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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사

진옥스님 설법집_행복수행론 2편

석천사 2025.03.15 17:26 조회 수 : 272

21장

영원한 자성이 없는 나(무아)

 

불교의 핵심 철학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시대 인도의 다른 종교나 사상과 닮은 점들이 많습니다. 그래 서 다른 가르침과 불교를 구분 짓는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께서 한 번은 힌두교의 큰 공양 의식인 푸자(Puja) 에 축사를 해달라는 초청을 받고 가신 적이 있습니다. 가서 보니까 티베 트불교나 인도 바라나시에서 예식 올리는 힌두교 행사나 거의 비슷하더 랍니다. 그렇다면 다른 게 무엇인가? 다른 건 딱 한 가지, 무아라고 하셨 습니다. 염불하고 합장하고 촛불 켜고 하는 등의 예식은 같은 문화권에 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거의 비슷합니다. 촛불을 켜면 불교이고 촛불을 안 켜면 불교가 아닌 것이 아니잖습니까? 그런 것은 문화와 습속으로서 의미를 갖겠지만 그보다는 그것을 통해 무엇을 지향하느냐가 중요한 문 제입니다. 불교에서는 그 지향점이 바로 무아(無我)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아함경』부터 시작해서 『원각경』 『화엄경』 등 대승경전 에 이르기까지 무아를 말씀하셨습니다. 무아가 여러 갈래의 불교를 관통 하는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무아를 설명하는 일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과학자들이 우주를 연구하고 물리현상을 관찰하여 부분 적으로나마 무아를 설명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확실하게 증명하지 못했 습니다. 부처님께서는 2,600년 전에 깨달으셨을 때 이미 무아를 확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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셨고 그 뒤로 일관되게 무아를 가르치셨습니다. 따라서 무아를 기초로 하지 않는 수행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일단 불교가 아니라고 보면 됩니 다. 그러면 무아란 무슨 뜻입니까? 단어의 뜻대로 하면 ‘내가 없음’인데 “그럼 지금 있는 너는 뭐냐?”라고 하면 “글쎄, 잘 모르겠는데?” 이렇게 됩니다. 무아라는 말에 혼돈이 와서 자꾸 유아와 무아로 묻고 답하는 상 황이 벌어집니다. 그 이유는 무아의 뜻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 문입니다. 『금강경』에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이라 한 것도 무아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21년 동안 반야부 경전 600부를 말씀하셨는데 그 반야도 무아에서 나온 것입니다. 무아 상태에서 나오는 생각이 반야(prajñā)입니다. 용수보살이 말씀하신 공성이나 마명 보살이 말씀하신 진여자성도 무아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무아라고 할 때 그 ‘아(我)’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무아를 알 수 있습 니다. ‘아’의 개념을 혼동하는 여러 가지 사례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 가 ‘불성’이라는 말을 듣고 그것을 ‘아’로 이해하는 경우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불성이 있다고 하면서 영원성을 주장하 고 있습니다. 영원성을 주장한다면 아무리 그것이 불성이라 해도 불교라 고 할 수 없습니다. 불성은 깨달을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 기 성냥이 있다고 합시다. 성냥개비가 있고 유황을 묻혀놓은 판이 있습 니다. 성냥개비를 판에 마찰시키면 불이 발생합니다. 조건이 갖추어져서 불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성냥에 불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입니 다. “일체중생 실유불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생은 모두 깨달을 수 있 습니다. 육도에 윤회하는 가운데 깨달을 가능성을 가장 잘 갖춘 중생이 사람입니다. 지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잘 발달된 대뇌 가 있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고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판단합니다. 이 뇌가 깨어있는 정신을 발생시킬 수 있는 조건입니다.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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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에 법문을 듣고 선정을 닦는 수행이 더해지면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불 생불멸하는 영원한 불성이 있어서 그것이 다 알아서 주재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브라흐만교나 외도입니다. 우리는 감각기관과 뇌를 갖추 고 그것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아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영원성에 대해 간단하게 개념 정리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영원한 것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이야기할 때, 상대(相 對)를 끊었다는 뜻에서 절대(絶對)라고 합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존재는 상대성을 피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 달라 질 수밖에 없고 공간의 위치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부 처님께서 말씀하신 제행무상입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 있 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브라흐만이나 유일신을 믿는 종교인들 대 다수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절대적인 존재인 창조주가 있어서 세계를 만 들어내고 주관한다고 믿습니다. 창조주 브라흐만에서 떨어져 나온 것을 ‘아트만(我)’이라 하고 이것이 죽으면 다시 브라흐만으로 올라가는 것 을 윤회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영원성을 가졌다는 브라흐만도, 거기 서 떨어져 나왔다는 아트만도 증명된 적이 없습니다. 그저 관념상의 존 재로 있다고 생각할 뿐이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영원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브라흐만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주장을 착각이라고 하셨습니다. 『아함경』을 보면 부처님께서 5온, 12처, 18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것 이외에 무엇이 있다면 다 착각일 뿐입니다. 5온, 12처, 18계는 각각의 요소들이 모여서 인연에 의해 잠시 존재할 뿐이기 때문에 자성이 없다는 뜻에서 무아라고 했습니다. 영원성을 가진 자체 성 질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를 ‘진옥’이라고 하면 진옥이라는 이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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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가 영원한 자성을 가진 존재이겠습니까? 진옥은 이름일 뿐이고 색· 수·상·행·식의 요소가 모여서 몸과 정신을 순간순간 발생하는 것이 지 영원한 실체 같은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용수보살께서 “무자성고공 (無自性故空)”, 즉 자체 성질을 가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공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오해합니다. 공성이라는 게 따로 있는 건가? 공성은 있는 것이 아니고 비어 있음을 표현하는 말일 뿐입니다.

 

옛날에 부처님이나 조사들께서는 공을 설명할 때 비유를 들어 설명했 습니다. 공을 빈 항아리 같다고 했는데요. 항아리 안에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예로 들어 공을 설명합니다. 비어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습니다. 나는 물을 비유로 듭니다. 물은 분자구조가 H₂O입니다. 수소 두 개와 산소 하나가 결합해서 물이라는 물질이 생깁니다. 수소와 산소 가 각각 있을 때는 젖어드는 습성이 없지만 결합해서 물이 되었을 때는 젖어드는 습성이 생겨납니다. 그 특성이 하나 생겨나지만, 그러나 이것이 영원한 속성은 아닙니다. 분리되면 없어집니다. 인간도 오온이 모이면서 갖가지 정신작용이 생기지만 그때그때 생겨난 작용이지 본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정신은 영원하리라 생각하는데 영원한 것은 없습 니다. 불교를 수행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자꾸 마음을 닦아서 영원한 나 를 찾는다는데 마음을 무엇으로 닦을 건가요? 마룻바닥 닦듯이 닦을 순 없지 않습니까?

 

이 도리를 잘 전해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종 5조의 수제자였던 신 수(神秀) 스님이 자신이 수행해서 얻은 경계를 시로 썼습니다. “신시보리 수(身是菩提樹) 심여명경대(心如明鏡臺)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 물사 야진대(勿使惹塵埃),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명경대라, 부지런히 닦고 닦 으면 먼지가 끼지 않으리.” 그때 절에 들어 온지 얼마 안 된 행자가 이 시 를 보고 벽에 시를 적었습니다.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명경역비대(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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鏡亦非臺)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보리는 본 래 나무가 없고 명경 역시 대가 없음이라,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때가 낄 것인가?” 공성에 대하여 확실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5조 홍인 스님이 두 사람의 오도송을 보고 행자에게 법을 전했으니 그가 바 로 6조 혜능(慧能) 스님입니다. 달마 스님과 혜가 스님 사이에도 그런 이 야기가 있습니다. 혜가 스님이 와서 “제가 마음이 몹시 불안합니다.” 그 러니까 “그 마음을 갖고 와라. 내가 편안하게 해주겠다.” 하셨습니다. 혜 가 스님이 나가서 한동안 마음을 찾았는데 못 찾았습니다. 이쪽으로 가 면 사라져 버리고 또 저쪽으로 가서 찾아보면 사라져 버리고 이틀, 사흘 마음을 찾다가 다시 달마 스님께 갔습니다. “찾았느냐?” “아무리 찾아 도 없습니다.” “내가 네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없는 마음을 네가 일으 켜서 왜 난리를 치느냐, 그 말입니다. 마음도 공한 것입니다. 마음 안에 불변의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일어난 현상일 뿐입니다.

 

‘아’라는 것도 내가 일으킨 착각일 뿐이지 실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번 『반야심경』을 외웁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 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이렇게 외우면서도 오온이 공하다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섯 가지로 형성된 이 존재는 연 기에 의해 존재하는 나이지 실재로서 불변하는 나는 없습니다. 인연에 의 해 발생했다가 사라지는 거품 같은 현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 언가 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거기에 집착합니다. 창조주 브라흐만이 있을 것이고 거기서 내가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브라흐만의 이마에서 떨어 져 나오면 브라흐만이고, 옆구리에서 나오면 왕족이고, 허리에서 나오면 평민이고, 발바닥에서 나오면 천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철학은 사 회문제로 이어집니다. 인도에서 불가촉천민은 사람 취급을 못 받습니다. 생각이 그러면 차별을 당연시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많은 사회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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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잘못된 종교나 철학을 가지면 사람을 죽이면서도 잘못인지 모릅니다. 종교사를 들여다보면, 특히 창조주를 믿는 사람들이 살상의 역사를 반복한 건 이러한 차별의 철학이 바탕에 있습니다.

 

오온이 공하다고 할 때 그 공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 습니다. 부처님께서 『아함경』에서 무아를 이야기할 때부터 공성을 설명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AD 2세기경에 용수보살이 『중론』을 통해 그 의미를 완벽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종중연생법무자성 무자성고공(從眾緣生法無自性 無自性故空)”, 여러 가지 인연으로 생긴 것은 자체 성질을 갖지 않고,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는 말입니다. 그 냥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이 성냥개비에 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냥개비에 아직 불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불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 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불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없다고 말하려면 인연을 만났을 때 불이 일어나지 않아야 합 니다. 브라흐만들은 본래 불이 있는데 미세해서 안 보이는 것이라고 주 장합니다. 그럼 불이 이 안에 잠복해 있는 건가요? 불을 일으킬 탄소가 있는 것이지 탄소가 불은 아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이 되 면 발생했다가 변하고 없어질 뿐 본래부터 있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아함경』에서 장작불로 비유를 드셨습니다. “장작에 불 이 있느냐? 아무리 쪼개 봐도 불이 없을 것이다. 지금 불이 붙은 장작은 영원히 불이 붙어 있느냐? 장작이 다 타고나면 꺼질 것이다.” 이와 같이 불은 영원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 어떤 존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자연 의 현상이든 인간의 현상이든 다 인연을 따릅니다. 그것을 무아, 공성이 라고 합니다. 사람의 죽음도 자연 현상의 일부라서 생자필멸, 태어난 자 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사실 그 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생사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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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오온개공”도 같은 말입니다. 이 몸도 아트만이나 어떤 자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깊이 알면 죽을 때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도 그 경계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오온이 공하다는 것이 불교의 철칙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 합니다. 모든 것이 연기하는 존재라서 무아이고 그렇기 때문에 다 변화 한다는 사실은 제법무아, 제행무상, 일체개고의 삼법인에 잘 나타나 있 습니다. 만약에 자체 성질을 갖는 것이 있고 예외적으로라도 영원한 것 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불교가 아닙니다. 이 우주도 인연으로 발생했다가 인연으로 사라집니다. 제임스 웹 망원경을 가지고 오리온성운이나 다른 성운들을 보면 지금도 별이 생겨나고 사라집니다. 은하도 계속 부딪혀서 하나의 은하로 합쳐졌다가 다시 폭발해서 가루가 되었다가 다시 뭉치고 하는 현상이 계속됩니다. 우주의 나이는 우리처럼 짧지 않아서 억년 단위 로 잡아도 모자랍니다. 일억 년 동안 간 빛의 거리를 일억 광년이라고 합 니다. 그런 우주도 영원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주의 규모에서 지구 같은 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구도 얼마 안 가 어느 정도 되면 폭발해 서 사라질 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영원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는 것이 현실이고 사실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성을 가진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더 확실하게 밝혀지겠지 만 불교는 2,600년 전부터 이 사실을 밝혔습니다.

 

우리는 매번 『반야심경』을 외면서 “불생불멸”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공성을 설명하는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 는 영원한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불생불멸은 공성을 체득 하여 분별하는 마음이 사라졌다는 뜻이지 영원한 존재가 있다는 뜻이 아 닙니다. 불교에서 생사가 없다고 하니까 이 몸뚱이를 가지고 안 죽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몸을 가진 사람 중에 안 죽는 사람이 어디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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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까? 영생을 표방하는 종교에서 영생했다는 사람 봤습니까? 영생까 지는 아니어도 인공 장기로 오래 산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단언 컨대 전부 헛짓입니다. 안 죽는 세포는 암세포가 되어 숙주를 다 죽이게 되어있습니다. 우리 몸속에 안 죽는 게 하나 있다면 그것이 우리를 죽일 것입니다. 우리는 변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이면 울고불며 붙들고 늘어질 일이 없습니다. 정 때문에 울 고불고 하는 것이지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무상과 무 아를 이해하면 좋은 만남과 좋은 생각을 가지고 점점 좋은 쪽으로 진보 합니다. 나부터 좋은 생각을 내면 좋은 도반을 만나게 되고 함께 정진을 하게 됩니다. 그럴수록 내 욕심이 줄어들고 번뇌가 사라지고 다른 사람 을 도울 힘이 생기고 그래서 사회가 밝아집니다. 이렇게 살면 그곳이 불 국토이지 불국토가 서쪽으로 십만팔천 리를 가야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나’라는 속에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착 각입니다. 지금 이 사람을 ‘진옥’이라고 하는 것도 착각입니다. ‘진옥’은 이름일 뿐입니다. 사진을 찍어 놓고 이 모양을 나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 모양이 계속 그대로 있습니까? 모양이 계속 바뀌니까 여권 사진을 6 개월 이내 것으로 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6개월 사이에도 모양이 달라집 니다.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집착은 욕심으로부터 일 어나고 욕심은 ‘나’로부터 일어납니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영원한 실체 가 없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자꾸 잡착해서 문제가 발생합니 다. 물건도 생각도 변화하는 속에서 영원할 것이라고 집착하면 그것이 깨 어지는 순간 고통이 일어나고 싸움도 일어납니다. 생각은 사람마다 다릅 니다. 내 생각이 언제나 옳다는 집착에서 벗어난다면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되고 서로 합의점을 찾으면서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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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성을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고 들여다보면 대상 하나하나가 영원성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창조주를 비 롯해서 여러 신들까지 포함됩니다. 나무에는 목신, 물에는 용왕, 심지어 는 바위에도 신이 있어서 우리를 도와준다고 거기에 의지합니다. 용왕신 이 있다면 지금 바다가 오염돼서 플라스틱 쓰레기 치우느라고 청소부를 많이 고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왕신을 실제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 습니다. 또 어떤 바위가 부처님을 닮았다고 거기에 기도를 합니다. 부처 님을 생각하니까 바위가 부처님으로 보이겠지만, 껍데기를 닮아서 뭐합 니까? 닮기로 말하자면 우리가 부처님을 가장 많이 닮지 않았습니까? 태 어나서 80년을 살고, 눈도 두 개고, 콧구멍도 있고, 바위보다는 더 닮았 습니다. 닮으려거든 모양을 닮지 말고 생각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매 일 나를 위한 생각, 내가 편히 사는 생각, 내 생각에 동조해주는 사람 생 각만 하고 살아갑니다. 부처님께서는 똑같이 주어진 80년을 우리와는 다 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대상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자체 성질을 가지고 영원히 변치 않는 자성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무아의 가르침입니다. 이 우주 전체가 인연 따라 발생했다가 인연 따라 변화하고 사라진다는 사실 을 알면 아공과 법공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공을 깊게 이해하면 나라 는 생각이 끊어지고 따라서 탐진치가 다 끊어집니다. 공에 대한 이해 없 이, 무아에 도달하려는 수행 없이, 번뇌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일어납니 다. 그래서 무아, 공성을 아는 것이 보살에게 가장 중요한 수행 가운데 하나입니다. 『반야심경』과 『금강경』이 모두 공성에 대한 가르침이고 용 수보살의 『중론』도 어렵기는 하지만 깊은 법문이니 이 경전들을 볼 때 공성에 주목하여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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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장

완성의 길(바라밀)

 

정진 열심히 하십니까? 여러분께서도 정진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점검해보셔야 됩니다. 한국에서는 스님들만 수행자로 보는 경향이 있는 데 재가자들도 수행자입니다. 불자라고 하면서 수행을 하지 않고 믿기만 하면 미신이 됩니다. 수행을 기본으로 삼지 않는 불자는 마치 먼지 구덩 이에 다녀와서 목욕을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항상 때가 끼어 있어서 생각과 말과 행동에 때가 묻어 나온다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우리가 바깥에 다녀와서 먼지와 세균에 오염된 상태에서 음식을 만든다든지 아 기를 보살핀다든지 했을 경우에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 로 평소에 수행을 하지 않고, 악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면 남들에게 피해를 주고 스스로도 피해를 입게 됩니다. 자신이 정진하지 않으면 모 든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됩니다.

 

옛 스님들께서는 정진하는 사람에게 사흘 전의 일을 묻지 말라고 하셨 습니다. 사흘 전에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정진을 통 해 나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깨친 이들은, 내가 법의 문에 들 어가기 전까지는 잘못한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지만 정법의 문, 깨 어있음의 문에 들어선 뒤에는 잘못된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은 나쁜 일을 할 이유가 일체 없기 때문입니다. 깨닫기까지 평소에 꾸준하게 정진하는 과정에서도 마음이 향상됩니다. 욕심과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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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어리석음이 점점 없어집니다. 잠시 물러나기도 하고 나아가기도 하면 서 결국은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어느 보살님은 운전하는데 차가 밀리면 인내심에 문제가 생긴다고 합 니다. 캐나다에서는 장애인들이 리프트를 이용해서 버스에 타는 데 거의 7분여 걸립니다. 하지만 버스 안에 탄 승객들이 장애인을 탓하거나 눈치 를 주지 않습니다. 이웃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이타심이 생활화된 선진사 회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주요 7개국 정상회의 G7에서 G10으로 확대 개 편하려고 하면서 한국, 호주, 인도를 포함시킨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민주화 정도, 경제 규모, 코로나 대응 등 여러 분야가 조화롭게 발전하여 선진국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선진국이 된 것은 분명하 지만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사람들의 의식이 변해야 됩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기중심적인 의식구조에서 벗어나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성 숙한 의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종교의 신앙 형태가 내 복을 구하는 데 만 있다면 진보된 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2,600여 년 전 에도 그런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고 현실에도 맞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바라밀(波羅蜜)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화엄경』에서는 열 가 지 바라밀을 이야기하고 반야부에서는 여섯 가지 바라밀을 이야기합니 다. 부처님께서는 상황에 따라 네 가지 바라밀만 말씀하실 때도 있습니 다. 『화엄경』의 10바라밀은 깨달은 후에 어떻게 바라밀을 형성해 나갈 것 인가에 대하여 6바라밀에다 중생들을 위하는 방편바라밀 등 4바라밀을 추가한 것입니다. 여래를 이루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바라밀이 여섯 가지입니다. 보살은 일체중생을 위하는 마음을 낸 수행자들입니다. 모든 중생을 고 통의 수레바퀴로부터 벗어나게 해야겠다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이것 이 보리심의 핵심입니다. 중생들의 다양한 형태와 처한 상황에 맞게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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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행으로 이끌어 일체중생을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가장 중 요합니다. 그렇다면 윤회의 발단은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아상을 두 는 데서 시작합니다. 나라는 것이 있다는 착각으로부터 집착이 시작되고 너와 내가 구별되어 양극단의 마음이 생깁니다. 나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 에 나에게 좋고 나쁘다는 분별심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반복되어 생사윤 회를 겪습니다. 누가 태어났다고 하면 생일 축하 노래 부르면서 즐거워 하고, 누가 죽었다고 하면 곡을 하며 슬퍼합니다. 이런 양극의 모습이 반 복됩니다. 이렇게 분별심을 일으키는 것으로 출발하여 다음 생으로 전환 되고, 그다음 생으로 확대되면서 끊임없이 육도를 돌고 도는 것이 윤회 (輪回)입니다. 양극단으로 쪼개진 이 마음이 일심이 되기까지는 윤회를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생사의 번뇌가 완벽하게 끊어져서 더 이상 마음속 에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윤회가 사라진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이 윤회를 거듭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이 현상 세계입니다. 반 복되는 윤회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아주 어두운 사람입니다. 윤회를 부정한다면 보살이 보리심을 낼 이유도 없고 불교가 존재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죠.

 

보살이 발심을 해서 중생을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보리심의 핵심인데 최종 단계는 여래가 이루어졌을 때입니다. 최종에 이를 때까지 의 수행 단계를 살펴보면 그 처음은 범부가 닦는 선행입니다. 우리가 나 쁜 일을 계속 저지르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사람 같지 않다.’고 말 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은 이 생에서 사람 같지 않다는 평가를 받으니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으로 태어났으 면 최소한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다음 수행 단계는 성문과 연각입니 다. 성문은 법문을 듣고 사성제를 관찰하여 도를 이루고 연각은 12연기 를 관찰하여 스스로 깨닫습니다. 문사수 수행을 통해서 아나한과를 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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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이들은 곧바로 부처가 되지는 못합니다. 보살은 52단계의 수행 을 거칩니다. 10신(信)에서 시작하여 10지(地) 끝에 이르면 여래를 이룬다 고 합니다. 최종 단계에 이르기까지 ‘내가 일체중생을 이끌고 가겠다. 그 래서 나의 깨달음과 중생의 깨달음이 둘이 아니다.’ 이 보리심을 강력하 게 구축하신 분들이 보살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보살은 무엇을 닦는지 하나하나 아는 것이 중요 합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 여섯 가지 길, 육바라밀(六波羅蜜)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라밀(波羅蜜)은 범어 빠라미따(pāramitā)를 중국에서 음 역한 것입니다. 바라밀의 의미는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우선 ‘도일 체고액(度一切苦厄)’ 할 때의 ‘건널 도(度)’입니다. 강이나 호수를 건널 때 도선(渡船)을 탔다고 하는데 도선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네주는 나 룻배입니다. 이쪽 언덕을 ‘차안(此岸)’, 저쪽 언덕을 ‘피안(彼岸)’이라고 하지요. 차안은 생사윤회의 고통이 있는 곳이고 피안은 생사윤회의 고통 을 벗어난 니르바나입니다. 언덕은 비유입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 게 하는 것이 육바라밀이라는 뜻에서 ‘도피안(到彼岸)’이라고 번역하기 도 합니다. 즉 번뇌가 다 사라진 곳,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여기 에서도 핵심이 되는 것이 지혜이기 때문에 육바라밀을 얘기할 때 반야바 라밀을 가장 많이 거론합니다. 지혜의 나룻배로 열반의 저 언덕에 건너가 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반야용선(般若龍船)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진도 씻김굿을 지낼 때 종이로 배를 만들어서 길 닦음 의식을 합니다. 반야용선의 다른 모습은 법당입니다.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한 절이 해남의 미황사와 여수 의 흥국사인데 바닷가에 있기 때문에 목수들이 표현을 잘해놓았습니다. 미황사와 흥국사를 보면 축대 밑에 용과 게, 거북이 등이 조각되어 있어 서 법당이 바다 위에 떠가는 배가 됩니다. 여기서 배는 도피안(到彼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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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편입니다. 바라밀을 뜻합니다. 여섯 가지 방법을 통해 피안으로 건너가 기 때문에 다른 말로 도(道), 방법이라고 합니다. 이 방법을 실천하지 않 고서는 보리심이 확대되지 않습니다. 내가 설사 보리심을 내었다 해도 그 것만으로는 미약합니다. 밭에 콩을 심었어도 처음 싹이 올라왔을 때는 매우 약합니다. 비둘기가 쪼아 먹으면 그 움튼 싹은 살기가 어렵습니다. 이 싹이 튼튼하게 자라려면 햇볕도 있어야 하고 물도 있어야 하고 적당 히 바람도 불어야 합니다. 마음 가운데 가장 위대한 마음이 보리심이지 만 일체중생을 위해 보리심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그 보리심을 확대시키 는 실제적인 방법은 여섯 가지 바라밀입니다.

 

지리산에 피아골이 있습니다. 피아골이 원래는 피안골, 도피안, 바라밀 골짜기라는 말이었습니다. 바라밀의 골짜기, 그곳에 절이 있었고 스님들과 도인들이 계셔서 우리를 피안으로 이끌어주는 그런 곳이라는 뜻입니다. 놀러가는 사람들은 단풍이 좋다고 가지만 단풍이야 시시각각 바뀌는 것 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피안과 차안, 이 언덕과 저 언덕은 따로 있는 것 이 아니고 번뇌가 사라질 때 한 발자국도 옮길 것 없이 그 자리입니다. 『반야심경』을 보면 맨 마지막에 주문이 있습니다. 운동회에 가서 응원 할 때 ‘아자, 아자, 파이팅!’ 이런 구호를 외치듯이 『반야심경』도 부처님 께서 설법을 하신 후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삼가떼 보디 스와하(Gate Gate Pāragate Pārasamgate Bodhi Svāhā)” “가자, 가자, 어서 가자, 어 서 빨리 가자, 저 깨달음의 세계로”를 세 번 반복하셨습니다. 마음이 그 렇게 일어나라고 거듭 외우는 것입니다. 노를 저을 때도 ‘어야디야 어서 가세.’ 그럽니다. 노 젓는 노래에도 『반야심경』의 그 구호가 들어 있습니 다. 깨달음의 세계, 즉 피안으로 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보시, 지계, 인 욕, 정진, 선정, 지혜, 이 여섯 가지 바라밀도 깊이 이해하고 닦으면 깊은 해탈의 경지를 담고 있는 요의(了義)의 실천입니다. 육바라밀 하나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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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완성되면 무아와 자비심이 같이 완성됩니다. 예를 들어 보시행을 말 하면 대부분의 불자들은 표피적으로 뭔가를 주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그것은 보시와 공양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시는 재물뿐 아니라 몸과 정신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내가 죽어서라도 당신을 외로움 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생각이 있어야 보시를 행할 수 있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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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베풂의 완성(보시바라밀)

 

저는 아침에 한 시간 정도 포행하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지금 걷고 숨 쉬는 이 순간이 너무나 평온하다. 이것 외에 무엇이 있겠는 가?’ 걷다가 낙엽이 떨어질 때 떨어지는 낙엽을 봅니다. 이 우주에서 낙 엽이 떨어지는 그 인연을 내가 보고 인식하는 것 외에 무엇이 따로 있겠 습니까? 낙엽이 떨어지는 것으로 그 순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잠깐 지나갔을 뿐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 더라도 잠깐의 꿈일 뿐입니다. 일생을 고생하면서 살지만 깨어나면 꿈속 의 모습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나간 과거에 집착할 것도 없고 오지 않은 미래에 집착할 것도 없습 니다. 죽은 뒤에 극락이나 천당을 기대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지금 내 가 어떻게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평온하게 살 것인가, 이 생각을 하며 탐 진치 번뇌가 어디서 일어나는지를 순간순간 관찰해야 합니다. 번뇌는 아 상에서 일어납니다. 나를 집착하여 분별하는 마음을 내어서 자꾸 시시비 비를 따지고 내 마음대로 안 되면 분노를 일으킵니다. 순간순간 일어나 는 번뇌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현상에 놀아나게 됩니다. 마주한 현상을 두고 내 욕심에 맞는지 아닌지, 내 자존심에 맞는지 아닌지를 가려냅니 다. 손해 보는 짓이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온통 시비를 따지고 살아 갑니다. 그런 사람이 많은 곳은 항상 시끄럽기 마련이고 습성이 거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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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이 있다면 큰 사고가 나기도 합니다. 반면에 도 닦는 사람이 많은 곳 이라면 마음도 평온하고 세상도 평화로울 것입니다.

 

우리는 도 닦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요즘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의 중요성을 더욱 절감합니다. 식상한 이야기 같 지만 돈만 있으면 세상 행복할 것 같아도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옛날의 황제나 지금의 재벌은 행복하게 오래 살아야 하겠지만 그 렇지 않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인의 말씀 을 듣고 정진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꿈에서 깨지 못한 채 일생을 허비 할 것입니다. 도 닦는 일은 스님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사람이면 당 연하게 도의 길을 가야 합니다. 도가 무엇입니까? 사는 방법이 도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괴로움이 없어지는가를 스스로 물어야 됩니다. 예로부터 많은 성현들이 다양한 종교와 철학에서 이 문제에 대해 말씀을 남기셨습 니다. 말로만 좋은 말씀을 남긴 분도 있고 논리도 없이 인과에 맞지 않 은 주장을 펼친 분도 있습니다. 그런 주장들은 이미 오래전에 검증을 통 해서 많이 걸러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이 진정한 도의 길로 들어서 서 부처님의 말씀대로 정진하여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 랍니다.

 

도의 길은 지식을 가지고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식이 부분 적으로 많은 문제를 해결한 것도 사실이라 현대 사회에서 지식산업은 중 요하게 여겨집니다. 특히 과학이 인류의 행복에 끼친 영향을 부정하기 어 렵습니다. 그러나 지식과 과학이 많은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지만 동시에 인류에게 큰 위협이 되기도 합니다. 몇몇 나라는 원자폭탄을 만들어서 보 유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를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분량입니다. 인류를 멸망시키고도 남을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쩌지 못합니다. 과학은 그렇게 양날의 칼로 사람들을 이롭게도 하고 해롭게도 합니다. 이 세상에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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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가 시비를 다투 고 폭력을 행사하고 탐욕과 분노를 일으키고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지 않고서는 분명한 피해자가 생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식 쌓는 일을 넘어 도 닦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도 닦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실천이 보시입니다. 보시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보통의 연민을 갖고 베푸는 정도로는 보시가 되지 않습니다. 보시를 하려면 나를 해체해야 합니다. 나라고 착각했던 아집을 놓아야 탐진치가 깨지는데 보시는 이것을 시작하는 행위입니다. 욕심이 가득하 면 매일 성질을 냅니다. 욕심 많은 사람치고 화 안 내는 사람이 없습니다. 욕심대로 하려다가 안 되면 성질이 나기 때문입니다. 화를 안 낸다는 것 은 그만큼 욕심이 적다는 뜻입니다. 남에게 베풀고 사는 사람치고 화내 는 사람 없습니다. 욕심이 줄어든 사람치고 어리석은 짓을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보시는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할 뿐만 아니라 무아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베풀지 않고 도인이 되었다는 사람은 사기꾼입니다. 욕심이 있으면 도를 닦을 수 없기에 욕심 없는 사람을 도인이라고 합니 다. 아상이 없어야 욕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없애려고 부단히 노 력하는 사람을 수행자라고 합니다. 『금강경』을 비롯해 많은 경전에서 아 상을 버리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불성만 발견하면 성불한다는 흐름이 상당히 많습니다. 또 하나의 잘못된 흐름은 그냥 빌어서 복 받고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입니다. 둘 다 이미 불 교가 아닙니다.

 

달라이 라마께서 이런 예를 드셨습니다. 알라신을 모독하는 사람을 보 고 회교도가 그를 향해 총을 쐈다면 이미 회교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알라신을 위한다는 명분이 있다 해도 사람을 죽이겠다는 마음을 일으키 고 총을 발사한 순간 외형적으로는 회교도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회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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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불자가 수행을 하지 않고 그냥 빌어서 적당히 사는 정도라면 불교도가 아닙니다. 지금 종단에서 신도들의 숫자를 세어 놓고 숫자 노름을 하는 것은 창피한 일입니다. 한국에서는 많은 재가자 들이 가정에서 정진하고 있고 출가자들은 절에서 결제와 해제를 거듭하 면서 정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른 법으로 정진하여 가끔은 도인들이 나와야 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각자가 깨어나 서 정법을 중심으로 삼고 정진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제자 가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나면 우리는 무엇에 의지하고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를테면 마하가섭을 의지하고 살아라,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자등명, 법등명”, 자 신의 등불을 밝히고 법의 등불을 밝히라고 하셨습니다. 네 스스로 깨치 면 네가 너의 스승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각국의 사람들은 그 나라 의 헌법에 의지하면서 살아갑니다. 평소에는 그런 생각을 크게 하지 않지 만 헌법을 어기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그와 같이 수행자에게 정법은 헌 법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를 의지하고 정법을 의지해서 수 행하면 다 성불할 것입니다.

 

6바라밀 중 첫 번째는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입니다. 범어로는 다나 (dāna-pāramitā)라 하고 중국에서 단나(檀那)라고 음역했습니다. ‘다 나’는 베푼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베풂을 세 가지로 말씀하셨는데 여기에는 모든 베풂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물질을 베푸는 재시(財施), 두 번째는 법을 전하는 법시(法施), 세 번째는 공포로부터 벗어 나게 하는 무외시(無畏施)입니다. 그런데 보시는 한자로 포(布) 자를 씁 니다. 넓게 펼친다는 뜻의 글자입니다. 한자 사전에서도 보시(布施)를 ‘보 시(普施)’라고 ‘넓을 보(普)’ 자를 써서 정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 가 족, 내 친척, 내 친한 사람들에게만 나눠주는 것은 보시가 아닙니다. 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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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나보다 높은 사람에게 아첨하려고 뭔가를 주는 것은 보시가 아니고 뇌물입니다. 편협하게 나눠 먹는 정도이거나 의도를 가지고 내 이익을 위 해서 주는 것은 보시가 아닙니다. 봉사를 하는 건 좋지만 상을 타고 수 상소감을 거창하게 이야기하고 사진 자료를 남기는 것 또한 진정한 보시 는 아닙니다. 본인의 자존감이나 명예를 위해 하는 건 보시가 아닙니다.

 

보시의 보(布)는 넓게 깔다는 뜻으로 평등성을 의미합니다. 모든 대상 을 똑같이 볼 수 있을 때 진정한 보시가 됩니다. 그렇지 않고 저 사람은 어째서 주지 못하겠다고 하고 저 사람은 어째서 주고 싶다고 한다면 분 별해서 베푸는 것이니 엉터리 보시입니다. 배제하고 선별한다면 보시가 아니고 차별입니다. 보시의 시(施)는 시혜(施惠), 혜택을 베푼다는 뜻입니 다. 즉 내가 주고 싶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필요한 것이 다르니 주는 것도 돈, 주거, 음식, 옷 등 여러 가지가 됩니다. 누구에게는 국가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우 리나라 사람들은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에 매우 인색합니다. 이 점에 대 해서는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난민들은 본국에서 전쟁, 재 난, 위협 등으로 살 수 없어서 죽기를 각오하고 탈출한 사람들입니다. 이 난민을 얼마나 어떻게 수용하느냐를 보면 그 나라의 수준을 알 수 있습 니다. 난민수용의 면에서 나는 독일을 존중합니다. 한국과 일본은 이 문 제에 매우 인색한 편입니다.

 

무엇인가를 베푼다고 했을 때는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상(我 相)이 없어야 합니다. ‘내가 준다’는 생각이 있으면 분명히 문제가 생깁 니다. 수행자가 ‘내가 깨달았다’고 한다면 사기꾼입니다. ‘내가 깨달았 다’는 말에는 ‘너희들은 못 깨달았다’는 의미가 함께 있습니다. 그러면 뻣뻣해져서 법문 한 마디도 상대를 위해 쉽게 하지 못합니다. ‘너희들은 별 볼 일 없고 나는 깨달았으니까’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주장자만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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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내렸다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알아듣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물 론 필요할 때는 그런 법문도 해야겠지만 그럴 때가 아님에도 아상 때문 에 그렇게 한다면 문제입니다.

 

법문을 하든 물건을 주든, 내 것인데 준다고 하면 그것은 보시가 아닙 니다. 엄격하게 따져보면 ‘내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라고 하지만 이 몸조차 다섯 가지 요소가 잠시 모여서 형성된 것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나라면,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안 늙고 싶으면 안 늙어야 하고 안 죽으려고 하면 안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몸이 내 마 음대로 됩니까? 내가 아니니까 늙어서 가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되면 백 년만 살고 싶겠습니까? 천년 만년 영원히 살고 싶겠죠. 그래서 영생을 꿈꾸는 사람들이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서는 영원히 못 사니까 저기 가서 영생한다고 말합니다. 욕심일 뿐이죠. 전부 나라는 고집으로 연결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시를 하는 사람일수록 공성을 보아 실제 영 원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마타를 통해 내 마음 이라는 것도 일어나는 현상일 뿐임을 알면 나와 내 것이라는 고집이 다 깨져 나갑니다. 그렇게 되어야 평등한 보시를 할 수 있습니다.

 

보시할 때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고 나서 딴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주고 나서 자꾸 챙긴다고 인과가 바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안 챙겨도 잘 오게 되어 있으니까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사실은 과보가 오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보시의 결과로 좋은 일이 오면 수용하시겠습 니까?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할 정도의 다이아몬드를 준다고 해도 그것으 로 뭘 하겠습니까? 돈이나 건강 등 세상의 복도 내가 했던 행동이나 베 푼 것에 의해 온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누리는 것도 전생에 어떤 방식 으로든 조금이라도 베풀었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고 우연히 오는 것은 없 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받으려 하지 않고 베풀면, 설사 복이 오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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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욕심을 차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욕심이 완벽하게 버려지 면 공성을 체험하게 됩니다. 베풂을 통해 아(我)를 버리고 공성에 도달하 고 결국에는 일체중생을 위해 회향할 때 보시가 완성됩니다.

 

부처님께서 6바라밀 중 첫머리에 보시를 말씀하신 이유는 무아와 자 비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보시는 까칠까칠한 밤송이 와 같아서 껍질을 벗겨내지 않으면 알맹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몸이나 돈이나 땅, 자식, 명예 등을 나, 혹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보시한다면 허망한 일입니다. 이런 것들은 껍질에 불과합니다. 모든 것은 자성이 없 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습니다. 보시할 때 주는 물건도 자성이 없습니다. 돈을 주었다면 그 돈이 영원한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닙니다. 받는 사람 도 같은 이치라서 인연 따라 흘러갈 뿐입니다. 이것을 알면 욕심에서 벗 어납니다. 나도 공한 존재라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는 물건 또한 자성이 없고, 받는 사람도 자성이 없습니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과 물 건이 다 공함을 알면 그것을 삼륜(三輪)이 청정한 보시라고 합니다. 이런 보시를 하려면 무아가 되어야 하고 무아가 되지 않으면 자비심을 낼 수 없습니다. 무아와 자비는 같은 것입니다. 무아가 되지 않으면 중생을 위 하는 마음이 완전하지 않아서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남아 있게 됩니다. 부모님들 중에도 자식을 낳아서 실컷 키웠는데 왜 이리 불효막심할까, 이 런 분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부모라는 생각이 있고 보상을 바라는 마 음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보시행의 핵심은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나를 두고서 베푼다면 받는 사람이 피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받는 사람이 비참한 생각이 들면 그것은 보시가 아닙니다. 돌려받을 생각 없이, 내가 준다는 생각 없이, 그 저 잘 썼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주어야 합니다. 보시로 무아가 이뤄지 고 자비심이 이뤄지면 그것을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그때는 욕망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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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는 고통은 사라져 버리는데, 그것을 위해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리 고 이 보시바라밀을 행함으로써 다른 바라밀들이 점점 깊어집니다.

 

보시 가운데 법보시는 정신적으로 깨어나는 길로 이끄는 매우 중요한 수행이니 특히 스님들은 이 부분에 진력해야 합니다. 본인이 법에 들기 위해 부단히 정진해야 하고 그 법을 사람들에게 설명해야 합니다. 그래 서 법을 말해주는 스승을 법사라고 합니다. 『금강경』과 『법화경』에도 “수지독송 위타인설(受持讀誦 爲他人說)”이라는 구절이 자주 나옵니다.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최선을 다해 설명하라는 말씀 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설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설법을 안 하는 곳도 있고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소리를 하는 곳도 있습니 다. 경을 강의하려면 경의 내용을 이해하고 나름대로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장 많이 독송하고 강의하는 『금강경』의 경우는 예부터 중국, 한국, 일본에서 수많은 해석이 나왔습니다. 그중에는 오랜 세월을 거쳐 지금까지 읽히는 주석도 많습니다. 강의를 하려면 이렇게 검증된 주석에 의거해서 설명해야 경의 본 취지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자 기 멋대로 설명하면 경의 본뜻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자기가 모르면 가르치지도 말아야 합니다. 길을 잘못 가르쳐주면 다른 사람을 헤매게 만듭니다. 20여 년 전에 인도 다람살라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법문을 들으러 가다가 길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이정표를 잘 해놨지만 그때는 막대 하나 꽂아서 나무판자에 이쪽으로 가면 어디로 간다고 적어놨는데 운전기사들도 길을 잘 몰랐습니다. 그곳의 아이들이 판자를 갖고 놀다가 틀어놓았는데 가리킨 대로 따라가다 보니 거꾸로 가 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시간 잘못된 길로 갔다가 돌아오니 두 시간이 걸 렸습니다. 농부한테 물어보니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르면 모르겠다 고 하면 될 텐데 모르면서도 제멋대로 가르쳐줘서 3시간을 갔다가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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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느라 3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길을 잘못 가르쳐주면 이런 일이 생깁니 다. 법을 설명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르면 공부해야 합니다. 한국 에서는 출가자가 법을 모른다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 다. 재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조차 다 른 일에는 바쁘면서 법을 공부하지 않습니다. 몰라도 엄청 당당합니다.

 

서산 스님은 『선가귀감』에서 말법 시대에 법을 설명하지 못하는 비구 를 아양승(啞羊僧)이라고 비판하셨습니다. 지혜와 언변을 갖추지 못한 비구는 혀가 있어도 소리를 내지 못하는 벙어리 양과 같다는 비유입니다. 법을 베푸는 사람은 천 번을 물어도 천 번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 론 선가에서는 설명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의단(疑團)을 주기 위해서 쓰는 방편입니다. 설명을 안 하는 것으로 의심을 만들어주 는 것인데 그것도 결국은 설명입니다. 선가든 교가든 곳곳의 처마 끝에서 부처님의 소리가 들리도록 해야 합니다. ‘나는 원래 선방에 다녀서 본래 무일물(本來無一物)이니 한마디 할 게 뭐가 있나?’ 그렇게라도 가르쳐주 어야 합니다. 재가자들도 스님들께 법문을 청해서 들어야 합니다. 우리 불자들은 집에 무슨 일이 있으면 스님을 청해서 공양을 올리고 축원을 드리지만 법문을 청하지는 않습니다. 재가자에게도 중요한 역할이 있습 니다. 법의 자리를 마련해서 설법이 계속 이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법회가 항상 열려서 법이 유통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법회가 많이 열렸습니다. 신라의 연등회, 고려의 팔관회, 조 선의 수륙재, 이런 행사가 춤추고 노래나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춤과 노 래는 공양 올리는 하나의 의식이고 핵심은 법문입니다. 사흘, 나흘, 일주 일간 큰 법사가 와서 법문을 했습니다. 법문 없이 북 치고 꽹과리 두드리 면서 복만 빌고 있으면 법이 유통되지 않습니다. 법은 사는 방법이고 수 행하는 방법입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의 병을 고치듯이 법으로 고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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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애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법보시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달라이 라 마께서는 법사를 모셔서 법문을 듣지 않으려거든 기도도 하지 말라고 하 셨습니다. 삿된 기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의식은 법을 유통하 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그것을 법회라고 합니다. 법회에 참석해서 법문 을 듣고 발심을 하고 선한 마음을 기르고 수행을 한다면 불법이 지속될 것입니다. 그러니 49재를 하거나 동지 기도를 하거나 거기에 법이 없다면 중요한 부분이 결여된 것입니다.

 

법을 베푸는 사람은 언제든지 법을 통해 중생에게 길을 안내하겠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때 아상이 있으면 안 됩니다. 아상이 있으면 법을 설명하는 나는 잘났고 법을 듣는 너는 못났다는 생각이 일어날 수 있습 니다. 그럴수록 아상이 굳어지고 교만이 높아집니다. 너와 나를 구분하 는 분별심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의 근기를 살피는 지혜가 필요합니 다. 빠른 사람에게 맞는 설명이 있고 더딘 사람에게 맞는 설명이 있을 것 입니다. 각각의 근기에 맞추되 틀리지 않게 설명하여 더딘 사람들도 차츰 법에 들어와 정진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법보시를 하다보면 법 에 대한 이해가 늘어나서 차츰차츰 아상이 사라집니다. 법을 듣는 사람 도 이제껏 착각하고 고집했던 것들을 자각하게 됩니다. 서로가 근기를 증 장하여 수준이 높아지면 법을 설명하는 이들도 틀린 법을 얘기할 수 없 습니다. 이렇게 해야 무아의 법시가 되고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길로 안내 할 수 있습니다. 법시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지혜를 얻고 부처님 법도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법시가 중요합니다.

 

세 번째 무외시(無畏施)는 고차원적인 보시입니다. 끝없이 생사를 반복 하면서 윤회하는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입니다. 지금까지 내 것 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잃고 내 몸까지 사라지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을 때, 그리고 죽은 뒤에 두려움 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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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 사람들입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큰 스승들이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지상의 대보살들은 죽음 의 공포에서 벗어난 분들이고 그 힘과 자비심으로 우리를 두려움에서 벗 어나게 해주십니다.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그런 보살들입니다. 우리가 죽음에 다다라 숨이 끊어질 때 그분들을 의지하겠 다는 마음을 강력하게 내면 중음의 상태로 진입할 때 그분들께서 인로왕 이 되어 주십니다. 인로왕(引路王)은 길을 이끌어주는 안내자라는 뜻입 니다.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에 무외를 베푼다는 뜻에서 이 보 시를 무외시라고 합니다.

 

『입보리행론』 제10장 회향품에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 다. 또 티베트의 스승들은 사람이 죽으면 『바르도퇴돌』을 독송해줍니다. 『사자의 서』라고 알려진 책인데, 당신이 지금 어떤 상태이니까 두려움을 갖지 말고 어떤 색깔을 보고 의지하고 어떻게 하라고 방법을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수행이 깊은 보살들이 지금 이생에 태어나서 우리를 이끌어 주듯이 바르도 상태에서도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원효 스님도 『유심안 락도』에서 공덕을 많이 쌓지 못한 사람이라도 일념으로 지극한 마음으 로 아미타불을 염하면 죽는 순간에 아미타불을 꿈에서 보고 왕생할 것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미타부처님은 전생에 세웠던 48가지 본원을 다 성취하신 분입니다. 원을 성취했다는 것은 원대로 되었다는 의미이니 중생이 제일 두려워하는 죽음의 순간에 보호주가 되고 인로왕이 되어 주 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돌아가시면 장례식장에 가서 아미 타부처님을 부르면서 돌아가신 분을 이끌어 주십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국불교에서는 이런 내용들을 깊이 생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냥 의례적인 것 같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49재를 안 지낼 거니까 간단하게 염불이나 해달라고 합니다. 49재를 지내느냐 안 지내느냐, 염불을 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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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 안 하느냐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부모가 죽은 상황에서 도 자식들은 재산 싸움을 합니다. 장례식장에서도 기껏 한다는 게 내 손 님이 몇 명이 왔고, 누구는 조의금을 얼마나 했고, 네 손님, 내 손님이나 따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돌아가신 분을 위하는 자세입니까?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가 돌아가셔서 공포에 떨며 다음 생으로 윤 회하고 있는데 자식 된 자가 그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믿음도 없고 공부도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부끄러운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입 니다. 윤회를 믿지 않는 사람은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윤회에 대한 통찰이 있다면 돌아가신 분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 할 것입니다. 이생에 나의 어머니였고 아버지였고 자식이었다면 그가 고 통 받을 때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조그마한 꼬마가 엄마 손을 놓치면 두 려워합니다. 그래서 아이는 항상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고 불러보 고 엄마 목소리가 들리면 안심을 합니다. 그렇듯이 어디로 갈지 모르고 생사에 윤회하는 우리가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서 대보살과 스승에 의지 하지 않고 어떻게 그 고통의 강을 건널 수 있겠습니까?

 

생사에 자재한 대보살은 중생에게 무외시를 베풀지만 우리는 아직 그 럴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승려가 되었다면, 아직 생사를 벗어나 지는 못했더라도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을 위해 도움 될 일을 해야 합니 다. 큰 보살들께 이 사람을 잘 이끌어 주십사 기도하고 돌아가시기 직전 에 손이라도 잡아드려 의지처가 되어준다면 무외시를 베푸는 자세라 하 겠습니다. 재시, 법시에 무외시가 더해지지 않으면 보시가 완성되지 않습 니다. 돈을 주는 보시는 오히려 쉬운 일이고 무외시는 그보다 어렵습니 다. 여러분도 다 부모 형제가 계실 텐데 그들이 큰 고통을 당하고 두려움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면 그들을 공포에서 건질 수 있겠습니까? 그 순간 에 여러분이 해드릴 일이 있습니까? 자비와 연민의 마음으로 큰 스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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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 부모님을 잘 이끌어 주십사 기도 올릴 수 있습니까? 요즘 장례식장에 가서 보면 너무 안타깝습니다. 돌아가신 분도 어둡게 살았고 자녀들을 봐도 마음이 아픕니다. 이 세상을 그렇게 허망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최고의 보시는 생사윤회 속에서 내가 당신의 인로왕이 되고 동반자가 되 겠다는 생각을 내는 것입니다. 나는 그 생각이 한 10년 전부터 겨우 일어 났습니다. 전에는 그렇게 깊지 않았는데 점점 절실해집니다.

 

재물을 베풀어 중생을 살리고, 법을 설해 정법을 전파하고, 법을 닦아 중생을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세 가지 보시입니다. 재시, 법시, 무외시, 이 세 가지를 베풀 때 ‘아’가 있으면 보시가 안 됩니다. 베풂으로 써 무아가 되고 도에 들어가는 것이 보시바라밀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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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지킴의 완성(지계바라밀)

 

산티데바가 쓴 『입보리행론』에 아무리 어려움이 온다 해도 그 어려움 이 이익이 되기도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려움의 뒷면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개인이나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 칠 때도 있습니다. 어렵기는 하겠지만 고통이 다가왔을 때 그 고통을 통 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불교는 역경과 고통을 어 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해 특히 많은 도움이 되는 가르침 이기도 합니다.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인 명상은 지금까지 밖으로 향해 있던 마음을 잠시 멈추고 내면을 향하게 합니다. 토굴에서 무문관을 해 보면 한 달, 두 달, 석 달만 해도 바깥으로 분주하게 치닫던 마음이 가라 앉습니다. 문밖에 안 나가고 프로그램에 따라서 아침에 예불하고, 송경 하고, 108배 하고, 명상하고, 점심에 사시공양 올리고 그렇게 하루종일 10시간에서 12시간을 방 안에서 보냅니다. 일주일만 그렇게 지내도 거친 생각은 많이 가라앉습니다. 재가자들도 기도하는 방법과 명상하는 방법 을 잘 배워서 수행을 하면 다른 방향에서 인생의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자각하고 생활 태도를 어떻게 바꿔 나갈 것인지 늘 깊이 성 찰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6바라밀 가운데 지계바라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범어 ‘śīla’는 원래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행위나 습관을 뜻하는 말이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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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이것이 깨끗한 쪽으로 의미가 한정되어 계(戒), 또는 율의(律儀)라고 번역했습니다. 계·정·혜 삼학 가운데 첫 번째 나오는 만큼 가장 기본 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비구 250계를 받는다, 비구니 348계를 받는다는 말을 들으면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계는 절대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계는 한마디로 깨어있는 사람의 행동입니다. 아(我)가 다 하고 번뇌가 다한 사람은 계체(戒體)가 형성되어서 억지로 지키려 하지 않아도 계를 범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살생이나 도둑질을 한다는 것 은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행위뿐만 아니라 마음속에서도 그런 생각 이 털끝만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탐진치가 다 사라진 상태에서는 계를 범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처님처럼 완벽하지 않으 니까 그렇게 되고자 지켜나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계를 지킬 때도 나만 깨끗하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계를 잘 지 키니까 좋지 않은 결과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는 것은 좋은 분별력 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키니까 괜찮은 사람이고 너는 안 지키니까 나쁜 사람이라는 식의 구분은 좋지 않은 분별심입니다. 세속의 입장에서도 이 런 분별심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요즘은 불교 안에서도 계를 지키는 것에 관한 논의를 잘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불자들은 오계를 받으라고 해도 부담스럽다면서 잘 안 받습니다. 옛날에는 몇 번이고 받기라도 했 는데 말입니다. 어느 장례식장에 입관하러 가니까 돌아가신 분이 받은 계 첩이 스무 개가 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염라대왕 앞에서 계첩 받 은 것을 보여줘야 하니까 관에 꼭 넣어달라고 유언을 했답니다. 계첩이 무슨 액막이 부적이나 염라대왕 앞 면피용 탄원서쯤 되는 것 같았습니 다. 이처럼 계만 받아놓고 있지 수행에 있어서 계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불자들도 많습니다. 또한 한국의 출가자들은 계를 지 키는 사람을 별 볼일 없는 사람이나 앞뒤가 막힌 벽창호 정도로 여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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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이 있습니다. 잘못된 견해이고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수행과정에서 계를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을 나쁜 일로부 터 보호하고 승가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는 계를 지니는 것이 꼭 필요합 니다. 계는 단계에 따라 지켜야 하는 정도가 정해져 있습니다. 재가자들 은 오계를 기본적으로 지켜야 재가자로서 온전한 수행을 할 수 있습니 다. 출가자의 경우 20살 전의 사미는 열 가지 사미계를 받습니다. 재가 오 계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꽃 장식 등을 하지 말라, 춤추고 노래하지 말라, 금붙이 등을 지니지 말라, 때 아닌 때 먹지 말라, 이 다섯 가지를 더 해서 열 가지가 됩니다. 이 10계를 지켜야만 어린 아이가 자라서 비구가 되었을 때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미가 자라서 비구, 비구니가 되었을 때는 250계, 348계를 받고 비구, 비구니로서 기본적인 도덕성을 갖추게 됩니다. 이것은 아라한과를 목표로 하는 소승계입니다. 소승의 수행을 벗어나서 일체중생을 건지겠다고 대승의 마음을 낸 사람은 이미 받은 오 계나 비구·비구니계를 바탕으로 그 위에 보살계를 받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나란다에서 형성되어 지금 밀교권에서 주고 있는 대승 보살계는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보살계를 주고는 있는데 다른 전승인 것 같습니다. 대승의 보살행에는 나란다 전승 보살계가 맞는 것 같습니다. 비구계를 받아서 소승의 사마타행을 닦고, 그 뒤에 일체중생을 건지겠다는 보리심을 낸 사람이 지니는 대승보살계가 다른 것 같습니다. 비구의 모습에 대승 보살을 하나 덧입혀서 차원을 높인 것입니다. 비구계를 받은 사람이 대승보살계를 다시 받으면 비구 보살이라고 부릅니다. 대승보살계에서는 18가지 중죄가 있어서 보살이 보리심을 발한 후에 절대 18중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설합니다. 『허공장보살경』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보살이 되면 첫 번째로 맹세할 것이 있습니다. 자화자찬하면서 남을 비 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체중생을 위해 발심했다면 좋은 일은 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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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리고 나쁜 일은 자기에게 돌려야 하는데, 남을 대신해서 모욕을 받지는 못할망정 남을 비방하고 자기를 칭찬하면 큰 죄가 됩니다. 두 번째, 법을 구하는 중생이나 재물을 구하는 중생에게 법보시나 재물보시를 하지 않 으면 중죄가 됩니다. 보살이 되었으면 재물이든 법이든 베푸는 일에 인색 해서는 안 됩니다. 장소를 마련하고 법회를 열어 법을 설하고 경전을 유 포해야 합니다. 재물을 아끼지 말고 중생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보살에게 중죄가 됩니다. 세 번째,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대승보 살 앞에서 참회하는데 받아주지 않으면 중죄가 됩니다. 잘못을 참회하지 않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문제지만 참회하는 사람을 받아주지 않고 쫓아낸다면 보살이 아닙니다.

 

네 번째, 대승의 법을 말하지 않고 유사한 법을 말하면 중죄가 됩니다. 이를테면 부처님 경전이 팔만 사천인데, 경전을 놔두고 외도 사상을 강의 하는 것 등입니다. 글 자랑을 하려는 건지 승려가 되어서 『유교』나 『도 교』를 강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강의는 오히려 듣는 사람에게 혼 란만 가져다줄 것이니 보살이라면 대승의 정법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다 섯 번째, 삼보에 공양한 물건을 자기 마음대로 쓰면 중죄가 됩니다. 삼보 에 바쳐진 물건을 도둑질하거나 권세를 가지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 하는 일이 있습니다. 중국의 마오쩌뚱이 정권을 잡고 나서 불교문화재를 뺏거나 훼손한 일도 삼보의 물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사례입니다.

 

여섯 번째, 삼승의 바른 법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성문의 법으로는 번 뇌를 끊을 수 없고 결과를 이룰 수도 없다고 말한다면 중죄가 됩니다. 성 문·연각·보살승이 다 부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 배척한 다면 불법이 아닙니다. 배척하는 태도가 나중에는 분서갱유가 될 수도 있 습니다. 우리나라도 조선시대에 산문을 폐쇄하고 500년 동안 숭유억불 정책을 썼습니다. 배타적인 태도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 사례를 역사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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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 비구와 비구니를 해치면 중죄가 됩니다. 비구와 비구니는 불법의 혜명을 이어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들을 해 치는 것은 불법을 해치는 일입니다. 한 사람의 비구를 해쳐도 죄가 막중 한데 중국에서는 네 차례나 대규모의 훼불이 있었습니다. 경전을 불사르 고 불상을 파괴한 것은 물론이고 이때마다 수많은 비구·비구니를 승복 을 벗겨 환속시켰습니다. 이런 일들이 다 큰 죄가 됩니다.

 

여덟 번째, 다섯 가지 무간업을 짓는 것입니다. 무간지옥에 떨어질 다섯 가지 죄는 어머니를 죽이거나 아버지를 죽이거나 아라한을 죽이거나 승 가의 화합을 깨뜨리거나 부처님 몸에 피를 내는 것입니다. 만약에 보살 이라는 자가 이 다섯 가지를 저지른다면 중죄가 됩니다. 아홉 번째, 전도 된 견해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전도된 견해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외 도의 견해입니다. 선법이 아닌 것을 선법이라 하고 번뇌가 끊어지지 않는 방법을 번뇌 끊는 방법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번 뇌 끊는 방법이라면서 이런저런 프로그램이 난무하고 있습니다만, 해탈 이나 중생구제로 이끌지 않는 견해는 다 전도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열 번째, 도량이나 마을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도량에는 스승과 제자가 살 고 때로는 마을에서 청중이 와서 법을 듣습니다. 불법이 유지되는 이유 는 이런 환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국이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티 베트의 7,000여 사원과 중국 내에서도 수없는 절을 파괴했습니다.

 

열한 번째, 실제로 수행하지 않는 사람에게 공성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근기도 살피지 않고 공성을 말해주면 겁을 먹거 나 단견에 빠집니다. 그래서 공부를 안 하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열두 번째, 대승을 구하는 수행자를 소승의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보리 심을 내서 일체중생을 위해 살겠다는데 더 좁은 길을 가르쳐준다면 중죄 가 됩니다. 열세 번째, 소승의 별해탈계를 받은 제자를 그것으로부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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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하게 하는 것입니다. 별해탈계는 비구, 비구니, 사미, 사미니 등의 수행 자가 각각 받은 계를 말합니다. 번뇌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고 계를 통해 하나씩 벗어난다는 뜻에서 별해탈계라고 합니다. 이 계를 받고 수행하는 제자를 해탈의 길에서 이탈시킨다면 중죄가 됩니다. 열네 번째, 성문승과 연각승에 대해 폄하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성문은 부처님의 법을 듣 는 수행자이고 연각은 연기 도리를 관찰해서 깨닫는 수행자입니다. 2승 수행자도 불법 안에 있는 분들이니 폄하하는 것은 중죄입니다.

 

열다섯 번째, 나의 공덕을 높이고 남의 공덕을 낮추어 말하는 것입니 다. 보살이 된 자는 주고도 주었다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명성을 위해 서나 더 많은 소유를 위해 자기 공덕을 선전하고 남의 공덕을 폄하하면 중죄가 됩니다. 열여섯 번째, 궁극적 실재를 직접 인식했다고 제시하는 것 입니다. 공성의 입장에서 보면 궁극적 실재란 없습니다. 열일곱 번째, 승 가에 기증된 보시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승가의 물건에는 건물과 땅같이 큰 것도 있고 약이나 곡식같이 일용품도 있지만 공용이 기본입니다. 공공의 재산을 사적인 용도로 다른 데 쓰면 중죄가 됩니다. 열여덟 번째, 수행자의 물건을 뺏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소개한 것이 대승의 지계바라밀입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겠다고 발심했다면 삿된 법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삿된 법으로는 번뇌를 없앨 수 없고 일체중생을 건질 수 없습니다. 삿된 법에 빠져 외도가 되지 않으려면 대승보살계를 받고 18가지를 지키려 애 써야 합니다. 노력하다 보면 보리심이 자라나서 6바라밀이 완성될 것입 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승보살계를 주지 않지만 이 계의 내용을 생각하 고 정진한다면 수행자로서 도덕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께서 는 관정할 때 설법해서 이 계를 받게 합니다. 이것이 여러 가지 행을 받침 해주는 대승보살의 지계바라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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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장

참음의 완성(인욕바라밀)

 

범어 ‘kṣānti’를 인욕(忍辱), 안인(安忍)이라고 번역하는데 몸과 마음 의 고통을 참고 감당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고통이 있지만 특히 남에 게서 받는 모욕을 참는다는 뜻입니다. 그냥 참는 것이 아니라 인욕을 통 해 열반의 피안으로 함께 가기 때문에 여기에 ‘바라밀’을 붙입니다. 우리 는 나와 남을 구분하고 선과 악을 구분합니다. 모욕을 주는 상대가 있고 모욕을 받는 내가 있습니다. 이런 수준에서는 화가 나도 참는 것이 인욕 입니다. 그러나 보살은 무아를 체득했기 때문에 모욕받을 내가 없습니다. 그래서 분노가 일어나지 않고, 상대와 원수를 맺지 않고, 악의를 품지 않 습니다. 이것이 보살의 인욕바라밀입니다.

 

수행 중에 제일 어려운 수행이 인욕입니다. 가장 크게 문제를 일으키는 분노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보시 같은 경우는 차라리 인색하더라도 금방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원인이 결과로 이루어지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노는 휘발유처럼, 짚에 불이 붙는 것처럼 금 세 불이 붙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참지 못해서 화를 내면 큰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수행이 깊은 사람도 화를 한 번 낸 것 때문에 퇴보하는 이야기가 경전에 종종 나옵니다. 인욕은 그만큼 어려운 수행입니다. 인욕이 완성되면 수행자로서 거의 8할에 도달했다 할 수 있 습니다. 인욕이 안 되는 한 그 어떤 수행도 완전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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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인욕은 중요한 덕목입니다. 참는 자 에게 복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을 믿는 사람들이 테러나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자기들의 신을 믿지 않거나 모독 한다는 이유로 분노를 일으켜서 그들이 말하는, 신의 피조물을 죽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신에 대한 모독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말을 안 듣는다고 해서 때리거나 쫓아내지 않습니다. 나무라고 타일러서 가족의 일원으로 품는 것처럼 자비로운 신이라면 피조물을 죽이지 않을 것입니다. 유일신 을 믿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큰 문제 중에 하나가 배타성입니다. 내가 믿 는 신이 옳기 때문에 그밖에 다른 존재는 배제합니다. 그래서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아상이 가장 거친 형태로 나타난 것이 유일신입니다. 다른 우상을 숭배한다고 사람을 죽이고 불상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부 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불상을 깨뜨리고 절을 부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도 나쁘지만 그 사람을 향해 분노를 일으킨다면 더욱 나 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불법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분노입니다. 산티 데바는 『입보리행론』 인욕품의 첫 구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수 천억 겁 동안 보시공덕을 쌓고, 계를 지키고, 사마타 수행을 하고, 과거 세부터 지금까지 부처님께 공양승사를 하고, 선행을 수없이 해서 아주 착한 사람이 되었다 하더라도 한 번의 분노가 그 공덕을 모두 불태워 버 린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집을 짓는 데는 많 은 시간과 돈과 노력이 들어갑니다. 몇 년을 거쳐 준비를 하고 설계를 하 고 나무를 깎아 기둥을 세우고 벽을 만들고 해서 완성하지만 불타는 데 는 한 시간도 안 걸립니다. 한 번의 분노로 오랜 수행이 허사가 되는 것 도 이와 같으니 인욕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세속의 일도 마 찬가지입니다. 내가 낳아서 기른 자식이라 해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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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을 가한다면 아무리 낳아서 길러주신 부모라 해도 자식은 마음에 상처 를 입고 다시는 안 보려고 할 것입니다. 분노를 일으키는 것만큼 큰 죄가 없습니다. 우주에 있는 다이아몬드를 다 훔친 것보다 분노 일으킨 것이 더 큰 죄가 되는데, 이것이 죄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왕이 분노를 일으키면 전쟁을 해서 수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고위층에 있는 사람일수록 분노를 일으키면 매우 위험합니다. 가장이 분노를 일으키면 가족 전체가 공포에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불난 집이 되었는데 그 속에 누가 들어가려고 하겠습니까?

 

요즘에는 분노를 적절하게 표출하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바른 태 도가 아닙니다. 분노표출로는 자기 문제도 해결할 수 없고 타인과의 관 계도 좋아질 수 없습니다. 분노는 조금이라도 일으켰다 하면 바로 죄악 이 됩니다. 비구나 비구니는 설사 누가 나를 죽인다 하더라도 분노를 일 으키거나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머리 깎고 출가하 는 것을 할애출가(割愛出家)라고 합니다. 나의 애착을 끊는 것이니까 내 가 설사 죽는다 하더라도 원망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분노를 일으키고 원한을 갖는다면 수행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서 가장 어려운 수행이 인욕이고, 완성되었을 때 가장 빛나는 수행도 인 욕입니다. 사마타는 마지막 마음 속의 번뇌를 끊는 데 필수적인 수행이 지만 인욕은 모든 공덕의 80~90%를 차지합니다. 걸인이 아무리 수단이 좋아서 잘 얻어먹어도 만약 주는 사람 앞에서 성질 한 번 내버리면 다시 는 못 얻어먹습니다. 인욕 수행자는 이 생각을 기본으로 가지고 마음을 관찰해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분노가 한 번 일어났다 할 때는 벌써 부처 님 세계를 한 번 불 지른 것입니다.

 

인욕이라는 말은 ‘참을 인(忍)’에 ‘욕되게 할 욕(辱)’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참는다는 말인가요? 나를 욕되게 하는 것을 참는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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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많이 해서 몸이 고된 것을 참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욕되게 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가 인욕입니다. 그러면 나를 욕되게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분노가 일어나는 원인, 욕됨으로 받 아들이는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사실 매우 간단한 문제입니다. ‘아(我)’에 대한 애착 때문입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 그 안을 가만히 들 여다보십시오. 내 생각을 왜 이해 못하느냐, 내 행동을 왜 이해 못하느냐, 이해하고 인정해주지는 못할망정 내 생각이 틀렸다고 모욕을 주니 성질 난다, 그렇게 해서 싸움이 됩니다. 거기에는 결국 ‘나’가 들어있으니 나 를 욕되게 하고 나를 힘들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욕은 나를 완 벽하게 버리고 무아가 되는 마지막 단계입니다. 무아를 정확하게 이해하 지 못하면 인욕행도 안 될뿐더러 왜 인욕을 해야 되는지조차 모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인욕을 화를 가라앉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 정도를 인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좌선하고 앉아 있으면 좀 가라앉기는 합니 다. 그러나 ‘나’가 있기 때문에 나중에 그 ‘나’를 건드리면 분노가 다시 올라옵니다. 『입보리행론』의 우드라까 이야기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는 사마타 수행을 열심히 하는 바라문이었습니다. 한 번 앉으면 일주 일 이상 정진하고 오랫동안 고행을 했습니다. 평생 머리를 안 깎아서 긴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였고 그게 고행의 표시였습니다. 그런 그가 일주 일 선정에 들어가 있는 동안 쥐가 와서 머리카락을 갉아먹었습니다. 선정 에서 깨어나자 머리카락 한 덩어리가 툭 하고 떨어져버렸습니다. 얼마나 성질이 났는지 쥐를 잡으려고 쥐구멍마다 쑤시고 다니고 불을 갖다 넣고 하다가 안 잡히니까 죽이려고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렇게 선정을 오 래 닦았는데 겨우 쥐한테 성질이 나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수행을 오랫동안 했는데 감히 수행한 ‘나’를 훼 손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수행하는 줄 쥐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머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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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이 40년 수행의 표상인 줄 쥐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드라까 이야기 는 실제 있었던 일이고 나란다 대학에서 많이 회자되었다고 합니다.

 

우드라까처럼 수행하는 ‘나’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수행했다, 내 가 깨달았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깨달은 자가 아닙니다. 깨달을 것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다는 말씀이 『원각경』에 있습니다. 무아가 전제되지 않으면, 깨달은 내가 사라지지 않으면, 깨달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라 한을 다 깨달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법아(法我)가 있기 때문입 니다. 깨달음이란 영원성을 지닌 그 어떤 것도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따 라서 ‘깨달은 나’란 없는 것입니다.

 

수행자에게 수행하는 ‘나’가 있다면 세속인들에게 ‘나’는 무엇으로 이 루어집니까? 나의 무엇이 손상되었을 때 분노가 일어납니까? 우리는 무 엇보다도 몸을 나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생긴 것에 체면과 자존심을 겁 니다. 누가 “못생겼다” 그러면 분노가 일어나서 “그러는 너는 잘생겼냐?” 이런 식의 반응을 보입니다. 어느 코미디언이 그 직업을 갖기 전에는 자 기가 못생긴지 몰랐었는데 선배들에게 못생겼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 서 못생긴 줄 알았다고 합니다. 전에는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나’가 있 었고, 이제는 못생긴 줄 아는 ‘나’가 있습니다. 몸을 나로 생각하고 애착 을 갖는 한 이런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누가 건드리면 분노를 일으키기 쉽습니다.

 

그다음으로 나를 구성하는 요소는 외적인 자기 것들 입니다. 대체로 세속 인들은 재산이 있고 그것을 건드리면 분노가 일어납니다. 정부가 잘못해서 아파트 값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올라가도 욕을 먹고 내려가도 욕을 먹습니다. 아파트 값이 오르면 화나는 사람들은 아파트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아파트가 있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어쩌고저쩌고 떠 들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를 것입니다. 내 아파트, 내 돈, 내 주식,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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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인 것에 ‘나’를 갖다 붙입니다. 그래서 물질적 ‘나’가 손해를 입으 면 분노가 일어서 욕을 하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나를 형성하는 것이 사 회적 위치입니다. 사람들의 지위와 계급은 층층입니다. 나보다 낮은 사 람에게는 반말을 하지만 나보다 높은 사람에게는 감히 함부로 하지 못 합니다. 지위가 높을수록 돈과 명예가 따르고 지위가 낮을수록 모욕을 받기 쉽습니다. 모욕을 당한 자아는 깊은 상처를 입고, 그래서 보다 높은 위치로 올라가려는 욕망이 끝없이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생긴 것, 가진 것, 사회적 위치가 나를 형성하고, 내가 있기 때문에 큰 고통이 따릅니다.

 

그리고 생각이나 사상을 나의 것으로 여깁니다. 법아(法我)라고 하는 데 주로 학자나 종교인들이 갖는 특징입니다. 모든 것이 영원하다거나 모든 것이 허무하다거나 하는 외도들의 견해가 다 법아견입니다. 자신들 의 견해만 옳다고 고집하면 다른 견해를 배척하게 됩니다. 심한 경우는 마녀사냥도 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설사 외도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바 른 법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살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증오하거나 배 척하는 대신 설득해서 바른 견해를 갖게 합니다. 법아견은 일체법을 어떻 게 보느냐의 관점입니다. 일체법이라고 할 때의 법은 결정되어 있지 않습 니다. 그것을 법무아라고 합니다. 또 사람들을 고통으로부터 건져주는 것도 법입니다. 그것도 사람의 고통에 따라서 약을 줄 뿐이지 정해진 법 은 없습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때는 돛단배를 타던지 나룻배를 타던 지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저렇게 가서 저기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 제를 생각합니다. “그렇게 가면 도착을 못할 것 같아. 그 배를 타고 가다 가는 중간에 가라앉을 수 있어. 그 배는 거기로 가는 배가 아니야.” 이런 관점을 가지고 이야기해줄 수는 있지만 법에 대해 집착하는 것을 불교에 서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집착을 버려야 인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깥에 있는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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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빼앗긴다고 생각하고 분노를 일으킵니다. 내 안에 있는 생각을 내 것으로 집착해서 나와 다른 생각을 만나면 분노하 고 공격합니다. 바깥의 사물이든 안의 사상이든 그런 것은 모두 실체가 없습니다. 영원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내 집이라고 이야기하지 만, 정말 내 집이라면 팔아도 내 집이니 팔 수 없을 것입니다. 집은 인연 이 있어서 잠깐 머무는 동안 가치를 지니는 것이지 내 것이 아닙니다. 집 을 팔았는데 남이 그 집에 들어와 산다고 분노를 일으키고 항의를 하지 는 않지요. 집을 팔았으니까 내 집이 아니라는 것을 사실대로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인욕을 수행하려면 상대가 필요합니다. 산중에 혼자 들어가서는 인욕 이 안 됩니다. 보시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욕과 보시는 혼자 할 수 있는 수행이 아닙니다. 산중에 홀로 앉아서 할 수 있는 수행은 딱 하나, 사마 타밖에 없습니다. 대상이 있어야 주든 말든 할 것 아니겠습니까? 물질적 보시를 제일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살면 자꾸 줄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법보시도 사람을 만나야 법을 말할 기회가 생깁니다. 나 혼자 토굴에 앉아있으면 나무에게 설법할 수도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가난한 사람이 나타나면 필요한 물건을 주고, 법을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법을 나누고, 죽을 때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안심을 주는 것이 보시입니다. 다 상대를 만 나야 이루어지는 공덕입니다. 인욕행도 혼자서는 안 됩니다. 나를 인욕 하게 해주는 상대는 자칫 잘못하면 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질을 돋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나를 껄끄럽게 하고 고통스 럽게 하는 상대를 안 만나려고 합니다. 할 수 없이 만나야 한다면 적이라 생각하고 싸워서 이겨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나에게 고통을 주거나 욕보이는 사람을 싸워서 이겨야할 대상으로 보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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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관찰하라고 가르칩니다. 욕을 당하고 분노가 일어나면 수행이 안 됐다는 자각이 올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를 먹이는 사람이나 거슬리는 경 계를 만나는 것은 인욕수행자 입장에서는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애먹이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어떤 목사님이 “절에 가보니까 귀신 종합청사더라.” 그랬답니다. 그 말 을 전해 듣고 가만히 생각해봤습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행위에 토테미즘, 샤머니즘, 조상숭배 이런 것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을 보니까 저 사 람이 말을 과하게 했어도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바로 지적해줬으니 성 질낼 일도 아니고 부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실제로 그렇다면 당신 말이 맞다고 하면 되고, 그런 일이 없으면 아니라고 하면 됩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욕보이는 사람들이 사실은 인욕수행을 돕는 큰 스승입니다. 그 스승은 전부 역적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병에 걸렸을 때 병마가 들 어와서 나에게 잘해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병을 대하고 다스리는 데서 힘이 생깁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데바닷타가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데바 닷타는 부처님을 죽이려고 여러 차례 위해를 가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법화경』 데바닷타품에서 그와의 전생 인연을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데 바닷타는 전생에 나의 선지식이다. 그 선지식 덕분에 내가 육바라밀을 완 성하고 부처를 이루었다.” 부처님의 인욕심이 완벽하게 드러나게 해주신 분이 데바닷타입니다.

 

우리는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인욕을 수행 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가 떠갈 때도 물의 부력, 물의 마찰력 의 도움을 받습니다. 세게 달릴수록 마찰력과 부력이 더 크게 작용합니 다. 인욕도 상대가 나를 욕되게 할수록 수행이 점점 높아집니다. 부처님 은 오랜 전생에 인욕행을 완성하셨습니다. 가리왕이 손 마디마디를 잘랐 을 때 인욕바라밀이 완성된 마음을 들여다보고 ‘오, 됐다, 됐다.’라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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셨습니다. 가리왕은 그 말을 듣고 자기를 약 올린다고 더 죽이려고 대들 었습니다. 인욕행이 완성된 분을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 금만 건드려도 성질이 납니다. 털만 하나 뽑아도 발끈합니다. 그럴 정도 로 우리의 인욕은 허약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도 전체적으로 분노가 들 끓고 있습니다.

 

하나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분노 표현에 관한 문제입니다. 요즘에 는 분노를 적절하게 표현하고 사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 다. 분노는 표현할수록 심해집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힘든 사람 들은 그것을 수행으로 삼아야 합니다. 수행을 안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 가 와서 마음의 병이 됩니다. 무조건 어금니만 깨물고 참으려고 해도 병 이 됩니다. 수행이 좀 된 사람은 상대가 화내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안타 깝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 몸에 불이 났구나, 저 사람 머리에 불이 붙었 구나, 무슨 안 좋은 일이 있구나, 어떻게 화를 꺼지게 해줄까?’ 이렇게 생 각합니다. 요즘에는 자기가 먼저 화가 나서 벌떡거리고, 남이 화가 나 있 으면 옆에서 기름을 더 끼얹습니다. 매스컴이 그런 일을 합니다. 분노심 이 들끓어서 서로 공격할 때 가라앉히는 매스컴이 하나도 없습니다. 계 속 싸움을 붙여놓고 자기들은 쏙 빠져버립니다. 그래서 사회가 온통 시 끄럽고 가라앉을 수 있는 것도 계속 들끓고 있습니다.

 

좀 화가 나더라도 가라앉히고 이길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을 만들어나 가야 합니다. 그 과정이 인욕수행입니다. 디스크에 걸려서 허리가 아플 때 주변의 근육을 훈련시켜서 극복하라고 하지요. 그런 것처럼 우리 마 음속에 인욕의 근육을 키우지 않으면 상처받고 병 걸리고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피안으로 건너가는 데 인욕은 매우 중요 한 수행입니다. 분노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고통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이 인욕이고 모든 공덕에 가장 앞서가는 공덕이 인욕입니다. 참을 일이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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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이 사바세계에서, 요즘 같은 시대에 인욕만큼 중요한 수행은 없습니 다. 이 점을 항상 생각하여 내 마음을 살피고 분노가 일어나는지 안 일어 나는지 잘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육바라밀 중 보시바리밀과 지계바라밀과 인욕바라밀은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의 두 가지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진제와 속제를 요의(了義) 와 불요의(不了義)라고도 합니다. 보시바라밀을 속제의 관점에서 본다면 베푼 자도 있고, 받은 자도 있고, 주고받은 물건도 있습니다. 저 사람이 불쌍해서 백만 원을 주었다면 불쌍한 저 사람도 있고, 베푼 나도 있고, 돈 백만 원도 있습니다. 속제의 베풂에는 아(我)가 있기 때문에 베푼 사 람이 위대할수록 받은 사람은 비참해집니다. 주면서 내가 너보다 위에 있 다는 선민의식이 깔려있게 됩니다. 그러면 진제의 베풂은 어떤 모습일까 요? 성자가 되면 베풀고도 베푼 데가 없으니 무아라서 그렇습니다. 그와 나는 둘이 아닙니다. 불이(不二)라고 해서 하나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둘이 아니라는 말과 하나라는 말은 다릅니다. 무아라는 면에서 둘이 아 니라고 할 수 있지만, 모양이 다르다는 면에서 하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일불이(不一不二)라고 합니다. 이것을 체득한 보살은 『금강경』 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합니다. 준 사람도 없고 받은 사 람도 없고 주고받은 것에 값을 매기지 않습니다.

 

지계바라밀도 두 가지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속제의 관점에서 보면, 불살생계를 지킨 사람은 내가 살생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계 율을 잘 지키면 사회에서 존경을 받습니다. 선민의식도 생기고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놓고 생각합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에서 도덕 적인 명분을 찾고 다른 사람들을 낮추어봅니다. 이것이 속제의 계율입니 다. 진제의 관점에서는 계를 지킬 때 아상이 없습니다. 나는 계율을 지키 니까 훌륭한 사람이고 저 사람은 안 지키니까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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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습니다. 다만 계율을 안 지켜서 나중에 고통당할 줄 아니까 안타까 운 마음으로 바라볼 뿐 낮춰보거나 혐오하지 않습니다. 지구상에 없어져 야 할 존재는 없습니다. 간혹 성소수자들을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자비심을 잃은 사람이고 아상이 깊은 사람입니다. 만약에 부처 님이 일체중생을 다 건질 필요가 없다고 하거나 계율을 지키지 않는 사 람은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라고 했다면 나는 그런 부처님을 안 믿겠습니 다. 진제의 관점에서는 내가 계를 지킨다는 생각 없이 계를 지켜야 지계 바라밀이 됩니다.

 

인욕바라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깨달았다고 하면 깨달은 것이 아 니듯이 내가 참는다고 하면 진정한 인욕이 아닙니다. 세속에서는 인욕을 참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안 됐으니까 참아준다고 하지만 그렇게 참으면 속병이 납니다. 그러나 안 참으면 엉망진창이 되기 때문에 그래도 참는 편이 좀 낫습니다. 안 참고 성질나는 대로 하면 온통 사고 뿐입니다. 예 컨대 차를 몰고 가다가 빨리 안 간다고 뒤에서 받아 버리면 교도소에 갑 니다. 교도소는 안에서도 잠그고 바깥에서도 잠가서 제 맘대로 문을 열 고 나올 수가 없습니다. 억지로라도 참는 데가 교도소입니다. 우리가 사 는 사바세계도 참는 곳입니다. 그래서 사바세계를 ‘견딜 감(堪)’, ‘참을 인(忍)’, 감인세계(堪忍世界)라고 합니다. 진제의 입장에서 보면 인욕은 참을 일이 없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본래 없는데 욕 볼 일이 어디 있겠 습니까? 아상이 깊은 사람일수록 고상한 척하고 이름이 나면 거기에 취 합니다. 그러다가 조그만 모욕이라도 받으면 그 고상한 아(我)가 성질을 벌컥 냅니다. 인욕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은 인연 따라 모여 있는 나도 물 거품처럼 일어난 것이고 나에게 모욕을 준 사람 또한 물거품처럼 흩어질 것을 압니다. 잠시 모여 있는 존재이고 업에 의해 일어났다 사라지는 행 위일 뿐인데 무슨 욕을 받는다고 벌컥 하겠습니까? 모욕을 참는 것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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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라 받는 사람도 없고 참을 일도 없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바라밀은 속제와 진제를 구분해서 보아야 합니다. 세속적 인 실천이 좀 낮은 차원이기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선행이 됩니다. 진제의 바라밀은 무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실천하면 선행을 넘어서는 공덕 이 됩니다. 같은 보시, 지계, 인욕이라고 하지만 속제와 진제를 섞어서 얘 기하면 혼선이 빚어집니다. 바라밀을 닦는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내가 베 풀었다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전에 어느 절에 잠깐 있을 때 어떤 보살이 대웅전의 기둥 만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슨 기도를 하는가 싶 었는데 오랫동안 기둥 열 개를 돌면서 계속 만지작만지작 했습니다. 나 중에 들으니 이 법당을 지을 때 기둥 시주를 했는데 어느 기둥이 내 기둥 인지 모르겠다고 그럽니다. 보시를 이렇게 하면 복 쪼가리는 받을지 몰 라도 공덕이 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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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장

부지런함의 완성(정진바라밀)

 

모든 만남에는 선연과 악연이 공존합니다. 과일나무가 바람과 물과 햇 볕을 충분히 받으면 좋은 결실을 맺지만, 태풍을 만나면 다 된 과일이 상 처를 입거나 떨어져서 결실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렇듯이 사람도 좋은 인 연으로 만나면 좋은 결과를 이룹니다. 잘 어울려 서로의 삶을 상승시켜 주는 관계를 좋은 인연, 선연이라고 합니다. 좋은 사람 만나서 좋은 생각 을 나누고 선업을 교환하면서 함께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좋은 사회는 이타적인 사람이 많은 곳입니다. 각자의 이기심만 챙기면서 좋아지는 사 회는 없습니다.

 

오늘은 여섯 가지 바라밀 가운데 네 번째 정진바라밀에 대해 말씀드리 겠습니다. 범어 ‘vīrya’를 ‘정진(精進)’ 또는 ‘정근(精勤)’이라고 번역했 습니다. 정진의 정(精)은 정미롭다, 정밀하다, 면밀하다, 정제되다, 순수하 다는 뜻이고 진(進)은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정(精)은 원래 불순물을 골 라내서 정제한 쌀인데 불교에서는 오염된 생각을 걷어낸 바른 정신을 뜻 합니다. 바른 정신과 바른 행으로 업을 상향시켜 나가는 것을 정진이라 고 합니다. 부처님의 정법에 의지하여 닦아 나아갈 때 나태함이 없다는 뜻에서 부지런할 근(勤)을 붙이기도 합니다. 게으름 없이 후퇴하지 않는 삶을 정진이라고 했을 때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도둑질을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생각도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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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횟수도 늘어나고 성공률도 높아져서 점점 더 도둑질을 잘하게 된다 면 아무리 부지런해도 정진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후퇴하는 삶이기 때문 입니다. 내가 번뇌 버리는 작업을 계속 해나가는 것이 정진이고, 다른 사 람을 그 길로 이끌어 주는 것이 정진입니다. 이 과정에서 게으름이 없어 야 합니다. 정진은 게으름의 반대말이 됩니다.

 

옛날에 육조 혜능 스님께서 견성을 하시자 오조 스님께서 가사와 발우 를 전해주셨습니다. 전법의 징표를 빼앗으려는 사람들이 쫓아오자 혜능 스님은 추적을 피하느라고 사냥꾼들 속에 섞여 살았습니다. 사냥꾼들은 도인을 옆에 두고서도 전혀 몰랐습니다. 도인은 자비심이 강해서 사냥꾼 을 악업에서 건져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냥이 그들의 생계 수단이라 무조건 살생하지 말라 하기도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같이 다니면 서, 저 사슴은 다쳐서 절룩거리는데 사냥꾼이 자존심도 없이 다친 생명을 사냥하느냐. 정상적으로 경쟁해서 잡는 것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면 되 겠느냐, 이런 식으로 말했습니다. 새끼라고 못 잡게 하고, 새끼를 가졌다 고 못 잡게 하고, 새끼를 낳을 때라고 못 잡게 하고, 굶주릴 때라고 못 잡 게 했습니다. 몇 년 동안 사냥꾼이 사냥을 못하게 되자 하루는 당신 때문 에 굶어 죽게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때 도인은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대가 지금 부지런히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가장 게으르게 사는 것이다. 반복해서 악업을 짓는 것은 그대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쁜 일 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고 고통만 반복시킬 뿐입니다. 고통을 덜어주는 쪽으로 노력하는 것을 부지런하다고 합니다. 분별력을 가지고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가려야 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사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저것 아무리 열심히 해도 욕심을 줄이는 데 도움 이 되지 않는다면, 또 아무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게으름 이고 오히려 타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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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바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부지런하다고 생각합니다. 나 의 행복과 여러 사람의 행복을 다 깨뜨릴 일인데도 열심히만 하면 좋은 결과가 오는 줄 압니다. 좋은 결과를 맺으려면 선행을 해야 합니다. 정진 은 선행을 부지런히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삶을 돌아보면 선행을 찾 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뭄에 콩 나듯 합니다. 어쩌다 한두 번 한 것을 가 지고 선행을 베풀었다고 하면 그나마 드물기 때문에 칭찬을 받습니다만, 그러나 한두 번의 선행을 정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몸에 배어 일상 속에서 습관이 되어야 정진이라고 합니다. 선행하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어렵고 쉬운 것은 습관의 문제입니다. 술을 못 먹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술자리에 가야 한다면 고역일 테고, 술을 잘 먹는 사람이 술을 안 먹는 자리에 가면 고역일 것입니다. 쉽고 어렵고의 문제는 내가 그것을 반복적 으로 했느냐 안 했느냐의 문제이지, 악행이 쉽고 선행이 어렵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도둑놈이 도둑질하기 쉬운 것은 습관이 들었기 때문입 니다. 선행도 자꾸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습관을 들인다는 것은 좋은 생 각을 하고, 좋은 말을 하고, 그 말과 생각을 행동으로 자꾸 옮기는 것입 니다. 일상생활이 그렇게 되는 것이 정진입니다.

 

매일 절에 다닌다고 선행이 되지는 않습니다. 내 복만 빌러 절에 다닌 다면 거기에 무슨 선행이 있겠습니까? 좋지 않은 일을 자꾸 줄여서 나도 불행에 빠지지 않고 남도 불행에 빠지지 않게 노력하는 것을 선행이라 하고, 그것이 일상 속에서 습관이 되었을 때 정진이라고 합니다. 다리 좌 선하고 앉아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 정진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 다. 법복을 입고 절에 다녀도 선행이 없다면 그냥 유니폼 입은 사람에 불 과하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세속에서는 ‘내가 벌어서 내가 먹고 산 다, 내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고 열심히 산다.’고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동물들도 그렇게는 합니다. 내가 벌어서 내가 먹는 것도 모두 착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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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라면 선행과 악행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고 인 과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타적인 선행을 해나갈 수 있 습니다.

 

선행은 재가오계나 10선계를 받고 악을 멈추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 다. 내 속에서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정진이라고 합니다. 절에 다니 느냐가 선행의 기준이 아니라 내 마음과 행동이 선한 쪽으로 차츰차츰 바뀌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자기도 힘들어지고 자기 가 속한 주변도 힘들어집니다. 예를 들어 절에 다니는 신도들이 선행은 안 하고 전부 악행만 저지르고 다닌다면 절이 십 년도 못 갈 것입니다. 가 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식구들이 각각 자기만 알고 다른 식구들을 위하지 않는다면 본인들도 집에 들어가기 싫을 것입니다. 하물며 어느 누가 그 가정을 좋게 보고 더불어 살려고 하겠습니까? 악연이 계속되어 몇 세대 안 가서 망할 것입니다.

 

흔히 정진을 도 닦는다고 하는데, 선행조차 안 되는 사람들이 도 닦는 다고 하면 기초공사도 하지 않고 집을 짓는 격입니다. 정진은 10악을 행 하지 않는 것과 10선을 행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세속에서는 남에게 피 해를 끼치지 않으면 선하다고 하는데 불가에서는 거기서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을 선행이라고 합니다. 선행을 하기 위해 부 지런히 노력하는 것을 정진이라고 합니다. 불가에는 권선이라는 말이 있 는데 공부하는 사람들이 서로 선행을 권한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화주 책 들고 나가서 모금하는 것을 권선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야 기이고 인과법을 기본으로 착해지기를 권하는 것이 권선입니다. 권선은 정진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입니다. 출가자나 재가자나 보살행을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나만을 위해서 사는 것을 줄여야 합니다. 대승보살의 정진은 이기심을 줄이고 이타심을 키워나가는 데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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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기심은 서로를 괴롭히지만, 이타심은 서로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입 니다. 코로나 대응 과정에서 이기심은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백신을 개 발한 선진국들을 보면 어려운 나라에 백신을 주자고 하는 나라가 별로 없었죠. 가난한 국가들은 왜 빨리 구해오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목소리 만 들립니다. 그러는 사이 변이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번지는 것을 수차 례 목격했습니다. 백신 만들 기술도 없고, 사서 쓸 돈도 없는 일부 국가 들이 소외되었을 때 우리만 백신 맞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남을 배격하고 우리만 잘 살 수 없다는 것 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가 동일체인데 나만 살려고 하면 공멸합니다. 인 류가 이기적으로만 살았다면 멸종했을 것입니다. 인류학자들은 네안데 르탈인의 경우 여러 이유를 찾을 수 있지만 바이러스로 인해 멸종했을 것이라고 봅니다만, 이타적이지 않을 때 생명체들은 생명의 고리에서 아 무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타적인 마음을 키워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중생이 고통 속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잊고 살지만 윤회하는 육도 세계는 어디에도 안심하고 머물 곳 없는 고통 속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사성제 법문에서 첫 번째로 고제(苦諦)를 말씀하셨습니다. 고통 없는 곳이 있다면 거기에 머물 수 있겠지만 육도 중에 그런 곳은 없습니다. 윤회하면서 겪는 가장 핵심적인 고통은 생로 병사의 고통입니다. 지옥에 태어나건 천상에 태어나건 사람으로 태어나 건 동물로 태어나건 수라로 태어나건 아귀로 태어나건 전부 태어나는 고 통과 그 후로 변화해 가면서 병들고 늙어가고 죽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 렇기 때문에 고통 받는 중생들을 고통이 사라진 니르바나의 상태로 모 시고 가겠다고 이타심을 내는 것입니다. 만약에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 앉으셔서 생사의 고통이 사라진 이 경계를 확인하지 못하셨다면 이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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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고, 그랬다면 불교는 이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불자들은 고통 받는 중생에게 공감을 느껴야합니다. ‘나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 모두, 나아가 육도에 윤회하는 모든 중생이 고통을 받고 있 구나. 근원적으로 죽음의 고통이 항상 도사리고 있구나.’ 이렇게 같은 중 생으로서 고통 받는 생명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갖는 것을 연민이라고 합니다. 중생을 모두 건지겠다, 이 길을 통해서 함께 니르바나에 이르겠 다는 마음을 내는 것을 보리심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생명들이 아닙니다. 인연을 분석해보면 세상에서 만난 인연도 있고, 법으로 만난 인연도 있고, 인연이 없는 생명체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연, 법연, 무연중생을 가리지 않고 설법을 해놓으셨습니다. 당신이 열 반하신 뒤에 직접 만나지 못하는 무연중생을 위해 해놓으신 법문을 우리 가 지금 경에서 만나보고 있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 수보리가 “이 말씀을 듣고 신심을 낼 중생이 얼마나 되 겠습니까?” 하고 묻자 부처님께서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여래가 멸도한 뒤 5백 년이 세 번 지나도 신심을 내서 이 말을 진실로 생각하는 이가 있 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직접 만나지 못할 미래의 중생이지만 여 러 생을 수없이 태어나면서 만났을 어머니, 아버지, 형제, 친구였을 것입 니다.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기심에서 이타심으로 옮겨가는 보리심 수행이 중요합니다. 그 법을 잊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정진입니다. 스승에게 칠지 공양을 올리고, 예를 올리고, 예경을 하 고, 공양을 올리고, 참회를 하고, 수희동참을 하고, 스승께 오래 계셔달 라고 청하고, 스승께 거듭 법을 청해 들으면서 정진의 길로 나아가야 합 니다. 내가 이렇게 행한 정진이 모든 중생에게 회향되면 좋겠다는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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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보리심을 냈다면 탐욕을 줄여 남에게 보시를 하고, 남을 해치지 않기 위해 계를 지니고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인욕을 하는 등 이타심을 가지 고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이 정진입니다. 정진은 게으름이라는 병을 대체 하는 치료제입니다. 정진하지 않는 것을 게으름, 또는 타락이라고 합니 다. 보리심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게으른 자입니다. 남에게 보시를 하지 않거나, 계를 지키지 않거나, 인욕을 하지 않는다면 게으른 자입니다. 마 음속까지 박힌 번뇌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 사마타와 비파사나를 행하지 않는다면 게으른 자입니다. 무언가 아무것이나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은 정진이 아닙니다. 이타심이 전제되어야 정진이고 정진하지 않으면 타락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밥 먹고 매일 부지런히 골프 치러 다닌다면 그것을 정진이라 하겠습니까? 불교는 경쟁을 하지 않습니다. 선의의 경쟁이라도 상대를 이기려고 ‘나’를 세우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계를 지키고 인욕 을 하고 정진하는 것은 경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타중생을 위해서입니 다. 내가 그렇게 되고 자타가 다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리심 을 내고 선행으로 정진하지 않으면 나에게나 남에게나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我)’가 있는 한 보리심을 일으킬 수 없고 정진도 되지 않습니다. ‘내’가 없다는 것을 『반야심경』에서 “오온이 공하다”라고 했습니다. 우 리를 구성하는 것이 오온입니다.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몸, 감각기관으 로 받아들이는 느낌, 떠올리는 생각, 일으키는 의지, 알아차리는 작용, 이 색·수·상·행·식이 인간의 기본 구성이라고 했을 때, 그 성질들을 낱 낱이 살펴보면 변치 않는 자성을 가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 문에 우리가 보고, 듣고, 나라고 인식하는 이것이 이름이고 모양일 뿐입 니다. 이름과 모양 외에 무엇이 있습니까? 이름과 모양은 인연 따라서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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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난 하나의 현상일 뿐, 깊이 관찰해보면 나라는 것은 있지 않습니다. 우 리의 착각일 뿐입니다. 이 공성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사마타 를 통해 공성을 이해하는 내 마음도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라지면서 나를 중심으로 생겼던 탐욕과 분 노와 어리석은 생각들이 사라지게 하는 것을 정진이라고 합니다.

 

공성에 대한 깊은 관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또 하나의 집착이 생기는 데 그것이 종교적인 ‘나’가 되기도 하고 세속적인 ‘나’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보통 세속적인 쪽을 많이 생각합니다. 이것은 내 집이고, 아파트 값이 올라가서 기분이 좋은 것도 전부 나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 에게 이타심이 있다면, 아파트 값이 올라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겠다는 생각이 먼저 나와야 하는데 그런 소리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진은 공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합니다. 사마타와 비파사나 를 통해서 나라는 존재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해야 번뇌가 끊어 지기 때문입니다. 번뇌가 안 끊어진 상태에서는 보리심이 완벽하게 실현 될 수 없습니다. ‘나’가 있으면 『금강경』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안 됩니다. 따라서 공성을 투철하게 깨치기 위해 사마타와 비파사나를 수행해야 합니다. 『금강경』에서 말한 “불취어상 여여부동”은 사마타이 고,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은 비파사나입니다. 사마타로 일념이 되고 비파사나로 일체가 자성이 없는 줄 들여다봐야 번 뇌가 뚝 끊어집니다. 탐진치의 번뇌를 끊고자 하는 거듭된 노력이 정진입 니다. 정진하는 사람은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이 벌써 달라져 있습 니다. 마음은 변치 않는 것이 아니라 거듭 변하는 것입니다. 대승을 수행 하는 사람이라면 출가이건 재가이건 보리심을 내서 고통 속에 빠져있는 저들을 어떻게 건져야 될까라는 생각을 점점 더 깊이 하고 무아를 관찰 해서 번뇌를 철저하게 끊어나가야 합니다. 나중에는 육바라밀이 완성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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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게 나다’라고 생각하던 부분까지 다 깨져야 합니다. 그렇게 거듭 노력해 나가는 것을 정진이라고 합니다. 그래야만 내가 점점 나아지고 고 통으로부터 벗어나서 열반 언덕으로 중생과 함께 나아가게 될 것이기 때 문입니다. 니르바나의 행복에 도달하는 길을 찾아서 그곳으로 가기 위해 부지런 히 노력하는 것을 정진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노력해야만 바뀝니다. 누 가 갖다주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도 신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옆에 남 편이 있고, 부인이 있고, 자식이 있고, 부모가 있더라도 소용없습니다. 스 스로 찾아서 부지런히 나아갈 때 마침내 행복에 도달할 것입니다. 항상 정진합시다. 어제와 오늘이 같아서는 안 됩니다. 어제 생각에 잘못이 있 으면 오늘 바로 끊어서 행복의 씨앗을 심으십시오.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은 수행자의 기본이고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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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장

일념의 완성(선정바라밀)

 

이제부터 선(禪)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에 관한 이야기는 깊이를 요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선의 개념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고, 닦는 방법 을 정확히 알고, 다른 명상과 어떻게 다른지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에 관한 오해와 편견은 수행에 혼란을 초래합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 고 수행하면 고집만 강해져서 결코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선만이 절대적이라는 생각도 옳지 않습니다. 선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 나는 번뇌를 가라앉혀 일념이 되게 하지만 선을 했다고 보시가 되는 것 은 아닙니다. 선을 했다고 계를 등한시해서도 안 됩니다. 선은 근본적으 로 우리 마음에서 시작한 업을 끊어주는 수행입니다. 이 점에서 불교의 선이 다른 데서 말하는 명상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근래에 많은 명상이 불교의 이름을 달고 있거나 불교 안으로 들어와서 부처님 당시에 해놓 은 말씀들을 오히려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경전과 조사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하나 짚어 드리고자 합니다. 선을 해 나가는 방법과 선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 그리고 선을 하면서 어떤 부작 용이 일어날 수 있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 부작용이 없는 것은 없습니다. 절대적인 방법이란 없기 때문 입니다. 예컨대 항생제가 처음 생겼을 때는 많은 이익을 얻고 만병통치약 처럼 생각했지만 그것을 오남용하면서 부작용이 많아졌습니다. 의약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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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뿐만 아니라 축산업이나 어업에 투입되는 항생제의 양이 늘어나면서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건강보험공단 심사평가위원회 에서 항생제의 남용을 통제하고 환경부에서도 강물에 흘러나가는 항생 제의 양을 감시하면서 오남용을 규제하고 있습니다. 항생제가 좋은 약이 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약이 아니듯이 선도 좋은 수행이기는 하지만 절대 시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히 선의 용도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일어 나는 번뇌는 ‘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어떻게 하면 이익일까 손해 일까, 오락가락 하는 생각을 한 곳에 집중시켜서 끊어내는 수행이 선입 니다. 그렇게 하려면 번뇌에 대해서, 아집에 대해서, 선을 하는 방법에 대 해서 좀 더 세밀하게 아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알 필요도 없이 무조건 화두만 들라고 하는 것은 무모한 이야기입니다. 방법론은 가르치지 않 고 그냥 들고 있으라고 하면 시작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우선 지적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명상이라는 용어가 선을 통칭하는 말 로 자주 사용되고 있고 불교에서도 이 용어를 따라 쓰면서 혼란을 초래 하고 있습니다. 서양에는 불교적 의미에서의 선이라는 것이 본래 없었고 그들이 쓰던 meditation을 근세의 일본 학자들이 명상(冥想)이라고 옮긴 것입니다. 그러나 ‘meditation’이든 ‘명상’이든 조용히 생각하다, 숙고 하다, 고찰하다, 깊은 생각에 잠기다, 이런 뜻으로서 비슷하기는 하지만 개념상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불교의 선(禪)은 범어 ‘지아나(dhyāna)’ 를 ‘선나’라고 음역한 말이고 뜻으로 번역하자면 정려(靜慮)가 됩니다. 범어에 삼마지(samādhi)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것을 정(定), 삼매(三昧)라 고 번역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색계 4선에 무색계 4정을 합해 4선 8정이라 하고 이것을 ‘선정’이라고 통칭합니다. 이런 불교 용어들을 그대로 써주면 용어가 가 진 개념적 특성들이 잘 전달될 텐데 세상에서 쓴다고 불교에서도 계속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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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라고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선’과 ‘정’은 경전 속 에 있는 용어이고 ‘명상’은 경이나 논에 없는 용어입니다. 영어권에서는 적당한 말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meditation을 쓰더라도 불교 안에서 는 모든 스승들이 사용한 말을 통해 가르침의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선’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쓰는 것이 좋겠다는 제프리 홉킨스 교수님 등 번역하는 분들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과거 유적을 살펴보면 인도에는 불교 이전에도 명상의 전통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더스 문명의 하라파, 모헨조다로에서 기원전 2~3,000년경의 유적들을 발굴하다가 그 안에서 제사장 상이 나왔는데 앉아서 명상하는 자세였습니다. 이것으로 5천 년 이전부터 명상이 있었 다고 추정은 하지만 어떤 명상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인도 같은 데 는 워낙 더워서 남부 쪽은 사람 살기가 무척 힘든 곳입니다. 그래서 사암 층을 뚫어 만든 석굴 사원이 많은데 영상 45도 이상 올라가도 굴 안에 들어가면 덜 덥습니다. 그쪽 분들도 더우니까 동굴 속에서 수행을 했을 것입니다. 더울 때는 나가 다니기 괴롭고 그렇다고 계속 누워서 잘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게다가 인도는 더울 때도 나가기 어렵지만 우기에도 비 가 너무 많이 와서 바깥 활동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조용한 곳에 앉아 있 는 생활방식이 오래전부터 있어 왔고 조용히 앉아 있다 보니까 저절로 사유하는 문화가 발달된 것 같습니다.

 

고대 인도에 사유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가라 앉히는 쪽이었습니다. 대체로 분노나 욕심 등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부처님 당시의 수행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시기 전에 외도에게 선을 배워 가장 높은 선정이라는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 處定)’에 들어갔습니다. ‘내가 죽었나, 살았나.’ 이 생각만 왔다 갔다 할 뿐 다른 생각이 없어질 정도로 가라앉은 것입니다. 비상비비상처정에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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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을 때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 정도라는 말입니 다. 부처님께서 그렇게 6년 정도 하셨는데 하루에 쌀 한 톨 먹고 물 조금 마시고 갈비뼈가 다 드러나도록 고행하신 모습이 경전에 자세하게 묘사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라앉히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 서 스승께 물었습니다. “몸을 혹사하고 고행을 해서 가라앉혔더니 내가 정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스승은 그것이 자기가 인도 전역을 다니면서 증득한 최고의 경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부처 님께서 고행에서 나와서 몸이 서서히 회복되자 번뇌가 다시 일어났습니 다. 스승에게 가서 번뇌가 도로 일어난다고 하니까 그 이상은 자기도 모 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출가를 해서 수행하는 목적이 고통을 없애기 위한 것인데 고통이 그대로 다시 일어나자 부처님께서 이 방법은 아니라고 생 각해서 고행과 외도의 삼매를 다 버렸습니다. 외도에게서 얻었던 비상비 비상처정의 가라앉힘은 궁극의 경계가 아니고 번뇌를 없애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때 고행을 버리면서 전정각산에 가셔서 조그만 굴에 계셨습니다. 유미죽을 잡수시고 한 달 정도 지나 몸이 회복되자 보 리수 아래 결가부좌를 하고 앉으셨습니다. 결가부좌 한 것은, 번뇌가 다 하는 길을 발견하지 못할 경우에는 결가부좌를 풀지 않고 그냥 이대로 가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 일주일 정도 앉아계 시다가 거기서 번뇌가 떨어진 상태가 온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 최초로 생 사의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발견하신 때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 께서 가르쳐주신 선입니다.

 

지금 유행하는 명상은 대부분 인도의 힌두교나 중국의 도교에서 발달 한 것들입니다. 마하리쉬, 크리슈나무르티, 라즈니쉬 같은 사람들이 전부 힌두교 전통을 이은 부류입니다. 한국의 승가에서도 마하리쉬 부류의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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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따르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유아론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불교의 선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라즈니쉬의 『반야심경』을 한국 사람들이 많이 읽고 있지만 정확히 공성에 관한 이야기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도 유아 론자여서 불교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불교는 선을 통해 공성을 완벽하게 체험하여 번뇌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스스로 확인하게 합니다.

 

그런가하면 중국의 도교에서 하는 명상은 이론적 바탕부터 문제가 있 습니다. 그들이 하는 기(氣) 운행은 소주천과 대주천의 단전을 여는 것으 로부터 시작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혼돈입니다. 혼돈은 생각이 일어 나지 않게 해서 분별이 없는 상태, 다시 말해서 물과 불을 구분 못하는 상태를 만드는 것입니다. 장자의 호접몽 같은 경우, 꿈에서 나비를 봤는 데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모르겠노라 하는 식입니다. 그들이 도 교의 철학에 근거해서 혼돈을 지향하는 것은 신선이 되는 데 목적이 있 습니다. 그러므로 번뇌가 가라앉지만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태초에 무극 이고 혼돈이기 때문에 정신이 또렷하게 깨어있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고 혼돈의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혼미, 혼침, 침잠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번뇌의 소멸을 추구하지만, 번뇌가 사라진 그 정신 은 살아 있어야 됩니다. 번뇌가 사라진 정신마저도 깨져버리면 사람이 아 니라 목석입니다. 중국에 불교가 들어가서 도교의 전통과 섞이면서 혼란 이 생긴 것입니다. 두 문화가 만나서 발전된 부분도 많지만 선에 관해서 는 오히려 발전했다고 보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유럽, 미국 쪽 사람들은 명상이라는 것을 원래 접해본 적이 없었습니 다. 르네상스 이후에 조금씩 책으로 전달되어 겨우 접해보기는 했지만, 실제로 거기에 어떤 정신적 수련, 불교의 선 같은 것이 있는지는 모릅니 다. 그네들은 중세까지 신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근세에 과학이 발달하면서 선을 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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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되었지만, 번뇌 끊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명상을 하면 뇌 의 알파파가 어떻고 감마파가 어떻고 내분비가 어떻고 주로 이런 이야기 를 합니다. 그들은 ‘그 어려운 수행을 꼭 해야 하나? 약을 하나 개발해 서 깨달은 효과를 내면 안 될까?’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에게는 달나라에 갔다 온 기술이 있습니다. 과학의 발달이 우주를 바라보는 시 야를 넓혀준 것은 좋은 일입니다만, 그러나 명상에 관한 문제를 과학으 로만 접근할 때 놓치는 것이 많습니다. 그들은 선을 번뇌 끊는 것으로 생 각하지 않고 물질과 현상의 관점으로 접근합니다.

 

한 10년 가까이 된 일인데 세계에서 명상을 가지고 임상연구를 한 사 람들이 천 명 넘게 모여서 “명상은 과학이다.” 그렇게 선언했지만, 불교 는 2,600년 전에 벌써 명상이 해탈의 길인 줄 알았습니다. 그 연구자들 덕 분에 2,600년이 지난 오늘날 명상이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버스 지나간 뒤에 손 흔드는 격이지만 한국에서 선을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서양 사람들의 이러한 연구에 관심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프 로그램을 보면 번뇌 끊는 내용이 아닙니다. 문제는, 번뇌 끊는 것이 아니 면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환자가 병이 났는데 진통제를 좀 주 면 우선 통증이 안 오니까 괜찮겠지만 병이 나은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 지로 요즘의 명상이 잠시 가라앉히는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아’가 사라지지 않으면 번뇌가 해결이 안 됩니다.

 

불교의 신행은 경을 보던지, 염불 하던지, 칠지공양을 하던지, 참선을 하던지, 근원적으로 번뇌를 끊기 위한 것입니다. 번뇌란 ‘아’를 뿌리로 해서 일어난 탐진치를 말합니다. 명상을 해서 탐욕이 끊어졌느냐 하면, 아무리 가라앉아도 ‘아’가 끊어지지 않으면 다시 올라옵니다. 겨울 추위 에 풀이 다 말라버려도 봄 되면 다시 올라오는 것과 같습니다. 번뇌를 다 끊으면 여섯 가지 신통이 생깁니다. 부처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던 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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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원래 불을 섬기는 외도였는데, 부처님을 만나서 누진통을 얻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번뇌가 다해서 얻는 신통이 누진통인데 가섭은 그때까지 얻 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얻었다고 대답하자 가섭은 그 자리에 서 일어나 번뇌 끊는 방법을 알려 달라면서 바로 제자가 되었습니다.

 

선의 핵심은 탐진치 번뇌를 끊는 데 있습니다. 탐진치를 없애기 위해 선 을 하는 것입니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은 생각은 ‘나’에 집착해서 일 어납니다. 고통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이 세 가지를 삼독이라 하고 이것 을 끊으려면 무아를 체득하라고 가르칩니다. 마음속까지 전부 살펴서 번 뇌를 끊게 만드는 방법이 불교의 선입니다. 외도 선을 해서는 번뇌가 안 끊어집니다. 그래서 외도라고 합니다. 선을 통해 마음이 실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정확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달마 스님이 혜가 스님에게 이 야기하지 않았습니까? 혜가 스님이 “제 마음이 몹시 불안합니다.” 그러 니까 “불안한 그 마음을 가져와라.” 하셨습니다. 혜가 스님이 물러가서 저녁내 찾다가 그다음 날까지 찾았습니다. 마음이 불안한데 불안한 마 음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달마 스님께 가니까 “찾았느냐?” 물으 셨습니다. “찾아도 없습니다.” 하니까 “내가 너를 이미 안심시켰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없는 것을 가지고 왜 찾고 있느냐, 네가 일으켜서 그런 것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공성을 보면 불안한 마음도 없어진다는 사 실을 이 이야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화두를 들건, 호흡을 관하건, 염불을 하건, 또는 나로6법의 일점관을 하건, 선을 하는 목적은 다 똑같습니다. 방법론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도 있고 뒤에 발전시킨 것도 있지만 그 목적지는 똑같이 번뇌를 끊는 데 있습니다. 오락가락하는 생각이 다 사라지는 것이지, 가라앉는다고 해서 지혜마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육조 스님이 이야기를 잘해놨는 데 부처님 말씀과 똑같습니다. “선이란 뭐냐? 마음 속에 더러움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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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없는 것이다.” 마음속에 번뇌, 즉 더러움이 일어나지 않아서 조용하게 깨어있는 생각을 선이라고 합니다. 선을 다른 말로 하면 번뇌 없는 것입 니다. 아무 생각 없는 것이 아니라 번뇌 자체가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지 금 우리는 생각이 계속 일어나는 이것을 가지고 나라고 의지하고 살아갑 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 저거 좋은데? 저거 가져야지.” 구하려는 내 가 있고, 구하려는 물건이 있고, 돈을 가지고 구하는 것을 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사라지고 나면 물건도 허망하고 나라고 생각했던 것도 욕심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걸 알아차리고 욕심부리지 않고 실상을 그대로 보고 사는 것을 선이라고 합니다.

 

지금 서양에서 받아들인 명상에는 힌두교 명상도 있고, 남방불교 쪽의 사마타, 비파사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마타와 비파사나도 왜곡되어 전 달된 것이 많습니다. 왜냐면 서양 사람들은 계율도 안 지키고 교리도 잘 모른 채 무조건 다리만 꼬고 앉아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남방 선 센터에 가보면 비구계 받기 전에 7세, 8세부터 경을 배우고 계를 수지(受 持)합니다. 받아 지닌다는 말은 확실하게 알고 실행한다는 뜻입니다. 스 무 살 넘어서 비구계를 받고 그때부터 사마타, 비파사나에 들어갑니다. 경전을 배우지 않으면 정견이 일어나기 어렵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몸 에 밴 나쁜 습관을 고치기 어렵습니다. 경전과 계율을 익히기도 전에 조 급하게 다리 틀고 앉아 있는 것으로는 배움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서 양 사람이든, 한국 사람이든 남방에 가서 배우려면 경전과 계율을 철저 하게 하고 나서 사마타와 비파사나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 리나라 선방을 보면 화두선 하는 사람이 적은 편 입니다. 스무 명, 서른 명 앉아 있어도 화두선 하는 사람이 서너 명밖에 안 됩니다. 그냥 앉아 있는 사람도 있고, 비파사나 한다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기 수련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화두선을 하려면 들어가는 길을 스승이 분명히 제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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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합니다. 그러나 방법도 알려주지 않고 그냥 화두 하나 들어 봐라, 이 렇게만 합니다. 교학도 제대로 안 가르쳐서 그 안의 내용들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선원들도 그런 위기를 맞이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선이 있지만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선만이 번뇌를 끊을 수 있 습니다. 지금도 인도사람들은 부처님을 무상요기스트라고 합니다. 무상 (無上)은 ‘그 이상 없다’, 최고라는 뜻이고 요기스트는 요가를 하는 분, 수행자라는 뜻입니다. 한국에서는 요가라 하면 꼰 다리 또 꼬고 튼 발 또 틀고 하는 모습을 생각하는데, 그건 그냥 운동하는 것이고 요가는 수 행입니다. 최고의 요기스트라고 한 것은 번뇌를 완벽하게 깬 분이 부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선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이익이 있습니다. 한국에는 남방의 선으로는 깨닫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방 선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수행방법이기 때문에 번뇌가 끊어지고 아라한과를 이룹니다. 번뇌장까 지는 다 끊어집니다. 그러니까 남방의 선을 하고 싶은 사람은 20년이고 30년이고 정확하게 따라서 공부해야 합니다. 가서 얼마간 앉았다가 오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서 눈 감고 앉아있으니까 눈에 뭐 가 보인다고 합니다. 눈 감고 10분만 앉아있으면 누구도 이것저것 다 보 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선은 번뇌를 없애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탐진치의 고 통이 사라져서 마음이 청정해진 상태로서, 일념이 되었다고도 하고 깨어 있는 상태 즉 부처의 성품이라고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선 을 알고 해야지 아무 데나 선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선을 해보십시오. 하다보면 중간에 병이 나을 수도 있고 더 편 안해지기도 할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과학적으로 이야기하는 여러 가 지 일들이 일어날 수 있지만 그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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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잘못해서 생기는 병도 있습니다. 선을 한다면 무엇보다도 목적을 정 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깨침이란 탐진치를 없애서 나의 본 정신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선을 수행해나갈 것인가의 관점에서 앉는 방 법, 스승을 선택하는 방법, 소의처(所依處)를 정하는 방법 등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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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장

선(禪)을 하는 자세

 

선을 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거나 몸의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있습 니다. 이런 것들은 선을 하는 과정에서 올 수 있는 부수적인 효과에 지나 지 않습니다. 선을 하는 목적은 진짜 큰 병인 탐진치 삼독을 벗어나는 데 있습니다. 삼독은 ‘나’가 있다는 고집이 씨앗이 되기 때문에 마음속의 탐 진치를 없애려면 ‘무아(無我)’를 체험해야 합니다. 집중을 통해 ‘나’가 본래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선의 요점은 집중하는 데 있 으므로 집중에 도움이 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몸의 자세와 호흡은 물 론 마음 자세도 중요합니다. 선은 마음속 번뇌가 떨어지게 만드는 방식 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행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자세를 취할 때 가장 집중도가 높아지는지가 선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대로부터 하 나의 과제였습니다.

 

선은 인더스 문명 뿐만 아니라 황허 문명이나 이집트 쪽에도 있었던 것 으로 보이는데 그중에 인도가 가장 발달했던 것 같습니다. 선의 최고 대 가인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곳이니까요. 인도의 북부는 산악지역이라서 덜 더운데 남부는 영상 45도, 어떤 때는 50도까지 올라갈 정도로 굉장히 덥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흙벽을 아주 두텁게 해놓고 집 속에서 잘 움직 이지 않고 지냅니다. 몸에서 열이 나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열량이 많 은 음식을 피하고 술도 잘 안 마십니다. 화를 많이 내는 것도 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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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게 먹고 가만히 앉아 쉬는 것이 더위를 이기는 방법인데 반듯하게 앉 아있는 자세가 발달한 것은 병이 덜 나는 방식이라 그렇습니다. 그렇다 고 병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비스듬히 앉아 있거나 오래 누워있으 면 몸이 엉망이 됩니다. 몸에 덜 해로운 자세를 취하다보니 반듯하게 앉 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조용히 앉아 생각하는 습관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 다. 선의 기원에 대해서는 이런 자연환경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보 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앉는 방법을 중심으로 선의 자세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사흘 꼼짝도 안하고 누워있으라고 하면 못 누워있습니다. 당장은 편할 것 같 지만 오래 눕는 것은 몸에도 정신에도 좋은 자세가 아닙니다. 선을 할 때 는 보통 가부좌를 하는데 좀 오래 앉아있어도 가장 문제가 덜 생기는 방 식이라 이 자세를 취합니다. 몸에 무리가 덜 갈 뿐만 아니라, 몸을 바로 함으로써 말도 줄어들고 일념으로 집중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좌선 방식에 관해서 천태 지의 스님은 조신(調身), 조식(調息), 조심(調心) 세 가지로 설명하셨습니다. 조(調)는 고르다는 말로, 몸과 호흡과 마음을 반듯하게 고른다는 뜻입니다.

 

몸을 어떻게 해야 선을 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가에 대해서는 수많 은 선지식들이 좌선을 권하셨습니다. 물론 서서도 할 수 있고 걸어가면서 하는 행선도 있습니다. 옛날 중국의 굉침 선사는 누워서도 했습니다. 집 중만 되면 행선도 와선도 할 수 있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문제가 생깁니 다. 걸으면서 하면 보이는 게 많고 들리는 게 많아서 마음이 산란해지기 쉽습니다. 누워서 하면 잠이 오기 쉽습니다. 눕거나 걷는 자세로는 혼침 과 산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앉는 자세를 권하셨습니 다. 앉는 것도 바르게 앉아야 합니다. 유교에서 하는 ‘정좌(靜坐)’는 사 람의 하체를 허약하게 만듭니다. 두 무릎이 포개지도록 앉는 자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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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오래 앉아 있으면 하체에 피가 안 통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불교의 좌선 자세는 혼침도 막아주고 산 란도 막아주는 방식으로 이 자세를 ‘비로자나 7자세’라고 합니다. 비로 자나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그 법신(法身)입니다. 즉 법에 들어가는 자세, 집중에 의해서 번뇌가 끊어지는 상태를 만드는 일곱 가지 자세인데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비로자나 7자세를 하려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이 좌복입니다. 될 수 있 으면 무명 솜이 들어있는 좌복이 좋습니다. 너무 얇으면 푹 가라앉고 너 무 두툼하면 공중에 떠있게 되니 적절한 두께로 만들어야 합니다. 나일 론 같은 합성섬유는 땀이 잘 흡수되지 않으므로 겉은 무명으로 씌워야 좋습니다. 앞쪽은 두 다리를 포개고 뒤쪽은 앉기 때문에 엉덩이 쪽이 좀 낮습니다. 엉덩이에 살이 많은 분들 말고는 앉아있으면 자꾸 뒤로 넘어 가려고 해서 앞 쪽에 힘이 자꾸 들어갑니다. 나중에는 배가 아프고 오래 앉으면 어딘가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좌복을 길게 만들어서 한 번 접 어서 받쳐주던지, 받침 방석을 조그맣게 만들어서 엉덩이에 받쳐주면 반 듯하게 앉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앉는 데는 좌복이 꼭 필요합니다. 티베트 스님들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신발을 많이 떨어뜨리는 것은 별로 칭 찬받을 일이 못되네. 좌복을 많이 떨어뜨리는 수행자만이 칭찬받을 만하 네.” 앉아서 수행을 많이 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신발 만큼 좌복도 많이 떨어뜨리셨습니까?

 

좌복 위에 가부좌하고 앉는 것은 일단 몸이 부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폼을 잡는 것입니다. 양반다리를 괴거나 무릎을 꿇는 것은 좌선 자세가 아닙니다. 일본 사람들이 무릎 꿇고 앉습니다. 우리나라도 무릎 꿇는 자세를 가르치는 곳이 있다는데 좌선에는 원래 그런 자세가 없습니 다. 물론 허리가 아파서 치료를 하기 위해 그런다면 몰라도 불상이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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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봤을 때 무릎 꿇고 좌선하는 경우는 어디에서도 못 봤습니다.

 

앉을 때 다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결가부좌와 반가부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결가부좌는 부처님께서 ‘깨닫지 못하면 내가 이 자리에서 다리를 풀지 않고 죽으리라’ 결심했을 때 취한 자세입니다. 오른쪽 발을 왼쪽 허벅지에 올리고 왼쪽 발을 오른쪽 허벅지에 올려두는 자세인데 우 리가 일상적으로 이렇게 오래하면 하체가 약해져서 그렇게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가부좌를 주로 합니다. 반가부좌는 오른쪽 발을 될 수 있으면 안쪽으로 최대한 붙여주고 그 다음에 왼쪽 발을 살짝 위로 얹어주면 됩니다. 오래 하다보면 자세가 잡혀서 양쪽 무릎이 좌복에 닿게 됩니다. 다리에 살이 많거나 근육이 너무 많으면 다리가 잘 안 접히고 잘 풀립니다. 좌선을 하려면 어느 정도 접어지는 것이 좋지만 잘 안 접어 지면 조금 느슨하게 앉아도 되고 다리가 아플 때는 바꿀 수도 있습니다. 이 자세를 왜 하냐면, 오래 앉아있어도 가장 병이 덜 나는 자세이기 때문 입니다. 연세 드셔서 오래 앉아있으면 척추나 골반 쪽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좌선이 끝난 후에는 스트레칭을 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스님들은 선방에서 공부할 때 45분, 50분 앉고 10분, 15분 빠른 걸음으로 포행을 합니다. 포행은 하체의 피를 순환시키고 등뼈와 골반의 균형을 잡아 줍 니다. 여러분도 좌선할 때 그렇게 스트레칭을 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부좌로 앉을 때 어떤 이익이 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 분도 단전(丹田)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배꼽 세 치 정도 안 쪽, 뒤 명문에서 직선거리로 1/3 지점에 하단전이 있습니다. 여기에 기가 모입니다. 기가 가슴에 모이면 울화증이 되고 머리에 모이면 두통이 생기 는데, 하단전은 대장과 소장이 있는 뒤쪽이기 때문에 기가 모이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누워있으면 기가 흩어져버리고, 서 있으면 다리 쪽 에 피가 쏠려 무리가 갑니다. 반가부좌는 하단전에 기를 모아 상기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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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막아주고 머리를 맑게 하며, 가슴이 답답하지 않게 해줍니다. 이 자 세에 익숙해지면 집중에 도움이 됩니다. 요즘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많습 니다. 생각을 많이 굴려야 사는 세상이라서 그렇습니다. 생각을 많이 굴 리다 보면 머리에 기운이 올라서 두통이 옵니다. 머리를 많이 굴린다고 일이 다 잘 풀리는 게 아니니 속상한 일도 많고 긴장도 잘합니다. 그러다 보니 절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염불이나 참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먼저 하단전에 태양을 관해서 기운을 내려주게 합니다. 기운이 좀 내려지면 염불을 하거나 화두 를 하거나 호흡에 집중할 수 있게 합니다. 옛날에는 머리를 많이 굴리고 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머리 아픈 일이 없었지만 울화병이나 두통이 많은 현대에는 이런 증상부터 가라앉힐 필요가 있기 때문에 저는 이 부분을 강조하면서 가르칩니다.

 

이상에서 설명한 자세가 비로자나 7자세의 첫 번째로, 가부좌 자세입 니다. 반가부좌와 결가부좌로 나눕니다. 하단전의 기운을 낮추고 혼침과 도거를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는 자세입니다. 혼침(昏沈)은 수면이나 가수면 상태이고 도거(掉擧)는 뜬 상태입니다. 혼침 상태에서는 정신이 명료하지 못하고 도거 상태에서는 안정이 되지 않습니다. 둘 다 양극단 이라 집중을 방해합니다. 자세만으로 혼침과 산란이 다 해결되지는 않지 만 이 자세가 화두집중을 하거나 일념집중을 하거나 일점집중을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다른 방식으로 했을 때는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에 이 자 세를 권하는 것입니다. 수영이나 양궁 등 운동종목도 자세가 중요하고 자세에 따라 기록이 달라지듯이 몸의 자세가 정신을 담아내는 데 상당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비로자나 자세는 척량골, 척추를 반듯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비로자나 법신의 자세는 정신을 깨어있게 만드는 것인데 척추가 반듯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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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서야 가능합니다. 척추측만증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척추가 휘어지면 몸도 불편하지만, 정신적으로도 힘들어집니다. 일상생활을 하 든 수행을 하든 허리를 반듯하게 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반듯하게 하라 니까 힘줘서 펴는 사람도 있는데 너무 바짝 세우면 나중에 근육이 땅겨 서 무리가 갑니다. 허리를 반듯하게 하라는 것은 콧등과 배꼽이 일직선 이 되게 하고 이쪽저쪽으로 돌리거나 기울지 않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 두 귀가 양쪽 어깨와 직선이 되게 합니다. 그렇게 허리, 척량골, 척 추를 반듯하게 T자 모양으로 세워줍니다. 가부좌를 통해 밑을 잡아 주 고 허리를 직선으로 세우면 전체적으로 T자와 같은 모양이 나옵니다. 이 렇게 자세를 잡을 때 몸이 가장 편안한 가운데 졸리지도 않고 산란심도 적게 일어나고 오래 앉아 집중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손의 자세, 선정인(禪定印)입니다. 손바닥을 한 번 싹싹 비벼 보십시오. 따뜻해질 때까지 비벼서 공을 잡듯이 둥글게 만들어보십시오. 힘을 크게 주지 말고 당겨보면 손안에 무슨 느낌이 드십니까? 당길 때는 거미줄이 있어서 당기는 느낌을 받을 것이고 누를 때는 뭔가 안에 있어 서 빵빵하게 되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을 장력이라고 하는데 손 에서 생긴 기(氣)입니다. 소화가 안 될 때 배에 손을 얹고 오른쪽으로 비 벼주면 장이 자극을 받아 움직입니다. 손자가 배 아프다고 하면 할머니 가 이런 식으로 만져주는데, 손에 일종의 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좌선 할 때는 손을 하단전 위에 얹어주는데 왼손을 아래에 두고 오른손을 위 에 둡니다. 사람마다 몸에 차이가 있어서 다리와 배꼽 사이에 수건 한 장 을 얹어놓으면 더 편할 수 있습니다. 손이 들려있으면 안 되고 편안하게 위에 얹혀 있어야 합니다. 손날이 하단전에 걸리게 하고 오른손가락을 둥글게 잡아주면 이 안에서 장력이 형성됩니다. 이렇게 잡아줌으로써 기 운이 위로 솟구쳐 오르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했는데도 상기가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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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과 집중을 잘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앉아 있으면 민감하신 분들은 하단전이 조금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는데 그것이 선과 직접 연결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신기하다고 뭔가 된 것처 럼 이야기하는데 불교에서는 그것을 이용할 뿐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가 라앉혀서 집중하는데 도움이 되는 손 모양, 선정인입니다.

 

네 번째는 눈을 반개(半開)하는 자세입니다. 눈을 크게 뜨면 많이 보여 서 두리번거리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눈을 뜨고 정진하라고 부처님 가르 침 밖엔 없습니다. 특별한 경우, 칼라차크라 분노존 수행을 할 때는 눈을 위로 뜨라고 했지만 일반 선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눈을 감으면 잠이 오기 때문에 눈을 감지 않습니다. 지금 선을 하는 사람들이 어디에 서 배워왔는지 자꾸 눈을 감고 선을 합니다. 눈을 감고 하면 눈동자에서 여러 가지 이상한 것이 일어납니다. 뭐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불빛 같기도 하고 그림자 같기도 합니다. 눈을 감고 뭐가 보인다 하면 전부 착각입니 다. 문을 닫아놨는데 바깥에 누가 왔다 갔다 한다면 그 사람의 착각입니 다. 눈을 감고 하면 졸리기도 하고 자꾸 뭐가 보이기 때문에 눈을 반쯤 뜨고 하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감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뜨는 것도 아니 고 반쯤 뜨라는데 이 상태에서 집중하는 곳이 소의처(所依處)입니다. 화 두면 화두, 거기에 마음을 집중하면 눈은 그냥 반쯤 뜨고 있을 뿐이지 실 제 무엇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다섯 번째는 입의 자세입니다. 입은 다물되 어금니를 꼭 깨물면 힘들어 서 안 됩니다. 자연스럽게 다물되 혀끝을 앞니 안쪽 위, 잇몸과 이 사이 에 둡니다. 평소에 여러분이 말을 많이 안하고 여기에 혀를 대고만 있어 도 많이 가라앉습니다. 좌선할 때 혀를 대는 위치는 기가 내리 타는 경로 입니다. 자연스럽게 기운이 내려올 수 있는 경로를 주면 상기가 되지 않 기 때문에 혀를 위에 두고 말을 하지 않아야 집중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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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럴 때 침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삼키면 됩니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는 턱과 어깨의 자세입니다. 턱은 앞으로 살짝 당겨주고 어깨는 힘을 빼줍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좌선의 기 본자세입니다. 가부좌를 하고, 선정인을 하고, 척량골을 바로 세우고, 눈 을 반개하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 턱을 당기고, 어깨에 힘을 빼는 자세로 앉습니다. 그리고 척추를 세울 때는 머리 한 가운데 백회혈을 뒤의 척추 와 직선이 된다고 생각하십시오. 이 자세는 정신이 깨어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줍니다. 여러분이 선을 하거나 염불을 할 때는 항상 좌복 위에 이 비로자나 7자세로 앉으려고 노력하십시오. 다른 데 어디 가서도 이 자세 로 반듯하게 조용히 앉아주시면 됩니다. 부처님께서 이 자세에 대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자세로 삼매에 들었을 때는 옆에 맹수가 오더라도 피해서 간답니다. 부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적이 많습니다. 코브라가 옆 에 왔다가 피해 갔다든지 사자 같은 맹수들도 옆에 접근을 못했답니다. 공격하려고 하면 그의 정신적 파장이 크게 나갑니다. 두려워하면 동물들 이 나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세로 집중하고 있으면 동물도 사람도 그를 무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언제든지 앉아 계 실 때 이 자세를 취하셨습니다.

 

좌선의 세 가지 자세인 조신(調身), 조식(調息), 조심(調心) 중 이번에는 호흡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호흡은 절대 조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식관을 잘못 알아듣고 호흡을 5초 내쉬고, 5초 들이쉬 고, 이렇게 조절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호흡은 뇌의 자율신경에서 명령하 는 것입니다. 자율이란 본능적으로 되어있다는 뜻이라서 의식적으로 조 절하면 자율신경에 혼란이 생기고 나중에 큰 병에 걸립니다. 호흡을 소 의처로 삼는 경우도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는 것이지 조절하는 것이 아 닙니다. 도교나 바라문교에서 호흡조절을 많이 하는데 심하게 해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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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몇 번밖에 안 쉬면 뇌가 손상됩니다. 그것을 수행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부처님께서는 올바른 수행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천태지관에서도 호흡을 조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호흡이 거칠어도 염불하거나 화두 들고 소의처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조금 지나 저절로 편안해집니다. 불교에서는 호흡을 자연 상태에 맡기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몸의 생리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드린 것이 좌선의 기본자세입니다. 이렇게 가르쳐드리면 무 릎 관절염이 있고 허리가 아프고 늙어서 가부좌가 안 된다고 합니다. 이 자세가 안 되는데 꼭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앉아 있다가 다리가 아프 면 오른쪽과 왼쪽을 바꾸시면 되고 가부좌가 안 되면 의자에 앉으셔도 됩니다. 등받이에 기대면 편해서 잠이 오니까 허리를 떼고 앉아서 무릎을 바로 세우고 손을 앞에 두면 됩니다. 의자에 앉아서도 못하는 분이 있다 면 누워서 하시면 됩니다. 어쩔 수 없지만 안 하는 것 보다는 백번 낫습니 다. 또 어떤 이는 일이 바빠서 못한다고 하는데 그럴 때는 움직이면서 구 칭염불이라도 하십시오. 못할 상황이 되더라도 조금이라도 하는 쪽으로 적응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방법을 두 번, 세 번 보고 익혀서 좌선에 익숙해지십시오. 초보자들 은 행선(行禪)이나 와선(臥禪)은 잘 안 되니 앉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 해야 조금 익숙해지고 그래야만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오늘 배운 대로 연습을 계속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랫동안 선을 해서 깨달음을 이룬 분은 앉아서 돌아가시기도 합니다. 보조국사는 그대로 앉아서 좌탈입망 (坐脫立亡)하셨습니다. 집중이 잘 되어 정신적으로 두려움이 없는 것은 평소에 좌선하는 힘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생 누워서 살았는데 누워서도 발버둥을 치면서 죽고 평생 바삐 돌아다녔는데 서서 죽지도 못 합니다. 오늘 드린 말씀이 좌선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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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장

선(禪)에 필요한 주변 조건

 

오늘은 선을 해나가는 데 필요한 자량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 하는 사람은 갖추어야 할 주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 잘 안 갖추어지 면 공부하기 힘들고 장애가 일어납니다. 운동선수들도 시합에 앞서 코치 가 준비를 철저히 시킵니다. 운동에 적합한 환경을 조성하고 선수마다 취 약한 부분을 트레이닝을 통해 보완합니다. 탐진치를 벗어나 성불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선을 하는 데 필 요한 주변 조건, 그 중에서도 장소와 스승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세속적인 삶의 조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중요 한 것은 부모의 인연입니다. 좋은 부모를 못 만나면 어릴 때 어떻게 스스 로 생명을 보전하겠습니까? 설사 좋은 부모 밑에서 자랐다 하더라도 모 두 다 성숙한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정신적 성장에 있어서는 스승을 잘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스승을 아무리 잘 만나도 나라가 잘못되면 수 행하기 어렵습니다. 옛날 고구려는 권력투쟁이 벌어져서 보덕화상이 제 자를 데리고 백제로 넘어와야 했습니다. 6.25 때도 북쪽에 있던 스님들이 부산 선암사까지 피난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국가가 잘못되면 공부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도반을 잘 만나야 합니다. 잘못된 도반을 만나면 내가 바로 수행으로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수행하기에 좋 은 인연들을 만났는지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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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하는데 주변 조건들이 좋지 않으면 자꾸 장애가 일어나기 때문에 조건을 잘 갖춰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조건 중에서 우선 장소가 중요합 니다. 부처님도 승가를 이끌면서 장소를 신중히 정하셨습니다. 사위성이 나 왕사성 같은 성 안에는 절을 안 지었습니다. 지금 라즈기르, 옛날 왕 사성에 가보면 빔비사라 왕이 쌓았던 성곽이 지금도 남아있고 바로 밑에 온천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곽 바깥쪽으로 옆에 죽림정사가 있습니다. 기 원정사도 사위성에서 5리 정도 바깥에 있습니다. 이 거리는 사위성까지 걸어가서 탁발하고 다시 걸어와서 공양을 잡수시는 왕복 4km 정도로 하 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걸식을 하기에 너무 멀지 않 으면서도 도시의 번잡을 피할 수 있는 곳에 수행처를 마련하셨습니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은 송광사에 내려와서 살았습니다. 당시는 고려 불 교가 타락해서 도인이 없고 의례로서 가지고 살아가는 시대였습니다. 보 조국사가 크게 분발하여 수선결사를 한 것도 그런 시대배경이 있었기 때 문입니다. 수행처를 송광사로 정한 것은 개성과 멀어지기 위해서였습니 다. 왕도에 살다가는 권력에 붙기 쉽고 결국 타락하기 때문입니다. 송광 사는 당시 기준으로 보면 개성으로부터 아주 먼 곳입니다. 도성에서 사 람을 한 달간 보내서 겨우 찾을 정도로 먼 곳에서 결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때 송광사는 밥 얻어먹기도 힘든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시골이니 옛날 엔 더 벽지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수행에 방해받지 않도록 주변 조건을 잘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에는 큰 선방들이 있어서 수행하기 에 적합한 장소를 갖춘 곳이 많습니다. 선원의 대중 방에서는 20명, 50명 같이 하지만 토굴에서는 혼자서 하게 됩니다.

 

대중 처소이든 토굴이든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첫 번째 조건은 주 변에 스승이 있는 것입니다. 스승이 있는 사람, 스승이 없는 사람, 스승 이 가까이 있는 사람, 스승이 멀리 있는 사람, 각자의 조건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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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곳에 같이 살면서 스승이 본보기가 되어주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스 승이 직접 가르치고 배려하고 경책해주어야 더 분발해서 정진할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스승이 멀리 있으면 사진이라도 모셔 놓고 스승을 생 각하고 가르침을 생각하면 됩니다. 스승은 그만큼 수행자에게 힘이 되는 존재입니다. 티베트 스님들께서 동상이 걸리면서도 6,000고지, 5,000고지 를 넘어 인도의 다람살라로 오는 이유가 지금 티베트 안에는 스승으로 부터 지도받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중국 정부가 스승들을 내쫓고 죽이고 감옥에 가둬버렸기 때문에 다른 조건은 열악해도 스승이 계시는 곳을 찾 아 다람살라까지 먼 길을 오는 것입니다.

 

티베트에서 다람살라로 넘어오신 어르신이 한 분 계시는데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결사를 하고 절을 한번 시작할 때 십만 배씩, 380만 배를 하셨는데 돌아가실 때 혼미에 안 빠지신 것을 보면 공부가 그만큼 깊었나 봅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사탕만 좀 빨아서 넘기셨는데 며 칠 전에 사탕을 갖다 드리자 이것이 마지막이니까 갖고 오지 말라고 하 셨답니다. 당신이 오늘내일 사이에 간다는 것을 알고 가셨으니 사마타를 한 공덕이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나타납니다. 사마타가 깊어지면 뚝담에 들기도 하고 중생을 건지겠다는 원을 가지고 다음 생에 공부하기 좋은 곳에 스스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그런 분을 보디사트바(bodhisattva)라 고 합니다. 공부하기 좋은 곳이란 스승이 계신 곳이고 좋은 스승을 만나 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복입니다. 옛날의 선사들은 대부분 입실제자라고 해서 스승이 있는 선방에서 깨침을 이룰 때까지 공부했습 니다. 매일 방에 들어가 묻고 답하고 거량을 했던 모습들이 어록에 전해 집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안 계신 세상에서 법을 전해줄 스승이 가장 큰 인연입니다. 우리는 후세의 중생이 되어서 글이나 말을 통해 볼 수밖 에 없지만 법을 이어온 많은 스승들이 계십니다. 은사다, 법사다, 형식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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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인연이 지어지는 것 말고 법이 분명히 있는 이라야 스승입니다. 법 이 있지 않은데 같이 사는 것은 한 공간에 있으면서 서로를 어둡게 할 뿐 입니다. 그래서 선을 할 때는 토굴에 있더라도 자기를 지도하고 점검해 줄 스승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주변에 도반이 있는 것이 좋습니다. 좋은 도반이란 경을 잘 알고 계율을 잘 지키고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입니다. 세속에서도 좋은 친 구가 있으면 살아가는 데 힘이 되듯이 공부하는 사람에게 도반이 가까 이에 있으면 공부에 힘을 받습니다. 만나서 밥 한 끼 먹는 친구가 아니라 서로 경책하고 서로 돕는 사람이라면 나이와 상관없이 도반이 됩니다. 『삼국유사』에 ‘노힐부득(努肹夫得)’과 ‘달달박박(怛怛朴朴)’이라는 도 반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사람은 출가하여 한 스승 밑에서 열심히 공부 하다가 누구든 먼저 도에 들면 도반을 도와 같이 성불하자고 언약을 했 습니다. 백월산 동쪽과 북쪽에 각각 자리 잡고 수행하다가 관음보살의 현신으로 노힐이 먼저 도를 이루고 달달을 인도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보듯이 도반이 반 공부를 해줍니다. 우리도 공부하면서 살아보면 ‘아, 저 사람 보니까 나도 공부 좀 해야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게 으른 사람이 가까이에 있으면 ‘아, 저 사람도 노는데 나도 하루 정도 놀 고 하면 안 될까?’ 그런 생각이 들기 쉽습니다.

 

세 번째는 선 수행을 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안 먹고 수 행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음식을 구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합 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매일 걸식을 했기 때문에 왕사성에서 너무 멀지 않 은 곳에 수행처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토굴이 많습니다. 지리산에 있 는 토굴은 옛날에 밑에서 쌀을 한 가마 짊어지고 가려면 여러 사람의 노 고가 필요했습니다. 60리, 70리 산길을 계속 올라가야 하는데 한 사람이 두어 말밖에 못 집니다. 그러자니 본인이 먹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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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를 끼치게 됩니다. 쌀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서 생활용품 조달하느라 공부하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높은 곳에 있는 선방이 나 토굴이나 기도처에서 공부하는 사람은 거기에 많은 사람들의 고생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정진을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 시에 가까우면서도 산중처럼 조용한 곳이 가장 적절합니다. 한 2~3km 떨어져서 음식과 생필품을 힘들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곳이라야 정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무조건 산속 깊이 들어간다고 정진이 되는 것이 아닙 니다. 선방이나 토굴을 선택할 때 이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다른 수행은 시내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보시, 인욕, 지계, 근수정진 등 의 수행은 사람들이 있는 시내에서 해야 실제로 되는 일이고 경을 배우 는 것도 강원이나 학원이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산중에 들어가서 혼자 살면 보시나 인욕을 해야 될 이유도 없기 때문에 시내에 살아야 하지만 오로지 선, 사마타 수행만은 고요한 곳이 필요합니다. 정처(靜處)에서 정 려(靜慮)를 닦아 번뇌를 정리하는 수행이기 때문에 산중을 선택하는 것 입니다. 사마타 수행만은 철저하게 부처님 말씀처럼 설산수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러 토굴에 들어가는 사람에게는 주변의 도움 이 필요합니다. 제자들이나 신도들이 옷이든 먹을 것이든, 풍족하게 할 필요는 없지만 수행하다 잘못되지 않을 만큼은 도와줘야 합니다. 너무 멀리 떨어져서 물건을 조달하기가 힘든데 신도나 제자들이 그 상황을 모 르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돌아가실 수도 있고 크게 병이 날 수도 있으니 잘 살펴서 도움을 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다음에 고려할 것은 그 수행터가 큰 스승들이 성취한 곳인가 하는 점입니다. 옛 스승들께서 성취한 흔적이 공부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런 곳이 더 좋습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부다가야에 가보면 우리 마음속 에 부처님 성불이 먼저 떠오르고 나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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듭니다. 그래서 태국, 스리랑카, 한국, 일본, 미얀마 등지에서 수많은 불 자들이 그곳을 찾아옵니다. 유럽 사람들도 와서 좌선을 합니다. 다리가 길쭉해서 가부좌를 틀고 반듯하게 앉으면 수염은 예수님처럼 나고 모양 은 도인처럼 그럴싸합니다. ‘저 양반들도 과거에 인연이 있어서 부처님께 서 깨달으신 성지에 와서 저렇게 앉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발심하지 않았던 사람도 부다가야에 와서 주변에 조그마한 암 자를 하나 짓고 정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오래된 절들도 대부분 옛날에 성취한 분들이 살았던 곳입니다. 거기에서 정진해서 힘을 얻고자 그 주변에 절을 지은 것입니다. 지금은 대부분 관광지가 되어버렸 지만 이를테면 낙산사 홍련암은 관세음보살이 홍련 위에 직접 나투신 곳 이고, 상원사는 문수동자가 세조에게 몸을 보여주신 곳이며, 부석사는 의상 스님이 공부를 성취하고 돌아와서 화엄의 가르침을 크게 알린 곳입 니다. 그런 곳에서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 래서 그 주변에 수행자들이 모여서 환희심을 내고 크게 발심을 하는 것 입니다.

 

히말라야의 수미산 같은 경우도 많은 수행자들이 수행을 하다가 돌아 가신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사람들이 수미산을 돌면서 발원하 는 것 아니겠습니까? 남쪽으로 내려가서 아잔타, 엘로라 쪽은 많은 스승 들이 살고 가셨고 그 밑에는 용수, 무착, 세친 등 대승의 스승들이 태어 나서 공부를 하셨던 곳입니다. 그쪽이 폐사가 되다시피 했는데도 거기 가 서 그 분들을 떠올리면서 우리도 스승들을 따라서 정진하며 살겠다는 마 음을 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큰 성취자들이 머물던 주변에서 살려고 하는 이유가 그분들을 연상하면서 스스로 깊이 있게 수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 다. 달라이 라마께서도 부다가야를 참으로 성스러운 곳이라고 하셨습니 다. 많은 성취자들이 계셨고 앞으로 오랜 생 뒤에 미래에 오시는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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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도 붓다가야에서 성불하시리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성취자들을 떠올리 며 발심해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위험을 피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곡성 태안사는 고 려 말에 혜철국사께서 살던 곳입니다. 혜철국사가 중국에 가서 서당 지장 스님에게 인가받고 귀국해서 결사를 하려고 들어간 곳이 태안사입니다. 그곳에 절을 개창하려고 하는데 거기는 도둑이 많아서 혜철국사가 두 번 이나 몽땅 털렸습니다. 그 밑에 큰 제자 한 분이 상방 여선사이고 둘째 제자가 우리가 잘 아는 도선국사입니다. 상방 여선사가 주지를 할 때는 좀도둑이 아니고 떼거리로 와서 다 갖고 가버렸다고 합니다. 그런 환경 에서는 대중이 살기가 힘듭니다. 그와 같이 도적이나 강도가 들끓는다던 지 민심이 흉흉하고 전쟁의 위험이 있으면 선을 하기 어렵습니다. 교화하 러 들어가는 것은 몰라도, 내 정진이 완성되지 않았을 때는 선을 하기 위 해 그런 곳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위험한 곳을 피해서 무엇에도 방해 받지 않을 곳을 선택해야 합니다.

 

내가 다람살라에서 무문관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집안에서 안 나오고 두세 달 있는데 어느 날 밤에 쾅쾅 소리가 나서 전쟁이 난 줄 알았습니 다. 무슨 총소리가 이렇게 크게 나나 했더니 설날에 폭죽을 터뜨리는 소 리였습니다. 선을 하고 앉아서 집중할 때는 빛도 장애가 되지만 소리도 장애가 됩니다. 빛이 너무 밝으면 집중이 안 되고 너무 어두우면 착각이 일어납니다. 빛 다음으로 장애가 되는 것이 소리입니다. 한번은 네충 스 님이 토굴 하라고 주신 곳에서 지냈습니다. 달라이 라마 왕궁 밑 꼬라길 에 위치한 네충 스님의 토굴에서 무문관을 했더니 두 가지 때문에 잘 안 되었습니다. 까마귀가 한 번 날아오면 수백 마리가 나무 위에 잔뜩 앉아 서 까악- 까악- 합니다. 인도 까마귀는 우리나라 까마귀보다 높은 톤으 로 우는데 여러 시간을 떠들고 갑니다. 까마귀들이 가고 나면 티베트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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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 할아버지들이 토굴 바로 옆 의자에 앉아서 몇 시간을 떠들다 갑니 다. 소리가 계속 들려오니 정신이 분산되고 집중이 잘 안됐습니다. 옛날 큰 스님들께서는 동굴에서 수행하셨습니다. 히말라야에는 밀라레빠, 파 드마삼바바 같은 분들이 수행을 했던 동굴이 있습니다. 저도 동굴에 들 어가 한 보름 해보니까 참 좋았습니다. 빛도 조절이 잘 되고 소리도 안 들립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려면 소리로 인해 산만해지는 곳은 선택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다음으로 주의해야 할 곳은 병이 많이 도는 곳이나 짐승이 많은 곳 입니다. 물이 깨끗하지 않으면 전염병이 돌기 쉽습니다. 산에 살아도 어 떤 물은 먹기가 힘듭니다. 우물을 파서 먹는데 그 안에 우라늄이 섞여있 어서 방사능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독버섯이 많은 곳에서 나는 물도 마 시면 좋지 않습니다. 동물이 많이 사는 산도 위험합니다. 시라소니, 맷돼 지, 곰이 많은 곳에 살면 집안에 뭘 놔두지 못합니다. 워낙 힘이 세서 문 짝을 뜯고 들어와서 먹고 가기도 합니다. 곰한테 대들 수도 없고 쫓아내 지도 못하니까 짐승이 많은 곳에서는 공부하기 어렵습니다. 다람살라에 서 무문관을 할 때 다리에 힘이 빠져 토굴 주변을 걷다가 원숭이 가족을 만났습니다. 한 30마리쯤 되는데 대장 원숭이는 나보다 컸습니다. 내가 지나가면 대장 원숭이는 절대 눈을 바로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바로 보 면 동물은 싸우자는 뜻이니까요. 저도 그걸 아니까 옆으로 보고 지나갔 습니다. 원숭이에게는 바나나를 던져주지도 못합니다. 해친다고 놀랄까 싶어서 바나나를 보여주고 그 자리에 놔두고 가면 녀석이 이튿날 내려올 때 내 손에 바나나가 들려있는가 확인합니다. 원숭이와 이 정도의 소통 은 가능하지만, 그들도 굉장히 힘이 셉니다. 팔 힘이 사람의 10배 이상 된다고 하니 부딪치면 사람이 크게 다칩니다. 그래서 위험한 동물이 많 은 곳도 장소를 선택하는데 주의해야 할 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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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하나는 마을과 너무 가까워서 마을의 대소사나 시시비비에 휩 쓸리는 상황을 피해야 합니다. 요즘에는 코로나 때문에 마을에 오라는 소리를 잘 안하지만 시골 마을이라도 전에는 반상회나 노인당에 나오라 고 했습니다. 마을 일에 일일이 참여하다 보면 공부하기 힘들어집니다. 선을 하기 위해서는 방해받지 않을 조건들이 필요하다고 하면 세속사람 들은 “우리는 그럼 사마타 수행은 못하겠네.”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야기한 조건 중에 반 이상 갖추어진 장소가 사실은 지금의 아파트입니다. 주부들의 경우 식구들이 출근하고 학교 가고 나면 혼자 적막강산을 누릴 수 있습니다. 좌복을 갖추어 놓고 정진하다가 주 변 공원까지 산책할 수 있으면 힘들게 토굴을 마련하는 것보다 오히려 낫다고 생각합니다. 집에 꼭 자그마한 선방이나 기도방을 마련하십시오.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산중에 가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 활하면서 수행하기에는 아파트 같은 곳도 참 괜찮습니다. 요즘은 자녀 들이 다 커서 바깥에 나가고 집에 거의 없으니까 집이 가장 공부하기 좋 은 환경입니다.

 

선을 하는데 장애가 일어나지 않도록 주변 조건을 갖추는 것도 그 사 람의 지혜입니다. 조건을 갖추지 않고 그냥 토굴에 들어가서 수행하면 금방 될 것 같아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집단으로 수행할 수 있게 조건을 만들어 놓은 곳이 한국의 선원입니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세계적으로 이만한 시스템이 없습니다. 봉암사 선원, 해인사 선원처럼 큰 절에 선원을 둬서 20명, 30명이 선을 할 수 있는 데는 드뭅니다. 대중이 같이 수행하면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겠지만 내가 볼 때는 장점이 상당 히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지도자가 계시면 좋고 조금만 보완하면 집 단선방 시스템으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잘 갖추어졌다고 할 만 합니다. 집도 잘 지어졌고 위치도 좋아서 물자 조달에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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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 돈다든지 도둑이 드는 일도 없습니다. 거기에 좋은 스승이 계신다 면 가장 좋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조건을 잘 갖춘다면 사마타 수행에 충분한 조건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집도 좋은 조건입니다. 그런 줄 알고서 나머지 부족 한 것을 갖추려고 노력한다면 공부를 성취하는 데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조건이 안 갖추어져서 못하겠다고는 하지 마십시오. 극복하려 고 애를 쓸 문제이지 조건 때문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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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장

마음 집중의 대상, 소의처

 

오늘은 소의처(所依處)에 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화두, 염불, 호흡, 관 상 등의 소의처에 마음을 어떻게 집중시킬 것인가, 불교수행의 핵심입니 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종교와 철학에서 마음에 관해 탐구하고 각각의 설을 내놓았습니다. 힌두교, 도교, 유교는 마음에 관한 이론이 비 교적 단순하고 내용도 빈약합니다. 서양에서는 근대에 들어 심리학, 정신 분석학, 뇌과학 등의 분야에서 마음에 관해 상당히 발전된 이론들을 발 표했습니다. 프로이드, 융 같은 사람들이 무의식을 탐구하여 어느 정도 까지는 마음에 관해 알아낸 부분이 있지만 불교가 2,600년 동안 발전시 킨 심리학에 비하면 깊이도 얕고 해석하는 방법도 차이가 있습니다. 마 음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불교만큼 정확하게 관찰하고 사유한 종교가 없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불교는 마음의 구조와 작동원리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또한 그 원리를 활용해서 마음을 다스리고 안정시키는 방법 론을 깊이 있게 제시합니다. 현대의 어떤 과학이나 철학도 마음에 관하 여 불교만큼 정교한 이론을 제시한 예가 없습니다.

 

마음의 특성에 대해 살펴보고 그 마음 안에서 일어난 번뇌를 없애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어떤 번뇌든 일어났다하면 마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행동과 말을 조심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마음 깊 은 곳까지 관찰하지 않으면 번뇌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계를 지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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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할 때는 몸을 구속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을 하지 않 게 우리 몸에 계율의 갑옷을 입히고 수갑을 채워 범죄를 막는 것과 같습 니다. 이 몸은 형체가 있어서 집을 만들어놓고 문을 잠가버리면 못 나갑 니다. 그렇게 해놓으면 어느 정도 제동이 걸립니다.

 

행동에 비해 말은 제동이 잘 안 걸립니다. “구시화문(口是禍門)”, 입이 화의 근본이 되기도 합니다. 입을 살펴보면 말을 통제하기 위해서 자물 통을 여러 개 채워놓았습니다. 입술로 채워놓고 이로 채워놓고 혓바닥으 로 채워놓고 안쪽에 목젖의 떨림판으로 채워놓았습니다. 하지만 화가 나 면 말이 그냥 튀어나옵니다. 자기가 나쁜 말을 하는지 좋은 말을 하는지 구분이 안 되는 채로 아무 말이나 쏟아놓습니다. 말에 제동을 거는 방법 이 묵언입니다. 내가 묵언을 석 달 정도 해보니까 입이 가벼워서 좋았습 니다. 입안이 아주 말끔해지는 느낌입니다. 스스로 자물통을 채우고 말 을 줄이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데 집중하는 것입니다. 절에 살면서는 매 년 한두 달 정도는 묵언수행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세속에 있는 사람에게도 가끔 묵언을 하라고 권합니다. 성질이 나서 말 안 하는 것은 묵언이 아닙니다. 말을 안 해도 머리가 돌아가고 감정이 움직이니까 수 행이 되지 않습니다. 성질 안 부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입을 딱 다물어 야 합니다.

 

말과 행동에 비해 마음을 제어하기는 훨씬 어렵습니다. 마음은 형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공간도 시간도 방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여기 앉아서 지구 바깥을 생각할 수도 있고 먼 과거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은 빛보다도 빠릅니다. 빛은 초속 30만km로 지구 일곱 바퀴 반을 돌고 그 렇게 백억 광년을 달려가서 우주 끝에 가지만 마음은 우주 끝까지 가는 데 0.1초도 안 걸립니다. 이렇게 형체가 없고 시공을 초월해 있는 것이 마 음의 특징입니다. 대상도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마음은 머물러있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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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자기 욕망을 좇아서 일어나는데 형체가 없으니까 잡을 방법이 없습 니다. 몸은 잠시 가둘 수 있고 말은 잠시 멈출 수 있지만 생각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욕망에 따라 바깥 대상에 상응해서 끊임없이 일어나 는 마음은 매우 빠르고 복잡합니다. 생각이 일어나서 의지가 되고 반복 되어 집착하는 것을 법집이라고 하는데 그 고집과 집착과 편견은 변화시 키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마음은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고 형체도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이미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마음이 콩밭에 있다고 하는 속담이 마음의 그러한 특성을 잘 나타냅니다. 마음의 대상은 감각이든 의식이든 정해져 있지 않 습니다. 보는 것만 해도 하나의 색이 아닙니다. 안·이·비·설·신·의 여섯 가지 감관으로 색·성·향·미·촉·법 여섯 가지 경계를 대하여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이 일어납니다. 빛을 보고서 보는 마음이 일어나고, 소리를 듣고서 듣는 마음이 일어나고, 냄새를 맡고서 냄새 맡는 마음이 일어나고, 맛을 보고서 맛을 보는 마음이 일어나고, 피 부에 닿고서 촉감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 마음은 정해진 바 없이 대상 에 따라 그때그때 달리 일어납니다. 또한 감각기관의 예민한 정도에 따 라서, 자신이 지어온 업에 따라서 저마다 달리 일어납니다. 이렇게 마음 이라는 것은 종류가 정해져 있지 않아서 부처님께서는 중생심(衆生心)을 “약간종종심(若干種種心)”이라고 하셨습니다. ‘약간’이란 많고 적음이 정해지지 않은 수를 뜻합니다. 마음은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에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늘 보 고 듣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누가 이 마음을 일으키는 것일까요? 지금 물을 마신다면 물을 마시는 나, 주어가 있습니다. 왜 마시느냐? 내가 목 이 말라서 물을 마십니다. 항상 ‘내가’라는 주어가 따라다니는데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나[我]’의 착각입니다. 일상의 정신작용은 전부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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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일어난 마음들입니다. 우리는 색깔을 보고서 안식(眼識)을 일으켜 붉은색을 보고 붉은색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물체가 원래 붉은 색을 갖고 있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붉은 빛을 반사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붉은 빛을 보고서 내가 붉다는 생각을 일으킨 것도 가 상 속에서 일어난 하나의 마음일 뿐입니다. 무언가를 생각할 때 내 GPS 가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마음을 일으키는데 그것을 ‘아상(我相)’이 라고 합니다. ‘나’라는 마음이 일어나면 그 다음에는 무슨 마음이 일어 나겠습니까? 나한테 좋은가, 안 좋은가, 이 생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다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내 몸이고, 내 집이고, 내가 괴롭고, 내가 맛있고, 내가 싫고, 저녁이 되면 남의 집이 아닌 내 집 에 들어가고 들어가서는 보기 싫은 아내나 남편을 마주합니다. 그런데 보기 싫은 것이 원래 배우자에게 있습니까? 나에게 있습니까?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나를 중심으로 좋다, 싫다 가리는 마음을 ‘분별심’이라고 합니 다. 이 분별은 ‘말나식(末那識, manas)’의 작용인데 ‘말나’라는 말은 마 음을 뜻하고, ‘의(意)’라고 번역합니다. 우리가 오래 반복했던 경험들이 씨앗의 형태로 잠복되어 있는 곳을 ‘아뢰야식’, 즉 장식(藏識)이라고 하 는데 말나식은 이 아뢰야식을 나라고 집착해서 아집의 근본이 된 것입니 다. 또한 말나식은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 등의 번뇌와 항상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거듭 반복해서 우리를 ‘나’ 중심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나’의 GPS에 의해서 착각된 마음은, 우리가 만나는 대상이 실제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나한테 좋냐, 안 좋 냐, 끊임없이 따지게 합니다. 그중에 나한테 이익 되는 것, 내 욕심에 맞 는 것을 좋다고 보고 살아갑니다. 좋은 것과 싫은 것 외에 이도저도 아닌 것이 있습니다. 좋은 것에 자꾸 욕심을 내고 싫은 것을 자꾸 피하려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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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지만 이도저도 아닌 것은 아무리 많이 지나가 도 기억에 없습니다. 제일 기억이 잘 나는 것은 싫은 것입니다. 마음은 좋 은 것, 나쁜 것, 이도저도 아닌 것, 이렇게 세 가지로 기억을 저장하는 특 성을 갖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계속 오락가락 두 가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번뇌라고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좋은 것과 싫은 것을 구분해내는 한, 끝없이 번뇌가 일어납니다. 자기 욕심에 좋은 것은 계속 반복하려 하고, 싫은 것은 방어기전을 만들어서 피하려 하고, 이도저도 아닌 것은 어찌 되든 관심이 없습니다.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어도 나하고 무 슨 상관이냐, 나는 거기에 투자한 것도 없으니 잃을 것이 없다고 안도합 니다. 보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미얀마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할까, 우 리나라도 쿠데타가 두 번이나 일어났었는데 저 사람들도 참 힘들겠다, 이 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미얀마가 남의 일이 라서 그저 그런가보다, 후진국이네, 그러고 말아버립니다. ‘나’ 중심의 사고에 남이 들어올 자리는 없습니다. 자기한테 좋은 것은 계속 애착하 고 싫은 것은 계속 미워하면서 타인은 관심 밖으로 밀어냅니다. 이렇게 애착과 혐오와 무관심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이 번뇌이고, 그 결과 고 (苦)가 따릅니다. 그렇게 안 되게 하려면 마음에서부터 수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계를 잘 지켜서 행동을 조심하고 입을 단속해도 안에서 부글부 글하면 해결이 안 됩니다. 착한 일을 합시다, 그래놓고도 마음이 안 착하 니까 자꾸 안 착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모든 것이 마음으로부터 시작하 고 업의 시스템 자체가 마음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 서 마음속을 깨끗하게 해야 선행을 할 수 있는데 마음속을 정리하는 방 법이 선 수행입니다.

 

선 수행을 어떻게 하느냐? 예를 들어 쥐를 잡으려면 쥐의 특성을 잘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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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합니다. 쥐나 다람쥐 등 쥐과의 첫 번째 특성은 잘 잊어버리는 것입 니다. 고양이한테 쫓겨 구멍으로 들어가도 10분만 되면 다 잊어버리고 다시 나옵니다. 고양이는 쥐의 그런 특성을 이용해 10분 동안 굴 앞에서 기다립니다. 아무 소리도 안 내고 발톱 세우고 기다렸다가 기회를 놓치 지 않고 쥐를 잡습니다.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우리도 마음의 특성을 잘 알면 그에 따라 처방전을 갖고서 수행하면 됩니다. 고양이가 집중하는 대상을 선에서는 ‘소의처(所依處)’라고 하는데 마음을 집중시킬 대상을 하나 잡아주는 것입니다. 그런 대상이 없다면 이 마음은 끝없이 파장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대상에 집중이 되면 오락가락하는 파장이 다 사라 집니다.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한테 와서 “부처가 뭡니까?” 하니까 “끽다 거(喫茶去)”, 차 한 잔 마시라고 대답했습니다. 파장이 안 일어나는 상태, 오락가락하는 마음이 다 사라진 상태를 묻는다면, 차 마실 때는 차 마시 는 것 외에는 없지 않습니까? 『금강경』의 “불취어상 여여부동(不取於相 如如不動)”은 사마타로 집중이 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시계추가 있어서 똑딱똑딱 왔다 갔다 하다가 시계추가 서면 왔다 갔다 하는 움직 임이 사라집니다. 시계추가 서면 이제 시계추가 필요 없어집니다. 그와 같 이 우리들 마음속에 오락가락하는 생각이 없게끔 만드는 것을 집중이라 하고 이 집중된 상태를 사마타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수없이 헤매고 다닙니다. 그 한 곳을 소의처라고 하는데 만약에 돈을 소의처로 삼으면 돈을 찾아다닐 것이고 집을 소의처로 삼으면 매일 아파트 투기하러 다닐 것입니다. 불교 는 고통을 없애는 쪽으로 소의처를 제시합니다. 마음을 의지할 곳을 주 고 거기에 집중하게 해서 오락가락하는 생각들을 끊게 하는데 선입니다. 선은 부처님 당시부터 있었던 아주 오래된 수행방법입니다. 2,600년 전 에 마음을 깊이 관찰하고 연구해서 찾아낸 방식입니다. 그런데 근대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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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사람들이 마음을 발견했다고 하고 명상기법을 개발했다고 합니다. 그 것은 마치 영국 사람들이 에베레스트에 최초로 올라갔다고 하는 것과 같 습니다. 네팔의 셰르파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에베레스트 8,000고지를 뒷동산처럼 오르내렸습니다. 영국 사람이 최초로 올랐다고 한다면 셰르 파족은 사람이 아닌가요? 엉터리 같은 소리입니다. 불교만큼 마음의 원 리를 알아내고 방법을 제시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브라흐만교에서는 윤 회하던 아트만이 업이 다하면 나중에 브라흐만천에 올라가서 불변의 브 라흐만과 합일한다고 주장하지만, 마음에 관해 불교만큼 자세하게 분석 하지 않았습니다. 유교는 하늘에서 받은 인간의 성품이 선하다고 전제하 고 본성에 따라 선하게 살 것을 주장하지만 마음이라는 것이 어떤 작용 을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도교는 인간과 세계를 허무로 보았습니다. 마 음까지도 없다고 주장한다면 순간순간 일어나는 이 마음은 어떻게 설명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마음의 특성을 알고 그 작동원리에 맞게 수행 방법을 만 드셨기 때문에 원리에 안 맞으면 수행한 것이 다 틀리게 됩니다. 그 방법 이 집중입니다. 마음은 한 가지에 집중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지금의 뇌 과학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은 매일 여러 가지 이슈를 만나 고 여러 가지 대상에 대응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인식이 일어나지만 동 시에 여러 가지 대상에 집중할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여러분도 집에서 엿을 만들다가도 친정어머니가 쓰러졌다는 말을 들으면 신발도 못 신고 쫓아갈 것입니다. 우리 뇌는 한 가지를 해결하기 위해 한 가지에 집중합 니다. 두 가지가 한꺼번에 잘 안 됩니다. 순간순간 한 가지에 집중하는 마 음의 특성이 사마타의 원리입니다. 집중이 되면 ‘나’를 가지고 오락가락 하는 생각이 사라지기 때문에 집중이 바로 해결책이 됩니다. 소의처에 집 중하는 동안에는 나한테 좋다 싫다 하는 생각이 약해지고 나중에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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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집중이 깊어지면 내가 지금껏 여기저기 옮겨 다니 면서 했던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본래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 음마저도 공성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마타에 의해서 부동의 상 태가 되면 최종적으로 오온이 공함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가 일으킨 이 런저런 마음들이 모두 안개처럼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불안한 마음이 일어났다면 그 마음을 찾아보십시오. 혜가 스님이 달마 스님께 가서 찾지 못했다고 한 그 마음을 한 번 찾아보십시오. 자성이 없 다는 것을 순간에 확인하면 도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일체법에 자성이 없음을 알지 못하고 평생 좋고 싫은 생각을 일 으키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을 분별심이라고 하는데 번뇌에 오염된 더러 운 마음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판단하던 분별심을 떠나면 마음의 밝은 본바탕이 드러납니다. 분별을 떠나 더 이상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되면 그것을 청정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3대 조사 승찬(僧璨) 스님은 『신심명 (信心銘)』에서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 하셨습니 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선과 악, 너와 나, 좋고 나쁨을 분별하는 마음만 없으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마타에 의해 공성을 보는 도는 어 렵지 않습니다. 마음의 빈자리를 보고 나면 그 다음에 일어나는 것이 반 야(般若)입니다. 사마타 다음에 비파사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어떤 소의처를 가질 것인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의 처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부처님께서는 깨닫고 나서 멀 리서 찾지 않고 호흡을 소의처로 삼아 관찰하셨습니다. 호흡이 끝나면 죽는 거니까 호흡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것이고 살아있는 한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집중시켜 관찰하기에 호흡이 좋은 소의처가 됩 니다. 염불도 좋은 소의처가 되는데 여기에는 자력과 타력 두 가지 방식 이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도 타력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고 요즘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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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자력만을 강조하는 사람 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력과 타력은 둘이 아니므로 염불수행은 자력과 타력이 같이 가야 합니다. 티베트에는 나로6법이라는 수행법 중에 일점 (一點), 한 점에다 마음을 집중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승불교에 는 관상(觀想), 상을 떠올려서 집중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따라서 탱화가 굉장히 발달했는데 만다라나 탱화를 모시고서 부처님이나 보살의 모습 을 관상하면서 사마타를 닦아나가는 방식입니다. 그 다음에 중국에 와 서 발달한 화두도 집중하기에 좋은 소의처입니다. 이상 소개한 다양한 소의처 중에서 이것은 상승이고 저것은 하질이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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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장

염불 수행자의 소의처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킬 때 그곳을 소의처라고 합니다. 그 어떤 명상이나 선도 번뇌가 제거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합니다. 부처님께서 괴로움의 원인은 ‘나’를 고집하는 데 있고 거기서 탐진치 삼 독이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불교에는 여러 가지 가르침이 있지만 전부 괴로움과 괴로움을 없애는 것에 대한 규정입니다. 왜 괴로우냐 하면 ‘나’ 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괴로움을 없애느냐 하면 ‘나’를 없애면 됩니다.

 

『금강경』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보리심을 낸 보살이 어떻게 수행해 야 하느냐고 수보리가 묻자 부처님께서 무아의 가르침을 주십니다. 보살 이 모든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지만 실제로 멸도에 든 중생이 없다고한 것은 부처님 자신의 아상이 다함을 보여주신 겁니다. ‘나’라는 착각에서 깨어나 본자리를 확인한 것입니다. 꿈을 깨면 그것이 ‘각(覺)’입니다. 깨 침을 신비화하여 다른 이야기를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탐진치가 없어진 것을 말합니다. 탐 진치는 우리의 행동과 말과 생각에 습관으로 배어 있다가 꿈을 깨고 나 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습니다. 생각에 남아있지 않게 하려면 소의처에 의지해서 집중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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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념이 되어 번뇌가 사라지게 하는 수행을 옛 스님들께서 이미 일러주 셨습니다. 요즘도 마음수행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만, 정확하게 일러주 기 보다는 막연한 소리를 하거나 잠깐 가라앉히는 경계를 가지고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육조단경』 첫머리에 나오는 신수 스님과 혜능 스님의 게 송을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신수 스님이 지은 게송입니다.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 심여명경대(心如明鏡臺) 시시근불식(時時勤拂 拭) 물사야진애(勿使惹塵埃), 이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 울의 틀이라, 부지런히 닦고 닦으면 어디에 먼지가 끼겠는가?” 다음은 혜 능 스님의 게송입니다.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명경역비대(明鏡亦非 臺)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보리도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도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 거니 어디에 때가 끼겠는가?” 두 분의 입장이 분명하게 갈라집니다. 오조 홍인 스님은 깨어있는 분이기 때문에 두 게송을 보고서 법을 누구에게 전해줄지 판단하셨습니다. 신수 스님의 게송을 보고는 “견성하지 못했다. 문밖까지는 왔으나 문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했으니 이런 견해로는 무상 보리를 구하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부지런히 공부한 것으로 천상에 는 태어나겠으나 공성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깨침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일부는 두 분의 차이는 게송에 명료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마음을 집중시키는 방법 중에 오늘은 염불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경을 읽는 것도 염불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독 경을 제외하고 진언염불과 명호염불을 위주로 말씀드리고 ‘천수대비주’ 처럼 장구의 염불에 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장구는 진언염불에 포함되 지만 행법에 들어가면 조금 다르기 때문에 덧붙이고자 합니다. 염불 이 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방편에 우열이 있다는 편견을 갖지 말라는 당부 를 드립니다. 수행의 목적지는 한 곳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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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있듯이 비행기를 타고 가던, 기차를 타고 가던, 버스를 타건, 승용차 를 타건, 걸어서 가건, 도달하는 곳은 같습니다. 염불, 진언, 화두, 일점, 관상, 호흡이 다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일념으로 오락가락하는 생각을 제거시키는 방법이고 결국은 자성이 공한 자리에 들어가서 번뇌가 완전 히 사라지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조단경』에서 “법무고하(法無高下)”, 법에는 높고 낮 음이 없다 했고, 선을 하는 사람들이 금과옥조처럼 생각하는 육조 스님 말씀에도 “법무돈점(法無頓漸) 인유이둔(人有利鈍)”, 법에는 빠르고 더 딤이 없지만, 사람이 둔하고 영리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법이란 방법을 뜻합니다. 화두를 드는 것은 고차원적인 공부고, 경을 읽는 것은 중간쯤 되는 공부고, 이도저도 안 되는 사람은 염불이나 한다고 흔히 말 합니다. 염불에 ‘이나’가 붙으면 무슨 염불이 되겠습니까? 법에는 높고 낮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에는 하근기와 상근기가 있습니다. 하 근기가 화두부터 들면 성취하기 어렵고 상근기도 염불을 하면 바로 성취 합니다. 중국의 여산 동림사 혜원 스님 같은 분은 염불선으로 득도하셨 습니다.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방법에 대해 시비를 거는 사람이 문제입니 다.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틀린 견해로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화두를 해 야 깨닫는다고 한다면 역대로 용수보살과 무착보살과 가섭존자는 화두 없이 어떻게 깨달아서 조사가 되셨겠습니까? 화두는 중국에 와서 된 것 이고 육조 스님 때도 없었습니다. 『육조단경』 어디에 화두 이야기가 있 습니까? 화두는 송나라 대혜 종고 스님 때부터 구체화된 방법입니다.

 

법에 고하가 없다는 점, 다시 말해 소의처에 높고 낮음이 없다는 점을 명료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화두가 안 되니까 염불이나 하자는 식 으로 염불을 비하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에 따른 인과 를 받을 것입니다. 단지 화두를 가르치는 사람은 화두가 최고인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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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을 가르치는 사람은 염불이 최고인줄 알고 수행해야 한다는 점은 인 정합니다. 다만 화두가 최고인데 그건 하기 싫고 근기에 안 맞는 것 같아 서 염불이나 하겠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화두를 들어도 근기가 하열하 면 못 깨닫고 염불을 해도 근기가 상승이면 깨닫는 것이니 자신의 근기 를 알아야 합니다. 하열한 근기가 최상승 방편을 쓰면 부작용이 따릅니 다. 몸이 아주 부실한 사람이 병원에 가서 고단위 항생제를 맞으면 부작 용이 생길 수 있는 것처럼 인과법도 모르는 사람에게 화두를 가르치면 문제가 벌어집니다. 각각의 증상에 맞는 약이 있듯이 근기에 따라 맞는 방편이 있는 것입니다.

 

화두, 호흡, 염불 등의 소의처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남방에 전 승된 방법은 호흡법이고 대승불교권에서는 관상과 염불이 병행되었습니 다. 티베트에서는 진언염불법과 관상법을 수행합니다만, 종파에 따라 약 간의 차이는 있습니다. 중국에 와서는 다양한 방법들이 사용되었는데 천 태종이나 화엄종은 호흡법을 썼고 선종은 화두 드는 법을 썼습니다. 교 종의 흡법, 이런 저런 방법들이 전승되었지만 모두가 집중을 위한 방법 이니 저것은 안 되고 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아전인수 격으로 이야 기해서는 안 됩니다.

 

전에 어떤 분이 신을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하기에 내가 그랬습니다. “신을 믿는 종교가 들어온 지 200년 밖에 안 됐는데 한국 사람은 단군부 터 시작해서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도 다 지옥 갔겠네요. 그건 누구 책임 인가요?” 하나만 고집하면 그런 오류에 빠집니다. 화두선만 인정한다면 그 전에는 도인이 없었다는 논리가 되고 그렇다면 부처님도 깨달은 사람 이 아니게 됩니다. 그러므로 소의처에 집중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 제가 중요합니다. 화두선은 부처님 이후에 중국에서 나온 것이라도 그것 을 통해서 도인들이 많이 나왔으니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보조국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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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서 경절문(徑截門)에 관해 이야기 나오는 부 분을 보면 우리나라도 일찍부터 화두선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 러 가지 방법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리 전승되어졌을 뿐이지 집중을 목 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어떤 것이 높 고 어떤 것이 낮다는 부질없는 논쟁을 하지 않게 됩니다. 시시비비로 공 부할 기회를 놓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 주의를 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화두와 염불을 섞어서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집중하는 방법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 를테면 대비주를 송념할 땐 그것만 집중해서 해야 합니다. 그러나 화두 를 하면서 동시에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집중하는 곳이 두 개가 되기 때 문에 흩어져버립니다. 화두를 할 때는 화두에, 염불을 할 때는 염불에 모 든 역량을 집중해야 흩어지지 않습니다. 석천사의 노보살님이 염불을 부 지런히 하신다고 해 어떻게 하시는지 여쭸더니 “예, 천수경 읽고요, 능엄 주도 하고요, 광명진언도 하고요, 스님께서 말씀하신 관세음보살 삼천 번 하고요, 또 어디 가니까 돌아갈 때가 됐으니 아미타불 하라고 해서 아 미타불 삼천 번 하고요. 지옥가면 안 되니까 지장보살 삼천 번 합니다.” 하셨습니다. 어느 약이 맞을지 모르니까 이것저것 좋다는 대로 다 해보 는 것입니다. 옛날에 가톨릭 신부님이 시골에 부임했는데 할머니 한 분을 신도로 맞아들이고 앞으로 다른 신은 절대 믿지 않겠다고 함께 다짐을 했답니다. 어느 날 성황당에 돌을 던지면서 손을 싹싹 비비는 할머니를 보고 신부님이 화가 나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물으니까 “아이고, 어느 신이 도와줄지 모르니까요.” 하더랍니다. 미리 보험을 들어놓듯이 신앙 생활을 하는데요. 불교는 특히 통불교라는 이름 아래 온갖 것들이 뒤섞 여서있어 혼란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어쨌든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이 중 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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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의 종류는 타력과 자력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자신이 공성을 체험 하고 성불하려고 정진하는 것을 자력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근기가 부족 해서 이생에는 성취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보살의 힘에 의지 해서 극락에 가려는 원을 세우는데 이것을 타력이라고 합니다. 자력과 타력에 관한 논의는 보조국사의 『정혜결사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에 보조국사가 보제사(普濟寺)에서 열린 담선법회(談禪法會)에 갔다가 법회가 끝나고 도반 십여 명과 함께 정(定)과 혜(慧)를 닦는 결사를 맺자 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도반 하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말세 에 태어나서 부처님 가신지 오래 됐고 법이 약한데 공부한다고 뭐 되겠 습니까? 부지런히 염불해서 불보살의 가피를 받아 임종 시에 극락세계에 가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보조국사가 반론을 펼칩니다. 시절 은 변해가지만 심성은 변하지 않으니 시절 탓하고 근기 탓하면서 핑계 댈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고 안 하고는 지금 우리에게 달린 문제라는 것이죠.

 

타력염불은 우리 같은 하근기가 뭘 하겠냐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집중 으로 번뇌를 깨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극락에 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염 불을 하되 성불까지는 잘 안될 것 같고 다음 생에 극락세계에 가서 아미 타부처님께서 맞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미타부처님께서 좌우에 관세 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을 거느리고 염불행자를 맞아드리는 고려불화 를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불보살들이 나를 이끌어서 극 락에서 깨닫게 해달라고 염불합니다. 타력을 하는 사람은 믿음을 중시하 는데 근래에 잘못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미타부처님을 신앙해 야지 관세음보살님, 대세지 보살님, 지장보살님 등의 명호를 신앙하는 것 은 타력 신앙에 도움이 안 된다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 다. 그러나 금강승을 포함한 대승의 핵심에서는 10지 보살들을 다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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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으로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의 명호를 염불하는 것도 굉장히 중 요합니다.

 

자력염불은 불보살에 의해서 극락에 태어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가 공성 체험을 통해 깨달음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미타 부처 님의 명호를 염하건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염하건 하나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염불은 자력이라 해도 타력의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명 호를 부르든 관상을 하든 주력을 하든 불보살을 염두에 두는 것을 전제 로 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관상염불을 할 때 불보살님께서 빛으로 와 계신다고 관상을 하는 식으로 타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타력으로 염불하는 사람도 자기 힘으로 집중에 들어가기 때문에 자력의 요소가 아 주 없는 것이 아닙니다. 타력을 하더라도 자력적인 것이 있고 자력을 하 더라도 타력적인 것이 같이 있습니다. 염불에서 자력과 타력은 상호보완 적인 관계입니다.

 

중국의 여산 동림사 혜원 스님은 동진 때의 도인인데 염불선을 주창하 셨습니다. 저도 그곳에 몇 번 가봤습니다. 법당 가운데 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그 앞에 사람들이 호궤합장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 시간 염불을 하고 한 시간 부처님을 돌면서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합니다. 이어 한 시 간은 염불화두를 합니다. 법당 가장자리로 평상이 있는데 그 위에 좌복 을 깔고 앉아서 벽을 보고 참구합니다. “염불자 시심마(念佛者 是甚麼), 염불하는 이 놈이 어떤 놈인가?” 하고 깊이 궁구하는 것입니다. 염불주 력 한 시간, 참선 한 시간, 이렇게 정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동림사 혜원 스님이 주창하신 염불선인데 여기에 자력과 타력이 함께 있 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미타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지장보살님, 이런 분들은 자신의 이름에 가피를 두어 중생을 돕습니다. 누구든 내 이름을 부르면서 집중해서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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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다면 나도 당신들을 어떤 식으로든지 돕겠다고 원을 세우신 분들입 니다. 평소 염불할 때도 우리를 항상 보호하고 지켜주시며 임명종시에 중 음 상태일 때도 우리 앞에 나타나서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니 불보살 중 에 어떤 분을 부르더라도 하나의 명호에 집중해서 그분이 나를 이끌어 주시리라, 언제 어디서든 나를 보호해주시리라는 마음을 항상 깊숙이 지 녀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집에서 염불하고 기도할 때는 공양을 올리 는 것이 좋습니다. 여래들께서 이 자리에 와 계신다고 관상하기 때문에 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오라고 불러놓고 물 한 잔도 안 올린다면 안 되 겠죠.

 

끝으로 한 가지 권유해드릴 것이 있으니 집에 꼭 염불방을 하나 두어 서 불단도 갖추고 불상도 모셔 놓으십시오. 불상은 손주가 불국사 수학 여행 가서 사온 것 말고 작은 불상이라도 정식으로 점안하여 스승을 초 빙하여 모십시오. 탱화도 불모가 그린 것으로 마련하여 점안하고 모셔서 매일 공양 올리고 예경하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일곱 가지 공양에 대해 떠올리면서 실행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천수경』을 읽으십시오. 『천수경』 에는 관세음보살, 아미타불과 연관된 내용이 들어있고 발원과 참회가 나 옵니다. 진언을 할 때는 염주를 꼭 들고 하십시오. 진언을 외우든 명호를 외우든 집중하면 됩니다.

 

염불할 때는 비로자나7자세를 기본으로 하고 손에 염주를 들고서 관 세음보살, 명호를 일념으로 집중합니다. 꼭 소리 내서 명호를 부르십시 오. 영명 연수선사는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에서 “고성염불 십종공덕 (高聲念佛 十種功德)”, 소리 내서 염불하면 열 가지 공덕이 있다고 하셨 습니다. 졸음을 방지하고, 바깥 소리를 막아주고, 마음을 흩어지지 않게 하고, 용맹정진의 마음을 일으켜줍니다. 집중이 잘 되면 삼매가 현전하 고, 결국에는 정토에 왕생합니다. 정토자는 말이 번뇌가 다한 상태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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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입니다. 그 밖에도 염불소리에 천마(天魔)가 두려워하고, 그 소리가 온 누리에 퍼지고, 삼도의 중생이 고통을 쉬고, 여래들이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소리 내서 해보면 여러분이 직접 이러한 효과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력을 할 때는 관세음보살님께서 여기에 빛으로 와 계신다 생각하고 관세음보살님 앞에서 큰 서원을 세우고 하루에 만 번이든 2만 번이든 명 호를 부르면서 마음을 일념으로 만들어 나아가십시오. 가지고 계신 염주 를 들고 한 번 넘길 때마다 염불 한 마디를 하면서 집중해 가십시오. 자 기가 내는 소리를 자기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능엄경』에서 “반문문 성(返聞聞性)”, 자기 염불소리를 자기가 놓치지 않고 집중하여 듣는다는 뜻입니다. 그 소리가 이어져 일념이 되고, 삼매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주의할 점을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관세음보살에 집중할 때 항상 의 식을 하단전에 놓아야 합니다. 안 그러고 입으로만 명호를 부르면 나중 에 상기하여 머리가 아파옵니다. 그렇게 관세음보살을 부르다가 혼침이 오거나 졸리면 눈을 좀 크게 떠 줍니다. 그래도 계속 잠이 오면 일어서서 하고 그래도 잠이 오면 나가서 천천히 걷다가 좀 깨면 다시 앉아서 합니 다. 혼침과 반대로 “관세음보살” 부르는 사이에 산란심이 일어날 수 있 습니다. 산란심을 알아차리고 나면 즉시 관세음보살로 돌아와야 합니다. 산란심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왜 나한테는 산란심이 일어날까? 나는 근 기가 약해. 나는 안 되는가봐. 다른 걸 할까? 엊저녁에 뭘 했나?” 꼬리를 무는 생각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그러면 마(魔)에 걸려든 것이고 마에게 지는 것입니다. 마를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염불하다가 번뇌가 치고 들어오면 놔버리고 얼른 관세음보살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한쪽으로는 산란이, 한쪽으로는 혼침이 올 때 이상에서 말씀드린 방법을 써서 집중 상태를 지속해 가십시오.

 

양변의 번뇌가 자꾸 일어나면 그것은 ‘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번뇌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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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것을 끊기 위해서는 일념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일념을 만들 어나가면서도 항상 관세음보살님이 천수천안으로 나를 살피실 것이니 나는 항상 관세음보살님과 함께 한다는 생각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두려 움도 없어집니다. 일념이 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집중력도 늘어납니다. 더 힘이 붙으면 나중에 바르도 상태에서도 집중이 유지됩니다. 이 마음 으로 아미타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님 명호에 집중하는 방법이 명호염불 입니다. 대비주나 육자진언도 명호염불에 준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살아 있을 때도 바로 살고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타력과 자 력을 굳이 가를 필요가 없습니다. 일념으로 집중하는 것이 중요할 뿐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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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장

화두의 특성

 

선의 핵심은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있습니다. 신·구·의 세 가지 업 가운데 가장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 마음입니다. 몸으로 하는 행 동은 눈으로 그 모습을 볼 수 있고 입에서 나온 말은 소리라는 형체가 있어서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말과 행동은 이미 마음에서 결정한 것이 바깥으로 드러난 것이지만 마음을 일으켰을 때는 그것이 선한 마음이든 악한 마음이든 형체가 없습니다. 말과 행동이 파도라면 마음은 바람과 같습니다. 바람이라는 에너지 때문에 파도가 일어나지만 형체 없는 그 에 너지를 볼 수 없습니다. 형체 없는 이 마음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작동합니다. 마음에서 일으킨 대로 말이 되고 행동이 되기 때문에 마음이 모든 업의 시초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 가운데서도 가장 큰 착각은 ‘나’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나를 중 심으로 나한테 잘해주면 선, 내 욕심에 맞지 않으면 악, 나와 연관이 없 으면 무기(無記), 이렇게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세속적인 기준으로 선이라고 하는 것이, 예컨대 ‘저 사람 참 좋은 사람이다.’ 할 때, 객관적으로 옳은 판단은 아닙니다. 그렇게 나를 중심으로 선악을 구 분하는 것이 세속의 살림살이입니다. 무아와 공성에 관한 법문을 듣고 마음에 새겨도 실제 삶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공성을 생각하고 무 아를 말하지만 다시 내 중심으로 돌아와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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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세상에 시비와 다툼이 끝없이 일어납니다. 중생계의 괴로움은 전부 ‘나’로부터 비롯됩니다. 시비와 다툼을 막아보자는 가르침은 불교 외에도 있긴 했습니다. 유가는 예의와 도덕을 가르쳤고 법가는 철저한 법 의 시행을 강조했고 묵가는 평등한 인류애에 호소했지만 다툼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신을 믿는 종교는 모든 것을 신의 주관으로 보는데, 그렇다 면 악한 마음도 신이 만든 것이고 다툼도 신의 계획이어야 합니다. 서로 악마로 보니까 싸움이 일어나는데 사실상 자기 속의 악마와 싸워야지 누 구와 싸우겠습니까? 고통에 대한 완전한 해결책을 내놓은 분은 부처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고통이라는 현상, 고통의 원인, 고통이 멸한 상 태, 고통을 없애는 방법을 다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고통을 없애는 방법을 불교에서 방편이라고 하는데 방편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오해가 있습니다. 일상에서는 방편을 편법과 혼용하여 오히려 비불교적인 방법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고통을 없애지 못하는 방법은 방편 이라 할 수 없고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킬 뿐입니다. 굿을 열두 번 하면 고 통이 사라지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중에 계를 지키고 경을 읽고 보시를 하는 등으로는 마음속에서 일어 난 것을 잡을 수 없습니다. 다만 그것들을 본 수행에 들기 위한 예비 수 행일 뿐입니다. 탐진치의 근본까지 해결하는 유일한 방편이 선으로서 소 의처에 집중하여 오락가락하던 번뇌를 사라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시비를 일삼던 마음이 착각임을 알아차리면 양극에 의해 지탱 되던 ‘나’가 사라집니다. “마음을 찾아봐도 없습니다.”라고 한 혜가 스 님도 이 공성을 체험하신 것입니다. 이 체험은 선이라는 방편으로만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교를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선의수행 방편을 닦아야 합니다. 요즘에는 불교를 한다면서 상담심리를 도입한다든지 착 하게 살기를 권한다든지 이런저런 명상을 가르치는데 그 정도를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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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근본적인 번뇌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본 수행이 되지 않는다는 뜻 입니다.

 

선의 원리는 다 같습니다. 소의처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어느 것이 더 우수하거나 열등하지 않습니다. 원리를 알면 부처님의 말씀이건 조사의 말씀이건 집중에 다 도움이 되기 때문에 편견을 가질 일이 아닙니다. 요 즘 한국에는 화두선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판 을 하려면 한국에서 화두선을 받아들여 수행했던 것에 대한 정확한 이해 와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화두선이 목표하는 바가 무엇인지, 누구 하나라도 그 목표에 도달해서 번뇌가 사라진 경계를 실제로 증명해 보인 일이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화두를 잘못된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에 대 해서는 비판할 수 있지만 화두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 다. 화두선을 부정한다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대혜 스님은 견성을 못 하셨나요? 보조국사는요? 수많은 스님들이 화두선을 통해 깨달음을 이 루신 일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방법을 정확하게 모르고 정확하게 실 행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 절대 화두선의 잘못이 아닙니다.

 

화두선에 대해 또 다른 오해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직접 화두를 가르 쳐주셨다는 오해인데 부처님께서 화두를 직접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경전 어디에도 없고 몇 백 년 지난 뒤 나란다 전승이나 남방불교 쪽 논전 을 보더라도 화두라는 말이 없습니다. 화두선은 분명히 중국에서 창안 한 방법입니다. 중국의 큰 스님들께서 해보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 과 동일한 경계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화두선도 분명 번뇌를 끊 는 힘이 있으므로 그 원리를 명확하게 아는 것이 좋습니다. 일념에 도달 해서 양극에 갈리는 두 가지 마음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어느 선이나 마 찬가지입니다. 양극단이 사라지면서 번뇌가 없어져버린 상태를 중도라고 도 하는데 그 상태를 『반야심경』에서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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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했습니다. 그 경계에 도달하면 생사가 이미 없습니다.

 

우리는 태어나고 죽습니다. 매번 생과 사를 반복하면서 태어남은 좋은 것이고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두 경계를 넘어서면 불생불 멸인데 우리는 생에 집착하기 때문에 죽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싫건 좋건 상관없이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것이 고약한 일이지만 번뇌가 사라지지 않는 한 생사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과 사를 끊임 없이 왔다 갔다 하지만 번뇌가 끊어진 사람은 생과 사가 없어서 싫어할 이유도 없고 좋아할 이유도 없이 잘 가고 잘 옵니다. 그런 분을 여래, 범 어로 tathāgata라고 합니다. 오고 싶은 마음에 허겁지겁 오지도 않고 가 기 싫은 마음에 저항하지도 않고 생사를 벗어나 여래여거(如來如去)하기 때문에 ‘여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하는 목적은 생사를 벗어난 경계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 러나 실제로 조금 앉아보면 몸을 조복 받기도 힘이 듭니다. 그 단계가 지 나면 몸도 편해지고 마음도 조금 가라앉는데, 그렇다고 그것이 다가 아 닙니다. 그것은 마치 구정물 통을 가만히 놔두면 가라앉았다가 작대기로 휘저으면 다시 올라오는 것과 같습니다. 선을 한 시간 하고 집에 왔는데 영감님이 술 먹고 들어와서 깽판을 치면 한 시간 가라앉힌 것이 어디 가 버리고 다시 어지러워집니다. 그래서 완벽하게 벗어난 경계를 얻기 위해 서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우선 충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외부 환경을 조 성해야 합니다. 외부와 내부는 항상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또 계 율을 잘 지키고 삿된 생각을 하지 않으면 번뇌를 끊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렇게 예비 수행을 하고서 선을 하면 빨리 성취합니다. 계란에 구멍도 안 내고 노른자를 빼낼 수 없는 것처럼 예비 수행 없이는 본 수행의 진수 를 맛볼 수 없습니다. 오늘은 집중의 소의처인 화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화두를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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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대표적인 용어로 공안(公案)과 고칙(古則)이 있습니다. 공안은 임금 의 일급 비밀편지를 뜻합니다. 임금이 공문서를 써서 전할 때는 개봉 못 하게 해서 정해진 사람이 뜯어보게 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화두에 왜 공안이라는 이름을 붙였느냐 하면, 일급 공문서는 비밀이 새 나갈까봐 쓴 사람과 받은 사람 둘만 알고 중간에 배달한 사람도 모르기 때문입니 다. 심지어는 들고 가는 사람이 가다가 죽더라도 그 내용을 모릅니다. 개 봉하는 사람이 뜯어보면 즉시 알고 시행하는 것, 화두가 그런 특성을 갖 고 있습니다. 또한 공안은 후대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만한 옛 법식이 된 다는 뜻에서 고칙이라고도 합니다. 고칙, 공안에는 역대 조사들의 1,700 가지 화두가 있습니다. 학인이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조주 스님이 “없다”라고 대답한 것이 그 예입니다.

 

화두는 생각이나 개념으로 지어서 답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는 의 심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공안 명제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아, 이런 문제를 받고 보니까 답이 이렇구나.” 하면 그것은 중간에 비밀 공문서를 갖고 가던 사람이 뜯어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뜯어보면 잘 못되는 것처럼 화두를 하면서 관념적인 답이 나왔다면 그것은 이미 답이 아닙니다. 화두의 목적은 일념이 되어 분별 망상을 없애기 위함인데 분별 로 답을 내면 이미 목적을 잃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부모미생전 본래 면목, 엄마 뱃속에 들어가기 전에 너는 뭐였는가?” 하고 묻는데 전생에 뭐였을 겁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셈이 됩니다. 묻는 분의 목적은 엉뚱한 데 있습니다. 그 엉뚱함 때문에 선문답이라고 합니다. 답이 없다고 해서 목적이 없지는 않습니다. 답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눈병이 났습니다. 의원이 약을 주면서 눈을 비비지 말라고 했는데 가려우니까 계속 비벼서 낫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말 을 안 듣게 생겼으니까 다시 처방을 냈습니다. “아, 큰일 났소. 진맥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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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 탈장이 되어서 돌아가시게 생겼소. 눈병은 아무 것도 아니오.” 그러 자 이 사람이 깜짝 놀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습니다. “이것은 약도 없습니다. 일주일 동안 일어나지 말고 양쪽 손으로 엉덩이를 꽉 붙들고 계시오.” 시키는 대로 엉덩이만 붙들고 앉았는데 눈 생각은 나지도 않았 습니다. 병원에 갈 때까지 엉덩이를 붙들고 가서 물었습니다. “엉덩이 붙 들고 있은지 일주일 되었으니까 괜찮겠습니까?” “예, 엉덩이도 괜찮고 눈도 괜찮죠?” 눈병을 고칠 목적으로 탈장을 이야기한 것이 화두선의 내 용과 비슷합니다.

 

분별 망상을 없애주기 위한 것이 화두인데 화두를 분별 망상으로 판단 해서 개념을 지으면 그것을 ‘파설’이라 하고 그런 사람들을 ‘지해종도 (知解宗徒)’라고 합니다. 화두를 잘못 이해하고 잘못 들고 있는 것입니 다. 견성을 한 사람들은 화두를 통해 ‘아’가 완전히 사라져서 분별심이 없는 상태에 든 것입니다. 화두를 들 때는 의심에 일념을 할 뿐이지 대답 을 구하면 안됩니다. 조주 스님한테 어떤 객이 가서 물었습니다. “개한테 도 불성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으니 까 그렇게 물었습니다. 조주 스님은 “없다(無)”라고 대답했습니다. 부처 님도 큰 어른이고 조주 스님도 큰 분인데 한쪽은 있다 했고 한쪽은 없다 했습니다. 질문한 사람은 “개한테 불성이 없다.”라고 하신 조주 스님의 말씀을 듣고, ‘왜 없다고 했을까? 무라, 무라, 무라……’ 그 모순된 명제 의 의심으로 집중합니다. 그래서 무자(無字) 화두라고 합니다. 그 의심에 집중을 하면 일념이 되고 의심의 일념이 되니까 마음이 화두에 집중이 되 어 일념이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전강 스님의 법문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화두 는 말이야, 말뚝에 송아지를 매놓는 것과 똑같아.” 여기에 말뚝 하나 딱 박고 송아지 코 뚫어서 묶어 놓으면 고삐 길이만큼밖에 못 나갑니다. 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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뺑 돌면 돌수록 자꾸 감겨서 나중에는 말뚝에 붙을 수밖에 없습니다. 화 두 일념이 되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소가 꼼짝도 못 하고 앉아서 입만 우물우물하고 앉아 있듯이, “이 뭣고, 이 뭣고……” 하고 앉아 있게 됩니 다. 화두는 말뚝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써 일념이 되어 번뇌 없는 경 계에 들어가게 합니다. 번뇌를 없애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고 그 도에 들 어가는 좋은 방편이 화두입니다. “예불 소리를 들으니까 마음이 편안합 디다.”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래서 그 편안함이 계속 유지되던가요? 안 되잖아요. 그렇다고 예불 소리를 듣지 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예불 은 칠지공양 가운데 하나로서 목표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전제조건일 뿐 입니다. 예불 들으려고 불교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죠. 예불도 예비 수행 으로는 좋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화두의 말뜻에 대해 덧붙이자면, 화두는 글자 그대로 ‘말머리’라는 뜻 입니다. 일상에서 보통 화두라고 할 때는 말의 발단이나 화제 거리를 뜻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쓰는 화두는 말 이전,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 상 태를 가리킵니다. 화두를 통해서 나를 중심으로 한 이런 저런 생각이 일 어나기 이전 상태로 들어가면 번뇌가 사라집니다. 그 상태를 『반야심경』 에서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고 했습니다. 생과 사를 떠났 고,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떠났고, 길고 짧은 것을 다 떠난 상태, 그것을 중도라고 합니다. 이 경계에 도달해야 앉아서 죽고, 서서 죽고, 자유롭습 니다. 죽음뿐 아니라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도 자유롭습니다. 우리는 온 갖 시비로 괴로워하고 온갖 박복함으로 괴로워하지만 그런 것이 다 없어 집니다. 밥 한 숟갈 먹어도 별 문제 없습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배 가 안 고플 수는 없지만 배가 고프면 ‘아, 배가 고프구나.’ 하는 정도이 지 배가 고프니까 괴로워, 우울해, 비참해, 이런 생각이 없습니다. 내가 명 품 가방을 안 가져서 동창회에 갈 수가 없어, 그런 소리를 하지 않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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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필요해서 가방을 가지고 다니지만 명품이라고 우쭐하거나 모조품이 라고 자존심 상하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이 없는 경계, 번뇌 망상이 일어 나기 이전의 경계를 다른 말로 부처님의 경계라고 합니다. 우리가 앉아서 화두를 잡고 선을 하는 것이 그 경계로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그 경계에 서는 나를 중심으로 시비하는 마음이 다 떨어져버리기 때문에 그때부터 일체중생이 모두 윤회하는 속에서 저렇게 싸우고 사는구나, 하고 자비심 이 일어나게 됩니다. 도인이 되고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는 부처님께서 가신 길로 들어가는 법칙입니다. 그런 뜻에서 옛 고, 원칙 칙 자를 써서 고칙(古則)이라고 합니다. 의심에 집중하여 무분별지 에 들어가게 하는 방편이 화두입니다. 예부터 수많은 도인들이 이 방편 을 통해 무분별지를 얻었으니 이것이 틀림없는 법칙이 됩니다. 화두, 공 안, 고칙이라는 이 세 가지 용어만 보아도 이것이 얼마나 훌륭한 방편인 지 알 수 있습니다. 불교는 탐진치를 없애는 것이지 약간 가라앉히거나 다른 효과나 신통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선을 하지 않고도 육조 스님처럼 욕심이 쏙 빠졌다면 선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 려고 선을 하는 것이고 육조 스님은 이미 목적에 다다른 분이니까요. 선 을 하는 사람은 그와 같이 목적의식이 분명해야 하고 마음속의 번뇌를 제거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화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칙 공안에는 1,700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가에서 ‘1,700공안’이 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옛날 스님들은 공안집에서 하나 뽑아서 이 화두 들어봐라, 무자 화두 들어라,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이야기들을 모아서 공안집의 형태로 편집한 것은 후대의 일입니다. 옛날 의 활발발(活潑潑)한 어르신들은 누가 무슨 이야기를 갖고 오면 그 이야 기를 가지고 말문이 탁 막히게 해줍니다. 말길이 끊어지게 만들고 생각길 이 끊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예는 아주 많습니다만 운문 스님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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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유명합니다. 어떤 객이 와서 물었습니다. “부처가 뭡니까?” 운문 스 님이 대답했습니다. “마른 똥 막대기지.” 화장실에 변이 쌓이면 쓰는 막 대기가 있습니다. 화장실 바깥에 세워놓았는데 스님이 그때 마침 똥 막 대기를 보고 있었나 봅니다. 마른 똥 막대기와 부처는 연결이 안 되잖아 요? 설명을 할 수 있습니까? 화두란 그렇게 말문을 막는 것입니다. 그런 데 요즘 사람들은 『벽암록』같은 공안집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똥과 사 람을 분별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서 똥 막대기가 곧 부처고 부처가 곧 똥 막대기라는, 이런 정신 나간 소리를 합니다. 부처가 뭐냐는 말에 똥 막 대기를 말했을 때는 도저히 이론적으로 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생각 을 만들어 낼 구석을 ‘똥 막대기’로 없애버린 것입니다.

 

화두에 집중하면 생각을 붙들 곳이 없어지니까 번뇌가 사라지는 경계, 번뇌가 본래 없는 경계를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번뇌가 다 해 개안하 는 것, 화두선은 거기에 묘미가 있습니다. 의심에 집중이 된 가운데 결국 은 무분별지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경계를 용수보살은 ‘공성’이라 했고 유마거사는 ‘불이’라 했고 부처님은 ‘무아’라고 하셨습니다. 무아의 관 찰을 반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화두라는 소의처의 핵심은 의심에 있습니 다. 이론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이야기를 통해 의심에 집중하도록 한 것 입니다. 그 의심을 가지고 집중을 해서 번뇌가 떨어지게 하는 것이 목적 입니다. 이 방법은 당나라 때까지는 안착이 안 되었고 송나라 때 대혜 종 고 스님에 와서 화두를 관하는 방법이 구체화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많 은 분들이 이 방법을 통해 무분별지를 얻었습니다. 물론 앞에 예비 수행 이라 할 수 있는 경율론 등을 2~30년씩 공부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선 에 들어서 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엄청난 정신적인 유산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자산이고 그 길을 제시하는 곳은 불교밖에 없 습니다. 한국 불교의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점을 정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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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경부터 배우고 율을 잘 갖춘 다음에 선을 하면 틀림없이 도가 빨리 이루어집니다. 예부터 많은 도인이 나왔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전통을 계승하여 정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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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장

화두를 참구하는 법

 

부처님께서 화두라는 말을 직접 쓰지는 않으셨지만 일념이 되어 번뇌 를 끊는다는 점에서 화두는 다른 소의처와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는 출가하고 6년간 고행을 하셨습니다. 씻지도 않고 하루에 쌀 몇 톨과 물 조금 먹고 지내다보니 피골이 상접했는데, 그렇게 고행을 해도 번뇌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고행을 포기하고 전정각산 에 잠시 머물다가 네란자라 강에 내려와서 목욕을 하고 모래밭에 그냥 쓰러지셨습니다. 그때 염소를 키우던 여자가 공양을 올려서 겨우 기력을 회복하셨습니다. 유미죽 한 그릇을 올렸다고 하는데 기력을 회복할 때까 지 한 달 이상 돌봐드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보살핌을 받는 동안 저녁 에는 보리수 아래에서 정진을 계속하셨습니다. 한 달 만에 기력을 회복 하신 것을 보면 부처님은 건강하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 같으면 6년 고행 하고 쓰러졌을 때 아마 모랫바닥에서 못 일어났을 텐데, 한 달 정도 되니 까 병 하나도 없이 깨끗하게 털고 일어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몸을 회복한 뒤에 부다가야의 커다란 보리수 아래서 결가 부좌를 하셨습니다. 반가부좌가 아니고 결가부좌를 한 데는 굳은 결의 가 들어 있습니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그대로 열반에 들겠다는 것입 니다. 경전에는 열반에 들겠다고 표현했지만 죽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결가부좌를 풀지 않고 집중해서 선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것이 화두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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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아니었지만 무엇이 이렇게 풀리지 않는가라는 의문, 생로병사에 대한 의문에 깊이 집중하는 가운데 삼매에 드셨습니다. 결국 깨달음을 이 루어 새벽에 샛별을 보는 순간 번뇌가 다 사라지는 체험을 하셨습니다. 왔다 갔다 하는 생각이 없어지고 ‘나’라는 고집이 없어져서 밝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아닙니다. 다 보고 다 듣고 다 알지만 분별에 의한 번뇌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화 두선을 주장했던 대혜 종고 스님이나 그 뒤에 스님들은 부처님의 이러한 집중이 화두와 다를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도 그 견해에 동의합 니다. 화두라는 이름은 없었지만 그 부분은 확실히 같습니다.

 

당신이 번뇌가 다 사라지고 나서 가만히 보니까 이 집중은 일반적인 외 도들의 수행을 가지고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출가하고 나 서 외도에게 법을 묻고 그들이 가르치는 대로 수행한 이력이 있기 때문 에 그들의 방법에 무슨 결함이 있는지 잘 알고 계셨고 깨닫고 보니 더 확 연해졌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성문 제자들에게는 호흡법을 가르치기 시 작했습니다.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나 보리수 아래서 집중했던 것이나 원 리는 같습니다. 성문 제자들에게 호흡법을 가르치는 한편 대승 수행자들 에게는 불보살의 상을 관하거나 명호에 집중하는 등 여러 가지 방식을 활용하셨습니다. 이런 방식들은 모두 일념이 되기 위한 것인데 화두도 그 런 면에서 다를 바가 없습니다.

 

화두라는 특수한 방식이 나온 데는 문화적인 배경이 있다고 생각합니 다. 우선 인더스 문명이 부처님을 탄생시켰습니다. 부처님께서 태어나기 전에도 인도에는 다양한 종교와 철학이 유행했습니다. 부처님은 이런 인 문학의 토양에서 성장하여 부처가 되셨고 열반하신 후에도 수많은 제자 들이 토론과 결집을 통해 방대한 양의 경전을 전승했습니다. 그 문화가 산을 넘고 사막을 건너 황하문명과 만났습니다. 두 문명의 교류는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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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경전을 전해 받은 중국인들은 수백 년 동안 연 구하고 번역했습니다. 역사의 깊이로 보나 문화의 특성으로 보나 황하문 명의 언어학적 깊이가 인더스 문명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경전을 이해하고 번역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도가의 개념을 빌 려 변역하다가 점점 불교의 본뜻을 찾아갔고 유가와 만나면서는 철학적 논의나 계율에 관한 해석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주자학과 양명학에도 많 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화두가 도교의 수행법에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학의 황금시대』를 쓴 대만의 학자 오경웅 씨를 비롯해서 많은 논문이 있습니다. 이 주장을 비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만, 그러나 화두가 도교의 방식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는 것을 부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국에서 창안되었고 도교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번뇌를 끊는 방법이라면 문제될 게 없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수행을 하는 한국 불자들에게 형식선에 빠지지 말라고 당부합니 다. 형식선이란 오래 앉아 있다든지 잠을 안 잔다든지 생식이나 단식을 한다든지 법복을 입고 외형적으로 선 수행자의 모양새를 갖추는 것입니 다. 실제 깊이 있게, 정확하게 정진하지 않으면서 토굴 생활을 능사로 삼 는 것도 문제입니다. 외양이 어떻든 바른 정진이 아니라면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화두는 사마타에 들어가 마음속으로부터 번뇌를 끊는 중요 한 방식인데 이 목적을 잃으면 형식선에 빠집니다. 따라서 화두선은 방법 을 정확하게 알고 실행해야 합니다. 반드시 스승을 간택해서 지도를 받 는 것은 밀교와 같습니다. 밀교에서는 사람마다 근기 차이가 있기 때문 에 스승과 제자가 1:1로 가르치고 배웁니다. 스승이 제자의 근기를 살펴 서 어느 정도로 가르칠 것인지 정하고 과제를 주고서 하나하나 가르쳐 나갑니다. 현교는 공개석상에서 드러내놓고 가르치지만 밀교가 드러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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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선근이 갖추어지지 않은 하근기에게 상 근기 법을 가르쳐주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승이 1:1로 가르치고 점검해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조사선도 마찬가지로 공개석상 보다는 조실 스님이 입실 제자를 일일 이 지도합니다. 조실 문하에 들어가는 것을 입실이라고 하는데 입실 제 자는 조실을 스승으로 모시고 매일 지도를 받습니다. 큰방에서 공부하 다가 스승을 따로 뵙고 점검받는 독참 제도가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중 국, 한국, 일본에 이렇게 좋은 선방 시스템이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쇠퇴 했습니다. 중국은 모택동의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종교를 탄압하여 승려 들이 흩어지고 선방이 없어졌습니다. 공산정권은 몇천 년 동안 쌓아왔던 문화를 하루아침에 다 쓸어버려서 수행하는 사람들이 없고 불교가 관광 지의 유적으로만 남아있습니다.

 

일본도 조동종이나 임제종 등이 있지만 계법이 유통되지 않고 화두선 도 실제로 진행되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명치유신 이후에 불교 가 일종의 가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승려는 대를 이어 절을 물려주면서 지역의 장례나 납골을 맡아서 이어갑니다. 가업을 물려받은 아들이 발심 을 해서 출가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어느 절 주지는 식당을 하고 바텐 더도 한답니다. 한국은 지금까지 선방이 남아있고 결제 시스템이 유지됩 니다. 옛날보다는 못하지만, 일 년에 두 번 결제기간 동안 3,000명 정도의 스님들이 선방에 들어갑니다. 이런 전통을 잘 살려내려면 조실 스님들이 분발해서 입실제자들과 같이 정진하면서 하나하나 이끌어주고 그 바탕 위에서 도인들이 나와야 합니다. 옛날에 스님네들은 무문관에 들어가서 깊이 수행하셨습니다. 요즘은 무문관을 하는 경우도 적지만 무문관을 남 들이 다 알도록 떠벌이기까지 합니다. 스님네들을 본받아서 생사를 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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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고 깊이 사마타를 닦는 전통을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화두를 드는 방법에 관해 말씀드리자면, 우선 스승을 통해 화두를 간 택하고 그다음에 그 화두를 일념으로 의심해야 합니다. 화두는 물음에 답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에 집중해서 번뇌를 깨지는 데 답이 있습 니다. 거량을 할 때는 번뇌가 다 깨진 상태를 갖고서 대답을 합니다. 거량 은 서로 묻고 답하는 가운데 상대방의 공부를 측량해보는 것으로서 번 뇌가 다한 경계에 도달했는지를 관찰합니다. 육조 스님께서 “무념위종 (無念爲宗)”이라 하셨듯이 화두는 무념에 도달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 다. 분별 망상이 사라진 무념의 경계를 핵심으로 삼는 종파가 선종이고 선종에서 쓰는 방법이 화두입니다. 화두를 들기 위해서는 스승이 간택해 주는 것을 받고 나서 실참에 들어갑니다. 관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 마음을 화두에 붙들어 매기 때문에 ‘실참실수(實參實修)’라고 합니다. 사실로서, 현실로서, 자기의 온몸과 온정신을 다 쏟아서 해야지 적당히 하다 말다 하면 진전이 안 됩니다.

 

요즘에는 화두를 간택할 때 화두를 잘 모르는 사람한테 그냥 “무자 하나 들어봐라.” 하거나 자기 마음대로 “나도 무자화두를 들까?” 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스승이 있고 없고에 따 라서, 그 스승이 화두에 깊이 들어가서 공부를 했는지 여부에 따라서 차 이가 큽니다. 경전이나 율을 익힐 때도 스승이 필요하지만 선 수행에는 특히 스승이 중요합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작동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선의 체험은 경을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선 어록에서도 내밀한 이야기는 잘 전달하지 못하고 그저 표피적인 설명이 나 강한 인상을 남기는 이야기들만 해놨습니다. 보조국사의 경절문에도 화두 드는 법을 구체적으로 말씀해놓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물론 대혜 종고 스님은 방법에 대해서도 말씀을 남겼지만 실참은 관념이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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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에게 직접 배우고 하나하나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1,700가지 공안 을 다 화두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스승이 하나를 간택해주면 그것만 하면 됩니다. 간혹 “어떤 화두는 나한테 맞고 어떤 화두는 나한테 안 맞 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화두는 그 안에 답이 나올 수 없는 것 이고 답은 번뇌가 다할 때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나한테 맞고 안 맞고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걸 들다가 저걸 들다가 하지 말고 정확하게 하나 만 해야 합니다.

 

좌선할 때는 비로자나7자세를 취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앉을 때뿐 아니라 다닐 때나 다른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화두를 자꾸 챙기는 습관 을 들여야 합니다. 하루에 시간을 내서 염불 수행을 하는 것과 똑같이 화 두를 들고 매일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무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평 소에는 하지도 않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화두를 든다거나 용맹정진 한답시고 밤을 새워 앉아 있으면 몸만 다치고 실제로는 되지 않습니다. 잠이 오거나 망상만 더 일어납니다. 너무 힘들게 좌복 위에 앉아서 억지 로 버티고 나면 거부반응이 일어나서 그다음에는 좌복 위에 앉기조차 싫 어집니다. 몸도 조복 받으면서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싫증이 나지 않 게 하려면 하루에 시간을 정해놓고 꾸준히 정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처음 시작할 때는 어렵습니다. 염불도 처음 하면 집중이 안 되고 목소리도 안 나와서 하기 싫어집니다. 내가 누구에게 하루 만 번씩 하라고 하니까 “스님, 좀 깎아 주이소.” 합니다. 서툴러서 하기 싫은 것입 니다. 그래서 습관이 중요합니다. 나는 거꾸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술 마시는 사람은 그 쓴 것에 습관을 들여서 나중에 알코올 중독의 경지에 이르고 흡연자는 몇 개비에서 시작해서 하루에 두 갑씩 피우는 중독에 들어갑니다. 몸에 해로운 것도 기어코 매일 해서 습관이 드는데 그대는 염불이나 화두로 경지에 이를 수 없겠습니까?” 염불과 화두는 할수록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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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좋고 마음에도 좋습니다만, 처음에는 잘 안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어떤 분이 “스님, 불교 공부 어려워서 못 하겠습니다.” 하기에 “얼마나 했 습니까?” 물었습니다. “이제 2개월째입니다.” 내가 그만 말이 막혀버렸습 니다. 겨우 일주일에 한두 시간 하고서 어렵다고 하는데 해본 적이 없어 서 어렵습니다.

 

일단 화두를 받아서 의심을 일으킵니다. ‘부처님은 개한테도 불성이 있 다 그랬는데 조주 스님은 없다 그랬다. 무(無)라. 왜 없다 그랬을까?’ 의 심이 잘 안 일어나면 처음에는 염불하듯이 자꾸 일으켜야 합니다. 그렇 다고 ‘이뭣고, 이뭣고’ ‘무(無)라, 무(無)라’ 하고 다니라는 것은 아닙니 다. 의심을 자꾸 일으켜서 나중에는 이 마음 자체가 의심 덩어리가 되도 록 해야 하는데 그 상태를 의단(疑團)이라고 합니다. 의심이라 하면 남을 의심하는 것쯤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명 제에 대한 질문입니다. ‘개한테 불성이 왜 없다 그랬을까?’ 여기에 마음 을 몰두해서 다른 생각들이 다 끊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의심이 일어나서 화두가 조금 잡히려고 하면 그다음엔 잠이 옵니다. 참 묘하게도 딱 그때 잠이 찾아와서 눈이 밑으로 내려옵니다. 이 상태를 혼 침이라고 합니다. 보통 화두가 잡히지 않고 그냥 고요히 앉아 있다면 이 미 혼침에 빠진 것입니다. 염불을 해도 집중이 되지 않으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다가 그냥 편안해지는데 그것이 혼침입니다. 앉아있어도 잠든 상태나 다름없습니다. 고요한 가운데 혼침이 오면 얼른 알아차리고 화두가 또렷하게 들리게끔 애를 써야 합니다. 그리고 화두수행에서 또 하나의 장애는 산란한 마음입니다. 초기에는 번뇌가 자꾸 바깥으로 치 달리면서 시비가 많이 일어납니다. 선방에서 선을 좀 해보면 괜히 옆 사 람하고 싸웁니다. ‘화두 하려고 하니까 옆에서 코 골고 고개 끄덕끄덕해 서 집중을 할 수가 없다’고 불평합니다. 자기 마음이 바깥으로 나가서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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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반 애들 떠든다고 “다 눈 감아” 했는데 어떤 애가 “쟤는 눈 떴어요” 하면 자기도 눈 떴다는 반증이 될 뿐입니다.

 

바깥 경계에 끌리던 산란심이 조금 지나고 나면 이제는 안에서 이런저 런 생각이 일어납니다. 철학적인 사유도 있고 ‘아, 깨달음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자기가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나옵니다. 그러나 관념 속에서 한 일은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오히려 속은 것입니 다. 보조국사처럼 수행이 높은 분도 속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 은 종단을 만들어서 사이비로 가르칩니다. 어디서 참선을 하고 앉았는데 “이제 네가 도인이 됐으니까 내려가라” 그랬다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옛 날에 이회광이라는 사람이 금강산에서 백일기도를 했는데 남쪽을 보고 총을 쏘는 꿈을 꾸고서 내려와 해인사에 갔답니다. 도착한 날 저녁에 해 인사 벌통에 벌이 싹 다 날아가 버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도인인 줄 알고 이 사람을 해인사 조실로 세웠답니다. 취임식 날 몇백 대중이 모 인 가운데 조실이 올라가서 상당법문을 했습니다. “산하대지가 모두 이 이회광의 입으로부터 나왔느니라.” 그때 석두 스님이라는 분이 물었습니 다. “그럼 이회광의 입은 어디로부터 나왔습니까?” 조실은 이 질문에 그 만 콱 막혀버렸습니다. 그 일로 석두 스님이 쫓겨났습니다. 이때 석두 스 님은 금강산으로 갔는데 거기서 효봉 스님을 만나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었습니다.

 

화두를 지어갈 때 ‘개한테 불성이 없다고? 모든 중생에게 다 있다고 그랬는데 왜 없다 그랬을까?’ 그 의심에 집중해서 그대로 나아가면 의심 이 한 덩어리가 됩니다. 혼침과 도거가 떨어지고 마침내는 일념의 그 순 간이 며칠간 지속되면서 번뇌가 뚝 끊어져 ‘본지풍광’, 본 모습으로 반 드시 들어갑니다. 이것이 화두를 지어가는 법입니다. 그런데 선을 할 때 한국 사람들이 특히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상기되는 병입니다.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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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사람들은 철저하게 채식을 하고 하루에 한 끼밖에 안 먹으니까 상기 되는 일이 적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머리 를 많이 굴리고 살기 때문에 선을 하는데도 머리를 굴리는 습관이 있습 니다. 선을 하면서 머리를 굴리면 기운이 올라와 머리가 아프게 되어있습 니다. 그래서 화두를 들고 앉을 때는 비로자나7자세를 통해서 하단전으 로 잘 가라앉혀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두를 들고 의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마음이 전제되어야 합 니다. 대부분 화두를 받을 때 1,700공안 중에 한 가지를 간택해줍니다. 또는 대도인이 즉흥적으로 활발발하게 바로 일러줘서 의심에 들어가게 만들기도 하는데 거기에 의심을 일으키면 그냥 집중이 됩니다. 화두를 받 기 전에 제일 중요한 것이 발심입니다. 내 번뇌를 완벽하게 끊어내고 일 체중생도 이와 같이 번뇌를 끊게 하겠다는 원이 서 있어야 합니다. ‘중생 무변서원도’의 원이 없다면 나 혼자 정진해서 내가 성불하는 것이고 까 딱 잘못하면 내 욕심이 되어서 또 하나의 ‘나’가 생깁니다. 『금강경』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어야 보살이라.”라고 했듯이 ‘나’가 있 다면 성자가 아닙니다. 모든 중생과 함께 번뇌를 벗어나겠다고 원을 크 게 세워야 번뇌 끊는 공부에 원동력이 됩니다. 화두 공부가 개인 차원이 나 이기적인 목적에 머물러서는 잘 나아가지 않습니다. 중생을 위해 보리 심을 일으켜야 공부에 힘이 생깁니다.

 

그다음에는 신심이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이 법을 통해서 생사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믿음이 확실해야 피안에 갈 수 있습니다. 다리를 건너 갈 때 이 다리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발을 내딛을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참선을 할 때 ‘뭐 그냥 남들이 하니까’ ‘앉으면 참 좋 다네’ ‘어쩌다 보면 깨달을 수도 있겠지’ 이런 정도로 하는 것은 옳지 않 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대각의 길을 분명히 제시해주셨다는 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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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믿음, 대신심이 필요합니다. 대발심과 대신심 다음에는 대분심이 있어 야 합니다. 분심은 분발하는 마음입니다. 부처님 당신만 그렇게 될 수 있 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기 때문에 안 해서 그렇지, 알고 매진하면 일체중 생이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도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나와 외형적으로 다를 게 없습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능력은 이미 타고 났으니 내가 결정코 번뇌로부터 벗어나서 당신처럼 되겠다는 마음이 대 분심입니다. 보조국사도 나옹선사도 서산대사도 사람이 정진을 안 하는 것이 문제지 법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더 라도 정진하지 않은 사람은 이룰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생에는 안 되겠고요. 뭐 다음 생에 나……”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날지 무엇으로 태어날지 어떻게 알겠 습니까? 그러니 척량골을 바짝 세우고 한 시간을 앉더라도 대분심을 일 으켜서, 내가 기어코 이 생에 한 번이라도 번뇌 없는 경지에 들어가 보겠 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정진하라 그러면 조건 탓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 다. 물론 이해는 합니다. 부부끼리도 말년에 서약을 하고 정진을 권하십 시오. “이번에 어디 결제는 당신이 갔다 오소.” 토굴 하나 지어놓고 “이 번에는 당신이 참선도 하고 기도도 하고 오소.” 이렇게 좀 멋지게 살았으 면 좋겠습니다. 어제와 오늘이 조금씩 달라지도록 해야 합니다. 어제 했 던 생각을 오늘도 하고 내일 또 하고 있으면 다음 생에도 그렇게 살 것입 니다. 지금부터라도 발심과 신심과 분심을 내서 화두를 받고 의심에 집 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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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장

사마타의 다양한 소의

 

소의처는 오락가락하는 이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켜 사마타가 이루어 지게끔 하는 의지처로서 소를 매어놓는 말뚝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소의 처 가운데 화두와 염불에 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소의처에 그 두 가지 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사람들의 근기를 살펴서 다양한 방법을 가르쳐주셨고 사람들이 살아온 습관을 살펴서 소의처가 될 만한 것을 계 발해주기도 하셨습니다. 오늘은 다양한 소의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다양한 소의처가 있다고 해서 아무것이나 하면 안 됩니다. 이를테면 『금강경』을 소의처로 삼지는 않습니다. 『금강경』은 철학적 내용들을 담 고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이해하고 아는 것으로 깨달음을 삼아버립니 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번뇌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경을 보는 동안에 마 음이 여러 가닥으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소의처로는 적합하지 않습니 다. 『반야심경』도 짧은 경이기는 하지만 같은 이유에서 소의처로 권하지 는 않습니다. 소의처는 생각 이전 자리, 분별이 일어나기 이전 상태에 이 르는 것입니다. 생각 자체가 우리의 삶이라서 생각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그렇 게 얘기했지요. 그러나 부처님께서 깨달아보니까 생각이라는 것은 나를 두고서 거듭 반복한 분별심에 지나지 않고 그것이 번뇌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벗어나서 생각 이전 상태가 되는 것이 소의처에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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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목적입니다. 생각으로만 계속 무엇을 해나가면 도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생각으로 될 수 없는 것을 소의처로 제시해놨습니다. 화두가 그 렇고 염불도 그렇습니다. 나옹 스님의 시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염도 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 생각 이 다한 끝에 분별 망상이 사라진 곳에 이르면 그때 반야의 생각이 일어 나서 부처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화두와 염불 외에 다른 소의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화두 하는 사람 은 염불로는 깨닫지 못한다는 편견을 가지는가 하면 염불하는 사람은 염 불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편견을 가집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부터 여 러 가지 방법이 있었고 지금까지 그 방식들이 전승되고 있습니다. 한 가 지 소의처를 가지고 자신의 방법만 옳다는 것은 편견일 뿐입니다. 오늘 은 밀교 쪽과 대승불교에서 쓰고 있는 다른 방식을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티베트의 까규파에서 쓰는 방법입니다. 까규파의 스승 중에 밀라레빠라는 분이 부처님 법을 이어서 나로6법을 수행법으로 삼았는데 나로6법 가운데 사마타법이 있습니다. 내가 라닥에 갔을 때 4,300고지의 토굴에서 살며 정진하는 스님들과 대화하면서 자세히 묻기도 하고 그 뒤 에 까규빠의 큰 스님들로부터 다시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따시종 의 스님들과 이야기를 해보니까 우리처럼 화두나 염불을 하지는 않지만 역시나 소의처에 집중하는 것은 똑같았습니다. 밀라레빠 이후에 내려오 는 전통으로 세계에서 이 방법을 쓰는 곳은 까규파가 유일한 것 같습니 다. 중국에서 대혜 종고 스님이 화두선을 확립시켰듯이 그쪽에서는 밀라 레빠가 나로6법을 소의처로 확립시킨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는 사마타를 어떻게 하느냐면 한 점에 집중하는데 그것을 일 점수행이라고 합니다. 비로자나 자세로 앉았을 때 방바닥의 40cm 정도 앞에 자그마한 검은 점을 관상합니다. 거기에 실제로 점을 찍어놓고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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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이 그 점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집 중을 하면 환상이 일어나서 안 됩니다. 거기에 점이 있다는 상을 두고서 그 점과 하단전을 일치시켜줍니다. 그 점에 집중이 되면 산란이나 혼침이 사라지면서 그 점이 하단전과 같이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산란이 일어났 을 때는 그 점이 안 떠오르다가 집중이 되면 또렷하고 또 혼침이 왔을 때 는 흐트러져버립니다. 수행하는 동안 이 과정을 반복하는데 그것은 화두 를 들거나 염불을 할 때도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나’가 있다고 착각하고 그 ‘나’를 집착하는 데서 이익과 손해 를 따지며 평생을 살아갑니다. 오락가락 반복하는 이 생각을 떨치기 위 해 사마타를 하고 집중이 될 때 양극단이 사라집니다. 집중이 된 상태를 삼매라고 하며 집중의 힘을 계속 길러나가는 것을 선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선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선은 번뇌가 사 라져서 일념이 되었다는 뜻인데 그 상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 통 선을 한다고 합니다. 좌선은 앉아서 그 상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집중을 계속 반복해서 일으키면 집중하는 힘이 커집니다. 처음 해보는 사람들은 해도 안 된다는 말만 자꾸 합니다. 안 되는 것이 당연 합니다. 우리는 이제껏 나를 중심으로 분별심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입니 다. 예를 들어 차를 몰고 길을 나서면 먼저 어느 길이 제일 가까운지부터 찾게 됩니다. 나한테 가장 이익이 되는 길이니까 그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다음에 길이 막히면 화가 납니다. ‘나’가 있기 때문에 ‘나’의 길을 방 해하는 상황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중이 된 상태에서는 그런 것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점을 띄워놓고 관하는 까규파의 일점수행은 깊은 사마타 법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뭐 그런 법이 있느냐고 의심하거나 그런 걸로는 안 된 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비판입니다. 왜냐면 밀라레빠 이후에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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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행을 통해 사마타를 이룬 사람이 많이 나왔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었 기 때문입니다. 그 법은 내가 잘 모른다고 할 수는 있지만 해보지 않고서 틀렸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까규파 전승의 일점수행 역시 핵심 은 일념이 되는 것에 있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눈을 반개하고 40cm 정도 앞의 바닥에 점이 있다고 관상하는데 초보자들은 처음에 점을 조그맣게 하나 찍어놓고 시작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벽을 보고 앉아서 벽 의 낮은 곳에 점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떠올리는 것이 처음에는 잘 안되 니까 눈으로 보고, 있다고 관상을 하는 것입니다.

 

일점수행 과정에서 잠시 10초, 20초, 30초, 일념이 될 때가 있습니다. 잠시라도 일념이 되는 그 순간들을 자꾸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 는 이것에 “삼매의 근육”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마음이라는 것도 일념이 되는 근육을 확실하게 키워놓지 않으면 산란심 때문에 결국 본인 이 고통을 당합니다. 이럴까 저럴까 하는 생각이 오락가락 수없이 반복 되면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상태가 불안해지고 심하면 정신질환이 되기도 합니다. 사마타의 근육이 커진 사람은 마음이 안정되어 정신과적인 문제 가 생기지 않습니다. 다쳐서 아프거나 선천적으로 조울증 같은 기질을 타 고났다면 모르겠지만 일상에서 받는 스트레스 정도로는 문제를 일으키 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담사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일념이 되 는 사마타의 근육이 생겨야 진정한 치유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마 타는 인류가 발견한 가장 좋은 치유 방법이고 그 치유는 결국 우리의 몸 과 생활을 개선하고 궁극에는 카르마를 개선 시킵니다. 일점수행을 지금 당장 여러분께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까규파에서 이 방법으로 사마타를 성취해서 수많은 도인을 배출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기 위해 말씀드렸 습니다.

 

두 번째는 대승불교권에서 하는 관상법입니다. 이 방법은 대승불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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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밀교로 넘어가면서 조금 깊어지고 확대되는데 불단이나 공양단을 차 려놓고 불보살을 관상하는 것입니다. 티베트 쪽 금강승권에 가보면 출가 자와 재가자 모두 개인 선방이나 기도처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 불단 이나 공양단을 만드는데 사마타를 할 때 꼭 필요한 단입니다. 바닥에 좌 복을 깔고 앉으면 항상 부처님이 눈보다 조금 높이 보이게 설치합니다. 1.2m 정도 높이의 단 위에 탱화와 불상을 모십니다. 우리도 집에 불상과 탱화를 모시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불국사 관광 가서 기념품 하나 사다 놓듯이 무지몽매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비싼 돈을 주고 사거 나 조성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관상하는 데 적합한 탱화와 불상을 법 에 맞게 모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신 탱화와 불상이 관상을 하는 만 다라에 맞아야 합니다. 색이 틀리거나 또는 눈이나 귀가 안 맞게 그려졌 거나 하면 나중에 관상을 할 때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탱화는 색깔과 모 양을 정확하게 그려야 합니다.

 

관상 수행자에게 불상과 탱화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불 자들은 워낙 고수들이라서 그런지 집에 불상을 잘 안 모십니다. 내가 부 처인데 모실 까닭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만큼 수행에 관심 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집에 모시면 귀신이 붙느니 어쩌니 해괴한 소 리를 하면서 부처님을 귀신 푸닥거리 차원으로 떨어뜨려 놓기도 합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의 상을 모시고 얼굴을 보면서 ‘부처님께서 계 셨구나.’ 하는 생각만 내도 공덕이 될 터인데 부처님 모시기를 부담스러 워합니다. 집에 침대나 가구, 수석은 비싼 걸로 어마어마하게 모셔 놓고 부처님은 부담스럽다고 모시지 않으니 우리가 무엇을 중시하는지 알게 합니다. 『자경문』에 “배각합진(背覺合塵), 깨어있음을 등지고 허망한 것 들과 더불어 살려고 한다”는 말씀이 요즘의 우리에게 주는 일침이 아닌 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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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단을 차리고 불상을 모시든지 탱화를 모시든지 아니면 둘 다 모 시든지 했다면 이제 관상을 합니다. 앉으면 내 눈높이에서 조금 위로 단 을 쳐다보게 되어있습니다. 집중하고 앉아서 단을 바라보며 비로자나 자 세로 눈을 반쯤 지그시 감고 부처님께서 와 계신다, 빛으로 와 계신다, 그 대로 떠올립니다. 부분만 떠올려도 되고 얼굴만 떠올려도 괜찮고 몸 전 체를 떠올려도 좋습니다. 처음에는 떠올리는 것이 안 되니까 한 부분만 떠올리기도 합니다. 부처님이나 보살의 얼굴 부위만 집중하면 얼굴 부위 가 그대로 10분, 20분, 30분, 한 시간 또는 이틀, 사흘, 살아계신 모습과 같이 떠오릅니다. 정신이 흐트러지면 그 상이 사라져버리고 정신이 또렷 하게 집중되면 그 상이 유지됩니다.

 

티베트에서는 많은 스님들이 탱화를 그립니다. 우리도 탱화를 그리면 서 사불(寫佛)한다고 합니다. 사불하면 좋다는 말을 듣고 따라 하는데 어떤 의미로 좋은지를 알아야 합니다. 색을 칠하고 선을 그리는 것이 관 상할 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좋다는 것이고 그것이 관상의 기초가 됩니 다. 티베트 스님들이 탱화를 잘 그립니다. 한 선도 틀리지 않게, 한 색도 틀리지 않게 그리려고 하다 보니 탱화기법이 좋습니다. 관상할 때 잘못 관상하면 안 되니까 법에 맞게 그리는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께서도 그 냥 길거리에서 장사하는 이에게 탱화를 그려서 가지고 가면 잘못됐다고 사인도 안 해주고 점안도 안 해주십니다. 관상하는데 도움이 안 되기 때 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상에 집중하면 좋은 현상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도 없으면서 ‘상에 집중하는 것은 외도들이나 하는 엉터리 짓’이라고 비판하는 사람 들이 있습니다. 화두를 하면서 각자의 업력에 의해서 다른 것이 보이거나 눈을 감고 집중해서 다른 상이 보이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지만 관상 수행에서 불보살의 상을 관하는 것은 잘못된 수행이 아닙니다. 화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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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하는 경우는 부처님에 대한 공경의 마음이 좀 사그라질 수 있습니 다. 물론 부처님께서 위대한 깨달음을 이루셨다는 공경을 가지고 출발했 겠지만 자칫 잘못하면 부처의 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갖기 쉽습 니다. 지금 한국의 불교에는 그런 경향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불보살님 께 공양하고 예경하고 상에 집중하면 깨달음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 이 더 커집니다. 관상이 더 깊어지면 하루, 이틀, 사흘씩 그대로 집중이 유 지됩니다. 이런 힘이 생기면 보살초지에 들어가 번뇌가 떨어지면서 보신 을 친견하기도 합니다. 관상의 힘이 이렇게 강력합니다. 이것이 대승불교 권에서 오랫동안 해온 사마타 방식입니다. 호흡법이나 화두 등 다른 수 행을 하는 분들이 관상법을 별 의미 없다고 하거나 마군의 장난이라고 까지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관상 수행을 통해 많은 분들이 도를 성취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이 방법을 소개하는 이유는 어 떤 수행을 하건 간에 집중이라는 원리가 같고 번뇌가 떨어진다는 결과도 같다는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수행 방법을 모르면서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법을 훼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밀교의 관상법입니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에게 계를 주기 전 에 집중 관상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관세음보살 관정을 한다면 본존 인 관세음보살을 깊이 관해서 내가 관세음보살의 대리자가 되어 부촉을 받습니다. 달라이 라마께서도 수계하실 때는 두세 시간 정도 집중 관상 을 하고 나서 천수관정을 주십니다. 이 방법은 집중을 통해서 본인이 관 세음보살의 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 빛으로 여기에 와 계시 고 내가 보살의 심부름꾼이 되어 보살을 대신해서 중생에게 관정을 내리 겠다고 하는 것으로서 대체로 밀교의 스승들이 쓰는 방식입니다. 관세음 보살만이 아니고 다른 보살을 관상해도 됩니다. 관상수행자는 불보살을 친견하기도 하고 꿈에서 보는 경우도 있는데 꿈이지만 흐릿하지 않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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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쫑카파 스님께서는 여러 날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법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신라나 고려 때 그런 방법이 있었는데 이제는 사라 지고 없습니다. 금산사 진표 율사에게 미륵보살께서 직접 현전했다는 기 록이 있습니다. 보신을 직접 뵙고 말씀을 듣는 일은 이 사마타 수행을 통 해서 가능합니다. 부처님께서 여러 방법을 통해 사마타에 집중하고 다음 수행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을 내가 모른다고 해서 부정하 는 것은 어리석은 짓임을 알아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세 가지에 한 가지 더 소개할 것이 있습니다. 초전법륜 때부터 부처님께서 성문들에게 제시한 호흡법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 히 비파사나로 이야기되고 남방에 가서 배워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호흡 법은 기본적으로 호흡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주의할 점은 호흡을 조절하 는 것이 아니고 호흡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비로자나 자세 그대로 앉아 서 들숨과 날숨에 마음을 집중시킵니다. 관상이나 화두나 염불이나 일점 에 집중했던 방식을 호흡에 그대로 합니다. 호흡법을 비파사나라고 하는 사람들은 한쪽만 이야기한 것이고 사마타와 비파사나가 함께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사마타가 된 다음에 비파사나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비파사나이고 그러기 위해서 먼저 호흡관을 통해 집중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호흡관은 들숨, 날숨을 코끝에서 관찰하는 방법입니다. 하단전 관찰이 아니고 코끝이란 장소가 중요합니다. 코끝의 숨이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그대로 관찰하는 이유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양쪽 으로 분별심이 일어나는 것을 제어하기 위해서입니다. 들숨과 날숨은 자 연 상태로 둡니다. 호흡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 는 가운데서도 자연히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일부러 조절할 필요가 없고 호흡을 그대로 둔 채 관찰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분별이 가라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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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마음이 하나로 통일되면서 집중이 됩니다.

 

이상에서 화두, 염불, 일점수행, 관상, 호흡 등 다섯 가지의 사마타 소 의처를 소개했습니다. 이 방법들이 지금까지 불교 안에서 전승되어온 집 중수행의 방법입니다. 우리나라는 화두와 염불을 주로 해왔고 지금은 남 방에서 호흡이나 비파사나를 들여와서 수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 섯 가지를 다 하라는 것이 아니고 한 가지만 선택하십시오.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이끌어 줄 스승이 필요하기에 반드시 스승을 두어야 합니다. 스 승에게 방법을 정확하게 배우지 않고 혼자서 하면 잘못될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여러 방법에 대해 두루 이해하면 남의 수행법에 편견을 가지고 비난해서 불법을 훼손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여러 가지 소의처에 대해 전체적으로 이런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취지에서 소개했으니 지금 이야기한 정도를 가지고 구체적인 수행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직 접 수행을 하려면 보다 자세한 공부와 지도를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 가지에 집중해서 번뇌가 끊어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사마타 수행의 요 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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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장

수행의 걸림돌

 

수행을 예비 수행과 본 수행으로 나눠볼 때 사마타와 비파사나가 본 수행입니다. 예비 수행을 지나서 본 수행부터가 본격적으로 번뇌가 끊어 지는 최종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바라밀의 경우 앞의 보시, 지계, 인욕, 정진까지는 예비 수행에 해당합니다. 예비 수행이라고 하니까 ‘별 것 아닌가 보다, 안 해도 되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수영할 때 준비 운동을 안 하고 들어가면 심장마비가 일어나 는 것처럼 예비 수행은 반드시 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예비 수행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물에는 안 들어가고 매일 바깥에서 맨손체조만 한 다면 수영하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 중에 무엇이 주이고 무엇 이 부인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후인지를 가려서 해나가야 합니다. 오 늘은 예비 수행과 본 수행의 관점에서 사마타와 비파사나에 관해 말씀 드리고 이어서 수행에 방해가 되는 몇 가지 마음에 관해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사마타를 통해서 집중이 이루어지면 그다음에 비파사나, 즉 관을 통해 서 번뇌가 깨집니다. 마지막 일어나는 번뇌까지 완벽하게 깨버리는 것이 비파사나인데 비파사나는 순간에 알아지는 것이라 오랜 수행이 필요치 않습니다. 물론 그 앞의 예비 수행들이 잘 되었을 때 그렇습니다. 경을 철 저하게 보고 깊이 사유해서 얻은 정지, 정견이 본 수행의 바탕이 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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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옥스님 설법집_행복수행론-2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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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정견을 비롯해서 팔정도에는 정(正)이 여덟 개나 되는데 그것은 ‘부처님 말씀과 같다’는 뜻입니다. 정견은 부처님 말씀과 똑같은 견해를 가졌다는 뜻이지만 견해가 같아도 실제로 번뇌가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가까운 예로 건강을 위해 술 먹지 말라는 부인의 이야기가 백번 맞지만, 오랫동안 술을 먹어온 남편은 술을 끊지 못합니다. 그것처럼 부처님의 견 해가 다 맞더라도 수천 겁을 살아온 습성 때문에 ‘말씀은 말씀이고 나 는 나고’ 이렇게 살아갑니다. 습성이 달라도 우선 생각이 부처님과 같아 야 합니다. 그렇게 정견이 일어나고 나아가 부처님 가르침과 같은 선정, 부처님 가르침과 같은 지혜, 즉 정과혜를 수행하여 이루게 됩니다.

 

예비 수행을 한 뒤에 사마타와 비파사나로 들어가는데 사마타에 의해 서도 번뇌가 100% 끊어지지는 않습니다. 집중이 되면 안에서 오락가락 하는 것이 다 거두어지는데 그러나 속에 잠재해 있던 습이 불쑥 튀어나 오기도 합니다. 이때 앞에서 얻은 바른 견해와 사마타의 집중으로 ‘이 생 각이 잘못됐구나.’하고 탁 끊어집니다. 그래서 이것을 ‘금강반야’ 또는 ‘마하반야’라고 합니다. ‘금강’은 벼락이라는 뜻이고 ‘마하’는 크다는 뜻입니다. 모든 번뇌를 벼락처럼 다 깨버리는 완벽하고 큰 지혜, 이것이 비파사나입니다. 비파사나로 “오온개공(五蘊皆空)”, 오온이 공함을 보면 나에 대한 집착이 끊어집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목적은 탐진치 번뇌를 깨 는 것이고 그 번뇌는 ‘나’의 집착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공성을 체험하 면 무아가 됩니다. 영원성을 가진 그 무엇도 오온 안에 없습니다. 용수보 살의 『중론』도 모든 것이 서로 인연 따라 일어나고 사라질 뿐 영원성을 갖고 있는 자체 성질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 오온이 공하다고 하셨습니다. 색수상행식에서 식이 마음인 데 마음의 그 어떤 것도 안에 실재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고, 진짜 그렇게 되는 수행은 이 사마타와 비파사나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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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상을 나투실 때는 항상 가부좌로 앉아 계신 모습입니다. 만약에 베풂 이 주 수행이었다면 무언가를 주는 상이 나왔을 것입니다. 선정만 이루 어지면 비파사나는 순간입니다. 앞에 정견이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 사마 타가 이루어지면 순간순간 다 깨지는 것이 비파사나입니다. 사마타가 되 었다 하더라도 잠깐 일어나는 것이 있으면 비파사나에 의해서 ‘아니구 나’하고 벼락 때리듯이 순간에 딱 깨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수행하지 않 으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더라도 그 습이 오래갑니다. 서로 싸우고 나서 도 왜 싸운 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가기 때문에 중생이고 도인들은 바로 알아차립니다. 멀리 둘러서 알지 않고 시간이 지나서 알지 않고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사마타와 비파사나, 본수행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선 수행에 들어가면 잘 안되는 것이 많습니다. 첫 번째가 마 음을 붙들어 매는 것이 안 됩니다. 형체가 있어야 잡고 붙들어 매지 않겠 습니까? 마음은 오직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마음은 자기 마음대로 라 마음의 주인이라고 하지만 원하는 대로 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마 음을 제멋대로 되지 않게 말뚝을 박아서 붙들어 매는 것을 선이라고 합 니다. 본 수행에 들어가서 마음을 한 곳의 소의처에 붙들어 매기가 힘든 이유는 습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태까지 무엇으로 살았습니까? 원효 스 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삼독번뇌(三毒煩惱)로 위자가재(爲自家財)요.” 탐 진치 삼독으로 살림살이를 삼았습니다. 평생 돈 벌고 시집, 장가가서 자 식 낳고 집 한 채 사는 것을 목표로 살았습니다. 통장에 동그라미가 늘 어나서 바라던 집 한 채 사고, 한 채로 부족해서 두 채, 세 채 사고 땅 투 기해서 시세차익을 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을 잘 산다고들 합니다. 어디 가 끝인지 모르고 욕망을 좇아서 탐진치를 집안의 보배로 삼는 것이 습 관이 되었습니다. 탐욕이 채워지지 않으면 성질을 내고, 조금이라도 손해 보면 고소·고발하고, 언제쯤 욕심이 채워질까 매일 점이나 보러 다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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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어리석은 짓은 다 합니다.

 

절에 다녀도 수행할 생각 없이 복을 빌러 다닙니다. 중생을 위해 내 것 을 버려야 불자가 아니겠습니까? 사마타를 하라고 권하면 그것이 어디 에 좋다면서 무슨 보약처럼 생각합니다. 절하면 좋다고 무조건 따라 합 니다. 그저 좋다고 하면 안 가리고 할 정도로 욕심을 부립니다. 내 몸에 좋나, 내 욕심을 채워주나, ‘나’를 중심에 두고 따지고 욕심대로 안 되면 화가 나서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현재 우리 불자들은 욕심 버리는 일을 잘 안 합니다. 어디 기도처에 가 봐도 ‘욕심 을 버리도록 부처님 앞에 서원합니다.’ ‘화와 분노를 안 내도록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중생을 도와주겠습니다.’ 많고 많은 기 원문 중에 이런 것은 없고 그저 합격, 돈, 건강, 승진 같은 것만 기원할 뿐 입니다. 『보왕삼매론』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마라.” 했습니다. 병이 들면 보살은 ‘일체 중생의 병이 나 아픈 것으로 인하여 다 없어지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수행을 할려면 보살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선 수행을 하려면 깨끗한 믿음과 서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현실은 선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선을 통해 몸 건강과 정신 안정만을 기대합니 다. 서양 사람들도 선에 관심은 있지만 의심이 많아서 스승의 말도 잘 안 믿습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다람살라에서 한의사가 침을 놓아 아 픈 사람을 치료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랜 경험으로 침 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다른 나라 사람 들은 침도 맞고 봉사도 하는데 미국 사람 하나는 와서 들여다보고 물어 보고 한 달을 왔다 갔다 하다가 그냥 가버렸습니다. 이해가 안 된다는 얘 기인데 의심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의심하면 시도조차 할 수 없 습니다. 시도를 해도 ‘좀 해보니까 좋더라.’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번뇌 가 끊어진 상태를 조금이라도 겪어봐야 합니다. ‘아, 욕심과 집착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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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큼 내려놓으니까 얼마나 편한가. 중생을 위하는 마음이 더 강하게 일 어나는구나.’ ‘중생무변서원도’가 안 되면 선도 안 됩니다. 번뇌를 끊기 위해서는 삼귀의와 사홍서원이 수행법의 핵심이 됩니다. 삼귀의는 스승 과 법을 따르겠다는 것이고 사홍서원은 일체중생을 위하고 번뇌를 끊겠 다는 것 아닙니까? 삼귀의와 사홍서원이 수행의 근본 틀입니다.

 

예비 수행을 통해 바른 견해가 생겼다 해도 본 수행에 들어가 사마타 를 해 나가는데 방해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 면 제대로 해나갈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는 해태(懈怠), 게으름입니다. 밥은 집에서 해먹든 나가서 사먹든 하루에 세 끼를 챙겨 먹습니다. 나가서 사먹어도 밥값을 버느라 많은 시간을 투 자합니다. 집에서 해 먹는 경우는 시장 보고 요리하고 먹고 치우는 데 두 세 시간씩 걸립니다. 하루에 먹는 데 드는 시간이 적지 않습니다. TV도 매일 먹는 방송을 내보냅니다. 먹는 것은 싫증을 안 내고 그렇게 부지런 히 하면서 선은 하루에 20분만 하라고 해도 못 한답니다. 저번에 누가 와 서 “꿈을 꿨는데 스님이 와서 또 호통을 쳤어요.” 그러기에 “그대가 안 했구먼.” 그랬더니 수행은 안 하고 마음에는 계속 부담이 되었답니다. 그 러니까 꿈에 나온 것이죠. 나는 안 갔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수행이 삶에 얼마나 소중한지 그 가치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예 를 들어 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 슬라브족들이 사는 곳은 해가 잘 뜨지 않아서 어쩌다 햇볕이 나면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해가 나면 근무를 하 다가도 햇볕 쬐러 옷 벗고 옥상으로 올라가기도 합니다. 이런 것처럼 정 진이 내가 살 길이다, 해보니 너무 좋다 그러면 게으른 생각을 낼 리가 있 겠습니까? 그것이 좋은 줄 모르기 때문에 안 하는 것입니다. 아이 보느 라 바빠서 못하고, 무릎이 안 좋아서 못하고, 허리가 아파서 못하고, 집 에 영감이 고함질러서 못하고 등등 핑계만 댑니다. 하루종일 바빴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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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라도 수행의 면에서는 게으른 것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에게 해태심은 심각한 문제인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기도처에 가서 복을 빌면 돈을 좀 벌까? 어디 부적이 영험이 있다던가?’ 그런 생각이나 하니까 실 제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게으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선하는 데 무슨 돈이 들어갑니까? 우리는 수행에는 시간을 내지 않으면서 돈 버는 데는 시간과 돈을 다 투자합니다. 집, 땅, 주식, 달러를 안 가리고 심지어 지금은 가상화폐라고 하는 비트코인에 투자하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허망한 데에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 고 잘못해서 다 잃고 나면 죽겠다고 괴로워합니다. 그러면서도 돈 한 푼 안 들어가고, 진짜 행복을 가져올 수 있고, 시간 조금만 내면 되는 일은 안 하니까 그것을 게으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방해하는 첫 번째 요인이 게으름입니다. 핑계대지 말고 꾸준히, 부지런히 선정의 근육을 키 우고 지혜의 근육을 키워서 ‘내가 잘못 살지 않아서 악한 인과에 떨어지 지 않고 결국 부처님처럼 성불해서 이 세상의 윤회로부터 완벽하게 벗어 나겠다.’ 이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두 번째 방해 요인은 불신(不信), 불법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돈은 다 믿습니다. 연세 드신 분들도 돈이 있어야 자식과 손자들이 온다고 말합 니다. 경험을 통해 돈의 효과를 알기 때문에 돈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불에 관해서는 의심을 내고 번뇌가 사라진 경계에 대해서는 안 믿습니 다. 사마타 수행을 해서 번뇌가 끊어지면 이 세상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 찾아옵니다. 그것을 경에서는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 득 쌓아놓고서 베푸는 것도 이 행복에 비하면 천만 분, 억만 분의 일도 안 된다고 천문학적인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실제 그런 경계가 있고 그 방법을 통해 성불하신 분이 있습니다. 부처님 자체가 실험을 통해서 증명된 사례이고 그 방법을 부처님께서 자세하고 정확하게 말씀해 놓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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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그렇게 한다고 과연 될까?’ ‘나 같은 사람이 성취 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2,600년 전 분이고 지금은 세상이 얼마나 달 라졌는데.’ 하면서 이런저런 이유를 댑니다. 그러나 사람은 달라진 게 별 로 없습니다. 번뇌가 일어나고 고통을 겪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 니다. 수레 타고 다니다가 자동차 타고 다니게 된 정도일 뿐 마음은 근원 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부 처님께서 제시하신 방법이 지금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불신은 번뇌를 끊 는 데 처음부터 장애가 됩니다. 부처님 법을 믿지 않고 부처님이 근본 스 승임을 믿지 않고 도를 이룬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으면 수행을 시작할 수 없고 번뇌를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불자가 아닙니다. 사마타 를 할 때는 딱 틀고 앉아서 부처님에 대한 믿음과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확실해야 하고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의 행법을 그대로 따르면 깨달음으 로 간다는 확신이 서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도의 근원”이라 했으니 불 신은 수행에 매우 큰 문제가 됩니다.

 

세 번째 방해 요인은 혼침, 가라앉음입니다. ‘어두울 혼(昏)’은 바른 견 해로 정확하게 구분이 안 되는 혼미한 상태를 뜻하고, ‘가라앉을 침(沈)’ 은 마음이 침체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세속의 삶에서도 순간순간 선택이 주어지고 분별력을 가지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려야 합니다. 하물며 수행하는 사람은 끊어야 할 것과 키워야 할 것을 명확히 구분해야 하는데 혼미한 상태에서는 그것이 안 됩니다. 지금 정진을 하다가 ‘이거 뭐 꼭 해야 하나? 다리도 아픈데 굳이 계속해 야 하나? 정진 안 해도 다른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살더라.’ 이런 생각이 든다면 구분을 못 하는 사람입니다. 정진을 안 할수록 나중에 가면 ‘나 이 들어서 이까짓 거 왜 하고 앉아있나.’ 하고 점점 수행에서 멀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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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혼이라고 합니다. 혼미한 가운데 침은 마음이 가라앉는 것입니 다. 나이 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울증 비슷하게 오고 두려움도 오고 의심도 생깁니다. 그러다보면 ‘에이 모르겠다.’ 하고 쉽게 포기하게 됩니 다. 마음이 고양이 안 되니까 잠이 오고 자꾸 누워 있으려고 하니 그럴 수록 자꾸 혼침이 와서 깨어있지 못합니다. 혼미함이 깊어지면 잠이 되고 이것을 혼침이라고 합니다.

 

혼침이 오지 않도록 막으려면 소의처에 집중해야 합니다. 집중이 잘 될 때는 혼미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눈을 감고 앉아 있는데 그것 자 체가 혼침입니다. 예로부터 스승들이 눈을 감고 하지 말라고 일러주셨습 니다.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처음에는 잘되는 것 같지만 혼침에 빠지고 또는 뭐가 보이기도 하고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염불을 해도 자꾸 졸 립니다. 입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는데 혼침이 와서 관세음보살 은 어디 가버리고 없습니다. 그러면 편안해지는데 그 상태를 명상이라고 착각합니다. 혼침에서 오는 편안함으로는 번뇌가 안 끊어지기 때문에 혼 침이 자꾸 오면 굉장히 심각해집니다. 그러므로 염불하는 사람은 소의처 에 집중해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입으로 부를 때 생각이 거기에 같 이 가줘야 하고, 화두를 하는 사람은 의심에 집중해서 화두가 성성(惺惺) 해야 합니다. 성성은 화두가 또렷하게 들려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염불 을 하든지 화두를 들든지 마음이 소의처에 성성하게 머물면 혼미함이 사 라집니다.

 

네 번째 방해 요인은 도거(掉擧), 들뜸입니다. 혼침과는 반대로 마음이 들떠서 안정이 안 되는 상태입니다. 주로 눈 뜨고 있을 때 자꾸 무슨 생 각이 납니다. ‘김치 담으러 가야 하는데’ ‘어디 놀러 가야 되는데’ ‘공부 는 갔다 와서 하지, 뭐.’ 이렇게 집중을 벗어난 마음은 말뚝을 벗어난 소 처럼 이리저리 헤맵니다. 이렇게 계속 들뜨면 공부를 못 할 장애만 생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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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혼침이 와도 공부를 못하고 도거가 와도 공부를 못하니 이 두 마 음이 같이 없어져야 합니다. 오로지 소의처에 정확하게, 정밀하게 집중하 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 힘이 그냥 생기는 게 아닙니다. 이 화두를 타 파해서 중생을 건지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해야 힘이 커져서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앉아 있을 뿐입니다. 도거심이 계속 일어 나면 ‘부처도 별거 없는 거 아닌가?’ 그런다던지 ‘이미 깨달음인데 그걸 할 필요가 뭐 있어?’ 그런 생각이 듭니다. 보조국사 같은 경우도 깨닫기 전에 한 번 깨달았다고 착각했던 적이 있는데 그것이 도거심 때문이었습 니다. 스승이 없었기 때문에 바로 점검하지 못했습니다.

 

소의처에 또렷하게 집중이 되면 어느 시점에 생각도 가볍고 몸도 가볍 고 편안해집니다. 그 상태를 경안(輕安)이라고 하는데 경안이 오면 이제 조금씩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혼침과 도거를 계속 반복할 때까지는 한 치도 진행이 안 됩니다. 앉아서 졸고 있다거나 천지사방으로 마음이 돌 아다니게 됩니다. 이러면 공부에 진척이 없습니다. 이 사마타를 최우선으 로 삼고 하루에 한두 시간, 두세 시간씩 시간 나는 대로 힘을 들여서 하 겠다고 마음을 내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이 마음을 조밀하게 해서 혼침 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산란심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합니 다. ‘이까짓 것 뭐하러 해? 안 해도 잘만 살던데.’ ‘윤회하는 게 있나?’ 이런 식으로 안 할 핑계만 찾으면 공부가 진척이 안 됩니다.

 

지금까지 열거한 수행의 방해 요인은 부처님 당시 초전법륜 때부터 있 었던 이야기입니다. 삿된 견해를 갖고 있거나 게으르거나 믿지 않거나 또 는 혼침이나 도거가 올 때 그것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수행을 해나갈 수 없습니다. 혼침이 오면 눈을 반개했다가도 크게 뜬다든지 화두를 들고서 얼굴을 만져준다든지 잠깐 일어서 있든지 바깥에 나가서 걷고 온다든지 그렇게해서 혼침을 떨쳐야 합니다. 또는 ‘부처님께서 일체종지를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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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좌에 오르셨구나, 얼마나 위대한가?’ 이렇게 고양을 시켜주면 가라 앉았던 마음이 일어서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극복하면서 정 진을 해나가야 합니다. 수행을 방해하는 해태, 불신, 혼침, 도거 가운데 하나라도 오면 지금 정진이 안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못하 는 핑계를 대지 말고 하다가 장애가 나타나면 하나하나 극복하고 나아 가는 것이 정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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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장

사마타의 단계, 9주심

 

보살이 보리심을 일으키고 예비수행으로 사무량심, 사섭법 등을 닦는 다고 했고 본수행으로서 사마타가 매우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사마타의 방법론과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는 소의처에 이어 오늘은 사마타의 아 홉 가지 단계인 9주심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화두, 염불, 관상, 일점수행, 호흡수행이 모두 마음을 집중시키는 소의 처인데 이것을 다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중에 가장 익숙한 방법이나 지 도해줄만한 스승이 있는 소의처에 집중해서 공부하는 것이 좋습니다. 몸 은 형체가 있기 때문에 어떤 의지처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 리가 잠을 잘 때는 침대에 몸을 의지하고 다리 아픈 사람은 지팡이에 의 지하고 서 있을 때는 두 다리에 의지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한 곳에 두기 어렵습니다. 마음은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바깥 경 계와 감관이 만나면서 의식이 발생합니다. 마치 아지랑이처럼 생겼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자기 멋대로 일어난 마음을 구속시키려고 해도 구속시 킬 방법이 없습니다. 한용운 스님이 “너희들이 내 몸은 이렇게 구속을 시 키더라도 내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듯이 형체 없는 이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옛날 인도의 외도들은 사마타를 통해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만 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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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가라앉히다 보니까 반드시 혼침에 빠지게 되어있습니다. 아주 미세 한 혼침에 들어가서 나중에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내가 지금 살아있는 건지 죽어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데까지 갔습니다. 이 경계를 비상비비상처정이라고 합니다. 이 정도로 깊이 들어가는 선정 을 완성으로 여기지 말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선정 에서 나와서 본 상태로 돌아오면 욕심이 다시 일어나고 고통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끊어지고 번뇌가 끊어진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부처 님께서는 6년 동안 해보시고 그 방법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번뇌 가 끊어지게 하는 방식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제껏 그 누구도 알지 못했 던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어떤 의지처를 만들어서 마음을 거기에 집중시 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선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소의처가 있느냐 없느냐를 보면 됩니다. 브라흐만교나 이슬람권, 그리스, 이집트, 중국 쪽 에도 명상이 있지만 불교의 선과는 다릅니다. 불교국가라고 하더라도 부 처님 가르침대로 하지 않고 외도의 방법을 따르면서 그것이 마치 불교인 것처럼 착각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소의처의 유 무입니다. 마음을 붙들어 맬 수 있으려면 소의처가 분명히 있어야 합니 다. 소의처가 없으면 반드시 혼침이 오기 때문입니다. 혼침이 심하게 와 서 결국에는 그 혼미 자체를 마치 깨달음이라고 하거나 브라흐만교에서 말하는 ‘진아’로 여기게 됩니다. 이런 부작용을 없애는 가장 혁신적인 방 법이 소의처를 두는 것입니다. 소의처는 마음이 의지하는 대상이라 합니 다. 부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소의처에는 호흡과 명호주력과 관상이 있습니다. 화두나 일점수행은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중국의 선종과 티베트의 까규파에서 이 소의처를 통해 많은 도인이 나왔 습니다. 그 도인들이 깨닫고 나서 두 소의처가 실제로 파워풀한 도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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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고 확인한 내용입니다.

 

소의처의 종류와 내용을 알았으면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됩니다. 다섯 가지를 다 하라는 것이 아니고 이것저것 옮겨 다니면서 해도 안 됩니다. 이것은 행법이기 때문에 분명히 먼저 그 길을 통과한 스승에게 지도를 받 아야 합니다. 교리도 물론 스승이 정확하게 설명해줄 필요가 있지만 행 법은 더욱 그렇습니다. 안내자에 의지해서 가고 소의처에 의지해서 가는 것이 행법이기 때문에 스승 없이 공부하면 일정 부분은 될지 몰라도 바 르게 나아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보조국사 같은 분도 스승 없이 했기 때문에 한 번 실수를 했습니다. 번뇌가 다한 줄 알았는데 한 달, 두 달 지나 보니까 번뇌가 다시 일어난 것입니다. 그분은 교학을 철저히 했기 때문에 바른 알아차림이 있어서 잘못을 점검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마타와 비파사나가 아니고서는 마음속의 번뇌가 끊어지지 않습니 다. 그래서 이것을 본수행이라 하고 그 앞에는 예비수행이라 합니다. 우 리가 계율을 지키면 번뇌가 다 끊어집니까? 거친 바람은 끊어져도 마음 속의 것은 안 끊어집니다. 교리를 알면 번뇌가 다 끊어집니까? 옛날 노스 님들이 “거꾸로 외우고, 위로 외우고, 옆으로 외우더라도”라고 하신 것 처럼 경을 통달해도 실제로 번뇌가 끊어졌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최종 적으로 이 번뇌를 끊기 위해서는 소의처에 일념으로 집중하는 훈련이 필 요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외도들은 소의처를 두지 않기 때문에 번 뇌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가라앉는 상태를 추구합니다. 그러한 혼침은 수면에 해당하고 조용한 상태가 다하면 다시 번뇌가 일어 납니다. 독에 구정물을 떠놓고 가만히 놔두면 가라앉지만 막대기로 휘저 으면 다시 올라오는 것과 같습니다. 독의 밑바닥이 완전히 깨져서 물과 그 안의 흙이 다 내려가야 속으로부터 번뇌가 다 꺼집니다. 따라서 앉아 있으면 좀 편안해진다고 하는 이야기는 선의 본질과 관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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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복잡한 양상으로 일어납니다. 『유식론』과 『구사론』에서는 그 작동원리를 오위백법(五位百法)과 오위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으로 설 명합니다. 유식에서는 일체법을 다섯 가지로 나누고 거기에 딸린 심리적 현상을 100가지로 분류했는데 심왕(心王)과 심소유(心所有)입니다. 심소 유법은 대상을 향해서 일으키는 마음이고 모든 번뇌가 다 여기에 들어갑 니다. 심왕법은 변치않는 마음의 본질이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은 나중 에 공성학파에 의해 오류로 지적받았지만, 식학에서는 이 심왕 중에 아 뢰야식을 본래부터 있던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만, 여기에는 좀 문제가 있습니다. 아뢰야식은 본래부터 있던 것이 아닙니다. 요즘 얘기로 하면 무의식인데, 무의식도 본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삶을 반복하면 서 이루어진 아주 깊은 업의 기록입니다. 아주 많은 기억을 저장하고 있 는 아뢰야식은 나머지 일곱 가지 식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백 가지 법을 전개합니다.

 

이 복잡한 마음 작동을 간단하게 추리면 양쪽 끝, 양변(兩邊)이 됩니 다. 우리는 유(有)와 무(無), 단멸(斷滅)과 상주(常住)를 왔다 갔다 하거나 한쪽을 고집합니다. 고집하거나 흔들리거나 그 중심에는 ‘나’라는 것이 있어서 그렇게 움직입니다. 그 ‘나’는 실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과 조 건에 의해서 착각으로 형성된 것이고 거기에 집착이 붙기 때문에 그것을 아집이라고 합니다. 그것에 의해서 수많은 선택을 합니다. 사람이나 일이 나 물건을 선택할 때 전부 ‘나에게 좋은 것인가?’를 기준으로 합니다. 내 욕심에 맞으면 좋은 사람, 안 맞으면 나쁜 사람, 그렇게 생각합니다. 객 관성과 합리성을 주장하는 사람도 무아가 되기 전에는 절대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나’를 두고서 왔다 갔다 하는 극단적인 양변의 놀이 입니다. 그래서 삼조 승찬 스님이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취사선택하 는 마음만 없으면 된다(至道無難 唯嫌揀擇).”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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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으로 좋다 싫다 구분하는 그 마음이 없어져야된다는 말씀입니다.

 

물리학에서도 전자에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있다고 합니다.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나타나야 중간자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자석에도 N극 과 S극이 있어야 자석의 기능을 합니다. 희한하게도 한 극만 나타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한 극이 사라지면 다른 극도 사라집니다. 자석이 안에 자장을 띠지 않게끔 만들면 두 극이 다 사라집니다. 사회과학도 마찬가 지입니다. 한쪽 끝에 진보가 있고 다른 한쪽 끝에 보수가 있습니다. 그 중간 어디에 중도가 있습니다. 양극이 없다면 중도도 설 자리가 없습니 다. 물리학의 원리나 사회과학의 원리나 선의 원리나 같은 점이 있습니 다. 이런 원리를 우리의 삶에, 우리의 마음에 적용시켜볼 수 있습니다. 특 히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속의 양극을 관찰하고 없애는 데 이 원리 를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속에서 좋다 싫다 하는 양극을 없애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없애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서 없어지겠습니까? ‘나’라는 것이 실제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브라흐만이 주장하는 아트만, 영원성을 띤 특수한 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있 다고 생각하는 ‘나’는 착각에 불과한데 그 착각을 기반으로 좋다, 싫다 하는 분별을 냅니다. 선악도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한테 잘해주면 선한 것이고 나한테 못해주면 악한 것으로 판단합니다. 여기서 ‘나’라는 것을 빼버리면 내가 없기 때문에 나한테 잘해주니까 선이고 나 한테 못해주니까 악이다, 이런 것이 없어집니다. 선과 악이 없어진 그것 이 도(道)이고 선(禪)이며 중도입니다.

 

지금 선을 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는 것을 추구하는 경 향이 있습니다. 아니면 빛이 보인다든지 하는 체험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우리 몸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옛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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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 스님이 말씀하셨듯이 그런 것을 가지고 수행의 단계라고 이야기하 면 정말 우스운 일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신기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눈으로 저 바깥을 보고 붉은색이다, 노란색이다, 꽃이 피었다, 그걸 아는 것입니다. 그만큼 신기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이 참으로 신기하고 소중한 줄은 눈이 안 보일 때 압니다. 정작 보일 때는 너무 당 연해서 알지 못합니다. 선 수행을 하려면 선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과 바 른 견해를 갖고 있어야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생겨야 바른 방법을 가지 고 실행할 수 있습니다.

 

한편 서양 사람들은 선을 개발한다면서 명상에 이런저런 이름들을 붙 여놓는데 그것으로는 번뇌가 안 끊어집니다. 선의 목적은 나에서 비롯한 오락가락하는 번뇌, 나라고 생각했던 이것을 끊어내는 것입니다. 선을 해 서 진아(眞我)를 본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라는 착각이 다 사라져 버린, 실제 오온이 공함을 보는 것을 진아라고 한다면 그 말이 맞을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내가 있고, 불성이 있고, 이것을 발견해야 된 다는 주장은 브라흐만이나 외도의 논리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마하리쉬, 크리슈나무르티, 라즈니쉬 같은 힌두교 파가 되는 것입니다. 불교를 힌 두교로 만들어놔서야 되겠습니까? 선은 오온이 공하다는 사실을 확인 하는 작업입니다. 본래 영원한 자성이 없고 내가 없음을 알고, 마음이라 는 것도 나라는 것도 근거가 없음을 확인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화두 하는 사람들은 사구(死句) 말고 활구(活句)를 참구하라고 합니 다. 사활은 죽고 산다는 뜻인데 화두를 든다고 무조건 활구는 아닙니다. 번뇌가 안 깨지는 방식이나 외도의 선이 사구입니다. 화두를 잘못 들면 사구이고 화두의 목적을 모르고 들면 사구입니다. 관념으로 지어가는 것 도 사구로서 죽은 참구입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표현은 번뇌가 계속 일 어난다는 뜻이고 산다는 표현은 번뇌가 다 사라져서 진짜 삶을 산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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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입니다. 누군가 호흡관을 사구라고 한다면 잘못된 구분입니다. 호흡 관도 번뇌가 끊어지게 하면 활구가 됩니다. 번뇌를 다하게 하는 것이 사 람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사람을 살린다고 했 을 때 그것은 번뇌를 끊고 제대로 살게끔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한다고 하지만 사마타를 해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사마타의 근육, 정신적 힘이 쉽게 생기지 않습니다. 계속하려고 애를 써 도 관성이 있어서 흩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뚝신심으로 처음부터 죽 자 살자 잠도 안 자고 용맹정진하다가 포기하기도 합니다. 한 번에 들어 갈 수 없기 때문에 먼저 집중의 단계들을 하나하나 이해해야 합니다. 이 단계를 이해하면 지금 내가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왜 앞으로 못 나가는 지 알 수 있습니다.

 

본 수행인 사마타와 비파사나는 ‘지관’입니다. 보조국사께서 주창한 ‘정혜쌍수’와도 같은 내용입니다. 정(定)과 지(止)는 사마타, 혜(慧)와 관 (觀)은 비파사나로서 말만 다를 뿐 같은 내용입니다. 부처님께서 많은 경 전 속에 사마타와 비파사나를 말씀하셨고 육바라밀의 선정바라밀과 반 야바라밀이 곧 사마타와 비파사나에 해당합니다.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 나 인도, 중국, 한국 할 것 없이 시대와 지역의 차이를 넘어서 사마타와 비파사나의 방법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사마타와 비파사나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수행해야 하는가 하면, 사 마타가 먼저입니다. 사마타가 이루어지지 않고서 비파사나를 하면 그것은 앎에 불과합니다. 사마타는 마음을 일념이 되게 하는 수행인데 마음이 일념이 되지 않고서는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 기초 가 되는 것은 사마타입니다. 사마타를 하기 위해서는 10선행을 닦고 무 엇보다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고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이 따라야 합니다. 보리심을 일으켜 수행할 때 그 행이 보살행이 되고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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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행이 육바라밀입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4바라밀은 예비수행이고 선정과 지혜 즉 사마타와 비파사나는 본 수행입니다. 지와 관의 수행 순 서는 선정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사마타 집중만으로는 번뇌가 완벽하게 끊어지지 않고 그다음에 비파사나가 이루어져야 완벽하게 끊어집니다.

 

본 수행에 들어가서 하는 사마타는 삼매라고도 하고 집중이라고도 합 니다. 소의처에 마음을 집중시켜서 오락가락 하는 생각이 없어지고 일념 이 되게 만듭니다. 그것을 선이라고 합니다. 소의처를 간택할 때 ‘이걸 하 면 좋을까? 저걸 하면 좋을까? 이게 더 좋겠구먼.’ 하면 그건 벌써 산만 심이고 간택심입니다. 화두를 들던 염불을 하던 하나를 가지고 소처럼 계 속 뚜벅뚜벅 해나갑니다. 집중의 단계가 깊어질수록 ‘선에 들어간다’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집중수행을 해나가는 과정을 옛날 나란다 대학의 큰 스님들께서 아홉 단계로 나누어 9주심(九住心)이라고 했습니다. 주(住) 는 마음이 머문다는 뜻입니다.

 

그중에 첫 번째가 내주심(內住心)인데 이제껏 바깥으로 향하던 마음을 안으로 돌려 머물게 하는 단계입니다. 공부를 해나가는 데 계율에 대해 서 배우고 습의를 익히고 경을 통해 바른 견해가 선 뒤에 비구계를 받고 수행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는 외부 경계들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 라 마음을 소의처에 두고 바깥 경계로 갔던 마음을 안으로 돌이키는 것 입니다. 그 경계를 잘 표현한 옛 시가 있습니다. 봄이 왔다고 해서 하루 종일 봄꽃을 찾아 산천을 헤매고 돌아와서 다리가 아파 마루에 앉으니 뜰 앞에 매화 한 송이가 피었더라고 했지요. 여기가 봄인데 다른 곳만 찾 아다닌 중생심을 뜻합니다.

 

우리 중생은 행복이 전부 바깥에 있는 줄 압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좋은 차를 타고 비싼 집에 살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에는 돈이 좀 있으니까 경치 좋고 환경 좋은 데 가서 집 지어놓고 채전밭을 가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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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겠다고 하는데 그것이 진짜 행복인지 묻고 싶습니다. 사회에서 스트레 스를 받아서 혈압 오르고 병을 얻은 사람들이 가서 잠깐 쉬는 것은 괜찮 겠지만 그런다고 마음속의 번뇌가 어디 가겠습니까? 행복이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고 자꾸 바깥으로만 치닫던 마음을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 은 이제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로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뛰어난 생산력을 갖추고 수출도 많이 하고 외환보유고도 높습니다. 그러면 우 리나라 사람들이 행복한가, 이 질문을 해봅니다. 굶는 것에 대한 스트레 스는 줄었지만 자살률은 늘어나고 출생률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교통사 고로 죽거나 일하다가 재해를 입는 사람도 많습니다. 결코 안전하고 행 복한 사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난했던 때보다는 굶지 않으니까 삶에 좀 유리해졌다고는 할 수 있지만 근원적으로 행복해졌냐고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갈구하는 외부의 것은 반조각 행복도 안 되는 허망 한 것들입니다. 물건이나 재산이나 심지어는 자녀조차도 얻었을 때 잠깐 즐겁지만 오래 가지 않습니다. 이제는 그런 것을 다 무상, 무아, 고로 보 고서 바깥으로 향했던 이 마음을 안으로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사마타 의 핵심은 이것을 거두어들이는 작업을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나라는 것 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세상 모든 것이 다 인연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것을 확인하는 방식은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내 마음을 들 여다봐야 합니다.

 

마음이 안으로, 나에게로 향해서 머물러야 합니다. 안의 무엇에 머물 것인가,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소의처입니다. 마음이 바깥으로 나가면 헤 매고 돌아다니게 됩니다. 화두를 들건 염불을 하건 거기에 내가 마음을 집중하겠다, 바깥으로 치달았던 것이 전부 허망하다는 것을 내가 알겠다, 하고 안으로 돌이켜 소의처에 머무는 것입니다. 호흡이라는 소의처에 집 중하기 시작하고, 화두를 받아서 마음이 바깥으로 안 가고 화두에 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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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매서 안에 머물게 하는 것이 보살의 첫 번째 사마타, 내주심(內住心)입 니다. 염불을 할 때도 마음에서 일으킨 대상에 머물게 합니다. 염불하는 이 소리와 염불하는 명호에 마음이 머물게 하는 것이 ‘내주’입니다.

 

염불을 해서는 힘을 못 얻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잘못 알고 있 어서 그런 소리를 합니다. 소리로만 하거나 입으로는 염불을 하면서 속 으로는 ‘복 한 덩어리 주십시오.’ 하면 끝내 번뇌가 사라지는 것과는 아 무 상관이 없습니다. 근원적인 것을 모르니까 바깥으로 향하는 방식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와는 달리 사마타의 내주심은 바깥으로 향하지 않 고 마음을 안으로 돌리는 방식입니다. 사마타는 마음이 두 갈래, 세 갈래 되지 않고 하나가 되게끔 하는데 그렇게 되게 하는 것이 마음의 의지처 입니다. 화두건, 염불이건, 호흡이건 다섯 가지 소의처 중에 가르쳐 줄 스 승이 있는 하나를 가지고 하되, 집중을 안으로 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염불을 하다보면 대개는 이렇게 됩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아 이고, 꽃이 피었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아이고, 새가 우는구먼.” 자 꾸 마음이 바깥으로 나가버립니다. 안으로 해야 되겠다 다짐하면서도 그 동안의 습관이 늘 바깥에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바깥으로 나가서 꽃을 보고 새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처음 공부할 때는 화두를 들거나 염불을 하려고 해도 잘 안 됩니다. 입은 염불하면서 눈과 귀는 딴 데 가 있습니 다. ‘아, 염불소리 시끄러워서 같이 못 하겠네.’ ‘옆 사람이 졸아서 화두 못 들겠네.’ 이렇게 옆 사람을 보면서 시비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바깥 것 을 보고 생각이 바깥으로 가는데 자꾸 안으로 구겨 넣으니까 분노가 일 어납니다. 그렇게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선방에 앉혀 놓으면 벌떡거려서 못 앉아 있습니다.

 

앞의 부작용들을 충분히 이해하고서 ‘아, 이제 내가 깊숙이 안으로 살 펴서 소의처에 의지해서 들어가야 되겠다.’ 이 생각을 갖고 스승에게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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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를 받거나 염불하는 법을 배워 하나하나 뚫고 들어가려고 처음 그 끈 을 한 번 잡아보는 것, 마음이 바깥으로 치닫지 않고 안으로 들어와 머 물게 하는 것이 ‘보살 9주심’ 가운데 첫 번째 ‘내주심’입니다.

 

사마타의 9주심 중에 첫 번째 내주심(內住心)은 안의 소의처에 머물기 시작하고 거기에 머물려고 애를 쓰는 것이고 두 번째는 속주심(續住心) 입니다.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바깥으로 돌아다니려고 할 때 그 마 음을 묶어두는 것이 속주심입니다. 마치 소가 이리저리 날뛸 때 코뚜레 를 뚫어서 말뚝에 매어 놓듯이 지금 들고 있는 화두나 염불에 마음을 단 단히 매어 둡니다. 마음이 자꾸 바깥으로 치달을 때 보면 자기 업이 강한 쪽으로 치닫고 그다음에 하나씩 더해집니다. 만약에 술 먹는 업이 강한 사람이면 매일 술 생각을 할 것입니다. 술 먹으러 갈 때 기분 좋으라고 좋 은 차를 타고 혼자 먹으면 심심하니까 다른 사람도 데려가고 음주운전 하면 안 되니까 기사를 하나 둬야합니다. 이런 식으로 음주라는 강한 업 이 나오면서 여러 가지를 끌고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음이 바깥으 로 치고 나가지 못하게끔 소의처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바깥으로 치닫던 힘이 점점 죽습니다. 정진을 하라는 말은 지금 여기에 자꾸 집중을 하라 는 뜻입니다.

 

자꾸 바깥으로 나가려는 이 마음을 붙잡아서 30분이고 1시간이고 염 불을 합니다. 주력을 1만 회, 10만 회 정도 하라는 것은 집중해서 수행하 는 그 사이에 바깥으로 향하던 마음이 묶여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관세 음보살 염불과 주력을 하면 관세음보살의 명호에 마음이 머무는 것이고 바깥으로 달려가는 마음을 묶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이 나가지 못합니 다. 화두를 들거나 염불을 하거나 집중을 하면 머무는 힘이 점점 커집니 다. 염불이나 화두에 자꾸 힘을 붙여서 거기에서 다른 생각이 못 나가게 만들면 이것을 정진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바깥으로 달아나고 헤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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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마음이 약해지고 욕망이나 자극으로 치달았던 것이 끊어져서 담담해 집니다. 이것은 화두를 들든, 염불을 하든, 호흡을 관하든 마찬가지입니 다. 똑같은 원리입니다.

 

세 번째는 안주심(安住心)입니다. 이 단계에 들어가면 계속 애써 붙들 어 매지 않아도 좀 편안해집니다. 우리가 주력을 30분 한다면 그동안 다 른 것이 잠깐 잠깐 쳐들어오긴 하지만 거기에 마음이 좀 머물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해도 잘 안된다고 하는데 얼마나 했냐고 물으니 사흘 했 다고 합니다. 사흘 해서 될 일 같으면 이 세상에 부처 안 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초등학교 6년 다니고 중·고등학교 6년 다니고 대학교 4년을 다녔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모르지 않습니까? 안주심은 바깥 경계 로 크게 치달았던 마음이 서서히 꺾이기 시작해서 소의처에 집중하는 일 이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편하기 때문에 그전에 했던 여러 관 심이나 생각들이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네 번째는 근주심(近住心)입니다. 아직 사마타가 되지는 않았지만 비슷 하게 조금씩 되기 시작하기 때문에 ‘가까울 근(近)’을 씁니다. 한 5분, 10 분, 20분 이렇게 오롯이 집중이 되는 시간이 옵니다. 그런 시간이 오기 시 작하면 굉장히 편안해지기 때문에 그 사람은 눈빛의 파장이 다릅니다. 이 런 경계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은데 집중을 방해하는 산만심이 생기기 때 문입니다. 화두 들고 있는데 술 생각이 난다거나 염불하고 있는데 남편 하고 싸운 일을 두고 참아야하나 말아야하나 생각합니다. 집중을 방해 하는 산만함은 나에게서 나옵니다. 저도 토굴에 있을 때 공부가 잘 안 되 었습니다. 밥을 직접 해서 먹다보니 밥 때가 되면 ‘점심 때 뭐 해먹지?’ 이 생각이 문득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무문관 수행자에게는 그런 잡념 없이 공부할 수 있게끔 다른 사람이 밥을 해서 넣어주고 공부에 전념하 게 합니다. ‘이제 내가 소의처에 마음을 집중하겠다.’ 하고 바깥으로 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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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마음을 안으로 들여옵니다. 그러면 바깥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집에 왔을 때 잠이 오듯이 염불이 좀 된다 싶으면 졸리기 시작합니다.

 

바깥으로 치닫는 마음을 도거(掉擧), 졸리는 마음을 혼침(昏沈)이라고 하는데 이 사이를 오락가락 반복하면서 깊이 들어갈수록 혼침도 도거도 더 미세해집니다. 이런 상태가 오면 적절한 방편을 써서 없애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소의처에 집중하면 도거와 혼침을 막을 수 있습니다. 원효 스님의 『발심수행장』에 “와생해태(臥生懈怠)하고 좌기난 식(坐起亂識)이니라.” 했습니다. 누우면 그냥 혼미해지고 앉거나 일어서 면 별의별 생각이 다 난다는 뜻인데 이것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래서 번 뇌가 많고 산란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혼침이 더 옵니다. 혼침이 왔을 때는 잠을 깨야하는데 잠이 온지도 모르고 염불을 하고 있으면 다 헛일입니 다. 또 산만심으로 계속 따라가면서 무엇을 했다고 하는데 그것도 하나 마나한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진전이 없어서 번뇌가 안 끊어집니다. 오 래 참선하고 앉아있어도 나이 들면 혼미해져서 꾸벅꾸벅 졸거나 헛소리 만 하게 됩니다. “파거불행(破車不行)이요, 노인불수(老人不修)라.”, 부서 진 수레는 갈 수 없고 늙은이는 수행할 수 없다고 했으니 하루라도 더 가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소의처에 집중해야 합니다. 혼침 없이 또렷한 상태를 성성(惺惺)이라 하고, 도거 없이 고요한 상태를 적적(寂寂)이라 하고, 이것을 합해서 ‘성성적적’하다고 표현합니다. 소의처에 집중하여 고요한 동시에 또렷한 상태가 유지된다는 말이니 이렇게 되어야 번뇌가 끊어집니다.

 

다섯 번째는 조복심(調伏心)입니다. 이때는 혼미한 마음과 들뜬 마음 이 어느 정도 조절되고 극복된 상태입니다. 그래도 미세하게 혼미가 남 아있어 잠이 옵니다. 염불을 하면서 조금 혼미해지더라도 알아차리고 ‘내가 이걸 극복해야 되겠다.’ 하고 혼미를 누르고 다시 소의처로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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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니다. 산만한 마음이 왔더라도 ‘아, 허망한 생각이지’ 하고 딱 끝내버 립니다. 업연에 의해 일어났던 생각들이 조금씩 조복되어 걸어가다가도 시비하는 마음이 잠깐 일어나면 ‘아니지’ 하고 소의처로 돌아갑니다. 혼 침과 도거를 누르고 조절할 힘이 생겨서 번뇌가 줄어드는 단계가 다섯 번 째 조복심입니다.

 

여섯 번째는 적정심(寂靜心)입니다. 적정은 고요하다는 말로 번뇌와 망 상이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했을 때 적정심이 이루 어지는데 ‘적정’을 삼매의 통칭으로 쓰기도 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잠이 오는 일도 줄고 번뇌가 일어나는 일도 많이 줄어듭니다. 그러나 혼침과 산란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적정심이 이루어지고 나서 까딱 잘못하면 소의처를 싹 놔버려도 편안한 때가 있습니다. 그 편안한 상태에서 미세 한 혼침이 옵니다. 그 경계에 들어가면 화두가 안 들려도 염불이 안 되어 도 조용하니까 거기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미세하지만 강력한 혼침이 라고 합니다. 그 단계에 들어갔다가 일어나 무엇을 하거나 어디를 가거 나 하면 다시 다 일어납니다. 조용하고 편안한 상태를 즐기지 말고 항상 소의처에 집중해서 성성적적한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화두를 들면 화 두에 또렷한 의심이 있어야 하고 염불을 하면 관세음보살에 온 마음이 가 있어야 합니다. 입으로만 외우면 죽은 염불이고 벌써 혼침에 빠진 것 입니다. 바로 알아차리고 소의처로 돌아가야 반복되는 혼침과 도거를 막 을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는 최극적정심(最極寂靜心), 아주 고요한 상태입니다. 앞에서 말한 적정심이 보다 깊어진 상태입니다. 이 고요한 상태에서도 소의처는 또렷해야 합니다. 아주 깊은 상태에 들어가서 이때는 “관세음보살” 소리 만 들리는데 내가 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왔다 갔다 하는 생각이 거의 없어지고 소리만 또렷하게 들립니다. 화두도 또렷하게 들립니다. 이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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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가 들리지 않거나 소리가 또렷해지지 않는다면 혼침인 줄 알아야 합 니다. 핵심은 소의처가 끝까지 또렷하게 들려있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야만 정신이 죽어버리지 않고 혼침에 빠지지 않습니다. 깨어있는 생 각이 지속되어야 하는데 깨어있는 생각을 죽여 놓고서는 다음으로 나아 갈 수가 없습니다. 소의처에 집중하여 깨어있는 것이 선의 핵심입니다.

 

여덟 번째는 전주일경심(轉住一境心)입니다. 최극적정심을 넘어서 하나 의 경계에 안주하는 이때는 몸도 마음도 아주 편안한 경안(輕安) 상태가 됩니다. 우리가 외롭다, 괴롭다, 힘들다 하는 것은 업력에 의해 수없는 번 뇌가 발동하기 때문인데 이 단계에서는 이런 것들이 모두 없어집니다. 우 리가 밭을 깨끗이 닦아놓으면 잡초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번뇌가 일어나 지 않습니다. 밑에 씨앗은 몇 개 떨어져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 일어나지 는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무겁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무게가 있어 서 무거운 게 아니라 번뇌롭다는 뜻입니다. 우리 중생의 마음은, 사회적 으로 정상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조울증과 같이 어떨 때는 푹 가라앉 았다가 어떨 때는 들떴다가 합니다. 수행자들도 혼침과 도거를 반복하 다가 이 단계가 되면 그런 것이 없어져서 마음도 무겁지 않고 몸도 가뿐 합니다.

 

경안 상태가 되면 염불을 하거나 화두를 들거나 저절로 됩니다. 염주 들고 다니라는 소리 안 해도 염주 들고 다니면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 살” 합니다. 다람살라에 가서 보면 티베트 사람들은 신도들이건 노장들 이건 꼬라를 돌면서 염주를 가지고 항상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합니다. 우리가 지나가면서 “따시델레” 하고 인사하면 “따시델레”하고 바로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안녕하세 요?” 그러면 “다음에 한번 놀러 오십시오.” “언제 밥 한번 먹읍시다.” 쓸 데 없는 말을 덧붙이고 실제로 만나서 먹고 노느라 생활이 번거로워집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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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우리는 손에서 휴대폰이 떨어질 새가 없지만 티베트 노장님들 손에서 는 항상 염주가 떨어지지 않고 굴러갑니다. 그 노장님들 눈빛을 보면 깊 이 들어가신 것이 보입니다. 염불에 장애가 되는 상황이면 같이 있다가 도 슬그머니 일어나서 나가십니다. 누가 공부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하는 것은 그것이 좋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 마타가 이루어질 날이 멀지 않습니다.

 

아홉 번째는 평등주심(平等住心)입니다. 차별심, 양 극단의 마음이 다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평등하게 머무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왔다 갔다 하 는 마음이 나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아’가 ‘무아’인 이치에 깊이 들 어갔을 때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이 모두 사라지고, 따라서 나라는 것도 같이 사라져버립니다. 이 상태를 옛날 도인들이 “독의 밑바닥이 탁 깨졌 다, 푹 빠져버린 것 같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누가 물독을 이고 가는데 독 밑이 탁 깨져버리면 물이 확 빠져서 한 방울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독 밑이 빠진 것처럼 마음도 실제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 내가 마음이라고 믿고 그것을 또 나라고 믿어 왔던 것이 다 빈 것이구나.’ 『반야심경』의 “조견오온개공”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모든 생각, 너와 나, 좋다 싫다 하는 것을 넘어서게 되는데 이것이 9주심 가운데 아홉 번째 평등하게 머무는 마음입니다.

 

9주심은 보살의 수행에서 삼매가 이루어져 가는 과정을 단계별로 차 근차근 설명한 것입니다. 이 단계를 잘 알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내가 뭘 하는지, 얼마만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본인이 직접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본인은 매일 하고 있다 고 생각하는데 아직 1단계도 못 들어갔거나 애를 쓰는데 헛짓만 하는 경 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석천사에 오는 처사님들이 있는데 차를 몰고 열심히 보살님들을 데려다 줍니다. 데려다 주고 자기는 절에 안 들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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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밑에서 기다립니다. 절에 다니긴 다니지만 부처님께 예경도 안 하고 법 문도 안 듣고 수행도 안 합니다. 업은 누가 대신 지어주지 않습니다. 수 행도 전부 자기 몫입니다. 자기가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사마타 행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서 정진에 필요한 조건, 마음 자세, 소의처를 간택하는 방법, 정진이 성숙해가는 단계를 말씀드렸습니 다. 사마타에 관한 내용을 듣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마타는 행 법이기 때문에 ‘그래, 이제 해야 되겠구나. 이것을 안 하고서는 마음속의 번뇌가 끊어지지 않겠구나.’ 이 점을 명념해야 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 것을 하지 않고서는 마음속의 번뇌가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경계를 마주하면 성성적적이 깨지거나 죽음 앞에 도달하면 혼미해져서 나중에 는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무상이 신속하니 시간 허비 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 우리는 과거 조상들이 살던 때보다는 유리한 조건에서 살고 있습 니다. 임진왜란 때만 해도 평균수명이 서른여덟 살밖에 안 됐습니다. 지 금은 80된 노인이 마라톤을 하고 보디빌딩을 합니다. 90이 다 된 나이에 요가를 해서 건강하게 지내는 어르신도 있습니다. 몸의 상태를 보면 지금 이 정진하기에 굉장히 유리한 시대입니다. 옛날에는 정진을 하려 해도 먹 을 것이 부족해서 힘이 없고 그러다 병에 걸리고 고치지도 못하고 일찍 죽기도 했습니다. 스님들도 절에 들어와서 일하느라고 정진할 여가가 없 었습니다. 일 하기 싫어서 선방에 간다고 도망가고 그랬습니다. 지금은 본인이 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시간 과 물자를 아끼던 옛날 수행자의 모습은 『초발심자경문』에 “비육일(非 六日)이어든 부득세완내의(不得洗浣內衣)하며”라고 나와 있습니다. 6일, 16일, 26일이 아니면 빨래도 하지 말고 목욕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목 욕과 빨래를 열흘에 한 번씩 했습니다. 지금은 매일 하지 않습니까?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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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깨끗하고 몸도 깨끗하고 방도 따뜻한데 공부는 안 합니다.

 

9주심을 통해 사마타 닦아나가는 과정을 말씀드렸는데 끝으로 한 가 지 명심할 점을 덧붙이겠습니다. 아홉 단계 중에 7주심 정도 될 때까지는 정견이 꼭 필요합니다. 자신의 상태가 지금 혼침인지 도거인지 알아차리 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정견입니다. 스승이 있는 데서는 설사 좀 모르더라 도 스승이 지적을 해서 바른 길로 갈 수 있지만 스승이 없으면 스스로 미 리 알고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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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장

비파사나

 

불교 외에 인도나 중국에서도 사마타와 비파사나 비슷한 수행 방법들 이 있었습니다. 인도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중국은 하·은·주 시대 때 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부처님도 전에 있었던 방법들을 배웠고 그것이 어느 정도 수행에 토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방법 들을 상당 부분 차용하고 거기서 부족한 점이나 문제가 되는 점을 바꾸 고 개선하여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그것 이 불교의 본 수행인 사마타와 비파사나입니다. 사마타에 이어 오늘은 비파사나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수행하다가 몸에 생길 수 있는 문제와 부작용을 먼저 알려드려서 수행에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불교에서는 차크라를 얘기합니다. 특히 밀교 쪽에는 차크라에 관련한 수행이 많습니다. 우리 몸의 여섯 차크라는 에너지 운동과 연관되어 있 는데 몸이 늙어서 결국 사라지고 난 뒤에 이 에너지에 의해 다음 생에 윤 회하게 됩니다. 중국 사람들은 이것을 기(氣)라고 해서 수행에 보조적으 로 많이 썼습니다. 이 말씀을 왜 드리느냐 하면, 수행을 잘못했을 때 몸 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마타 집중을 하는 데 가장 큰 병은 도거 와 혼침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전에 몸에 장애가 생기면 선 자체를 지속 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상기병이 오면 기운이 위로 솟구칩니다.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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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지가 몸에서 고르게 돌지 않고 머리로 쏠리는 것입니다. 머리에서 에너 지를 많이 쓰기 때문에 혈압이 올라가고 머리가 아프기도 합니다. 눈이 침침하거나, 눈이 튀어나오려고 하거나, 귀에 이명이 생기거나, 입안이 붓 거나, 치아에 문제가 생겨서 잠을 못 자는 상황도 벌어집니다.

 

요즘 사람들은 옛날 사람들에 비해 몸을 잘못 다뤄서 상기되는 경우 가 많습니다. 세상이 변했고 삶의 양식도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삶이 단순했고 글을 아는 사람들이 적었던 데 비해 요즘 사람들은 학력 이 높고 글과 영상을 통해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이느라 머리를 많이 씁니다. 팔다리를 움직여 농사 짓거나 쫓아다니며 몸을 부지런히 움 직여야 하던 시대가 아니고 IT 시대입니다. 직장에서 하루종일 머리 써서 컴퓨터로 일하고 집에서도 머리를 쉬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 학을 가는데 거기서 머리 비우는 방법이나 수행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머리 쓰는 법만 가르칩니다. 세계 모든 사람들이 아는 것을 가장 중시합 니다.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돌아볼 틈도 없이 정 보의 홍수 속에서 머리를 싸매고 살아갑니다. 하여튼 두통약이 많이 팔 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스트레스나 정신적인 문제가 생기는 것도 역시나 머리를 너무 써서 그 렇습니다. 머리를 많이 쓰는 사람은 염불을 하거나 화두를 들 때도 머리 로 합니다. “스님, 염불하는데 머리가 아파서 못 견디겠습니다.” 이렇게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일을 할 때 팔을 많이 쓰면 팔이 아프고 다리를 많이 쓰면 다리가 아프지 않습니까? 머리에 일을 많이 시 키면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염불을 할수록 머리가 아파서 잠이 안 온다거나 눈이 뻑뻑하고 침침하거나 입이 까끌까끌하거나 밤에 산란 한 꿈에 시달리는 것은 머리로 해서 그렇습니다. 선을 하는 사람이 머리 를 굴리면 안 됩니다. 염불할 때도 소리 듣고 자각하는 것은 머리로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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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기운은 가라앉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제대로 모르고 하면 끝까지 해나가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증상이 심하게 이어지면 나중에는 정신에 도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유념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을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수화 풍 4대로 된 몸과 수상행식 네 가지 정신작용, 그것들의 연결 상태로 몸 과 정신을 설명하셨습니다. 인체학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몸을 형성하는 중에 가장 바깥에 있는 것이 머리카락, 손톱, 발톱인데 이것들은 신경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 단백질이 변형되어 나와 있는 신체의 일부입니다. 그 다음에 피부가 있는데 속 피부는 신경이 연결되어 있고 그다음에 살이 있 습니다. 그리고 살 속의 혈관으로 피가 흐릅니다. 그다음에 뼈가 있고 뼈 속에는 골수가 있고 골수에서 기가 생깁니다. 골수가 잘 차있는 사람은 나중에 죽어서 화장을 하면 잘 안 타고 그것이 응고되면 사리라고 하여 주로 뼈 속에서 많이 나오는데 그것이 정기(精氣), 정의 기운입니다. 사람 의 희로애락, 우비고뇌 등의 감정, 이를테면 크게 기쁘다든지, 크게 즐겁 다든지, 크게 슬프다든지, 크게 분노가 일어날 때 그 분노나 슬픔이 정기 에서 발현합니다. 정이 변하면 기가 된다고 하는데 기는 일종의 에너지 같은 것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촛불을 켜놓았을 때 불 위의 뜨거운 기운 을 기라고 보면 됩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영양분이 몸 속에 들어가는데 그것을 세포 안에 서 태워서 에너지를 만듭니다. 그것이 기이고 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이 기가 몸 전체에 혈을 따라서 소통을 합니다. 한방에서는 기가 흐르는 맥 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기맥이라고 합니다. 기진맥진의 그 기맥입니다. 기 맥에 침을 놓으면 혈을 통과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를 통과시키는 것입니 다. 머리가 아픈 것은 머릿속에서 그 에너지를 많이 써서 기운이 몸 전체 로 골고루 돌지 않기 때문입니다. 몸 전체에 기와 혈이 골고루 돌아야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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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이나 뼈 상태가 전부 건강합니다. ‘기운차다.’ ‘기가 세다.’ ‘기가 막힌 다.’ 하는 말들이 이런 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는 항상 혈과 함께 돌기 때문에 여기에 문제가 생기면 몸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래 서 부항 뜨고 침을 놓아 그 기를 돌리고 혈을 돌려서 몸을 활성화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몸에 대한 지식을 선을 하는데 활용할 수 있습니다. 기 를 알고 잘 운용해야 몸에 무리가 가지 않습니다. 산만한 생각을 갖고 머릿속에서 기운을 자꾸 작동시키거나 또는 가슴 중단전에서 작동시키 면 그쪽으로 기가 몰려 머리가 아프거나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기를 모 아놔도 문제가 안 생기는 곳은 하단전과 장심 두 곳 뿐입니다. 장심은 발 바닥 밑에 오목 파인 곳입니다. 우리가 비파사나 하고 행선을 할 때 의식 을 그 두 곳에 두면 기운이 전혀 안 오르고 머리 아픈 일도 전혀 없습니 다. 하단전에 기를 두기 위해서는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마음을 따 라서 기가 움직이면서 혈도 같이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성질이 나면 아무 리 좋은 밥을 먹었어도 성질의 기운으로 바뀌고 좋은 생각을 내면 좋은 기운으로 바뀝니다. 성질 내놓고 좋은 척 하려면 잘 안 됩니다. 남에게도 그렇게 보이지 않고 본인도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이 기운을 하단전에 맞춥니다. 중국에서는 단전이라 하고 인도에서는 차크라라고 했는데 지점이 거의 같습니다. 구마라집과 현장이 불경을 번 역하기 전에는 중국과 인도의 수행자들 사이에 별 교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전부터 양쪽에 이 지점을 활용한 수행이 각각 있었을 것 으로 추정됩니다. 고대 중국 사람들은 아마 하단전, 불꽃 수행을 했던 것 같습니다. 단전의 아홉 지점을 자세하게 말씀드리기는 어렵고 하단전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단전은 간단히 상중하 세 곳으로 나 뉩니다. 상단전은 양 미간 사이, 중단전은 양쪽 유두 사이 한 가운데,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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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전은 배꼽에서 손가락 세 개 정도 아래, 뒤 꼬리뼈에서 3번, 4번 척추 쪽으로 세 개 정도 위쪽에 있습니다. 표피에 있는 것이 아니고 뒤에서 안 쪽으로 2/3 지점에 있습니다. 하단전이 다른 장기처럼 있느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대장이 지나가는 곳, 소장의 일부가 있는 곳의 빈 공간을 하단 전이라고 합니다. 그 지점에 기운이 모였을 경우 신체 이상이 생기지 않 기 때문에 그 곳을 선정해서 수행에 활용하게 된 것입니다. 딴 데는 기가 모이면 문제가 생깁니다. 가슴 같은 데 화의 기운이 잔뜩 모이면 위나 간 에도 문제가 생기고 다른 장기들도 충혈되지만 하단전에 기가 모이면 그 런 문제가 안 생기기 때문에 이곳을 선택한 것입니다.

 

옛날 스승들은 화두를 들거나 염불을 할 때 하단전의 이러한 장점을 알고 활용했습니다. 기를 잘 운용하면 머리도 편안해지고 몸 전체의 균 형이 잘 잡히고 손발이 따뜻해지고 스트레스도 가라앉아 편안해집니다. 그래서 하단전에 기를 모으는 것이 중요하고 하단전에 기가 모이면 거기 에 내 의식을 두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할 때 하단전에 의식을 둡니다. 머리에 두고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파옵니다. 의식을 어디에 두는 것이 처음에는 잘 안 됩 니다. ‘하단전에 어떻게 두고 하지?’ 그럴 것입니다. 간단하게 얘기하면 우리가 방에 앉아 있을 때 마음은 부엌에 가서 김치를 담거나 딸네 집에 가 있기도 합니다. 화두를 들 때 의념을 하단전에 두면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상기되지 않고 다리 쪽도 덜 저리고 이런저런 이점이 많습니다.

 

전에 전강 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신은 누가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화두를 머리로 들다가 머리에서 피가 터져서 죽을 뻔했는 데 당신 제자인 송담 스님이 기 수련법을 알아서 아주 무난하게 통과했 다고 했습니다. 송담 스님께서는 그 방법을 공부하는 데 활용하셨고 법 을 이룬 뒤에도 평소 법문하실 때 보면 하단전이 아주 견고하고 기가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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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여러분도 하단전에 의념을 두어 기 를 모아 보십시오. 그러면 분노심도 조금 일어나다가 머리로 확 오르지 않기 때문에 자제가 됩니다. 생각도 두 번, 세 번 눌러놓을 수 있는 힘도 생기고 여러 가지 힘이 생깁니다.

 

제가 이제 관법을 하나 권유해드리겠습니다. 『관무량수경』에 나오는 일상관(日想觀)입니다. 이 경에는 태양을 관찰하는 일상관, 물을 관찰하 는 수상관 등 극락을 관상하는 16가지 방법이 나옵니다. 이 경에서 빔비 사라 왕은 아들 아사세 왕에 의해 감옥에 갇혀 죽게 됩니다. 죽기 전에 부처님께서 16관법을 가르쳐주었고 빔비사라왕은 이 방법으로 마지막 성취를 얻고 죽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관법들로 수행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권하는 것입니다. 일상관을 하려면 우선 가부좌나 반가부좌 자세 로 앉으십시오. 비로자나7자세로 앉아서 태양을 관합니다. 빛이 크게 나 는 태양을 관해도 안 되고 새카만 태양을 관해도 안 됩니다. 태양이 떠오 를 때나 질 때 빛을 크게 발하지 않고 태양 자체가 벌겋게 되어있는 모습 을 떠올리십시오. 야구공보다 조금 작게, 정구공이나 탁구공 정도의 크 기로 내 마음속에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 태양을 하단전에 고정 시키십시 오. 붉은색 그대로 생각을 여기에 둘 때, 그 생각에 따라서 기가 바뀝니 다. 그것이 차갑다고 생각하면 찬 기운이 되어버립니다. 어떤 사람이 날 카로운 생각을 내면 기운이 날카로워져서 상대의 폐부를 찌릅니다. 또 어 떤 사람이 분노의 기운을 갖고 있거나 차가운 기운을 갖고 있다면 본인 이 말하고 행동하지 않아도 화기나 냉기가 돌아서 주변을 전부 그렇게 만들고 맙니다. 그것은 본인이 타고난 기운을 잘못 활용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과 기운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음 따라 몸도 변하 고 몸 따라 마음도 변하는 가운데 기운 자체도 따라서 바뀝니다. 이를테 면 일체중생을 위한 대보살들의 자비는 따뜻한 마음이기 때문에 기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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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합니다. 중생이 그것을 느끼기 때문에 다 그 품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두울 때 불빛에 의지하고 추울 때 따뜻한 곳에 의지합니다. 추울 때 방으로 들어가지 얼음판으로 나가지 않잖습니까? 지옥은 춥고 깜깜하기 때문에 지옥중생은 불빛을 보고 의지하고 따스함 을 보고 의지합니다. 이것이 의지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마음을 먹고 기운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많은 사람에게 따뜻함과 지 혜로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수행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마음 따 라서 기와 몸도 다 움직이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기의 움직임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손바닥을 올려보십시오. 안에 공이 하나 들었다 생각하고 너무 꽉 잡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손을 붙였다가 당겼다가 해보십시오. 손바닥 안에 무엇이 있는지 느껴보십시오. 안에 아 무것도 없는데 밀가루반죽 하듯이 뭔가 당기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 손에서 일어나는 자기장 같은 에너지인데 이것이 우리 몸에 영향을 끼칩 니다. 손을 쫙 펴서 어느 손이 큰지 한번 보십시오. 왼손을 많이 쓰면 왼 손이 크고 오른손을 많이 쓰면 오른손이 큽니다. 아무 손이나 한쪽 손을 들어보세요. 편안하게 눈을 감고 집중하면서 이 손이 점점 커진다고 생 각해 보세요. 지금 든 손이 점점 커집니다. 손가락 끝이 쭉쭉 위로 올라 가고 피가 그쪽으로 쏠리고 기운이 그쪽으로 쏠리면서 커지는 느낌을 받 습니다. 이제 눈 감고 다시 집중합니다. 이번에는 점점 작아져서 어린이 손처럼 된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점점 작아집니다. 피가 빠져나가고 기운 이 빠져나가서 편안한 고사리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운을 느껴보십 시오. 우리가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몸의 피가 그쪽으로 쏠리 고 기운이 그쪽으로 쏠리고 영향을 받습니다. 성질을 내면 눈이 커지고 졸려서 기운이 빠지면 눈이 가물가물한 것도 똑같은 이치입니다. 이 몸의 에너지는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에 마음의 작동이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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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합니다. 훔칠 마음을 내면 에너지가 전부 도둑질에 쓰이고 발심을 하면 에너지가 전부 보리심 수행에 쓰이는 것입니다.

 

이제 태양을 관해봅시다. 태양을 떠올려서 하단전, 배꼽 아래 세 치에 서 직선으로 뒤 명문 혈까지 직선으로 놓고서 2/3 뒤 지점, 그 안쪽에 그 대로 둡니다. 붉은 태양을 거기에 놓고 떠올려 주는 것입니다. 하루에 기 도를 하거나 주력을 하기 전에 10분 정도씩 이렇게 떠올려주십시오. 처음 엔 잘 안 될 것입니다. 태양이 그냥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하나도 떠오 르지 않는데 그냥 생각만 하고 있고, 잠깐 떠올랐는데 태양이 두 개가 되 었다가 한 개가 되기도 하고, 흐릿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집중을 하고 있으면 태양이 붉게 그대로 있습니다. 관상의 집중력이 어느 정도 냐에 따라 다릅니다. 집중력이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하면 선을 할 때 소 의처에 집중하는 속도가 빨라집니다. 이렇게 5분이나 10분씩이라도 매일 해주면 위로 상기했던 것이 사라집니다.

 

선을 하라고 강조만 하지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선을 하라 고 하면 대다수가 머리로 해서 두통이 생기거나 신경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불편을 처음부터 겪고 나면 다시는 선을 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갑니 다. 염불하는 사람은 매일 10분 정도 하단전에 집중을 한 채 머리로 하 지 말고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그대로 하단전에 얹어주십시오. 자기 가 내는 소리를 자기가 들으면서 하단전에 얹어주면, 하면 할수록 기운 이 하단전에 모이기 시작하고 차츰차츰 훨씬 더 소의처에 강력하게 집중 이 됩니다. 『천수경』 등의 경을 독송하기 전에도 10분이나 15분 정도 하 단전에 집중해보십시오. 떠오르건 안 떠오르건 상관없이, 떠오르면 좋고 안 떠오르더라도 집중해서 하면 하단전에 기운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그 러면 따뜻해진다든지 또는 뭐가 스멀스멀 기어가는 것 같다든지 또는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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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뻑뻑해진다든지 그런 감각적인 것이 조금씩 옵니다. 조금 지나면 아주 뜨끈뜨끈해지고 심지어는 아주 냉했던 사람들도 몸이 따뜻해집니다. 처 음 하단전에 태양을 놓고 관하기 시작할 때 ‘이 태양은 따뜻한 태양이 다.’라고 한 번 해주고 ‘이 태양은 밝은 태양이다.’라고 해주십시오. 기 운이 그렇게 바뀌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밝고 따뜻한 기운이 온 몸에 번진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기가 모이면 모일수록 온몸이 젖을 만큼 땀이 날 때도 있지만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외도들도 여기까지는 했습니다. 집중을 통해서 어느 정도 가라앉히고 몸이 좋아지는 데까지는 다른 수행을 통해서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 러나 불교가 그들과 다른 점은 실제로 번뇌가 끊기는 데 있습니다. 번뇌 가 끊어지려면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한데 그것이 소의처를 두는 방법 입니다. 부처님께서도 6년 동안 외도의 방법으로 수행을 했습니다. 그리 고 안 되니까 보리수 아래서 혼자 계셨는데 수행 방법이 따로 없었고 당 신이 자연스럽게 들어가서 번뇌가 다한 경계가 왔습니다. 그것이 화두와 비슷한 수행입니다. 소의처가 있느냐 없느냐로 불교와 외도가 갈리지만 부처님께서도 6년 수행을 하실 때 몸에 대해서, 기에 대해서 잘 알고 활 용하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국의 옛날 스님들도 선을 닦을 때 거의 다 기를 활용해서 상기되지 않고 장애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기에 대해서 알아두면 수행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 주의할 것은 뭔가 특 이한 상황이 나타났을 때는 반드시 스승에게 묻고 지도를 받아야 합니 다. 그리고 기 수련이 목적이 아니라 번뇌를 없애는 것이 목적이라는 사 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불법의 수행은 차제나 방편의 과정을 거쳐 깨닫는 것이지 바로 깨닫는 일은 없습니다. 바로 깨닫는다고 한다면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 장수가 되어 칼을 들고 나가 전쟁을 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기르는 순간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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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하는 순간들이 쌓여서 2, 30년이 지나야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 렇게 이야기하면 “육조 스님은 바로 되었다는데요?”라고 반문하는 이가 있습니다. 전생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 생에서 바로 된다고 주장하 지만 육조 스님은 오랜 생을 통해 이미 수행이 되어서 이 생에 와서 대오 한 것입니다. 혹여 본인의 근기가 낮고 수행의 깊이가 얕으면서도 그냥 바로 된다는 소리에 현혹되면 수행을 해도 결과가 오지도 않고 고생만 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술 먹는 사람이 술을 끊지 않고 참선에 들어가는 것과 똑같습니다.

 

차제법이나 방편법은 하나하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한꺼 번에 장애가 다 제거되는 경우는 없고 장애가 남아있는 상태로 대오하는 경우도 없습니다. 장애를 하나하나 제거하는 과정이 수행차제이고 수행 자는 계율부터 이 과정을 밟아 나아갑니다. 물론 상상근기면 계율을 억 지로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계율이 갖추어져 있어서 자연스럽게 해 도 계율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렇다 해도 계를 받아서 뭐가 잘못인지 를 알아서 재차 문제가 되지 않게끔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바로 깨달 아 성불하는 줄 알면 부처님께서 3아승지 겁을 닦았다는 것은 거짓말이 됩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목적은 나쁜 업을 약화시켜 법에 도달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를 고통으로 이끄는 업들, 몸으로 짓는 업, 입으로 짓 는 업, 생각으로 짓는 업의 관계를 점차 약화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그러다 보면 차츰차츰 법으로 나아가게 되고, 어느 순간에는 법에 도달 하게 됩니다. 그 순간을 견도라고 합니다. 자량도, 가행도, 견도, 수도, 무 학도의 차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견도가 됐다, 견성했다고 합니다. 그 안의 내용은 공성을 잘 이해하고 실제로 사마타와 비파사나를 통해 그 것을 확인한 단계입니다. 그런 사람은 무아를 확인했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를 일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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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으로서 앙굴리마라의 예를 들어보 겠습니다. 앙굴리마라는 외도를 스승으로 모셨는데 그 스승이 잘못 인도 하여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나중에 부처님께 귀의하여 아라한과를 이 루었지만 사람을 999명이나 죽였으니까 그 가족들이 원한이 서려서 그 를 가만두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길에 나가면 사람들이 돌멩이를 던져서 탁발도 못하고 피가 흥건해서 들어오곤 했습니다. 어느 날 앙굴리마라가 탁발을 나갔는데 그 집에 마침 산모가 아기를 낳는 순간이었습니다. 시 주를 하려고 음식을 들고 나갔던 사람이 그를 보고 앙굴리마라가 왔다 고 놀라서 말했고 그 소리를 듣고 아기가 도로 들어가 버렸답니다. 그러 니 앙굴리마라는 ‘내가 두들겨 맞는 건 괜찮지만, 나 때문에 아기를 못 낳으면 아기도 위험하고 산모도 위험하겠다.’ 싶어서 부처님께 달려가 여 쭈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딱 한 말씀 해주셨습니다. “네가 도에 들 어간 이후에는 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 이 말을 다시 그 집에 가서 해주 자 아기가 안심하고 나왔답니다. 그 전에는 별별 업을 다 짓고 살던 중생 이 공성을 확인하고 도에 든 뒤에는 계율을 범한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도에 들었다는 것은 이미 ‘아’가 사라져서 무아가 되고 양극단으로 오 고 가는 분별심이 사라져서 그 바탕이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나를 중심 으로 좋다, 싫다는 분별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무분별지’라고 합니다. 대승에서는 보살이 환희지에 들어갈 때 무분별지를 얻는다고 하 는데 설사 사마타를 통해서 삼매가 이루어졌다 해도 번뇌가 완전히 끊어 진 것은 아닙니다. 그 뒤에도 무의식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있기 때 문입니다. 수천억 겁 동안 행했던 것들이 습이 되어 저장된 아뢰야식 속 에서 일어나는 번뇌는 뿌리가 깊습니다. 그것은 아집을 끊고 도에 들어 간 수행자에게도 일어납니다. 보살 초지가 되더라도 무의식 상태에서 일 어나는 것은 일어나기 때문에 그때 법집을 끊는 것입니다. 견도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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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의 위치에 오른 보살도 장식(藏識) 속에 들어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번뜩 일어나는 것을 끊으려면 분명하게 사마타가 이루어진 후에 비파사 나 수행을 같이 해야 합니다.

 

요즘 일부 사람들은 비파사나를 한다며 일어나는 생각을 그대로 관찰 해보라고 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방법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을 그대로 들여다보고 앉아 있다가는 안 끊깁니다. 사마타가 없는 비파사 나는 전부 다 망상일 뿐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제거하지 못합니 다. 사마타와 비파사나를 얘기할 때 사마타를 앞에 둔 것은 먼저 되어야 할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파사나와 사마타’라고 하지 않습니다. ‘선정과 지혜’라고 하지 ‘지혜와 선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혜는 선 정 상태가 아니고서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사 일어났다고 하더 라도 그건 지혜가 아니고 지식에 불과합니다. 수행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사마타를 하기 전에 계율을 철저히 배우고 부처님 경전을 철저히 공부해 서 바른 견해가 정확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바른 견해가 있어야만 사마 타에 들기도 쉽습니다.

 

사마타의 예비 수행에는 바른 견해를 세우는 정견과 잘못을 알아차리 는 정지가 있습니다. 일어나는 생각을 지켜보는 것을 요즘에 비파사나라 그러는데 그것은 수행에 앞서 정견이 생기고 정견에 의해서 내가 지금 생 각하고 행동하는 것에 무엇이 잘못됐나 사유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른 알아차림일 뿐 비파사나가 아닙니다. 비파사나는 정정과 정혜, 정혜쌍수 를 닦을 때 쓰는 말입니다. 이때 비파사나는 반드시 앞에 정견과 정지가 성립된 뒤에 이루어집니다. 먼저 계율을 받아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다음 에 부처님 말씀을 잘 사유하는 ‘분별혜’가 있어야 합니다. 분별혜가 없 으면 부처님 말씀과 부처님 말씀이 아닌 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경전 과 율을 공부하지 않고서는 바른 알아차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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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잘못됐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부처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 는 상태라면 선을 한다고 산중에 백 년을 앉아 있더라도 우둔한 수행자 가 되고 맙니다. 경을 무시하기 때문에 삿된 짓을 수도 없이 하면서 삿된 줄도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는 공부의 바른 순서에 접어들지 못합니다.

 

사마타의 예비수행은 정견과 정지가 되고 비파사나의 예비수행은 사 마타가 되어야 합니다. 일념이 되어서 양극단의 생각이 없어지지 않고서 는 일체법의 무상이나 무자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집착이 또 일어나게 됩니다. 본수행은 분명히 정견과 정지가 예비로서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 다. 초, 중, 고등학교도 안 나오고 검정고시도 안 본 사람이 대학에 들어 가려면 대학이 안 받아주는 것과 같습니다. 학업을 수행할 능력이 안 되 듯이 선을 수행할 능력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자가 되는 길을 이 해하지 못하면 성자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거듭 강조하지만 비파사나의 예비수행은 사마타가 되어야하고 그 전에 정견과 정지도 매 우 중요합니다.

 

비파사나는 무의식 속에서 일어났던 번뇌가 벼락 맞은 것처럼 깨져버 리는 것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마하반야(mahāprajñā)’는 비파사나로 관찰하는 큰 지혜를 가리킵니다. 이 지혜는 지식과는 전혀 다 릅니다. 현상을 아는 것이 지식이라면 본질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반 야’에 ‘마하’를 붙여서 큰 지혜라고 한 것은 더 이상의 높은 관찰은 없 다, 이것이 최고의 관찰이라는 뜻입니다. 마하반야의 비파사나로 번뇌를 극복하고 바라밀다(pāramitā)를 이루는 핵심적인 말씀이 『반야심경』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관자재보살을 중생의 고통을 잘 관찰한다는 정 도로 이해하지만 좀 더 깊이 이야기하면 비파사나에 자유로운 보살이 관 자재입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생명체들이 잘못된 업을 지어 고통 속에 빠져 있는 줄 모두 알고 오온이 공함을 조견, 즉 비추어 보는데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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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입니다. 비파사나는 순간 비추어 보는 능력입니다. 비추어 보려면 사 마타의 집중이 전제되고 그 앞에 정견과 정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관찰을 하더라도 분별심일 뿐입니다. 분별이 남아있으 면 너 좋은 것, 나 좋은 것 구분하고 집착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사마타 가 이루어진 후에는 일념이 되었기 때문에 깨끗한 거울에 현상이 그대로 비치듯이 일체법을 그대로 비추어 보게 됩니다.

 

사마타가 이루어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대상에 대한 태도가 다 릅니다. 길을 가다가 귀한 물건이 떨어져 있으면 보통은 누가 보나 안보 나, CCTV가 있나 없나 살핀 다음에 얼른 주워 넣고 횡재했다 할 것입니 다. ‘나’가 있기 때문에 나에게 이익 되는 것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에 사마타가 된 사람은 그 물건을 보긴 보는데 ‘누가 저것을 갖고 가다 가 떨어뜨렸구나. 잃어버린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하면서 그대로 놔두 고 지나갑니다. 마음이 아에 의하여 움직이지 않습니다. 도인은 길에 금 덩이가 굴러다녀도 손을 대지 않습니다. 정견과 정지가 있고 사마타가 이 루어진 사람은 일체법의 허망함을 알고 화근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도 알기 때문에 마음에 출렁거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도를 닦아 견도에 들 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견도에 들어간 사람도 배고픔을 느끼지만 저녁 에 먹을거리가 없다 해도 불만이 없습니다.

 

『금강경』도 『원각경』도 부처님께서 비파사나로 관찰하고 말씀하신 내 용입니다. 도에 의해서 이 세상의 실상을 관찰된 그대로 설명하고 있습니 다. ‘생자필멸’ 누구나 죽는다는 것도 관찰하신 대로 이야기한 것 아니 겠습니까? 아기가 태어났다고 축하해주지만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사람 들은 평균수명을 기준으로 “그래도 70까지는 살겠죠.” 하지만 그 전에 죽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죽으면 끝이 아니고 다음 생으로 환생하고 육도에 윤회한다고 부처님께서 본 대로 얘기해주셨습니다. 세상 허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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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관찰할 수 있어야 욕심이 뚝 떨어 집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생각하는 속에서 욕망 때문에 속고 삽니다. 듣 는 말 가운데 욕망을 부추기는 것이 칭찬입니다. 잘 들여다보면 전부 다 속고 삽니다. 불자라면 부부관계도 욕망으로 만나서 살지 말고 같이 정 진하는 도반으로 산다면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앞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 관의 내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마 타를 기반으로 관이 정확하게 되면 번뇌가 딱 깨집니다. 그러면 관을 어 떻게 닦을 것인가? 소승 초전법륜의 사념처관을 들 수 있습니다. 마음이 일어나는 대로 그냥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신·수·심·법 네 가지 대상 을 구체적으로 관하는 방법입니다. 첫 번째는 ‘관신부정(觀身不淨)’, 이 몸이 깨끗하지 않음을 관하는 것입니다. 사람 몸은 더럽습니다. 며칠만 안 씻어도 누가 옆에 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아홉 구멍으로 질질 물이 흘러나오고 허물이 벗겨집니다. 살아있을 때도 더럽 지만 죽으면 송장 물 줄줄 흐르는 것은 말도 못합니다. 사대로 이루어진 이 몸은 피고름 덩어리고 고름주머니고 뼈 주머니라고 관찰할 때 오온이 공함을 알 것입니다. 몸이라는 대상을 항상 그렇게 바라보면 욕망과 집 착이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고통이 많이 일어나지 않습니 까?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도 어여쁜 손자도 깨끗하지 않다고 그렇게 관 찰하십시오.

 

두 번째는 ‘관수시고(觀受是苦)’, 즐거운 느낌이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고 관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좋아서 내 것으로 만들려는 것은 모두 고 통을 불러일으킵니다. 욕망 때문에 실제 있지도 않은 것에 집착해서 고통 을 느끼고 삽니다. 우리가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대부분 ‘세락후 고(世樂後苦)’, 앞에 즐거웠던 것이 뒤에 고통이 됩니다. 결혼식 때 괴로 워서 우는 사람 봤습니까? 그렇게 좋아서 결혼하고 행복할 것이라고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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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에 부풀어 결혼하지만 그 이후로는 사는 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밥 벌어먹기도 보통 힘든 게 아니고 자식을 키우는 일도 온갖 어려움이 닥칩니다. 갈등과 문제도 얼마나 많습니까? 결혼할 때는 좋았지만 좋은 느낌이 가고 나면 고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즐거움이 곧 고통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관심무상(觀心無常)’, 마음이 무상함을 관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 하면서 대상을 옮겨 다닙니다. 마 음이라는 실체가 항상 존재한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마음도 조건에 따 라서 항상 변합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마음의 무상함 을 관하면 욕심에 끄달릴 것도 없고 감정에 일희일비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도 고집할 것이 아닙니다.

 

네 번째는 ‘관법무아(觀法無我)’, 존재하는 모든 것에 영원성이 있지 않음을 관하는 것입니다. 절대신이고 아트만이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모 든 것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겼다가 사라질 뿐, 본질이나 자성이 없습 니다. 사람들은 절대적인 존재를 만들어놓고 자꾸 딴 짓을 하지만 대상 을 바라볼 때 자성이 없음을 본다면 더 이상 미혹에 끌리지 않을 것입니 다. 지금까지 몸, 느낌, 마음, 법의 네 가지 대상에 대해 각각 부정, 고, 무 상, 무아로 관하는 사념처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 부언하자면, 몸에 대 해서 부정하다고만 관하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고, 무상, 무아를 함께 관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몸의 더러움으로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관찰하면 욕심 부릴 일이 없고 성질 낼 일도 없고 집착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살 면 점점 고통이 사라질 것입니다.

 

비파사나를 하는 방법으로 소승 사념처관을 말씀드렸는데 대승에서 는 비파사나를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 중에 『금강경』의 6유(六喩)가 있습니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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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이 여섯 가지 비유를 통해 일체 유위법을 관하라고 가르칩니다. 그 앞에 “불취어상 여여부동(不取於相 如如不動)”은 사마타를 가리킵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그 어떤 상도 취하지 않기 때문에 흔들림 없 는 상태가 된 것이 사마타입니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께서 이 게송을 한 번 들어봐라 하면서 여섯 가지 비유를 드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꿈 과 같다고 했습니다. 꿈속에 돈 천억을 갖고 있다고 깨어나서 쓸 수 있습 니까? 부처님이 된 연후에 깨어나서 보니까 중생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이 꿈 속에서 있다가 갖고 나오려고 하는 것과 똑같더라는 말씀입니다. 여 러분도 지금 50, 60, 70 되어 살아온 걸 생각해 보면 꿈같지 않습니까? 나중에 더 늙어서 치매가 오면 그마저도 아예 다 잊어버릴 것입니다. 호 흡이 정지되고 심정지가 오면 그때는 확 날아가 버리고 완전히 내가 다 흩어집니다. 지금도 꿈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이렇게 관찰할 때 욕망에서 비롯한 괴로움이 깨질 것입니다.

 

환(幻)의 비유는 아주 적절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영화를 생각하면 됩 니다. 우리 어릴 때 왕우라는 홍콩 배우가 있었습니다. 성룡 나오기 훨씬 전의 무술영화 스타였습니다. 그 사람 나오는 영화를 엊저녁에 봤는데 그 사람이 죽는 걸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영화를 보러가니까 또 살아서 움직입니다. 그 안에서 배우가 울고 웃고 하는 것은 전부 환입니 다. 헛것을 보고서 우리가 울고 불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한 편의 연극을 보고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연극배우가 아무리 울어도 실제로 운 게 아니고 몇 번을 죽어도 실제로 죽은 게 아닙니다. 그런데 우 리는 왜 현실에서 울고 죽고 하면서 자꾸 중생이 되어서 나오느냐 그 말 입니다. 환에 이어서 나오는 비유는 물거품 같다는 것입니다. 비누 거품 을 생각해 보십시오. 거품이 생성될 조건에서 만들어졌다가 잠시 후에 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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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버립니다. 그렇게 거품 같은 인생을 붙들고 고통스러워하고 집착해 서 분노를 일으키고 하는 상황을 왜 만드느냐는 말입니다.

 

그다음은 그림자에 비유하셨습니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습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고 생각하는 것, 지금 내가 살아 가고 있는 것, 세간의 모든 것이 그림자와 같습니다. 실체가 있다면 그림 자와 같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이슬과 번갯불에 비유하셨습니다. 잠시 만에 끝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나 나나 30년, 40년 뒤에 지구 상에 있을 사람 별로 없을 것입니다. 청춘만 번개처럼 지나가는 것이 아 닙니다. 모든 것이 번개처럼 지나가고 아침이슬처럼 사라집니다.

 

지금까지 든 비유로 모든 것을 관찰하면 우리가 집착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엇을 집착하겠습니까? 벽돌과 나무와 기왓장으로 쌓아놓은 절에 집착하겠습니까? 아니면 종이 쪼가리 돈에 집착하겠습니까? 허망 하게 애정으로 얽힌 가족에 집착하겠습니까? 다 놓고 떠날 일들 아닌가 요? 꿈속에서 깨어나면 다 끝날 일들 아닌가요? 사마타가 된 후에 이렇 게 관찰하면 깨어있는 생각이 드러나고 얽혀있던 어두운 매듭들이 하나 하나 사라지면서 나쁜 업이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욕심을 일으 키고 고통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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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장

수행의 다섯 단계

 

오늘은 수행의 단계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단계에 대한 이 해가 있어야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한 주제입니다. 지금 우리 불교에서는 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심지어 잘못 알고 있는 경 우도 있습니다.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면 수행과정에서 여러 가지 오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수행단계는 대소승에서 공통으로 인정한 다섯 가지가 있는데 이것을 ‘수행5위(修行五位)’ 또는 ‘수행5도(修行五道)’라고 합니 다. 이 다섯 단계는 부처님께서 말씀해놓으신 것을 후대 학자들이 정리 한 것입니다. 아비달마 시대에 부분적으로 정리되고 유식학 시대에 완벽 하게 정리되어 그 이후 대승에 들어와서도 유효한 교의로 정착했습니다.

 

수행은 신구의 삼업을 바꾸어나가는 과정입니다. 마음과 행동과 말을 차츰차츰 바꾸어나가서 완전히 깨달았다고 할 때는 그동안의 업을 부처 의 업으로 바꾸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빠른 시간 내 성 취한다 하더라도 부처의 업으로 바꾸어내는 일은 순간적으로 되지 않습 니다. 그런데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깨달을 수 있다고 합 니다. 중국의 대혜 종고 스님 이후에 화두선을 하는 분들이 주로 그런 주 장을 하고 우리 불교도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만,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3 아승지 겁 동안 닦았던 일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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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육조 스님은 바로 깨달았다고 하는데 육조 스님이 전생, 그 전생에 공부를 안 하고 깨달았겠습니까? 윤회하는 속에서 수행자로 살아 온 육 조 스님의 삶을 무시했을 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전생에 연등부처님 앞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 으키고 그 뒤로 3아승지 겁 동안 수행하셨습니다. 우리는 아승지 겁을 오 랜 세월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데 실제로 인도 사람들이 쓰는 시간의 단위입니다. 대충 계산해보면 한 4만 년 정도 태어났다가 다시 돌아가시 고 하면서 보살행을 완성하여 마지막에 성불하셨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듯 부처님께서는 오랜 생을 닦아서 부처가 되셨습니다. 2,600년 전 인도의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이룩한 그 순간만 놓고 보면 돈오가 되겠지만 그 앞에 해왔던 과정을 이야기한다면 돈오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극단적으로 돈오만 주장한다면 그 앞의 전생, 윤회하면서 닦아온 보살행을 인정하지 않는 폐단을 낳게 됩니다. 내가 볼 때는 오랜 시간 수행을 통해 성불한다는 교설이 틀림없습니다.

 

팔리어로 전승된 남방의 불교나 산스크리트어로 전승된 나란다 대학 의 전통에는 돈오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오에 매몰 되면 수행의 많은 과정을 잃게 되고 수행의 문에 들어갈 때부터 막힘이 생깁니다. 누구나 깨달아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 전제 입니다. 다만 업력의 차이에 따라서 낮은 차원에서 수행할 때가 있고 높 은 차원에서 수행할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돈오는 깨닫는 그 순간 ‘직 지인심(直指人心)’, 마음을 직접 관찰해서 공성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러나 ‘수행5위’에 비추어 본다면 ‘견성즉성불’이라는 말은 좀 더 깊이 사유해봐야 됩니다.

 

수행5위 중 첫 번째는 자량위(資糧位)입니다. 자량은 수행의 예비 단계 입니다. 예를 들면 운동선수가 시합에 나가기 전에 트레이닝을 해서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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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을 다지는 것과 같습니다. 운동선수가 체력을 보완하지 않거나 필요 한 기술을 습득하지 않고 본 경기에 바로 들어가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 생할 것입니다. 근육을 다치거나 숨이 차거나 또는 기술이 상대보다 뒤져 서 지게 됩니다. 수행을 할 때도 준비가 필요한데 그 단계를 자량위라고 합니다. 우리가 먹고사는데 굶어 죽지 않으려면 농사를 지어서 식량을 생산합니다. 식량을 생산하는 행위를 통해 얻은 식량으로 배고프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를 최종 단계라고 하면 수행과정 전체를 놓고 볼 때 자량위는 첫 단계에 해당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열 가지 선행을 수행합니다. 수행이라 고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덕 목들입니다. 본 수행에 들어갔을 때 문제가 되지 않을 만한 기초체력을 키우는 것, 정신적 근육과 업의 근육을 키울 수 있는 것은 ‘선행’입니다. 선행의 결과는 세속적인 복을 포함합니다. 세속의 박복함에 시달리면 수 행할 마음을 내기가 힘이 듭니다. 선행을 해서 선근을 심고 기르면 복을 받는데 그것이 세속적인 복이라 해도 수행에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부 처님께서는 자량위의 첫 번째로 열 가지 선한 일, 10선계(十善戒)를 제시 하셨습니다.

 

10선계는 열 가지 악을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 가지 악을 행할 경우 괴로운 과보를 받아서 점점 더 수행에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열 가지 악을 신구의 삼업으로 이야기하는데 살생, 투도, 사음은 몸으로 짓는 악 업이고 망어, 기어, 양설, 악구는 입으로 짓는 악업이고 탐진치는 생각으 로 짓는 악업입니다. 우리는 일생을 사는 동안 탐욕밖에 생각 안하고, ‘아(我)’를 세워서 분노를 일으키고, 인과에 맞지 않는 어리석은 행동을 합니다. 도둑질을 하면서 부자가 되려고 한다거나 남의 생명을 죽이면서 오래 살 거라고 생각한다면 전도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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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가지 악이 내 살림이 되었을 경우에는 다음 생을 받을 때 삼악도에 태어납니다. 지옥, 아귀, 축생의 몸을 받고서는 수행 자체를 할 수 없습 니다. 『천수경』에 나와 있는 대로 “원아영리삼악도”, 내가 항상 삼악도 를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10선계를 지킬 때 삼 악도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수행은 고 사하고 악도에 떨어집니다. 수행에 가장 적합한 곳이 인간입니다. 천상 은 너무 편안하고 즐거워서 수행할 마음을 내기 힘들고, 수라는 싸울 마 음 때문에 수행이 잘 안되고, 삼악도에서는 고통 받느라 겨를이 없습니 다. 인간으로 태어나야 수행할 마음을 갖기 쉬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10 선계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어도 선근이 없어서 아주 박복하면 수행하 기 어렵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긴 했는데 살생의 업이 크면 몸이 계속 아프다든지 중간에 비명횡사하게 됩니다. 남에게 베푼 바가 없다면 아주 가난해서 평생을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기 도 합니다. 악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면 주변의 인연들도 전부 악해서 매 일 빚 받으러 와서 딱지 붙여놓고 간다든지 합니다. 그렇게 복이 하나도 없어서 공부가 안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수행을 하려면 어느 정도 세 속적인 복이 필요한데 앞서 닦은 선근이 자량이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세속 복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출가를 했답니다. 그는 평소 보 리밥에 거친 나물만 먹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재가 들어서 좋은 음 식을 먹으면 설사를 하더랍니다. 같은 밥상에 앉았어도 부침개 한 조각 을 못 먹습니다. 매일 그렇게 가난하고 복이 없으면 공부하는 몸 자체도 유지가 안 될뿐더러 생각 자체도 비루해서 공부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내 기가 힘듭니다. 그렇다고 지금 복이 낮은 사람은 공부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세속의 복이 약한 사람은 여태까지 오랜 생을 살면서 남을 위 해 베풀고 남의 목숨을 살려주는 일들을 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런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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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은 참선해서 바로 깨닫겠다고 결심해도 잘 안 됩니다. 참선하려고 앉 으면 다리에 관절염이 걸리고, 허리가 아파오고, 머리가 상기됩니다. 정신 적으로도 약해서 선을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스승 복도 희미해서 지도 를 잘 못 받고, 자기 나름대로 하다가 병을 얻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행 하는 데 자량위의 복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 불교에서는 이런 것을 매우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 다. 특히 비구는 그런 복을 짓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옛 스님들의 삶 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지나가다가 배가 고파서 쩔쩔매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 밥을 덜어서라도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셨습니다. 비 구라 해서 복 짓는 일을 소홀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수행할 때는 복이 가 장 밑바탕이 되고 이것을 쌓는 단계를 첫 번째 ‘자량위’라고 합니다. 부 처님께서는 10선계를 많이 설하셨고 재가자들한테도 오계를 꼭 받아서 좋은 일을 많이 하라고 권하셨습니다. 그것이 수행에 바탕이 되기 때문 입니다. 마치 건축을 할 때 밑에 기초를 닦는 것과 같습니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기초가 안 되면 나중에 5층, 10층 올렸더라도 건물이 무너지거나 기울거나 금이 가게 됩니다. 수행에서 자량위는 집의 기초와 같습니다.

 

기초가 잘 갖추어지지 않으면 불연(佛緣)이 적어서 여러 가지로 박복한 삶을 받습니다. 다행히 사람으로 태어나긴 했는데 소인배라 매일 먹을 것 만 찾고 돈만 밝힙니다. 성정이 어두워서 좋은 사람을 사귀지 못하고 이 리저리 다니다가 사기를 당해서 한 푼도 없고 그 고생이 다 끝나고 나니 까 늙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부처님이나 도 인이 돌아가신 뒤라서 직접 뵙지 못하고 시간상으로 공간상으로 자꾸 엇 갈립니다. 도인 계실 때 그 부근에 태어나면 분위기라도 어떻게 따라갈 텐데 시공간이 엇갈려 법을 들을 수 없습니다. 자량의 공덕을 많이 쌓은 사람은 스승과 법을 만나는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스승과 법의 복을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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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지 않기 위해 일체 삼보를 향해서 칠지공양을 올리는데 그것도 자량위 의 수행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하면 스승과 법에 깊은 인연이 생기기 때 문에 수행이 쉬워집니다.

 

5위 가운데 두 번째는 가행위(加行位)입니다. 가행은 힘을 들인다는 뜻 인데 자량위에서 쌓은 선행으로 밑바탕이 좀 갖추어진 뒤에 애써 닦아 나아가는 단계입니다. 전생에 쌓은 선행으로 이생에 복 받는 것을 생득 선(生得善)이라고 하는데 태어날 때부터 얻는 생득선에 비해 가행선은 노 력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자량위에서 쌓는 것이 세속적인 복이라면 가 행위부터는 출세간 무루지혜를 추구합니다. 성문 가운데 수다원이 되는 견도에 이르기 전까지가 가행위인데 예비수행이나 방편행에 해당합니다. 법을 듣고 사유하고 닦는 데 집중하기 때문에 여기서부터는 출가자에게 적합합니다. 재가자라 해서 아주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세속에 살면 집 중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세속에 있으면 결혼해서 아기 낳고, 아기 낳 으면 의무적으로 길러야 되고, 아기를 기르려면 돈을 벌어야 되고, 돈을 벌려면 사장 심부름도 해야 되고, 사장 심부름을 하려니까 저쪽하고 또 술을 한 잔 해야 하고, 이래야 먹고 삽니다. 매일매일 이렇게 죽자 살자 하다가 부인이 아파서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그때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 습니다. 세속에서는 부인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수행할 마음을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기에 늙은 부모까지 봉양하려면 재산이 있어야 하고 형제들과의 관계도 더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가행, 즉 번뇌를 끊는 일에 가속도를 붙이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출가하는 것이 좋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출가를 하면 우선 부인이나 남 편에게 싫은 소리 듣고 싸울 일이 없어서 사는 것이 단출합니다. 자식을 낳아 놓으면 그들이 라훌라가 되어 공부를 방해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도 출가하기 전 아들이 태어났을 때 “오, 라훌라”라고 하셨습니다. 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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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첫 마디를 그렇게 한 것이 이름이 되어 평생을 ‘라 훌라, 라훌라’ 좀 억울한 이름을 갖고 살았지만, 그도 출가하여 아라한 이 됩니다. 출가를 하면 번거로움을 떠나서 수행에 가속도가 붙습니다. 스승 있는 곳에 가서 구족계를 받고 부처님 말씀을 전적으로 배워서 바 른 견해를 세우고 그 정견을 바탕으로 깊이 있게, 더 빠르게 정진해 나아 갑니다. 이렇게 가행을 하다보면 수다원과를 얻고 그 뒤로 계속해서 사 다함, 아나함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성자의 지위도 결국에는 앞의 자량도에서 이룬 선근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복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복을 짓지 않아서 가난한 것과 세속 복을 지었더라도 내가 수용하지 않는 것 과는 다릅니다. 복을 짓지 않아서 가난해진 경우는 거지라 하고, 복을 지 었는데 수용하지 않는 경우는 비구라 합니다. 복을 짓지 않아서 가난한 거지가 비구까지 되어버리면 비구도 거지가 됩니다. 그런 경우는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같이 살아도 대중이 시끄럽고 공양하는 사람이 줄어들어 절 집안이 쪼그라듭니다. 반대로 지은 복을 자기가 수용하지 않고 남에 게 베풀면 자량이 더욱 쌓여갑니다. 자량도의 가장 대표적인 사람으로 수자타 장자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고 제자를 가 르치는 것을 보고 부처님과 제자들께 공양하고 거처도 마련해 드렸습니 다. 전 재산을 털어서 기원정사를 짓고 매일 법을 청해서 법을 들었습니 다. 부처님께서는 기원정사에 20년 동안 머물면서 중요한 법을 설하셨는 데 거기에는 수자타 장자의 공덕이 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가 지금도 경을 읽을 때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는 구절을 자주 봅니다. 이렇게 자량의 공덕을 갖춘 다음 세속적인 번거로움을 다 벗어놓고 더 깊이 있게 열심히 정진하는 것을 가행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견도위(見道位) 또는 통달위(通達位)라고 합니다. 자량을 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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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서 시작하여 가행도에 들어간 수행자가 가행도 끝에 공성을 체득하 여 법계의 평등성을 보는 단계입니다. 주관과 객관을 분별하는 마음이 사라져서 무분별지를 얻고 그것으로 번뇌를 끊습니다. 소승으로는 아라 한, 대승으로는 보살10지의 첫 번째 환희지에 해당하는데 여기서는 너와 나의 분별이 없기 때문에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나한테 이익이 되는 쪽으 로 생각하지 않고 남을 미워하거나 좋아하는 생각도 사라집니다. 견도, 도를 봤다는 말은 번뇌 없이 사는 길을 확인했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 는 번뇌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번뇌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입 니다. 세계도 나도 착각이고 망상일 뿐 영원성을 가진 것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일체법의 공성을 확실히 보는 단계가 견도위입니다.

 

견도에 이르면 그때부터 그를 성자(聖者) 또는 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때부터는 그분이 제자들로부터 절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절은 승복을 입었다고 받는 것도 아니고,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받는 것도 아니고, 무 슨 소임을 맡았다고 받는 것도 아니고, 노란 옷 입고 노란 모자 쓰고 앉 았다고 해서 받는 것도 아닙니다. 절을 받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분이 성자이기 때문입니다. 성자란 욕심을 없애서 ‘나’가 사라진 사람을 뜻합 니다. 이 분들은 영원한 ‘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 몸도 인연 따라 일어났다가 인연 따라 사라질 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안 사람들입니다. 성문4과, 연각, 보살초지 이상, 최고의 스승이신 붓다가 성자에 들어갑니 다. 범어 ‘ārya’를 중국 사람들이 ‘성(聖)’으로 번역해서 성스러운 분이 라고 했는데 ārya는 깨끗하다, 고결하다는 뜻입니다. 욕심이 없으니까 깨끗하게 살아갑니다. 욕심이 없으니까 거짓이 없습니다. 욕심이 없으니 까 평등한 마음을 가져 남을 해칠 일을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런 분을 성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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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교단에서는 무슨 기적을 일으켰다면서 성자라고 하는데 불교에 서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일으킬 기적이 없다고 보는 것이 불교입니 다. 진짜 기적은 욕심을 버린 것입니다. 욕심을 버린 성자들은 존중을 받 아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이 분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상단에 모십니다. 조사당에 모시고 공양을 올리고 예경을 바칩니다. 절집 안에서는 많은 도인들이 나왔습니다. 전당을 짓고 탱화와 영정을 모시고 예경을 바치는 것은 그분들이 수행을 해서 견도에 든 성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승복만 입었으면 절을 하는데 그것도 틀렸다 할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도인이 되라고 절하는 것이니까요. 예불할 때 공경을 바치는 대상은 견 도에 든 성자들입니다. 한국에서는 이것을 견성이라고 합니다. 마음도 본 래 자성이 없다는 것을 참선을 통해 확실히 아는 단계입니다. 다섯 단계 중에 자량도, 가행도를 거쳐 견도에 들어야만 수행이 제 길로 들어섰다 고 봅니다. ‘견성이 곧 성불’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제야 제 길 로 들어선 단계를 다 끝난 것으로 보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견도에 도달하면 ‘환희지(歡喜地)’라고 해서 번뇌가 사라 진 경계를 확실히 보고 기쁨을 느끼는 단계입니다. 이제부터 일체중생을 위해 점점 더 자비와 지혜를 기르는 기나긴 행로를 걷게 됩니다. 자비와 지혜를 강력하게 닦아서 보살 초지를 지나 2지, 3지부터 10지까지 올라 가서 등각, 묘각,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수행과정에 이와 같은 단계가 있 다는 것을 이해하면 수행자가 자신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조그 마한 경계가 왔다고 해서 수행을 대단히 깊이 한 것처럼 착각하지 말고 배운 바에 비추어 내가 지금 이 정도 단계에 있구나, 알아야 합니다. 견성 하면 바로 성불이라고, 돈오돈수만 주장하는 부분에 대해 바른 견해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자량위, 가행위, 견도위에 이어 수도위와 무학위에 관해 말씀드리겠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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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수도위를 수습위(修習位), 무학위를 구경위(究竟位)라고도 합니다. 자량위는 선행을 하면서 수행할 준비를 하는 단계이고 가행위는 본 수 행에 앞선 예비 수행을 하는 단계입니다. 이 두 가지를 거쳐 견도에 오르 면 성자가 되고 대소승에서 각각 아라한과 보살 환희지에 해당합니다.

 

한국 불교에서는 조사 스님들께서 화두타파가 되었을 때를 견성했다 하고 그것을 견도로 봅니다. 견성하면 다 되었다, 성불했다고 하는데 그 것은 견도 이후의 수도와 무학도가 빠진 채로 이야기하는 것이 됩니다. 화두가 타파된 상태에 대해서 오해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화두를 들고 의심에 집중하는 것은 분별을 없애기 위함입니다. 화두에서 제시하는 문 제는 생각을 이렇게 저렇게 굴려서 답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관 념적으로 생각해서 ‘이거 아닙니까?’ 하면 그 어떤 대답도 틀리게 되어있 습니다. 왜냐면 사량과 분별을 통해서 나온 답으로는 번뇌를 끊을 수 없 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700공안이 머리를 굴려서는 대답이 나올 수 없 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옹선사의 말씀처럼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분별로 일 으킨 망상들이 사라진 자리라야 화두타파가 가능합니다. 화두의 핵심은 생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의심하는 데 있습니다. 의심에 집중이 되 면 안에서 분별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분별은 ‘나’를 중심으로 일어납 니다. 내 욕심에 따라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것을 가지고 자꾸 살림살이로 삼으니까 복잡한 일만 생겼던 것입니다. 화두를 들고 집중해서 오직 의심뿐이고 이런저런 분별이 전부 사라졌을 때 그것을 ‘의 단독로(疑團獨露)’, 의심 덩어리만 오롯이 드러났다고 합니다. 집에서 복 잡한 일이 생겼을 때 아무리 생각을 굴리고 싸워봐야 해결은 쉽게 나지 않습니다. 그럴 때 화두를 들거나 관세음보살을 염하면서 분별 망상이 사라지는 쪽으로 들어가면 복잡했던 생각이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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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것처럼 무자화두를 드는 사람은 ‘무(無)’에 의심 덩어리가 되어 마 음이 오고 가고 할 데가 없습니다. 우리 뇌는 한 가지 이슈가 생겼을 때 두 가지가 안 떠오르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처리할 수가 없 습니다. 집에 불이 나면 무조건 살려고 뛰쳐나올 수밖에 없고 이것저것 챙겨 나올 생각이 안 납니다. 문제가 주어지면 거기에 집중해서 해결하려 고 발버둥을 칩니다. 만약 호랑이한테 쫓기는 상황이라면 집에 가서 뭘 먹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도망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화두에 의심을 일으켜서 거기에 집중하는 것을 의단, 의심 덩어리라 하고 그 상태가 지속되면 삼매라고 합니다.

 

화두삼매에 들어 3일, 또는 일주일 깊이 집중이 되면 왔다 갔다 하는 생각이 싹 사라져서 다시는 안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멍청해진 것 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멍청한 생각이 없어지니까 진짜 맑은 지혜 가 생겨서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집중이 되어서 망념이 사 라졌을 때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하고 육문상방자금광(六門 常放紫金光)이라”, 분별 망상이 사라지면 안이비설신의 6문을 통해 자금 광이 항상 나오게 됩니다. 지혜를 상징하는 자금색 빛이 눈을 통해, 입을 통해, 온몸을 통해서 표현됩니다. 그 빛이 입으로 나오면 지혜로운 말이 되고 몸으로 보여주면 지혜로운 행이 되는 것입니다. 조사 스님들이 견 성을 하셨다 그러면 그 경계에 들어간 것을 말합니다.

 

불법에는 이런 훌륭한 방법이 있어서 예부터 이 방법을 통해 해탈을 얻 은 분이 많습니다. 도인 한 사람이 나오면 그와 인연 있는 사람은 전부 다 극락이 됩니다. 우리나라도 도인이 많이 나왔습니다. 전국의 전통사 찰 가운데 정신적인 지주가 없었던 곳이 없습니다. 화순 쌍봉사 철감국 사, 양양 진전사 도의국사, 남원 실상사 홍척국사, 영주 부석사 의상 스 님 등 큰 스님들이 도를 얻고 법을 펼치셨습니다. 모두가 부처 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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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의 목표이고 도에 들어가게끔 이끌어주는 것이 불사입니다. 법당을 크게 짓고 거대한 불상을 만든다고 불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을 통해서 좋은 전통을 이어가고 거기서 도인이 나와야 합니다.

 

도를 닦으려면 내 선근이 좀 약하더라도 자꾸 발심해서 깨달음으로 들 어가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욕심을 줄여야 합니다. 도 를 닦는 일이 아니어도 우리가 욕심을 부려서는 같이 사는 길이란 없습 니다. 지구상에 인류가 태어나서 고생인류를 거쳐 현생인류에 이르기까 지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지만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은 욕심을 줄이는 것입니다. 세계에는 굶주리는 사 람도 많은데 생산량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잉여분을 가지고 평등하게 나눠먹으면 굶는 사람 하나 없이 다 살 수 있다는데 안 나눠 먹으니까 지 금도 2억, 3억 되는 아이들이 굶주리거나 치료를 못 받아서 죽어가고 있 습니다. 욕심을 줄이고 평화롭게 산다면 전 세계가 무기개발에 투자하는 어마어마한 돈으로 사람을 살리는 길을 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깨어있는 정신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 불자입니다. 복 이 있어서 돈을 좀 많이 벌면 가난한 사람과 나누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불자입니다. 사람들이 도를 닦는 세상이 되어야 시끄럽지 않습니 다. 도 닦지 않고 욕망으로 사는 세상에서는 죄업을 짓고 싸움도 많이 일 어납니다. 그럴수록 사람도 세상도 더욱 혼탁해집니다. 나는 항상 원효 스님의 『발심수행장』을 생각합니다. “조향암혈(助響巖穴)로 위념불당(爲 念佛堂)하고 애명암조(哀鳴鴨鳥)로 위환심우(爲歡心友)니라. 메아리 부 딪히는 바위굴로 염불당을 삼고 슬피 우는 기러기로 친구를 삼겠다.” 욕 심을 버리고 공부하는 사람의 삶입니다. 성경에도 “심령이 가난한 자에 게 복이 있나니”, 욕심 버린 자의 행복을 가르칩니다. 불자라고 하면 부 처님 제자라는 뜻인데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도를 닦아야 제자이지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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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러기면 불자가 되겠습니까?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원효 스님은 또 “도인탐(道人貪)은 시행자수치(是行者羞恥)요, 출가부(出家富)는 시 군자소소(是君子所笑)라.” 도 닦는 사람이 탐욕을 내는 것은 수행자의 수치이고 출가한 사람이 부자로 사는 것은 군자들의 웃음거리라고 하셨 습니다. 여러분이 부처님 제자라면 도인들이 가르쳐주신 대로 욕심을 버 리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도를 닦아서 깨닫는 것을 견도라고 합니다. 그런 도인이 한 사람 나오 면 그와 인연 있는 사람은 좋은 영향을 받습니다. 보고 듣고 배워서 차 츰차츰 도를 닦아 극락을 이루어갈 것이니 견도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량을 갖추지 않고 예비 수행을 하지 않으면 견도에 들지 못합 니다. 우리는 성급해서 다리를 놓기도 전에 큰 강물을 건너려고 합니다. ‘언제 다리 놓겠냐?’ 하면서 맨발로 들어가면 왼발, 오른발,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물에 빠집니다. 공덕의 배가 없는데, 반야의 배가 없는데 어떻 게 건너갈 수 있겠습니까?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남에게 베푸는 것으로 우선 자량을 쌓으십시오. 남에게 베풀면 겉으로는 손해인 것 같 지만 복이 쌓입니다. 혼자 먹을수록 손해를 봅니다. 복진타락(福盡墮落) 이라, 복이 다 하면 반드시 망합니다. 전생에 지은 복이 다했을 때는 아 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주저앉습니다.

 

수행5위 가운데 네 번째는 수도위(修道位)입니다. 견도가 이루어지면 그게 끝이 아니고 그 다음에 진짜 도 닦는 과정이 있습니다. 소승으로는 견도인 아라한에 해당하고, 대승으로는 환희지를 지나 제2 이구지(離垢 地)로부터 제10 법운지(法雲地)에 해당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견도에서 다 끊지 못했던 수많은 미세번뇌를 끊고 보살행을 해나갑니다. 육도에 윤회하되 인간세계에만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지장 보살님처럼 지옥에 태어날 때도 있고, 아귀에 태어날 때도 있고, 수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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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 때도 있고, 축생에 태어날 때도 있습니다. 전생담을 보면 부처님 께서도 비둘기나 사슴으로 태어난 적도 있고 3아승지 겁을 윤회하면서 많은 중생을 건졌습니다. 이구지에서 시작해서 발광지, 염혜지, 난승지 등 을 거쳐 올라가서 법운지까지 중생을 위해서 닦는 기간이 3아승지 겁이 고, 그렇게 해서 공덕의 몸이 원만하게 갖추어지는 이 단계가 진짜배기 도를 닦는 수도위입니다.

 

선가에서는 이 단계를 보림(保任)한다고 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도를 닦는 동안 그 사람의 능력이 점점 커집니다. 우리나라 원효 스님도 견도 를 넘어서 수도의 경계에 들어갔던 분입니다. 차츰차츰 중생을 위한 일 을 하면서 특별한 거처 없이 돌아다니셨기에 사람들은 스님이 어디에 계 신지 잘 몰랐습니다. 온 마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찬불가를 만들 어 부르고 무애춤을 추면서 사람들이 오면 법을 가르치기 시작해 수행으 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산티데바 같은 분도 7세기경 나란다 대학에서 견도에 들고 나서 『입보리행론』과 『보살집학론』을 설법하시고 나란다 대학에서 사라지셨습니다. 가끔 소문이 들리기도 하고 길거리에 서 설법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그분에게 법문을 청하면 법을 가르쳐가면서 정진을 권하셨습니다. 일흔 몇 살인가 에 돌아가셨다는데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모릅니다. 이런 분들 은 죽음에 자유롭습니다. 이렇게 보살행을 제10지까지 쭉 해나가는 과정 을 수도라고 합니다.

 

수도를 통해 도를 성취하신 분을 대보살, 또는 마하살이라고 합니다.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등이 그런 분인데 우리는 그분들이 이 끌어주시기를 바라고 그분들은 모든 중생에 응해주십니다. 관세음보살 님 같은 분은 ‘내 이름을 한 번만 불러도 그대 주변에서 이끌어주겠다’ 는 원을 성취하신 분입니다. 도를 닦은 결과로 그런 능력을 얻은 것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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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 앞에 견도 전까지는 문에 들어오기 위한 단계로 아직까지는 거짓 도 있고 허구도 있고 잘못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도에 들어가 서부터는 더 이상 잘못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견도에서 번뇌 없는 무루 법이 일어나면 몸에 계체(戒體)가 형성되어 의식적인 허물을 짓지 않게 되 고, 그 다음 수도로 나아가 육바라밀을 닦아서 완성하면 공덕의 몸, 보 신(報身)이 됩니다.

 

수행5위 가운데 다섯 번째는 무학위(無學位)입니다. 수도위의 끝 제10 지를 지나 등각, 묘각은 더 배울 것이 없기 때문에 무학위라 하고 마지막 단계이기 때문에 구경위(究竟位)라고도 합니다. 무학의 경계는 등각, 묘 각에 올라서 부처가 되었을 때를 말합니다. 번뇌가 다 끊어졌고 일체중 생을 위한 공덕신이 완성되어 한 중생도 빠짐없이 건지게 됩니다. 석가모 니 부처님도 설법을 해서 말세에 인연이 없는 무연중생까지도 들어올 길 을 다 열어놓으셨습니다. 모든 중생은 시간의 문제일 뿐 어느 때인가 다 성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승의 무학도는 아라한을 말하고 대승의 무 학도는 보살10지를 말합니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은 지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혜도 더 닦을 것이 없습니다. 보살10지는 법운지 (法雲地)라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말하고, 행하더라도 정법과 한 치도 어 긋나지 않습니다. 보는 견해가 정확하고 거짓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등각, 묘각이 더 배울 것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금강경』에서 “여래는 다 알고 다 보신다(悉知悉見).”라고 하셨습니다. 연기의 원리를 알고 공성을 알고 세속의 인과까지도 자세히 다 아십니다.

 

무학에 이른 소승의 아라한과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위해 모든 법을 다 말씀해주시고 무여열반에 드셨습니다. 열반은 아라한의 유여열반, 보살 의 무주처열반, 부처의 무여열반 이렇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유여열반은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의 준말인데 여기서 의(依)는 의지할 곳, 즉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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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는 몸이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보살은 아라한의 열반을 얻기는 했 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중생을 위해 윤회하되 중생은 아닙니다. 보살 의 열반은 머물지 않고 중생의 윤회에도 머물지 않으니 그것을 어느 곳 에도 머물지 않는 열반, 즉 무주처열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런 경계를 다 벗어나서 무여열반에 드십니다. 남은 것이 하나도 없고 보살행을 하기 위해서도 다시는 이 세상에 오지 않습니다. 근본무명까지 도 다 끊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혹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지금 저 극락세계에 계신다고 하는데,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 세 상에 오시지 않을 뿐더러 삼계를 벗어나셨기 때문에 어떤 곳에서 형체 있 는 몸이나 형체 없는 몸을 받고 살지 않습니다. 우주의 대법신으로 돌아 가신 것입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듯이 “무수상행식 …… 이무소득고”, 공성의 원리에 의해 공성은 무색이니, 안이비설신의가 어디에 있으며 색 성향미촉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주의 법신은 공성인데 원래 자성이 없는 속에 무엇이 따로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어디에 계시겠습니까?

 

『입보리행론』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공 양은 왜 올리느냐고 물었습니다. 산티데바가 공양 올리는 자의 마음이 라고 했습니다. 여래가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수행하기 위해서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친께 제사를 지낼 때도 어머니, 아버지 께 평소에 못 드시던 것을 조금이라도 드리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올리지 요. 내 마음의 문제입니다.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예경하는 이유는 석가 모니불께서 부처가 되었듯이 나에게도 그런 품성이 있고 내가 그렇게 되 기 위해서 인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경할 때마다 이런 생각으로 하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구사론』과 『유식론』에 근거하여 수행의 다섯 단계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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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드렸습니다. 최종 목표는 부처가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긴 세월 동안의 수많은 과정을 정리한 것이 수행5 위입니다. 수행을 수습(修習)이라고도 하는데 습은 자꾸자꾸 실행해서 몸에 배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처가 될 때까지 목표를 잃지 않고 자신 의 업에 따라서 하나하나 해나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모 든 사람이 바로 직입여래하면 좋겠지만 습관이 닦여 있지 않으면 어렵습 니다. 우리의 습관은 힘이 셉니다. 졸지에 없어지거나 생기거나 그렇게 되 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줄일 것을 하나하 나 줄여나가고 견도에 이르러 공성 체험을 하면 다시 거기서부터 보살의 행을 하나하나 쌓아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부처가 될까, 그런 말들을 하지만 제일 게으른 사람이 하 지는 않으면서 멀다 그럽니다. 그것이 게으른 사람의 특징입니다. 허리가 아파서 못 한다, 바빠서 못 한다, 핑계는 많습니다. 원효 스님도 『발심수 행장』에서 “차언부진(遮言不盡)이어늘 탐착불이(貪着不已)하고 제이무 진(第二無盡)이어늘 부단애착(不斷愛着)이라. 끝없이 핑계를 대면서 탐 착을 그치지 못하고 끝없이 미루면서 애착을 끊지 못한다.”라고 경계하 셨습니다. 한 걸음 걸어가면 한 걸음만큼 가까워질 것이니 핑계 대지 말 고 미루지 말고 지금부터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수행5위를 참고하면 졸 지에 뛰어오르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지금 어느 위치에서 공부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길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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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장

10바라밀

 

오늘은 보살의 수행 중 열 가지 바라밀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6바 라밀에 방편(方便), 원(願), 력(力), 지(智)를 더해 10바라밀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화엄에서만 10바라밀을 설했다고 하는데 반야부, 유가부 등 많은 대승경전에서 10바라밀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앞에서 6바 라밀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그것과 관련지어서 나머지 4바라밀을 설명 하겠습니다.

 

6바라밀 가운데 보시, 지계, 인욕, 정진 네 가지는 자량과 가행에 해당 하고 선정과 지혜는 본수행에 해당합니다. 대승보살의 지위로 말한다면 초지인 환희지까지는 자량도와 가행도를 거쳐 견도에 이른 것이고 그 뒤 로 수도의 과정에 4바라밀이 붙어서 10바라밀이 완성됩니다. 앞의 보시, 지계, 인욕, 정진 4바라밀이 기본이 되고 사마타와 비파사나를 통해 마 음속의 번뇌를 끊고 그 다음 4바라밀을 가지고 그때부터 일체중생을 위 한 진짜 수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6바라밀의 완성이 아 니고 거기에 4바라밀을 추가해서 수도분과 무학도분까지 가야 바라밀이 완성됩니다.

 

견도에 든 사람은 어떻게 수행을 하는가? 보살초지, 환희지에 들면 성 자가 되는데 거기가 끝이 아니고 그때부터 진정 성자의 힘을 발휘해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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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옥스님 설법집_행복수행론-3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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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 전에 자신의 악업을 약화시킨 것도 중생을 위 한 삶이 됩니다. 보시는 일체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이지만 나의 욕심도 동시에 줄어듭니다. 그래서 아직 욕심이 다하지 않은 수행자를 위해 첫 번째로 보시바라밀을 권하고 그 뒤로 이어지는 바라밀도 반드시 채워져 야 수행이 완성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냥 참선만 하면 깨닫는데 보시는 왜 하며, 계율은 왜 지키며, 인욕은 왜 하며, 이미 부처인데 정진할 필요가 있느냐고 합니다. 아마도 정정진이 무엇인지 모 르고 하는 오만불손한 소리일 것입니다. 따라서 6바라밀과 10바라밀의 관계를 설명하여 도인들이 어떻게 중생교화를 위해 노력하는가, 그리고 나의 수행이 어떻게 부처를 향해 가도록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해 살펴보 도록 하겠습니다.

 

『화엄경』은 부처에 이르는 길을 총체적으로 설명합니다. 특히 십지품 에 수도분에 들어간 보살이 초지에서부터 10지에 이르도록 하나하나 수 행하는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보살 초지에 들어가면 그동안 닦아왔던 보시, 지계, 인욕, 정진 바라밀을 행하지 않느냐면 그렇지 않습 니다. 앞의 바라밀은 충분히 닦았으니 뒤의 4바라밀만 닦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는데 앞의 4바라밀은 기본으로 항상 깔려있습니다. 10바라밀 전체가 부처로 가는 행의 전반에 다 깔려있고 이렇게 사는 것 이 수도위 보살의 삶입니다.

 

보시에는 법보시, 재보시, 무외시,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법을 가르쳐주거나 재물을 희사하거나 두려움을 없애주 는 구체적인 보시행을 통해 나의 욕심이 약화되도록 합니다. 불교의 수 행은 결국 욕심을 버리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욕심은 ‘나’를 고집하 는 데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무아, 공성을 체험한 다는 말입니다. 지계는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이 요점입니다.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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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해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생명뿐 아니라 무기물이라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 지계행입니다. 상대를 가장 해치는 것이 목숨을 빼앗는 일이기 때문에 “살생하지 말라”가 첫 번째이고 다른 계들도 그 범주 안에 거의 다 들어갑니다. 불교 윤리관의 첫 번째가 모든 생명을 살리는 일이고 이것이 전제되지 않는 한 모두가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지구상에는 지금도 다른 생명을 죽이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심 지어 불교국가를 표방하는 미얀마도 군부 쿠데타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습니다. 인권과 자유를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을 총으로 무자 비하게 다루고 있어서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죽어야 될지 모 릅니다. 몇몇 사람이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우매한 행동을 하고 있을 뿐 절대 불교적이지 않습니다. 만약에 누군가 알라신을 모독했다고 명예살 인을 한다면 그들은 회교도라 해도 이미 알라신을 배반한 사람들입니다. 불교국가 속에 살면서 생명을 함부로 대한다면 겉으로만 불교도이지 실 제로는 불교도가 아닙니다. 이미 국민을 향해서 총을 겨눈 자를 어떻게 불교도라 하겠습니까? 형식상으로는 절에 다니고 부처님 앞에 절하고 염불을 하는지 몰라도 불살생의 계율을 지키지 않을 때는 불자가 아닙니 다. 보시와 함께 지계는 수행자가 반드시 지녀야 할 덕목입니다. 인욕의 핵심은 무아에 있습니다. 나를 내세우지 않아야 인욕이 됩니다. ‘나’가 있는 상황에서는 억지로 참는다고 모욕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정진은 배운 것을 부지런히 실천하여 게으름을 막고 선법을 자라나게 합니다. 이것도 ‘나’가 있으면 행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좀 더 편하고 내가 좀 더 게으름 피우고 내가 좀 더 세속의 즐거움을 취하려 한다면 정진이 되겠습니까? 보시, 지계, 인욕, 정진 네 가지 바라밀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불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바라밀을 닦으려면 먼저 고통의 삶을 자각하고 벗어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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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발원해야 합니다. 바라밀이라는 말 자체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 을 뜻합니다. 도피안, 저쪽 언덕으로 건너간다고 할 때, 이쪽 언덕은 힘든 삶을 뜻합니다. 왜 삶이 힘드냐면, 잘못 생각하고 잘못된 업을 지어 고통 스러운 결과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10바라밀입니다. 그중에 보시, 지계, 인욕, 정진으로 많은 선 법을 쌓을 수 있지만 마음속의 깊은 번뇌까지 다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 래서 이 네 가지를 예비행이라 하고 그 뒤로도 많은 수행 과정이 남아있 는 것입니다. 마음속의 깊은 번뇌인 숙업까지 관찰해서 없애는 공부는 불 교의 수도위에서만 가능합니다.

 

다른 사상이나 가르침은 마음속까지 다루지 않습니다. 유물론자들은 모든 존재를 물질로만 이해합니다. 물질로 된 몸이 죽으면 소멸되어 아 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합니다. 달라이 라마께서 스무 살 전에 중국의 마 오쩌둥과 만나서 이야기해보니까 마오쩌둥은 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고 합니다. 달라이 라마께서는 그때 마오쩌둥과는 같이 할 수 없다고 생 각했답니다. 진실에 접근하지 못할뿐더러 그런 사상으로는 마음속의 번 뇌를 제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브라흐만교는 아트만이라는 영혼을 인 정하고 모든 사물에 다 영혼이 있다는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우리에게도 아트만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트만은 불변이기 때문에 마 음 그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과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불교만이 이 마음을 변화시킬 방법을 찾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일어나는 첫 단계의 가장 미세한 곳까지 관찰하 여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어떻게 잘못된 마음이 계속 일어나는가를 보셨습니다. 잘못된 마음의 작동을 멈추려면 근원을 없애야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아(我)에 뿌리를 두고 내가 있다는 착각에서 모든 분별이 일 어납니다. 나를 중심으로 욕심을 일으키고 분노를 일으키고 어리석은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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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을 일으킵니다. 이것을 없애려면 수행의 단계를 밟아 나가야 하는데 선 행을 쌓고 보시, 지계, 인욕, 정진 4바라밀을 닦는 것으로 번뇌와 악행이 약화되기는 해도 아주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4바라밀만 행해도 굉장히 착한 사람이고 훌륭한 수행자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마음속의 미세한 번뇌까지는 제거되지 않습니다.

 

수행은 밭에 김을 매는 일과 같습니다. 가장 영리한 사람은 풀이 조금 올라왔을 때 뽑기 시작합니다. 뿌리가 깊이 내리기 전에 뽑으면 힘을 들 이지 않고 없앨 수 있고 나중에 한두 개 올라오더라도 뽑기가 쉽습니다. 그다음에 중간 정도 되는 사람은 뿌리가 다 뻗었을 때 뽑기 시작해 굉장 히 힘들어집니다. 풀뿌리가 사람을 끌고 내려갈 지경이라 호미로 파고 뒤 집어엎고 흙을 털고 그래야 겨우 해나갈 수 있습니다. 제일 어리석은 사 람은 씨가 다 영근 다음 풀을 뽑는데 씨를 떨어뜨립니다. 잡초를 잔뜩 뽑 았지만, 다음 해에 몇백 배 많이 납니다. 씨가 밭에 떨어지고 나면 잘 안 보이니까 이 사람은 잡초 제거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게으른 집은 논 에 피를 안 뽑아놓아서 벼가 고개를 숙일 때 피가 빳빳하게 서 있습니다. 벼보다 웃자라서 빳빳하게 서 있는 게 보기 싫다고 모가지만 떼러 다닙 니다. 베려고 해도 익은 벼가 다 떨어져 버립니다. 피는 벼보다 강합니다. 얼마나 단단하게 방호장치를 하고 나오는지 겨울에 얼어 죽지도 않고 물 속에서도 물이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박혀 있다가 봄이 되면 나옵니 다. 정확하게 모 심을 때 나옵니다. 왜냐하면 위장을 해야 하니까요. 그 렇게 영리합니다. 우리의 번뇌도 피와 같습니다. ‘나’라는 뿌리를 내리고 자기중심적으로 작동하여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이기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번뇌를 가라앉히고 ‘나’의 뿌리를 관찰하려면 앞의 4바라밀만 가지고 는 안 되고 사마타와 비파사나를 닦는 본 수행에 들어가야 합니다.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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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이라고 하는 이유는 마음을 직접 다루기 때문입니다. 본 수행을 통 해 마음을 안정시키고 무아가 되어 번뇌가 사라지게 만듭니다. 마음이라 는 것이 항상 왔다 갔다 하니까 사마타를 해서 하나에 집중합니다. 하나 에 집중하라고 하니까 ‘나는 돈에 집중하렵니다.’ 하는 사람도 있습니 다. 『금강경』 『천수경』도 주식이나 비트코인 잘되라고 읽는다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불교의 수행은 마음의 번뇌를 없애는 것이고 마음을 깊이 관찰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루는 데 있어서 그 번 거로운 양극단의 분별심을 사라지게끔 해주는 것은 불교의 선 수행입니 다. 그런데 집중 하나만 가지고는 100%가 안 되니까 비파사나를 내놓은 것입니다. 사마타의 집중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다가 생각이 일어나면 비 파사나로 실체가 없음을 관찰하는데 사념처관이 이 방법에 속합니다. 『금강경』에서 여섯 가지 비유로 든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관찰해보면 모든 것은 자성이 없고 전부 허망한 그림자일 뿐이라는 말 씀입니다.

 

선 수행을 통해 견성했다고 할 때 무엇을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아(我) 가 사라진 상태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번뇌는 안 일어납니다. 의식적인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분별심도 사라지기 때문에 나에게 잘해 주면 좋다, 나에게 못하면 싫다, 이런 것도 없어집니다. 선화월보살 같은 이는 당신을 죽이는 왕에게 원망이나 미움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금 강경』에 나오는 가리왕 이야기도 있습니다. “가리왕이 내 몸을 토막토막 내어서 죽일 때 만약에 아(我)가 있었다면 마땅히 분노와 원망하는 마음 이 났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면 다음 생에라도 원수를 갚겠다고 했을 겁 니다. 그러나 부처님에게는 그런 마음이 일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4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비파사나가 이루어져서 도인이 된 다음에는 중생을 교화합니다. 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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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바라밀 중 일곱 번째 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을 닦습니다. 방편바라밀 은 욕심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시행할 수 없습니다. 욕심이 남아 있으 면 남을 위해 불법을 설명하고 경을 읽어주고 재를 지내주고 해도 방편 이 되지 않습니다. 방편은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저 사람에 게 이익이 되어야 하고, 그 이익은 번뇌가 사라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절 에서 소원 하나 들어준다고 기도하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절대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 거나 바이러스 퇴치라고 했을 때 기도한다고 그 소원을 들어줄 자가 어 디 있겠습니까? 번뇌를 덜어서 중생을 지혜롭게 만들어주어야 방편바라 밀이 됩니다.

 

방편의 또 한 가지 조건은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에게 욕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왕이 백성을 위한다고 하고 지금도 국가 가 국민을 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고 권력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자 기를 위해서 정권을 잡고 자기를 위해서 삽니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서 해준 역사가 별로 없고 오히려 국민을 이용하고 심지어는 독재자가 나와 서 국민이 고통을 받은 때도 많습니다. 위정자들이 자기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결과입니다. 위정자가 도를 닦아 욕심을 버린다면 그가 펼치는 정 책이 고통을 줄이는 방편이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보살 이 쓰는 방편의 핵심은 욕심이 없는 데서 나옵니다. 수행자라면 지금 자 신이 하는 일을 진정으로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하는가? 절을 위해서 이러는가? 신을 위해서 희생하는가? 조금이라도 욕망과 어 리석음이 남아 있으면 방편이 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힘들어할 때 나를 버려야 그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습니다. 아이가 물에 빠지면 어머니는 헤엄을 치거나 못 치거나 뛰어 들어갑니다. 나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이익과 내 집단의 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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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위해 베푸는 것은 방편이 아닙니다. 도인이 된 후에는 수단과 방법을 매우 적절하게 써서 상황에 맞게, 사람에 맞게 도움을 줍니다. 이때부터 도인의 풍모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 도인과 도인 아닌 사람이 차이가 납니다. 유사 종교들은 자기를 위하고 자기 집단을 위해서 욕심 을 부리기 때문에 사람들을 속입니다. 자기도 자기가 낸 생각에 속고 있 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자기가 교화했다고 생각한 사람에 의해서 배격을 당합니다. 속았다는 것을 안 사람이 분개해서 돌아서기 때문입니 다. 방편을 쓰는 도인에게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불법문 중에는 ‘불사일법(不捨一法), 깨어있는 사람의 법문 안에는 한 법도 버릴 것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익이 되는 방법을 쓰되 나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 상대에게 독이 되지 않습니다. 불법 의 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수도분, 초지에 들어가 교화를 시작하면 무 엇을 하든 무주상이 됩니다. 보시를 해도 100% 무주상 보시가 되고 스 스로 계율이 100% 유지되어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 이 도인입니다. 도인이 아니면서 도인 행세를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도인은 그 어떤 것도 자기 욕심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일체중생을 위 해서만 모든 방법을 씁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의 병을 낫게 하려고 약도 먹이고 어려운 수술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방편은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한 법도 버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이익 을 위해서, 당신의 집단 이익을 위해서, 부처라는 이름을 내기 위해서 했 던 것은 한 번도 없습니다. 오로지 중생이 번뇌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 는 마음만 있을 뿐이고 그것을 위해 갖가지 방법을 베푸는 것을 방편바 라밀이라고 합니다.

 

10바라밀 가운데 여덟 번째는 원바라밀(願波羅蜜)입니다. 보살초지 환 희지부터는 원바라밀을 닦습니다. 처음 발원했던 그 마음을 항상 유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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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원바라밀입니다. 원은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에 욕심과 혼동할 수 있으므로 구분을 잘해야 합니다. 내가 있고 내 가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만약 제가 절 을 하나 가져야 되겠다고 욕심을 내서 절을 부지런히 지었다면 원력이 있 어서 지은 게 아닙니다. 우리 종단에서는 크기 경쟁을 많이 합니다. 동양 최대의 불상, 동양 최대의 법당, 제일 큰 절, 제일 오래된 절. 그게 무슨 의 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중생을 위하겠다는 생각이 있어야 원이 됩니다.

 

전에 내가 아는 스님 한 분이 백일기도 용맹정진을 하셨습니다. 너무 열심히 하시는 것을 보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하시는지 물 었습니다. “예, 제가 여기 저기 돌아다니려니까 힘이 들어서 내 절 하나 지 으려고요.” 그 스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재가자들도 기도하는 목적이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원(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수행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자기를 위하기 때문입니다. 원력은 단 두 가지,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으로 요약됩니다. “모두가 깨달음으로 나아 가게 하소서. 일체중생에게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게 하소서.” “내 모양을 보는 이나 내 이름을 듣는 이는 보리마음 모두 내어 일체중 생이 모두 삼악도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이 마음이 원입니다. 그 원을 실천해나가는 것이 초지부터의 수행입니다. 오직 그 마음밖에 없습니다.

 

달라이 라마 존자를 보면 중생을 위해 살아가십니다. 지금 연세가 여 든일곱이신데 코로나 사태 속에서도 중생을 위해 법을 펼치십니다. 우리 생각에는 법회를 잠시 그만두고 쉬면 좋겠는데 당신께서는 비대면으로 라도 법회를 하려고 애를 쓰십니다. 조금이라도 부처님 말씀을 전달하려 는 그 마음이 보살의 원입니다. 달라이 라마의 삶이 원을 실현하는 보살 의 삶이라면 우리의 삶은 나를 뿌리에 두고 욕망을 실현하는 범부의 삶 이라 하겠습니다. 내가 있고, 내 욕심을 채워야 되겠고, 집을 어디에 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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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올라갈지 계산하고, 자식이 어느 대학에 합격하고 얼마나 성공할 까, 그런 삶에 무슨 원력이 있겠습니까? 개인밖에 없습니다. 저마다 소망 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원력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반 면에 보살은 공성을 체험하여 무아가 되었기 때문에 욕심을 내려놓고 상 구보리와 하화중생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원바라밀이고 보살초지 를 넘어서면 순수하게 원바라밀을 실현하면서 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깨끗해지고 소통이 잘 되어서 살기 좋은 곳이 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된 사회에서는 남을 해치는 일 이 줄어듭니다. 원바라밀을 기준으로 우리 사회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 다. 깨끗하고 투명한 사회인지, 소통이 잘 되는 사회인지 말입니다. 내가 만약 기업 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마 음이 있는지, 세금은 제대로 내고 있는지, 일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서 환경을 갖추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힘든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순탄하게 지내다 가도 역경계를 만나면 힘들어하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순경계가 있으면 역경계도 분명히 있습니다. 흘러가는 물을 타고 내려갈 때는 쉬워도 물 을 거슬러 오르려고 하면 힘이 드는데 인생에는 순경계와 역경계가 교차 합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낮과 밤이 번갈아 오는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지 낮만 계속 있으면 사람이 못 삽니다. 저 유럽 어 디에는 백야가 되는 곳이 있는데 사람 살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우리는 순경계만 오기를 바라지만 절대 순경계만 있지 않고 역경계가 함께하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가 깊고 산이 낮으 면 골짜기가 얕습니다.

 

수행자는 역경계가 왔을 때 그것을 수행의 계기로 삼습니다. 마치 운동 선수가 훈련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운동선수는 역경계로 연습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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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단련시키는데 굉장히 힘이 들고, 힘이 들어야 결국은 순경계가 옵니 다. 역경계가 왔을 때 수행자들은 인욕수행을 합니다. 인욕에 가장 도움 이 되기 때문에 역경계를 인욕수행의 스승이라고 합니다. 근래 세계 사람 들은 코로나의 역경계를 만났습니다. 코로나가 가져다준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사람이 죽고 아프고 일상생활이 안 되는 것은 물론, 경 제가 어려워지고 정신적인 어려움도 겪고 있습니다. 이런 때 사람들이 인 내하고 극복하려는 마음을 내서 이런 것이 다시 발생하지 않게끔 노력을 한다면 참는 힘이 늘어나고 사회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 다. 코로나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습니다. 살아가면서 역경계가 왔 을 때 더 단단해질 수 있습니다. 힘들기만 한 것 같고 생각조차 하기 싫 으면 역량이 늘지 않고 힘든 일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면서 순경계를 만나든 역경계를 만나든 수행의 길로 만들어나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10바라밀 가운데 역바라밀(力波羅蜜)은 말 그대로 힘과 능력입니다. 보살초지를 넘어선 도인들이 우리를 교화할 때 그분들에게는 힘이 있습 니다. 불보살의 힘으로 말하자면 여래의 14무외력, 관세음보살의 열 가 지 힘 등이 있습니다. 아무 능력이 없으면 우리를 이끌 수 없겠지만 그분 들은 오랜 수행을 통해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를 깨친 초지에 서부터 이구지(離垢地), 발광지(發光地), 염혜지(焰慧地), 이렇게 단계를 높여간다는 얘기는 그만큼 중생을 교화할 수 있는 힘이 커진다는 뜻입니 다.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노력을 반복했을 때 보살의 힘이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보살이 아닌 우리도 무슨 일을 하든지 반복할 때 능력이 늘어납니다. 젊은 나이에 첫아기를 낳았을 때는 아기를 키울 능력이 미숙합니다. 오 히려 할머니가 아기를 더 잘 키웁니다. 할머니는 이미 경험을 통해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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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미숙했던 젊은이도 경험이 쌓이면 육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문제가 생기면 대처할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부처님이나 도인들의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능력과는 다릅니다. 우 리가 능력 있다고 할 때는 주로 세속적인 유위의 습관적 능력을 생각합 니다. 그러나 도인들이 돈이나 권력으로 우리를 구제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도인의 힘은 욕심 없는 데서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 이 그 도인을 바라보면서 믿음을 가집니다. 욕심이 없으면 거짓말 안 하 니까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여러분에게 공양을 받아서 술 이나 사먹고 다니거나 담배 냄새나 풀풀 내고 다닌다면 어떻겠습니까? 신 도들이 아낀 돈으로 보시를 했는데 억대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면 어떻겠 습니까? 믿음이 안 생겨서 다음엔 돈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도인들은 욕 심이 없기 때문에 소유를 줄이고 최소한으로 살아갑니다. 해봤자 크게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힘을 가집니다. 『치문경훈』 위산경책(溈山警策)에 “기송지갈 상용천심(倚松之 葛 上聳千尋), 소나무에 의지한 칡은 천 길 높이 올라간다”는 말씀이 있 습니다. 누구와 같이 사느냐, 어떤 인연을 만나느냐가 중요합니다. 술 친 구를 가까이하면 술 포대가 되고 담배 친구를 가까이하면 담배 포대가 되고 노름하는 친구를 가까이하면 노름 포대가 됩니다. 어울리는 사람 들 속에서 같은 흐름을 타기 때문입니다. 항상 스승과 함께 살고 도인 옆 에 있으면 나쁜 행동이 줄어들고, 생활이 담박해지고, 도 닦을 생각이 자 라납니다. 도인에게는 사람을 도의 길로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과 도인들에게는 두려움이 없는 데서 나오는 힘이 있습 니다. 우리는 많은 두려움 중에 죽는 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그러나 부처 님은 두려움 없이 열반에 드셨습니다. 『열반경』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래가 열반에 드실 때 그 모습을 보려고 천신들이 내려왔습니다. 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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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하늘에서 수만 년 살았어도 복진타락이라, 죽을 때 복이 다해서 두 려움에 떱니다. 생사로부터 벗어나 두려움 없이 죽는 존재를 한 번도 보 지 못했기 때문에 여래의 열반을 직접 보려고 내려온 것입니다. 부채 부 쳐주는 시자의 눈에는 천신들이 안 보였지만 부처님께서는 천신들을 보 시고 시자에게 비켜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여래가 두려움 하나 없이 마지 막 대반열반, 무여열반에 드시는 모습을 보고서 천신들이 큰 환희심을 냈다고 합니다.

 

보조국사도 가시기 한 보름 전에 시자에게 보름 뒤에 가겠다고 말씀하 셨습니다. 가시는 날 앉아서 700 대중을 불러놓고 108가지 질문을 받으 셨습니다. 제자가 일어나서 마지막 질문을 했습니다. “스승께서 지금 아 프신 것은 유마거사가 칭병하신 것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하니 “너는 같고 다른 것을 배우려고 출가했느냐?” 망상분별에서 나온 질문에 이 말 씀으로 대답하시고서 700 대중 앞에서 그대로 앉아서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일주일간 손대지 말라고 하여 700 대중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경계가 있다는 것을 보고서 크게 발심하여 정진했습니다. 지 금도 티베트 스님들 중에는 뚝담에 들어 제자들이 염불하고 있는 가운 데 혼자 그대로 앉아서 돌아가신 분들이 계십니다. 이렇게 생사로부터 벗 어날 수 있는 길을 직접 보여주신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시다림할 때 인로왕보살 마하살, 나무 극락도사 아미타불, 관 음세지 양대 보살을 부르는 것은 우리 숨이 다 되어서 끊어질 때 바르도 상태에서 그분들이 이끌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길을 인도하는 보살’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중음 상태에서 다 음 몸을 받을 때까지 좋은 길로 이끌어주십니다. 보살 초지를 넘어서 정 진 단계가 차츰 높아지면 그런 힘이 생기고 부처님의 경계가 되었을 때는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그런 경계를 안 믿으니까 『화엄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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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같다는 소리를 하는 건데 그 안에 있는 이야기들은 다 사실입 니다. 오래전 기록이라 문학적인 부분도 있지만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 아 니라 불보살이 실제로 보고 경험한 내용을 법문으로 남긴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9지, 10지 되는 보살들이 현신하셔서 직접 보여주신 경 우도 많습니다. 금산사 진표 율사는 부사의방에서 기도하실 때 지장보 살님과 미륵보살님을 친견했고, 의상 스님은 홍련암에서 붉은 연꽃 위에 앉아계신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했고, 세조는 오대산 상원사에서 문수보 살을 친견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절대 전설의 고향이 아닙니다. 보살들이 차츰차츰 수행 능력이 강해지면서 중생을 이끌기 위해 몸을 나투기도 하 고 꿈에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꿈에서 나타나실 때도 환상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고 또렷합니다. 쫑카파 스님 같은 경우는 꿈에서 문 수보살을 친견하여 설법을 들었습니다. 이런 사례가 많으니 우리가 이런 경계를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거나 거짓이라고 여 겨서는 안 됩니다. 용수보살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원래 아비달마 쪽의 논사였다가 나중에 대승 논사가 되었는데 대승의 논의를 살펴보고 거짓말인지 실제로 되는 건지 직접 봐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리고는 대승의 법대로 정진하여 10지 보살을 친견하셨습니다. 그 뒤에 대 승의 논사가 되어 당신이 확인한 사실을 바탕으로 소승의 잘못된 점을 논파하셨습니다.

 

수행을 많이 한 보살에게는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건지고 길을 이끌어줄 다양한 힘들이 있습니다. 『입보리행론』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깜깜한 지옥에 있는 중생들에게 저 하늘로부터 빛이 내리쬐는데 이때 잠깐 고통 이 멈추었습니다. 누가 와 계신가 보니까 금강수보살님께서 와 계셨던 것 입니다. 지옥의 고통스러운 상황도 보살의 힘으로 잠깐 멈추기도 합니 다. 지장보살 같은 분은 지옥중생을 구제하십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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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도 그분들께 ‘이 고통으로부터 구해주십시오’ 하는 것이고, 우리도 당 신들과 같이 발심하고 수행해서 그런 길을 가겠다고 발원하는 것입니다. 열 번째는 지바라밀(智波羅蜜)입니다. 여섯 번째 지혜바라밀과는 다릅 니다. 지혜바라밀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그대로 관찰하면서 지혜 의 싹이 나오기 시작하는 때이고, 지바라밀은 이미 지혜가 다 발현된 때 입니다. 아함부에서부터 법화, 열반, 반야, 화엄까지 부처님께서 말씀하 신 팔만사천대장경이 전부 이 지바라밀에 해당됩니다.

 

지바라밀은 보통의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무엇인가를 안다고 할 때 단편적인 지식을 말할 수도 있고 그것이 잘못된 앎일 수도 있습니다. 바 르게 알더라도 상대적인 앎이 대부분이고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아는 경 우는 없습니다. 부처님의 지(智)를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부릅니다. 우 리도 발원할 때 “일체종지를 이루어지이다” 하지 않습니까? 일체종지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지혜입니다. 단순히 지식을 쌓아서 부분적으로 조금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근원에서 지말까지 모두 다 안다는 뜻입니다. 경을 보면 많은 사람이 와서 부처님께 묻습니다. 그럴 때 부처님께서 모르겠 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금강경』에도 “실지실견(悉知悉見)”, 여래는 다 알고 다 본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누가 오면 어디서 왔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그런 것을 묻 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묻지 않는 것입 니다. 전생부터 다 압니다. 수닷타 장자가 왔을 때도 어디서 왔느냐고 묻 지 않고 “잘 왔다, 장자여.” 그 소리가 첫인사였습니다. 수닷타는 전생에 출가한 바가 없기 때문에 “잘 왔다, 장자여.” 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잘 왔다, 비구여.” 그랬습니다. 아직 머리도 안 깎고 처음 본 사람에게 “잘 왔다, 비구여.” 한 것은 전생부터 비구였기 때문입니다. 경전 속에는 부처님께서 “선래비구(善來比丘)여” 하자마자 머리카락이 저절로 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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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온 사람도 전생에 자기가 비구였나 보다 했을 것 입니다. 저절로 삭발이 되었다는 말은 안 믿겨지긴 합니다만, 옆에 우바 리 존자나 이발사가 있다가 즉시 깎아주었다고 나는 이해합니다. 부처님 께서는 그 사람의 전생을 알고 다음 생에 뭐가 될지도 아십니다. 삼세를 다 아니까 묻지 않으십니다. 『법화경』 데바닷타품에서는 데바닷타가 오 랜 전생에 당신의 스승이었다는 말씀을 하시고 오백제자수기품에서는 오백제자가 언제 성불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당신이 과거 연등부 처님 앞에 처음 발심한 이야기도 하십니다. 그러니까 일체종지를 이루어 실지실견하신다는 말이 맞습니다.

 

일체종지를 갖추지 못한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문제를 갖고 왔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전생에 무슨 업이 꼬여서 지금 그렇게 불편한 관계가 되었는지 아시고 ‘전생의 네가 이래 서 그렇단다.’ 답을 다 갖고 계십니다. 그러니 부처님께 물어서 해결이 안 된 게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주의 근원적인 질서도 다 알고 중생의 갖가지 업력과 갖가지 욕구들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누가 와도 묻지 않 고 그에게 맞는 방편을 써서 끝없이 구제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을 만나 뵌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고 거기서 모두 발심했다는 이야기가 경전 속에 많이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서른다섯에 깨달음을 이루고 팔순에 열 반에 드실 때까지 행한 모든 것이 바라밀입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방편·원·역·지바라밀을 다 하되 여래의 주된 힘은 지바라 밀에 있습니다. 부처님의 45년 설법 가운데 21년 정도 반야부를 설하셨지 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깨닫고 나서 하신 설법이 다 지바라밀행이라고 보 시면 됩니다.

 

여래께서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래는 일체종지를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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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고 모든 중생을 이미 건졌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생깁니 다. ‘모든 중생을 다 건졌다는데 지금 우리는 안 건져졌지 않느냐?’ 그것 은 시간의 문제이지 길은 다 열어놨다는 뜻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인연 있는 중생은 직접 만나서 법을 듣고 많은 성취를 이루거나 발심을 했습 니다. 성문, 보살 같은 법연중생들, 카필라바스투의 세연중생들, 마하파 자파티, 아들 라훌라, 사촌 아난다 등의 친족들도 출가하여 도를 닦고 과를 얻었습니다. 당신이 열반에 드신 뒤에 태어난 무연중생이나 다른 지 역에 태어나 만날 수 없는 사람들, 또는 인간이 아니더라도 육도에 윤회 하는 모든 중생을 위하여 방편으로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관세 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등 대보살들에게 이 중생들을 이 끌어주라고 부촉하셨습니다. 『금강경』에 “선부촉제보살(善付囑諸菩薩)” 이라고 하셨는데, 부촉은 부탁한다, 맡긴다는 뜻입니다. 여래께서는 무 여열반에 들어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으시지만 대보살들을 여래사 (如來使)로 삼아 미래 중생을 맡기셨습니다. 대사할 때 ‘사(使)’도 여래 사의 ‘사’와 같은 뜻인데, 보살이 여래를 대신하여 일체중생을 이끌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도인이 된 후에는 더 이상 바라밀을 행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 데 그렇지 않습니다. 바라밀을 행하는 능력이 갈수록 커져서 9지, 10지를 넘어서면 32형상을 나투어 중생을 구제합니다. 직접 윤회를 하면서 어떤 몸으로 태어나서 어떤 사람들을 이끌어줘야 되겠구나 하는 원을 실현하 기도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끌려가는 윤회가 아니고 여래의 사 자로서 자기가 하는 일을 알고 실천합니다. 이 10바라밀은 발심에서 성 불까지 모든 수행의 요체가 되고 수행의 단계마다 이 행을 하나하나 해 나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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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장

화엄경 십지품

 

세상에서 만난 인연은 대부분 이해관계로 얽혀있기 때문에 만나면 반 갑지 않은 사람도 있고 친했던 이가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교 에서 만난 인연들은 공부와 수행이라는 공통분모를 형성하고 있기에 편 안하고 행복합니다. 법연으로 만난 사이를 도반이라고 하는데 도를 닦 는 친구보다 더 좋은 관계가 없습니다. 그가 남자건 여자건, 흑인이건 백 인이건, 잘생겼건 못생겼건, 돈이 많건 적건 상관이 없습니다. 깨어있는 정 신으로 함께 도를 닦으며 욕심을 줄이고 서로의 정진을 돕는 사이라서 법연으로 사람을 만나면 참으로 행복합니다. 도반을 만나 성자들의 가 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좋은 세상이 됩니다. 도반을 만 나 도 닦는 이야기는 『화엄경』에 잘 나와 있습니다.

 

『화엄경』은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지 400~500년 뒤에 암송으로 유통되 다가 기원전 1세기경에 기록되고 편집되었다고 근래 학자들은 말합니다. 범어로 된 최초의 기록은 나란다 대학에서 강의되었다고 합니다. 이 경은 중국에 전해진 뒤에 모두 세 번에 걸쳐 번역되었습니다. 첫째는 위진남북 조 시대 동진의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가 번역한 60권 본이고, 둘째는 당나라 때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80권 본이고, 셋째는 당나라 때 반야(般若)가 번역한 40권 본입니다. 40권 본은 입법계품 하나를 따로 번역한 것입니다. 입법계품은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다니면서 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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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옥스님 설법집_행복수행론-3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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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분량으로 보나 교리로 보나 『화엄경』 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고 중요하기 때문에 별도로 번역해서 유통 한 것입니다. 우리 대장경 속에는 세 가지가 다 들어 있고 탄허 스님께서 번역하신 것은 그중에 80화엄입니다. 저는 처음에 80화엄을 접했는데 한 200년 전에 찍은 목판본이었습니다. 안에 한문이 가득하고 표지만 봐도 완전히 보물 같았습니다. 감탄하고 책장을 넘겨보면서 ‘이 안에 무슨 내 용이 있을까?’ 하고 대단히 궁금하고 설렜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선 일반 대중 사이에 오해가 있는 부분을 한 가지 짚어 드리겠습니 다. 『화엄경』은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 안 것입니다. 7처 9회, 혹은 7처 8회라고 해서 부처님께서 일곱 군데에서 아홉 번 설법하셨습니다. 마가다국 적멸도량에서 첫 번째 법회를 시작하고 중간에 야마천, 도리천 등을 거쳐 마지막 보광명전까지 장소가 나와 있고 대중도 다 나와 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보살과 신들이 와서 모였다고 묘사되어 있는데 그중에 보현보살을 비롯해서 스 무 분의 대보살과 도량신을 비롯해서 삼계의 여러 신들을 열거합니다. 이 경을 누구에게 말씀하신 것이냐 하면, 보리심을 내고 수행해서 이미 대보 살, 큰 스승이 된 사람을 위해 하신 법문입니다. 다른 경에는 보통 ‘1,250 명의 비구와 함께 계셨다’ 하고 성문제자들의 이름부터 나오는데 『화엄 경』에는 성문, 아라한 등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 경이 최상승의 법을 담 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상승의 법이라고 하면 부처님께서 말년에 설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초기부터 시작하여 말 년에 이르기까지 일곱 군데에서 아홉 번을 설법하셨습니다.

 

이어서 티베트의 칼라차크라 법문도 혹자들은 힌두교, 바라문교의 영 향을 받아서 된 것이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그 법문은 금강승에 들어가 는 최고입문 과정인데 달라이 라마 존자님 말씀을 들으니까 부처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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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승에 들어간 사람들 가운데서도 아주 깊이 들어간 사람들 24명에게 전수를 했답니다. 기원후에 발견된 『천수경』도 일부 학자들은 힌두교식 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한 비구니 스님에게 전수했 고 그 비구니 스님에 의해 전파되어 인도의 한 지역에서 600년, 700년 동 안 수행되었습니다. 『천수관정』 같은 경우도 그 비구니 스님에 의해 전해 졌다고 합니다. 『화엄경』도 부처님의 직설이 아니고 후대에 편집된 것이 라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는 소리입니다. 서양의 일부 서지학자나 문헌학 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화엄경』의 정식명칭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입니다. ‘대 방광(大方廣)’이라는 이름처럼 광대한 경이고 분량도 많아서 읽을 엄두 를 내지 못합니다. 옛날에 상당히 이름 있는 학자한테 들은 이야기입니 다. 그분은 『화엄경』이 대단한 것 같아서 한 번 읽어보려다 질려서 얼마 못 읽고 책을 덮었습니다. 책장 속에 먼지가 쌓이도록 다시는 볼 생각이 없어져버렸다고 합니다. 그만큼 쉽지 않은 경전인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대방광(大方廣)의 ‘대’는 단순히 크다는 뜻이 아니고 상대적인 법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반야심경』의 ‘마하’도 같은 용례인데 공성이 크다, 작다 하는 경계를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에 나오듯 “수보리야,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그 몸이 크다고 하겠느냐?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 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몸이 아니기 때문에 큰 몸이라 고 합니다.” 여기서도 작은 것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크다는 뜻이 아니 고 진제(眞諦)로서 크다는 것입니다. ‘방’은 방향이나 위치를 뜻하기도 하고 반듯하다는 뜻에서 법도, 궤칙의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광’은 ‘대’처럼 넓다, 좁다 하는 상대를 뛰어넘어 어디에나 두루하다는 뜻입니 다. 빛으로 가득 찬 부처님의 화장세계, 깨달음의 세계, 진제의 세계를 설 한 것이 『화엄경』이고 거기에 ‘대방광’이라는 말을 붙여 경의 요지를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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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했습니다.

 

『화엄경』 가운데 핵심이 되는 부분을 꼽으라면 입법계품과 십지품을 들 수 있습니다. 입법계품은 그것만 따로 번역할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 되었고 십지품 또한 세친의 『십지경론(十地經論)』 등 많은 주석이 달려 서 별행본으로 유행했습니다. 십지품은 지금도 범본이 그대로 남아있는 데 지상보살의 수행을 이야기합니다. 초지 이상을 지상(地上) 보살이라 하고 그 아래는 지전(地前) 보살입니다. 초지부터 어떤 수행을 해서 어떤 정신세계가 펼쳐지는가, 이것이 십지품의 내용입니다. 자량도, 가행도, 견 도, 수도, 구경도의 수행5위에서 견도가 보살의 초지라고 했는데 그 전에 10신, 10주, 10행, 10회향은 초지 전 지전보살들의 수행으로, 지상으로 가기 위한 예비수행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간혹 10신, 10주, 10행, 10회향 가운데 10주 같은 경우는 10지와 동등하다고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인 것 같습니다. 왜냐면 지상보살과 지전보살은 수행의 차원 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상 10보살에 지전 40보살을 더한 보살의 50위를 일일이 다 설명할 수는 없고 신해행증(信解行證)을 가지고 총괄 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화엄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다른 경전과는 다르게 믿음을 강조합니다. 다른 경전들에서는 ‘이해해라’가 먼저인 경우도 있고 행을 먼저 말한 경 우도 있으나 『화엄경』에서는 믿음을 필두로 ‘신해행증’을 이야기합니다. 이 네 가지 과정은 입법계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의 가르침에 따라 남방의 여러 곳을 다니며 덕운비구를 비롯해서 선지식을 찾아 구법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동남, 동녀, 뱃사공, 의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53분의 선지식을 만나서 10 신 초부터 시작해서 도를 닦아 마침내 깨달음에 도달하는 과정을 하나 하나 이야기해 놓았습니다. 어떤 분을 만나서 어떤 말씀을 듣고 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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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어떤 깨침을 이루는지 한 계단, 한 계단 53계단을 올라가면서 정신세 계가 형성되는 과정들입니다. 마지막 즈음에 미륵의 일탄지(一彈指)가 나 오는데 미륵이 손가락을 튕기자, 선정에 들어있던 선재동자가 그 소리에 깨어나서 미륵의 깊은 법문을 듣고 그 가르침대로 다시 남방으로 가서 문수를 만나 마정수기(摩頂授記)를 받는 가운데 깨침을 이룹니다. 믿음 에서 시작해서 성불해 들어가는 과정을 설명한 이 부분이 불교수행의 하 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10신의 믿음에서 시작해서 그다음에 이해하고, 실행하고, 체험하는 순서로 수행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단계가 믿음이라고 하니까 가장 쉬운 단계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화엄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믿음과 다릅니다. 너 무 광대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상대적 차원을 벗어나 있습니다. 간단하게 예를 든다면 허블망원경이 발명되기 전에 우리가 생각하던 우주의 크기 와 같을 것입니다. 허블망원경이 없었을 때는 은하계가 60억 개나 되는지 전혀 상상도 못했습니다. 제일 가까운 달도 몇백 년 전에는 계수나무 아 래서 토끼가 방아 찧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월식을 할 때는 달을 누가 갉아먹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부처님은 2,600년 전에 신통력으 로 관찰하여 우주를 보셨고 삼천대천세계라는 우주적 단위를 사용하셨 습니다. 경에 자주 나오는 삼천대천세계, 혹은 무량세계는 상상이 안 갔 는데 허블망원경이 나오고 나서 보니까 우주가 끝이 안보입니다.

 

경에 보면 무량한 국토가 있고, 거기에 부처님이 한 분씩 계시는데 남 방에는 어떤 부처님이 계시고, 그 부처님 계신 곳에 보살대중이 누가 계 시고, 그 대중 가운데 또 누가 계시고, 이런 이야기들이 끝없이 나옵니다. 차원을 달리하는 다양한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처럼 이렇게 몸을 가지고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도 있고 형체 없이 에너지로만 존재하는 세계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엄경』에서 말하는 세계에 대해 이해를 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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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라도 일단 좀 믿고 들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화엄경』 이 너무 광범위하고 황당해서 못 읽겠다고 하는데 사실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에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미 치지 못하는 것을 경에서 “불가사의하다”라고 말합니다. 불가사의한 이 경계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화엄경』에서도 ‘신위도 원공덕모(信爲道源功德母)’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공덕이 이루어지는 데는 믿음이 첫 단계가 됩니다. 아함이나 다른 경을 설하실 때는 먼저 이 해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우선 이해부터 해서 정견이 생기면 그 정견을 바탕으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에 비해 『화엄경』은 믿음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믿음만 강조하면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빠지는 상황이 벌어지 게 됩니다. 믿는데 무엇을 믿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이야기하 면, 알지 못하는데 알지 못한다는 것을 또 누가 압니까?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그 사람도 사실은 뭘 알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브라흐만 신이 창조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브라흐만 신이 창조했는지, 어떻게 창조했는 지 모릅니다. 모른다고 하는 그 사람은 사실 뭘 모르는지도 모릅니다. 이 것이 불가지론의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믿음이 이루어지고 곧바로 이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때의 이해는 차원을 달리한 이해 가 될 것입니다.

 

믿음의 단계를 지나면 해(解), 이해하는 단계로 갑니다. 여기서는 상상 도 할 수 없었던 우주를, 망원경을 통해 명확히 보는 것처럼, 법에 대한 이해가 분명해집니다. 지금은 과학의 발달로 망원경을 가지고 우주를 관 찰해서 빛이 초속 30만km를 가고 빛이 100억 년을 달려간 거리 개념을 이해합니다. 100억 광년 거리에 있는 별이 빛을 발하고 있지만 그 별은 이미 없어졌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화엄경』의 화장세계(華藏世界)도 차원이 다른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믿으라고 했다고 4차원, 5차원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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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기를 그냥 믿기만 하면 무당 푸닥거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높은 차 원의 이해를 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냥 지금처럼 상대적으로 존재 하는 세계로 이해하는 데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차원이 다른 이야기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십시오. 저 천상에는 계단마다 수명이 다르다고 하는데 우리의 백 년이 천상의 하루라고 합니다. 36,500번을 죽었다 깨었다 해야 합니다. 여기 사는 우 리의 시간도 고통스러울 때는 길게 느껴지고 즐거울 때는 짧게 느껴집니 다. 빨리 갔다가 천천히 갔다가 심리적 시간은 그렇습니다. 천상은 너무 즐거워서 시간이 빨리 가나 봅니다. 욕망이 적고 욕망이 일어난다 해도 즉시 해결된답니다. 예를 들어 ‘토마토 먹고 싶다.’ 하면 토마토 향기가 나고 토마토 맛이 입에 퍼진다고 합니다. 형체 없는 에너지로 오기 때문 입니다. 음악을 듣고 싶으면 저절로 들린다고 합니다. 천상에서 우리를 바라볼 때는 ‘하루살이 같은 인생인데 하루를 저렇게 울고불고 싸우고 괴로워하며 번거롭게 사는가?’ 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상은 너무 편하고 즐거워서 수행이 잘 안되는 곳입니다. 여기서도 돈 많고 재미있는 일이 많으면 수행을 잘 안 하는 것과 같습니다. 좀 힘들어야 철학도 발전하고, 수행할 마음도 내게 되지요. 욕계, 색계, 무색계, 물질로 존재하든 에너지 로 존재하든 수많은 세계를 화장세계라 하고 이것을 이해하려면 여러 차 원이 필요할 것입니다.

 

믿고 이해한 다음에는 행(行)이 따라야 합니다. 행은 법에 대한 바른 이 해를 바탕으로 정진해 나아가는 단계입니다. 보살은 낮은 차원이 아니고 일체중생을 위한 행을 합니다. 우리는 남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자기중심 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보살은 분별을 떠났기 때문에 세계와 중생을 평 등하게 봅니다. 세계도 무량하고 중생도 무량해서 끝이 없는 빛과 에너 지를 내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무량광, 무량수라고 합니다. 이렇게 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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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큰 차원에서 일체중생을 위하는 것이 보살의 행입니다.

 

신해행증의 마지막은 증(證)으로, 수행을 통해 결과를 얻는 단계입니다. 정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시작해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수행을 해 나가다 보면 번뇌가 끊기고 지혜가 늘어납니다. 공성을 체득한 지혜로 진 여의 세계에 깨달아 들어가기 때문에 증입(證入)이라 하고 그 세계가 바 깥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내증(自內證)이라고도 합니다. 인과법 으로 보면 믿음, 이해, 수행이 원인이 되고 증득이 결과가 됩니다. 이렇게 보면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부처와 정법에 대한 믿음이 가장 중요하고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믿음이 모든 공덕을 낳는 근원임을 강조합니다.

 

발심한 보살의 수행과 견성의 단계를 화엄에서는 10신, 10주, 10행, 10 회향, 10지로 설명합니다. 『화엄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은 ‘깨달아서 부처 될 수 있다’라는 믿음입니다. 보리심을 발한다는 말은 내가 부처가 되겠다 는 믿음이고, 무량광, 무량수의 세계를 내가 체험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 다. 그런 믿음을 중심으로 열 가지 단계를 세웠기 때문에 10신이라고 합 니다. 신심(信心), 염심(念心), 정진심(精進心), 혜심(慧心), 정심(定心), 불 퇴심(不退心), 회향심(迴向心), 호법심(護法心), 계심(戒心), 원심(願心), 이 열 가지가 믿음의 범위에 들어갑니다. 중요한 것은 나도 여래와 같은 경 계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와 같은 법들을 닦아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다음 10주는 열 가지 머무는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은 어디에 머물 러 있습니까? 우리 앞에 펼쳐진 상대적인 세계, 그 어느 한쪽에 머물러 있 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머무는 마음은 상대적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 계를 보면, 부모에 의해서 자식이 생기고 자식에 의해서 부모가 생깁니다. 서로 상대적으로 생기는 것인데 우리는 그 세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상대 적으로 존재하는 이 허망한 세계에 머물러 부모와 자식 사이, 며느리와 시부모 사이가 껄끄러워지고 고통을 주고받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또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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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 머뭅니까? 욕망에 머뭅니다. 매일 무엇인가를 사고 싶고 갖고 싶습 니다. 자본주의는 그 욕망을 부추깁니다. 집에 입을 것이 있는데도 옷을 더 사려고 합니다. 자본의 세상에 사는 우리는 자기 마음이 어디에 머무 는지 항상 살펴봐야 합니다. 반면에 보살의 마음은 어디에 머물러 있겠 습니까? 법에 머뭅니다. 이름뿐이고 모양뿐인 세계에 머물지 않고 정법 의 세계에 머뭅니다. 이 단계 역시 발심주(發心住)로 시작해서 관정주(灌 頂住)까지 열 가지가 있습니다. 발심한 이래로 한 단계씩 승진하여 마지 막 관정주에 이르면 부처님께서 지혜의 물을 정수리에 부어주어 불사를 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10행은 바른 법에 머물러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하는 단계입니다. 환희행(歡喜行)으로 시작해서 진실행(眞實行)까지 열 가지를 행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잘 참고 성을 내지 않습니다. 중생을 구제하는 일에 게으 른 마음을 내지 않고 부처님을 공양하는 일에 싫증을 내지 않습니다. 지 혜를 닦아 정법을 수호하여 진실한 법을 얻습니다. 갖가지 선법을 행하 여 무애법문을 얻어 말과 행이 어긋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10행을 닦 는 보살의 모습입니다.

 

10회향은 그동안 수행으로 쌓은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돌리는 단계입 니다. 10회향의 첫 번째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보호하되 중생을 구제 한다는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지금까지 닦아 얻은 무진장한 선근을 무량법계에 회향하는 것입니다. 이런 회향이 어떻게 이루어지겠 습니까? 일체 내 것이 있지 않아야 합니다. 나라는 것도 실체 없이 연기 로서 존재할 뿐이고 받는 저 분도 실체 없이 연기로서 존재할 뿐이니 그 와 내가 주고받는데 무슨 거래관계가 있겠습니까? 지금 나의 삶을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쓰는 것이 회향의 핵심입니다.

 

여기까지가 지전보살의 수행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이루었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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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공성을 완벽하게 깨달아서 무아가 된 것은 아닙니다. 이 단계를 넘어 서야 보살초지에 들어가 진짜 수행을 합니다. 그것이 10지입니다.

 

보살의 지위에 대해서는 아비달마에서도 조금 다루었고 반야부와 유 식에서 보다 정비된 설을 정립했지만 화엄에서 정리를 가장 잘 해놓았습 니다. 발심한 보살이 10신, 10주, 10행, 10회향의 예비수행을 다 끝내면 10지에 들어갑니다. 우선 지(地)의 뜻을 풀이하자면, 범어 bhūmi를 중국 사람들이 ‘땅 지(地)’로 번역했습니다. 땅은 우리 삶의 토대입니다. 땅이 없으면 우리가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발을 공중에 대고 있을 순 없지 않 습니까? 기본적으로 지구라는 행성 위에 땅이라는 토대가 있어야 그곳 을 의지해서 나무도 자라고 사람도 살고 모든 생명이 살아갑니다. 중생 의 삶에서 땅은 정말 소중합니다. 물론 공기와 물과 불 등 여러 가지 조 건이 필요하지만 제일 크게 의지하는 것은 땅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땅 이 신성시되었던 경우도 많습니다.

 

보살도 마찬가지로 토대가 필요합니다. 10지는 수행하는 삶, 번뇌를 벗어나는 삶의 토대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 기본을 바탕으로, 여기에 도 달하지 않고서는 보살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보살 은 이 토대를 의지하여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갑니다. 우리가 계단을 오를 때처럼 첫 계단을 의지해서 둘째 계단을 올라가고 둘째 계단을 의지해서 셋째 계단을 올라가고 그렇게 계속해서 올라갑니다. 첫째 계단이 없이는 둘째 계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10지 보살은 각각의 계단을 토대로 삼 아 열 가지 수행을 쌓은 결과로 계속해서 나아갑니다. 이 단계를 열 가지 로 나눴는데 그 깊이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합니다. 인간 에게서 어떻게 이런 능력들이 나올 수 있을까 신기할 정도입니다. 10지의 초지에 올라 ‘지(地)’가 붙으면 여기서부터 성자라고 부릅니다. 수행5도 가운데 견도에 해당하고 공성을 체험한 경지입니다. 선가(禪家)의 방식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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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얘기하면 화두를 타파했다고 합니다. 남방의 빨리어 전승으로 얘기하 면 무루법이 현전하여 아라한과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10신에서 10회향 까지의 앞 단계들도 참으로 훌륭합니다. 믿음으로 들어가서 확고한 이 해를 바탕으로 닦고 닦아서 얻은 결과를 모두 중생에게 돌려주니 대단 한 경지입니다. 지상보살은 첫 단계부터 성인입니다.

 

10지 가운데 첫 번째 환희지(歡喜地)는 기쁨이 토대가 되는 단계입니 다. 여기에 들어갈 때 공성을 체험하고 아집과 법집에 의해 일어난 번뇌 가 끊어져 마음이 깨끗해지면서 기쁨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다 끊어진 것 은 아닙니다. 적어도 지금 내가 의식하는 범위 안에서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하느냐 하면, 오랜 생을 살아오 면서 무의식 속에 축적된 것은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식욕이나 수면욕 을 들 수 있습니다. 맛있는 거 보면 군침이 돌고 나도 모르는 사이 잠이 옵니다. 의식적인 훈련을 통해 잠이 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은 그냥 옵니다. 그렇게 무의식이 작동한 연후에 의식에서 졸리다는 것을 아는 것 입니다. 초지에서는 무의식적인 번뇌의 습기는 해결하지 못했어도 의식적 으로 일어나는 번뇌들은 끊어지기 때문에 ‘아, 부처님께서 어떤 단계를 거쳐서 번뇌를 끊으셨구나, 이런 경계가 있구나.’ 하고 기쁨이 일어납니다.

 

전강 스님은 스물여덟에 견성을 하셨답니다. 하루는 태안사 가는 길에 징검다리를 건너시다가 번뇌가 뚝 끊어지는 경계를 접하셨습니다. 화두 를 들고 십수 년을 공부하다가 일어난 일입니다. 그 경계를 본 것에 환희 심이 솟구쳐서 징검다리 위에서 몇 시간을 서 있었다고 합니다. 깨진 밑 동에 물이 쑥 빠져버리듯 했다고 하셨는데요. 우리가 번뇌 속에 살 때는 잘 모르다가 의식적으로 일어나는 번뇌가 확 끊어지고 난 뒤에 압니다. ‘아, 이제 내가 수행 길의 참맛을 봤구나.’ 히말라야에 있는 수미산을 갈 때 힘든 일을 많이 겪습니다. 지대가 높아서 고산병도 오고 환경도 열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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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걷기도 힘들다가 수미산이 나타나면 환희심이 생겨서 가고자 하는 생각이 더 강해집니다. 그렇듯이 이 단계에서는 부처의 경계를 보고 부처 가 될 가능성에 대해 확신을 갖기 때문에 큰 환희심이 일어납니다. 여기 서부터 수행5도에서 견도 다음의 수도에 들어갑니다. 진정 수행다운 수 행은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선방의 조사 스님들은 그것을 보림(保任)이 라고 합니다. 그래서 만공 큰 스님은 견성을 하고 난 후에야 진정한 수행 으로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기쁨을 맛보고 나면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경계가 확실히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말고 보살의 길 로 나아가야 합니다.

 

보살 초지에서 맛보는 기쁨과 세속에서 맛보는 행복은 다릅니다. 우리 가 보통 행복을 느낀다고 할 때 그 복은 허망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 는 것이 돈, 건강, 젊음과 같은 것들인데 돈도 언젠가는 없어지고 건강과 젊음도 어느 정도 노력해서 늦출 수는 있어도 늙고 병드는 이치에서 벗 어날 수 있는 이는 없습니다. 인생이 너무 허망해서 영화 한 편보다 빨리 지나갑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속의 복에 관해서는 별로 얘기하지 않으셨 습니다. 세속은 전부 상대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를 행 복의 근거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진짜 행복은 그런 허망한 것들에 속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세속의 복이 허망하고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 을 빨리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세속의 온갖 행복에 집착합니다. 세속적인 것은 금방 왔다가 번갯불처럼, 풀 끝 의 이슬처럼 허망하게 금방 사라집니다. 거기에 속지 않는 것을 자각이라 고 합니다. 첫 번째 환희지는 이와 같이 도에 들어가서 도의 맛을 본 수 행자입니다. 마음에 환희심이 가득 차서 ‘내가 이제부터 죽자 살자 바라 밀행을 해야 되겠구나. 번뇌가 없어진 이것을 토대로 살아가야 되겠구 나.’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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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구지(離垢地)는 더러움을 떠난 단계입니다. 앞서 얘기한 대 로 의식적으로 일어나는 번뇌는 끝나지만 무의식에 깊숙이 박혀 있는 번 뇌의 습기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번뇌의 습기는 살아있는 한 남아있고 부처가 되어야 끝이 납니다. 번뇌의 습기는 무조건 살려고 하는 것입니 다. 몸에 매인 습관, 예를 들어 매일 밥을 먹고 생명을 유지하는 일도 근 본무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머리카락 이 자라고 손톱이 자라나는 생명현상이 여기에 기인합니다. 뇌가 없는 조 그마한 박테리아도 왜 사는지 모르면서도 무조건 살려고 합니다. 우리 무의식 속에 박혀 있는 번뇌의 습기는 보살 초지에 들어가도 안 없어지 고 그 안에서 불쑥불쑥 나옵니다. 보살 2지, 이구지가 될 때는 습성으로 남아있던 이것이 제거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견성을 하셨다는 분이 술을 한 잔씩 한다고 하면 안에 깊숙 이 들어있던 것이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것입니다. 견성을 했다 하더라도 행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분들은 대부분 이구지의 경계를 수행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보살 2지가 되면서 그것을 자각하기 시작하 고 겉으로 행동으로까지 나가도록 놔두지 않고 끊기 시작합니다. 이때부 터 깊숙이 박힌 근원적인 무명의 내용들도 하나하나 끊어 나갑니다. 그 래서 이구지부터는 때꼽재기 낀 것이 바깥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때꼽재 기는 바깥에서 묻어온 티끌이 아니고 몸에 찌든 때입니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깊은 번뇌를 때꼽재기라고 하는데 이것을 떠나는 단계를 ‘떠날 이(離)’, ‘때 구(垢)’를 써서 이구지라고 했습니다. 더러움 을 떠나서 깨끗해졌기 때문에 이구지이고 청정한 계행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에 구계지(具戒地)라고도 합니다. 이것이 토대가 되어 세 번째 단계 로 나아갑니다.

 

세 번째 발광지(發光地)는 빛이 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선정을 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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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얻은 지혜가 이 단계에서 빛을 발합니다. 이때 몸의 차크라가 다 열 리기 때문에 앉아 있거나 설법을 할 때도 언뜻언뜻 몸에 빛이 나타나기 도 합니다. 수월 스님께서도 몸에서 빛이 났다고 했습니다. 불화를 보면 불보살에게 두광도 있고 신광도 있는데 그 빛이 발광지 보살부터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혜를 얻어서 변재를 갖추었기 때문에 법문을 잘하 십니다. 하시는 말씀이 법에서 벗어나지 않고 생각이 반짝반짝 깰 수 있 는 내용이 많아서 생각에 그늘졌던 부분이 확 드러납니다. 햇빛이 났을 때 그늘졌던 부분이 확연히 드러나듯이 그분의 말씀이 우리의 어둠을 드 러내는 빛이 됩니다. 그분의 행은 항상 밝습니다. 공자도 군자는 큰길로 간다고 하셨는데 이 단계에 있는 보살도 큰 길을 갑니다. 큰 길은 중생을 위해 산다는 뜻입니다. 이 단계에 이른 분이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면 저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빛의 기운이 있고 상서로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네 번째 염혜지(焰慧地)는 지혜의 불로 번뇌의 땔감을 태워버리는 단계 입니다. 이때부터는 생각이 부처님과 거의 다르지 않아서 생각을 일으키 면 ‘염념보리심’이 됩니다. 공성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가 일으키는 생각 에는 어두운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두운 구석이란 나를 위하는 생 각인데 그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중생을 위하는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발광지에서부터 얻은 지혜가 더 빛을 발하기 때문에 말을 하면 항상 지 혜로운 얘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분들은 농담을 해도 다 법담이 됩니다. 이런 보살들은 중생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매우 큽니다. 지나가다 가 잠깐 만나서 해준 말도 인생의 행로를 바르게 바꿔줍니다. 다른 사람 에게 해준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의 정신을 깨우거나 마음에 스며들어 발 심을 하도록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지나가다 잠깐 던진 말도 이 정도이 니 이런 분을 가까이 하면 마치 겨우살이가 상수리나무에 붙어서 살아가 듯이 영향을 받습니다. 이 단계의 보살은 생각을 일으키고 말을 하고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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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하는 것이 모두 지혜에서 나온다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다섯 번째 난승지(難勝地)는 역경계를 극복하는 단계입니다. 이 보살은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다가와도 언제든지 극복합니다. 억지로 이겨서 극복 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방편을 닦아서 끊기 어려운 번뇌를 끊고 제도 하기 어려운 중생을 구제합니다. 예수님을 예로 들자면, 그분도 상당히 높은 보살지에 이른 분이라고 짐작합니다만,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하 는 어려운 상황이 왔어도 그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어려움을 극복했습니 다. 우리가 볼 때는 죽었으니까 극복이 안 된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 만 극복한 것입니다. 그의 죽음으로 로마 전체가 기독교 국가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던 것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목련존자 같은 경우도 외도에게 맞아 죽는 어려움에 처했어도 그 부족 들을 전부 교화해서 정법의 길로 이끌어주셨습니다. 이렇게 난승지에 오 른 보살은 어떤 어려움이 닥쳐오고 목숨이 다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극 복할 힘이 생깁니다.

 

여섯 번째 현전지(現前地)는 반야지혜를 얻어 몸을 나타내는 단계입니 다. 현전은 눈앞에 나타나서 보인다는 뜻입니다. 이 상태가 되면 중생이 원할 때 언제든지 나타나 줄 능력이 됩니다. 꿈속에 나타나기도 하고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중생이 원할 때 아들로 태어나서 건져 주기도 하고 왕이 되어 나라를 건져주기도 합니다. 앞장서서 우리를 이 끌어줄 힘이 이때 생기는 것입니다. 32응신(應身), 중생이 원할 때 그들이 원하는 몸을 나타내서 이끌어주는 단계가 현전지입니다. 관세음보살의 현전 가피를 입었다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 면,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 태화지에 갔을 때 문수보살이 나타나서 가사도 주고 사리도 주고 법문도 해주셨습니다. 의상 스님은 홍련암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셨습니다. 사복(蛇福)은 전생에 경을 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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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다니던 소를 제도하기 위해 몸을 바꿨습니다. 전생의 소가 여인으로 태어나 살고 있었는데 그 여인의 태를 빌려 아들로 태어나서 어머니에게 업장 소멸할 기회를 주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장사지내면서 법문을 하고 자신도 생을 마감했습니다. 조선의 세조 앞에는 문수보살이 동자 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 단계에 오른 보살은 이렇게 모든 중생 을 다 건지기 위해서 당신의 몸을 드러냅니다.

 

일곱 번째 원행지(遠行地)는 멀리 간 단계입니다. 여기서 원행이란 우리 가 보통 생각하는 가깝고 먼 경계가 아닙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인도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멀고 가까운 사이가 있습니다. 그런 데 원행지에 오른 보살은 무상관(無相觀)을 닦아서 세간의 모습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멀고 가까움이 없습니다. 다음 생에 태어날 때도 어떤 중 생을 위한다면 멀기 때문에 못 가고 가깝기 때문에 가고 그런 것이 없습 니다. 이 단계의 보살은 고통받는 중생이 부르면 언제든지 거기에 나타 나리라 하고 방편을 닦아서 그런 능력을 갖춥니다. “천강유수천강월 만 리무운만리천(千江有水千江月 萬里無雲萬里天), 천 강에 물 있으면 달 도 천 개요, 만 리에 구름 없으면 만 리가 하늘이라.” 강에 비친 천 개의 달을 천 사람이 다 다른 각도에서 봅니다. 중생에게는 멀고 가까움이 있 지만 이 보살은 멀고 가까움 없이 평등하게 나타납니다. 구름 없는 하늘 처럼 번뇌를 없애서 세간을 멀리 초월했기 때문에 이런 힘을 갖습니다. 그 냥 멀리, 오래 간다고 해서 원행이 아니라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이 단계 를 심행지(深行地)라고도 합니다.

 

여덟 번째 부동지(不動地)는 번뇌에 흔들리지 않는 단계입니다. 『금강 경』에서 “불취어상 여여부동(不取於相 如如不動)”, 상을 취하지 않고 움 직이지 않는다고 한 경계입니다. 이 보살은 상(相)이 없는 지혜를 얻은 뒤 로 항상 이 지혜를 일으켜 중생을 위해 쓰기 때문입니다. 바깥 경계에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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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의 오고 감이 없고 무의식 상태의 번뇌도 어느 정도 사라졌습니다. 심 자재(心自在)까지는 아니어도 색자재(色自在)의 경계까지 도달한 것입니 다. 이 정도가 되면 죽음 앞에 이르러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죽으나 사 나 동요되지 않고 마음이 오락가락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뒷걸음 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불퇴전(不退轉)이라고도 합니다.

 

아홉 번째 선혜지(善慧地)는 막힘없는 지혜를 얻어 모든 선법을 연설하 는 단계입니다. 이때는 어떤 생각을 일으키든지 어떤 행을 하든지 전부 지혜로운 모습이 됩니다. 자신이 얻은 지혜를 자유롭게 쓰기 때문에 말 씀 한마디에 중생이 기쁨을 내고 행동 하나에 중생이 신심을 냅니다. 앞 의 부동지 보살이 색(色)에 걸림 없는 경지였다면 이 선혜지 보살은 심(心) 에도 걸림 없습니다. 나고 죽는 문제에 있어서도 무애를 얻어서 생사를 벗어났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지혜롭습니다. 이러한 지혜를 갖추고 이 타행을 완성해가는 단계가 선혜지입니다.

 

열 번째 법운지(法雲地)는 10지의 마지막으로, 최상위에 올라서 법을 비처럼 내리는 단계입니다. 이 보살은 법신을 얻었기 때문에 어느 곳이나 어느 때나 어디를 가든 어디에 머물든 무엇을 하든 찰나 간에도 법 아닌 것이 일어나는 경우가 없습니다. 밥을 먹어도 법이 되고 걸어가도 법이 되어 모습만 봐도 감화를 받는 사람이 많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걸어가시는 모습을 보거나 앉아계신 모습을 보고 감화를 받아 공부에 들어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일체처 일체행이 모두 다 법이 됩니 다. 이 보살은 육도윤회를 하는 중에 지옥에 계시든 천상에 계시든, 사냥 꾼과 같이 있건 도둑놈과 같이 있건, 법 아닌 것이 단 하나도 없기 때문 에 법이 구름처럼 일어난다는 뜻에서 법운지라고 합니다. 금강승에서는 이 법운지를 부처와 같다고 봅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지장 보살과 같은 대보살들은 아직 중생을 교화할 일이 남아서 잠시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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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서 10지가 이루어지고 제10법운지에 서 등각, 묘각을 이루어갑니다. 등각(等覺)은 등정각(等正覺)의 준말로 부처님과 깨달음의 내용이 같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대반열반에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나머지는 부처님과 구분할 수 없습니다. 등각은 보살수 행의 마지막 단계이고 묘각(妙覺)은 보살이지만 깨달음과 행이 완성되어 부처의 자격을 이미 갖추었기 때문에 부처라고도 합니다. 도솔천에 계시 는 미륵보살 같은 경우가 묘각입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오셔서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는 모습을 보이시고 설법하시고 무여열반에 들 것이라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묘각을 지나면 이제 마지막으로 부처입니다. 발심한 이후 6바라밀, 10바라밀 등을 수행하면서 단계별로 올라가서 10지를 넘어 등각, 묘각을 얻고 부처에 이릅니다. 석가모니 부 처님께서도 용맹정진해서 이 과정을 거치고 성불하기까지 3아승지 겁이 걸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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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장

요의와 불요의

 

부처님의 가르침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요의(了 義)와 불요의(不了義)로서 요의는 법을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드러낸 가 르침이고 불요의는 중생의 이해력에 맞게 방편을 써서 상대적으로 가르 친 법문입니다. 본질적인 부분과 상대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떤 경에서는 생사와 열반이 다르지 않다고 하고 어떤 경에서는 생사를 떠나 열반에 이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요의와 불요의의 차이입니다.

 

불요의는 상대적인 법문입니다. 법을 있는 그대로 말했을 때 알아들을 수준이 안되는 사람들을 위해 부처님께서 어쩔 수 없이 방편을 쓰셨습니 다. 밥을 많이 먹어서 배부른 사람에게는 적게 먹으라고 권하는 것이 옳 은 얘기지만 배고픈 사람한테는 적게 먹으라고 말할 수 없듯이 시간, 공 간, 사람, 경우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함부 8년 동안 하신 말씀에도 니르바나와 같은 요의 법문도 있지만 상당 부분이 상대적 법문입니다. 이를테면 선을 행하라고 했을 때 그것은 악 때문에 일으킨 말썽을 두고 하신 말씀이지 절대 선이 따로 있다는 뜻이 아닙니 다. 어두울 때 불을 켜라고 하면 맞는 얘기지만 햇빛이 쨍쨍한 대낮에는 불을 켜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을 켜라는 얘기가 어둠을 전제해서 나오듯이 선행을 하라는 것도 악을 전제로 한 상대적인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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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인 이야기는 시시비비가 따릅니다. 사람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 고 경우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 께서는 시비가 갈라질 수 있는 얘기는 최대한 하지 않으셨고 수행자들이 뒤에 그것을 불요의라고 구분해놓았습니다. 그러므로 불요의를 가지고 시시비비를 일으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께서 마야부 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나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샤 카족의 탄생 설화였기 때문에 설화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니까 시비를 가 릴 일이 아닙니다. 설화로 이해하면 될 일이지 거기에 믿음을 가지고 오 른쪽 옆구리를 주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을 믿는 종교들은 종종 이런 이야기를 절대화시키고 일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을 신비화하 여 믿음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불교는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부 처님께서는 상대적인 것은 상대적인 것이라고 밝히셨고 뒤의 수행자들은 부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 말씀을 하셨다고 분명하게 주석을 해놨습니 다. 그래서 불교에는 신화와 실제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와 혼란이 없 습니다.

 

오늘은 불교의 핵심적인 이야기인 요의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상대 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면 절대성을 생각합니다만, 절대란 없습니다. ‘그 래놓고 어떻게 절대를 말씀하십니까?’라고 한다면, 절대가 없다는 것이 절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이 그렇습니다.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는 영원하지 않고 실체가 없다는 것이 절대적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은 절대적이지 않 습니까? 절대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 자체는 절대성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아함에서는 삼법인(三法印)을 도장 찍은 것처럼 절대성을 갖는 세 가지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에서, 순간순간 변화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짜 행복은 니르바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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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고 거기에 이르려면 허구를 떠나서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절대 적인 말씀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상대적인 것만 가지고 불교를 이해하려 고 하면 이해도 못하고 진짜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상대적인 얘기는 불교가 아니더라도 다른 종교나 철학, 일반 윤리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요의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제법무아, 즉 공을 말할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의 “오온개공(五蘊皆空)”은 아공(我空)을 뜻합니다. 인간을 분석해보면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을 분석하는 논리가 불 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와 정신으로 나눌 수 있고 정신적인 부 분은 심리학에서 다루고 육체적인 부분은 의학에서 다룹니다. 그러나 현 대 심리학이나 해부학에서 전문용어를 가지고 아무리 자세히 분석하더 라도 옛날 부처님의 방법만큼 설명하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이 다섯 가지로 구성되었다고 보고 오온(五蘊)이라는 용어로 설명하셨습니 다. ‘온’이라는 말은 모여 있는 집합체를 뜻합니다. 무엇이 모여있느냐 하면, 색·수·상·행·식 다섯 가지입니다. 이 용어는 지금 쓰더라도 문 제될 게 없어 보입니다.

 

다섯 가지 중에 색온(色蘊)은 우리 육신인데 지수화풍 4대(大)로 이루 어져 있습니다. 요즘은 단백질이나 칼슘, 마그네슘, 철분 등으로 이루어 졌다고 하겠지만 실제로 우리 몸을 관찰해보면 지수화풍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뼈, 근육, 피부, 이, 머리카락, 손톱과 같이 딱딱한 것들은 지대 (地大)에 속합니다. 우리 몸의 67~68% 정도를 차지하는 피와 땀 등 여러 가지 체액은 수대(水大)입니다. 몸의 체온을 유지하는 에너지, 따뜻한 기 운은 화대(火大)에 속합니다. 그리고 숨 쉴 때 콧속과 폐부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이 풍대(風大)입니다. 눈, 귀, 코, 혀, 몸은 이렇게 지수화풍의 물질 로 되어있고 이 감각기관을 통해서 바깥 대상을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인 다는 뜻에서 이 작용을 수온(受蘊)이라고 합니다. 감각대상을 받아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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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좋고 싫은 느낌이 따라 일어나므로 고락이 여기서 비롯됩니다. 그리 고 외부 대상을 받아들여 생각을 일으키는데 그것이 상온(想蘊)입니다. 그다음 행온(行蘊)은 나머지 4온 외의 모든 작용입니다. 마음을 일으켜 서 지속되게 하는 부분도 마음인데 대표적으로 의지 작용을 들 수 있습 니다. 다섯 번째 식온(識薀)은 보고 듣고 아는, 알았다는 생각이 일어나 는 것입니다.

 

오온은 원인과 조건이 만나서 발생한 현상일 뿐입니다. 우리는 몸을 ‘나’라고 생각하지만 나라고 생각한 이것마저도 착각과 고집에 의한 하 나의 정신작용일 뿐 실재가 아닙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정신작용 도 인연 따라 일어났다가 인연 따라 사라질 뿐입니다. 꽃을 보면 꽃에 정 신작용이 일어나고 물을 보면 물에 정신작용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감각 은 대상에 따라 거듭 바뀌어 갑니다. 사유 또한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생 각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같은 지역에 살아도 생각이 다른데 먼 곳에 살 면 차이가 더합니다. 사람들은 왜 다른 철학을 일으켰을까요? 그리스 철 학이나 인도 철학 자체가 본래부터 있던 것이 아닙니다. 자연환경과 삶의 토대가 다르고 그 위에서 각기 다른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일으킨 생각 들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본래부터 있지 않았던 그것을 ‘무아’ 또는 ‘공’이라고 합니다.

 

공을 ‘없는 것’이라고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있는데 왜 없다 그러는지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불교는 없다고 이야기한 적 이 한 번도 없습니다. 자성, 영원성을 가진 것이 없다고 했을 뿐입니다. 그 러면 있는 것은 무엇이냐, 인연을 따라서 발생했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품 같고 이슬 같다고 비유합니다. 『반야심경』에서 오온이 공하 다는 것은, 대상은 물론이고 가장 집착하고 아끼는 자신마저도 실체 없 이 인연 따라 발생했다가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영원성을 인정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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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터 불교가 아닙니다. 그 어떤 존재도 무아입니다. 제법무아에서 법은 모든 존재를 가리킵니다. 유형이건 무형이건 어떤 것이든 제법에 들어갑 니다. 허공도 법입니다. 허공을 불변이나 비존재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 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허공에 변치 않는 자성이 있다면 허공에 걸려서 움직이지 못할 것이고 건물도 짓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사는 현실을 살펴보면 실체가 있어서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거듭 변 화하면서 이어갈 뿐, 나조차도 영원성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무아를 얘기하면 ‘내가 없다’고 번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 원한 실체가 없다는 뜻이지 눈앞에 존재하는 이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아 닙니다. “나라는 게 본래 없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지금 말하는 자신 은 누구입니까? 이것을 구분 못하고 그냥 없다고 해버리면 단멸론에 빠 지고, 있다고 해버리면 유아론에 빠집니다. 자성이 없고 연기로 존재한다 고 말해야 맞습니다.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이 만나 결과를 내면서 변화 해갑니다. 『반야심경』도 다 그 말씀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 공 공불이색” 자성이 없기 때문에 현상이 존재하고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자성이 없다는 이 사실은 지금 과학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 니다. 무아론을 부정하려면 유아론을 증명해야 되는데 아무리 뛰어난 과 학자가 나와도 증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무아론은 불교의 기반이고 여기 에 입각하지 않고서는 불교를 말할 수 없습니다.

 

‘나’조차도 공하다고 했을 때는 대상도 마찬가지로 자성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상에는 창조주가 있습니다. 브라흐만교를 비롯해 서 지금도 창조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의 주장도 나름 일리가 있지만 부처님께서는 창조주나 지적설계론 같이 아무 증거 없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브라흐만신이 있다는 증거도 없을뿐더러 그런 역사도 있지 않습니다. 창조주 같은 절대적인 신만이 아니라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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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옛날 구석기나 청동기 시대는 물론이고 얼마 전까지도 나무에 목신이 있고 부엌에 조왕신이 있 다고 믿었습니다. 집안에 무슨 일이 있어서 무당한테 물어보면 “집에 나 무를 건드린 일이 있습니까?” 묻습니다. 그러면 “아이고, 우리 집에 나무 가 한쪽으로 쳐져서 잘랐는데 목신이 노하셨나 봅니다.” 이러면서 굿을 합니다. 목신이 있다면 벌목공은 벌써 몇 번 죽었을 것이고 불낸 사람은 더 빨리 죽었겠네요. 산신이 있다면 산에 터널 뚫어놓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요즘에도 절에서 산신제를 지냈다는 이야기를 매스컴에서 종종 듣습니다. 일반인들이 산신제를 지낸다면 속으로는 아닌데 하면서도 그 사람의 믿음이니까 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출가자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영원체인 신은 없습니다. 그 안에 영원불변한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부 인연을 따라서 변하는 것임을 알고 바른 견해 를 가져야만 어떤 것에도 현혹되지 않습니다. 불법은 우리를 무엇에도 현 혹되지 않도록 합니다. 대상 자체도 자성이 없이 원인과 조건에 따라 변 화해서 새로운 결과가 발생하고 새로 나온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고 다 시 조건을 만나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거듭 반복됩니다. 이것이 사 물의 이치이며 우리의 세상살이입니다.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생활하지 않으면 미신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불자들도 공부를 안 하면 허당 입니다. 미신에 빠지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공을 여러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자성이 없다는 사실을 두 가지, 세 가지부터 열여섯, 열여덟까지로 설명합니다. 방위개념을 예로 들 어 보겠습니다. 나는 우주 다큐멘터리를 자주 보는 편인데 우주선이 올 라가서 지구 바깥으로 나가면 우주선 안에는 지구의 인력이 없기 때문에 아래위가 없습니다. 거꾸로 서 있어도 거꾸로 서 있다는 느낌이 없고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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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선 안에서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합니다. 물방울이나 물건들도 여기저기 떠다닙니다. 아래위는 지구가 끌어당기는 힘 때문에 발생하고 우리가 개 념을 지어서 아래위라고 생각하지만, 우주 바깥으로 나가면 아래위도 없 고 동서남북도 없습니다. 극락세계는 서쪽에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서쪽 으로 가면 인도가 나옵니다. 서쪽이라는 것은 개념일 뿐입니다.

 

동서남북은 우리가 몸을 붙이고 있는 곳을 중심으로 몸의 GPS가 작 동하면서 방위개념이 생겨 고착된 것입니다. 해는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 로 지는데 해가 안 뜬다면 동쪽이 어디 있습니까? 또 해는 영원히 뜨는 해입니까? 성주괴공의 세월 속에 그것도 몇십억 년이 지나면 없어집니다. 우주에는 동서남북과 아래위가 있지 않습니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상 대적으로 우리가 생각해 낸 것들입니다. 방향을 정해놓지 않으면 생활 속 에서 혼란이 일어나기 때문에 개념을 지어놓았을 뿐입니다. 해가 뜨는 쪽 으로 집을 지으면 햇빛이 잘 든다는 효과 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지만 동 쪽이라고 고정된 곳은 있지 않습니다. 우주에 올라가서 본 사람들의 얘 기를 들어보면 방위라는 것도 다 공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일체법이 공하다고 하니까 공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 습니다. 색즉시공을 말해주면 ‘색이 있고 공이 있어서 색이 곧 공이고 공 이 곧 색이고 이렇게 되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공은 자성이 없다 는 뜻인데 그것을 또 하나의 개념으로 잡아서 공성타령을 합니다. 예를 들면 성불이 있는 것 같지만 성불은 없습니다. 중생의 번뇌가 떨어진 것 을 성불이라고 할 뿐 성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불이 어디 따로 있어서 우리가 취득을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공도 공하다는 것을 ‘공공(空空)’이라고 하는데 이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자꾸 헷갈리는 소리를 합니다. 『열반경』에서 모든 생명체들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니까 그것을 유아론으로 이해합니다.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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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을 만들어주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지 불변의 아트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성은 영원한 것이 라고 합니다. 『반야심경』의 불생불멸도 영원한 불성을 깨달으면 나고 죽 지 않는다고 이해합니다. 그것은 외도나 브라흐만의 주장입니다. 중생이 보리심을 일으키고 수행을 하면 그렇게 된다는 뜻이지 영원한 불성이 있 어서 그것을 깨달으면 성불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깨달음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탐진치가 없어진 것입니다. 육조 스님은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을 듣고 깨 달았다고 합니다. 머무는 데 없이, 집착하는 곳 없이 마음이 나오는 것입 니다. 머무는 데가 없으면 맑은 마음만 나오는데 이 역시 맑은 마음이라 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이 없으니까 밝은 것입니다. 보살의 육바라밀, 십바라밀은 욕심을 버리고 나면 생각과 행동이 그렇게 나온다 는 뜻입니다. ‘아’를 버리고 욕심을 버리면 배고픈 사람한테 밥을 안 주 겠습니까? 헐벗은 사람한테 옷을 안 주겠습니까? 탐진치가 없어져서 무 아가 되면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공도 공함을 알아야 된다고 하니까 그것을 허무주의로 이해하는 사람 들이 있습니다. 허무에 집착해서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세상 어떤 법에 집착을 한다면 그것은 ‘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생사를 벗어나라고 열반 을 이야기하지만 의상대사 법성게에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相共和)”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열반이라는 실체가 있느냐 하면, 생사가 사라진 것을 그냥 열반이라고 합니다. 『금강경』 종경(宗鏡) 스님 송에 “보화비진 요망연 법신청정광무변(報化非眞了妄緣 法身淸淨廣無邊)”이라는 구절 도 같은 맥락입니다. 삼신불 중에 보신과 화신은 상으로 나타난 몸이라 진짜가 아닙니다. 그것을 알면 청정법신이 광대무변하다는 말입니다. 그 럼 법신은 실체가 있느냐? 부처님께서 대열반에 드셨다고 하지만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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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고 나고 할 것이 없어서 광대무변입니다. 부처님과 보살의 모든 특성 들, 예를 들면 14무외력, 32응신 등도 자성이 없습니다. 인연 따라서 바 라밀을 행할 뿐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인연 따라 발생했다가 인연 따라 사라진다는 무자성의 공을 체험하고 아는 것이 불교입니다. 이것을 알고 실천하기 때문에 무 소득, 얻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집착하는 것이 있고 그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지만, 공성을 체득한 보살은 잃을 것이 없고 따라 서 두려움도 없습니다. 이 공성에 대해 깊이 사유한다면 틀림없이 불법의 요의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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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장

발보리심

 

오늘은 대승불교의 핵심인 보리심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는 일상 속에서 무언가를 늘 하고 살아갑니다. 무슨 행동이든 말이든 시 작되는 지점은 마음입니다. 마음에 없이 말과 행동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출발한 말과 행동은 다시 마음에 영향을 주어 삼업이 계속 윤회 되어 돌고 돕니다. 마음이 가장 잘 투영된 곳이 얼굴과 눈빛입니다. 얼굴을 ‘얼골’이라고 했는데 ‘얼’은 마음을 뜻하고 ‘골’은 모양을 뜻합니다. 마음 자체는 모양이 없기 때문에 얼굴을 통해 마음을 읽습니다. 얼굴 가운데 마음이 가장 잘 표현되는 곳이 눈입니다. 그래서 연기자들은 표정이나 눈빛을 가지고 마음을 전달합니다.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듯이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 고 있습니다. 도둑질할 마음을 내면 도둑질에 필요한 말을 하게 되고 훔 치는 행동을 해서 도둑놈이 됩니다. 반대로 착한 마음을 내면 착한 얼굴 에 선한 눈빛을 하고 행동도 말씨도 착하게 바뀝니다. 악한 마음을 갖고 서 행동과 말을 착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이 마음먹은 대로 된 다는 것은 마음이 씨앗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처가 된다 고 했을 때 처음에 부처님과 똑같이 되려는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부 처가 되려는 마음을 보리심이라고 합니다. 보리심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불교에서는 본래 부처를 자꾸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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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본래부터 부처였으면 우리가 지금 왜 이 모양이 되어있겠습니까? 왜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번뇌 없는 무아의 상태에 서 욕심을 다 버리고 보니까 고향으로 돌아간 듯한 니르바나의 상황이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래부터 부처였다고 주장한다 면 부처도 변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석가모니 부처님도 부 처였다가 중생이 된다는 말인가요?

 

본래성불론은 중국에 와서 극단적인 사람들에 의해 주장된 것이고 실 제로는 보리심을 내는 데서 출발하여 수많은 겁을 닦아 부처가 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연등부처님의 위대한 모습을 보고 ‘나도 당신처 럼 붓다가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것을 묻고 보리심을 일으키셨습니다.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등 모든 경전이 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화엄경』 입법계품 같은 경우는 보리심의 아주 핵심적인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부처가 되고자 하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부처가 된 연후에 보니까 이렇게 이렇게 해야 된다고 대답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하 면 우리에게는 불교가 없는 것이고 불자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또는 ‘나 같은 사람이 뭐 부처님처럼 될 수가 있겠는가?’ ‘나는 그런 거 모르 고 그냥 부처님께 빌어서 복 받겠다.’ 한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는 보리심을 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을 ‘발아뇩다라삼 먁삼보리심’이라고 합니다. ‘발’은 냈다는 뜻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 리’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뜻합니다. 발보리심은 전부 버리 고 부처님처럼 최고의 깨달음, 니르바나에 도달하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 입니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셨을 때 왕위도 버리고 나라도 버리고 왕궁을 나와서 옷도 버리고 머리도 깎아버리고 차고 있던 칼도 던져버리셨습니 다. 처음부터 부처가 될 때까지 버리는 작업만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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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한 것도 사람을 모아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부하려고 따 라오니까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치셨을 뿐입니다. 『금강경』 첫머리에 “아 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는 어떻게 마음을 가져야 하며 어떻게 마음 을 항복시켜야 합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소승의 『아함경』도 대승의 『화 엄경』 『법화경』도 모두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이 어떻게 살 것인가?’라 는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보리심을 일으키지 않은 사람들은 경전에 대해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님, 법화경을 읽으면 사업이 잘된다면서요?” “스님, 생일 때 는 무슨 경을 읽으면 좋습니까?” “스님, 초상났을 때 금강경을 읽으면 좋 다면서요?” 보리심을 발하지 않고 경전이나 불상을 접하면 기복으로 흐 르기 쉬운데 나는 기복이라는 말에 불교를 붙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 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내려면 ‘내가 지금은 아주 미약 하지만 부처님처럼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 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알아보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경전을 보고 듣고 바른 견해가 생기게끔 하는 것 아닙니까?

 

보리심을 발하지 않는다면 불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보리심 을 내서 나의 더러운 때를 씻기 위해 정진하고 일체중생을 위해 살겠다는 생각을 내는 순간에 이 사람은 보살이고 불자입니다. ‘불자’는 부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상속받으려면 우선 보리심을 내야 하고 수행을 해서 내 마음과 업을 바꾸어나가야 합니다. 보리심은 부처 님의 정신적인 유전자입니다. 보살이나 불자에게는 ‘여래사’, 부처님의 심부름꾼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보리심을 내서 수행하고 설법을 하는 등 여래의 심부름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릅니다. 보리심을 발하고 난 후 에 보리심을 키워나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키우고 키워서 마침내는 석가 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과거칠불과 똑같은 부처가 될 것입니다. 이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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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용맹정진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다 를 뿐이지 이 한 생각 낸 것이 씨앗이 되어 한 생에서도 엄청나게 바뀐다 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보리행론』에서는 보리심을 보 석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보석을 길바닥에 던져놓지는 않습니다. 보석함에 잘 넣어놓던지 목에 걸고 다닙니다. 그만큼 보리심을 보석처럼 소중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수만 가지 마음을 낼 수 있지만 지금까지 인간이 내왔던 마음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 보리심입니다. 아집을 버리고 탐진치를 벗어나 서 일체중생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겠다는 이 마음 이상이 있겠습 니까? 그래서 보리심을 내는 것이 너무나 소중합니다. 보리심을 내지 않 고 경을 보거나 법문을 들으면 그냥 지식 전달일 뿐 내 안에 변화가 일어 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집을 두고 고집하기 때문에 변화가 되지 않 기 때문입니다. 보리심을 발한 연후에 들으면 지식이 아니라 실제가 됩니 다. 학자와 수행자가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도 보리심을 일으켜서 행자가 되십시오. 부처님 말씀을 지식이나 상식 수준에서 들으 려고 하지 마십시오. 불교를 상식적으로 알아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내 마음을 바꾸어나가는 수행에 써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모양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삶은 마음을 어떻게 먹고 있 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겉만 생각하고 겉치레만 합니다. 한국은 이제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고 안에서도 밖에서도 인정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습니다만 속은 많이 바뀌어야 합니다. 나 부터, 우리 불자들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생활 속에서 작은 것부터 하나 하나 실천해야 됩니다. 욕심이 목구멍까지 차 있으면서 어쩔 수 없이 명 분상 조금 하는 선행 정도로는 욕망이 허물어지지 않습니다. 수행에 장 애를 일으키는 것은 다 욕망 때문이니 욕망이 없으면 장애가 안 일어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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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마음을 잘 먹어야 합니다. 욕심이 얼마나 크면 경에서 그것을 ‘인 아산(人我山)’이라고 표현했겠습니까? 산처럼 높아서 앞을 가로막고 있 다는 뜻입니다. 자기 삶을 가로막는 것은 욕심 때문이고 아상 때문입니 다. 보리심을 내서 일체 중생을 위해 살아간다면 욕심의 산은 저절로 줄 어들고 마침내는 무너질 것입니다. 이 생각을 갖는 것부터가 수행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이제 마음을 내시기 바랍니다. 절에 다니면서 나만 잘 살 고 내 아이만 잘 되기를 빌면서 중생의 아픔을 보살피지 않았던 삶을 돌 아보십시오. 언젠가는 내가 부처님처럼 되어 일체중생을 위해야겠다는 생각을 내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내주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보살님, 스승님들이시여! 저를 굽어살펴 주소서. 이전의 스승 들께서 보리심을 발하시고 보살의 학처와 차제에 머무셨듯이, 저 또한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보리심을 발하고 보살의 학처를 차제에 따라 배우겠습니다. 최상의 보물인 보리심을, 일으키지 않은 이는 일으키고, 일 으킨 이는 기우는 바 없이 더욱더 높이 증장되게 하소서. 허공계가 있는 한, 중생계가 있는 한, 그때까지 제가 머물러 중생의 고통이 사라지기를, 허공같이 무량한 중생의 삶에 바탕이 되기를, 흙과 물과 불과 바람, 외 딴곳의 나무처럼 모든 중생의 삶의 토대가 되어 늘 원하는 대로 세세생생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지금 내 삶은 과보가 있어, 지고한 인간의 생을 성취하였고 오늘 부처님의 성품을 가진 이로 태어나니 이제 부처님의 아 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불성에 어울리는 일을 하며 허물없이 고귀한 이 불성을 더럽히지 않도록 그와 같이 하오리다.’

 

나 혼자만, 내 가족만 위해서 살지 않겠다고, 일체중생을 위해서 살겠 다고 마음만 내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 실천해서 이 마음이 커 지도록 노력해 주셔야 됩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자꾸 이기심이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이기심은 내 수행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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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해칠 수 있는 위험한 마음이고 일종의 질병입니다. 나를 괴로움의 구덩이에 빠뜨리기도 하고 친한 사람들을 괴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극단 적인 이기심이 온갖 폭력과 사회적 악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기심의 범위 가 확대되면 이기적인 나라가 됩니다. 때로는 전쟁을 일으켜 주변국에 엄 청난 피해를 줍니다. 그런 참상은 지금, 이 순간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 고 있습니다. 이기심이라고 하면 개인적인 차원만 생각하는데 집단 이기 심이 더 무섭습니다. 너와 나를 나누고 집단 이기심이 발현되면 나라 안 이나 나라 간에나 비극은 끊이지 않습니다. 이기심은 행복을 만들 조건 이 전혀 안 됩니다.

 

행복을 바란다면 이기심을 가져서는 안 되고 이타적으로 살아야 합니 다. 이타적인 삶은 자발적으로 나부터 하는 것입니다. 그가 안 하니까 나 도 안 한다고 하면 이타행이 아닙니다. 나부터 무엇을 바라지 않고 그냥 하는 것이 이타행입니다. 하나하나 그렇게 해나가면 그것이 큰 수레, 대 승입니다. 같이 살자는 뜻이죠. 보리심은 큰 수레입니다. 보리심을 발하 는 것은 부처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지만 그 기저에는 고통스러워하는 중 생을 건지고자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탕이 안 되면 참선을 아 무리 해도 아상을 버리는 위대한 참선이 되지 않습니다. 위대한 참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번뇌를 끊고 중생을 위하겠다는 마음을 내고 그 마음을 기반으로 참선하면 위대해지는 것입니다. 참선도 결국 보 리심이 바탕이 돼야 합니다.

 

이타심을 행하는 데서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절벽에서 뒷걸음치 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듯이 이타심에서 한 발짝 물러서면 바로 이기심 의 낭떠러지입니다. 만약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수행자건 재가자건, 남을 도우려는 생각을 내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먼저 살핀다면 세계에서 지 도국이 될 것입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한국은 그래도 과거에 지은 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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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보가 적은 편입니다. 일본, 독일, 미국 등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죽 이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약소국이어서 그런 부분도 있지만 남의 나라 에 쳐들어가서 그 나라 사람들을 죽이고 재산을 뺏고 나라를 지배하여 고통을 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우리를 적으로 보는 나라 가 별로 없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큰 이익입니다. 나는 이것이 불교의 영 향이라고 봅니다. 일본, 미국, 중국, 소련 이런 강대국들 틈에서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이제 이 작은 나라가 큰 나라가 되었습니다. 지금 부터는 좀 더 큰마음을 내고 욕심을 줄이면서 남을 돕고자 한다면 세계 에서 위대한 지도국이 될 것입니다. 힘만 세다고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승의 보리심이 얼마 나 보석 같은 마음인지,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 줄 결정적인 씨앗인지 염두에 두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이 마음만 갖고 계신다면 이 세상에 두 려워할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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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장

포교의 의미

 

오늘은 지금까지 공부해온 내용을 어떻게 전파할 것인가, 포교의 문제 에 대해 말씀드릴까 합니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 숫자를 동원해서 설 법하신 내용이 많습니다. 5온, 12처, 18계처럼 숫자가 붙는 경우가 많고 아승지, 나유타 등 다양한 수의 단위는 물론, 심지어는 항하의 모래알이 나 무량수를 가지고도 설명하셨습니다. 인도가 원래 수학이 발달한 나라 여서 0의 개념도 인도에서 나왔고 공사상도 사실은 수학의 0에서 출발 했습니다. 0은 없는 것이 아니라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진행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공의 개념이 도출되고 연기의 법칙도 설명됩니다. 그 래서 수학은 그냥 숫자가 아니라 사유 방식이고 철학입니다. 내가 불교 와 수학을 연관 지어 생각하는 이유는 같은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1+1=2 를 생각하면 원인이 되는 수 1에 조건이 되는 수 1을 더했을 때 2라는 결 과가 나옵니다. 불교는 보리심이라는 원인에 수행이라는 조건이 더해져 서 성불이라는 결과가 나옵니다. 불교나 수학이나 답을 내는 점이 같은 데 여기에는 비약이 없습니다. 수학을 기초로 하는 과학도 마찬가지입니 다. 물리학, 생물학, 공학 등의 분야는 수많은 실험을 거칩니다. 똑같은 원인에 똑같은 조건을 주었을 때 똑같은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어떤 사 람이 했건 어떤 감정을 가지고 했건 마찬가지입니다. 인과를 바탕으로 한 불교의 수행론은 이런 점에서 매우 합리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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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이러한 합리성은 탄탄한 논리학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논리학을 인명학(因明學)이라고 하는데 논증을 통해 말의 확실 성을 추구하는 학문입니다. 무엇을 주장하려면 타당한 이유를 대고 그 에 맞는 사례를 들어서 증명해야 합니다. 논증에 오류가 있으면 어떤 말 도 진실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엄격한 논리학으로 볼 때 공부를 깊이 있 게 하지 않고는 불교를 제대로 하기 어렵습니다. 산수만 잘한다고 수학 이 아니듯이 불교를 껍데기로 하거나 잘못된 공식을 가지고 수행하면 오 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특히 불법을 전파하려면 정확한 말로 남에게 설 명해야 합니다. 틀린 말을 하면서 방편으로 그렇게 한다고 변명해서는 안 됩니다. 방편은 방법을 뜻하는데 수학 공식과 같이 명료하고 정확해야 합니다.

 

법을 전파하는 사람은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듯 해야 합니다. 의사는 증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어떤 조건을 주었을 때 치료가 될 지를 알아야 그다음에 약을 투입합니다. 약을 투입할 때 무슨 부작용이 일어날지 알아야 하고 부작용에 어떻게 대처할지도 알아야 환자에게 해 가 가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을 쓰셨습니다. 제자들이 수 행하다가 부작용이 일어났을 때는 정확한 약을 다시 써서 수정을 하셨 습니다. 초전 법륜에서 일어난 부작용 때문에 중전 법륜, 즉 대승을 얘기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초전 법륜을 하고 보니 아라한과만 증 득하고 이기적인 집단이 되어갔기 때문입니다. 사회 전체를, 인류뿐 아니 라 중생을 전부 구제한다는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 부작용 때문에 이 타심을 일으켜줄 대승의 말씀을 다시 전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법은 지금의 과학을 가지고서도 다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현대 심리학이 도저히 따라 올 수 없을 정도의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법을 전파하는 당위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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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포교라고 하면 언뜻 사람을 많이 모으는 것을 먼저 떠올립니다. 사람 모으는 것을 능사로 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 은 포교가 아닙니다. 말 한마디가 듣는 이로 하여금 고통을 줄이고 행복 의 길로 인도한다면 그것은 옳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포교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라도 직접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를 누리게 해주어야 합니 다.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 불법에 대한 확신이 서고 그 확신 속에서 다 른 사람에게 그 법을 전하는 것이 포교입니다. 포교에 대한 또 하나의 잘 못된 행태는 영험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어느 절 부처님이 영험이 있어서 기도를 하면 뭐가 이루어진다더라, 이것은 포교가 아니고 혹세무민입니 다. 포교는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 그것이 해탈의 길로 이끌기 때 문에 당위성을 갖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마지막에 이렇게 권합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 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어서 가자, 빨리 가자, 저 니르바나로.”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것을 권선이라고 합니다. 착해지는 길이나 좋은 길 을 권하는 것이 권선입니다. 화주책 들고 시주받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등을 달면서 욕심을 버리고 부처님의 지혜를 얻겠다고 발 원합시다.’ 하면 그것은 권선이 됩니다. 부처님 법은 번뇌를 버리고 악함 을 버리고 선해지도록 권하는 것입니다. 권선이 중요한 것은 부처님 법으 로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변화에서 시작해서 말이 변하 고 행동이 변하는 동기를 주기 때문에 법을 가지고 이끄는 것입니다. 그 래서 법이 없으면 권선이 안 됩니다. 권선을 하려면 내가 먼저 공부해야 합니다. 여행 가이드를 하려 해도 그 지역을 훤히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위치와 지형은 물론 역사와 전설, 지금 그곳 사람들의 삶까지 공부해서 누구라도 같이 갔을 때 알려주는 것이 가이드가 할 일입니다. 적어도 우 리가 불법의 가이드가 되려면 내가 먼저 불법을 공부하지 않고서는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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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합니다.

 

『금강경』에서는 권선의 방법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지독송서사 위 타인설(受持讀誦書寫 爲他人說)”, ‘수’는 받아들인다는 뜻이고 ‘지’는 몸에 지니듯 자기화한다는 뜻입니다. 달라이 라마처럼 90세 되도록 지금 도 끊임없이 경을 보는 것이 수지입니다. ‘독’은 눈으로 읽어서 이해하는 것이고 ‘송’은 소리 내어 읽어서 기억 속에 남기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 씀이 기억 속에 안 남아 있으면 창고를 크게 지어놓고 그 안에 쌀이 한 낱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기억은 창고이고 말씀은 쌀입니다. 배고플 때 창고에서 쌀을 꺼내 밥을 짓듯이 ‘아, 이럴 때는 무슨 말씀이 유효하겠 구나.’ 하고 부처님 말씀을 기억에서 꺼내 써야 합니다. 수지독송을 하지 않으면 그때그때 꺼내 쓰기 어렵습니다. 중요한 말씀을 정확하게 기억하 고 어떤 상황을 만났을 때 ‘아, 부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셨지. 이럴 땐 이렇게 하라고 하셨지.’ 이게 바로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악업을 멈출 수 있습니다. 이미 결과가 나온 뒤에는 수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언제 나 기억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서사’는 경을 베껴 쓰는 일입니다. 베껴 쓰는 자체가 경을 수지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고 옛날에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베껴 쓴 것을 묶어서 책으로 만들어 남에게 보시했습니다. ‘위타인설’은 남을 위해 설 명해주는 것입니다. 남에게 설명하려면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틀림없이 전달해야 합니다. 우리 불자들은 대부분 이 점이 부족합니다. 누가 물으 면 경전의 근거를 가지고 대답하지 못합니다. 무지는 몰라서 깜깜한 것입 니다. 수지독송으로 기억한 법을 자꾸 설명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잘 모르겠다 싶으면 물으십시오.

 

권선의 핵심은 상대가 부처님 법을 통해 선해지는 데 있습니다. 부처님 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경을 읽고 기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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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선해지지 않는 이유는 경의 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 욕망을 버 리지 않고 이기심을 내는 한 기도가 되지 않고 경을 봐도 수지독송이 되 지 않습니다. 이것은 권선도 아니고 포교도 아닙니다. 달라이 라마께서 는 큰 행사를 하더라도 법사가 법문을 하지 않으면 행사를 못하게 하십 니다. 법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그 행사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 분이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고 할 때 부처님의 법을 모르면 신처럼 믿 게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신이 아닙니다. 창조주가 아닙니다. 법이 있 고 그 법을 깨친 이가 부처이고 그 법을 공부하는 이들이 승가입니다. 이 것이 불법승 삼보입니다. 법이 담겨 있는 것이 경입니다. 그래서 『금강경』 에서 “개종차경출(皆從此經出)”, 모든 부처님 법이 이 경으로부터 나왔 다고 했습니다.

 

대웅전을 짓거나 다른 불사를 할 때도 권선을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내 절, 우리 절이라는 생각을 낸다면 권선이 아니라 권악이 됩니다. 무엇 을 악이라고 합니까? 이기적인 것을 악이라고 합니다. 절에 가서 내 복 빌었다고 하면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절에 갔다고 다 착한 사람이 아닙니 다. “절에 가서 30년 기도했는데 왜 나한테 이런 어려움이 옵니까?” 묻는 데 착한 기도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권선은 다른 이를 법의 길로 이끌어주는 것이지 자기 것을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포교 하는 곳에 가서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지 말고 거기서 가르치는 분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거기 소속된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복을 빌거나 법사가 틀린 얘기 하면서 자기 무 리 만들어서 이익을 취한다면 권선이 아니고 권악입니다. 권선을 다른 말 로 권선징악이라고 합니다. 선을 권하고 악을 눌러놓는 것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인과의 공식으로 불교가 가장 완벽하게 이야기해놨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무엇을 권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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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대체로 세속적인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것도 행복 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세속적인 행복은 고통이 따릅니다. 산꼭대 기가 높은 만큼 골짜기가 깊듯이 행복의 뒷면에 고통이 깊어지니까 그것 은 권유할 것이 못 됩니다. 요즘은 “부자 되세요!”라는 말을 덕담인 양 하는데 허망한 이야기입니다. 욕심을 떠나면 돈이 많건 적건 상관없이 자 유롭게 살아갈 힘이 생깁니다. 불법은 우리를 자유의 길로, 진정한 행복 의 길로 이끌어줍니다. 여러분도 이 법을 배우고 수행하면서 가까운 인 연을 이끌어 주십시오. 그러면 아이들도 엄마를 보고 배웁니다. 부모가 잘못된 신행을 하면 가족들의 마음에 불신만 키워줍니다. 큰마음을 내서 이기심을 버리고 수행할 때 아이들 역시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포교를 하는 목적은 법을 유통하는 데 있습니다. 절에서 때마다 행사 를 많이 하는데 법이 중심이 되어야 포교가 됩니다. 법이 중심이 되지 않 으면 행사가 아무리 성대하고 화려해도 법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 많이 모아놓고 바라춤을 추고 나비춤을 추고 음식을 산더미처럼 쌓아놓 고 했더라도 거기에 법이 없다면 그냥 춤판에 불과하고 문화행사에 불 과합니다. 정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 법이기 때문에 법을 권유하는 것이 포교라는 점을 명심하셔야 됩니다. 법이 빠진 행사는 불량품과도 같아서 의미가 없을뿐더러 삿된 곳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달라이 라마께서도 “기 도만 하는 것은 삿되기 쉽다. 반드시 부처님 말씀을 같이해야 기도가 살 아나고 기도하는 사람의 정신도 살아나고 법도 살아나서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법사로 초청받아서 법문하러 가보면 “10분만 해 주십시오. 신도들이 지루해서 듣지 않으니까 짧게 해주십시오.” 이런 부 탁을 합니다. 요즘에는 아예 법문을 청하지도 않습니다. 법이 유통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선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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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법의 길로 이끄는 보살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포 교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삼국시대에 묵호자, 마라난타, 아도 화상이 이 땅에 불법을 전하셨습니다. 인종과 지역이 다르고 나라가 다른 곳에서 와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포교하셨습니다. 그렇게 거창하게 포교하 지는 못할망정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포교를 안 합니다. 부처님 법을 공 부하면 우선 가까운 사람부터 좋은 길로 이끌어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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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장

수행자의 길

 

끝으로 우리는 무엇 때문에 불교를 배우는가, 어떤 결과를 위해서 수 행을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 왜 카필라바스투에서 태어나서 출가를 하고 6년 고행하는 과 정들을 겪으셨는가? 왜 45년 동안 설법을 하고 열반에 드셨는가? 우리 도 그렇게 될 수 있는가? 실제로 안 되는 일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그냥 주장에 불과할 것이지만, 부처님의 말씀은 실증을 거쳐서 나온 주 장입니다. 당신이 해봤고 당신이 가르친 대로 해본 사람들도 그렇게 되 었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된다는 것이냐면, 욕심을 버리고 행복한 삶을 이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안 해서 문제이지 하면 된다는 확실한 증거 가 있습니다. 부처님만 그렇게 되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이 여러 경로를 거쳐서 전파되었고 2,600년 동안 수많은 성문과 보살 제자들이 나왔습니다. 빨리어 전승의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에 서도 아라한과를 이루신 도인이 수없이 나왔고, 산스크리트어 전승에서 대승불교로 가는 루트를 통해 티베트, 중국, 한국, 일본에서도 수없는 도 인들이 나왔습니다. 누구나 하면 된다는 얘기입니다.

 

도인이란 번뇌를 다 버리고 니르바나를 확인한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집단적으로 2,600년에 거쳐서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 분들이, 부처님은 우리와 다른 특별한 존재이고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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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았다면 지금까지 불교가 이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자들 본인이 직접 수행을 해보고 나서 성취가 되니까 우리에 게 수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만약 해도 안 됐으면 아마 그중에 많은 제 자들이 그만두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목숨을 걸고 도를 닦았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닐 경우에는 실망하고서 버렸을 테지만, 그런 사람 은 없습니다. 수행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도인이 나옵니다. 불법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해보니까 된다는 것이 2,600년 역사에서 증명이 되었 으니 불교를 만났다면 수행을 해야 합니다. 분명 이런 경계가 있다는 것 을 믿고 정진해야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허약하게 엉뚱한 생각을 내서는 안 됩니다. 지금부터 작은 정진이라도 시작해서 조금씩 나아가야 자기 자신과 중생에게 도움 이 됩니다. 전국의 오래된 절들은 모두 큰 스승들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 해서 자리 잡고 가르치기 시작했던 곳이지 복 빌러 다니라고 지은 곳이 아닙니다. 그 스승들의 힘으로 한국에서 불교가 1,600년을 내려올 수 있 었습니다. 전란 속에서도, 조선 500년의 억불정책 아래서도 서산, 사명, 보우, 부휴 같은 큰 스님들이 수두룩하게 나왔습니다. 재가자들도 ‘절대 나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적당하게 그냥 넘어가서는 이익이 하나도 없습니다.

 

도인들을 다 이야기하려면 수없이 많겠지만 몇 분만 추려볼까 합니다. 우선 신라 때 원측 스님을 들 수 있습니다. 중국에 가서 현장법사의 역장 에서 번역에 참여했고 규기 스님과 함께 현장법사의 대표 제자로 불립니 다. 유식의 도리를 잘 알아서 『해심밀경소』,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찬』 같은 저술을 남겼는데 지금도 많은 수행자가 읽을 만큼 명저입니다. 그 때 유학은 가지 못했지만 원효 스님 같은 분은 대승 보살의 길을 철저하 게 살았습니다.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그중에 『대승기신론소』, 『유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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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도』, 『법화종요』, 『열반종요』 등은 지금까지 남아서 공부하는 사람들 에게 금과옥조가 되고 있습니다. 의상 스님은 중국에 가서 화엄종 지엄 법사 밑에서 공부해 견성하고 그 깨달음의 내용을 시로 지었습니다. 『법 성게』가 그것입니다. 16년 화엄을 공부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것만 봐 서 깨친 것은 아니고 참선도 하고 다른 수행도 겸해서 그런 오도송을 쓴 것입니다. 귀국해서는 부석사에서 법의 문을 열었고 지금의 낙산 홍련암 법당 자리에서 붉은 연꽃 위에 서 계신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고 법을 널 리 펼치셨습니다.

 

자장율사는 통도사를 창건해서 80%에 달하는 신라사람들에게 수계를 하신 분입니다. 중국의 오대산 북대 꼭대기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태화 지라는 연못이 있는데 거기서 기도하시다가 문수보살을 친견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입으셨던 가사와 사리를 전달받고 귀국하여 통도사에 모시 고 계단(戒壇)을 세우셨습니다. 부처님의 사리를 친견하시고 “진신사리 금유재 보사군생예불휴(眞身舍利今猶在 普使群生禮不休)”, 진신사리가 지금까지 남아있어서 예불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글을 남기셨 습니다. 우리나라에 진신사리를 처음 들여온 분이 자장 스님이고 그 뒤 에도 불법에 맞게 신라의 제도를 만들어 나가셨습니다. 비구계, 보살계 는 물론 재가자들도 대부분 오계를 받아서 신라가 윤리적으로 탄탄한 기반을 갖는 데 큰 역할을 하신 분입니다.

 

진표 율사는 자장 율사보다 뒤에 활동하셨던 분인데 역시 중국에 가서 숭제 스님에게 법상종의 참법(懺法)을 공부하고 와서 금산사를 개창 하 셨습니다. 부사의방에서 참회정진을 하고 기도하실 때 지장보살과 미륵 보살을 친견하셨는데 지금 금산사 미륵전에 모셔진 불상이 율사께서 보 신 크기라고 합니다. 금산사뿐만 아니라 선운사, 운주사, 법주사도 진표 율사의 법맥에 의해서 개창된 곳입니다. 진표 율사가 수계를 하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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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너무 많이 몰렸습니다. 그때가 통일신라 때인데 왕이 보기에 백제 출신 승려가 너무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중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해서 스님을 금산사에서 쫓아냈다고 합니다. 스님이 가는 곳마다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하니 스님의 교화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원측, 원효, 의상, 자장, 진표와 같이 드러내놓고 크게 교화를 펼치신 분이 그 뒤에도 많이 계셨고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보살행을 한 분들도 너무너무 많습니다. 수많은 도인들이 각자 특징에 따라서 중생을 교화하 셨지만 제가 가장 크게 감명 받았던 분은 고려 명종 때 보조국사 지눌 스 님입니다. 국사의 행적은 김부식의 손주인 대학자 김 군수의 비문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국사는 어려서 출가를 하셨습니다. 자녀가 없던 부모 는 부처님께 가서 아이를 낳게 해주시면 출가를 시키겠다고 기도했습니 다. 그런데 낳고 보니 너무 병약했습니다. 지금도 보조국사 진영을 보면 앉아계신 모습이 마르고 허리가 굽은 것이 병약했겠다는 느낌을 받습니 다. 어려서부터 자주 아프니까 보는 사람마다 절에 데려다주라고 권했습 니다. 그래서 8살에 출가를 했습니다. 당시 고려에는 경전을 가르치는 곳 이 많았고 법회도 성행했고 의식을 굉장히 장엄하게 했습니다. 국사가 어 릴 때 들어가서 경을 배울 때 강원 한 곳에서 배운 것이 아니고 절마다, 강 사마다 잘하는 분야가 있어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경을 배웠습니다. 1100 년에서 1200년 사이 고려 중기에는 그런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서 좋은 인 연들을 만나 경을 배울 수 있었나 봅니다. 워낙 머리가 영민하신 분이 스 물댓 정도의 나이까지 각각 최고의 스승에게 배웠으니, 경을 아주 깊이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갖춰진 환경 속에 살아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경에서는 수행하 면 깨닫는다 하고 실제로 깨달은 사람들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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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분이 누가 있는지 봤더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확인하러 담 선법회에 나갔습니다. 담선법회는 결제 동안에 모여서 선에 대해 논의하 는 법회입니다. 100일 동안 뛰어난 수행자들이 하루에 한 명씩 자기 견해 를 밝히는 자리였는데 보조국사는 나이가 어려서 마지막에 차례가 되었 습니다. 도인이 나와서 활발한 소리를 할 줄 알고 100일 동안 듣고 있었 는데 전부 나와서 하는 소리가 부처님 가신 지는 오래됐고, 법의 힘이 약 해진 시대에 우리가 공부한다고 되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연등회 같은 법 회가 열리면 왕이 공양을 하고 수만 명이 모여서 장엄하게 절차를 진행 하는데 실제로 안에 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설법하는 사람이 올라가서 그 저 나무아미타불 염불하여 극락세계 가자는 소리뿐, 성불에 대해서 말하 지 않는 것이 고려 보조 공부 시절의 현실이었습니다.

 

보조국사가 맨 마지막에 나와서 사자후를 토했습니다. 스승 가신 지 오래됐으나 우리가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있지, 법에 강약이 어디 있느냐고 설했습니다. 깨치려고 공부하는 사람은 없고 타력 신앙이나 하 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리며 비판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는 그래도 염불 이라도 부지런히 해서 극락세계 가자고 했는데 지금은 부지런히 빌어서 돈 벌자는 얘기나 하고 있으니, 그때보다 더 타락했습니다. 국사가 설법 을 마치고, 나를 따라서 정진하러 갈 사람은 손 들어보시오 하니 그 많 은 사람 가운데 득재 스님을 비롯해서 일곱 명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일곱 분이 대구 팔공산 거조암에 들어가서 결사를 했습니다. 경전에 나 와 있는 대로 정진을 하는데 한 사람은 아프다고 빠져버리고 한 사람은 은사가 죽었다고 가버리고 이런저런 이유로 다 빠져서 3년 지나고 국사 혼자 남았습니다. 바른 법으로 살자는데 아무도 옆에 없으니 참 쓸쓸한 얘기입니다. 거조암에 계시다가 정진을 더 해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천은 사 등 다른 곳으로 가서 정진하시다 지리산 상무주에서 힘을 얻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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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무도 따라온 사람이 없고 시자도 없이 혼자서 그 약한 몸으로 나 무하고 밥해 먹고 살면서 화두 정진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부에서 보조국사가 깨닫지 못했다는 소리를 합니다. 도인을 두고 그렇게 헛소리를 하면 안 됩니다. 당신이 깨달은 경계에서 말씀하신 내용들은 이미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이고 기록에도 남아 있습니다. 국사가 상무주에서 공부를 하시던 어느 날, 좋은 경계가 와서 이게 깨달 음인가 보다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스승이 계셨다면 그 자리에서 점검해 주셨을 텐데 그때는 스승이 없었습니다. 삼매에 들어 좋은 경계를 보고 깨달은 줄 알았다가 삼매에서 벗어나 생활을 해보니까 번뇌가 도로 올 라왔습니다. 그제야 속은 줄 알고 참회를 하고 다시 정진으로 들어갔습 니다. 그런데 이게 아닌 줄 국사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경을 철저히 봐 서 내용을 알고 점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에서 공성 체험을 비롯 해서 수행의 단계를 정확하게 이야기해놨는데 그 내용을 모르면 어떤 경 계가 나타났을 때 그것을 실재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대다수가 그렇습 니다. 그러나 국사는 이미 마의 경계라는 것을 아니까 다시 정진에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정진을 하다가 『화엄론』을 읽어 내려가는데 순간 확연하게 깨 침이 열렸습니다. 그 뒤에는 행주좌와 무엇을 하든 번뇌가 더 이상 일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게 진짜인가, 또 마의 경계인가, 순간적으로 온 경계인가 점검해 보셨습니다. ‘자수용법락(自受用法樂)’ 기간이라 해 서 깨친 경계를 확인하고 이제 사람들을 교화하러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교화지를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서울이 개성이었는데 개성 가까 이 가면 권력과 결탁되기 쉽고 왕의 비호를 받으면서 편히 살면 수행자 들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국사는 권력과 좀 먼 곳을 찾아서 전라도 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여수 금오도에 송강암이라는 지역이 있는데 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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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지금 없지만 국사가 거기서도 몇 달을 계셨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다가 1195년에 여수 흥국사를 거쳐서 들어간 곳이 송광사였습니다. 그때 이름 은 송광사가 아니라 길상사였는데 스님들이 30분 정도 계셨습니다. 국사 가 그곳을 보고 안착할 만한 곳이라고 여겨서 머물기로 했는데 대중들 이 대환영을 했습니다. 벌써 말 한마디만 들어봐도 도인인 줄 알고 주지 하는 사람도 자리를 비키고 대중도 큰 스님 따라서 공부할 마음을 냈습 니다. 요즘은 옛날 같지 않아서 큰 스님들이 그런 대접을 못 받지만, 전 강 스님 때만 해도 28세에 칠불에서 조실을 하셨고 송광사 정화 때 구산 스님도 걸망 하나 짊어지고 와서 태고종 스님들을 다 포용해서 사셨습니 다. 그때만 해도 공부 많이 하여 견성한 도인을 모셨지, 지금처럼 권력과 금력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보조국사께서 송광사에서 결사를 시작하자 도인 오셨다는 소문을 듣 고 많은 사람이 모였고 돌아가실 때는 700 대중이 귀의했습니다. 권력과 는 멀리 떨어진 골짜기에서 대중을 지도하고 살면서 『계초심학인문』 같 이 초심자들이 지켜야 될 일들을 글로 쓰고 교재 편집도 하셨습니다. 그 렇게 가르쳤어도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 도인이 안 나왔습니다. 국사가 어느 날 “몸이 아프니 곧 가겠구나.” 하셨습니다. 깨치고 나면 언제 가시 는 줄을 본인들이 아십니다. 비문에 보면, 가시기 보름 정도 전에 제자들 을 모두 불렀고 주변에 토굴 같은 데서 정진하던 스님들도 소식을 받고 모였습니다. 송광사 대웅전 앞에 700 대중이 모인 가운데 국사께서 법상 에 오르셨습니다.

 

국사께서 마지막으로 대중을 향해 “이제 갈 때가 되었으니 물을 것이 있으면 물으라.”라고 하셨습니다. 가시고 나면 물을 곳이 없을 테니 공부 하는 도중에 의심나는 것을 지금 다 물으라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스 승을 보내는 제자들 입장에서는 마음이 착잡하기도 하고 묻기가 민망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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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인이 물으라니까, 또 이 기회가 아니면 물을 데가 없기 때문에 108명의 스님이 차례로 물었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법을 묻는 제자에게 답을 하신 것이 도인의 마지막 일이었습니다. 육조 스님은 돌아가시려는데 옆에 있던 대중이 전부 우니까 일어나서 “예끼! 이놈들! 내가 지금 죽는데 너희들이 왜 우냐! 내가 어디 갈 데를 몰라서 헤맬까봐 불쌍해서 우냐?” 그렇게 뭐라 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죽음에 서 자유롭고 사선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모습입니다.

 

도인들이 가실 때는 여러 가지 모습을 보입니다. 앉아서 죽고 서서 죽 기도 한다는데 사실 그런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누워 서 열반하지 않으셨습니까? 보조국사께서는 마지막까지 질문에 답변을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 생각해보면, 그때까지 깨친 사람이 없었기 때 문에 마지막으로 크게 발심할 기회를 주고 깨침의 기연을 만들어주기 위 해서 그렇게 하셨을 것 같습니다. 대중 가운데 누가 마지막 질문을 드렸 습니다. “스님께서 아프신 것은 유마거사의 아픈 것과 같습니까? 다릅니 까?” 그러자 국사께서 “너는 같고 다른 것을 따지려고 출가했느냐?” 하 시고 “더 물을 것 없느냐?” 해서 다들 잠자코 있으니까 “나 가겠다.” 하 고 뒤로 살짝 기대면서 가셨습니다. 일주일 동안 시신에 손대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대로 앉아계시면서 수염이 자랐다고 합니다. 티베트 식으로 이야기하면 뚝담에 드신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불안합니다. 이 육신을 나라고 애착하기 때문에 두렵고, 죽으면 육신과 가진 것을 다 잃을까 싶어서 무섭습니다. 그러나 반야바라밀을 의지하는 보살은 얻을 게 하나도 없음을 알기 때문에 공 포가 없습니다. 보조국사의 마지막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대로 앉아 계 신 일주일 동안 대중들도 일어서지 못했고 고요한 가운데 온 송광사 뜨 락이 은은한 향기로 덮였다고 합니다. 죽은 공명이 중달을 놀라게 해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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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게 했듯이 돌아가신 국사께서 일주일 동안 700 대중을 눌러놓고 정 진하게 했습니다. 이런 경계들이 실제로 있기 때문에 공부하라는 것입니 다. 죽음 앞에서 세속적인 복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국사께서는 허깨 비 같은 복을 벗어나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경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 습니다. 말법의 스승께서 보여주신 이 모습을 우리가 믿고 정진하자는 뜻에서 보조국사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세속의 삶 속에서 정진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세속의 복에 너 무 치중하지 말고 버릴 수 있는 것부터 놓아버리는 데서 시작하십시오. 재 가자나 출가자나 최종 목표는 똑같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욕 심을 버리고 번뇌를 없애 생사심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가고 오는 것이 자유롭게 될 때까지 해야 합니다. 나부터 시작합시다. 그렇게 정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야 사회도 정화가 되고 내 속도 정화가 됩니 다. 한국은 종교인의 숫자가 매우 많은 나라지만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 습니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이기심을 부추기는 기복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사회에 부패와 비리가 만연합니다. 그럴수록 개인이 불행해지는 악순환이 거듭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우리 불자들은 어떤 마 음 자세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모두가 행복한 길로 갈 수 있을지 생각 해봐야 할 때입니다.

 

지금까지 수행정진을 통해 행복에 이르는 길을 함께 생각해보았습니 다. 살아서 번뇌 끊긴 경계에 도달했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두려움 없이 가신 수많은 스승들이 계십니다.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수행의 내용과 방 법을 소개했으니 이렇게 가면 반드시 니르바나에 다다른다는 사실을 알 고 지금부터 공부하십시오. 부처님과 똑같은 생각, 똑같은 경계가 올 수 있도록 남은 생 동안 열심히 정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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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4년 12월 20일

발행처 티벳대장경역경원

 

저자 진옥 텐진 로셀

정리 김의연

교정 윤금선

삽화 이준희

 

편집 김소정

출판 송림그라픽스(松林出版社)

               전남 여수시 시청서1길 8-8ⅠT. 061-686-5543

ISBN 979-11-934230-7-3 (03220)

 

ⓒ 진옥 텐진 로셀, 2024

이 책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복제와 무단 전재를 금합니다. 이를 위반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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