원도의 원이 들어 있습니다. 대승 수행자가 보리심을 일으키고 자비심을 일으킨 것은 소승에서 업그레이드된 것입니다. 그다음에 금강승은 대승 수행자가 윤회하면서 중생을 건지겠다고 했을 때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 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되게 하는 금강승의 차크라를 여는 것입니다. 정 광명, 불광, 정광불이라고 하는 기의 빛을 통해서 다음 생으로 환생할 것 을 자기가 압니다. 다음 생에 무엇이 될 것인지 알고, 어디에 어느 부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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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어떻게 태어날 것인지 알고, 그리고 중생을 위해 환생을 해서 한 생을 살아가겠다는 것도 압니다. 티베트에서는 실제로 그렇게 되게끔 수행하 는 것을 금강승이라고 합니다. 대승에는 깊은 철학과 깊은 행이 있지만 무주처열반처럼 계속 윤회하면서 모든 중생을 위하려면 금강승을 수행 해야 합니다. 보리심과 자비심, 공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깊은 체험을 전 제로 하여 금강승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기 수련자 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소승, 대승, 금강승 할 것 없이 다 불설입니다.
또한 대승경전을 후대에 누가 지어서 저자 없이 대장경에 넣어놨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금강경』도 누가 지어 넣은 것입니 까? 그 사람들 얘기대로면 대승경전은 다 거짓말이고 사기가 됩니다. 경 첫머리에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 기수급고독원” 6성취가 다 있음에 도 불구하고 없는 경전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금강 경』은 부처님이 열반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암송으로 내려오다가 부처 님 열반하신지 300~400년 후에 결집되었습니다. 그 기록이 거짓말이라 고 하면 부처님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 사이에 누군가 ‘나도 부처님이다’ 하고 거짓말을 지어서 끼워 넣었다는 말입니까? 천수대비주 같은 경우도 그렇게 얘기하는데 그것은 부처님께서 어떤 비구니 스님에 게 전수해주신 것이 6세기경 한 비구니 스님의 수행처에서 발견되었습니 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아함경』만 설법하셨다고 하는 사람들은 아비달마 시대에 대승을 공격하기 위해 개발했던 논리를 다시 끄집어내 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이미 용수 시대에 다 깨졌던 논리입니다.
그리고 『화엄경』에 나오는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이런 대보살들은 부 처님께서 허구로 만들어낸 존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처님께 서 소설 쓰듯이 만들어낸 존재가 보살이라니 옳지 않습니다. 보살은 우 리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우리보다 능력이 훨씬 뛰어나서 여러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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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편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그것을 『화엄경』에서는 아주 훌륭한 방편(善巧方便)이라고 했으니 우리의 작은 꾀로 이해 못한다고 보살의 존재가 없는 것이 됩니까? 『화엄경』에서는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元功 德母)” 즉 믿음을 갖고 시작해야만 대승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 다. 믿음이 공덕을 쌓아 나가는데 모태가 된다는 말씀이니 믿음이 없으 면 처음부터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대승이 불설이 아니라면 우리는 모두 외도 짓을 하고 있는 것 입니다. 대승경전을 보고 관세음보살의 신행과 자비를 따르는 것도 외도 가 되는 것입니다. 승복을 입고 그런 모순에 빠져서 대승비불설을 주장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미 논쟁이 끝난 얘기를 더 이상 들고 나와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말이 아 닙니다. 부처님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실천해나갈수 록 교학이 더 깊이 보이고, 깊이 볼수록 실행할 힘이 생겨서 중생을 위하 는 마음도 더 깊어집니다. 그러니까 단견을 가지고 자기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없다고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리랑카에 갔을 때 아라한과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소승 쪽에서 대승이 비불설이라고 주장한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분은 그 런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습니다. 대승은 굉장히 어려운 수행이라면서 대승의 보살행을 부정한다면 『아함경』의 본생담(本生譚)도 부정할 것이 냐고 반문합니다. 본생담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먼 전생에 선혜(善慧) 바라문이었을 때 연등 부처님께 수기를 받고 연등 부처님 전에 발원을 한 후 오랜 겁 동안 보살행을 닦았던 이야기입니다. 본생과 수기는 12부 경의 한 부류이고 소승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경입니다. 『아함경』에도 분명 보살이라는 말로 기록되어 있고 미륵보살도 나옵니다. 이것이 대승 의 보살행을 비불설이라고 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런 주장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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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보살 앞에 가서 절을 왜 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신행을 하려면 깊은 이해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신행을 하는데 오락가락하면 안 됩니다. 길을 가는데 표지판과 내비게이션이 없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게 되 고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깊은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고 수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 내가 어느 절에 법문을 하게 됐는데 거기는 소승공부를 한다고 대 승은 부처님 공부가 아니니까 안 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하도 갑갑해서 대승공부를 좀 해보셨느냐고 물어보니 할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소승 을 공부하면 대승을 배격해야 되는 것입니까? 내가 만약에 지금 소승 그 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 나는 비구가 아닙니다. 소승, 대승, 금강승이 다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조사선도 대소승이 바탕에 깔려있어 야 되는 것이지 바탕없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불교에는 이런 부분 이 아쉽습니다.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는데 소승은 무뢰배들이라서 도를 못 얻는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앞에 내가 있었다면 당신은 비 구계를 어디서 받았느냐고 묻고 싶었습니다. 지금 우리 스님들이 받는 계는 소승의 계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재가오계도 소승계입니다. 사성제, 12연기, 무아를 공부하는 것도 소승법문이고 오랜 생 동안 부처님께서 보살행을 해왔다는 것도 소승의 본생담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 로 대승 법을 수행할 때 절대로 소승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소승의 수 행법은 매우 훌륭하고 수다원만 되더라도 도에 들어간 성자입니다. 마음 을 돌이켜 중생을 위해 보살행을 해서 초지에 들어가면 대승의 성자가 됩니다. 조금씩의 차이는 있지만 그 차이가 틀린 것이 아니고 단계를 설 명하는 것이니 다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남방불교 사람들 중에도 북방의 대승불교를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 다. 한참 전에 세계불교도우의회 대회 일로 태국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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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만, 중국, 일본, 각 나라를 대표해서 100분 정도 오셨는데 그 나 라 왕실에서 자국의 비구들에게만 공양 올리고 나머지는 속인 취급을 했 습니다. 그래서 ‘아, 이 사람들도 이런 곯아빠진 면이 있구나, 소승에 머 물고 말겠구나.’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반면 대승 쪽 사람들 가운데 일 부는 남방의 수행자들을 두고 ‘당신들은 성불 못해. 매일 계 지킨다고 앉 아서 뭐한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둘 다 아주 잘못된 태도입니다. 소 승의 수행도 아주 훌륭한 수행이고, 대승은 그것을 바탕으로 한 단계 업 그레이드 한 것이고, 금강승은 그것을 바탕으로 실행될 수 있게 하는 수 행입니다. 서로 보완 관계에 있는 것이지 어느 하나만 중요한 것이 아닙 니다. 선정이 우선이다, 지혜가 우선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논쟁거리 가 되지 않습니다. 선정과 지혜도 마찬가지로 서로 보완 관계에 있습니 다. 선정만 닦았을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를 지혜가 보완하고 지혜만 닦았 을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를 선정이 보완하기 때문에 “쌍차쌍조(雙遮雙 照)”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소승은 소승대로 존중하고 대승은 대승대로 존중해야 합니다. 나는 한국에 남방불교가 많이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남방은 지금까지 2,600년 동안 계율을 철저히 지키면서 전통을 깨뜨리지 않고 이어왔기 때문입니다. 또 다람살라를 중심으로 한 티베트 의 금강승은 나란다 대학의 전승을 그대로 이어왔습니다. 우리가 그런 불교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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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종교 존재의 근본 이유“죽음”
우리가 만나는 사람 중에는 반가운 사람도 있고 불편한 사람도 있습 니다. 선연을 만나면 반가울 것이고 악연을 만나면 불편할 것입니다. 선 행을 하는 사람은 누구를 만나든 좋은 관계를 맺을 것이고 악행을 하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불편을 끼칠 것입니다. 전에 교도소 법회에 가서 도 둑질을 해서 여러 번 들어오신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세상 사 람들이 어떻게 보이냐고 물어봤더니 도둑질만 하다보니까 사람이 두 가 지로밖에 안 보인다고 합니다. 하나는 털 사람인가 아닌가, 그리고 하나 는 자기를 잡으러 오는 사람인가, 그것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살면 굉장히 피곤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꿈은 뭘 꾸느냐고 하니까 매일 누가 잡으러 오는 꿈을 꾼다고 합니다. 잡히냐고 물으니까 결국 잡힌다고 합 니다. 악행을 하고 꿈에서도 악연을 만나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개인 간의 관계도 그렇지만 국가 간의 관계도 악연이 있습니다. 일본 총리는 외교무대에서 우리나라 대통령을 만나면 반갑지 않을 것입니다. 불편한 관계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때 침략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죽였고 일본제국주의 시절은 36년 동안 고통을 주고 그 뒤에도 계속 애 를 먹이고 있으니 얼마나 불편한 관계가 되었습니까? 개인이든 국가든 선한 마음을 가지고 선행을 해야 어디서 만나든 반가운 관계가 됩니다.
오늘의 주제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수행을 하려면 제일 먼저 생각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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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 하고 맙니다. 그래서 죽음의 특징이 어떤 것인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나 한테도 반드시 죽음이 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서 되겠는가, 자각이 생깁니다. 역사 이래로 안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 의 첫 번째 특징은 생자필멸,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우 리는 아직 안 죽었을 뿐입니다. 0.1%의 예외도 없이 반드시 죽는 날이 옵 니다. 반드시 오고야 말 그날이 두렵습니다. 그날이 오기 전에 수행을 해 서 생사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은 부 정하거나 숨기거나 슬쩍 피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루 하루 살면서 내일도 모레도 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고장을 보면 숙 환으로 별세한 분도 있고 갑자기 돌아가신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도 나는 그래도 조금 더 살겠지 하면서 하루하루를 허비합니다. 수행자는 죽음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봅 니다. 수행을 많이 한 도인은 자기가 죽을 것을 잘 알고 언제 어떻게 죽 을지도 압니다. 육조 스님도 내가 언제 가겠다고 얘기하셨는데, 반드시 갈 것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죽음은 평등합 니다. 도인이든 범부든 이 세상 모든 생명체에게 똑같이 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간혹 천상에 태어나 영원히 산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몸 그대로 영생한다고 주장하던 어떤 교는 신도가 4만이 넘 었습니다. 영원히 안 죽고 산다는 말을 믿고 좋아서 갔다가 속고 착취만 당했습니다. 영생한다던 교주는 교도소에서 복역 중에 심장마비로 죽었 습니다. 영생이고 천국이고 다 부질없는 생각이고 반드시 이 몸은 간다 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죽음의
두 번째 특징은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형제가 여럿이라 형님과 누님과 동생이 태어난 순서가 있습니다. 순서대로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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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정연할 텐데 죽는 것은 순서가 없습니다. 양자역학에서도 불확정성을 얘기하는데 우리의 생명도 불확정성이라 언제 갈지 모르고 얼마나 살지도 모릅니다. 엄마 뱃속에서 갈 수도 있고 태어나서 어릴 때 갈 수도 있습니 다. 백세 넘게 사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가긴 갑니다. 그래도 나는 대략 80까지는 살겠지,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80이니까 아직 15년 남았구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을 하면서 하루하루 허비합니다. 오늘도 쓸데없 는 일만 하고 선업은 뒤로 미루고 또 미룹니다. 내가 아는 어떤 어르신은 평생 남을 위해 베푼 적이 없다는 생각에 당신에게 남은 아파트 하나를 좋은 데 쓰라고 기부를 하려니까 이미 자식들이 몰래 자기들 앞으로 해놓 았다고 합니다. 내 힘이 떨어지고 나면 그때 가서는 선행을 할 수도 없습 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참으로 다행이구나’ 하고서 정진을 해야 합니다. 정진을 하지 않고서는 낭패를 당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침마 다 일어나서 잠깐씩이라도 생각하십시오. ‘아, 오늘도 살아있구나. 내가 숨을 쉬고 일어났구나. 내가 이렇게 움직이다가 오늘 갈 수도 있겠구나. 오늘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일이겠는가?’ 나는 이 생각을 쉬지 않습니다.
죽음의 세 번째 특징은 굉장히 빨리 온다는 것입니다. 옛날 도인들은 이것이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 같다고 하셨습니다. 화살은 시위를 떠난 순간 빠르게 날아가서 땅에 떨어집니다. 굉장히 빠릅니다. 지금 여러분도 그렇고 저도 그렇게 늙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이와 같이 죽음은 반드시 온다는 것, 차례가 없다는 것, 아주 빨리 온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죽음을 깊이 인식하지 않으면 정진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살아있을 것 같 고 내일도 살아 있을 것 같다는 착각 속에서 오늘도 미루고 내일도 미루 면서 재물에, 사람에 탐욕과 애착을 냅니다. 탐욕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 면 한이 되고 억울하다고 그러는데 사실 억울한 죽음은 없습니다. 정진 하지 않고 죽으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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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깊게 들여다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것이라고 했던 것들이 죽는 일순간에 다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내 것이 나에게 아무런 소용 도 없어집니다. 내가 낳아서 그렇게 애지중지했던 자식도 죽음의 순간, 호흡이 떨어지기 직전, 잡고 있던 손을 주르륵 놓는 순간이 되면 아무것 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아끼던 그 어떤 것도 마음속으로부 터 멀어집니다. 아무것도 아끼고 애착할 것이 없습니다. 소유하지 않아서 무소유가 아니고 소유할 수 없어서 무소유입니다. 다 무상해서 흘러가는 것인데 소유할 수 있는 게 이 세상에 무엇이 있습니까? 부부나 자식도 소 유가 아니라 인연으로 만난 동반자일 뿐입니다. 자식을 소유라고 생각하 면 오히려 그 자식을 잘못되게 만들기 쉽습니다. 부부끼리도 서로 소유 라고 생각하면 심각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냥 가까운 인연으로 만나서 세상을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도반일 뿐입니다. 소유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관계, 같이 수행하는 관계를 불교에서는 도반이라고 합니다.
내 것이 사라지는 것도 두렵지만 죽는 순간 제일 두려운 것은 내가 일 순간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을 나라고 생각하며 살아 왔기 때문에 나에 대한 애착을 놓기가 힘이 듭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무소유임을 정확하게 알라고 ‘오온개공’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대가 가 장 아끼는 이 몸뚱이도 실체가 없이 다섯 가지가 모여서 된 것이라는 뜻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 생기지 않았던 이전으로 돌아간다면 소유할 것이 없습니다. 눈과 귀 등의 몸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인식된 세계도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또한 무명에서 시작해서 늙고 죽음까지도 본 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실재하는 ‘나’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몸과 의 식에 집착해서 만들어낸 것일 뿐입니다. 내 몸이라고 생각했던 것, 내 의 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 무소유임을 알면 그밖에 재산이고 자식이고 는 더욱 소유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 것입니다. 욕망과 애착으로 잠시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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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되어 있을 뿐이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보살은 이 사실을 깊 이 들여다보아서 잘못된 생각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납니다. 반야바라밀 을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에 걸림이 없고, 따라서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잠시 인연에 의해 모여 있던 것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 두려움을 느끼 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속 사람들은 돈이 있다가 없어지는 것을 보고는 두려워서 쩔 쩔맵니다. 욕망 때문에 돈을 갈구하는데 욕망을 놓아버리면 돈은 낙엽보 다도 못한 것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되려면 죽음 앞의 자신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죽음을 도외시하고 회피합니다. 그 럴수록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부처님은 안 돌아가셨나요? 부처님도 똑같이 우주의 원리에 따라 서 이 세상에 왔다 가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 어 른은 일체가 다 자성이 없고 내 소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라진다 하더라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것이 부처의 죽음, 열반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죽으면서도 애착을 놓지 못하고 두려워하면서 한을 가지 고 죽습니다. 저 천상에 태어나면 좋겠다, 저 극락에 태어나면 좋겠다고 하면서 죽습니다.
장례식장에 가보면 불교식으로 염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연꽃잎 을 만들어 수의 위에 장식하고 다라니도 얹고 합니다만, 그게 무슨 의미 가 있겠습니까? 위로하는 정도에서 하는 의식일 뿐이지 그것이 우리 삶 을 근원적으로 깨어있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데 집착하면 오히려 불편해집니다. 우리가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그 건 미풍양속이지만 나쁜 습속이 될 수도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제사에 집착해서 편을 갈라 싸우기도 했습니다. 누구 집에는 홍동백서를 안 하 고 다르게 얹었다고 그 집의 가풍이 다르다느니, 질서와 예법을 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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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니 해서 당파가 나뉘어 남인북인, 노론소론 붙어서 나라가 위태로웠습 니다. 이런 상황들을 야기하느니 차라리 제사를 안 지내는 것이 낫습니 다. 제사가 좋은 일이기는 하나 그것도 잘못 집착하면 선행이 되지 않는 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입장입니다. 그러면 불교의 예불은 100% 선행인 가요? 예불을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선행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마음에서 예불을 부지 런히 하는 것은 옳지만 욕망의 위로를 받기 위해서라면 옳지 않습니다. 예불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하는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과 선해지 는 것은 다릅니다. 잠시 마음이 편해지는 정도로는 죽음의 공포를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죽을 때 스트레스를 제일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다 끊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늙어가면서 많은 것들을 잊어버 리고 인간관계도 점차 끊어지다가 죽음을 맞이할 때 모두 끊어져 버립니 다. 그래서 관계를 가장 중시하며 살던 사람들은 굉장히 힘들어합니다. 의식이 조금 살아있는 사람들은 애착심 때문에 관계가 끊어지는 이 부 분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 얘기를 드리는 이유는 죽음의 특징을 알지 못하면 수행할 이유를 못 찾고 자꾸 뒤로 미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수행법은 생사를 벗어 나는 데 있습니다. 나고 죽는 것은 물거품이 일었다 사라지는 현상인데 그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을 일으킵니다. 그 고통을 일으키지 않기 위 해서 부처님 법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초전법륜의 사마타, 비파사나를 통해 사성제를 정확하게 보고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중전법륜은 두 가지로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납니다. 하나는 세세생생 나고 죽고 하면서 일체중생을 건지겠다고 발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골백번 죽고 나 더라도 일체중생을 위하겠다는 것이 대승의 핵심입니다. 또 하나는 죽는 순간에 일체중생의 고통을 내가 다 짊어지고 가겠다고 원을 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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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시는 분이 마지막에 대승의 원을 내기가 참 어렵습니다. 불법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사람 같으면 ‘다음 생에 다시 보도록 합시다, 다음 생에 만나서도 같이 수행합시다.’ 이별을 그렇게 내일 다시 만날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돌아가시면서 모든 중생의 고통을 다 짊 어지겠다는 원을 세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가시는 분의 마음 자체가 달라집니다. 달라이 라마께 들은 법문인데 판첸라마께서 죽 음에 관한 부처님 말씀을 정리한 여러 수의 시 가운데 나오는 구절입니 다. 다음 생, 그다음 생, 수 없는 생을 태어나더라도 모든 중생이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 내가 모든 방법과 역량을 발휘하겠다고 원을 세 운 내용입니다. “죽음의 사선에서 두려움이 없게 하소서. 보살은 죽음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모든 중생이 죽고 나도 죽습니다. 일체중생 의 고통을 내가 다 짊어지고 가겠습니다.” 이것이 대승 불교의 핵심이니 이것을 모른다면 불교를, 대승을 한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흔히들 이런 얘기를 합니다. “죽은 뒤에 어떻게 될지 누가 아느냐? 죽 으면 다 끝 아니냐?” 하지만 죽은 뒤에 그냥 끝나는 것이면 얼마나 좋겠 습니까? 죽은 뒤에도 자기 업대로 환생합니다. 사람으로 환생할 뿐만 아 니라 육도 어디든 업에 끌려서 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죽 음을 맞이할 때 혼미해지지 말고 꼿꼿하게 원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다 음 생에 어느 곳에 다시 태어나던지 중생을 위해 살겠다는 원을 가져야 만 원생 할 수 있습니다. 업에 끌려서 태어나는 것이 범부의 업생이라면 발원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 보살의 원생입니다.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제 끝이구나, 이렇게 단견을 갖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보살로서도 맞지 않 고 부처님 가르침에도 맞지 않습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다음 생에 중 생을 위하겠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죽음을 맞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수행자는 죽음을 깊이 관찰합니다. 누구에게나 오고 언제든지 오고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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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내 것이라고 했던 모든 것을 다 잃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져야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은 알면서도 죽음을 회피합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깊이 관찰하지 않기 때문에 삶에 대한 애착이 너무 많습니다. 요즘에 웰빙과 함께 웰다잉이 유행입니다만, 말뿐입니다. 수행하여 죽음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 웰다 잉입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금강경』의 말씀처럼 “불취어상 여여부동(不取 於相 如如不動)”한 도리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게 된 사람을 도인이라 고 합니다. 육조 스님은 돌아가시려는데 옆에서 우니까 다시 일어나서 깨 우침을 주고 가셨다고 합니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은 그대로 앉아서 700 명의 대중에게 설법하고 물을 말이 더 없는지 물은 다음 없다고 하니까 간다고 하고 가셨답니다. 가시고 나서도 일주일 동안 그대로 앉아 계셨 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느냐? 혼미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기 때문 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 도리를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누구나 닥칠 수밖에 없는 이 문제 에 대해 명확한 길을 알지 못하면 불교를 수행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해 봤자 별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종교가 여태까지 죽음의 문제에 대해 나 름의 가르침을 내놓았지만, 이 문제를 가장 명확하게 해결한 종교는 불 교 외에 없습니다. 우리는 100년 뒤에 이 자리에 없습니다. 100년 뒤에 이 건물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내 뼈와 살이 어디 산천의 나무가 되어있을지 풀이 되어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허망 한 것들에 집착하면서 그렇게 번거롭게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음 앞에 서 정리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죽음의 문 제를 얘기하면 다들 피하려고만 하지만 들으셔야 합니다. 본인을 성찰해 보고 내가 사선에 도달했을 때 정말 흔들림이 없겠는가, 집착이 없겠는 가, 이런 자각의 시간을 가지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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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수행의 조건
우리는 사는 동안에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밥 먹자고 만나기도 하고 일로 만나기도 하고, 그중에는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동료도 있습니 다. 세속 인연들은 좋은 관계일 수 있으나 마지막에 가서 생각하면 허망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허망하지 않은 만남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 다. 우리는 법을 통해서 부처님과 만납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가 생각했을 때 부처님과 만나는 것보다 숭고한 가치는 없습니다. 법을 지닌 스승과 그 법을 배우고자 하는 제자의 만남은 아름답습니다. 나는 경전을 볼 때 항상 “여시아문 일시(如是我聞 一時)”에서 ‘일시’에 주목합니다. 스승과 제자가 정신적으로 교감을 나눈 그때를 생각합니다. 깨어있는 순간의 만남, 아름답고 빛나는 만남, 이것은 세속 인연과 비교 할 수 없는 법연입니다. 옛날 순치황제 같은 이도 황제를 하다가 출가하 고 나서 “인생 3만 6천 5백 일이 출가자의 반나절만도 못하다.”라고 했 습니다. 그래서 옛 선지식들도 부모를 떠나고 세연을 던지고 숭고한 가 치를 찾아 법연으로 갔던 것입니다. 법을 만나 욕심을 버리고 진정으로 평화를 얻는다면 그 이상의 가치는 없습니다. 아름답다는 말도 그럴 때 쓰는 것입니다. 육조 혜능 스님은 깨침을 확인하고 나서 오조 홍인 스님에게 “정녕 이 법 외에는 없습니까?” 물었습니다. 오조께서는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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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스스로 욕망과 번뇌를 모두 버리고 성자가 되는 법 외에 다른 것은 없 다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제가 오늘에서야 사람이 되었습니다.”라고 하 셨습니다. 깨닫기 전에는 우리가 껍데기만 사람이지 사실상 사람 아닌 모 습으로 삽니다. 욕심부리면 표범의 모습이 됩니다. 제 몸보다 무거운 먹 잇감을 발톱으로 꽂고 나무 위로 물고 올라가는 표범처럼 우리가 그런 모습으로 살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이라면 사람으로 산다고 말하기가 어 렵습니다. 수많은 만남 속에서 그 만남을 법연으로 가꾸어나가기 위해서 는 지금의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지 자각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는 법 을 만났어도 수많은 핑계를 대고 게을리 합니다. 나는 못생겼고, 키도 작 고, 여자로 태어났고, 돈도 없고, 공부 좀 하려니까 늙었고, 다리도 아프 고, 가지가지입니다. 지금은 아이가 고3이라서 못한다는데 조금 지나면 둘째 아이가 고3이 됩니다. 그러다가 본인이 늙어서 치아가 빠지고 몸이 안 좋아지면 몸 핑계 대고 공부를 미룹니다. 항상 못하는 핑계를 대는 사 람치고 잘된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원래 몸이 좀 안 좋을 때 공부하 는 것입니다. ‘아, 내가 병들어서 덜덜 떨리는 걸 보니까 죽을 때는 이것 보다 몇백 배 두렵겠구나.’ 그때부터 발심도 되고 공부도 됩니다. 병이 나은 뒤에도 살아있을 것이라고 장담 못 합니다. 그러니 지금 본인이 맞 이한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지, 지금이야말로 모든 인연이 갖추어진 때라 는 사실을 자각해야 됩니다.
어째서 모든 인연이 갖추어졌다고 하는지, 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우주 속에 지구라는 곳이 있고 지구 속에 60만 종이 넘는 생명체 중의 한 종류가 사람입니다. 사람 숫자는 대략 80억인데 지금 여러분은 그 가 운데 한 명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개미나 나무늘보라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공부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되었고, 사람 가운데도 귀, 눈, 뇌 등 여러 가지 장애가 거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법문을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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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못 알아들어도 대충 이해하고 고개도 끄덕거립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는 곳에서 죽어라 일만 하는 형편도 아닙니다. 그러 니까 지금이 법을 듣기에 최상의 상태라는 말입니다. “제가 늙어서 공부 를 못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지금이 제일 젊소.” 한 해 지 나면 더 늙어집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고 다음 생에 정확히 어디에 어 떻게 태어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이 공부하기 딱 좋은 때입니다. 지금 내가 만난 이 조건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다행입니다. 부 처님께서 공부하기 좋은 조건으로 여덟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8 유가(八有暇)라고 합니다. 가(暇)는 겨를이 있다, 여유가 있다는 말입니 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면 공부할 겨를이 없을 텐데 조건이 갖추어져서 공부할 수 있으니 다행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지옥에 안 태어난 것이 다행입니다. 지옥에 태어났으면 너무 고통스러워서 못 살 지경인데 공부할 마음을 낼 수 있겠습니까? 지옥에 서는 죽고 살고 죽고 살고 반복하면서 빠져나오는 데 팔만 사천 년 정도 걸립니다. 공부는 생각조차 못 할뿐더러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고 들을 수가 없습니다. 눈도 캄캄하고 귀도 캄캄하고 감각이 어두운 상태에서 계속 고통을 당한다니 그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우리가 전생에 지옥 을 한 번은 가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생에 지옥에 안 태어난 것이 큰 다행입니다. 두 번째, 아귀에 안 태어난 것도 다행입니다. 욕심부려서 남 의 것을 훔쳐 먹고 빼앗아 먹은 사람들이 아귀가 됩니다. 그 과보로 배가 고파서 쫄쫄 굶는 데 떨어진 것입니다. 항상 허기에 시달려 불을 보고 먹 을 것으로 착각하는 지경에 공부할 생각을 내겠습니까? 세 번째, 축생에 안 태어난 것이 다행입니다. 축생에 태어나면 전생에 빚진 관계로 자기의 딸과 아들이었던 애가 본인을 잡아먹기도 합니다. 축생은 지혜가 없어서 법문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지옥, 아귀, 축생 세 가지 세계는 공부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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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여건이 전혀 안 되기 때문에 삼악도라고 합니다. 이 세 곳에 안 태 어나고 사람으로 태어나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다리는 땅을 지탱하고 감관이 온전하여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네 번째, 천상계에 안 태어난 것도 다행입니다.
천상계는 복을 누리느 라고 공부할 생각을 내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공부하기 나쁜 곳 이 장수천(長壽天)입니다. 사람이 그래도 죽는다고 해야 겁을 잔뜩 먹고 공부할 생각을 내는데 장수천은 너무 오래 살아서 죽는다는 생각이 별 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장수천에 안 태어나고 사람으로 태어나 생사에 급한 마음을 내는 것만 해도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누가 이 얘기 듣고 성불은 둘째 문제고 오래 살아봤으면 좋겠다, 장수천에 태어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할까 겁이 납니다. 다섯 번째, 변방에 태어나지 않은 것 도 다행입니다. 변방이란 법을 들을 수 없는 곳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오셨을 때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요? 지금 법문을 듣는 사람은 그 리 많지 않습니다. 바른 법을 들을 수 있는 곳에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티베트나 남방불교 스님들과 재가자들은 절 부근에 집 을 짓습니다. 내가 다음 생에 태어나서라도 법을 가르쳐 주시는 스승 곁 을 떠나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집을 사려면 가장 먼저 집값 올 라갈 곳을 생각합니다. 어디에 집을 사면 얼마나 올라갈지 돈 벌 생각만 합니다. 그 돈의 인과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래도 여러 분은 한국에 태어나서 절에 갈 수 있고 법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 엄 청난 선물을 만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여섯 번째, 몸에 큰 장애가 없는 것이 다행입니다. 몸과 정신에 극복할 수 없는 장애가 있을 때는 공부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얘기를 듣고, 나는 다행인데 너는 안 됐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은 불편한 대로 상황에 맞게 공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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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 괜찮지만 중풍이 오거나 하면 공부하기가 힘들어집니다. 뇌에 문제 가 생기고 감정조절도 잘 안 됩니다. 그러니 지금 이 정도 건강해서 눈으 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코로 냄새 맡을 수 있고 팔다리를 움직 여 오갈 수 있고 내 수발 내가 들 수 있으니, 설사 조그마한 오두막에 앉 아서라도 정진하겠다는 생각을 내야 합니다. 몸이 건강하다면 지금 처해 있는 그 이상의 완벽한 조건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금의 내가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공부할 조건을 다 갖추었는데도 말입니다. 예전에 전 송광사 방장 스님께서 누가 절을 짓는다고 하니까 “에이, 절이 없어서 공부 못 하나.” 그러셨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요즘 아파트를 보면 그렇게 좋은 토굴이 없습니다. 스위치만 켜면 냉난방이 되고 싱크대 있어서 밥 간단하게 해 먹을 수 있고 정진하다가 공원에 나와서 산책도 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몸에 좋은 환경을 만났으니 다행인 줄 알고 공 부해야 합니다. 조건보다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일곱 번째, 사견을 내지 않는 것이 다행입니다. 인과를 바로 보는 것이 정견이고 그밖에 다른 것은 삿된 견해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세계를 창 조하고 주관하는 존재가 있다는 견해, 세계는 원래 그렇게 존재한다는 견해, 이 몸이 곧 ‘나’라는 견해 등 여러 가지 사견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삿된 견해를 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디 누가 족집게처럼 잘 맞춘다 면서 그것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도 잘 알아맞히는 일이 있 습니다. 무엇을 잘 아느냐 하면, 여러분이 수행을 하면 부처가 될 것을 압니다. 부처님도 우리와 똑같습니다. 옛날에 야부 스님이 『금강경』을 해 설하면서 안횡비직(眼橫鼻直)이라 하셨습니다. 눈은 옆으로 찢어졌고 코 는 반듯한 것이 부처님과 다를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과 똑같이 생긴 우리가 부처님과 똑같은 정견을 가지면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 므로 불법을 만나 삿된 견해를 일으키지 않고 바른 견해로 들어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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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덟 번째, 부처님 계신 때 태어나는 것이 다행입니다. 지금 우리는 부 처님 없는 때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금강경』에서 이렇게 말 씀하셨습니다. “여래가 멸도에 들고 오래 지나서라도 이 얘기를 듣고 믿 는 마음을 내서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한두 부처님이 아니라 무량한 부처님 처소에서 선근을 심은 것이다.” 부처님께서 우리 에게 용기를 북돋우려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습 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다는 말을 듣고 마음에 반발이나 광란이 일어나지 않고 깨끗한 믿음을 낸다면 이미 수많은 부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전생에 여러 부처님을 만났고, 그래서 지금까 지도 불법이 좋아서 쫓아다닐 것입니다. 정법과 사법이 섞여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정법은 삿된 법을 끊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 없는 곳에 태어 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달라이 라마 존자님께서 1959 년도에 인도로 망명하셨습니다. 그 후로 계속 티베트 스님들과 재가 수 행자들이 6천 고지의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네팔을 거쳐 인도로 넘어오 셨습니다. 험난한 길에 생사를 걸어야 하고 다행히 살아서 넘어와도 인 도에서 난민생활을 해야 하는데 왜 넘어오셨겠습니까? 스승 없이는 못 살겠다고 온 것입니다. 스승이 없다는 것은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항상 이 생각을 합니다. 인간에게 눈이 있는 한 밝은 빛을 향하게 되어 있듯이 우리에게 정지(正知) 기능이 있는 한 스승을 찾게 되어 있다고 말 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또는 스승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을 참 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여덟 가지 다행스러운 일, 8유 가(有暇)입니다.
공부하기 좋은 조건으로 열 가지를 들기도 합니다. 이것을 10원만(圓 滿)이라고 하는데 8유가와 중복된 점도 있지만 수행할 때 욕심부리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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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바로 보면 우리에게 다 갖추어져 있는 조건들입니다. 첫 번째, 인간 몸 을 받은 것입니다. 잘 생기고 못 생기고는 별 의미 없습니다. 눈이 예쁘게 생겼든 코를 조금 높였든 상관이 없고 수행하기에 적합한 인간 몸을 받 아서 태어난 것이 중요합니다. 천상이나 삼악도에 태어나면 공부를 못하 기 때문입니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거나 너무 편한 곳에 있으면 수행할 마음을 내기 어렵습니다. 고락이 교차하는 인간의 몸을 가졌다는 것이 참 다행입니다. 두 번째, 법이 있는 곳에 태어난 것입니다. 세상에는 불법 을 만나기 어려운 곳도 있습니다. 너무 벽지라서 불법을 듣기 어렵거나 다른 문화권이라서 불법에 관심이 없거나 불교를 접할 수는 있어도 제대 로 배울 수 없는 곳도 있습니다. 한참 전 몽골에 갔을 때 새벽부터 출발 해서 사막을 하루 내내 달리다가 자동차 바퀴가 빠져서 중간에 조그마 한 집을 발견하고 거기서 자고 간 일이 있었습니다. 새벽 2시 하늘에 별 이 총총 쏟아질 듯 떠 있는데 저 초원 끝에 불빛이 하나 보였습니다. 그 불빛 하나 보고서 한두 시간 달리니까 그 집이 나왔습니다. 막막한 초원 에서 불빛 하나 보고 머물 곳을 찾아가듯이 인간은 법을 향해서, 밝음을 찾아서 갑니다. 그래서 항상 법이 있는 곳에 태어나기를 발원해야 합니다.
세 번째, 온전한 몸을 받은 것입니다. 다들 몸이 조금씩은 안 좋아도 상당히 온전합니다. 몸이 어느 정도 온전한 것도 엄청난 행운이니 수행의 원만한 조건에 들어갑니다. 네 번째, 전도업(顚倒業)과 무간업(無間業)을 짓지 않은 것입니다. 전도업은 인색하면서 나는 부자가 될 거라고 생각한 다든지, 살생을 하면서 나는 건강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꾸로 된 생활, 좋은 인과가 나올 수 없는 행위들을 하면서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전도업입니다. 무간업은 어머니를 죽였거나 아버지를 죽 였거나 스승을 죽였거나 스승 몸에 피를 흘리게 했거나 이러한 일들을 말합니다. 이런 일을 저지르면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해서 무간업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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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합니다. 무간업을 짓고 나면 법과 인연이 없어져버립니다. 여러분은 부모를 잘 만났고 부모를 죽이지 않았으니 무간업을 짓지 않은 것이 다 행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왕 한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나중에 정신이 돌아서 난장판을 쳤던 일도 있었습니다. 역사상 정권다툼으로 자 기 아버지 죽인 왕이 많은 것을 보면 업이 무거운 사람들입니다. 다섯 번 째, 불법을 믿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중생에게 맞는 보편 적인 법입니다. 보편적인 가르침이 아니라면 믿음을 내기 어려울 텐데 불 법에 믿음을 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입니다. 스승의 법문을 듣고 믿음을 내고 정진을 해서 원만한 덕성을 갖춰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 입니다.
여섯 번째, 부처님이 계신 때를 만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돌아가셨습 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교화하셨던 그 시절은 없지만 부처님 법이 이 어져 내려와서 지금도 우리가 경전을 통해서 법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만 약에 그러한 것이 하나도 없는 시대에 태어났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입니 다. 일곱 번째, 부처님께서 정법을 설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삿된 견해가 많은데 우리는 부처님의 정법을 만나서 그것을 기준으로 수행할 수 있습 니다. 지금도 바른 법을 설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냥 아무 법이나 들었다면 니르바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법이기 때문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고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 다. 여덟 번째, 스승들이나 대보살들이 이 세상에 머무시는 것입니다. 스 승들은 법을 펴기 위해 언제든지 이 세상에 환생하고 또는 보신으로 나 투십니다. 우리가 수행력이 낮아서 그분들의 가피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분들께서 이 세상에 우리를 구제하기 위해서 계신다 는 것을 믿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지옥 중생도 커다란 금 강수보살이나 연화수보살 등이 빛을 나투어 내려올 때 그 순간 고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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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쉰다고 합니다. 그 빛을 볼 수만 있어도 너무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아홉 번째, 법의 수레가 굴러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굴리신 법륜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우리에게 왔으니, 우리도 법의 수레바퀴가 계속 굴러갈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지구상에 법의 수레바퀴가 항상 굴러가는 곳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해도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달라이 라마를 비롯 해 수많은 선지식들이 법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해 지금도 부단히 노력 하고 계십니다. 이런 것이 수행하는 데 원만하게 갖추어진 외부 조건들입 니다. 열 번째, 법을 수행할 인연이 있는 것입니다. 스승도 있고, 절도 있 고, 경전도 있습니다. 한국에는 지금 삿된 것이 많지만, 잘 살펴보면 수행 할 조건이 있습니다. 한국은 경제적 조건도 좋은 편이라 가난해서 공부 못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의 지식수준도 상당히 높아져서 공부하기에 알맞습니다. 모든 조건이 공부하기에 적당합니다. 이상에서 소개한 조건 들이 갖추어져야 수행에 큰 장애가 일어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할 수 있 습니다. 그래서 8유가, 10원만이라고 합니다만, 말세에 태어난 우리에게 혹시 이 중에서 하나라도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수행의 조건에 대해 말씀드린 것은, 지금 내가 소중한 몸을 받았고, 그 런 위치에 태어나 있고, 그런 시간에 와 있고, 그래서 내가 빨리 이생에 공부를 해야겠구나, 이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받은 조건 에 불만을 갖거나 모자란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한국불교가 수행불 교로 가지 않고 복 비는 불교에 그친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없을뿐더러 불교가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도 없어집니다. 수행의 조건을 잘 갖추었는데도 혹세무민하는 일들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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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듣고, 사유하고, 실천하는 수행법
수행에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오늘은 문사수(聞思 修)를 통해 경전을 보고 수행하는 방식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른 말과 바른 행동이 모두 바른 견해에서 나오기 때문에 견해가 바르지 못 하면 결과적으로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없고 행복한 삶을 이룰 수 없습니 다. 인식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삶에 큰 영향을 주고 그 인식이 우리 삶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뿐만 아니라 이 지구 상에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지구온난화가 갈 수록 심각해지는데 이 문제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에 게 자동차 좀 줄이라고 하면 줄이겠습니까? 신나게 타고 다니면서 한편 으로는 비가 너무 많이 온다고 불평합니다. 비하고 자동차하고 무슨 상 관이냐 하겠지만 관계가 있습니다. 자동차에서 나오는 CO₂ 때문에 지구 의 기온이 점점 올라갑니다. 북극 얼음이 녹아내리고 해수면이 높아져서 기후이상이 생기고 그 때문에 전에 100mm 오던 비가 한꺼번에 200mm, 300mm씩 쏟아지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잘못된 행 동이 이런 위기를 초래한다는 자각이 없습니다. 또 사람들이 쇠고기를 많이 먹는데 이것도 기후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입니다. 소가 풀을 먹 고 내는 메탄가스가 지구온난화에 CO₂보다 훨씬 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 니다. 이제부터 자동차를 줄이고 고기도 좀 줄이자고 해도 그럴 의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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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 보입니다. 이 심각한 문제를 마주하여 원인을 바로 알고 극복할 대 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시대는 삶을 제대로 이어갈 수 없습니 다. 자각 없이 무한대로 화석연료를 쓰면서 무한대로 자동차를 팔고 사 용하는 생각을 바꾸지 않고서는 더 심각해질 상황을 막을 수 없습니다.
불자들이 바른 견해를 갖기 위해서는 부처님 말씀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불자들은 교주께서 가르치신 내용이 뭔지도 모르고 불교를 믿는다고 합니다. “경도 필요 없고 계도 필요 없고 바로 깨달으 면 된다.”라고 하니 이런 난센스가 없습니다. 물론 육조 스님처럼 오랜 전 생에 다 닦아서 이런저런 단계들을 넘어섰다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특수한 사례를 모두에게 적용시킬 수는 없습니다. 대한민국 5,000만 인 구 가운데 대여섯 명만 뽑아서 도인을 만들고 나머지는 불자이건 말건 상관없다면 몰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바른 견해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면 부처님 말씀이 담긴 경전을 반드시 공부해야 합니다. 『금강경』에서 “부처가 다 이 경에서 나왔다.”라고 했습니다. 삼세 여래가 이 가르침에 의해서 나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르침을 배울 생각 없이 절에 다닌다면 그저 복 빌러 다니는 사람이고 절은 복 장사나 해서 먹고 사는 곳이 됩니다. 가끔, 선방에 다니니까 경전을 잘 모른다고 하는 출가 자들을 보게 되는데, 창피한 줄 알아야 합니다.
경전이 만들어지고 유통되어온 역사를 알면 경을 결코 가볍게 대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닫고 나서 45년 동안 당신이 깨달은 내용을 가 르치셨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 그것도 근기가 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 서 가르치다보니까 문제가 생기고 보완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 완에 보완을 거듭해서 수준을 높여가면서 말씀한 것이 초전법륜, 중전법 륜, 상전법륜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자 제자들은 그 말씀들이 잊힐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오백 아라한들이 왕사성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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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 칠엽굴에 모여서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하신 말씀을 기억해서 암송했 습니다. 기억력이 좋은 아난존자가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로 시작해서 끝까지 암송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증명법사가 되어, 나도 들었는데 그 것은 조금 다른 것 같다는 의견도 내고, 그 자리에서 서로의 기억을 검토 하고 확인해서 첫 결집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암송으로 전승되던 경 은 불멸 후 400년경 4차 결집 때 문자로 기록이 됩니다. 이렇게 생각해봅 시다. “경전도 필요 없고, 계율도 필요 없고, 바로 깨달아버리면 그만이 다.”라고 한다면, 만약에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면, 그 아라한들이 왜 결집을 했겠습니까? 경·율·론 삼장이 공부 에 필요하기 때문에 결집해서 후세에게 남겨주신 것입니다.
4차 결집 때부터는 경을 패엽에 기록했습니다. 패엽은 파초나무 일종 의 잎사귀인데 종이보다 오래 간다고 합니다. 거기에다 펜 같이 생긴 철 필로 긁어서 기록을 하고 천연 열매의 물감을 바르면 인쇄된 것처럼 글 자가 나타납니다. 패다라나무 잎에 썼기 때문에 패엽경이라고 합니다. 중 국에서는 대나무를 얇게 쪼개서 거기에 기록했기 때문에 죽간이라고 합 니다. 종이에 인쇄하기 전까지 죽간과 패엽이라고 하면 중국의 경전과 인 도의 경전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부처님의 방대한 말씀이 정확하게 남았고 그 경전을 통해서 공부하는 방법을 배우고 실 제 수행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경전은 부 적이 되어있습니다. “『천지팔양신주경』은 언제 읽으면 좋습니까? 『금강 경』을 생일에 읽으면 좋습니까? 이사 가려는데 무슨 경을 읽어야 좋을까 요?” 경이 결집되고 유통된 과정의 중요성을 모르고 자꾸 기복적으로만 사용한다면 우리가 불법을 쇠퇴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역사 이래로 부처님의 제자들만큼 기록을 중히 여긴 사람들이 없습니 다. 부처님의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했고 제자들의 논서와 주석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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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불경을 유통하기 위해서 종이의 사용 이 활발해졌고, 구텐베르크보다 70년 가량 앞서 세계에서 첫 번째로 금 속활자를 만들었습니다. 1377년 『직지심체요절』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 아 활자는 그 전에 발명되었다고 추정합니다. 인도, 중국, 한국의 불교인 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유통시키기 위해 그만큼 애쓰신 것은 사람들의 수 행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경전이 필요 없다고 한다면 매우 안타까 운 일입니다. 경전이 필요 없다는 얘기는 사마타와 비파사나 수행의 마 지막 단계에서 경전도 벗어놓으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불자들이 경의 내 용을 모르면서 경전을 부적이나 안정제처럼 사용한다면 재가든 출가든 무늬만 불자입니다. 경전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대단히 중요한 수 행 방법이라는 점을 알아야 됩니다. 법회 또한 법을 유통시키기 위한 수 단이고 발심과 수행을 위한 자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경전을 공부해서 지혜를 얻는 데는 문·사·수 세 가지 방식이 있습니 다. 첫 번째, 문(聞)은 스승으로부터 경을 듣는 것입니다. 스승은 제자가 법에 들어갈 수 있도록 경을 설명할 책무가 있습니다. 천번 만번이라도 방편을 통해서 알아들을 때까지 해야 합니다. 경을 모르는 사람이 혼자 읽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혼자 읽어서는 그 안에 담긴 뜻을 알 수 가 없기 때문입니다. 2,600년 전에, 우리나라 사람도 아니고 인도 분이 하 신 말씀인 데다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알아듣기 어렵게 된 면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보자가 혼자 읽으면 내용을 이해하기 가 어렵고, 그 가르침을 실제 수행에 적용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법맥을 이어온 좋은 스승에게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경을 배우 는 이유는 스승에게 들어서 본인의 잘못된 생각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듣고 많이 아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스승은 의사이고 경을 배우는 것은 약이자 수술이라고 보면 됩니다. 부처님 말씀을 듣고 내 생각과 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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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보고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아서 고쳐야 합니다. 부처가 될 때까지 스승에게 끊임없이 법문을 듣는 것이 사홍서원의 “법문무량서원학”입니 다. 들어서 바른 생각이 일어나고 바른 생각이 기억되고 바른 생각으로 잘못된 생각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 경전 공부의 첫 번째입니다.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스님들 법문이 다 옳은 얘기냐고 궁금해 할 수 있습니다. 미얀마와 티베트 스님들의 예를 들까 합니다. 미얀마에 는 삼장법사가 있습니다. 남방에서는 48장경을 공부하는데 이것을 다 이 해하고 외우고 충분히 토론하고 남을 위해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을 삼장 법사라고 합니다. 그냥 존칭이 아니라 옛날 우리나라 과거시험에서 선교 양과를 두어 승려를 인정했듯이 미얀마도 국가고시를 봐서 삼장법사를 허가하고 여기에서 선발된 사람은 국가가 보호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설 법하기 때문에 경이 틀림없이 전승됩니다. 또 티베트, 라닥, 부탄, 시킴, 따왕 같은 밀교나 대승불교 쪽은 하루에 8~9시간씩 16년 정도 경전 공 부를 합니다. 공부 깊이에 따라 스승의 단계도 나뉩니다. 게쉐도 그중의 하나이고 게쉐 안에도 여러 단계가 있어서 교육 체계가 잘 잡혀있습니다. 이런 정도의 사람들이 경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부처님 말씀을 완전히 자기화한 것은 아니어도 법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남을 가 르칩니다. 이 나라들을 보면 우리나라 불교는 반성할 점이 많습니다. 제 일 나쁜 것이 법을 설명하면서 법을 모른 채 자기 마음대로 가르치는 것 입니다. 설법을 한다면서 법이 아닌 이야기를 하거나 아니면 복 장사를 하거나 심지어는 윤회가 없다고 합니다. 윤회가 없다면 대소승, 금강승 할 것 없이 경전을 다 없애야 합니다. 법을 쉽게 전달하려고 방편으로 그 랬다고 변명하지만 법 아닌 것을 법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법 사의 책임입니다. 법사의 말은 많은 사람들이 듣는데 그 말을 듣고 잘못 된 길을 가면 어찌하겠습니까? 서산 스님도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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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온 뒤 첫 길을 걸을 때 아무 데나 밟지 마라. 지금 내 발자국이 뒷사 람의 이정표가 된다.”
좋은 스승에게서 법을 바로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경전을 들어 서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논을 보아서 보 충합니다. 논에서는 경문을 그대로 인용해서 근거를 대지만 그 경문을 자 기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도 사이비가 안 되 려면 부처님과 동일한 정도의 성취자라야 가능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논의 해석을 볼 때 해석의 방식과 근거를 잘 살펴야 합니다. 누가 어떤 방 법으로 해석했는지, 개념 해석이 정확한지, 앞뒤 맥락이 맞는지, 무착 스 님이 어떻게 했는지, 세친 스님이 어떻게 했는지 정확히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논사들의 해석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부처님 말씀을 근거 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법을 계속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정법은 몇 가지 뼈대를 가지고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공성, 연기, 인과, 계율. 이것을 명확하게 설명하는가를 살피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법을 듣지 않고서는 수행을 시작할 수도 없으니 법을 잘 전수 받은 옳은 스승 으로부터 경전을 들어서 나의 잘못된 견해를 고쳐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문사수의 첫 번째 문(聞)입니다.
두 번째, 사(思)는 기억하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무슨 말 씀을 해놨는데 기억이 없으면 사유할 수도 없습니다. 내 기억 속에 부처 님 말씀이 정확하게 있어서 보고 듣고 하면서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방 쪽은 어린아이들이 6~7살 때 절에 들어와서 48장경을 외우고 비구 계 받을 때가 되면 250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웁니다. 그러니까 자기 가 뭘 잘못했는지 알고 부처님 말씀에 의해서 고쳐나갑니다. 북방 쪽도 경전을 철저하게 외웁니다. 한 20년 전의 일입니다. 인도에서도 아주 시 골이고 우리에게도 낯선 곳인 다람살라에서의 일입니다. 그때 인도는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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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 다반사였는데 그날도 묵는 호텔에서 전기가 나갔습니다. 9시쯤 되 었는데 천상의 소리처럼 경전을 읽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한 50~60명의 대중이 합송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 소리가 어디서 날까 하고 랜턴 하나 들고 나가서 길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꼬부랑길이라 엎어질 뻔 도 했지만, 소리 나는 곳으로 기다시피 찾아가니까 50여 명의 스님들이 박스 조각과 좌복을 깔고 앉아서 경을 합송하고 있었습니다. 전기가 나 가서 책도 안 보이는 곳에서였습니다.
여러분도 경을 하나 배우면 시로 된 부분이라도 합송하고 외우십시오. 절에서 신도님들에게 경전 외우라고 하면 절에 올 사람이 없을지도 모릅 니다. 늙어서 못합니다, 눈이 침침해서 안 보입니다, 목이 아파서요, 핑계 를 대면서 안 하려고 할 것입니다. 듣고 까먹더라도 껍데기라도 있으면 괜찮은데, 다 잊어버립니다. 껍데기라도 있으면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 위국……” 이렇게 외우면서 그 안의 내용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합송하 는 동안 경문을 따라 그 안의 내용을 사유합니다. 앉아서 골똘히 생각하 는 것만 사유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경도 권하는 것입니다. 한 자 한 자 써내려가면서 그 안의 내용을 인지하고 기억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천수경』도 목소리를 다듬으려고 읽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할 때, ‘구업을 깨끗하게 하는 진언 이구나.’ 인지하고 “원아속지일체법” 할 때 ‘빨리 일체법을 알았으면’ 이 런 식으로 구구절절 따라가면서 외우고 뜻을 새깁니다. 『천수경』 안에는 대승의 참회와 발원이 담겨 있고 좋은 내용이 많아서 읽어가다 보면 마 음에 와서 콕콕 닿는 데가 있습니다. 외우지 못하면 보고서라도 계속 읽 으면서 내 생각을 자꾸 경문과 맞춰 나가야 합니다. 『금강경』을 한 편 외 우면 길을 갈 때도 ‘저 물건이 얼마짜리일까, 저걸 살까 말까.’ 이런 딴생 각을 하지 않고 외우면서 걸어가게 됩니다. 바르게 기억하고 바른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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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는 이것이 문사수 중에 두 번째 사(思)입니다.
세 번째, 수(修)는 경을 듣고 기억한 것을 가지고 내가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내 공부를 해나가면서 남을 위해 설명해주면 내 공부 도 깊어집니다. 진짜 잘 가르치는 사람은 본인이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 이고 남을 못 가르치는 사람은 자기도 안 되는 사람입니다. 문사수는 법 사들만의 얘기가 아닙니다. 신도라고 해서 “나는 잘 모르겠고요, 그냥 절 에 다니는데 부끄럽습니다.” 이런 소리만 하고 있으면 능력이 생기지 않 습니다. 여러분도 가족들에게 차 한 잔 마시자고 해서 도란도란 앉아서 『금강경』을 설명해주십시오. 엄마가 스님께 들어보니 이런 내용이더라, 완벽하지 않더라도 나름대로 이해해서 다시 설명해보십시오. 그러지 않 고 그냥 절에 왔다갔다만 하면 가족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우리 엄 마는 맨날 빌러 다니는데 가만히 보니까 빈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 상관이 없네. 절에 돈 갖다 주는 거 엄마니까 말도 못하고 그냥 넘 어가지만 나는 안 믿어.’ 가족이 그렇게 해서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 이가 말 안 듣는다고 스님한테 데리고 가면 거부감만 더 커집니다. 처음 와서 절도 생소하고 사람도 낯선데 어떻게 친해지겠습니까? 평소에 절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아이한테 절 안 한다고 구박하니까 다시는 오기 싫어합니다. 이렇게 어긋나기 전에 법을 잘 설명해서, 부처님이 이런 말씀 을 하셨구나, 이해를 시켜야 합니다. 이해하기 시작하면 점점 수행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낼 것입니다.
『아함경』, 『금강경』, 『법화경』 등 곳곳에서 경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 다. 경을 지니고 외우고 베껴 쓰고 남을 위해 설명하라고 권합니다. “수 지독송, 서사, 위타인설”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중에서 요즘 은 경을 인쇄기로 찍어내기 때문에 사경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만 옛 날에는 사경을 매우 중시했습니다. 책이 귀해서 큰 절에 가야 겨우 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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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정도였고 필경사들이 베껴 써서 유포했습니다. 경 한 권을 구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그때 필경사들은 우대를 받았습니다. 그마저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도들은 직접 베껴 썼습니다. 베껴 쓰는 동안 경의 내용이 새겨집니다. 여러분도 남에게 주지는 못하더라도 자기 사유를 위해 사경을 한다면 공부에 매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렇 게 경을 가지고 문사수를 하나하나 공부해가면 바른 견해를 세우고 바 른 사유를 하고 나아가서는 한 명이라도 발심하는 사람이 나올 것이니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억지로 사람 끌어들여서 포교하지 않아도 저절로 포교가 될 것입니다.
문사수 수행은 부처님 이래로 수많은 선지식들이 제자들을 공부시킨 방식이었습니다. 이 전통은 지금도 남방과 북방에서 그대로 시행되고 있 습니다. 우리도 전수해오다가 조선 중기부터 전통이 끊어져서 지금은 경 전을 안 배워도 바로 깨달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경 전을 듣고 내용을 알아야 실행을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듣고 사유 하고 실행해서 얻은 지혜를 문사수 삼혜(三慧)라고 하는 것입니다. 혜(慧) 는 분별력을 뜻합니다. 이것이 생겨야 수행과정에서 내가 지금 뭘 잘못하 고 있는 줄 알아서 고쳐나갈 수 있습니다. 문사수 세 가지는 재가자건 출 가자건 기본으로 해야 합니다. 지금은 출가자들도 문사수 수행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경전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자기 수행도 깊지 않고 남에게 설명도 잘 못합니다. 팔만 사천 경전을 언제 다 보냐고 하지만, 다 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중요한 몇 가지만 알고 들어도 충분히 내용을 파악할 수 있고 앎을 토대로 자기 정진에 들어가면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문사수 수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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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쉼(니르바나)
가을이 점점 깊어갑니다. 남녘 들판은 벼 수확이 다 되어가고 북쪽으 로 올라올수록 조금 늦어지는 것 같습니다. 산에는 높은 곳에 단풍이 들 기 시작했고 벚나무 가로수는 이파리가 다 졌습니다. 은행나무 잎이 노 랗게 물들기 시작했고 은행이 익기 시작합니다. 이 계절을 인생에 비유하 면 우리가 살아온 결과를 생각할 때입니다. 식물은 봄에 움을 피우고 여 름에 자라서 왕성하게 작용한 결과 가을에 결실을 맺습니다. 인간의 가 을은 언제쯤일까 생각해보면, 50대 접어들면서부터가 아닌가 합니다. 지 금까지 살아온 결과를 수확하는 계절에 내가 무슨 과실을 수확할지 생 각해봐야 합니다. 벼를 심었으면 쌀을 거둘 것이고 콩을 심었으면 콩을 거둘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인과의 법칙이니 아무것도 심지 않 고 수확을 바라면 도둑이 될 것이고 이것을 심어놓고 저것을 수확하려 해도 도둑이 됩니다. 가을을 맞이하면서 수행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우 리에게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바깥 공기를 쐴 때 ‘아, 내가 평생을 살면서 선한 일도 못하고 수행도 못하고 그래서 말년이 싸 늘하고 외롭구나.’ 그런 것을 깨우쳐주는 찬바람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습니다. 깊어가는 가을을 맞이하여 오늘은 수행의 마지막 결과인 열반 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불교를 가장 잘 나타내는 대표적 술어가 열반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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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nirvāṇa)’라 하는데, 중국의 번역가들이 열반(涅槃)이라 음역 하고 뜻으로는 적멸(寂滅), 멸도(滅度), 원적(圓寂)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니르바나나 열반이나 원적이나 한국사람 입장에서는 다 외국어입니다.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쓰다 보니 지금 한국에서는 열반이라 는 말을 죽음의 뜻으로 사용합니다. ‘큰 스님께서 열반에 드셨다’, ‘신원 적 영가시여’ 이런 정도로 쓰이는 실정입니다. 우선 말을 정확히 이해해 야 부처님께서 무슨 의도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니 르’는 부정 접두어로 ‘아닐 불(不)’과 같은 뜻이고 ‘바나’는 바람이 분 다는 뜻입니다. 니르바나는 바람이 잠잠해졌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자연현상을 차용하여 사람에게서 번뇌가 사라진 상태를 니르바나라고 하셨습니다. 끊임없이 불던 바람이 멈추듯이 계속 일어나던 번뇌가 더 이 상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바나’에 ‘니르’를 붙인 것입니다.
열반이라는 말을 통해 부처님께서 목적하신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것은 분명 고통과 번뇌를 없애서 우리를 편안한 곳에 이르게 하려는 것 이었습니다. 고통이 일어날 때 우리는 불행합니다. 고통은 어떤 식으로 일어납니까? 내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을 겪을 때, 내가 아끼던 것이 무너질 때, 모든 것이 무상한 데서 고통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고고(苦苦), 괴고 (壞苦), 행고(行苦)라고 합니다. 이런 고통은 무엇 때문에 일어납니까? 탐 진치 때문입니다. 탐진치 때문에 고통이 일어난다는 것은 공식입니다만, 그러면 탐진치는 무엇 때문에 일어납니까? 아(我)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아’를 주장하는 브라만 교는 살아 있을 때는 이것 때문에 열반에 이르지 못하고 죽은 뒤에 간다 고 생각했습니다. 신을 믿는 대부분의 종교들이 그런 주장을 하고 영원 한 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에 대한 애착이 일어나서 고통에 빠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불교의 니르바나는 죽어서 가는 곳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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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라 고통의 원인이 되는 번뇌가 다 사라진 상태입니다. 탐욕이 사라지 고, 분노가 사라지고, 어리석은 생각이 사라졌을 때 고통이 사라집니다. 탐진치의 원인이 아(我)에 대한 고집 때문이니 무아가 되지 않고서는 절 대 삼독을 없애지 못합니다. 그래서 니르바나는 무아를 전제로 합니다.
불교의 목적은 오직 번뇌를 없애는 데 있습니다. 불행의 원인이 고통에 있고 고통의 원인이 번뇌에 있기 때문입니다. 불행이 다 사라져서 바람이 그친 것처럼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이르면 그곳이 열반입니다. 우리는 열 반도 극락도 죽어서 가는 곳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극락도 불행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져서 항상 즐거움이 있다는 뜻입니다. 마 음이 잠시 편안해진 것이 아니라 그 상태가 지속된다는 뜻에서 극(極) 자 를 붙였습니다. 극락세계가 서쪽으로 십만 팔천 리 가면 있다고 하지만 물리적으로 어디 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육조 혜능 스님은 십만 팔 천 리를 10악과 8사가 없는 상태라고 해석하셨습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열 가지 악과 여덟 가지 삿된 견해를 버렸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 니다. 번뇌를 버리지 않고서는 극락과 열반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결국 누구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그렇게 되는 것이고, 어디를 가 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고, 나중에 죽어서 되는 것 이 아니라 지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니르 바나의 본뜻입니다. 빌어서 다음 생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생에서 지금 내가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 열반의 핵심입니다.
탐욕을 부리지 않거나 화를 내지 않을 때 우리 몸은 편안하고 정신도 안정된 상태가 됩니다. 이것은 지극히 과학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정진을 하는 것은 탐진치를 버리기 위해서이고 무아를 체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지금까지 발견된 그 어떤 법으로도 편안해질 길이 없습니다. 잠시 편안함을 느끼는 데 그치지 않고 항상 편안하고 고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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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에 이르기 위해 정진하는 것입니다. 장엄염불에서도 ‘극락세계 십종 장엄’을 얘기하는데 극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탐진치만 없어지면 이 세상에 다 있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극락에는 모든 나무가 금색이 라고 합니다. 생명 자체에 ‘나’가 없고 탐욕심이 없다면 나무가 무슨 색 이든 소중할 테니 그것을 금색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육문상방자금 광(六門常放紫金光)’, 안이비설신의 육근에서 금빛이 나온다는 말 역시 탐진치를 버렸을 때 자비와 지혜가 나온다는 뜻입니다. 불교는 이것을 추구하는 가르침임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불교에서 열반은 수행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번뇌가 꺼졌다는 현상은 똑같지만, 수행의 차제와 깊이에 따라서 누가 이룩한 열반이냐에 따라서 차이가 있 습니다. 아라한의 유여열반, 보살의 무주처열반, 그리고 부처님의 무여열 반,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 열반입니다. 우리가 선행을 닦 는 것을 수행으로 생각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열반에 이르지 못합니다. 선 행은 예비행일 뿐입니다. 선행하는 가운데 내가 선행을 한다는 생각이 있 으면 아(我)가 있기 때문에 열반에 이르지 못합니다. 선행은 악행의 과보 로 고통을 부르지 않기 위해 하는 것이고, 이 선행이 예비행이 되어서 열 반을 향해 나아갑니다. 니르바나는 아라한과부터 시작하는데 이들의 열 반을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고 합니다. 유여는 나머지가 있다는 말로, 무의식적인 미세한 번뇌가 남아있어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열반입니다. 성문의 네 가지 단계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으로 이야기하는 데 유여열반의 완전한 성취는 아라한과가 되었을 때입니다. 앞의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은 닦아가는 상태입니다. 예를 들면 수다원은 사마타와 비파사나를 닦아서 도에 들어왔다는 뜻으로 입류(入流)라고 합니다. 사 다함은 수다원보다는 수행이 깊지만 욕됨을 받으면 한 번 움직이는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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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고, 아나함은 욕됨을 당했을 때 성질은 일어나지 않는데 그래도 참 아야지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아라한은 그런 생각도 없습니다. 이 중에 아라한만이 열반에 이른 성자입니다.
유여열반에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번뇌 가운데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일어나는 번뇌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는 번뇌입니다. 무엇이 탐이 난다든가 누구에게 화가 난다든가 하는, 의 식에서 일어나는 번뇌는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먹고 싶은 것, 잠자고 싶은 것, 성욕 등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번뇌는 거의 본능적 이라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랜 생을 겪으면서 장식(藏識) 속에 아주 깊이 기억되어 있던 것이고 내가 의식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본다면 금방 태어난 아기가 엄마의 젖을 찾고 젖꼭지를 물고 젖을 빠는 행동은 누가 가르쳐줘서 하는 것이 아니고 의식적으로 젖을 빨아야겠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생의 본능에서 그대로 진행되는 것입 니다. 성문의 4단계 중에 앞 단계들도 의식 차원의 번뇌가 일어나면 ‘아, 이것은 잘못됐구나.’ 하고 금방 알아차리고 수습합니다. 그러나 아라한 이 되고 나면 의식적인 번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경지도 아주 대단한 것입니다.
다음은 보살의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입니다. 아라한은 열반을 이루 고 거기에 머물러서 수행의 완성처로 삼는데 반해, 보살은 일체중생을 건 지기 위해서 머물지 않고 육도윤회를 스스로 반복하기 때문에 무주처열 반이라고 합니다. 모든 중생이 다 성불할 때까지 내가 쉬지 않겠다, 열반 에 머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한역 경전에서는 ‘불주선정(不住禪定)’이 라고 했습니다. 머물지 않고 당신 스스로 원해서 육도에 돌기 때문에 보 살의 생을 원생(願生)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보살은 육도 세계 어느 곳에 나 계십니다. 중생과 보살은 둘 다 윤회를 하는데 중생은 본인이 지은 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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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따라 가고 보살은 원하는 대로 갑니다. 저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원을 세우면 저 중생의 아들도 되고, 딸도 되고, 아버지도 되고, 친구도 되어 그들을 구제합니다. 『삼국유사』 사복불언(蛇福不言) 조에 나오는 이야 기가 그런 예입니다. 사복이 전생에 공부하고 다닐 때 경을 싣고 다녔던 수레를 끄는 소를 구제하기 위해서 다시 태어납니다. 전생의 소가 사복 의 어머니가 되었고 사복이 아들이 되었습니다. 뱀 잡는 땅꾼들이 사는 다리 밑 집에서 그 어머니 태속에 들어가 태어나서 16년 동안 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의 역할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지극정성으로 사복을 간호하 고 보살핍니다. 사복은 일부러 일어나지 않고 어머니가 그의 대소변을 다 받아주게 합니다. 그 어머니가 훗날 돌아가시자 사복이 그 어머니를 업 고 가서 장례를 치르고 본인도 어머니 묘에 함께 들어갔습니다. 한 사람 을 구제하기 위해 원생(願生)한 보살의 이야기입니다.
보살은 중생처럼 육도에 윤회하지만, 원해서 태어나기 때문에 중생이 아니고, 아라한의 니르바나를 이루었지만, 거기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무주처열반이라고 합니다. 이분들이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육도를 도는 것도 자비심 때문이고 선정에 머물지 않는 것도 자비심 때문입니다. 머물 지 않는 것이 보살의 주처가 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연등 부처님 전에 보리심을 발하고 그 보리심을 완성시키기 위해 육바라밀 수행을 하 면서 3아승지 겁을 무주처열반 속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초지 보살이나 문수보살, 관세음보살 같은 대보살들, 10지 보살들도 무주처열반 속에 머물러 계십니다. 그분들에게는 번뇌가 없습니다. 원하는 중생이 있다면 그 중생을 위해 세세생생 그곳에 가서 당신을 바칩니다. 달라이 라마께 도 제자들이 모두 다음 생에도 저희들을 가르쳐 달라고 원합니다. 달라 이 라마께서는 꼭 얘기하십니다. “그대들이 원한다면.” 우리가 보살님들께 기도하는 이유는 무주처열반에 머물러 계시는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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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님들이 우리를 잘 이끌어 주시고 더 복되게 살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라서입니다. 여기서 복은 욕망의 복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욕망을 성 취해서 이룬 복을 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큰 빌딩 하나 갖고 있다고 해 서 그 사람을 복이 많다고 하지 않습니다. 복이 많은 만큼 화근도 따라 오기 때문입니다. 복이 천억 있으면 화근도 천억만큼 생깁니다. 내가 전 에 어느 돈 많은 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심장이 안 좋았는데 미국 가서 수술하고 돌아왔더니 자녀들이 이미 재산을 다 나 눠 가질 생각만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곧 돌아가실 것 같으니까 나눌 것 나누자고 미리 분배할 준비를 했답니다. 이분이 화가 나서 자녀들에게 한 푼도 안 준다고 선언했는데 워낙 노린재라서 다른 곳에도 줄 생각이 없었답니다. 그렇다고 죽을 때 안고 가겠습니까? 그때는 성질나서 그렇 게 했지만 결국에는 죽고 나서 자녀들에게 재산이 갈 것이고 자녀들도 어 차피 저 재산을 자신들이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더랍니다. 그러니 돈 많은 것도 재앙과 연관 지어 봐야 합니다. 돈이 많다고 무조건 행복 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재산의 크기만큼 재앙의 크기를 봐야 합니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그래도 스님, 안 아프고 건강한 것이 좋지 않 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평소에 건강하던 사람 이 죽을 때 엄청 겁을 내던 일을 봤습니다. 감기에 걸려도 재채기 한 번 하면 바로 낫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70대가 되어서 암에 걸 렸습니다. 돌아가시려고 할 때까지도 병원에 가자고 하면 “에이, 의사들 한테 돈만 갖다 주는 그런 병원에 왜 가냐, 나는 건강하다.”라고 했습니 다. 돌아가실 때가 되어서도 욕을 했습니다. “의사들이 돈 들여 가지고 월급도 주고 좋은 장비도 사 놓았으면서 세상에 이런 병도 하나 못 고쳐 서 나를 죽게 만드냐.”라고 의사한테 화내고 자식들에게도 성질부리더니 나중에는 손발이 덜덜 떨릴 만큼 두려워했습니다. 평소에 건강을 자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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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사람은 죽음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적고 불현듯 닥치면 그때 가서 두 려워합니다. 자주 아프면 이러다가 죽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것도 수행에 도움이 되니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주 아픈 사람도 다 나쁜 것만 있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한 번도 안 아파본 사람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 문제가 드러납니다.
어쨌든 보살이 수행하는 방식은 일체중생을 건지려는 마음을 내서 어 디에도 머물지 않고 윤회하면서 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다. 대승에서는 이 계단을 못 밟고 올라가면 부처가 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무 주처열반을 완성하고서 보살의 10지를 넘어서서 등각, 묘각의 부처가 됩 니다. 밀교에서는 보살 10지를 이미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관세음보살, 문수보살도 다 부처님입니다. 당신이 늦추어서 성불을 안 하고 있을 뿐 이지 이미 육바라밀이 완성된 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보살들 에게 기도할 때는 복만 빌 것이 아니라 보살의 무주처열반을 생각하면서 보살의 길로 이끌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다음은 부처님의 무여열반입니다. 이제 아라한과는 다 통과해서 번 뇌는 사라졌고 일체중생을 위해 윤회하면서 육바라밀을 완성하고 중생 을 건지던 상황도 다 끝났습니다. 육바라밀행이 완성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면, 보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보시에는 재물로 베푸는 것, 법 을 베푸는 것, 두려움을 없애주는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재물로 베풀 때 심지어 내 몸이 필요하다면 내 몸까지 주는 것입니다. 법을 베풀 때는 나와 법연이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설법을 하는 것입니다. 두 려움을 없애줄 때는 수많은 중생이 생사를 윤회할 때 그들과 같이 윤회 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을 건지고자 따라 죽기도 하고 살 아서 이끌어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보시를 예로 들었지만 모든 바라밀 을 이런 식으로 다 완성했다는 의미입니다. 지계바라밀이 완성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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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무의식상태까지 중생을 해하려는 생각이 조금도 일어나지 않는다 는 뜻입니다.
여래께서는 육바라밀이 다 완성되신 분입니다. 이 가운데 지혜는 비파 사나(觀, 관)를 가리키는데 모든 것을 관찰해서 하나도 어긋남 없이 바르 게 일러주신 그것이 45년 동안 설법한 모든 내용입니다. 그 가운데 오류 가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이 대반열반에 드실 때 선정에 깊이 들어간 모 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호흡이 끊어지는 것도 그대로 바로 알고, 마지막 으로 수습되고 흩어지는 차크라의 빛도 그대로 다 알고 계셨습니다. 이 처럼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서 마지막 보살행마저도 마친 것을 대반 열반이라고 합니다. 무주처열반도 넘어서 이 세상에 다시 오지 않는 대 적멸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열반에 드실 때 그 모습을 보려 고 하늘의 천신들이 내려왔습니다. 천상의 신들은 수명이 길어도 대반열 반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부처님의 눈에는 그들의 모습이 보였 습니다. 그때 부채를 부쳐드리는 시자가 있었는데 여래께서 시자에게 한 쪽으로 비키라 하셨습니다. “내가 모두에게 대반열반의 모습을 보여주겠 다”라고 하시고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열반은 3단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열반이라는 말 을 쓸 때는 돌아가신 스님들을 높여서 ‘열반에 드셨다’라고 하지만 실제 로 아라한과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에게는 열반에 들었다는 말이 맞지 않습니다. 열반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신구의 삼업 이 모두 소멸한다는 뜻이지 죽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번뇌가 다 사라진 분은 살아있어도 열반에 든 것이고 죽은 뒤에도 열반에 든 것입니다. 번 뇌가 사라지지 않은 사람은 살았어도 죽었어도 열반에 든 것이 아닙니 다. 이것의 핵심은 바람이 잦아진 것처럼 번뇌가 사라지고 무아, 공성을 체험한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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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중생을 위한 끝없는 마음(사무량심)
옛날에는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진지 드셨습니까?” 이런 인사를 많 이 했습니다. 밤사이 돌아가시는 분이 얼마나 많고 굶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으면 그런 인사를 했을까요? 못 먹고 못 살 때 주고받던 인사말이지 만 요즘은 그때보다 시절이 좋아서 밤새 안녕한지 묻지는 않더라도 여전 히 안녕한지, 밥은 먹었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평소에 나누 는 인사말 속에는 친절한 마음과 상대방의 안위를 걱정하고 위하는 마 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저런 따뜻한 인사 중에 불교에 참으로 좋은 인 사가 있습니다. “성불하십시오.” 번뇌가 사라진 본고향의 맛을 보시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믿고 정진하는 것은 본 고향에 돌아가 기 위함입니다. 옛날 조사 스님들도 본고향에 돌아갔다는 말을 많이 쓰 셨습니다. 마치 외지에 나가 사는 사람들이 죽으면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두고 묻어달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일본의 나라에 가보면 북서향의 집들 이 많습니다. ‘나라’라는 지명이 우리말 그대로 나라라는 뜻인데요. 백 제 사람들이 유민이 되어 그곳에 자리 잡고 살면서 집을 한반도를 향해 지었기 때문이랍니다.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도공들도 고향으로 돌아오 고 싶어서 집을 고향 방향으로 짓고 살았다고 합니다. 인간에게는 고향 을 찾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가장 편안한 안식처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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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빛이 있어야 사물을 봅니다. 눈이 항상 밝음을 향하게 되어 있듯 이 우리의 심성도 밝은 곳을 향합니다. 그러므로 어두워지는 것은 스스 로에게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과 남을 해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면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어둠이 줄어들고 없어지면 그 마 음을 지혜롭다 하고 자비롭다 합니다. 인간은 밝은 쪽을 보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불교가 생겨서 2,600년 동안 지속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인간이 밝은 심성을 향해 나아가고자 끊임없이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 다. 불교인들은 그것을 자각하고서 스스로도 밝음으로 나아갔고 많은 사람들을 밝음으로 이끌어 자족하고 행복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했 습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하셨기에 부처님을 능인(能仁)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를 밝은 쪽으로 이끌어주는 자비를 뜻하는 호칭입니다. 밝은 쪽을 고향이라고 표현한다면 수행자는 귀향하려는 사람입니다. 본래 밝은 곳, 욕심과 번뇌가 사라진 곳, 깨어있는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교입니다. 불교의 불(佛, buddha)은 깨어있는 자(覺者, bodhi)로서 ‘밝은 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깨어있는 모습, 밝은 모습을 불광(佛 光)이라고 표현합니다. 중생과 부처를 구분하지만 어둡고 밝은 차이입니 다. 중생이 어두운 것은 탐진치 때문이고 탐진치는 아(我)에 의해서 일어 납니다. 우리가 아상을 버려서 탐진치를 없애고 깨어있는 상태가 되면 더 이상 어둡지 않습니다. 중생이 아니라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사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32상 80종호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고 묻자 사리불은 볼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외형으로 나타난 부처는 부처가 아 닙니다. 깨어있는 것이 부처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포교를 한다면 그것은 복 장사밖에 안 됩니다. 복이나 줄 수 있으면서 장사를 하면 몰라도 요 즘의 불교는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앞에서는 법을 얘기하면서 뒤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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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팔고 있으니 실로 양두구육이라 하겠습니다. 가게 앞에다 양머리를 걸어놓고 뒤로는 개고기 파는 일을 불교가 해서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는 당신이 가르친 법에도 매몰되지 말라고 경계하지 않으셨습니까? 법은 뗏목처럼 단지 건너는 수단이고 거기에 집착하면 법집이 된다고 하셨으 니 부처님을 우상으로 받들거나 절대자로 믿어서 모든 것을 해줄 것이라 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야부 스님도 금강경에서 “쇠로 만든 부처는 용 광로를 지나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을 지나지 못하고 흙으로 만든 부처는 물을 건너지 못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모양으로 있는 것은 다 녹아 없어집니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것을 깨닫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대열반에 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있는 마음으로 왜곡 없이 이 법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번뇌로부터 벗어나서 본바탕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 길을 가는 수행자 가운데 성문도 있고 보살도 있습니다. 아라한을 최고의 결과로 하고 수행하는 분들을 성문이라 하고 대승의 법을 수행 하는 분들을 보살이라 합니다. 보살 수행자는 무주처열반에 의해서 살 아갑니다. 오늘은 보살 수행자들이 갖는 마음 가운데 대단히 중요한 마 음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무량심이라는 법인데 대승을 얘기할 때 많이 거론하지만 실제로 열심히 닦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보살 수 행의 핵심은 ‘보디사트바’라는 명칭에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 ‘보디’는 깨어있다는 말로서 공성(空性)을 보아 견도에 들어 열반에 들었다는 뜻 입니다. ‘사트바’는 중생이라는 말로서 중생을 위해 중생의 모습으로 육 도에 윤회한다는 뜻입니다. 깨어있는 상태로 중생이 되어 열반에도 머물 지 않고 생사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해서 보살의 무주처열반이라고 합니 다. 보살이 윤회하는 근본은 보리심에 있습니다. 일체중생이 허망한 현 실 속에서 잠시도 쉴 새 없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고 저들을 나의 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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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 어머니로 보고서 다 건지겠다는 마음을 낸 것입니다. 어둠으로부터 건져서 본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겠다, 깨달음으로 이끌겠다는 뜻입니다.
보리심을 낸 보살에게는 자비희사(慈悲喜捨) 네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설사 보리심을 냈다고 하더라도 네 가지 마음을 갖추지 않으면 보살이 아닙니다. 우리가 농사를 짓는데 콩 씨를 뿌려놨다고 하더라도 잡초를 뽑지 않으면 잡초밭이 되듯이, 아무리 보리심을 냈다 하더라도 이 보리 심을 증장할 수 있는 밑바탕이 필요합니다. 즉, 마음 자세를 어떻게 갖느 냐 하는 문제인데 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사무량심입니다. 사무량심 을 완성한 분이 부처님이고 보살은 부처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이니 보 살의 길을 거치지 않고 부처가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보리심을 내고 사 무량심을 점점 확장시켜 나가는 이가 보살입니다. 무량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마음을 냈으니까 됐다는 것이 아니라 한정 없이 마음을 내는 것입 니다. 한없는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는 네 가지 마음을 한없이 계속 내야 합니다. 이 마음을 한없이 내지 않는다면 콩 씨를 심어놓고 물과 햇볕 등 이 부족해서 콩이 자랄 수 없는 것처럼 수행을 완성할 수가 없습니다.
사무량심 가운데 첫 번째 자(慈)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중생이 무량하기 때문에 보살의 마음도 무량합니다. 무량한 중생 가운 데 사람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습니다. 불교 안에서 편 협한 생각, 편 가르고 차별하는 생각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됩니다. 업이 다 르고 습이 다를 뿐입니다. 그 사람이 받는 고통을 보고 그 사람이 잘 살 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양을 가진 생명도 있고 모양이 없는 생명도 있다고 하 셨습니다. 지옥의 생명체도 있고 천상의 생명체도 있고 많은 형태의 중생 이 있습니다. 존재의 방식은 달라도 고통을 받는다는 점에서는 똑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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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보살은 그 생명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면서 행복으로 이끌겠다는 생각을 거듭해야 합니다. 그 생각이 없으면 마음이 좁아져서 민족주의, 종족주의, 지역주의, 국가주의, 이기주의에 빠지고 다른 생명들에게 피해 를 주기도 합니다. 지금도 인류가 가지고 있는 핵은 전 세계를 잿더미로 만들고도 남습니다. 이처럼 무지막지한 일을 해놓고도 강대국이고 선진 국이라고 떠들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이런 나라는 선근이 부족한 나라입니다. 자본주의도 일부 좋은 점이 있지만 빈부격차와 물질적 타락 을 만들어내는 제도입니다. 사람보다 돈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돈 없는 사람은 점점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신자유주의는 정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자유는 모두가 누리는 평등한 자유 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있는 사람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자유를 누리 는 이면에 삶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세속의 법에서도 모든 사람은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규정합니다. 보살은 이 정신을 더 넓혀서 일체중생을 사랑합니다. 모든 중생의 생명과 삶을 존중하기 때문에 만약에 내가 죽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상대편을 죽이지 않고 내가 죽는 쪽을 택하는 것이 보살입니다. 모든 생명을 사랑 하는 마음, 이 심성을 갖추어야 보살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두 번째 비(悲)는 중생이 잘못된 업으로 인해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슬 퍼하는 마음입니다. 중생은 스스로 고통을 부릅니다. 삿된 법을 믿고 삿 된 짓을 하기 때문입니다. 콩을 심어놓고 팥을 기대하듯이, 잘못을 저질 러놓고 좋은 결과를 바라는 것이 중생입니다. 보살은 이런 모습을 보고 슬퍼하면서 연민의 마음을 냅니다.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도록 끝없이 바 른길로 이끌려고 합니다. 그것을 교화라고 하는데, 내 편으로 끌어들인 다는 뜻이 아니라 벗어나도록 도와준다는 뜻입니다. 고통에 공감하고 슬퍼하는 비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심이 많은 지장보살은 지옥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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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들을 보면서 매일 우신다고 합니다. 화관을 쓰고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계신 관세음보살과는 달리 지장보살은 두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한 손에는 지옥 열쇠인 지팡이, 한 손에는 보명주를 들고 계십니다. 보명 주는 요즘 같으면 플래시인데 중생들이 어두운 곳에 있나 찾으러 다닌다 고 합니다. 그런 비심을 가져야 보살입니다.
불교 안에서 “놔두시오. 인과대로 받을 것 받는데 신경 쓸 게 어디 있 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을 보고 그런 말을 한다면 불교를 잘못 배운 사람입니다.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은 것 은 맞지만 안타까워서 ‘나는 어떻게 도와줘야 될까?’를 생각해야 불자 입니다. 자기 업 자기가 받았는데 당연하다고 하면서 방치하고 관망하는 건 보살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행동입니다. 사람이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원수거나 평소 관계가 안 좋은 사람이 잘못되면 은근히 고소 한 마음이 드는 게 사람마음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고난의 행군 때 북한 에서 사람들이 굶어죽는다는 보도를 보고 “이북은 아주 굶어 죽는답니 다.” 하면서 잘됐다는 듯이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TV를 보면서 굶주리고 얼어가면서 강을 건너는 모습을 보고 슬펐습니다. 그렇 다고 북한의 체제가 잘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북한은 아직 근 대국가도 형성되지 못한 것 같고 여러 가지 제도가 미비하고 인권, 자유, 복지 등의 측면에서 문제가 많습니다만, 아무리 잘못됐고 원수라도 마 음속에 연민이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아가 원수를 만들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엉뚱한 짓을 하고 위험한 짓을 해서 처 벌을 받지만, 한편으로는 짠한 생각이 들고, 저 사람은 뭘 착각해서 저렇 게 되었을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가 누구라도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 비심이 생겨야 불자입니다.
세 번째 희(喜)는 중생이 이고득락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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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듯이 남 잘되는 모습을 보 고 함께 기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보살은 사람들이 선업을 짓고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선재, 선재’ 하면서 기뻐합니다. 이렇게 수희찬탄 하는 것이 희심입니다. 남이 잘되었을 때 참 잘 됐다고 박수 쳐주고 내가 더 도와주고 동참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마음 없이는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천수경』을 읽어보십시오. 그 안에는 전부 이기심을 버리고 보살의 사무량심을 내라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우 리는 무슨 마음으로 『천수경』을 읽습니까? 돈을 잘 벌게 해주고 합격하 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건 되지도 않을 일입니다. 입시 철만 되면 창피합 니다. 부처님 앞에서 죽자 살자 절하는 모습이 TV 화면에 제일 먼저 나 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절이 기복처가 되었으니 안타깝고 속상합니다. 자기가 지은 복이 없으면 잘 될 리가 없습니다. 선업을 지어야 좋은 일이 생깁니다. 선업을 짓고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기뻐하고 그 일 에 동참해서 잘할 수 있게 옆에서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보살의 사무량심 중에 세 번째인 함께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항상 갖 고 있으면서 세상 모든 사람이 더불어 잘 살 수 있게끔 해주는 것이 보 살행입니다.
네 번째 사(捨)는 내 욕심을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나를 희생한다는 뜻 입니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내가 위하는 대상에게 나를 바치는 것입니 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과 같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부모가 무슨 보상을 받기 위해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를 낳았 을 때, 얘는 나중에 나에게 옷도 사주고, 용돈도 주고, 좋은 데도 구경시 켜주고, 아프면 병원도 데리고 다닐 테니까 지금부터 밥을 잘 먹이고 잘 키우겠다고 생각하고 키우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부모의 사랑은 거 의 맹목적입니다. 마찬가지로 보살이 일체중생을 위하는 마음도 맹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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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맹목적이란 말이 조금 안 맞는 구석이 있지만, 무엇을 바라고 해 주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바라고서 해주겠다, 무엇을 했으니까 자랑스럽다,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내가 복을 짓기 위 해 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내가 성불을 하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닙 니다. 『금강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설사 공성을 보고 깨쳤더라도 내가 깨쳤다고 하면 깨침에 장애가 된다고 했습니다. 내가 희생을 하고서 도 내가 희생했다고 한다면 희생한 ‘나’가 있게 됩니다. 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가 없어야 욕심을 끝까지 버릴 수 있고 그래야 모든 중생 을 평등하게 대할 수 있으니 보살의 이런 마음이 사심(捨心)입니다.
보살은 수행할수록 이 네 가지 마음이 끝없이 깊어지고 넓어지기 때문 에 사무량심이라고 합니다.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 모든 생명이 고 통스러울 때는 연민의 마음, 모든 생명들이 행복할 때는 함께 기뻐하는 마음, 모든 생명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마음, 이 마음들이 대 승의 바탕이 됩니다. 그래서 사홍서원 첫머리에 ‘중생무변서원도’가 나 오는 것입니다. 끝없는 중생을 내가 다 건지겠다는 그 마음 바탕이 사무 량심입니다. 이 마음이 있어야만 그를 보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마 음을 확립하고 그 마음을 실행해 나가는 방법이 육바라밀입니다. 육바 라밀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사무량심을 바탕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보리심을 일으키고 그 보리심을 확충시키는 것이 사무량심이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 육바라밀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갑자기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항상 ‘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한테 이익이 되면 좋은 사람이고, 나한테 손 해가 되면 나쁜 사람이고, 나의 경쟁자가 잘되면 싫어지고, 나와 동업을 해서 잘 되면 좋아지고, 이렇게 우리는 분별심으로 세상을 접합니다. 나 를 잣대로 분별하여 좁은 세계에 갇히면 무량한 마음을 쓸 수가 없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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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나를 버리고 중생을 위할 때 사무량심이 펼쳐집니다. 이 마음을 한계 가 없이 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되었고, 다른 것은 아직 안 되었고, 이런 것이 아닙니다. 대승의 보살행을 한다면 이 마음들을 고르 게 확대해 나가야 합니다. 기도를 하려면 이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즉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기도를 통해서도 사무량심을 키워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할 때 먼저 이기적으로 살았던 것과 남을 해쳤던 일에 대해 철저하게 참회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삶을 참 회해야 남을 위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보리심을 발하고 육바라밀을 실행해 나가려면 반드시 마음의 양을 키 워야 합니다. 좁은 이기심을 벗어나서 마음을 키워내는 것이 사무량심이 라고 부처님께서 밝혀놓으셨습니다. 『반야경』, 『열반경』, 『법화경』, 『화엄 경』 등 많은 경전에 사무량심이 나옵니다. 경전을 보더라도 글자만 갖고 읽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께서는 보리심을 발하고 마음의 양을 크게 확 대시켜서 평소 생활에 이 마음이 적용되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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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중생과 같이하는 네 가지 방법(사섭법)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취하는 네 가지 기본적인 태도가 사섭 법(四攝法)입니다. 보살은 보리심을 일으켜서 일체중생을 고통에서 벗어 나는 길로 이끌어가는 수행자입니다. 이러한 분을 리더라고 하고 사회의 목탁이라고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모습으로 행동하면 중생들이 의지하여 고통의 강을 건너게 될 것이고,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데 필요 한 행동 요령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사섭법은 중생을 받아들이는 법으로 서 중생들과 같이 살아가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고 그들을 깨달음으로 이끌려면 보살도 중생과 같이 있어야 하고 구체적인 행동 요령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실질적으로 이익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섭법은 사무량심과 함께 보살수행의 양대 축입니다. 사무량심이 마음자세라면 사섭법은 행동요령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불 교는 대승불교라고 하지만 사섭법이 이름만 존재하고 실제로 행해지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법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는 이 사섭법이 실제 행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섭법의 섭은 ‘당길 섭(攝)’으로 이끌다, 잡다, 거두다, 받아들인다는 뜻이 있습니다. 서로서로 위하면서 사는데, 어떤 방법으로 살 것인가, 중 생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저 중생들로 하여금 나를 어떻게 받아들 이게 할 것인가와도 연결됩니다. 중생에게 가까이 가지 않고서는 중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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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할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보살들에게 항상 사섭법으로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저 강 건너에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면 알 아서 헤엄쳐서 건너오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배가 있어야 합니다. 배를 가지고 가더라도 내가 산적처럼 보이면 배를 타려는 사람들은 불안 한 마음에 배를 타지 않겠지요. 뱃사공이 수염도 깎고 옷도 깔끔하게 입 고 친절하게 대해주어야 사람들이 안심하고 배를 탈 것입니다.
사섭법은 특별한 법이 아닙니다. 일상에서 경계심을 풀고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중생들은 본능적으로 경계하는 마음을 갖기 때 문에 그것부터 풀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진화하면 서 내 생명이 해를 입을 것을 제일 두려워하기 때문에 어떤 대상이 왔을 때 나를 해치지 않을까 하는 자기보호본능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방어막부터 치게 됩니다. 그래서 보살은 내 가 당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고양이도 새끼 때 눈 뜰 무렵부터 사람이 만지며 키우면 사람을 잘 따릅니다. 그렇지 않고 다 커서는 길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중생 역시 교 화하는 데 있어서 자신을 해치거나 해롭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나아가 저 사람을 가까이 해서 인연이 이어지면 행복하 고 편안하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섭법 중에 첫 번째가 보시섭(布施攝)입니다. 보살은 무어라도 줄 생 각을 가져야 합니다. 물건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필요한 물건을 주고 법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법문을 해주면 됩니다. 뭐 하나라도 줄 생각 을 해야 가까워지는 게 사람 사는 이치입니다. 주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 가 있습니다. 코미디언은 웃음을 줍니다. 웃음을 주는 것만으로도 경계 심이 풀리고 마음이 열립니다. 이처럼 보살은 가장 먼저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것을 줄 생각부터 해야 합니다. 제가 복지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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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한 것도 지역에서 살면서 밥값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였고 고통 중 에 가장 큰 고통인 가난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것을 파악 하고 나누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까워지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누구에게 무언가를 줄 때는 사심이나 바라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이 것을 주면 그도 나에게 다른 무언가를 주리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주고 받는 것이 세간법이라 줄 때는 받을 것을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주고받 을 생각은 청탁과 뇌물이 되겠죠. 하지만 불교에서는 무엇을 줄 때 아무 런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하물며 보살이 교화를 위해서 하는데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조건 없이 주어야 합니다. 조건이 나 기대도 없어야 하지만 상대에게 정말 필요한지 여부도 중요합니다. 상 대는 필요하지 않은데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헌옷이 가득해서 장롱이 비 좁을 때 다른 사람에게 옷을 준다면 그것은 보시가 아닙니다. 상대가 필 요로 할 때 필요한 것을 주어야 선물이고 보시입니다. 뇌물과 선물의 차 이입니다. 뇌물은 내가 필요해서 줍니다. 준 것에 상응하는 대가를 바라 면 뇌물이고 좋은 마음으로 상대에게 이익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주면 선 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작은 것은 선물이고 큰 것은 뇌물이라고 하는 데 보시는 물건의 양을 따지지 않습니다. 주고받는 가운데 기쁨이 있고 서로를 성숙시키는 것이 보시입니다.
인도 다람살라의 맥그로드 간지에 가면 타인의 도움으로 생계를 이어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분들이 내가 언제 오는지 물었다는데 이제는 저를 만나도 뭘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항상 그때가 되면 준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그분들에게 조그마한 불상 을 받았습니다. 아주 의미 있는 선물이었습니다. 6.25 사변 때 피난민들 이 부산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때 부산 사람들은 피난민들에게 방 한 칸을 내줬습니다. 본인들도 살기 어려우면서도 가족들을 한 방으로 옮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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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내게 하고 함께 살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이것이 보시섭입니다. 깍쟁 이가 베푸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불교 역시 베풀지 않으면 포교가 될 수 없습니다. 법으로 베풀든, 부처님의 지혜로 두려움을 누그러뜨릴 종교적 안심을 베풀든, 물질을 베풀든, 종단 전체가 베푸는 삶을 실현해야 포교 가 됩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사람만 많이 끌어모으는 것을 포교로 착 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포교(布敎)는 말 그대로 가르침을 널리 전하는 것 이고 그 첫 번째 조건이 베푸는 것입니다. 스님이건 신도이건 베푸는 것 으로부터 포교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보살은 이기적으로 사는 존재가 아 닙니다. 이타의 첫 번째가 보시이고 이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포교할 생각 은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기적인 사람의 말을 누가 믿겠으며 이기적인 사람의 행동을 누가 본받으려고 하겠습니까? 보살이 보리심을 일으켜 일체중생을 위한다고 했을 때 첫 번째가 보시섭(布施攝)입니다. 베푸는 것으로부터 섭수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을 필 요한 때 주는 것이 보시입니다.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애착이 가는 것 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나에게서 애착이 끊어지는 공덕이 이 루어집니다.
대만 자재공덕회를 세운 분이 증엄 스님입니다. 대만에 2,600미터가 넘 는 아리산 2천 미터 지역에 고산족이 살고 있습니다. 자재공덕회는 그분 들을 위해 병원을 지어 무료로 치료해주고 한 달에 한 번씩 이발, 목욕, 식사를 제공하고 선물을 드립니다. 그런데 그 선물 보자기가 크기가 다 다릅니다. 선물을 준비하면 보통은 같은 것으로 똑같이 준비하지요. 그 래야 공평한 것 같고 받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재공덕회는 스님들과 사회복지사들이 사전에 그들을 만나 필요한 것 을 미리 조사하여 각각에 맞는 선물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값 진 보시입니까? 꼭 필요한 물건을 주니까 받는 분들도 감사함이 훨씬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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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겠지요.
그리고 줄 때는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내가 줬다’라는 생각이 있으면 안 됩니다. 내가 줬다는 아상이 있으면 보상 심리가 생겨서 최소한 고맙 다는 말이라도 듣기를 바라게 됩니다. 고맙다고 안 하면 섭섭한 마음이 들고 서운한 마음이 들지요. 심지어 고맙다고도 안 한다고 형편없는 사 람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다시 할 생각을 내지도 않게 됩니 다. 부처님께서는 아함부에서 중도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 가 와서 내 팔을 잘라도 미운 생각을 내지 말고, 누가 와서 그 팔을 고쳐 줬더라도 고마운 생각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미운 생각을 갖지 말라 는 것은 그나마 이해가 가는데 감사한 생각마저 갖지 말라는 말은 이해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미움과 고마움은 모두 아상이 있어서 생기는 감 정입니다. 미움과 감사는 손등과 손바닥 같아서 언제든 넘나들 수 있습 니다. 손 자체가 없어지면 손등과 손바닥의 구분이 없어지듯이 아상이 없어지면 미움과 감사가 같이 없어집니다.
사섭법 중 두 번째는 애어섭(愛語攝)입니다. 화안애어(和顔愛語)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 마디가 미묘한 향이로다.’ 문수보살의 이 시가 화안애어입니다. 호주의 불자들이 달라이 라마께 교화를 요청하자 게쉐 스님 한 분에게 호주에 가서 법을 설하고 교화를 하라고 했답니다. 그 스님은 머리를 긁적이며 영어를 한마디도 못 하는데 교화를 어떻게 하냐고 난감해하니까 “영어 두 마디는 알잖아. Yes, No.” 그 두 마디로 어떻게 교화하냐고 하니 달라 이 라마께서 “가서 영어 배우는 동안에 사람들이 오면 못 알아들어도 그 저 웃기만 해라.” 하셨답니다. 영어 배우는 3년 동안 설법도 못하고 통역 도 안 되고 그저 기도하고 정진하면서 사람들이 오면 차 한잔하고 가라 하면서 웃기만 했답니다. 영어 배우면서 그냥 웃기만 했는데 그곳의 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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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300명이 금방 모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잘 안 웃습니다. 나부터도 그 렇지만 목도 뻣뻣하고 얼굴도 굳어있습니다. 다람살라 가서 티베트 스님 들의 웃는 얼굴과 편안한 얼굴을 보면 화 안 내는 편안한 얼굴이 사람을 다가가게 만든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화안(和顔)이 보살의 얼굴입니다.
애어는 부드러운 말과 위로하는 말입니다. 말투가 단지 부드럽다는 의 미가 아니라 자비심을 가지고 사람을 진정으로 대할 때 나오는 말이 애 어입니다. 인도의 수행자 간디께서 뭄바이에 머무실 때 어떤 분이 아이를 데려와서, 아이가 사탕을 많이 먹는데 못 먹게 얘기 좀 해달라고 했답니 다. 간디께서 2주 뒤에 다시 오면 그때 이야기해주겠다며 돌려보냈답니 다. 2주 뒤에 다시 오니 아이에게 “너 사탕 먹지 마라.” 그랬습니다. 별 얘 기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분이 여쭤봤답니다. “2주 전에 왔을 때 바로 얘기해주시지, 왜 2주 뒤에 다시 오라고 하셨습니까?” “아, 그때는 저도 사탕을 먹고 있었습니다.” 영혼 없는 거짓된 말을 하지 않으려는 진심을 알 수 있는 일화지요. 마음을 움직이는 말이란 이렇습니다.
달라이 라마께서 미국에 가셨을 때 일입니다. 오랫동안 마약을 복용했 던 사람이 있었는데 중독 치료를 받았지만 치료가 잘 안되었답니다. 그 사람이 달라이 라마 법회에 구경을 가게 됐습니다. 달라이 라마께서 그 사람 옆을 지나가다가 대뜸 그 사람의 손을 잡고 “그거 안 좋은 거니까 하지 마십시오.” 했답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는데 집 에 가서 생각해 보니까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하더랍니다. 마약 중독자의 모습은 겉으로 봐도 대충 알 수 있는데 달라이 라마께서는 혜안이 있으 시니 더 잘 아셨을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의 진심어린 말 한마디에 그 사 람은 마약을 바로 끊었다고 합니다. 애어의 기본은 그 사람을 깊이 사랑 하는 마음입니다. 사랑이 깔려 있지 않고는 싸움이 되기 쉽습니다. 여러 분도 남편에게 깊은 사랑이 있다면 술 먹지 말라는 말이 칼날같이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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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을 배격하고 공격하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 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애어입니다. 낯빛과 말이 수행의 덕 목이 됩니다.
사섭법 중 세 번째는 이행섭(利行攝)입니다. 이행은 몸으로든 말로든 생각으로든 이익을 주는 것입니다. 이익을 받은 사람은 이익을 준 사람 에게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그 사람과 가깝게 지내면서 도에 들 어올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이행섭입니다. 여기에서 생각해볼 부분이 있습 니다. 사람들은 여행을 다녀오면서 비행기나 면세점에서 술이나 담배를 선물로 사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술을 먹이고 담배 를 먹이고 싶을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하는 행동이 다 른 사람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보살은 남에게 손해 끼치는 일을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술 마 시는 사람들에게는 술을 먹지 말 것을 권합니다. 그 사람에게 이익이 되 는 쪽으로 권해야죠. 당장은 싫은 소리라 해도 자신에게 진정으로 이익 을 주는 말이라는 것을 바로 아는 사람은 민감하고 선한 사람입니다. 민 감하지 않은 사람도 당장은 모르더라도 나중에는 알게 됩니다. 그래서 보살은 한마디를 하더라도 잘못된 정신이 박히지 않게끔 깨어있는 말을 해줍니다. 진실하게 사실만을 말하고 성인의 말씀을 바르게 전합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좋다는 생각, 이롭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합 니다. 하다가 안 되면 축원이라도 합니다.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모 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빌어주어야 합니다.
사섭법 중 네 번째 동사섭(同事攝)은 보살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을 동(同)’, ‘일 사(事)’. 보리심을 낸 보살이 일체중생을 위 해 중생과 같은 일을 하면서 동행하는 것입니다. 토굴이든 큰절이든 같 이 살면서 법을 일러줍니다. 도인들은 도를 깨닫고 나서 동사섭을 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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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여기서 도를 깨달았다는 것은 번뇌가 다 했다, 욕심이 다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인도의 산티데바 같은 분은 도를 깨달은 뒤에 나란다 대학 을 나와서 살았습니다. 중생들 곁으로 가신 거죠. 그분이 어디서 돌아가 셨는지 모릅니다. 원효 스님은 견처가 있고 난 뒤에 경주 어느 다리 밑에 서 뱀 장사, 걸인들과 살았다고 합니다. 다리 밑 걸인들은 그 사람이 누 구인지 몰랐습니다. 원효 스님은 걸인들과 같이 살면서 빗자루를 만들어 서 함께 경주 곳곳을 청소하고 다녔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너무 좋 아서 그들이 오면 먹을 것도 주고 집도 지어주고 그랬답니다. 원효 스님 이 그렇게 지내면서부터 경주에 걸인들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 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박복하지 않도록 법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육조 혜능 스님도 16년간 쫓겨서 도망 다닐 때 사냥꾼들과 같이 다녔습니다. 사냥꾼이 활을 쏘려고 하면 “저 사슴은 새끼를 밴 것 같다”라고 못 쏘게 하고 “저 토끼는 다친 것 같다. 다친 동물은 쏘는 게 아니다.” 하며 못 쏘 게 했습니다. 따라다니면서 계속 트집을 잡고 못 하게 하니까 사냥꾼들 이 “그럼 나는 어떻게 먹고 사느냐”라고 했겠죠.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육조 스님은 “그대가 살생을 해서 먹고사는 것은 옳지 않다.”라며 살생 의 과보에 대해 가르쳐주어서 사냥꾼 스스로 활을 꺾게 만들었답니다. 이 렇게 같이 살면서 이끌어주는 것을 동사섭이라고 합니다.
스님들은 견처가 생긴 후로는 중생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꾸면서 세세 생생 태어납니다. 어머니가 되기도 하고, 아들이 되기도 하고, 남편이 되 기도 하고, 부인이 되기도 하고, 친구가 되기도 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을 법으로 이끌어 해탈케 합니다. 그런데 정작 불교의 구성원들이 이런 보 살행은 하지 않고 기복을 한다든지 앉아서 바로 깨달아 버린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누가 불법으로 들어오겠습니까? 이 사섭법은 보리 심을 일으킨 이들이 중생을 위해 기어코 해야 되는 일들입니다. 대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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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행은 높이 있거나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49재를 지내더라도 동 사섭의 마음으로 하면 됩니다. 설판 시주자가 되어 부처님께 공양 올리 고, 기도 올리고, 재에 참석한 대중에게 공양을 베풀고, 그리고 선망부모 와 망자들을 위해 시식을 베푸는 49재 또한 동사섭 가운데 하나입니다. 집안이 안 좋으니까 재를 지내고 조상이 앞길을 가로막는다고 재를 지내 는 것이 아닙니다. 재는 이처럼 법을 베푸는 중요한 의식입니다.
동사섭을 실천할 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동행한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역량이 안 되는데 함부로 했다가는 상대 를 돕기는커녕 그 업에 끌려가기 쉽습니다. 진정한 동사섭은 나의 도행이 깊고 견도가 되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큰 도인들께서 동사섭을 하셨습니다. 도인이 못 된 지금의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요? 사섭법을 항상 깊이 사유하면서 실행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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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중생의 행복을 원하는 힘(원력)
불교의 수행자들은 여러 단계의 수행을 거칩니다. 선행을 쌓기도 하고 도를 닦아 성문이나 보살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라한이나 보살도 최종에 이른 것은 아니고 부처 되는 과정 속에 있는 분들입니다. 불교의 최종 목표는 부처를 이루는 데 있으니까 ‘이룰 성(成)’, ‘부처 불(佛)’, 성 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란 각자(覺者), 즉 꿈에서 깨어난 자를 뜻 합니다. 그러므로 “성불하십시오.” 이 말에는 꿈에서 깨라는 경고의 의미 가 담겨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현실이기는 하지만 꿈 같고 환(幻)같은 것입니다. 깨고 나면 아무것도 실체가 없으므로 꿈이라 하는 것이고, 영화 스크린에 나온 영상처럼 실재가 아니라는 뜻에서 환 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 도달해서 일생동안 산 것이 무엇이 있 느냐고 했을 때 실제로 꿈을 꾸다가 깨어난 것 같다는 말입니다.
『삼국유사』에 있는 ‘조신의 꿈’도 그런 이야기이지요. 조신은 낙산사 홍련암의 스님이었습니다. 홍련암은 바닷가 바위 위에 지어놓은 암자라 서 그 밑으로 물이 들어와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자연의 오 케스트라가 수행을 도와주도록 설계가 되어 있는 암자입니다. 조신은 해 조음을 들으며 이 암자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여인을 만 나 아이도 낳고 사업도 하고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냅니다. 일생을 살고 나서 꿈에서 깨어보니 홍련암이었습니다. 기도하다가 잠깐 잠이 들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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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입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현실에서 겪는 생생한 고통과 즐거움이 전부 꿈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꿈에서 깨어난 이가 부처이니 “성불하십시오.” 는 서로 꿈에서 깨라고 경책하는 최고의 인사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보살행의 핵심인 원력(願力)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보리심 을 일으킨 보살이 중생을 건지기 위해 무엇을 원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대 승불교에서 또 하나의 핵심입니다. 원력은 보살이 중생 행복을 원하고 원력을 통해 힘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원하는 것을 소원이라 고 하는데 보살이 원하는 것은 원력이라고 합니다. 같은 원(願)이지만 내 용이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가 소원을 빈다고 했을 때는 대체로 개인적인 욕망을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이 소원을 빌기 위해 10년, 20년 기도처를 찾아다녔다 하더라도 자기 욕심만 강화될 뿐이지 원력과는 상관이 없습 니다. 처음부터 ‘일체중생을 건지겠습니다.’ 하는 이타의 원을 세워야 그 것이 원력으로 발현됩니다. 일체중생을 어떻게 고통으로부터 건질 것인 가, 여기서 출발해야 원력이 된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어떤 스님이 절을 하나 지었다고 할 때 무슨 뜻에서 불사를 일으켰는 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명예를 위해서, 혹은 문중이 살 기 위해서 절을 지었다면 그것은 원력이 아닙니다. 똑같이 절을 지었다 하 더라도 중생의 이익을 위해서 지어야 원력이 됩니다. 중생에게 이익을 준 다는 것의 첫 번째는 법을 펴는 것입니다. 절에서 경전을 인쇄하고 강의 하여 절에 오는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정진해서 득도한다면 요익중생, 즉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절에서는 지 금 무엇을 하는지, 불자들은 왜 절에 다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소원을 빌러 절에 가는 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돼지머리 얹어놓고 손이 발이 되 도록 빌 곳은 다른 데도 있습니다. 불교는 그런 것을 하기 위해 있는 것 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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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국제학술세미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불교를 비롯하여 개신 교, 가톨릭, 이슬람 등 6대 종교가 함께 하는 자리였는데 한 독일 학자가 한국불교는 샤먼에 가깝다고 비판했습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사실 이 그러니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의 불교는 욕망과 미신 을 부추기기 때문에 샤먼에 가깝습니다. 욕망이 강력하게 나오면 갖가지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께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믿고 어 리석은 짓을 하는데 빌어서 이루어지는 것은 절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과법에 저촉됩니다. 코로나가 창궐하니까 온갖 미신적인 헛 소문이 사실인 양 둔갑하여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린 사례가 많았죠. 사 람들의 두려움 때문에 과학의 외피를 입은 미신이 유행하는 것입니다. 두 려움과 무지 속에 있는 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보살은 무지를 벗어나 인과를 알고 과학적으로 사고합니다. 그렇기 때 문에 소원을 빌지 않고 원을 세웁니다. 보리심을 바탕으로 내가 일체중 생을 위해 성불하고 일체중생을 이끌어 깨달음으로 가겠다고 원을 세우 는 것입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어서 가자, 저 니르바나의 언덕으로.’ 이것을 실현하려고 큰마음을 내는 것을 서원(誓願)이라고 합니다. 원을 내지 않은 보살은 단 한 분도 없습 니다. 부처님께서도 어느 오랜 전생에 발원하셨고 그것을 본원(本願)이라 고 합니다. 그때의 발원이 씨앗이 되어 후생에서 싹이 틉니다. 『무량수 경』에 보면 아미타부처님께서 오래전 법장보살로 있을 때 48가지 원을 세웠고 그 본원을 다 완성하여 극락세계를 이루셨다고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천수경』 ‘여래십대발원문’에 나오듯이 열 가지 원을 세우셨습 니다. 예불 끝에 낭송하는 이산혜연 선사 발원문이 있지요. 선사가 세세 생생 보살행을 하기 위해 발원문을 짓고 매일 염송하셨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흉년 드는 세상에선 쌀이 되어 구제하고 모진 병이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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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에는 약풀 되어 치료하되 모든 중생 위하는 일 한 가진들 빼 오리까.” 이처럼 모든 중생의 이익과 행복과 성불을 기원하는 것이 발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보살님의 서원을 매일 읽으면서도 그 내용과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합니다. 자녀가 합격했으면 좋겠고, 우리 집이 잘 먹고 잘살면 좋겠고, 아파트 값이 올라가면 좋겠고, 사놓은 땅이 돈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보살의 원과는 천지 차이가 납니다. 저는 한국이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세밀한 부분까지 따진다면 부족한 부분이 있 지만 지금까지 경제성장을 잘 이루었고, 이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지 금 우리가 갖고 있는 마인드로는 앞으로 발전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개 개인이 이타심 없이 이기적인 생각만 한다면 우리 사회의 수많은 난제들 을 어떻게 풀어갈 수 있겠습니까? 사회문제에 조금이라도 자각을 해야 하고 이기심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살피고 행복을 주려고 노력 해야 경제성장에 버금가는 정신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을 세우지 않으면 보살이 아닙니다. 원만 세우고 행하지 않으면 그 또한 보살이 아닙니다. 약간의 선행을 했거나 경을 많이 읽었다고 보살 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보살은 일체중생을 건지겠다는 보리심을 일으킨 후에 사무량심을 내고 사섭법을 실행하고 자신이 세운 원을 실현해나가 는 사람입니다. 그럴 때 꼭 필요한 마음 자세가 있습니다. 뉘우치고 돌이 키는 참회입니다. 욕망으로 살아가던 중생의 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개 인이든 집단이든 특히 종교인들은 욕망으로 살면 필히 망합니다. 이기적 인 기도로 누구를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들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제 전 종정 스님이 서양에 다녀오신 후 해외에 나가서 보니 까 이제는 복 비는 것으로는 더 이상 안 되겠다고 법문을 하셨습니다. 이 기심을 부추기는 복 장사는 이제 그만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기적으로 살아왔던 지금까지의 태도를 끊겠다고 참회해야 합니다. 그런데 참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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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고 하면 불자들은 절을 합니다. 하지만 참회의 마음이 없이 병이 낫 는다,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마음이 여전하다면 그것은 참회가 아니라 방 아깨비처럼 절만 하는 수고로움입니다. 잘못 살아왔던 삶을 돌이키고 이 제부터는 그렇게 살지 않겠습니다, 일체중생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이렇 게 참회하고 원을 세워야 합니다.
중생을 위하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나쁜 결과를 가져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좋은 학교에서 잘 배워서 연구하지만 핵폭탄을 만들어 얼마나 골머리가 아픕니까? 우리나라 국방산업도 세계 적인 수준이고 그중에서도 K9 자주포는 세계에서 가장 잘 만든다고 하 는데 그것이 자랑스러운 일인가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미국, 러시아, 중 국 등 강대국들은 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경쟁적으로 만듭니다. 기술적 으로는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이것들은 모두 살상을 목적으로 합니다. 언 젠가는 쏘려고 만들어놓은 것이니 결국에는 사람을 죽이게 될 것입니다. 북한도 핵미사일을 개발했습니다. 이 모두가 중생을 위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이기적인 삶을 뉘우치는 것이 참회이고 이타적으로 살겠다는 결심이 발원입니다. 보살에게 참회와 발원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술 마시던 사람 이 후회하고 술을 끊고 남는 시간, 남는 돈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 언가를 하겠다고 결심한다면, 그것이 참회이고 발원입니다. 출가해서 공 부를 하더라도 중생을 위하겠다는 생각이 없다면 또 다른 자기 고집에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잘못하면 소승만도 못해집니다. 소승이라고 알려 진 스리랑카,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등을 가보니까 소승이라 고 이름 붙이기가 민망할 정도로 잘하고 있었습니다. 미얀마, 스리랑카 같은 경우엔 2600년 동안 지금까지 흔들림 없이 불교의 정신과 전통이 이어집니다. 사마타와 비파사나를 한다고 경전을 무시하거나 계를 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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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중생을 무시하는 경우도 없습니다. 언제든지 마 을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문을 열어서 공부를 시킵니다.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 있는 절에 가보니까 야외에 큰 강단이 있었습니 다. 천여 명 앉을만한 크기인데 스님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법문을 합니 다. 중생을 위하겠다는 원력이 없으면 매주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법문 을 하겠습니까?
달라이 라마께서도 당신 스스로 중생을 위해서 하고 싶은 것을 항상 메모하십니다. 발원문을 적어놓고 매일 독송하십니다. 대표적인 발원문 에는 여래십대발원문도 있고, 관세음보살의 10원(願)과 6향(向), 아미타 불의 48원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원이 사홍서원입니 다. 홍(弘)은 크다는 뜻이고 서(誓)는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네 가지 큰 원 을 일으켜 이 마음으로 살아가겠다는 말입니다. 사홍서원의 원력이 없거 나 원력이 허약하면 보리심을 일으켰더라도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 치 콩을 심은 것과 같습니다. 콩이 아주 알찰 때 거기에 조건인 땅도 좋 고 물이 있고 햇빛이 비춘다면 순이 확 차고 올라와서 이파리가 되고 이 파리가 뻗어나면서 콩이 쑥쑥 커갑니다. 그처럼 원력이 탄탄해야 다른 조 건들의 도움에 의해 수행력이 커집니다. 그래서 모든 불교의식을 할 때 항상 맨 마지막에 사홍서원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사홍서원의 첫 번째가 “중생무변서원도”입니다. 육도에 윤회하는 생명 체가 끝이 없더라도 내가 다 건지겠습니다, 다 모시고 가겠습니다, 하는 원입니다. 내 성불을 늦추고 모든 중생이 반드시 성불할 때까지 뒷바라 지를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함께 성불합니다. 내가 먼저 성불하고 나서 중생을 건지겠다고 하면 아상이 생깁니다. ‘내가 견성한 눈으로 보 니 너희 중생들 꼴이 웃기지도 않네.’ 하기 쉽습니다. 그게 무슨 보살행 입니까? 중생이 끝이 없더라도 다 건지겠다는 마음으로 출발해야 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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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나와 인연 있는 몇 사람만 건지겠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는 당신과 직접 인연이 없는 사람들, 특히 말세 중생을 위해서 많은 말씀 을 남기셨습니다. 선을 하고 경을 보고 다른 어떤 수행을 하든지 “중생 무변서원도” 중생을 위한다는 전제가 없을 때는 모든 행위에 또 하나의 종교적 아상이 생길 뿐입니다. 그래서 사홍서원 첫 머리에 가장 중요한, 중생을 모두 건지겠다고 서원하는 것입니다. 현장 스님도 큰 원을 세우신 분이셨습니다. 당시에도 중국은 땅이 넓 고 사람이 많은 거대한 세계였습니다. 한국, 일본, 베트남, 태국, 몽골 등 도 전부 중국 문화권 속에 있었습니다.
현장 스님은 거대한 대륙의 사람 들을 부처님 법으로 제도하기 위해 인도에 법을 구하러 가셨습니다. 갔 다 오는 데 16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사막을 건너고 산맥을 넘 어서 죽음을 무릅쓰고 나란다 대학과 여러 곳에서 공부한 뒤에 경전을 가져와서 남은 평생을 경전 번역에 바치셨습니다. 그때의 번역이 지금까 지 전해져서 지금의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그분의 원력을 우리가 가피로 입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세운 원이 이렇게 큰 힘을 발휘합니다. 그 런데 지금 우리들은 어떤 원을 세우고 있습니까? 대다수가 내 소원만 빌 러 다닙니다. 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재가든 출가든 이기심에서 벗어나 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창피한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사람 들을 말법으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합니다. 중생이 끝이 없 더라도 다 건지겠다, 그래서 깨달음으로 다 모시고 가겠다는 원을 가장 먼저 세워야 합니다. 『반야심경』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 지사바하. 갑시다, 갑시다, 모두 함께 빨리 갑시다, 저 언덕으로” 마지막 구절도 우리가 지녀야 할 중생구제의 서원입니다.
두 번째가 “번뇌무진서원단”입니다. 일체중생을 건지겠다는 원을 세웠 더라도 번뇌가 끊어지지 않으면 중생을 건질 수가 없습니다. ‘아’가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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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있다면 내 욕망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어서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는 것도 중생을 속이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최종까지, 여래가 되어 미세한 번뇌마저 다 끊어질 때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공성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체험하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나를 비롯하여 영원성을 갖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 집착을 놓게 되고 번뇌가 끊어집니다. 나와 남의 구분도 없어져서 중생을 위하되 남을 구제한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쉽게 중생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번뇌 끊는 것을 등한시할 경우에는 결코 중생을 위하지 못합니다.
세 번째는 “법문무량서원학”입니다. 법문이 아무리 많더라도 반드시 다 배우겠다는 발원입니다. 법문은 성자들의 말씀이고 법문을 통해 우리 는 발심하고 수행합니다. 우리를 공부로 이끌어주는 것이 법입니다. 『금 강경』에서 “모든 부처님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다 이 경에서 나왔 다.”라고 했듯이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 발심하고, 원을 세우고, 깨달음으 로 들어갑니다. 선불교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는 과거와 달리 근래에 들 어 경전을 보지 말라고 가르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팔 만대장경은 전부 필요 없는 것이 됩니다. 다만 사마타에 깊이 들어갔을 때는 관념적인 것에 의지하지 말라는 취지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주 특 수한 수행에 들어갈 때의 이야기를 일반적인 경우에 적용해서는 안 될 것 입니다. 사교 입선을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다.
다람살라 토굴에서 잠깐 무문관 수행을 할 때 바로 옆 토굴에 노장님 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노장님은 달라이 라마 법문이 있다고 하면 무문 관을 열고 법문을 들으러 가셨습니다. 달라이 라마께서도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존자께서 『입보리행론』 법문을 하셨는데 제가, 그 법문 수 백 번 들었을 텐데 무엇 때문에 또 들으시는지 물었더니 들을 때마다 다 르다고 합니다. 그전에 안 들리던 이야기가 들리고 그전에 아는 것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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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차원 다른 것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 노장님은 법문하시는 존자님 의 얼굴과 눈빛을 한시도 놓치지 않고 쳐다보고 귀를 잠시도 딴 데 돌리 지 않고 듣고 있었습니다. 한마디 법문을 듣기 위해 그렇게 정성을 쏟고 집중을 합니다. 한국의 지금 풍조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깨달으면 그만 이라는 조급증 때문에 경전을 등한시하고 계율도 아주 쉽게 여깁니다. 이 런 풍조가 계속되면 말법으로 떨어져 버릴 테니 그때 가서는 선을 닦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문무량서원학’, 언제나 좋은 스승으로부 터 법문 듣기를 원하고 경전을 중요하게 여겨 공부해야 합니다. 경을 공 부한 스님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앞장서서 경을 번역하 고 출판하고 해설해야 합니다.
사홍서원의 마지막은 ‘불도무상서원성’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정도 의 높은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기는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향해 갈 것이고 반드시 이루어 내겠다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원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중생무변서원도’로 시작해서 그것을 완성한 것이 ‘불도무상서원성’이고 그 과정 속에 ‘번뇌무진서원단’과 ‘법문무량서원학’이 있는 것입니다. 이 사홍서원은 모든 발원의 골격이 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 가지 발원, 관세음보살님의 10원과 6향, 아 미타부처님의 48원, 문수 보살님의 발원과 보현 보살님의 발원 등 모든 발원의 핵심이 바로 사홍서원입니다.
원을 세우고 그 힘이 확대되어 작동하기 시작하여 탄력이 붙으면 이것 을 원력이라고 합니다. 원력이 커지면 일체중생을 위하여 원생(願生)을 합니다.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지옥에 가서 태어나기도 하고 인간으로 태 어나기도 하고 아버지로 태어나기도 하고 왕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동물 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보살이 원생한 이야기는 많은 경전에 나오고 구 전으로 전해지기도 합니다. 화엄사 각황전 설화에 각황전을 짓기 위해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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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가 다음 생에 원생을 해서 중국 황제의 딸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 습니다. 원력의 내용을 모르면 그저 전설의 고향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보 살은 개인적인 욕망을 버리고 중생을 위해 살겠다고 마음을 낸 사람입니 다. 그렇게 방향을 바꾸면 사람이 100% 달라집니다. 여러분도 사홍서원 을 하실 때마다 보살의 원력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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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완성자의 세 가지 갖춤(삼신불)
불교에는 부처님들이 많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뿐인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뿐입니다. 부처님은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 니다. 절에 가면 실제로 많은 부처님이 계십니다. 절마다 아마타불, 비로 자나불, 석가모니불, 미륵불 등 모신 부처님이 다릅니다. 절 안에도 여러 부처님과 보살님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렇듯 과거, 현재, 미래에 셀 수 없이 많은 부처님이 계십니다.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 교는 유일이거나 절대가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연등불 과 미래의 미륵불도 계십니다. 한분의 부처님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청 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을 이야 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불신(佛身)에 대하여
법신(法身), 보신 (報身), 화신(化身)으로 나눠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법신, 보신, 화신, 삼신에는 다 ‘몸 신(身)’ 자가 붙어있습니다. 우리는 오온을 몸으로 여겨 왔기 때문에 법신, 보신, 화신도 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몸은 그런 형태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범 어의 kāya를 중국에서 몸 신(身) 자로 번역했는데, 물론 우리가 생각하 는 몸을 뜻하기도 하지만 어원을 보면 ‘모여 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 니까 법이 된 상태를 법신(dharma-kāya)이라고 한 것입니다. 불교에서 불신(佛身)이라고 할 때는 법 자체, 본질, 가치, 형태를 다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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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몸은 색·수·상·행·식으로 되어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처가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했던 오온 외에 진정 으로 완성된 부처가 되었을 때는 어떤 몸을 더 갖추어야 하는지, 삼신으 로 설명하겠습니다.
첫 번째 법신(法身)입니다. “법신 상주불멸야(法身 常住不滅也)” 이 글 귀로 인해 법신을 영원성을 갖춘 몸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 론 한 번 부처가 되면 영원히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맞 는 말이지만 영원한 어떤 당체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법의 몸을 갖추었 다는 뜻입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라고 할 때 ‘청정법신’이나 ‘비로자 나’는 같은 뜻입니다. 범어 ‘비로자나(Vairocana)’를 중국에서 법신으로 번역했는데 ‘완전히 깨끗하다’, ‘빛이 어디에나 두루하다’는 뜻입니다. 탐진치를 완전히 버려서 청정한 정신 상태, 그것을 빛으로 표현했습니다. 탐진치를 버렸다는 것은 무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영원불멸한 부처님 의 몸을 얻어서 법의 몸이 우주에 가득하다’고 하는데 이는 영원한 아 (我)로서의 법신이 아니고 아(我)라는 착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정신 을 말합니다. 그러한 상태를 각(覺)이라고 합니다.
법신 앞에 ‘청정’을 붙인 이유는 번뇌의 더러움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 아(我)입니다. 내가 있다는 고집에서 탐진치 를 일으키고 탐진치에서 온갖 번뇌들이 파생하므로 무아의 공성을 체험 하여 그 더러움으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났기 때문에 청정법신이라고 합니 다. 누구나 법신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지금 우리는 청정법신이 아닙니 다. 우리는 늘 아(我)를 중심으로 분별을 일으켜서 청정하지 않기 때문입 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손해가 되는지 분별해서 좋아하거나 싫어하 는 마음을 일으키고 말을 할 때나 행동을 할 때도 상대를 가려 애증을 나타냅니다. 이런 분별심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부처의 마음을 갖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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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합니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만 지금 우리가 일으키는 마음은 나를 중심으로 한 분별심이고 번뇌입니다. 그것을 중생심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염불할 때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원만 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 불(釋迦牟尼佛)을 부릅니다. 비로자나불에 귀의한다는 것은 내가 욕심을 버린 청정한 정신으로 돌아가서 의지하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싯다르 타가 부처가 된 일을 믿지만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신처럼 의지할 대상 으로 삼는 것이 아닙니다. 귀의한다는 것은 깨어난 정신에 의지한다는 의 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내용을 반야부에서 21년 동안 말씀하셨습니 다. 600부나 되는 광대한 경전이고 굉장히 중요한 말씀들이 들어 있습니 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이 모두 다 법의 본질인 법성을 깨칠 수 있고 누구 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법의 몸을 갖출 조 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으로 법신이 갖춰지는 것이 아니라 공성을 알고 나를 버리는 수행을 함으로써 바른 정신을 구축할 수 있다 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두고 법신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육조 혜능 스님 은 “법시정야(法是正也)”라고 하셨습니다. 법이란 바른 것이니, 바르다 는 것은 나의 욕심에 의해 판단하지 않는다, 분별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법의 세계, 깨침의 세계가 바른 세계입니다. 바르다는 것도 처음부터 정 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중심으로 분별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을 뜻합니다. 그것을 중도라고 하는데 누군가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런 사람에게 법이 이루어졌다, 깨쳤다, 법신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청정법 신 비로자나불이 어디 따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말하 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법에 어긋남이 없다면 청정법신입니다. 그것을 도 (道)라고도 합니다. 『원각경』의 원각(圓覺)도 법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원만하고 둥글어 찌그러지거나 모난 곳 없이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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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몸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지만 형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의 유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갖추어진 정신세계로서 그 세계 는 책을 수십만 권 읽었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세계는 나를 버리고 욕망을 버렸을 때 이루어지고 그 세계를 이루신 분을 부처 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그 세계를 완벽하게 갖추신 분이고 아직 수행하 는 보살들은 부분적으로 갖춘 분들입니다. 보살 초지인 환희지만 되어 도 공성을 체험하여 법의 세계가 이루어지면서 말을 하면 법에 맞는 말 이 나오고 행동을 하면 바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범부 중생인 우리는 법신이 될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아직 이루지 못했을 뿐입니다.
삼신 가운데 두 번째는 보신(報身)입니다. 노사나(Rocana)라고 하는데 수행을 쌓아서 공덕으로 이루어진 몸입니다. 보신은 보살행과 깊은 관련 이 있습니다. 누군가 평생 나쁜 짓을 했다면 그것이 쌓여서 나쁜 이미지 를 만들고 사람들이 그를 볼 때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반대로 노사나 불의 의미는 보살행이 쌓여서 중생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말합 니다. 보살은 오랜 생 동안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 을 행하면서 일체중생을 돕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5백 생을 통해 보 시행을 완성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보시에는 재보시, 법보시, 무외시 세 가지가 있는데 만약 무외시가 완성된 보살이라면 죽음을 앞둔 사람이 그 를 의지할 것입니다. 죽을 때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하면서 지장 보살 님을 떠올릴 것입니다. 이것을 보호주(保護主)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려 움에 처했을 때 나를 보호해 주실 주인이 계신 것입니다. 또한 굶어 죽게 되었을 때도 “부처님이시여, 관세음보살님이시여, 내가 당신을 의지하니 우리 식구와 세상 사람들 모두 굶어 죽는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십 시오” 한다면 오랜 생에 걸쳐 재보시를 완성한 불보살님들이 보호주가 되어 도움을 주십니다. 그러나 만약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기심으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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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았던 사람이면 누구도 그를 의지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대보살들을 의지하는 이유는 그분들에게 보호주의 공덕이 있기 때문입 니다. 우리가 간절히 그분들을 뵙고자 원할 때는 그 보호주의 몸이, 우리 와 같은 몸은 아니더라도, 상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꿈에서 보기도 하 고, 눈앞에서 뵙기도 하고, 그렇게 뵙지 않아도 보호주가 되어 주십니다. 경전 속에도 보호주가 되어 중생을 보호하는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달라이 라마께서도 중생들의 보호주가 되겠다고 원을 내신 분입니다. 다람살라에서 법회가 열릴 때면 존자께서 왕궁에서 법당으로 걸어 들어 오시는 길에 법당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탑돌이 하듯 한 바퀴 돌아서 걸어가십니다. 한번은 존자께서 법당 뒤편에 앉아 계신 노인 곁을 지나가 게 되었습니다. 머리도 하얗고 치아도 다 빠진 그 노인을 아시는지 손을 맞잡고 인사를 하셨습니다. 제가 옆에 있다가 보았는데 노인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실 때 힘들거든 내 이름을 부르십시오. 내가 당신 곁에 있어 주겠습니다.” 이런 모습이 보호주입니다. 우리 부모 님들 늙고 병들어 돌아가실 때 힘들어하시는데 그럴 때 보호주가 못 되 면 옆에 있기라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인데 많은 사람 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보살은 보리심을 발하고 일체중생을 위해 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육 바라밀을 행합니다. 하나하나의 행이 몸에 쌓여 공덕을 이루고 그 공덕 은 힘을 갖습니다. 육바라밀 중에 지계바라밀을 닦은 보살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내가 계를 잘 지켜서 세세생생 살생을 하지 않고 모든 생명 을 살리겠다.’ 다짐하고 지계바라밀을 닦았다면 지나가는 지렁이나 새 한 마리도 그 사람을 보고 놀라지 않습니다. 오랜 생 동안 생명을 죽이 지 않았기 때문에 저 사람은 나를 살려줄 사람이지 죽일 사람이 아니라 고 아는 것입니다. 동물들도 알고 지옥 중생들도 압니다. 이와 같이 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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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을 위해 바라밀을 닦아서 지혜와 선정과 대비의 공덕을 갖춘 몸을 노사나불, 보신불이라고 합니다.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은 오래전에 원 을 세우고 수행을 통해 그 원을 다 성취해서 보신을 이루신 분들입니다. 우리가 매일 부르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아주 오랜 전생에 법장보살 이 48가지 원을 세우고 수행하여 부처가 되신 경우입니다. 아미타불의 아(阿)는 부정 접두어로, ‘아닐 불(不)’이나 ‘없을 무(無)’로 번역합니다. 미타(彌陀)는 헤아림, 셈을 뜻합니다. ‘아’와 ‘미타’를 합하면 헤아릴 수 없는, 셀 수 없는 수명과 빛을 가진 부처님이라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끝 없는 수명은 장수한다는 뜻이 아니라 시간의 제약을 벗어났다는 뜻입니 다. 아(我)가 영원히 사라져서 생주이멸의 조작이 없는 법의 세계에 완벽 하게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 상태를 무량광, 무량수라 하고 여기에 불 (佛), 여래(如來)를 붙여서 아미타불, 아미타여래라고 합니다. 영원히 번 뇌가 일어나지 않아서 그대로 공성에 이르고 공성을 바탕으로 연기의 세 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도 중생을 위하겠다는 마음을 낼 수 있습니다. 이미 내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냈다 하더라도 나에게 별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공덕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속에서도 복이 없으면 자식에게 뭘 좀 해주려 해도 해줄 것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 군가에게 무언가를 해주려면 나에게 힘이 있어야 합니다. 중생을 구제한 다고 했을 때 내가 육바라밀을 닦아서 공덕을 쌓지 않았다면 구제할 힘이 없습니다. 남에게 회향하는 힘은 육바라밀을 닦아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살생을 많이 한다고 할 때 내가 오랫동안 불살생을 닦 아 공덕을 쌓았다면 나의 공덕이 그에게 비추어집니다. 그래서 그를 설 득할 때 도덕의 힘이 붙어서 그 사람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이러한 공덕을 갖추면 다음 생에 태어날 때 몸이 바뀝니다. 공덕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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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추었기 때문에 32상 80종호의 몸으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면 듣는 이가 그대로 100% 받아들이게 됩니다. 오랫동안 중생 을 위하고 아픔을 어루만져준 힘이 쌓여 있기 때문에 그를 바라보는 중 생에게 그의 말씀이 설득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법신은 우리 눈에 보이는 몸이 아니고 보신 또한 경계가 높은 보살들에게만 보이는 몸입니다. 그 러나 법신과 보신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공 덕을 쌓은 정신적인 몸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덕을 표현한 것 으로 우리 가까이에는 탑이 있습니다. 공덕을 쌓아올린 모양이 탑의 몸 체입니다. 옛날 신라나 고려 시대에는 탑을 크게 조성하여 부처님의 공덕 을 기리고 신행을 독려했습니다. 제가 언젠가 미얀마 쉐다곤에 가 봤는 데 그곳은 탑의 나라입니다. 장엄하게 조성해놓은 탑들을 보면서 ‘이 나 라는 공덕과 보신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 니다. 이러한 공덕을 갖출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기심과 아상 때문에 공덕의 탑을 자꾸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삼신의 세 번째는 화신(化身)입니다. 화신은 변화신(變化身)의 준말로 서 다양한 형태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갖가지 모습으로 변화해서 나타 나는 몸입니다. 우리 몸은 화신이라고 하지 않고 업신(業身)이라고 합니 다. 업에 의해, 업이 이끄는 대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화신은 업에 의해 태어난 몸이 아니고 원력에 의해 태어난 몸입니다. 중생을 건지기 위해 일 부러 몸을 다시 받아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육도에 윤회하는 중생의 모 습으로 태어나고 모양도 우리와 같지만,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법이 살 아있고 정신이 살아있고 공덕이 갖추어진 몸이 화신입니다. 중생을 위해 수많은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천백억 화신이라고 합니다. 관세음보 살님께서도 32응신(應身)을 자유자재로 나타내 갖가지 방편을 써서 중생 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십니다. 부처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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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축생, 사람, 천신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사람 중에서도 남녀노소와 계급을 가리지 않고 각각에 맞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중 생이 다가가기 쉬운 모습을 하고, 그들을 거듭나게 만들어주는 마중물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화신으로 태어나 일체중생을 위해 몸을 쓴 분들 이 많은데, 이를테면 신라시대의 이차돈 스님이 그런 분입니다. 재가자로 알고 있는 분이 많은데 불법을 널리 펼치겠다는 원을 세우고 출가하여 한 생의 몸을 바친 스님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세 가지 몸을 다 갖춘 분을 여래라고 합니다. 심신을 나누어서 이야기했지만 여래는 한 몸입니다. 이 한 몸을 본래 청정한 몸, 공덕을 쌓은 몸, 중생을 위해 나타난 몸으로 나눠서 청정법신 비로자나 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이렇게 말합니다. 일신이 든 삼신이든 지금 우리 몸은 부처가 아닙니다. 청정하지도 않고 공덕을 갖추지도 못했고 중생을 위해 나타난 몸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我)만 갖추고 그것을 버릴 생각이 없이 욕심만 가득합니다. 욕심이 채워지지 않 으면 성질을 내고 멍청한 짓을 반복하면서 속이 텅텅 빈 채 오온으로 된 몸만 아끼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업으로 태어나서 업으로 죽습니다. 언 제 태어났는지, 어떻게 태어났는지 캄캄하게 모르고 태어났다가 또 어디 로 갈지, 어떻게 갈지 모르고 정신이 나간 채로 가게 됩니다. 이 몸을 받 았을 때 지금부터라도 발심을 하고 공덕을 쌓아가야 합니다. 이를테면 육바라밀 가운데 보시, 그중에서 재보시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점점 힘을 길러나가면 됩니다. 재보시를 많 이 해서 어느 정도 완성이 되면 그 사람이 사는 지역은 가난이 없을 것입 니다. 경주 최씨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 동네 가 보면 지금도 기와 집이 즐비합니다. 경주 최씨는 근방 백 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있으면 자 신의 책임이라고 했답니다. 우리는 옆집에 굶어 죽는 사람이 있어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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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벌어서 내가 먹는데 네가 무슨 참 견이냐?” 이런 소리나 하고 삽니다. 남을 위할 마음이 없으면 베푸는 공 덕의 힘이 갖추어지지 않습니다.
법당에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세 분을 모셔 놓았지만, 이 는 한 분의 여래를 의미합니다. 극락세계에 아미타불이 계시고 사바세계 에 석가모니불이 계신다고 하지만 마찬가지로 법신은 모든 부처에게 완 성되어 있습니다. 극락도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으면 그곳 이 극락이고 불국토이니 삼신을 따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삼신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복을 줄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면 이 부처님 저 부처님 찾아다니면서 복을 비느라 바쁘기만 하겠죠. 또 한 부처님은 부처님이고 나는 그렇게 될 수 없는 존재로 생각한다면 수 행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법당에 여러 부처님이 앉아 계신 것처럼 보 여도 실제로는 모두 동일한 부처가 될 분들입니다.
삼신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이렇게 발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 에게 법신, 보신, 화신, 여래의 삼신이 다 갖추어질 가능성이 있구나. 내가 이것을 다 갖추기 위해 애를 써야겠다. 청정법신을 갖추기 위해 번뇌를 없 애고 욕심을 버려야겠구나. 일체중생을 위해 나를 버리고 육바라밀을 거 듭 수행해야겠구나. 중생에게 이익이 될 몸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나 성 불의 길로 나아가야겠구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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