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펴내며
『반야심경』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야부 600권의 방대한 내용을 단 270자로 압축한 경전이지만, 그 안에는 한 치의 빈틈도 없는 깊은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이 경전은 여래께서 왕사성 영축산에서 설하신 말씀으로, 중국에서는 구마라집을 비롯한 8명의 번역가들이 그 뜻을 전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익히 읽고 송독하는 『반야 심경』은 7세기 현장 법사의 번역입니다.
현장 법사는 서분과 유통분을 생략하고, 당대 한문의 간결하고도 문학 적인 정서를 반영해 뜻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번역을 완성했습니다. 이후 그의 제자 원측과 규기가 이어받아 주석서를 집필했으며, 이를 계기로 『반야심경』은 한문 문화권에 널리 유통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경전은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장 많이 독송되는 경전으로 자리 잡았고, 종파를 초월해 불교 의식에서 빠지지 않는 부처님의 말씀으로 사랑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원측 이후로 『반야심경』에 대한 주석서가 많지 않아, 경전의 깊은 뜻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반야의 공(空) 사상을 논한 용수보살의 중론 역시 한국에서는 크게 유통되지 않아, 반야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로 인해 『반야심경』이 단순히 기복적인 해석으로 흐르 거나 잘못된 이해가 진의로 여겨지는 경우도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안타까워, 저는 BBS 불교방송을 통해 반야정로라는 이름 으로 『반야심경』 강의를 30회에 걸쳐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강의는 제
가 경전의 내용을 완전히 통달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선대의 주석서들을 참고하며 제가 이해한 대로 성심껏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원문이 지닌 아름 다운 문장을 온전히 살려내지는 못했을지라도, 이 글이 독자 여러분과 부처님의 깊은 뜻을 조금이라도 나누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쓰였 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수행에 작은 도움이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방송과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분들의 노고와 공덕이 더해졌습니다. BBS 불교방송 촬영팀, 정준영 아나운서, 윤금선 작가, 교정을 도와주신 최보란 내과 전문의와 김의연 컬럼비아 대학교 박사과정생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방송을 위해 아낌없이 협조해 주신 강영숙, 윤정덕, 이주미, 김태림, 염상훈, 이정애, 최보란, 최수창, 최아영, 황도진 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책 출판 과정에서도 순천 홍선사의 정안 스님, 영국의 정진화 보살님, 석천사의 법보시 덕분에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공덕이 세상의 모든 중생들에게 행복으로 전해지길 진심으로 발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25년 1월 11일
비구 뒷방 늙은이 진옥 삼가 씁니다.
FOREWORD I have had the pleasure of knowing Ven. Jin Ok since 1999, when he began visiting Dharamsala, India. During these visits, he and many Koreans sought teachings from the Tibetan Buddhist tradition. With their rich Buddhist heritage, Koreans have impressed me with their deep interest in and sincere commitment to the teachings of Lord Buddha.
Ven. Jin Ok, a Korean monk, has greatly expanded his Buddhist practice and studies through his time in India, immersing himself in the Tibetan tradition. Upon returning to Korea, he has shared this enriched understanding widely, including through a popular series of weekly talks on Korean television.
This book on the Heart Sutra(Prajñapäramitährdaya Sütra) in Korean language is a testament to Ven. Jin Ok's dedication to making Buddha's profound teachings accessible to a wider audience. As one of the most profound and essential teachings in Buddhism, the Heart Sutra encapsulates the perfection of wisdom. Through his talks, now transcribed into this book, Ven. Jin Ok provides approachable explanation of this essential text, making its profound insights available to both new and experienced practitioners.
I hope this book will inspire readers to reflect deeply on the Buddha's teachings and integrate them into their daily lives, fostering greater understanding, compassion, and inner peace. With my prayers and blessings.
January 14, 2025
추 천 사
저는 진옥 스님께서 1999년에 인도 다람살라를 방문하시면서 인연을 맺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때부터 진옥 스님께서는 여러 한국 불자 님들과 함께 티베트 불교 전통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한국 불교는 깊고 풍부한 전통과 함께 한국 불자님들의 부처님의 가르 침에 대한 깊은 관심과 진지한 헌신은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진옥 스님께서는 한국의 스님으로서 인도에서 티베트 불교 전통을 깊이 배우며 수행과 학문을 넓히는 데 전념하셨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신 후에는 이러한 배움을 널리 나누셨고, 특히 한국 텔레비전의 주간 법문 프로그램을 통해 수많은 불자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셨습니다.
이번에 출간된 한국어로 된 반야심경 해설서는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하고자 한 진옥 스님의 노력이 담긴 결과물입니다. 반야심경은 불교에서 가장 심오하고 핵심적인 가르침 중 하나로, 지혜의 완성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스님의 법문 내용을 바탕으로 쓰여 초심자 부터 경험 많은 수행자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낸 해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이 독자 여러분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이를 삶 속에서 실천하며 더 큰 이해와 자비, 그리고 내면의 평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와 축복을 담아.
2025년 1월 14일 달라이 라마
추천사
般若心經은 六百部般若經의 精髓입니다. 270字의 經文에는 般若의 智慧와 그 修行體系를 온전히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종 法會 때에도 꼭 독송함으로써 그 의미와 체계를 다짐하게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中道이지만 初轉法門에서는 쉽게 理解시키기 위해 八正道를 말씀하셨습니다. 大乘佛敎가 시작되던 紀元前 般若部經典이 成立되고 中國 天台宗의 智顗(538-597)大師는 佛敎를 五時八敎로 조직 해석하였는데 반야부는 21年間의 說法이라고 했습니다. 아함부 12년, 방등부 8년, 반 야부 21년, 법화·열반부 8년으로 부처님의 설법하신 햇수를 49년으로 정리했습니다. 지금 학자들은 45년 설법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 반야부의 핵심이 되는 경전은 금강경으로 577卷째이고, 이어서 반야심경입니다. 금 강경은 조계종의 소의경전으로 많은 불자들이 수지독송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여수 석천사 진옥스님께서 BBS방송에서 그동안 방송했던 금강 경에 이어서 반야심경을 책으로 출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간의 노고 에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축하를 드립니다.
진옥스님은 그동안 인도 다람살라에 신도들과 함께 달라이라마 聖下 를 뵙고 법문을 경청하면서, 많은 여러 가지 노력을 해오셨습니다. 금강 경도 여러 板本을 대조했듯이 이 般若心經도 그렇게 참고해서 보고 듣 고 읽는 불자들이 이해가 쉬우리라 생각됩니다.
저는 BBS불교방송이 처음 개국하던 1990년 해인사 아침 예불을 시작 으로 FM라디오 방송에서 예불 끝에 20분씩 부처님의 생애를 방송했었 던 일이 어느덧 35년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인연이 이번 추천사를 쓰게 된 계기가 된 듯합니다.
한번 더 진옥스님의 반야심경 강의본 책자의 출판을 축하드리고 많은 불자들이 이 반야심경 강의본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믿고 실 천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불기 2569(2025)년 1월 11일
대한불교조계종
單一戒壇主 太虛無觀 謹誌
01 불교란 무엇인가?
Q 방송 프로그램의 제목을 <반야정로>라고 지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대승불교의 핵심이 반야입니다. 600부에 달하는 반야부 경전은 부처 님께서 21년 동안 설파하신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대승의 핵심인 반야의 공사상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른 길이란 삿되지 않은 길입니다.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가르침은 아주 정확합니다. 번뇌를 벗어나게 하는 방법은 수학 공식과 같아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습니다. 그 가르침대로 하면 부처님이 이루신 해탈 열반의 경 지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고 자유입니다.
반야의 길로 어떻게 들어갈 것인지, 바르고 정확한 그 길을 찾아보자 는 뜻에서 <반야정로>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지금부터 같이 공부하고 실 천하고 체득하면 좋겠습니다.
Q 반야사상의 핵심은 공사상입니다. 하지만 공사상은 쉬운 가르침이 아닌데요.
반야사상의 핵심인 공사상은 사실 어렵습니다. 우리가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많이 외우고 또 수행 삼아 독송과 사경을 열심히 하지만 정 작 그 안에 담겨있는 공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했을 때 자신 있 게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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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께서 인도의 타쉬룬포(Tashi Lhunpo) 사원에서 20만의 대중 앞에서 설법하시면서 지구상의 70억 인구 가운데 반야의 공사상을 이해하는 사람은 여기 모인 대중이 대부분일 것 같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그와 같이 공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Q 불자님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경전 가운데 특별히 『반야심경』을 공부 하자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공의 철학을 가장 정확하게 드러낸 경전이 『반야심경』입니다. 『반야 심경』은 600부 반야부의 핵심이고 어쩌면 부처님의 오도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깊이 공부해볼 가치가 있는 경전입니다.
우리도 모든 불교의식에서 『반야심경』을 외웁니다만, 불교국가는 물 론이고 미국이나 유럽 등 전 세계에서 빠지지 않고 독송하는 것이 『반야 심경』입니다. 모두가 독송하고 있고,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가장 익숙한 경전이기 때문에 보다 정확하게 알고 그에 따라 바르게 수행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외우는 『반야심경』은 중국의 현장스님이 번역한 것 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원측스님이 한문권에서는 최초로 『불설반야 바라밀다심경찬』이라는 주석서를 냈습니다.
『반야심경』과 관련해 해설서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있는 것 가 운데 부정확한 부분도 눈에 많이 띕니다. 우리가 부처님법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는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틀려서는 안 되죠. 넓게 보면 다 비슷 하다는 식으로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가면 안 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 신 진리를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자각하겠다는 마음으로 공부해야 합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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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럼 먼저, 불교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불교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한다면, 그 목적은 행복해지려고 하는 행위입니다. 불행은 누구도 싫어합니다. 육도 중생 가운데 고통을 좋아 하고 불행을 추구할 중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행복을 원하죠. 그러나 실제로 행복해지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합 니다. 행복을 원하지만 정말로 행복한 길로 가고 있는가 하면 그렇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모두가 행복해지고자 하지만 문제는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술을 먹으면 기분이 좋다고 하지만 술을 먹고 좋아질 일은 결 과적으로 아무 것도 없어요. 행복해지고자 하지만 행복해지지 않는 방법 들을 통해 행복해지려고 하니 도저히 이루어지지가 않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부처님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히 행복해지는 길을 찾았고 보여주셨습니다. 불교는 내세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현실 이외의 다른 극락세계를 추구하지 않죠. 또한 어떤 대상이 나를 행복하게 해준 다고 하면서 거기에 의존하지도 않습니다. 바로 내가, 지금 이 공간과 이 시간에, 정확한 방법을 통해 스스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한 것 입니다. 부처님 법은 매우 정확하게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입니다. 석가 모니 부처님 혼자만이 아니라 그 후 수많은 제자들에 의해 증명된 보편 적이고 합리적이며 명확한 방법입니다.
흔히 깨달아버리면 그만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7세기~8세기 경 『수습차제론』에서 까말라실라가 고통을 가져 오는 습관을 하나하나 행복해지는 습관으로 바꾸는 길을 제시했듯이 불교는 자신의 업을 스스로 바꿔 나가는 것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남이 주는 게 아니죠. 남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알고 하나하나 실천하는 것만이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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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이 정작 진정한 행복을 위한 길이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행복해지려고 하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행복해질 수 없는 방법으로 생 각하고,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있죠. 그것이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Q 그렇다면 불자들의 귀의의 대상인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웃 종교의 교주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차이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르죠. 부처님께서는 나를 믿으 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다른 교주들은 내가 곧 구원이고 빛이라고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길을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해보니까 되더라, 그 길을 가르쳐줄 테니 여러분께서도 해 보시라, 이렇게 일러주셨을 뿐입니다. 그러니 다른 교주들과는 전혀 다르죠.
부처님께서는 단지 그 길을 알고 성취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 므로 본인 스스로 하라고 했어요. 의존할 것이 있다면 오직 이 가르침에 의지해서 공부하라고 했죠. 그 가르침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벗어나는 방법에 불과하니 그 법에도 떨어지지 말라 했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조차 건너가는 방법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만큼 철저 하게 당신을 부정하셨기에 불교야말로 우상을 완전히 없애버린 종교입 니다. 신이라든가 절대자라든가 하는 우상을 완전히 타파했죠. 그대 스 스로가 그대를 묶었으니 자유 역시 그대 스스로 찾으라고 하셨으니 다 른 종교의 교주와는 전혀 다르죠.
Q 당신께서 하신 말씀조차 무조건 믿으라 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로 다시 생각하고 의심하여 스스로 판단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불교의 특별한 점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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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께서도 항상 그렇게 말씀하세요. 부처님께서도 누누이 강조 하셨듯이, 부처님이 말씀하셨다고, 혹은 훌륭한 누군가가 이야기했다고, 무조건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스스로 한 번 비판해보고 이것이 진짜로 되는지 안 되는지 직접 체험해보고 검증해보라고 늘 이야기하시는데요.
부처님 말씀도 절대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절대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전부 상대적이죠. 어떠한 병이 걸리면 그 병 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만들 뿐이고, 그 약을 먹고 병이 나으면 그 사람 에게 그 약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법도 절 대적인 것이 없고 부처님도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모두 상대적이니까 중 생이 있고 부처가 있는 것이지 중생이 따로 있고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 닙니다. 그런데도 부처님을 전지전능한 절대자처럼 믿고 그 앞에 엎드려 복을 빌면서 뭘 잔뜩 달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겠죠.
Q 부처님께서는 길을 보여주신 것이지 당신을 무조건 믿고 따르라고 하지 않았다고 하셨는데요. 그런 점에서 불자들의 믿음은 다른 종교 인의 믿음과는 달라야 할 것 같군요.
불자의 믿음은 간단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니르바나예요. 니르바나 는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유란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죠. 우리를 속박하고 괴롭히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 입니다.
그럼 여기에서 나를 얽어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죠. 나를 가 두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에 대한 착각과 집착 입니다. 그 착각과 집착 때문에 실제로는 허망한데도 끊임없이 욕심을 일 으키고 욕심대로 안 되면 분노를 일으키는 어리석은 일들을 반복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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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자유로워지는 길은 욕심을 줄이고 버림으로써 가능합니다. 온 세상의 천지만물은 물론이고 이 몸조차 영원성을 지닌 자성이 없다는 사실 을 철저히 알면 자유의 길이 보입니다. 이것이 다른 말로 행복입니다. 얽 힌 것이 없고 묶인 것이 없으면 그것이 자유이고 행복이죠. 그것은 나한 테 달린 거예요.
불자들의 믿음이란, 이러한 사실을 믿는 것이고, 그렇게 되는 방법을 믿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믿 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Q 우리를 묶고 있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말씀인데요.
스스로에 의해서 묶이지 않는 경우가 없어요. 욕망을 부리면 그 욕망 의 노예가 되잖아요. 알코올 중독만 해도 다른 사람이 중독 시켰나요? 본 인이 한 발 두 발 그 길로 발을 디뎠죠. 그렇게 습관이 된 것도 본인 탓이 에요. 오래 살고자 하는 것도 한편으로 보면 욕심이고 거기에 본인이 묶 여요. 오래 살려고 발버둥 치면 오히려 생명이 더 짧게 느껴질 거예요. 생 명이라는 것도 주관적인 것이라서 오래 살겠다는 생각이 강하면 120까 지 산다 해도 짧게 느껴지지 않겠어요? 50년, 60년을 살다 가더라도 그 런 생각 없이 산다면 만족스럽고 충분하게 느껴질 거예요.
고통스럽다, 괴롭다 하는 일들의 근원을 따져보면 스스로 가두고 스 스로 자초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신을 묶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반야심경』의 핵심 지혜입니다.
Q 불교를 지혜의 종교, 자각의 종교라고 하는데요. 지혜를 얻고 자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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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알고, 그대로 수행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대로 알려고 하지를 않아요. 아는 것도 어렵지만, 알고 나서 실행하는 것도 쉽지 않으니까 아예 공부를 하지 않죠. 그래서 미신 적으로 자꾸 빌기만 합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돌로 만든 불상이 어떻 게 우리에게 복을 주겠습니까? 그런 믿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태어나 첫 일성으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셨다고 하죠. 갓 태어나자마자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부처 님의 핵심 가르침이 그렇다는 뜻이겠지요. 오랜 원력으로 세상에 오셔서 첫 호흡을 하면서 가장 먼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그렇게 표현한 것 아니겠어요?
유아독존,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 여기에서 ‘아(我)’라는 말은 창조 주도 아니고 절대신도 아니고 산도 들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고 그 어느 것도 아니라 그대 자신이라는 말이에요. 여러분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말씀하신 거죠. 인간이 저마다 소중한 가치를 가 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집착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스로 행복과 불행을 다 만들 수 있으니 본인 스스로 어떻게 하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처럼 부처 님께서는 인간의 자유, 생명의 존귀함을 이야기하셨지 내가 너희들을 구 원해주리라, 나를 믿어서 구원을 받아라, 이런 말씀은 하신 적이 없어요. 그저 스승으로서 길을 가르쳐줄 테니 그 길을 가는 것은 너희들의 몫이 라고 했죠. 소를 강가까지 데리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먹고 안 먹는 문 제는 소에게 달려 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스스로 하느냐 하지 않느냐 거기에 달린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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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것이 불교의 매력이자 불교를 어려워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냥 믿기만 하면 쉬울 것 같은데 스스로 주체적으로 한다는 것이 어렵잖아요.
제일 쉬운 것이 내가 하는 것 아닌가요? 이 세상에 제일 불편한 게 남 한테 끌려 다니는 거죠. 남이 하라는 대로 하고 남이 정해놓은 대로 하는 것이 싫고 어려운 일 아닌가요? 맞지 않은데 그렇게 하라고 하면 그것처 럼 어려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그러더군요. 그 힘든 출가수행을 50년 넘게 어떻게 했냐고 하던 데 내가 하고 싶으니까 하지 누가 하라고 해서 할 수 있었겠어요?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중요하고, 내가 하는 것이 중요하죠.
피동적으로 생각하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 겠지만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스스로 서지 못하면 그 무엇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립과 자유를 추구하게 돼 있어요. 그것이 자각이고 각이지요. 깨어있는 생각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못 하고 노예처럼 끌려 다니면 안 되잖아요.
Q 불교란 바로 지금 여기에서 행복해지는 방법을 공부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요. 여기에 하나 더 붙인다면, 나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 이겠군요.
스스로 찾지 않으면 길은 없어요. 본인이 찾지 않으면 누구도 길을 닦 아주지 않죠. 아이들을 키울 때도 본인 스스로 길을 찾아나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그 힘을 키워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고 선생의 역할 이잖아요. 온실의 화초처럼 과보호만 하면 자기 갈 길을 스스로 찾지 못 하게 되고 그러면 아이의 신세를 망치게 됩니다.
자각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자기 스스로 자각하는 힘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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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밑의 사람들에게도 자각할 수 있게 도울 수 있죠. 육조 혜능스님이나 보 조국사 지눌스님처럼 자각한 사람은 밑의 사람들도 모두 자각하게 합니다. 자신을 우상화시키거나 자신을 바라만 보고 믿기만 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이비 종교지도자입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고 집단을 만들고 세력을 키워 서 피해를 준 사례가 얼마나 많습니까? 종교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Q 그래서 불교를 자각의 종교라고 하고 지혜의 종교라고 하는 거겠죠?
그렇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혜와 자각은 지식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지식은 그냥 아는 것들이에요. 경험한 것이나 텍스트로 개념을 아는 것과 실제로 본인이 그렇게 되었느냐 하는 것은 다르죠.
예를 들면 술이 안 좋다는 것, 술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들이에요.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술을 마시는 것처럼 지식은 깨침과는 관계가 없어요. 물론 지식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가 있고, 이러한 깨침의 세계가 있고, 이러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깨쳐지는 것은 아니잖아 요. 오히려 그 아는 것으로 헤아리기만 하고 생각에 붙들리기만 해서 진 척에 장애를 주는 경우도 많아요.
불교는 욕심을 버려서 성자가 되는 길인데 지식으로 성자가 되는 건 아니죠. 박사학위가 몇 개가 있더라도 성자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이것 이 지식과 지혜의 차이입니다. 지혜는 그렇다는 것을 알고 본인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자성이 없고 실체가 없는 공이라는 사실을 아 는 것과 실제 말과 행동이 아(我)가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은 천지 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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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래서 선가에서는 알음알이에서 벗어나라고 강조합니다.
알음알이가 바로 지식이죠. 지식 가운데 특히 아(我)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는 존재가 있고, 내가 있고, 내 것이 있고, 나는 대단한 사람 이다, 이런 생각에서 왔다 갔다 하는 모든 생각과 판단이 알음알이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이것이 나에게 이익인지 손해인지 끊임없이 분별 합니다. 분별하는 마음이 많다는 것은 욕심이 많다는 것과 다르지 않아 요.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판단하는 것도 대부분은 내가 중심이 되죠. 나에게 밥을 사주고 옷을 선물하고 이익을 주고 잘해주는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도둑질을 해서 준 것이라 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데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단 말입니 다. 자신에게 좋으면 선이고 자신에게 나쁘면 악이라고 규정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사찰 일주문에는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智解), 이 문에 들어올 때는 그런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고 써놓은 거예요. 좋고 나쁘다는 생각, 너와 나라는 생각, 선과 악이라는 분별을 모두 버리고 들 어오라는 거죠.
Q 분별심을 내려놓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만,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공부해나갈 내용들입니다. 알음알이를 내려놓는 방법이죠. 알음알이를 내려놓는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이 반야의 공 성을 아는 것입니다. 공성을 체험하고 나면, 실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면, 내 중심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이타행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Q 반야의 지혜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인데요. 그렇다면 바른 길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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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일까요?
수학공식을 이야기해볼까요? 1 더하기 1은 2가 되죠. 1 곱하기 1은 1 이고 1 곱하기 0은 0이 된다는 것, 이것이 원칙이잖아요. 이러한 원칙을 가지고 계산하면 아무리 복잡한 수식도 답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와 같이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길이 바른 길이에요. 부처님이 가르쳐주 신 길은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그것이 정로입니다.
불교논리학 가운데 인명논리학이 있습니다. 비량, 성언량, 현량, 즉 논 리적인 추론과 성인의 말씀, 그리고 현실적 경험에 비춰서 진위 여부를 논증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춰보면 부처님의 말씀은 불행해지게 하는 말씀이 일체 없어요. 진실합니다. 그러니 부처님 말씀이 정로이죠. 그러 한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반야의 지혜를 공부해 바 른 길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Q 인생을 흔히 길이라고 표현합니다만, 인생길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가야할지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중생이 걷는 길은 나중에 지나고 보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전부 허망한 것을 붙들고 살기 때문이에요. 평생 돈을 붙들 고 죽자 살자 돈을 벌어도 죽음 앞에서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죠. 건강을 위해서 조심하고 절제하고 관리해도 영원할 수 없는 일이고요. 누구나 반드시 다 그렇게 되잖아요. 그러니 허망하다고 하는 거죠. 그렇다고 무슨 영원한 길이 있느냐 하면 딱히 그런 길도 없어요.
단지 우리가 삶을 사는 데 있어서 거기에 얽혀서 고통스럽지 않고 편 안하게 살아가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 길이 중도이고 반야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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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스님께서는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시는 데요. 특히 정법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가 가장 먼저 구분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 부처님의 법인가, 부처 님의 법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부처님 법이 아닌 것은 해탈법이 없습 니다. 바로 안다는 것은 부처님 법을 바로 안다는 뜻이죠. 이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면 행복해지지 않을 일을 하면서 행복해질 것으로 착각하 게 됩니다.
그 다음 구분해야 할 것은 부처님 경전 가운데 무엇이 요의이고 무엇 이 불요의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요의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상대적으로 하신 법문이 아니고 번뇌가 없어진 깨침의 경계를 직설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상대적인 법문은 불요의입니다. 상대적인 법문이란 그때 그 상 황과 그때 그 사람에게는 옳은 이야기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불요의의 내용을 요의로 잘못 해석하거나 뒤섞 어서 설명하면 안 됩니다.
Q 요의경, 어떤 경전이 대표적일까요?
『반야심경』이 가장 대표적인 요의경전입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이야 기가 아니고 우리가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있는 그대로 직설적으로 말 씀하신 거예요. 보통 부처님의 가르침을 8만 4천 법문이라고 표현하듯이 부처님께서는 상대의 근기에 맞게 온갖 비유를 써서 쉽게 설명해 주셨죠. 그런데 요의를 담은 경전들은 부처님께서 꼭 말씀하고자 하는 바를 정 확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상정등정각, 즉 최고의 깨달음을 이룬 경지 를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의경인지 불요의경인지 구분해야 하고 불요의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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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의경처럼 최상의 경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아자타삿투가 아 버지 빔비사라왕을 죽이고 나서 너무나 괴로워 부처님이 계신 죽림정사 로 달려와 고통을 호소했을 때 부처님께서 그를 달래는 말씀을 해주셨 어요. 그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시킬 수는 없 죠. 그런 사례들이 경전에는 상당히 많은데 그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반야심경』은 비유도 없고 틈새도 전혀 없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요의경입니다.
Q 불자로서 어떻게 공부하면 좋을지 일러주십시오.
첫 번째는 부처님과 법과 스승들께 의지해야 합니다. 다른 데 의지하면 안 됩니다. 부처님도 스승으로서 의지하라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따르라 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따라야 하는 핵심은 법이죠. 법이 있는 분이 스 승이지 법이 없는 사람은 스승이 아닙니다. 승이란 부처님 법에 따라서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번뇌가 사라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스 승과 법을 의지해 공부하는 것이 수행에 있어서 핵심입니다. 돈도, 권력 도, 건강마저도 의지할 것이 못 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조건일 뿐이지 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완전히 자유가 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마지막 죽음으로부 터도 자유가 되는 길을 공부해야죠. 육조 혜능스님이 열반하실 때 제자 들이 우니까 벌떡 일어나서 내가 어디로 갈지 모를까봐 울고 있냐고 했던 것처럼 마지막 죽음까지 자유로워지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입니 다. 이러한 궁극의 자유와 해탈을 목표로 삼아서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Q 그처럼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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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첫 번째는 삼귀의입니다. 세속적인 가치가 아니라 불법승 삼보 에 의지한다는 마음을 굳건히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불자라면 기본적으 로 오계를 지켜야 합니다. 오계를 지키지 않으면 나중에 그 결과는 끔찍 한 결과를 낳습니다. 어떤 불자들은 오계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데 의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수행의 기초라는 것을 알고 반드시 지 켜야 합니다.
그 다음, 부처님 말씀을 계속 듣고 경전을 계속 공부하여 부처님 말 씀과 부처님 말씀이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보리심 을 세우고 바라밀 수행을 하고 사마타와 위파사나 수행을 배워야 합니 다. 이것은 모두 행복해지고자 하는 수행들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해주신 것들은 모두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잘못된 것을 고쳐주는 약입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어진 의사와 같이 중 생의 병을 너무나 잘 아셔서 자세하게 알려주신 처방전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로 잘 보고 잘 듣고 차근차근 실행하면 여러분에게 틀림없이 자유라는 행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Q 그런데 부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법문을 듣더라도 늘 따져보고 의문 나는 점이 있으면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법을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중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틀 리게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하고 재미있게 이야 기하는 것도 좋지만 중요한 것은 바르고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잘 못된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그 방법대로 갔는데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 게 할 건가요? 무거운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서산 휴정스님께서 「답설」이라는 시에서 말씀하셨죠. ‘오늘 내가 걷 는 이 발자국이 훗날 뒷사람에게 이정표가 될 것이니 눈 덮인 길을 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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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걷지 말라’ 했습니다. 그 발자국을 따라가다 누군가 잘못된 길을 가 거나 벼랑 끝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법을 바르게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듣는 사람은 스스로 의문 을 가지고 비판해보고 분석해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결국 자신의 인생 이고 자신의 일인데 스스로 깊이 사유하고 검토하지 않고 무작정 따랐다 가 잘못되면 그 손해와 고통은 고스란히 자신에게 닥치잖아요.
Q 불교를 공부하는 불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세요.
안 하면 본인 손해예요. 부처님께서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을 발견하셨고 2,600년을 지나면서 수많은 수행자들이 닦고 실천하면서 증 명이 되었어요. 그것을 하고 안 하고는 본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불교는 세력을 키우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하는 사람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느 사찰에 신도가 많더라, 이것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공부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것이 가장 중요하죠. 불교 공부는 오로지 욕심 버리려고 하는 일인데 욕심 버리는 것이 쉽 지 않습니다. 하지만 욕심을 부려서 되는 일이 아니에요. 정진하십시오. 정진하지 않으면 본인이 손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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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불교 탄생의 역사
Q 불교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불교의 역사를 알려면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인도역사를 알아야 합 니다. 기원 전 1300년 경 아리안족이 인도 땅을 점령하면서 세운 종교가 브라흐만교입니다. 브라흐만이라는 신이 만물을 창조했으며 그 창조주 에 의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했죠. 그리고 인간의 계급을 브라만 계 급, 그 아래 왕족과 무사 계급, 그 다음으로 평민, 노예로 나눴어요. 당시 대부분의 인도 사람들은 피지배 민족이었기 때문에 노예가 되었죠. 브라 흐만교라고 하는 종교가 계급사회를 정당화시킨 것입니다. 브라흐만 사 상의 핵심은 창조신 브라흐만에 의하여 아트만(我)이 만들어졌고 그 아 트만이 인간이 되어 살아가다가 죽어서는 다시 브라흐만이 있는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이죠. 이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나시기 300여 년 전, 우파니샤드 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온 사상의 흐름입니다.
여기에서 파생돼 브라흐만 신에 의해 나온 아트만이 본래 깨끗한데 인간에 의해 더럽혀졌다고 봤어요.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아트만을 극복 하고 회복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했죠. 그 수행법이 고행과 선정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환락을 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 브라흐만천에 다시 돌아가는 것이 그들이 이야기하는 윤회입니다. 이러한 브라흐만과 아트만의 윤회가 우파니샤드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입니다.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본래 하나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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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브라흐만 사상이 7~800년 정도 이어오다가 인도 사회에 혁명 적인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신에 대해 반대하는 유물론과 도덕 부 정론 등 신흥사상이 거세게 일어나죠. 이때 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길을 모색하는 출가사문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으로 62개의 견해가 있었 다고 하니 당시 신흥사상이 얼마나 난립했는지 알 수 있는데요. 혁신적 인 사상이기는 했지만 극심하게 난립하다 보니 오히려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 어떤 것을 믿고 살아야 하는지 혼란 스러울 수밖에 없었죠.
당시에는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부족 간의 전쟁이 빈번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전쟁을 종식할 이상적인 지도자인 전륜성왕이 나타나기를 소 망했습니다. 더불어 이러한 사상적 혼란을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는 깨 달은 자, 즉 부처가 출연하기를 갈망했죠.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났을 때 아시타 선인이 전륜성왕이 되거나 붓다(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은 당시 인도인들의 간절한 바람을 반영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시대의 부름에 응해서 오신 것이라 고 볼 수 있습니다.
Q 그러한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투셨습니다. 부처 님의 탄생으로 불교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봐야 하겠죠?
부처님이 태어나셨다고 부처가 된 것은 아니죠. 진정한 의미에서 불 교의 완성은 열반입니다. 불교의 역사는 완벽한 무여열반을 이룬 것에서 시작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탄생이 아니라 부처님이 열반하신 해를 기준으로 불기를 정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부처가 되는 역사를 살펴보면 룸비니에서 태어나 29세에 출 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이루었을 때까지가 초기의 역사이고, 부처가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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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이후 약 45년간 설법하신 것이 교화의 역사입니다. 즉 부처님 탄생의 역사와 부처의 역사와 무여 열반의 역사로 시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35세에 깨달은 이후 설법의 역사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 니다.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얻으신 직후 우연히 길에서 만난 상인들에게 당신께서 깨친 바를 설하신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들은 부처 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며 떠나버렸습니다.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었 을까요? 창조주가 없고 절대신이 없다는 이야기를 그들이 믿을 수 있었 겠어요? 신에게 매달리고 신에게 빌어왔던 사람들로서는 ‘지금 이게 무 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하고 가버렸죠.
깨달으신 후 부처님의 첫 번째 과제는 당신이 깨달으신 것을 ‘어떻게 알아듣게 할 것인가’였어요. 그렇다면 과연 누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고 심하신 부처님은 함께 고행했던 수행자를 떠올렸죠. 외도의 가르침을 모 두 섭렵하고 그것이 답이 아니라고 확신한 부처님께서 홀로 고행을 시작 했을 때 보좌하기 위해 함께 수행했던 교진여 등 다섯 수행자를 찾아 나 섭니다.
그들이 있는 녹야원에 가셔서 처음으로 말씀하신 것이 중도입니다. 이때는 완전한 공성의 중도가 아니라 고락중도를 이야기하셨어요. 지나 치게 고행을 하거나 지나치게 쾌락을 즐기면 깨침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 셨죠. 그 다음 사성제 법문 등을 일주일 사이에 설해 다섯 수행자 모두를 아라한과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초전법륜의 시작입니다.
일부에서는 이 시기의 가르침을 초기불교라고 하는데 그 개념은 잘 못됐습니다. 또한 다른 한편에서는 부처님께서 일생동안 말씀하신 가르 침을 초기불교라고 하면서 대승불교는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뒤에 발전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 역시 잘못된 견해입니다. 경전 전승의 갈래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으로 법의 수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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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를 굴렸다고 해서 초전법륜이라고 하는데요. 이 초전법륜의 가르침이 주로 아함부 경전에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들은 주로 암송으로 전승되어 왔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200년 정도 뒤에 문자로 기록 되었죠. 초전법륜의 가르침은 팔리어로 전승되었고 지리적으로는 주로 남방으로 전승되었습니다.
그리고 북방의 아리안족에게 전승되어진 법이 대승의 법문입니다. 이 가르침은 결집이 전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습니 다. 이것을 중전법륜이라고 합니다.
언어로 보면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로 나눠집니다. 팔리어 전승은 요 즘의 영어처럼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용어가 많고 산스크리트어 전승은 시적이고 추상적인 언어가 많아요. 산스크리트어가 상당히 발달된 언어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야부, 법화부, 열반부, 화엄부의 범어 전승이 풍 부하고 아름답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밀교 계통의 설법도 산스크리트어 전승으로 기록되어 있습니 다. 이것이 초전, 중전에 이은 상전법륜입니다.
이처럼 초전법륜, 중전법륜, 상전법륜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승되 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는 반야부는 중전법 륜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초전법륜, 중전법륜, 상전법륜은 상호 아주 깊 숙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초전법륜에서 설해진 사성제, 팔정도, 계정혜, 12연기, 인과 법문과 비구의 출가에 관한 법문이 대승의 중전법륜에 영 향을 주고, 보리심 수행을 비롯해 육바라밀, 사섭법 등 중전의 법문은 다 시 상전법륜인 밀교에 영향을 줬습니다.
일부에서는 대승불교만이 우월하다고 하면서 소승불교라 폄하하고, 초기불교에서는 대승불교가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무시합니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 달라이 라마께 여쭸는데요. 달라이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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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께서도 단호하게 말씀하시기를 초전법륜 없이 중전법륜과 상전법륜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대승을 닦고 있다 해도 비구의 계율은 소승의 법이고, 사성제 법문과 인과 법문이 그대로 대승의 법이며, 무아 법문이 곧 공성법문이니 다 같은 내용이고 좀 더 확대된 것뿐이라고 하 셨습니다.
이런 질문도 드렸는데요. 밀교가 그렇게 수승하다면 바로 공부하면 되지 않느냐고 여쭸더니 달라이 라마께서는 초전법륜과 중전법륜 없이 바로 상전법륜을 공부하면 외도가 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 리가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차례로 공부하듯이 부처님께서 차 제법문으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즉 부처님께서는 초전, 중전, 상전의 삼전법륜을 굴리셨습니다.
Q 스님께서 초전법륜이라고 명명하신 개념이 초기불교 혹은 부파불교 와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초기불교라고 하는 개념은 정확한 개념이 아닙니다. 초기, 중기, 말기 를 어떤 기준으로 나눌 것인지 논란의 여지가 많겠죠. 그런 점에서 부처 님의 설법을 초전법륜, 중전법륜, 상전법륜으로 나누는 것이 맞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초전, 중전, 상전법륜으로 설법하셨고 그 전승은 팔리 어와 산스크리트어 전승으로 나뉩니다. 이 가운데 팔리어로 된 전승을 연구한 20개 부파의 상좌부 불교가 초전법륜을 연구한 내용들입니다. 『아비달마구사론』 등이죠. 이것이 부파불교입니다.
그리고 중전법륜은 주로 대승의 부파로 이루어졌는데요. 유식학파부 터 시작해서 용수논사의 『중론』 등이 중전법륜을 주로 연구한 것입니다. 이것의 기초가 되는 경전이 반야부 경전들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소수의 수행자들에게 설법하신 밀교의 가르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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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파불교, 대승불교는 제자들이 초전의 논의, 중전의 논의, 상전의 논의를 정리해 론의 시대가 된 것이지 경전 자체가 그렇게 나눠지 는 것은 아닙니다.
Q 그렇다면 중국의 오시교판은 무엇인가요?
중국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래된 것은 축법란스님 등에 의해서입니다. 경전을 싣고 와서 최초로 세운 절이 인도 국경 근처의 백마사입니다. 그 후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을 본격적으로 번역한 것은 4세기 경 구마라집 스님에 의해서입니다. 6세기~7세기경에는 현장스님이 인도의 경전 원문 과 한문 번역본을 직접 비교·연구하고자 무려 16년을 인도 전역을 순례 하며 일일이 수집하고 기록하고 배워 와서 다시 번역했습니다.
구마라집스님 시대의 번역을 구역이라 하고 현장스님의 번역을 신역 이라 하는데요. 현장스님의 신역이 중국의 역사를 바꿔놓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성취를 이뤘습니다. 이때 번역사업은 국가적인 사업 으로 진행되었는데 중국의 규기스님, 우리나라의 원측스님이 양대 제자로 참여하는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불교학자들이 대거 참여한 거대한 프로 젝트였습니다. 중국의 사상과 문화의 발전은 당송시대에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사상과 학문은 물론이고 문화와 예술까지도 불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불교가 발전하고 시대의 흐름을 이끌 수 있 었던 데에는 불경을 번역한 공이 지대합니다.
그렇게 대대적으로 번역한 불교경전의 내용 전체를 체계적으로 이해 하려고 나눈 하나의 기준이 오시교판입니다. 중국의 역사분석가와 불교 학자들이 부처님께서 어느 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사상적 흐름을 화 엄시, 아함시, 방등시, 반야시, 법화시로 나눈 것입니다. 오시교판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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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사실에서 봤을 때 일부 맞지 않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정리하려는 하나의 시도로서 의미가 있 다고 봅니다.
Q 대승불교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견해는 꽤 많이 퍼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주 위험하고 잘못된 견해입니다. 서양의 몇몇 서지학자나 언 어학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에는 굉장히 중대한 모순이 있습 니다. 대승의 반야부를 비롯해 법화, 열반, 화엄부의 위대한 경전들이 부 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대승불교를 하는 사람들 은 부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어떤 저작자가 한 거짓말을 믿는 것이 됩 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이야기죠.
대승불교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아비달마 시대에도 논의 가 된 적이 있어요. 그때도 숱한 논쟁이 있었고 결국 대승불교 비불설은 논증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용수논사에 의해 완벽하게 깨졌죠. 그 뒤 로는 더 이상 거론도 되지 않았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근거도 제시하 지 못하고 논증하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 보겠습니다. 대승불교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 라면 반야부 600부 등 수많은 대승경전이 위경인가요? 그렇다면 이처럼 위대한 가르침을 누가 저작했다는 것인가요? 만약 그것이 모두 위경이 라면 부처님보다 더 위대한 분이 아닌가요? 그것이 누구인지 답할 수 있 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서 다른 한 편에서는 아함부의 내용에 덧붙여진 것이 대승경전이 라고 하는데요. 이 역시 허술한 주장입니다. 산스크리트어가 언어학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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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상당히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것이 많을 뿐이지 그렇다고 부처님께서 직접 설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부처님께서 전생에 보살로서 3아승지겁 동안 수행하신 이야기를 담 고 있는 본생담이 『아함경』 48장경에 다 들어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연등 부처님 앞에서 발심하여 3아승지겁 동안 수행하고 무여열반을 이룬 그 엄청난 과정이 모두 『아함경』에 들어있어요. 윤회하면서 보살행을 한 대 승의 핵심이 초전법륜의 『아함경』에 담겨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 지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스리랑카 등 남방불교 국가의 스님들과 이야기 해본 적이 있는데요. 그 분들도 대승불교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 적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스리랑카에 가서 아주 오래된 불교유물로서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진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 또한 초기 부터 대승의 가르침이 있었다는 하나의 반증입니다.
밀교도 힌두교가 습합된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도 산신과 칠성신을 호법신장으로 바꿔놓았듯이 교화대상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근거로 봤을 때 대승불교 비불설은 아무런 근거도 없고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 입니다.
Q 소승, 대승이라고 하는 용어도 주의 깊게 사용할 필요가 있을 것 같 습니다.
용어를 사용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소승과 대승이라는 말은 논쟁 이 붙었을 때 했던 말이에요. 소승에 대해서는 그 가르침으로는 아라한 과만 될 수 있지 부처가 될 수 없다고 했죠. 그리고 대승에 대해서는 그 가르침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격하게 논쟁하고 대립하던 시기에 나온 용어이기 때문에 소승, 대승이라는 용어는 적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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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초기불교인데요. 그렇다면 중 기불교, 말기불교가 있나요? 현재진행형인 불교를 이렇게 나눌 수는 없 는 것 아니겠어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반야부 등 대승의 가르침은 모두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밀교부도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셨습니다. 특히 칼라차크라 법문은 24명의 제자들에게 직접 전수하셨다고 합니다.
정리하면, 부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초전법륜을 굴리셨고 그 다음 제자들을 공부시키면서 중전법륜을 굴리고 상전법륜을 굴리시는 등 근기에 따라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역 사에서 시비하고 논쟁하던 용어들은 주의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승, 소승, 혹은 초기, 중기, 이러한 술어는 맞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Q 초전법륜, 중전법륜, 상전법륜, 각각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 군요.
초전법륜, 중전법륜, 상전법륜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조금씩 다릅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가르침은 단계별로 이루어진 것이니까 인식 과 실천의 수준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죠.
초전법륜의 핵심은 사성제입니다. 사성제, 삼법인, 인과법, 12연기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전법륜에서 중요한 것은 보리심입니다. 일 체 중생을 모두 이끌고 부처가 되겠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합 니다. 대승보살 수행입니다. 그 다음 상전법륜에서는 보디사트바(보살) 의 행을 하는 데 있어서 이론만이 아니라 실제 그렇게 하기 위해 다음 생 을 윤회하는 수행법을 설하고 있습니다. 밀교는 깊이 들어가면 전생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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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하고 다음 생에 태어날 것을 본인이 결정합니다. 보디사트바로서 중 생을 구제하기 위해 거듭 윤회하는 길을 걷는 실질적인 수행에 받침이 되 는 것이 밀교수행입니다.
각각의 취지와 내용을 이해하고 체득하고 실천하지 못하면 다음 단 계로 넘어갈 수가 없겠죠.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어요. 대 학을 다니려고 하면서 초등학교가 필요 없다고 하면 안 되죠. 박사학위 를 따는 데 대학 과정이 필요 없다고 하면 모순이잖아요. 초등학교 때 배 운 것이 중고등학교에서 공부하는 데 기초가 되고 중고등학교 때 배운 것이 대학에서 공부하는 데 자양분이 되듯이 부처님께서 초전 법륜에서 가르친 내용이 대승의 중전법륜에 바탕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 소승은 별 것 아니라고 하면서 대승만 공부하면 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거예요. 최상승이라고 하는 대승이나 밀교를 공부하려 면 소승부터 찬찬히 공부해야 합니다. 달라이 라마 존자께서는 소승, 대 승의 단계를 밟지 않고 밀교만 하면 외도가 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밀 교수행자들도 비구계를 받고 사성제와 12연기의 법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했어요. 이처럼 초전, 중전, 상전 법륜은 차원을 높여서 단계 단계 공부하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우리도 선가에서 소승의 가르침으로는 깨치지 못한다고 하는데 전혀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만약 아라한이 깨치지 못했다고 하면 달마선맥의 초조라 일컬어지는 가섭 존자의 법을 어떻게 전수받겠습니까? 모든 승려 는 반드시 비구계를 받고 사성제 법문과 인과 법문이 기본 바탕이 되어 중전의 대승을 배운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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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토대로 지금의 한국블교를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의 한국 불교는 대승을 이야기하고 있으면서도 대승에 대해 명 확하게 알고 있지 못합니다. 대승불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보리심 수행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 보리심을 모른다 면 그것은 굉장히 위험하죠. 쌀이 없이 밥을 하려는 것과 같아요. 보살이 란 보리심을 낸 사람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사람이죠. 그 마음을 내는 것이 발보리심입니다.
한국에는 발보리심 수행이 없어요. 말만 있지 실질적인 수행법을 모 릅니다. 육바라밀 수행도 없습니다. 그것은 불보살님이나 하는 것이라고 치부하고 바로 우리가, 바로 지금 해야 하는 수행으로 삼지 않고 있어요. 보살이라는 용어가 한편으로는 그저 여성신도를 가리키는 말로 한정되 거나 아니면 관음보살, 지장보살 등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신격 화시키고 이원화시켜 버렸어요. 조사선 역시 대승불교가 뒷받침됐을 때 훌륭한 것입니다. 보리심과 중생구제의 원력이 없는 화두참구란 사상누 각이죠. 깨달음을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추구하니 활구참선이 안 되는 것 입니다. 조사선을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다른 수행법을 배격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6~7세기 나란다 대학에서도 있었던 문제였어요. 보리심 수행이 없어지니까 자비심이 증장되지 않는 등 여러 문제가 발생했고 심 지어 자살하는 사람까지 생겨났어요. 공성만 이야기하고 일체 중생을 위 하는 마음이 없으니까 이기주의에 빠지거나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 거죠.
이때 아티샤라는 수행자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여러 나라를 다 니면서 해결책을 찾아다녔어요.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 보리심 수행을 하고 있는 스승을 만나 13년간 수행하고 다시 나란다 대학으로 돌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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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쳤죠. 그 후 이 가르침을 배워 나온 논전이 산티데바의 『입보리행론』 이에요. 우리가 하는 모든 기도문과 『천수경』 등에 실려 있는 것은 내가 하는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중생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께서도 어느 날 감기에 걸려 법문을 하시다 기침을 하시 면서, 맑고 명쾌한 목소리로 법문을 들려드려야 하는데 죄송하다고 하시 더군요. 법문을 하나 하는 것도 이처럼 오직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입보리행론』에서 산티데바가 이야기한 것처럼 조금이라 도 발심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법문을 하는 것이지 다 른 그 어떤 개인적인 이익이나 명예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불교는 대승의 근본정신이 결여된 부분이 많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유명한 기도도량에 가서 많은 분들이 써놓은 소 원지를 읽어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하나같이 자식이 잘 되고 시험에 합 격하고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내용들만 있더군요. 어떻 게 일체 중생을 위해 살겠다는 이야기가 한 마디도 없는가, 일체 중생의 행복을 기원하는 소망이 하나도 없는가, 이것이 우리 불교의 현실입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입니까?
사찰은 그 자체로서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 중생의 귀 의처가 되고 그 곳에서 모두가 수행이 될 때 의미가 있죠. 티베트의 수도 라싸까지 수천 킬로미터를 오체투지하며 순례하는 티베트인에게 무엇을 위해 기도하느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일체 중생의 행복을 위해 기도한다 고 말합니다. 병이 나았으면 좋겠다, 부자가 되면 좋겠다, 심지어 티베트 가 독립이 되기를 바라는 기도도 그 분들은 하지 않아요.
우리에게는 그러한 정신이 없습니다. 이기적인 기복만 한다면 대승불 교라고 이야기하기 어렵죠. 이것을 자각하지 않는다면 불교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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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사홍서원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사홍서원의 첫 번째가 ‘중생무변서원도, 중생이 끝이 없더라도 제가 다 건지겠습니 다’입니다. 이것이 기본이고 시작입니다. 중생이고 뭐고 필요 없고 나만 잘 되면 된다고 한다면 사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우리는 지금 매우 심각 한 중병에 걸려있습니다. 대다수는 중병에 걸려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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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
Q대승불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부처님께서 초전 법륜에서 가르치신 핵심은 사성제, 고락중도, 12연기 입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일어나는 번뇌를 깨뜨려서 아라한과에 도달 하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그런데 초전 법륜의 아라한과의 가르침은 상당히 이성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여기에 감성과 대사회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마타와 위파사나를 통해 자신의 번뇌를 끊는 것을 우선으로 하다보면 중생에 대한 부분이 약해질 수 있죠.
대승의 핵심은 이타 중생입니다. 대승의 기본이 사홍서원이죠. 중생 무변서원도가 가장 첫 번째 서원입니다. 번뇌를 끊는 것보다 중생을 위하는 마음이 먼저이고 중생의 번뇌와 내 번뇌가 동일시되어야 합니다. 자기중 심적이거나 이성에만 치우치기 쉬운 부분과 대사회적으로 약해질 수 있 는 부분을 중생을 위하는 마음으로 전환하는 것이 대승의 첫 시작이에 요. 자비심이 핵심입니다.
Q 그래서 큰 수레라고 한 거겠죠?
나 혼자 타고 가는 자전거보다 수만 명을 싣고 가는 기차처럼 대승의 전제는 모든 중생입니다. 여기서 중생이라는 말도 새겨봐야 하는데요. 사 람만이 아니라 육도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아우르는 말이에요. 즉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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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가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이고득락하게 하는 것이죠. 대승 은 나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같이 사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많은 가정에서 정수기를 쓰는데요. 어떤 때는 나 혼자 정수기의 물을 마시는 것도 소승의 물 잔을 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구 전체가 물 이 깨끗해야 하고 모든 사람이 깨끗한 물을 마셔야 하니까요. 공기청정 기도 비슷한 생각을 하게 해요.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한다면서 내 안에 갇히고 나 하나에 갇히는 것은 모순입니다. 물론 나로부터 출발하지만 모든 대상을 기점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완전히 다르다고 볼 수도 있어요. 초전 법륜의 내용 을 전제로 하지만 대전환이 이루어지는 거죠. ‘나’만이 아니라 ‘우리’라 는 개념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라는 말을 많이 쓰죠. 이 말 은 ‘울타리’라는 뜻도 있지만 ‘더불어’의 의미가 더 강합니다. 이 말도 불교의 대승사상에서 나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Q 대승의 보살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수행자예요. 우리나라에서는 보살의 개념을 두 가지로 사용하죠. 관 세음보살, 지장보살과 같이 십지보살이 넘은 분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고 절에 다니는 여성신도를 높여서 부르는 말로도 쓰이죠. 그런데 우 리는 신앙대상으로서의 보살만 생각하고 우리가 보살이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우리가 보살수행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죠. 선을 하는 사람 들 가운데에는 보살행을 해서는 깨닫지 못한다고 하는 사람도 많은데 이것은 상당히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보살은 대승의 법으로 수행하여 부처가 되고자 하는 수행자들입니 다. 범어로는 Bodhisattva, 한문으로는 보리살타(菩提薩埵)입니다. bodhi 는 깨달은 자, 번뇌가 떨어진 이를 뜻하고, sattva는 중생이라는 뜻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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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육도 윤회를 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각유 정이라고 하죠. 깨어있는 이인데 스스로 윤회한다는 뜻이에요.
열반은 아라한의 열반, 보살의 열반, 부처의 열반으로 나뉩니다. 아라 한의 열반은 번뇌가 끊어져서 윤회하지 않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죠. 보 살의 열반은 무주처열반입니다. 자신의 번뇌가 다 끊어졌지만 이것으로 끝내지 않고 육도윤회를 하면서 계속하여 세세생생 중생을 구제한다는 원을 세운 거예요. 깨달은 분이기는 한데 윤회를 하고, 윤회를 하지만 중 생은 아니죠. 그래서 무주처열반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에도 머물지 않고 윤회하는 데에도 머물지 않고 계속 반복되는 윤회의 흐름 속에서 중생 을 구제하는 이가 보디사트바예요. 깨어있는 이인데 언제나 중생들 곁에 있어요. 어머니가 되어 나타날 수도 있고 친구가 되어 나타날 수도 있고 스승이 되어 나타날 수도 있고 왕이 되고 자식이 되어 나타날 수도 있어 요. 지옥과 축생에서도 보살로 나타나죠. 다만 인간으로 태어나야만 부 처가 될 수 있어요. 이처럼 천상에도 있고 수라에도 있고 인간 세상에도 있는데 우리가 그렇게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우리가 역사적으로 보고 접한 분은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았을 때 번뇌가 모두 다 빠져나갔지만 몸이 있기 때문에 육체로 인한 고통은 남아있었죠. 80세에 돌아가시면서 몸을 받아서 윤 회하는 것까지 모두 끊겠다고 하셨어요. 이제 보살로서도 윤회하지 않겠 다고 대반열반에 드신 것이 부처의 열반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열반하 신 연도를 기준으로 불기를 산정하고 있는데요. 그것을 무여열반이라고 합니다. 보살로서 윤회하는 것도 끝났기 때문에 나머지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삶을 추구하는 분이 보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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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대승불교의 기본이 이타심이라고 하셨는데요. 사람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가 아닐까, 진정으로 이타심을 갖는 대승보살의 삶이 가능할까, 의구심이 듭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성이 없다는 점에서 사람이 본래 어떻다 하는 것은 일단 맞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일어났다가 인 연 따라 사라지는 것이니 본래부터 있는 것은 없어요. 다만 본성이라고 할 정도로 쉽게 변하지 않는 어떤 특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할 뿐이죠.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본성을 이기심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사실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아요. 생물학자나 진화심리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인간이 이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라고 합니다. 코끼리나 원숭이와 같이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들에게는 이타적인 부분 이 조금씩 있다고 해요. 특히 사람은 집단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아주 오 래 전부터 이타적일 때 가장 이익이 있다는 경험을 갖게 됐다고 합니다.
자매가 결혼해 아기를 낳으면 이모가 봐주죠. 말 그대로 다른 어머니 라는 뜻이에요. 자매만 그런 게 아니라 이웃들이 돌아가면서 서로의 아 이를 돌봐주잖아요. 그렇게 해야 공동체가 이익을 본다는 것을 사람들 은 경험적으로 알아요. 이것은 어린 아이의 실험을 통해서도 다각도로 증 명되고 있어요.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부분이 바로 이러한 이타적인 성향을 지금까지 계속 이어오고 있다는 점입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출연한 것이 약 20만 년 전이죠. 원인류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250만 년에서 300만 년 동안 진화시켜온 내용이 이타심입니다. 이타심은 인간이 생존을 위해 터득한 심성이고 진화시켜온 심성이에요. 그러므로 이타심을 구현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 다. 이타적인 삶은 결코 인위적이거나 인공적인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끌 어내야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으니까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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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얘기지, 하지만 나는 이기적으로 살 거야’ 한다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어요. 인간이 진화시켜온 이타심을 발 현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산다면 행복을 만드는 데 실패하게 돼 있어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승철학은 인간이 발전시켜온 가장 위대한 삶 인 이타적인 삶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우 리의 삶을 가장 크게 확대시킬 수 있고 행복을 증장시킬 수 있습니다. 이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에요. 부처님은 지금의 진화심리학자들이 이야기 하는 것보다 더 정확하고 실천적으로 말씀해놓으셨어요. 단순히 도덕적 이고 윤리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는 것을 밝혀놓으신 거예요.
이타심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심성입니다. 이타심이 전제되지 않 으면 대승불교가 아닙니다.
Q 이타심과 더불어 대승불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보리심이지요?
부처님께서 이타심의 동기로 제시해 주신 것이 보리심입니다. 발아뇩 다라삼먁삼보리심이란 이타심을 냈다는 이야기죠. 일체 중생을 고통으 로부터 건지겠다는 것이 가장 큰 이타심입니다.
보리심과 이타심을 왜 내야 할까요? 이 세상에 고통스러워지고 불행해 지려고 사는 생명체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다 행복해지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지옥 중생에서부터 천상의 중생까지 모두 행복해지고 자 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중생의 행복을 위해 보탬이 되려고 합니다.
행복 가운데 최고의 행복은 아(我)를 버리고 욕심을 버려 가장 큰 이 타심이 되었을 때입니다. 아를 버렸을 때가 부처가 됐을 때죠. 깨달음이 란 아를 버린 것이고 욕심을 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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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보리심이 단순히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하는 마음 이라는 부분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나 혼자 깨닫고자 하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나만 깨닫고자 하 면 또 다른 법아(法我)가 생겨서 깨달을 수 없어요.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갖고 수행한다면 나 혼자 깨달아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극단적으로는 나 혼자 내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다 는 잘못된 생각으로 빠져들 수 있어요.
경전에서 거듭 설해져 있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여래십대발원문, 관 세음보살의 십대서원과 육향, 아미타부처님의 48대원 등이죠. 발원문의 대부분의 내용은 이타중생입니다. 수행도 이기적인 동기와 목표로 하게 되면 가장 무서운 이기심이 됩니다. 저는 그것을 수행적 이기심이라고 부 릅니다. 자기 혼자만의 수행을 추구한다면 이것은 구도의 모습에서 가장 벗어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참선을 하는 것도 중생의 고통 을 건지기 위해 앉아있는 것입니다. 중생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같으니까 앉아있는 것이지 나 혼자만을 생각하고 나 혼자만을 위한다고 하면 매 우 위험하죠. 우
리나라에는 보리심에 대하여 용어만 있고 구체적인 내용이 없어서 보리심 수행이 많이 부족하지만 티베트 등 대승불교권에 가보니까 보리 심 수행이 아주 잘 살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모든 중생을 나의 어머니로 보라는 가르침이 아주 인상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느꼈는데요. 우리는 오랜 세월 수없이 윤회를 했을 것입니 다.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어머니가 있었을 것이고 동물로 태어나도 어 머니가 있었을 것이고 육도 윤회를 하는 가운데 수천 번 수만 번 태어났 다면 수 천 수 만의 어머니를 만났겠죠. 그러니 나이가 많건 적건 남자건 여자건 동물이건 우리가 만나는 생명체 가운데 나의 어머니가 아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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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은중경』을 부모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갚으 라고 설한 경전으로 알고 있지만 이것은 아주 훌륭한 발심경입니다. 부 처님께서 행각을 다니시다가 뼈 무덤을 보고 절을 하시잖아요. 아난 존 자가 삼계의 대도사이신 분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뼈 무덤에 왜 절을 하 는지 묻자 부처님께서는 어느 한 생애에서인가 당신의 어머니였다고 하 셨죠. 이처럼 나와 인연 있는 모든 중생을 어머니로 보고 그 어머니가 고 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가슴 아파 하며 그 어머니의 행복을 위해 내가 앞 서서 모시고 가겠다고 마음을 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Q 불교를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고 행복의 길을 찾았다면 그 다음 할 일은 무엇일까요?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이 그 해답입니다. 갑시다 갑시다, 어서 갑시다, 어서 빨리 번뇌가 다 한 세계로 다함께 갑시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구호예요.
나만을 위해서 하면 되지 않아요. 나만 위하면 깨달음 자체도 구할 수 없어요. 연목구어죠. 깊은 숲의 나무 꼭대기에서 낚시를 하는 것과 같 아요. 물고기가 잡힐 수가 없어요. 경전 어디를 보더라도 나 혼자 된다거 나, 나를 위해 수행한다는 이야기는 단 한 군데도 없습니다. 불자들이 가 장 많이 독송하는 『천수경』만 보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발원과 참회에 대해 설하고 있지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Q 대승불교의 구호라 할 수 있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이해하는 데 있 어서도 먼저 깨달음을 구하고 그 다음에 중생을 구제하는 것으로 받 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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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한다는 뜻인데요. 상구보 리가 먼저이고 하화중생이 나중이라고 생각하지만 두 가지는 동시예요. 부처가 된 후에 중생을 건지겠다고 한다면 언제 건집니까? 상구보리 자 체가 일체 중생을 위하는 일이에요. 동시에 나와요. 이것이 따로 놀면 거 짓입니다. 불이입니다. 둘이 아니죠.
자리이타라고 했을 때도 같습니다. 굶주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 밥을 한 그릇 드렸을 때 그 분이 고통을 면하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즐겁다, 이렇게 자리와 이타는 동시에 일어납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조금만 기다 리라고 하면서 돈 많이 벌어서 나부터 배를 채우고 밥을 주겠다고 한다 면 말이 안 되죠.
상구보리와 하화중생, 자리와 이타는 분리될 수 없어요. 분리시켜서 이야기하면 그것은 법이 아닙니다. 중생을 위하는 마음이 생겨야 중생을 이끌고 깨달음으로 가겠다는 생각이 일어나죠.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 다. 실제로는 같은 이야기입니다. 부처님과 여러 조사스님들께서 설명하 기 위해 두 개를 분리해서 이야기했지만 이것은 둘이 아니에요. 정진을 해 보니까 완전히 같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Q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행이 함께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만약에 군대를 만들어 훈련을 했는데 전쟁이 일어나니까 모두 도망 을 가버렸다면 그런 군대는 아무런 쓸모가 없겠죠. 우리가 이렇게 공부 하고 수행하는 것은 모두 실천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실천하지 않고 그냥 이론적으로 알고 지식을 쌓으려면 뭣하려 열심히 하겠어요? 그것 을 그림의 떡이라고 하죠. 제 아무리 먹음직스럽고 풍성한 떡을 그려서 방에 걸어놓더라도 먹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것 아닌가요? 실천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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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불교가 아닙니다.
중생을 구제하고자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최선을 다해 실천해나갈 때 지평이 열리고 수행이 이루어집니다. 자비심으로 법을 설한다는 것도, 무소유로 산다는 것도, 말이 아니고 실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말로만 떠든다면 수행자가 아니죠.
Q 인류가 지금처럼 발전하고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이타심이 바탕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만, 그럼에도 다른 사람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 이라는 생각을 갖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쉽지 않죠. 하지만 인류가 수백만 년 지나오면서 해왔던 거예요.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라면 어렵겠지만 원래 해왔던 것이고 우리의 심성에 깊 이 자리하고 있으니까 발현시킬 수 있어요. 이를 테면 부모가 자식을 사 랑하는 그 마음을 확대시켜 나가면 됩니다. 없는 것을 하라는 게 아니고 있는 것을 확대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교도소에서 교법사 일을 했는데요. 상담하면서 수형자들 에게 제일 쉬운 일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도둑질하는 게 제일 쉽다고 하더 군요. 우리는 도둑질을 한다고 생각만 해도 땀이 나고 심장이 뛰죠. 그러면 제일 어려운 일이 뭐냐고 하니까 매일 꾸준히 성실하게 일하는 게 어렵다 고 해요. 결국 습관을 어떻게 들이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습관이 되면 매 우 쉬워요. 선행을 하고 이타행을 하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도둑질은 한 밤중에 해야 하고 걸리면 교도소에 들어가야 하고 안 걸리더라도 평생 두려움에 떨어야 하고 결국에는 잡히게 되어 있잖아요. 하지만 이타행은 한낮에 해도 되고 한밤중에 해도 되고 온라인으로 해도 되고 오프라인 으로 해도 돼요. 어떻게 해도 상관이 없어요. 담배의 경우에도 평생 한 대 도 안 피워본 사람에게는 담배를 한 대라도 피우는 일이 너무나 힘들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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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요. 그런데 하루에 한 갑씩 피우는 사람을 보면 밥을 그렇게 먹으라고 하면 못 먹을 거예요. 이처럼 습관들이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타행도 작은 것부터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자꾸 이 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하고 연습이 되어야 해요. 집단이기심 도, 개인이기심도 모두 절대 옳지 않습니다.
Q 역사 속에서 대승보살의 정신을 구현했던 분으로 누가 계실까요?
가장 대표적으로 용수논사를 꼽을 수 있죠. 용수보살은 나란다 대학 출신으로 『중론』을 쓰신 분입니다. 공성에 관해 가장 깊이 있게 정리해 대승불교사상의 기반을 확립한 분입니다.
지금의 달라이 라마 존자도 높여 불러서 존자님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보살이죠. 보살이라고 하면 관세음보살님만 떠올리는데 대승불교를 수행 하는 분은 모두 보살입니다. 보살 수행자이죠. 대승불교의 행원을 실천 하는 사람은 모두가 보살이니까 역사적으로 대승보살은 굉장히 많습니다.
관세음보살 같은 분들은 보살의 계위가 십지보살로서 부처되기 직전 의 보살입니다. 문수보살, 대세지보살, 보현보살, 준제보살 등 수많은 보 살이 계시고 역사적으로 흔적을 알 수 있는 보살도 수없이 많죠.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분들은 대부분 성인의 위치에 올라가신 십지보살이라고 보면 됩니다.
Q 이타심과 보리심을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요?
『금강경』에서부터 『법화경』, 『화엄경』, 『원각경』, 『천수경』 등이 모두 대승불교의 수행지침서입니다. 목표는 깨침입니다. 다만 깨치지도 않았 는데 깨친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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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을 현혹하기도 하는데 여기에 흔들려서도 안 됩니다.
보살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리심입니다. 보리심을 발해서 일체 중생을 나의 어머니로 보고 저 분들을 모두 이끌고 가겠다고 발원해야 합니다. 어디로 모시고 갈 것인가?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 바하, 깨달음의 세계로 내가 다 모시고 가겠다고 간절히 발원해야 합니다.
예전에 티베트에서 매년 오체투지를 10만 배씩 하신 노장님을 뵙고 여러 번 말씀을 나눈 적이 있는데요. 어떤 마음으로 절하시는지 여쭈니 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당신은, 머리 위에는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고, 양쪽 어깨에는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을 모시고, 오른쪽 팔에는 친가의 사람들, 왼쪽 팔에는 외가의 사람들, 허리에는 아는 사람과 친한 사람들을 전부 붙들고, 다리에는 인연이 없는 모든 사람들을 이끌고 절 한다고 합니다. 절을 한 번 할 때마다 ‘한 걸음 한 걸음 깨달음의 길로 모 두 이끌겠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새긴다고 하셨어요. 원력이 이 정도는 되어야 수행자라고 할 수 있고 보살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스님들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차마고도에서 삼보일배를 하면서 라싸 까지 5천 킬로미터를 6개월 넘게 순례하면서도 자식의 행복, 나의 건강, 이런 것이 하나도 없어요. 심지어 티베트 독립을 위해 기도한다는 소리도 없어요. 일체 중생이 행복하면 좋겠다는 발원밖에 없습니다.
Q 무엇을 발원하는가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겠군요.
본인이 평소에 이타심이 잘 생기지 않는다면 만나는 사람을 이렇게 관찰하면 도움이 됩니다. 어느 생인가 나의 어머니였을 분을 만났구나, 이 분에게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이런 생각 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저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 다람 살라의 여러 곳을 방문했는데요. 그 분들은 힘들다고 하지 않고 모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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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밝고 긍정적이지만, 제가 그분들을 볼 때는 가슴이 참 아팠습니다. 저 들이 만약 나의 어머니였다면, 지금 저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 면서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러면 눈물이 쏟아지죠. 이러한 연민의 마음이 없이 불교를 믿고 공부하고 실 천한다는 것은 위선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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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대승불교의 실천 덕목
Q 대승불교의 실천 덕목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이타심을 내서 모든 중생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고 나는 맨 마지막에 성불하겠다는 생각이 보리심입니다. 발심하라고 많이 이야기하지요. 발 심이란, 발보리심,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의 줄임말입니다.
발심한다는 것은 그동안의 나의 삶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중생심으로 살았던 삶에서 이타적인 삶으로 바꾸겠다는 생각 을 내는 거죠. 내 나름대로 벌어먹고 살고 내 편한대로 살았던 것을 버리 고 이제부터는 모든 중생을 위해서 살겠다, 최종적으로는 중생을 전부 모시고 저 부처의 경지, 깨달음의 세상에 이르게 하겠다고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발보리심입니다. 보리심의 첫 번째입니다.
그 다음이 행보리심입니다. 보리심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로 육바 라밀이죠. 『화엄경』에서는 십바라밀을 이야기합니다. 마음만 낸다고 이 루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마음을 낸 다음 그것을 하나하나 실천해나가 야 하죠. 그것을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바라밀이란 건넌다는 뜻입니다. 행하지 않는 발보리심은 마치 씨앗만 심어놓고 물도 주지 않고 잡초도 뽑아주지 않는 것과 같아요. 육바라밀 을 실천하면서 보리심을 일으킨 이 마음을 확대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없이 발심했으니 이제 바로 깨달아 버리겠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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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과정이 다 생략돼버리죠.
그 다음 마지막 세 번째가 승의보리심입니다. 수승한 보리심이라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심을 완성하신 것을 이야기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3아승지겁 전에 연등부처님 앞에서 발심하고 3아승지겁 동 안 행한 것이 육바라밀이며 그것이 완벽하게 완성된 것이 부처입니다. 그 것이 승의보리심입니다.
부처님은 보리심을 완전히 이루신 분이고, 보살은 보리심으로 끝없이 행하는 과정이고, 우리 같은 경우는 보리심을 일으켜서 이제 막 발심을 한 경우죠. 중전법륜인 대승의 핵심은 보리심을 내고 행보리심으로 보리 심을 완성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자리이타입니다. 일체 중생을 위한 일이자 나를 위한 일입니다.
Q 바라밀의 뜻부터 짚어볼까요?
파라미타(Pāramitā) , 건넌다는 뜻입니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여기에서 저기로 건넌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힘 든 곳이죠. 사바세계 중생계이기 때문입니다. 온갖 고통으로 괴로우며 윤회하는 고통 때문에 힘듭니다. 윤회의 굴레에서 계속해서 뺑뺑 돌고 있 으니까 나들목을 통해 윤회에서 빠져나가 저 피안의 세계로 건너가야 하 겠죠. 그래서 바라밀을 도피안이라고 번역합니다. 지리산 연곡사에 단풍 이 아주 아름다운 피아골이 있는데요. 임진왜란 등의 전란으로 사람이 많이 죽어서 계곡이 핏빛이라 피아골이라 부른다고 하지만 그것이 아니 고 원래 피안골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도피안사도 바라밀에서 유래된 이름이죠.
피안에 이른다는 것은 피안에 이르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입니다. 차 안과 피안은 비유죠. 비유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 차안과 피안이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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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공간적으로 따로 있거나 시간적으로 떨 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중심으로 바로 이곳에서 차안과 피안이 형성됩니다. 내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거죠.
아미타 부처님의 48대원을 보면 전부 원력장엄입니다. 공간이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바꾸겠다는 의미거든요. 피안으로 건너간 다고 할 때는 버스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죠. 지금 내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번뇌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 때문에 달라집 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차안과 피안입니다.
Q 육바라밀의 의미를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육바라밀의 여섯 바라밀은 수레바퀴의 살처럼 긴밀하게 연결되고 하 나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한 가지만 갖고는 안 됩니다. 자동차가 있으면 바퀴도 있어야 하고 운전대도 있고 엔진도 있고 차체도 있고 휘발유도 있어야 되듯이 이 여섯 가지가 상호작용해서 피안에 다다를 수 있습니 다. 이 여섯 가지를 행하지 않고는 아직 미완성입니다. 이 여섯 가지를 행 하지 않는 수행은 완성될 수 없어요. 그리고 『화엄경』에서는 깨닫고 난 뒤에 행해지는 네 가지가 보태져 십바라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육바라밀에 더해지는 네 가지를 먼저 말씀드리면, 방편, 원, 력, 지인 데요. 육바라밀을 완성한 부처님과 보살님에게는 중생을 교화하는 데 있 어 선교방편을 사용하며 반드시 서원을 세우고 그 원력을 완성시킵니다. 그리고 부처님에게는 14무외력이 있죠. 두려움 없는 힘이 있어서 그 힘 으로 중생을 위하셨습니다. 그리고 원만한 지혜가 완성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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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첫 번째 보시바라밀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육바라밀의 첫 번째인 것도 의미가 있겠지요?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주실 때는 반드시 차례가 있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수행차제로 설명하셨어요. 수행의 순서인 셈 이죠. 그렇기 때문에 되는대로 뒤죽박죽 하면 안 됩니다.
가을에 밤이 떨어져 그것을 먹으려고 하면 무엇부터 해야 하나요? 가 시가 잔뜩 달린 껍질부터 벗겨야 합니다. 그리고도 딱딱하고 까만 껍질 을 까고 다시 또 속껍질을 까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행하는 데 있 어서도 순서가 있습니다. 인간이 제일 착각하기 쉽고 집착하기 쉬운 것이 물질적인 욕심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거칠고 단단합니다. 물질도, 형상도 실재하지 않는 것이고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사라지는 것인데도 우리는 그것을 갖기 위해 싸우고 속이고 폭력을 행사하잖아요.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그런 거칠고 강렬한 욕심을 제어하지 않으면 다른 어떤 수행을 해도 잘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보시를 제일 먼저 해 야 합니다. 보리심을 행하는 데 있어서도 가장 좋은 방법이 욕심을 버리 는 거예요. 베푸는 거죠.
하지만 욕심을 버리고 베푸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꽉 움켜쥐고 내놓으려고 하지 않잖아요. 아이가 목이 가느다란 병 안에 있는 사탕을 한 움큼 쥐고 손을 빼려고 해도 뺄 수 없는 것과 같아요. 하 나만 쥐면 간단한데 그것을 못한단 말입니다.
사람들은 남에게 베풀면 자랑스럽고 뿌듯하다고 하는데, 아닙니다. 베풀면 내가 가벼워져요. 구멍난 배에 물이 새면 제일 먼저 무거운 살림 살이부터 버려야 하죠. 우리도 그렇게 버려야 하는 거예요. 버리면 배가 가벼워져서 바다에 뜰 수 있듯이 욕심을 내려놓는 것은 마음의 살림살이 를 가볍게 합니다. 그것이 보시예요. 버리지 않고 성불한다? 꽉 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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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불할 수 있을까요? 절대 성불할 수 없어요. 설사 성불한다 해도 쓰레 기장이 되고 말겠죠.
보시란 널리 베푼다는 뜻입니다. 크게 베푼다는 의미죠. 평등심을 가 지고 베푸는 것입니다. 고작해야 내가 아는 사람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베푸는 것은 보시가 아니에요. 주지 않으면 괴로워질 수 있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보시입니다. 물이 없고 끼니가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 돈이 없고 시설이 없어서 진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 그런 곳에 분유 하나, 우 물 하나, 의약품 하나라도 주는 것이 보시입니다. 개인 뿐 아니라 나라 자체도 보시행을 해야 합니다. 사회적 평등을 이루고 빈부격차를 줄이는 것은 국가가 하는 보시라고 할 수 있겠죠.
베푸는 것은 나의 욕망을 줄이는 것이기 때문에 수행의 관점에서도 그렇고, 행복해지는 관점에서 봤을 때도 제일 먼저 선행되어야 하고 가 장 쉬운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쉽고 현실적인 방법이 재보시입니다. 실제로 돈이 없어서 고통스러운 일이 너무 많잖아요. 당장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일이니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으 로는 구제 못 한다, 법으로 구제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요. 배곯는데 법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겠습니까? 공자도 먹고 사는 문제를 치국에 있 어서 제일 첫 번째 덕목으로 삼았죠. 따라서 제일 거친 것이 사람의 욕심 이고 재물로 인한 고통이 현실적으로 가장 큰 괴로움이기 때문에 베푸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고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그 다음 법보시입니다. 우리는 법을 베푸는 것을 잘 하지 않아요. 법 을 베푸는 것은 나를 고집하는 법아가 없다는 의미예요. 법아를 줄이는 데 법보시가 최고입니다. 나는 많이 알고 너희들은 모른다는 생각에 사 로잡혀 그저 공양이나 올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죠.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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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베푸는 방법은 많습니다. 경전으로, 책으로, 주석서로, 설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일러줘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만 들어주는 거예요.
그 다음에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의 문제입니다. 종 교의 핵심 포인트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죽음의 과정을 어떻게 잘 통과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수준의 차이는 있겠지만 죽음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고 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늙음과 죽음의 통로를 통과할 때 옆에서 인로왕이 되어 도와주겠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호스 피스 간호를 할 때도 육신적으로 보살피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 죽음의 고통과 두려움을 어루만져주고, 맑고 편 안한 마음으로 마칠 수 있도록 심신의 안정을 챙겨줘야 합니다. 바르도 상태에서 시달림을 하고 다음 생으로 태어나는 49재까지 우리가 모두 인 도해야 할 중요한 과정입니다. 이러한 보시행이 무외시입니다.
재보시, 법보시, 무외시, 이 세 가지 보시행을 하면 욕심의 업들이 많 이 줄어듭니다. 욕심의 업이 줄어들어야 공부를 할 수 있어요.
Q 무주상보시의 의미도 짚어주세요.
무주상보시란 ‘내가’라는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무주상이란 머무르 는 상이 없다는 말이니까 ‘나’에 집착하는 상이 없다는 말이죠. 내가 베 풀었다는 상이 있다면 진정한 보시가 아닙니다. 내가 했다는 생각이 아예 없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줬을 뿐이라고 생각하 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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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두 번째 바라밀은 지계바라밀입니다.
계라는 한자는 경계할 계입니다. 부처님의 계율을 받아 지니고 지킨 다는 뜻이죠. 불교의 계율은 부처님께서 말씀해놓으신 것입니다. 일부에 서는 계율도 시대에 맞게 바꿔야 한다고 하는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 을 바꾸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오늘날에는 사회적으로 잘 되어 있기 때문에 필요하지 않은 계율이 있다면 그대로 놔두면 됩니다. 필요하 지 않다고 없애거나 바꿀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사실은 2600년 전 부처 님 당시나 지금이나 인간의 심성이 크게 바뀐 게 없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율은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시행을 하면서 업이 많이 줄어들었다면 그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잘못된 것을 중단하는 거예요. 이를테면 술을 먹는 것도 스톱을 해줘야 업이 줄어들지 계속 반복해서는 중단이 안 되고 수행이 안 되죠.
계를 지키지 않고도 바로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깨달은 행이 바로 계를 지키는 것이니까 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습니 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으신 분입니다. 그 분의 행은 전부 다 계율이에요. 당신이 지키지 않으면서 제자들에게만 지키라고 한 게 아니죠. 당신이 말 씀해놓으시고 어긴 적도 없으시고요. 당신이 말씀하신 계율에 어긋난 것 이 단 하나도 없으시죠.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길을 가려고 하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지키기 시작하면 잘못된 것들이 하나하나 멈추기 시작합 니다. 비유한다면 전쟁터에서 입는 갑옷과 같이 나를 지켜줍니다. 만약에 무엇을 크게 잘못해서 잘못한 결과가 과보로 온다면 그것을 막을 방법 이 없잖아요. 그러한 과보를 사전에 방지해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재가자들은 생활하면서 많은 것을 지키기 어려우니 가장 근본적인 것 으로서 오계를 지켜야 합니다. 남방불교 쪽에서는 8경계를 지키도록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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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있습니다. 오계는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입니다. 그 리고 출가하면 어린 사미에게는 살생, 투도, 사음에 망어, 기어, 양설, 악 구, 그리고 탐욕, 진애, 치심의 십선계를 줍니다. 이러한 계는 지키지 않으 면 과보가 올 때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불 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비구계 250계, 비구니계 348계, 그 다음 보살발원을 하면 보 살 48계, 그리고 금강승 수행으로 들어가면 금강승계를 받아야 합니다. 이처럼 불교의 계율은 수행의 차례에 따라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반드시 지켜야만 수행으로 나아가는 데 장애가 없습니다.
Q 스님께서는 계율을 갑옷에 비유해 주셨는데요. 어떤 분은 차선과 같 다고 하시더군요. 이처럼 계율은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사실을 기억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보시행을 하지 않고 계를 지키지 않으면서 바로 깨닫는다고 하는 것 은 어불성설입니다. 육조 혜능스님처럼 전생에 이미 다 닦아서 완성한 분 이나 가능한 이야기이지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달라이 라마께 여쭤본 적이 있는데요. 당신은 어릴 때 링 린포체께서 십선계를 받으라고 할 때 의심이 생겼다고 합니다. 당신은 세속에 대한 미련도 없고 욕심도 없는데 이 계를 왜 받아야 하는지 이해 할 수 없다고 하셨죠. 스승은 그 말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형식적으로 단 계를 밟아야 하는 것이니 받으라고 해서 십선계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처럼 전생부터 수행을 해온 사람은 이생에 태어나서도 그 업이 아주 약 하고 쉽게 제압할 수 있을 정도겠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가지만 지키는 것도 쉽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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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수행자라면 목숨 바쳐 지키겠다는 각오로 단계마다 계를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Q 세 번째는 인욕바라밀입니다. 무엇을 참아야 할까요?
모욕을 참는 것입니다. 인내가 아니고 인욕이에요. 욕됨을 참는 거죠. 단순히 참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고픈 것, 추운 것, 아픈 것, 이런 것을 참는 것은 조금 가벼운 이야기이고 우리가 가장 참기 어려 운 것이 나를 무시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것 아닙니까? 모두가 나라고 하 는 아를 내세우고 사는데 거기에 흠집이 나거나 먹칠하는 것을 참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죠. 아상을 버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쉽지 않 습니다. 보시행을 할 때도 물론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는 것이 니까 아상을 버리는 것이고, 계를 지키는 것도 내가 뛰어나다는 생각으로 다른 이를 해치거나 나를 보호하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니까 아상을 버리는 것이기는 해요. 하지만 그것은 아주 거친 아를 버리는 것이니까 초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진짜 아상을 버리는 수행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욕수행 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마음 안에 일어나는 욕됨을 극복하는 것이죠.
마음에 상처가 많고 콤플렉스와 트라우마가 많으면 분노를 참기가 힘들어요. 개인은 물론이고 국가와 민족 사이에도 이런 감정이 있을 수 있죠. 그래서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립하거나 갈등하다가 다툼으로 비화되는 것입니다. 이때 분노를 일으키고 그것을 표현하고 분출해야 이기는 것 같지만 이것은 사실 진 거예요. 분노를 일으키면 자기부터 타잖아요. 자기부터 괴롭단 말입니다. 만약에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화가 났다고 칩시다. 하지만 정작 그 누군가는 아무렇지도 않죠. 나만 괴로울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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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분노를 일으키면 내가 이긴 것으로 착각하는 그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참았을 때 이긴다는 것을 알아야 인욕이 가능합니다. 이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Q 요즘 우리 사회는 분노가 만연해있습니다. 화내는 것을 당연시할 뿐 아니라 정당하다는 인식까지 있는데요.
이 문제는 조금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워낙 많은 억압을 당했기 때문에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사회제도에 분노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사안 자체에 대해서는 사실에 근 거해 잘잘못을 가리고 정확하게 판단해야 하고 그것을 개선하고자 하는 요구와 움직임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사람을 대상으로 분노를 일으키 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분노가 많으면 그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 기가 어렵거든요.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는 데 있어서도 잘못된 것에 대해 서는 정확하게 알고 지적하되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있어서는 적대 감이나 분노가 아니라 개선시키기 위해 차분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달라이 라마를 여러 번 만났지만 중국에 대해 나쁘게 말씀하시는 것 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나의 친구’라고 하시면서 농담 삼아 ‘하지만 굿 프렌드는 아닌 것 같다’고 하세요. 언젠가는 화해하고 공존하는 날이 올 것이라면서 테러 등 적대적인 투쟁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중국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고 만약 테러 를 해서 피를 흘린다면 그것은 부처님 말씀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에 끝끝내 성의를 가지고 인욕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간디의 비 폭력과 무저항 정신을 우리 모두 본받아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분노를 일으키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절대 맞지 않습니다. 가정에 서도 참지 못해 폭언과 폭력이 이루어지면 안 되고 사회도, 국가도 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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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입니다. 서로가 참고 지나가면 해결될 수 있는 해결점이 찾아집니다.
『입보리행론』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몇 년에 걸쳐 아주 고생스럽게 지은 집이 성냥개비 하나로 불이 붙으면 한 시간도 못 돼 다 타버리듯이 그대가 수없이 오랜 세월 지은 공덕이 분노 한 번 일으키는 것으로 인해 다 날아간다고 했습니다. 설사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 아버지조차도 폭 력을 행사하면 상처가 되고 멀리 하게 되는데 다른 사람이라면 어떻겠습 니까? 그러므로 분노를 일으키는 것도 안 되지만 분노를 그대로 표현하 거나 분출하는 것도 절대 안 되는 일입니다.
사바세계인 인간 세상에서는 인욕행이 가장 어렵습니다. 우리 스님들의 옷을 왜 이렇게 길고 불편하게 만들었는지 아십니까? 저도 젊었을 때는 움직이기도 불편하고 벗어서 접기도 불편해서 옷을 좀 간편하게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요. 그 이유는 참으라고 한 거예요. 이 옷 입고 싸울 수 없잖아요. 원래 인도의 전통 가사는 오른쪽 어깨가 다 드러나게 되어 있지요. 이것도 숨은 뜻이 있어요. 인도의 무사들은 오른손잡이인 데 오른쪽에 칼이나 무기를 숨기지 않는다는 뜻에서 오른쪽을 드러낸 것 입니다. 당신을 해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표현한 거죠. 그러니까 이 렇게 오른쪽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승복을 한 이유는 비폭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분노를 일으키거나 화를 낼 생각이 없다는 의미죠. 분노를 일으키면 일단 수행은 안 됩니다. 분노의 마음에서 어떤 수행 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Q 다음으로 정진바라밀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말 부지런하지요. 우리나라 사람들뿐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부지런하게 삽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한 부지런 함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진짜로 올바른 곳을 향한 부지런함인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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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십시오. 도둑질하는 사람이 부지런하면 어떻게 됩니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죠. 싸우는 사람이 부지런하면 사회는 아주 복잡해집니다. 술을 먹는 사람이 부지런히 술을 먹으면 알코올 중독자가 되겠죠.
이러한 부지런한 것이 정진은 아닙니다. 나쁜 일을 하는 것에는 게을 러져야 합니다. 정진의 정은 정미롭다는 뜻이고 진은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에요. 더 나은 마음을 내고, 더 나은 마음으로 행동하고, 더 나은 삶 을 살아가기 위해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보시행도 한 번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거듭 마음을 내고 행 을 하여 욕심이 점점 줄어들게 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게 해 나가는 것이 정진입니다. 계율도 무엇인가를 잘못했다면 그것을 하나하 나 줄여나가는 것이 정진이죠. 인욕행을 할 때도 처음에는 화를 낼 수 있 습니다. 우리는 완성된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것을 잘 살피고 더 이 상 하지 않게 자꾸 브레이크를 밟아주는 그것이 정진입니다.
발심한 것이 약하면 보리심을 키워가는 것이 정진이고, 보리심을 이 룩하기 위해서 육바라밀을 행해나가는 것이 정진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 서 기도하고 참회하고 발원하고 경전을 보는 것이 모두 정진입니다. 부 지런히 하면 할수록 성불의 길로 나아가고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고 행복 의 길로 나아가니까 이 일은 부지런히 해야죠. 힘을 써서 해야 합니다. 세 상일이라는 게 가만히 놔두면 뒤로 후퇴하게 돼요. 그러므로 애를 써야 됩니다. 애 쓰지 않고 저절로 되는 선행은 없어요. 그래서 산티데바는 『입 보리행론』에서 이 세상의 악행은 가만히 놔둬도 저절로 되고 선행은 행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므로 죽자 살자 하라고 했어요.
정진을 한다고 할 때는 그런 생각을 갖고 거듭 반복해서 노력해야 합 니다. 인간답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그것이 정진에 있어서 중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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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단순히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열심히 하느냐가 중요 하다는 말씀이군요.
럼요. 외국에 갔다 오면 사람들이 술을 한 병씩 사서 선물하고 담 배를 사오고 그런다는데 그것이 잘 하는 일인가요? 술 먹고 몸에 좋을 일 없고 담배 피워서 해될 일밖에 없는데 그것을 선물이라고 사다줍니다. 술을 먹으려고 하면 말리고 담배를 피우려고 하면 말려야 하는 것 아닌 가요? 그것이 선행이고 그렇게 하게 도와주는 것이 정진인데 우리는 거 꾸로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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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자비심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출발할까요?
이 세상이 참 재미있구나, 흥청망청 놀고 그럭저럭 되는대로 살아도 괜찮겠지, 괴로울 일이 뭐 그리 있겠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수행할 생각 이 전혀 안 날 거예요. 환자가 병이 났을 때 고통스럽고 힘드니까 극복하 려는 의지가 생기는데 아프지 않다면 극복하려는 의지도 생기지 않겠죠. 병원에 갈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고 병으로부터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윤회하는 고통 에 대한 철저한 인식입니다.
『아비달마구사론』에서는 ‘고(苦)’에 대해 아주 세밀하게 분석해놨습 니다. 왜 고통스러운가요? 고정되어 불변하는 것이 없고 모두 다 변화하 기 때문이죠.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것도 괴로운 일입니다. 부자가 제일 걱정스러운 것이 뭐겠어요? 사라지는 거죠. 건강한 사람이 왜 건강을 유 지하려고 그러겠어요? 병의 괴로움이 있어서죠. 자녀를 낳으면 즐겁기만 하기를 바라지만 괴로운 문제가 발생하잖아요. 이것은 모두 변화하기 때 문이에요. 실체가 없이 변화하기 때문이죠.
좋은 것에는 집착하고 애착하고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되는 것 이 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어요. 어쩔 수 없죠. 그렇게 변화하고 계속 유 전하는 것이 윤회입니다. 계속 생겨났다가 계속 사라집니다. 존재와 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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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의 생각도 거듭 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합니 다. 이처럼 전부 다 변화하는데 우리는 변화하지 않으려는 애착을 갖고 있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따라서 그 변화하지 않겠다는 고집을 버리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 게 하기 위해서는 고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고에 대한 철저한 인식 없이 는 수행 못 합니다. 고로부터 탈출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수행이고, 고로 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고가 사라져야 즐거움이 오 지 고가 다하지 않으면 즐거움이 오지 않죠.
불교를 공부한다면, 이 세상이 정말 허망하구나, 전부 변화하니까 힘 든 일이구나, 잠시는 착각해서 즐거운 줄 알지만 뒤에는 반드시 괴로움 이 따라온다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수행이 시작되죠.
제가 행자 시절에 하동 쌍계사를 올라가는데 7세 정도 된 동자스님이 내려오시더라고요. 해맑은 동자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떻게 출가 했는지 물었더니 세상이 허망해서 출가했다고 해요. 이제 일곱 살밖에 안 됐더라도 괴로움에 대한 인식이 적다고 볼 것은 아니죠. 웬만한 어른보 다 낫다고 볼 수 있는데요. 큰스님 되겠다 생각했어요. 그 생각이 기초가 되어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을 갖는다면 수행에 아주 큰 힘이 되겠죠.
저는 아마추어 수준이지만 우주 과학, 우주 물리학을 좋아하는데요. 지구도 영원할 것 같지만 영원하지 않잖아요. 지구도 계속 살아서 움직 이는 유기체예요. 우주도 빅뱅 이후에 계속 멀어지고 있다고 하죠. 별도 생성되었다가 사라지고요. 우주도 영원한 것이 없어요. 부처님께서 이것 을 성주괴공이라고 하셨죠. 육도윤회하는 중생들이 잠시라도 머물 수 있 는 곳이 있느냐 하면 생각조차도 잠시 머물 곳이 없어요.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머물 곳이 있다고 착각하지만 머물 곳이 없죠. 1초 전도,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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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 모두 지나가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나라는 것을 고집 하고 유지하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에서 가장 먼저 사성제를 설명하셨죠. 의사가 환 자를 진찰할 때 하나도 아프지 않은 사람을 진찰하지는 않잖아요. 그러 니까 고통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는 병이 성립되지 않습니 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병에 걸린 환자와 같이 우리 중생들이 갖고 있 는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진단한 거예요. 영원성이 없음에도 우리는 영 원하기를 바라며 붙들고 있기 때문에 환자와 같은 고통을 겪죠.
영원하지 않은 데서 오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방식으로 예로부터 브라흐만천에 난다든지, 정령신으로 돌아간다든지, 하늘 또는 조상으로 돌아간다든지 여러 가지로 제시했지만 이것은 모두 살아있을 때는 안 되 는 방법들입니다. 죽어서도 그렇게 되는지 알 수 없는 방법이죠. 부처님 께서는 살아있을 때 되는 법을 이야기하셨어요. 직접 경험하고 검증되는 법을 말씀하셨지 막연하거나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일체 하 지 않으셨습니다.
Q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출리심이라고 하지요?
맞습니다. 단순히 세속을 멀리하는 마음이 아니에요. 출리심이란 변 화하는 허망한 것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결국 나를 위해서 살지 않겠다는 마음이고 내 욕심을 추구하면서 살지 않겠다는 마 음이에요. 실재하는 내가 없기 때문입니다. 연기로서, 인연 화합으로서 존 재하지만 실제 나라는 자성이 있지 않고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를 버리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에 대해 인식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은 인류 보 편적인 생각이에요. 아프면 병원에 가서 약 먹고 나으려고 하는 것과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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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생각이죠. 돈과 권력과 장수를 제 아무리 꿈꿔도 인류 역사 어디에서 도 그것을 영원히 갖지 못했어요. 그러한 세속적인 삶을 살지 않겠다, 거 기에 속지 않고 살겠다는 것이 출리심입니다. 출가와 비슷한 의미예요.
그렇다고 세속적인 것이나 허망한 것을 탐하지 않는다고 해서 종교 라는 이름으로, 답이 나올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철학이나 믿음을 강요 한다면 그것도 불교가 아닙니다.
Q 출리심은 단순히 세속이 싫다, 떠나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통과 번뇌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군요.
우스운 소리로 가출과 출가는 다르죠. 그 차이는 출리심에 있어요. 세속적인 욕망과 집착으로는 끝내 평화와 행복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 을 잘 알고 그런 삶을 버리겠다, 거기에서부터 벗어나겠다는 것이 출리심 입니다.
부처님께서 29세에 출가하실 때 카필라바스투라고 하는 작은 왕국의 왕권을 승계하는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고, 세상 사람들 이 너나없이 고통 받고 있는데 그 원인을 정확하게 찾고 해결하기 위해 출리심을 내셨죠. 이것을 출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Q 그러면 고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자비심으로 이어질까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모든 중생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똑같다는 점입니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똑같아요. 그러면 고통을 받고 있는 모든 생명들에 대해 연민의 마음이 일어나겠죠.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저들도 행복해지고자 하고 나도 행복해지고자 하니 까 똑같잖아요. 불행을 싫어하는 마음도 같잖아요. 저 분이 지금 아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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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모르고 웅덩이에 빠지려고 하면 가서 얼른 잡아야죠. 지금 잠시는 행 복해 보이지만 나중에 늙고 병들고 죽을 때 얼마나 힘들까, 궁핍하면 얼 마나 힘들까, 남에게 배격당하고 공격당하면 얼마나 힘들까, 이처럼 생명 에 대한 근원적인 연민의 마음이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도우려고 하 죠.
예를 들어 밥 한 끼 돕는 것은 그 사람을 반나절 정도 행복하게 할 수 있어요. 추운 날 옷 하나 사준다면 한겨울은 따뜻한 행복을 줄 수 있죠. 불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서 영원한 행복을 구가할 수 있게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건지겠다는 생각과, 이 타심으로 상대도 행복해지고 더불어 나도 같이 행복해지는 가르침이 불 교의 가르침입니다.
Q 누군가 고통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면 공감할 수는 있습니다만,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같은 아픔이라 할지라도 내가 겪는 것, 내 가족이나 지인이 겪는 것,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이 다 다르게 느껴지거든요.
거기에서 중요한 것이 ‘내’가 빠져야 돼요. 이스라엘 사람도, 팔레스타 인 사람도, 내 자식, 내 가족은 다 지키려고 하죠. 하지만 상대를 폭격하고 살상하고 있거든요. 내가 있으면 나만 지키는 것이 됩니다. 나라고 하는 아상에 종교적 신념까지 더해지면서 엄청난 불행을 가져오고 있잖아요.
『금강경』에서 어떻게 보살이 되냐고 했을 때 아상, 인상, 중생상, 수 자상을 버려야 된다고 했죠. 내가 빠질 때 평등심이 나옵니다. 이것이 쉽 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수행을 통해 거듭 반복해야 합니다.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지 않으면 자비심과 이타심이 나올 수 없어요. 평등심이 없으면 대승불교는 성립이 안 됩니다. 불교 자체도 성립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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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고 종교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모든 중생은 생명이 하나입니다. 하 나라는 점에서 평등하죠. 생명을 지키려고 하는 생각도 같고 두려움으로 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생각도 똑같아요. 행복해지고자 하는 것도 똑같 죠. 그래서 매우 소중하고 평등합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도 다른 생명 을 죽일 권한은 없습니다. 생명의 살 권리를 침해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죠. 인권이라는 것이 그것이지만 생명의 권리는 인간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에요.
티베트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어떤 스님이 오랫동안 정 진하다가 견도에 이르지 못해서 걸망을 짊어지고 떠났는데 문 앞에서 비 루먹은 강아지가 쓰러져 있는 것을 봤어요. 그래서 이 스님이 자비심을 일으켜 손수건을 꺼내서 진물을 닦아주려고 하니까 강아지가 아파하며 발버둥 쳤죠. 아파하는 강아지를 위해 자신의 혀로 상처를 핥아서 치료 하려고 하는 순간 견도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눈앞에 문수보살 이 서 계셨다고 하죠. 이 스님은 한없는 환희심에 빠져있었다고 하는데 요. 이러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차별심을 버리지 않는 자비행은 있을 수 없어요. 자비행이 아니에요.
Q 자비심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이라고 할 수 있겠죠?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이라는 뜻이니까 한정 지을 수 없는 끝없고 한량 없는 자비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한 번 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끝없 이 내야 하는 마음이에요.
자는 모든 생명을 근원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모든 생명이 고 통스럽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죠. 설사 원수처럼 생각하는 이도 잘 살아서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달라이 라마도 중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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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라 그러지 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모든 중생이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행복하면 좋겠다, 이것이 자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저 중생이 행복할 행을 하지 않고 고통스러울 행을 한다면 거 기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일어나죠. 그것이 비심입니다. 남이 잘못되는 모 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진심으로 슬퍼하는 마음입니다. 『천수경』에 등장 하는 준제보살을 티베트에서는 따라보살이라고 하는데요. 이 분의 탱화 나 상은 파랗게 표현되어 있어요. 타인의 슬픔과 괴로움과 죄까지도 다 흡수하겠다고 항상 관상해서 파랗게 된 거예요. 이와 같이 잘못하는 모 습을 보고 연민의 마음을 내 그가 그렇게 하지 않게끔 열심히 도와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정신으로 한다면 따로 포교를 할 필요가 있겠어요?
보살은 이처럼 모든 생명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모든 생명 이 고통을 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잘못된 길을 갈 때는 연민의 마음 을 가지고 이끌어주려고 하는 마음을 냅니다. 희는 남이 잘 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이에요. 행복해지기 위 해 노력하고 행복의 길로 가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는 거죠. 누군가 잘 되 면 기쁘게 생각하고 좋은 일을 하면 박수를 쳐주고 내가 못한 일을 해주 니 너무나 감사하다고 기뻐하는 것이 희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수희동참, 수희찬탄입니다.
그 다음 사는 그렇게 이끌기 위해서는 언제나 희생해야 된다는 거예 요. 내 목숨을 버리더라도 중생을 위하겠다는 마음을 갖는 거죠. 예수님 도 그렇게 하셨고 중생을 위해 목숨까지 버린 불교수행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물건 하나, 돈 조금 주는 것은 쉬워요. 손가락은 신경이 붙어있기 때문에 아파서 망설여지지만 돈이나 물건에는 신경이 없으니까 주면 그냥 끝이잖아요. 그래서 쉽다고 하는 거예요. 말로써 해주는 것도 조금만 에너지를 쏟으면 되니까 쉬운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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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은 언제든지 중생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는 분들 입니다. 지금 고통스럽고 힘들게 수행하는 것도 중생에게 희생하고 중생 에게 봉사하겠다는 것이 전제되면 힘이 생겨요. 그렇게 되지 않으면 이기적 으로 바뀌어서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수행 자체도 성과가 없어요.
Q 자비심, 하면 보시, 애어, 이행, 동사의 사섭법도 빼놓을 수 없겠죠?
문수보살의 게송 ‘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미묘한 향이로다’와 같이 수행자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자 비행이고 육바라밀행입니다.
가장 먼저 보시행을 해야 하는 것은 베풀지 않고는 욕심을 줄일 수 없기 때문이에요. 또한 베풀지 않고 중생을 이익 되게 할 수도 없어요. 욕 심을 줄이는 수행이고 자비행을 베푸는 수행이에요. 보시는 물질적인 것 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법보시와 무외시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애어란 부드러운 말과 진실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보호 본능이 있고 자기방어기제가 있잖아요. 그런 것 없이 받아들일 수 있으 려면 절대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거짓이 없으려면 철저히 경전에 근 거를 두고 정확하게 말해야 하죠. 그리고 아상이나 자만함 없이 자비롭 게 말해야 합니다. 진실하면 저절로 부드럽고 자비롭게 말하게 되고 상 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친절할 수밖에 없어요.
그 다음 이행입니다. 산티데바가 『입보리행론』을 저술하면서 첫 머리 에 이렇게 썼어요. 이 글을 쓴 이유는 글재주가 좋아서도 아니고 글 솜씨 를 자랑하려는 것도 아니며 많이 알아서 쓴 것도 아니고 부처님이나 조 사스님들이 가르친 것 외에 내가 특별하게 잘나서 쓴 것도 아니라고 했 어요. 물론 인도의 타고르보다 위대한 시인이라고 불린 분이니까 겸손의 말씀이기는 하죠. 그러면서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오직 중생에게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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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도 이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라고 했어요.
이것이 이행이에요. 모두를 이롭게 하는 행동이죠. 내가 이익 되게 하 려고 하면 타인은 손해를 보게 돼요. 그러므로 걸음걸이 하나에서부터 생 명을 유지하며 사는 모든 것까지도 중생에게 이익이 되어야지 중생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삶이란 보살행이 아니죠. 말 한 마디 하는 것도 이익이 돼야 하고 눈길 하나 주는 것도 이익이 돼야 합니다.
달라이 라마께서는 당신을 친견하는 불자들에게 정성을 다해 가피를 주시거든요. 염주를 하나 돌리고 주력을 한 번 해주시더라도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나에 대한 믿음을 가져서 이익이 되소서’ 이러한 발 원으로 하시는 것이에요. 중생에게 이로움을 주고자 하는 간절한 발원에 그 뜻이 있어요.
그런데 이처럼 도가 높고 도덕적이고 모범적이면 사람들이 좀 두려워 하게 되죠. 그래서 중생의 근기에 맞춰 자신을 낮춥니다. 육조 혜능스님 은 오조 홍인스님에게 인가를 받고 산에서 내려왔죠. 사실은 어떤 위해 가 있을지 몰라 도망간 거잖아요. 그래서 숨어 있으려고 했는데 도인들 은 말 한 마디도 힘이 있으니까 금세 제자들이나 사람들이 따라붙게 되 거든요. 그래서 사냥꾼의 모습을 하고 사냥꾼을 따라다녔어요. 그러면서 그 사냥꾼을 구제했죠.
동사란 이처럼 같은 일을 하면서 구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냥꾼을 따라다닐 때 육조 혜능스님은 사냥꾼이 활을 쏘려고 하면 새끼를 가진 것 같으니 가여워서 어떻게 쏘겠냐고 하고, 어떤 날은 다친 것 같은데 그래도 정정당당하게 겨뤄서 사냥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어요. 사냥꾼이 사냥을 하지 못하는 날이 늘어갔죠. 근기에 맞게 불살생을 이끌어주신 겁니다.
법이란 이렇게 가르쳐주는 거예요. 나는 높은 법문을 하고 너희들은 내 얘기를 들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같은 일을 하면서 구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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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같이 생활하면서 이끌어주는 거예요. 이것이 화신입니다. 중생에 따라 서 몸을 나투는 것입니다.
보시, 애어, 이행, 동사, 이것이 보살행에 있어 가장 기본이에요. 특히 마지막 동사는 아가 없이 일체 중생을 위하는 마음이 지극하지 않으면 하지 못하는 일이죠.
Q 그처럼 자비의 마음을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불자라는 마음을 잊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불자란 부처님의 자식이 라는 말이 아니에요. 깨어있는 부처님의 종자를 갖고 있다는 의미이고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깨어있는 생각이 있고 깨어 있는 생 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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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수행의 단계
Q 수행도 기초부터 차근차근 밟아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신행에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제일 중요한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팔정도에도 제일 첫 번째로 제시 되는 것이 정견입니다. 바른 견해란 부처님의 생각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아직 행은 부처님의 행과 같게 되지 않더라도 생각은 똑같아야 되죠. 생 각이 같아지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몰라요.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모르면 정지(正知), 즉 바른 자각이 일어나지 않아요.
정견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께 직 접 여쭤보고 답을 들으면 되지만 지금의 우리가 부처님의 말씀을 알 수 있는 것은 경전입니다. 그리고 많은 도인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주석하고 해석해놓은 논서들이죠. 정견을 얻으려면 경전과 논서를 봐야 합니다. 그 것을 보지 않고 정견을 얻을 수는 없어요.
육조 혜능스님 같은 분도 있지 않냐고 하는데 그것은 전생을 보지 않 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닦고 익혀서 이생에서 기연을 만나 바로 깨달은 것이지만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겠어요? 경이고 문자고 필요 없이 문득 깨달을 수 있다고 함부로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수행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노력해야 할 것은 부처님의 생각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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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1차부터 4차까지 부처님의 말씀 을 정리한 결집이 이루어졌고 4차 결집 때부터 문자로 기록하기 시작했 어요. 그것이 패엽경이에요.
물론 경전을 한 번 읽었다고 해서 습관이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경전을 통하지 않고 부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어떻게 알 수 있 겠어요? 혹자는 깨달음에 장애가 된다고 경전도 안 본다고 하지만 그것 은 잘못된 거예요. 경전을 본다고 깨닫는 것은 아니지만 수행의 과정에 서 경전을 공부해야 하는 단계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제가 대부분의 불교국가를 다녀봤는데 스리랑카, 미얀마, 라오스, 캄 보디아 등 남방불교국가와 티베트 등에서는 스님들이 출가하여 최소한 16년~20년 동안 경을 배우고 논서를 공부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경을 배 우지 않고 무엇을 하겠다는 것은 체계가 깨지고 시스템이 무너지는 일입 니다. 수행의 기초는 경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스님들도 다 그렇게 공부하셨어요. 열반하신 석주스님, 관 응스님께서도 강원에서 10년 이상 공부하셨다고 저희들에게 늘 말씀하 셨어요. 근래에 와서 대학제도를 도입하면서 강원교육이 짧아지고 경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스님들만 그렇게 공부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미얀 마에서는 국가고시로 삼장법사 자격을 공인하는데 삼장법사이신 분들 이 5천 명이 넘어요. 그 분들이 전국의 사원에서 신도들을 위해 경전을 설명하고 수계하고 거듭 반복합니다. 스리랑카도 공부하는 강단을 갖추 고 신도들이 매주 나와서 공부합니다. 티베트도 스님들은 매일 하루 8시 간 이상 공부하고 게셰 학위를 받은 스님들은 신도들에게 법을 설명하 는 과정을 쉼 없이 계속하더라고요.
놀 거 다 놀고 할 거 다 하고 이 핑계 저 핑계로 공부에 빠지면서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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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수준이 깊어지고 수행의 수준이 깊어지겠습니까? 다른 나라에 불 교순례를 가면 이렇게 공부하는 모습을 배우고 오면 좋겠습니다.
Q 수행의 단계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문사수 수행에 대해 짚어주시겠습니까?
문사수 수행은 경전 공부의 기본이고 차제입니다. 현대교육에서도 이와 비슷한 과정으로 공부를 시키죠. 그것을 우리는 2,600년 전부터 해왔어요.
『금강경』의 수지독송(受持讀誦) 서사(書寫) 위타인설(爲他人設)이 경 전공부의 기본입니다. 수는 받아들인다, 이해한다는 뜻이고, 지는 지닌 다, 기억한다는 뜻이죠. 독은 읽는다는 뜻이고, 송은 외운다는 뜻이에요. 서사는 쓰는 것이고 위타인설은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주면서 수행에 들 어갑니다. 이것이 문사수 수행입니다.
경과 율과 논은 반드시 스승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점,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얀마에서는 삼장법사, 티베트에서는 게셰라고 해서 보통 10년 ~20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국가 등에서 관리하는 시험과정에 통과해 공인된 분들이 있어요. 그렇게 확실하게 공부하신 분들에게 배워야 합니 다. 간혹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나름대로 해석해서 정확하지 않은 이 야기를 하면 오류가 생기기 쉬워요. 그렇기 때문에 경전에 능통한 바른 스승에게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문(問)입니다.
그 다음 사(思)는 사유수(思惟修)예요. 사유수의 기본은 정확하게 기 억하고 암기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는 것 다음에 기억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금강경』에서 말한 독송입니다. 무슨 행동을 했을 때 어떻게 바른 정지(正知)가 일어나겠어요? 우리도 강원에서 그렇게 공부했습니다. 하루 배우면 다음날 다 외워 야지 외우지 못하면 그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았어요. 한 사람이라도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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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우면 다 외울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외우게 했어요. 티베트에서도 강의 를 듣고 그날그날 외우는 과정을 밟더군요. 그리고 한 강의가 모두 끝나 면 필기시험을 보고 한 권을 모두 외우는 시험을 봐요. 그때 강의를 한 스승과 다른 강원에서 온 강주스님 등 세 분이 심사를 하는데 그 풍경이 재미있어요. 스승들도 책을 갖고 있지 않아요. 다 기억하고 있다는 얘기 죠. 제자가 한 명씩 들어와서 처음부터 쭉 외우면 스승들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한 자가 틀리면 지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더군요.
이렇게 경전 말씀을 훤히 알고 있어야 법문을 할 때도 경전과 논서에 근거를 두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죠. 법문을 듣는 사람도 이해가 안 되 거나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근거를 가지고 질문하거나 따져 물을 수 있으니까 토론도 발전적으로 할 수 있죠. 이처럼 외우고 있어야 길을 걷 다가도 무슨 상황이 벌어졌을 때 부처님 말씀에 비춰서 정확히 알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수(修)는 일체 중생을 위해 법보시하는 것입니다. 위타인설이 죠. 남을 위해 설명하면서 내가 더 철저해집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의 내 용을 차츰차츰 닦아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문승이 정견을 갖춰가는 과정입니다.
Q 듣고 외우고 수행하고 널리 펴는 문사수 수행이 각각 맞물려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요. 이렇게 한 번 생각해봅시다. 나는 듣기만 하겠다고 한다면 다 잊어버리겠죠. 아무 것도 남지 않아요. 제가 강의하고 법문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이 들을 때는 그런가보다 하고는 나중에 시간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몰라요. 다 잊어버려서 매번 처음 듣는 것처럼 해요. 맨날 나이 가 많아서 자꾸 잊어버린다고 하시는데 그럼 저는 젊었을 때는 왜 안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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셨냐고 하죠.
무조건 외우기만 한다는 분들도 있어요. 수행 삼아 외우는 분도 많으 시죠. 그 구절이 무슨 뜻인지 물으면 그건 몰라도 된다면서 외우기만 해 요. 듣고 읽고 이해한 내용을 외워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깊이 사유하 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공부가 돼요. 이 과정이 각 각 따로 떼어놓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남에 게 말을 못하는 거예요. 문사수 수행은 독립된 수행 체계가 아니고 긴밀 하게 연결되어 있는 수행 과정입니다.
Q 신행의 단계를 신해행증으로도 설명하는데요.
문사수는 경전을 공부하는 과정이고 신해행증은 실제 수행의 단계입 니다. 문사수의 수에 해당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믿음만을 강조하신 적이 없어요.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죠. 브라흐만교나 신을 믿는 종교들은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믿기만 하면 브라흐만이나 어떤 신이 모든 것을 해줄 것이라고 하죠. 하지만 부처님은 믿음만으로는 해탈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화엄경』에서 신해행증을 제시했는데요.
『화엄경』에서는 수행의 단계 를 53개로 설명했어요. 여기에서 가장 첫 번째 단계가 열 가지 믿음입니 다. 하지만 믿음만 있고 뒤에 이해가 없다면 미신이 됩니다. 믿음이 있고 이해가 있지만 실행이 없다면 그것은 공론이 되죠. 즉 믿음이 있고 이해 가 있고 실행이 있어야 깨달음이라고 하는 체험이 옵니다. 증득이란 체 험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는 뜻이죠. 이것이 신해행증입니다.
여기에서 믿음도 전제가 있습니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그것은 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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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옵니다. 듣고 이해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전을 공부하지 않 고,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집값이 얼마나 올라가고 주식이 어떻게 올라가는지에 대해서는 무식해도 괜찮 아요. 하지만 부처님 말씀에 무식하면 안 돼요.
믿되 무엇을 믿으라 했나요? 부처님께서는 당신도 믿지 말라고 했어요. 교주로 만들어 신격화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러면 무엇을 믿으라는 것일 까요? 당신이 이야기한 방법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 방법도 무조건 절 대적으로 믿지 말고 스스로 검증해보고 믿으라고 했어요. 그렇게 해서 번 뇌가 다한다는 것을 확신한 다음 믿으라고 한 것입니다.
Q 일반적으로 신을 상정한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과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겠군요.
종교를 영어로는 relig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매듭 짓는다는 의미예요. 종교라고 할 때 우리의 개념으로는 ‘으뜸 되는 가르침’이지만 서양의 개념으로는 처음부터 신을 상정하고 있어요. 절대 가 있고 그 절대자가 다 해줄 것이며 우리는 우러러 받드는 관계입니다. 하지만 불교는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믿죠. 우리가 믿는 부처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번뇌 를 다하고 욕심이 다하고 그래서 윤회의 고리를 끊어버린 성자입니다. 이 처럼 위대한 성자로서 부처님을 믿고 그 분의 가르침을 따라 실행하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신해행증을 줄여서 신행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을 믿기만 하면 극락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불교를 믿기만 해도 극락 간다고 하지 않았죠. 믿고 이해하고 실제로 그렇게 행하면 극락이 된다는 것이 부처 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 복을 준다거나 믿기만 하면 된다는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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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는 어디에도 없어요. 믿음과 함께 이해하고 행하는 것이 반드시 같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수천 수억 원이 넘는 가치를 지니고 있는 부처님 말씀을 우리 는 지금 백 원짜리도 안 되는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서 쓰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아무런 도움이 안 되죠.
부처님은 깨달으신 분이며 누구나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신 분입니다. 그렇게 해탈하게 되는 이치를 설해주셨으니 우리는 그 가 르침을 이해하고 실행해야죠. 그것이 부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보시도, 계율도, 인욕도, 정진도, 그것이 위대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복이 되니까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자신의 수행으로서 해나가는 것입 니다. 그렇게 꾸준히 해나가면 반드시 체험의 단계가 옵니다.
그렇게 차근차근 해야 하는 수행의 단계를 무시하고 졸지에 깨달아 버린다고 하면서 공부도 하지 않고 계율도 지키지 않는 건 허망하기 이 를 데 없는 일입니다. 깨닫는 것이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쉽다면서 술 이나 먹고 비틀거리며 흥청망청 살면 코가 만져지는 게 아니라 코가 깨 집니다. 자량수행을 차근차근 닦지 않으면 반야 지혜와 깊은 선정의 깨 달음은 불가능한 거예요.
Q 계정혜 삼학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세요.
현재 초전법륜의 비구계와 재가자의 팔경계가 가장 잘 유지되고 있는 나라가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 남방불교국가이고 북방불교국가인 베 트남도 이러한 전통이 잘 유지되고 있어요. 그리고 보살계와 금강승계가 잘 유지되고 있는 나라는 티베트입니다.
계정혜 삼학에서 계(戒)는 신구의 삼업을 통해 거칠어진 말과 행동과 생각이 나오는 것을 일단 외적으로 스톱시키는 것입니다. 경전에 보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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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마치 전쟁터에 나갈 때 갑옷이나 투구와 같다고 했어요. 화살이 날 아오는 것을 막아 다치지 않게 방어하는 것처럼 계는 외부로부터 침노하 는 고통을 방어할 수 있게 해줍니다. 자신을 보호해줍니다.
살생을 하면 내 생명이 단축되고 도둑질을 하면 내 것을 빼앗기고 가난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 가정을 지키고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횡액을 막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계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계율은 구속이나 억압이 아니라 내가 고통스러워지고 불행해지는 것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계율을 지키지 못하면 수행을 하는 데 있어 서도 성취하기가 어려워요.
재가자가 지켜야 할 계율은 8계이고 이것을 줄여서 반드시 지키도록 한 것이 살생, 도둑질, 사음, 거짓말, 음주를 금하는 5계입니다. 그리고 출 가하여 20세가 되기 전, 비구계를 받기 전에는 사미계와 사미니계를 받 죠. 살생, 도둑질, 사음, 망어, 기어, 양설, 악구, 탐욕, 진애, 치심, 이렇게 열 가지입니다. 그리고 정식 승려가 되는 비구계 250계와 비구니계 348 계를 받습니다. 여기에 대승보살의 계율로서 48계의 보살계가 있고 밀교 에서는 금강승계를 받습니다.
우바새 우바이계, 사미 사미니계, 비구 비구니계, 보살계, 밀교계, 이처럼 단계마다 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고 단계마다 주어진 계율을 지켜야 깨진 그릇이 되지 않겠죠.
그런데 계가 갖춰지더라도 마음속에는 번뇌가 바로 멈춰지지 않습니 다. 아무리 바깥으로 번잡한 생활을 하지 않고 반듯하게 살더라도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까지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잖아요. 이처럼 왔다 갔 다 하는 마음을 일념으로 집중시키면서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 정(定)입 니다. 사람은 마음속과 바깥의 경계가 다르기 때문에 복잡하죠. 계율을 잘 지키면 많이 안정되기는 하지만 마음속 번뇌 망상까지 끊어내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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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아요. 그래서 마음속까지 깨끗하게 하려면 선정을 닦아야 합니다.
그리고 계와 정을 통해 혜를 완성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수행이자 수레의 바퀴처럼 함께 연결되고 같이 굴러가는 수행 입니다. 계정혜 삼학을 닦을 때도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은 정견입니다. 정 견이 전제되지 않으면 선정을 해도 삿된 선정을 하기 쉽고 계율도 삿된 짓을 하기가 쉬워요.
정견으로 자신의 언행이 무엇이 잘못됐는지 잘 알고 계를 잘 지키고 집중 상태가 되어 나를 중심으로 왔다 갔다 헤매는 모습이 없어져 이러 한 상태가 오랫동안 유지되면 어느 순간 탁, 하고 깨지는 때가 옵니다. 이것이 지혜가 완성되는 때입니다. 정견과 선정으로 관찰해보면 아닌 것 을 바로 알죠. 그것이 금강반야입니다. 위파사나 수행을 하면 번뇌를 순 간적으로 깨버리기 때문에 벼락이 치듯이 번뇌가 순간적으로 깨진다는 의미에서 금강반야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품는 가장 큰 반야라는 의미 에서 마하반야라고도 하죠. 온갖 번뇌를 순식간에 완전히 모두 다 안다 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마음속에 있는 번뇌들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게 만들어나가는 것이 계정혜 삼학입니다. 정혜쌍수라고 하죠. 송광사의 옛 이름이 수선 사, 정혜사인데 여기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정혜쌍수에서 계는 빠져있어 요. 계는 이미 갖춰져 있다고 보고 정과 혜, 사마타와 위파사나를 함께 닦으라고 한 것입니다.
팔정도, 육바라밀 등 모든 수행의 중심축은 계정혜 삼학입니다. 이것 은 모두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만 선택해서 하는 것은 안 됩니 다. 정혜등지(定慧等持)입니다. 선정만 닦으면 어두워지고 혜만 닦으면 가볍게 움직여서 쉽게 흔들립니다. 상호 보완의 관계죠. 그래서 쌍차쌍조 (雙遮雙照)라고 했어요. 선정만 닦아 어두워지는 부작용을 지혜가 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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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 지혜만 닦아 산만해지고 지식의 경계에 머무는 것을 선정이 막아줍 니다. 수레의 두 바퀴이자 새의 양 날개와 같아요.
전등을 켰을 때 따뜻함과 밝음이 같이 있죠. 지혜와 자비도 그렇습니 다. 자비심이 없으면 진정한 지혜가 있을 수 없고 지혜가 없어도 진정한 자비심이 아니에요. 지혜는 있는데 자비가 없다면 냉혈한이 될 테고 자비 는 있는데 지혜가 없다면 그저 징징 울고만 다니지 아무 것도 하지 못해 요.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정확하게 알고 그러면서도 눈물로 아픔 을 같이 하고 웃음으로 즐거움을 같이 하는 힘이 나오죠.
부처님께서는 모든 수행에 대하여 법수로서 단계를 설명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순서를 나눠서 설명한 이유가 다 있어요. 생각나는 대로 말 씀하신 것이 아니고 아주 치밀하게 조직적으로 차례를 제시한 것입니다. 팔정도, 육바라밀이 다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하나하나 차례대로 밟아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거예요.
Q 오늘의 우리 불자들이 신행 생활하는 데 있어서 보완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저는 보완하는 수준이 아니라 싹 갈아엎어야 한다고 봅니다. 흔히 기 복불교라고 하는데요. 이 말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말이에요. 복을 비 는 불교란 있을 수 없어요. 물론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지려고 하지만 행 복은 빌어서 오는 것이 아니에요.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세속적인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게 될 때 진정한 불 교가 성립됩니다.
종교성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산신, 용왕, 이런 것에 의지하는 것에서 는 탈피해야 합니다. 설사 너무나 아프고 힘겨워서 부처님께 기대고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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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더라도 그 수준을 높여주고 해탈하는 길 을 찾을 수 있도록 애를 쓰는 게 진정한 불교이고 수행자의 자세이지요. 고단한 사람들의 마음을 따라가기만 하고 혹은 이용하거나 악용하면 절 대 안 될 일입니다.
그리고 불자라면 누구에게 의지하거나 도움을 바라기만 할 것이 아 니라 스스로 찾고 스스로 닦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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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기본 교리
- 삼법인, 사성제, 연기와 인과
Q 불교의 기본 교리 가운데 삼법인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법이란 모든 존재의 핵심이자 변함없는 사실이라는 뜻이고 인이란 도 장이라는 의미이니 불변을 뜻합니다. 법인이란 모든 존재의 변함없는 사 실, 핵심적인 진리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부처님은 이 세상에 영원한 것도 없고 변함없는 것도 없다고 했는데 변함없는 진리가 있다는 것은 모순 아니냐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모든 것은 실체가 없이 변한다 는 이 사실만 변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그 원리만 변함이 없죠.
삼법인의 첫 번째는 제행무상입니다. 무상하다고 하면 우선 허망하다 고 받아들이지만 그냥 객관적인 사실 그대로, 이 세상에는 영원한 존재 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과학, 종교, 철학 등 그 어떤 영 역에서도 영원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했어요. 무상은 현재까 지 옳고 앞으로도 변함없는 진리일 거예요.
두 번째는 제법무아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영원한 자성을 갖 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창조주가 됐건 아가 됐건 자연이 됐건 우주가 됐건 그 어떤 것도 영원히 변치 않는 자성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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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과 무아는 근본으로 보면 같은 말입니다. 무상은 현상계의 변화 를 설명하는 것이고 무아는 존재 가운데 절대적인 자성이 없음을 밝힌 것 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영원한 자성이 없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깨치고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머무르지 않는 것이 열반적정입니다. 니르바나, 즉 열반이란 바람이 그친 상태입니다. 적정이란 고요해졌다는 말이죠.
번뇌가 잦아들어 고요해졌다는 것은 아트만이 있거나 영혼이 있어서 어디 저 먼 하늘나라로 가서 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집착했던 것 으로부터 벗어나 편안하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던 것이 바람이 잦아들면 바다가 잔잔해지는 것과 같이 마음에 동요가 없이 평온해진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해인삼매라고 했어요.
이 세 가지 원칙은 우주가 존재하고 생명이 존재하는 한 변함이 없습 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것에도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애착하지 않아 서 착각에 의해 발생하는 고통을 버리는 것이 열반입니다. 열반적정 이외 에 다른 것으로는 행복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Q 그럼 일체개고라는 가르침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일체개고라는 가르침을 포함하여 사법인이라고도 합니다만, 이 세상 의 고통이 변함없는 것은 아니니까 삼법인에서는 제외되는 게 맞습니다. 우리의 삶을 보면 반은 좋고 반은 고통스럽습니다. 윤회하는 것이 고이 기는 하죠. 하지만 열반이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고 자체가 변함없다 고 할 수는 없어요.
물론 고라고 인식하는 것이 수행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제조 건이기는 합니다.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과 노력은 고에서부터 시작합니 다.
하지만 절대 변함이 없다면 공부할 필요가 없어지죠. 고를 관찰해야 고로부터 벗어나는 수행의 과정이 이어지니까 고를 인식하는 것은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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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변함없는 진리를 가리키는 법인에 고가 들어가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Q 고통에 대해 인식해야 고통에서부터 벗어날 길을 찾게 된다는 말씀 이군요.
아파야 병원을 가죠. 잘 먹고 잘 살고 편안하면 공부할 사람 별로 없 을 거예요. 지상낙원이라고 생각하며 살다가도 이것이 끝날 때가 있고 반대의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공부할 마음을 일으키 지 않겠어요?
Q 인도의 사상적 흐름에서 등장하는 개념이 아트만이고, 무아는 바로 이러한 아트만을 부정하는 거잖아요. 아트만의 개념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기원전 1300년 경, 지금의 이란인, 아리아인들이 히말라야를 넘어 인 도를 침략하면서 지배논리로 내세운 종교가 브라흐만교입니다. 이들은 신분을 네 개의 계급으로 철저하게 나눴죠. 가장 높은 위치가 지배계급으 로서 사제인 브라만이고 그 밑으로 왕족 크샤트리아, 평민 바이샤, 노예 수드라인데 실제로는 5천 개가 넘는 계급으로 나눴다고 합니다. 이러한 계급제도는 지금까지도 존속되고 있지요. 이러한 사상이 부처님 바로 직 전인 기원전 800년 정도까지 이어져 왔어요.
여기에서는 우리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다고 설명하느냐 하면 하늘 에서 신의 일부분이 떨어져 내려와 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아트만 이에요. 신의 한 부분이라는 거죠. 이러한 철학이 우파니샤드 철학입니 다. 이 아트만이 나를 만들었는데 나라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타락한 것으로 보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고행이나 선정을 통해 정화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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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죠. 그렇게 아트만이 신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윤회 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아트만의 원천인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 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그러한 윤회는 없다고 하셨어요. 브라흐만교에서 말하는 아트만으로 다시 돌아가는 윤회가 없다고 한 거예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윤회는 다른 차원의 윤회입니다.
Q 부처님께서 그러한 윤회가 없다고 하신 것은 영원불변한 고정된 실체 로서의 아트만을 부정한 것이군요.
그들이 말하는 윤회란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영원불변한 아트만이 내 몸에서도 아무 변화 없이 있고 사는 동안 아트만이 모든 것을 다 알 아채고 주재하다가 죽으면 브라흐만천으로 올라간다는 것이에요. 여기 에서 핵심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아트만이 있다는 거죠. 하늘에서 신으 로부터 떨어져 나올 때부터 사는 동안 내 안에서도, 그리고 죽어서 다시 하늘에 올라갈 때도 내내 변하지 않는 아트만이라고 하는 실체가 있다 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증명할 수도 없고 그러한 것은 있지도 않 다고 하셨어요. 그것이 무아입니다.
Q 아트만을 믿는 것과 무아를 믿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아트만을 믿어서 나라는 것이 있고 그것은 변하지 않으며 언젠가 저 천상에 태어날 것이라고 믿는다면 두 가지 집착이 일어나죠. 무언가가 있 다고 생각하면 집착하게 되잖아요. 현재 살아가고 있는 나에 대해 집착 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잘 살아야 되니까 잘 살기 위한 이기심이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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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시작하죠.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나는 거예요. 살아서는 나를 둘러싼 욕망적 집착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죽은 뒤에는 천상에 태어나고자 집착 합니다. 천상에 태어나지 못할까봐 불안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살아서도 죽어서도 창조주나 신에게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집착을 포기하는 것이 불교수행입니다.
실재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집착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집착했 던 것이 사라질 때 고통이 오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관찰하고 이해하 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변화해서 살 것인가 생각하게 되고 결국 수행이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죠.
Q 무아사상을 이해하면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말씀인데요.
집착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그 집착했던 것들이 하나둘 사라질 때 나 에게 오는 고통을 어떻게 합니까?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취하 려고 하니까 고통이 오고 머무르니까 고통이 오고 사라지니까 고통이 오는 거예요. 내 몸부터가 그렇잖아요. 늙고 아프고 쇠퇴해가잖아요. 자 성이 없어서 그렇죠. 인간이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안에 어떤 것 을 찾아보더라도 영원한 자체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은 없어요. 그렇기 때 문에 인연의 모습으로 계속해서 바뀌어가는 것입니다.
Q 그것이 바로 연기사상이지요?
부처님께서는 연기를 5지 연기, 7지 연기, 9지 연기, 12지 연기 등으로 설명하셨는데요. 이것은 인간을 중심으로, 생명을 중심으로 설명한 거예 요. 이러한 5지 연기부터 12지 연기에는 우주의 연기 법칙은 포함돼 있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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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법을 이야기할 때 전제가 되는 사실은 독자적인 존재가 없다는 거죠.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존재하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존재합 니다.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지고 저것이 사라지면 이것도 사라집 니다. 이것이 연기 법칙의 기본입니다.
자식이 있기 때문에 부모가 있고 부모 없는 자식도 존재하지 않아요. 모든 존재는 상대적으로 존재할 뿐 절대적인 존재는 없습니다. 물이라는 존재를 봐도 우주 최초의 물질인 H(수소)와 O(산소)가 합해져서 물이 되 죠. 물이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수소와 산소가 결합해서 된 것과 같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의지해서 서로 존재하지 독자적인 존재 는 아무 것도 없어요.
Q 우리도 지금 이렇게 존재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흩어진다는 말씀이네요.
흩어지죠. 저는 화장장에서 우리 존재가 흩어지는 것을 아주 격렬하게 느낍니다. 죽음 앞에서 지수화풍 사대의 육신과 정신이 흩어지는 모습을 여실히 보잖아요. 우주의 행성이나 별도 나중에 백색왜성이 되어 우주의 먼지로 다 흩어집니다. 우주도 성주괴공하여 영원한 것이 단 하나도 없 어요. 제임스 웹 망원경이나 허블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찰하는 것을 보 니 어마어마한 은하가 수십억 년에 걸쳐 생겨나고 합쳐지고 해체되는 과 정을 그대로 보여주더군요. 은하도 예외 없이 나고 흩어지고 소멸하기를 반복합니다.
우주도 은하와 은하 사이, 행성과 행성 사이, 별과 별 사이의 거리가 전부 멀어지고 있다고 해요. 멀어지는 것은 우리 생명체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늙어가는 것도 세포와 세포가 헐거워지고 무너지는 것이거든요. 뼈도 듬성듬성해지고 근육도 헐렁해지죠. 늙어간다는 것은 세포와 세포 가 엉성해진다는 얘기예요. 지수화풍으로 차차 해체되어간다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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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절대적 자성이 있어서 생성되고 해체되는 것이 아니고 전부 변화하는 한 과정으로서의 모습입니다. 거듭 생성됐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이 연기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과학에서도 증명되고 있죠. 영원한 실체가 없 다는 사실은 물리학, 양자역학 등에서 이미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관계성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이 연기법입니다. 지금과 같은 과학의 시 대에 같이 할 수 있는 종교는 불교밖에 없어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공 성과 연기법은 이렇게 우주적인 진리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Q 연기법을 달리 표현하면 인과법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연기의 공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과법이 됩니다. 우리는 인과법을 편중되게 이해하는 경향이 있어요. 인간은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마음이 라는 것이 발생하고 그 마음의 작용에 의해 원인이 되고 조건이 되어 행 동을 하게 되어 결과를 낳게 되죠. 악한 마음을 먹으면 악한 원인이 일어 나고 악한 조건들을 만나면서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오는 그러한 과정 을 설명하는 것이 도덕적 인과법이지만 그것만 이야기하면 이해의 폭이 협량해집니다. 선하고 악한 도덕적인 인과에 국한하지 말고 인과법을 폭 넓게 봐야 합니다.
원인과 조건에 의해 결과가 나오지 원인과 조건이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죠. 콩을 하나 심더라도 씨앗이라는 원인이 있고, 땅이 있고 물이 있고 햇빛도 있고 공기도 있고 그렇게 조건이 갖춰지면 콩이 열리잖아요. 세상 만물 그 무엇도 원인과 조건에 따른 결과이지 원인과 조건에서 벗어 난 결과는 없어요. 콩을 심어놓고 기도를 한다고 팥이 되지는 않잖아요.
우주도 은하가 60억 개가 넘는다고 하지만 가장 처음에는 빅뱅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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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는 폭발에 의해 여러 에너지가 분출하면서 수소가 발생하고 수많 은 물질들이 발생했죠. 우주의 발생도 원인과 조건에 의해 되는 것이고 우리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것도 만나는 원인과 연결되는 조건에 의 해 결과가 나오죠.
원인과 조건에 의해 결과가 나오고 그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어 다른 조건을 만나 다시 결과가 되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인과이고 윤회입니다.
Q 그런데 인과를 두렵게 바라보게 되는 이유는 왜일까요?
저는 인과법이 아니라면 그것이 훨씬 더 두려울 것 같아요. 내가 무엇 을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왜 나쁜 과보를 받는지도 알 수 없다면 그것이 더 답답하고 괴로운 일 아닌가요? 내가 무엇을 잘 했는지도 모르고 잘 한 것도 없는데 천상에 가거나 벼락부자가 된다면 그것도 맞지 않잖아 요. 그러면 오히려 불안하지 않을까요? 인과법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실제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죠. 만약에 부처님만 믿고 자신은 변하지 않는다면, 예수님만 믿고 자신은 바뀌지 않는다면 어떻게 좋은 결과가 올 수 있겠 어요? 절대 안 되는 일이죠. 이러이러한 마음이라는 원인을 내고 이러이 러한 조건들을 더하면 이러이러한 좋은 결과가 올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희망을 갖게 되는 것 아닌가요?
수행이란 ‘내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인과론은 숙명 론이 아닙니다. 전생에 지었던 것을 지금 받는 것이 숙명론 아니냐고 하 는데요. 지금 그것을 받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엉망이 되겠죠. 내가 지금 받는 것도 그것을 어떤 태도로 받고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과거의 인과가 줄기도 하고 확대되기도 합니다. 전생에 도둑질을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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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사람이 이생에 와서 또 도둑질을 하면 문제가 커지겠지만 지금부터라 도 도둑질을 하지 않고 바르게 살면 앞으로는 달라지는 거죠.
인과는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인과의 법칙 만큼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변화시킬 수 있는 원리는 없어요.
Q 불교의 핵심 교리인 사성제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사성제는 대소승을 막론하고 가장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의사가 환자 를 볼 때 현재 어떤 통증으로 괴로워하고 있는지를 보고 그것이 무엇 때 문인지 자세히 검사를 한 다음 그것을 어떻게 해소시킬지 판단하고 조치 를 취하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태어나면 안 죽어야 하는데 죽고, 젊었으면 안 늙어야 하는데 늙고, 가졌으면 안 잃어야 하는데 잃죠. 그것이 고통인데 중생들은 모두 이러 한 고통을 받고 있어요. 이것이 윤회하는 고통입니다. 이러한 고통에 대 해 깊이 인식하는 것이 고성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이 무엇 때문에 발생하는가 밝히는 것이 집성제입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살피고 파악 하는 거죠.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고통이 나으면 어떤 상태가 되는가, 니르 바나의 상태가 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 멸성제이고, 니르바나에 도달하는 방법, 고통이 사라지는 방법을 밝힌 것이 도성제입니다.
중생이라는 환자가 고통이라는 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고제이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진단하는 것이 집제이며, 병이 다 나았을 때는 어떤 상태인지 밝히는 것이 멸제이고, 낫게 하는 방법을 찾은 것이 도제입니다. 사성제는 초전법륜에서부터 대승과 선종 등 모든 불교에 일 관하는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인식 체계를 바탕으로 해야 우리가 수행하 는 데 있어서 옆길로 새지 않고 바르게 갈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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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저마다 고통스러운 일들이 있을 텐데요.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 엇일까요?
근원적으로 보면 고통은 아에 대한 착각에서 생깁니다. 영원한 것이 있다고 착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영원히 살아야 되겠다고 착각하는 것이 고통의 가장 큰 원인이 되죠.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모르기 때문 입니다. 그것이 무명입니다. 아트만이라고 하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다 고 생각하고 그래서 죽은 뒤에 제석천에 태어나기를 바라죠. 그렇게 알 고 살아생전에 고행을 한들 그것이 사실이 아니면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 까? 부처님께서는 죽은 뒤의 존재에 대해 애착하는 것을 무유애라고 하 셨어요. 그것조차 끊으라고 하셨죠.
살아서의 애착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죠. 나라는 것이 영원하다고 착 각하고 있으니까 나는 잘 살아야 되고 돈이 많아야 되고 더 좋은 것을 가져야 되고 명성을 갖고 살아야 되고 오래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죠. 그 렇게 나는, 나는, 하면서 살지만 실제 그렇게 되는 경우도 거의 없고 설사 그렇게 되더라도 오래 가지 못하잖아요. 자동차 하나만 생각해봐도 차 를 한 대 사더라도 그것을 운행하기 위해서는 여러 비용과 노력이 들어 가지만 10년, 20년 되면 못 쓰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차에 대해 집착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이와 같이 아가 강하고 집착을 하면 할수록 고는 더 심하게 일어납니 다. 내가 있다는 착각에 의해서 집착하는 것인데 집착을 계속 하게 되면 어떤 것이든지 영원하기를 바라게 되고 착각하게 되죠.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스럽고 고통스러워서 다시 더 집착하고, 반복됩니다. 이것을 보면 빈 다고 해서 고통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절대자가 있어서 고통을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고통의 해결방법을 고민하고 찾아내다 보니 이웃 종교에서는 절대자를 믿고 의지하면 된다고 이야기하지만 불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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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지 않습니까? 절대자를 믿고 의지하여 된다면 실제로 살아있을 때 는 아무 것도 해결이 안 되죠. 돌아간 후에 해결된다고 하지만 그것이 됐 는지 안 됐는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런 점에서 불교는 지금 살아있을 때 고통을 해결할 수 있고 그것은 바로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이에요. 불교는 가장 실질적이 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죽은 뒤의 문제는 중요하게 생각하 지 않죠.
Q 고통을 없애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철저히 알아야 합니다. 영원한 것이 없다는 사실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는 것도 알아야 해 요. 무아와 무상과 공성을 알아야 합니다.
Q 구체적인 실천법이 바로 팔정도이지요?
초전법륜에서 도성제로 제시된 것이 팔정도입니다. 번뇌를 없애는 바 른 길로서 정견에서부터 시작해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념, 정정진, 정 정입니다. 팔정도에서 첫 번째가 정견입니다. 바른 견해란 부처님과 똑같 은 생각을 가지는 거죠. 그리고 말과 행동을 바르게 가짐으로써 집착과 번뇌를 없앨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Q 인과와 윤회에 대한 말씀도 듣고 싶습니다.
윤회도 간단합니다. 사과나무를 심어서 거름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고 그렇게 잘 가꾸면 사과가 열리잖아요. 씨앗을 심고 가꾸는 과정을 밟아서 결과가 오는 것이 연기법이고 인과법입니다. 그리고 다시 씨를 맺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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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를 심으면 다음 해에 다시 사과가 열리죠. 생물학적으로 이것이 DNA의 연속입니다. 사과씨가 나무를 거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다시 또 씨앗을 맺고 하는 과정에서 새로 달린 사과씨와 그전의 사과씨가 똑같 지는 않죠. DNA가 연속되지만 같은 부분과 다른 부분이 있단 말입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그 안에 뭔가 영원한 것이 있어야 유전되는 것이 아니 냐고 생각하지만 유전공학적으로 보더라도 실체가 없기 때문에 DNA가 섞이면서 이어나가는 거죠. 만약 영원한 실체가 있다면 이어질 수도 없고 변화할 수도 없잖아요. 그것을 부처님께서는 직관으로 아신 것입니다.
따라서 무자성이라야 연기가 되고 윤회가 됩니다. 윤회하는 그 존재 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에요. 전생의 달라이 라마와 이생의 달라이 라마가 같은 분인가요? 다른 분인가요? 같은 분이 아니죠. 그러 나 완전히 다른 분이냐 하면 완전히 다른 분도 아니에요. 전생에 변화한 업력이 이어졌기 때문에 같은 부분이 있지만 업력도 변화하기 때문에 다 른 거죠.
윤회한다고 하면 뭔가 영원한 실체가 있어서 그것이 계속 반복해서 윤회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맞지 않는 이야기예요. 자성이 없기 때문에 윤회하고 자성이 없기 때문에 변화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Q 삼법인, 사성제, 연기와 인과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정리하면,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변화하면서 존재한다, 나라고 하는 존재도 연기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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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칠지공양
불자들이 일상 속에서 닦아야 하는 칠지공양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칠지공양이란 말 그대로 일곱 가지 공양법입니다. 부처님께 공양해야 하는 일곱 가지 내용이자 수행으로서 해야 하는 공양의 순서이기도 합니 다. 우리는 큰 법회 때 육법공양을 올리지요. 우리가 올리는 공양물이 법 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육법공양이라고 하는데요. 육법공양은 칠 지공양의 두 번째에 해당합니다. 칠지공양은 수행에 들어가는 데 있어 기 초적인 바탕이 되게 합니다. 절에서 새벽에 일어나 예불 올리고 사시에 공양 올리고 각종 법회에서 수희찬탄하고 기도하는 모든 의식이 이 일곱 가지 행법입니다.
공양이라는 말을 식사하거나 식사를 대접하는 것으로 좁게 생각하지 만 본래 의미는 부처님을 앞에 모시고 수행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보 면 됩니다.
Q 그렇다면 모든 법회의 시작에서 함께 하는 삼귀의의 의미부터 짚어 볼까요?
살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의 육체는 공기, 물, 음식물, 이런 것에 의지 하죠. 사람이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니까 생명을 유지하고 삶을 영위하는 데에는 의지하는 대상이 있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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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불자들은 무엇을 의지해서 살까요? 그것이 삼귀의입니다. 스 승, 스승이 가르치신 법, 그리고 그 법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해나 가는 예비스승들, 우리는 이렇게 세 가지 보배에 의지합니다. 귀중하기 때문에 보배라고 하는 거죠. 여기서 귀의란 돌아가서 의지한다는 뜻입니 다. 돌아가서 의지한다는 것은 그동안에는 이것에 의지하지 않았다가 다 시 돌아와서 의지한다는 의미죠. 가던 방향에서 뒤로 돌아 다시 원위치 로 와서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스승에 의지한다고 했을 때 가르침 하나 없이 오로지 스승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면 미신이 되기 쉬워요. 스승에게 무조건적으 로 의지하면 신처럼 믿게 되니까요. 그러므로 스승을 의지하는 바탕에는 그 분의 가르침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근본 스승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 은 경전으로 충분히 설명되어 있고 여러 선지식들이 여러 논전에서 부처 님의 말씀을 주석해놓았습니다. 이러한 경전과 논전을 공부해 해탈할 수 있는 방법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알고 이해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에 의지해야 하죠. 다른 것에 의지하면 안 됩니다. 불법 외의 다른 학문은 모두 참고사항이죠. 그래서 외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닦아 해탈할 수 있는 길의 핵심은 정확한 부처님 말씀과 해석 서에 의지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을 해인사에 잘 모셔 놓기 만 하면 안 돼요. 부처님 말씀은 우리들의 정신적 귀의처입니다. 불보와 법보에 대한 귀의가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불법승 삼보의 승을 의지함에 있어서는 아직 예비 수행자이거나 견도 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의지처가 될 수 없습니다. 일정 정도 이상에 오 른 사람을 의지해서 같이 공부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오래 전에 열반 하셨으니까 지금 공부하고 계신 이 분들이 우리를 이끌어주는 실질적인 스승이 되는 거죠. 스승은 법으로 이끌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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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의지하는 것은 법과 스승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의식에서 제일 첫 번째로 삼귀의를 하는 것입니다. 삼귀 의를 등한시하면 큰 일 납니다.
Q 법회의 마지막에는 사홍서원을 올리죠. 그 뜻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우선 서원과 소원을 구분해야 합니다. 새해 첫날 일출을 보면서 해를 바라보고 비는 것, 그것은 소원이죠. 절에서 등을 달고 공양물을 올리면 서 쓰는 것도 소원지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바를 비는 것은 소원입니다. 그에 반해 서원은 반드시 보리심이 작동되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원 을 내지 않고 일체 중생을 위해서 원을 내는 것이 서원입니다.
서원을 할 때 출발점이 되는 것은 참회입니다. 그동안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잘못을 알고 참회할 때는 ‘앞으로 하지 않겠습니다’ 이것만 있 으면 됩니다. 참회한 다음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따라야 합니다. 즉 다시는 이기적으로 살지 않고 이타적으로 살겠다고 마음을 내는 것이 발원이에요. 서원, 발원, 원력, 다 같은 의미인데 그 안 에는 반드시 이타적인 보리심이 작동되어야 합니다.
사홍서원은 네 가지의 크고 기본적인 원력입니다. 부처님 앞에서 이렇 게 살겠다고 다짐하고 약속하는 거죠. 앞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에요. 이 사홍서원을 바탕으로 아미타 부처님의 48대원이 나오고 관세 음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의 서원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홍서원의 첫 번째 서원은 중생무변서원도입니다. 첫 번째이니까 모 든 서원의 기본 바탕이고 제일 중요하다는 의미겠죠. 즉 중생을 모두 건 지겠다는 것입니다. 중생을 다 건지겠다는 원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 어 떤 신행도 바르게 이어질 수 없어요. 번뇌를 끊는 것도 그 다음이에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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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을 위하겠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번뇌를 끊어야 되는 당위성이 나옵 니다. 그리고 이렇게 중생을 건지고 번뇌를 끊기 위해서는 스승의 법문을 들어야 합니다. 공부해나가는 문사수 수행이 있어야 하죠. 그래서 끝이 없도록 법문을 모두 듣겠다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 알았다, 이만 하면 되었다, 하는 순간 수행은 잘못되는 것입니다. 법아가 생기면 더 이 상의 진전은 없어요. 중생을 건지겠다는 서원, 번뇌를 끊겠다는 서원, 법 문을 배우겠다는 서원,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에 성불하겠다고 서원합니 다. 성불이 맨 마지막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성불이 가장 앞이죠. 성불을 빨리 하려고 법문도 안 듣고 중생구제도 안 하는 이것이 지금 우리 불교 의 모순이에요.
중생을 건지겠다는 발원이 있어야 공부도 하고 수행도 하고 마침내 도를 이루게 되는 거예요. 중생을 건지겠다는 생각이 없으면 번뇌를 끊겠다는 생각이 안 되는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우리 절의 신도님 한 분이 자녀도 모두 결혼해서 분가하고 남편도 돌아가시고 나니 밥을 할 힘이 하나도 없다고 하시더 군요. 가족이 있었으니까 부지런히 시장도 보고 요리도 하고 그러셨겠죠. 가족의 힘이 이렇게 크다는 걸 알았다고 하시면서 가족 때문에 귀찮고 번거롭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주 게을러져버렸다고 말씀하셨어요. 중생을 건지겠다는 그 힘이 발동되어야 번뇌를 끊어야겠다는 힘이 나오 고 법문을 듣고 공부를 하겠다는 힘이 나오는 법입니다.
불자라면 다른 것에 의지하면 안 됩니다. 반드시 삼귀의에 의지해야 해요. 그리고 그동안의 잘못된 삶의 방식을 참회하고 이제부터는 다르게 살겠다고 아주 단호하게 결심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홍서원입니다. 원력 이 커질수록 부처님법을 공부해나가는 이익이 커지고 중생에게도 이익이 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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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런데 칠지공양이라는 개념은 조금 낯설게 다가옵니다.
한국불교나 중국불교에서는 칠지공양이라고 따로 정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동안 이런 공양을 다 해왔어요. 절에 시주하고 부처님 과 스님들께 공양 올리는 것을 하고 있잖아요. 다만 이러한 공양만으로 는 법과 나의 수행이 연결이 잘 안 됩니다. 자칫 잘못하면 기복으로 흐르 기가 쉽거든요.
칠지공양은 절 안에서도 일상적으로 해야 하지만 가정에서도 불단을 모시고 일상적으로 하는 게 좋습니다. 다른 나라의 불자들은 아침에 향 올리고 촛불 올리고 꽃 올리고 다 하거든요. 그러한 것을 일상에서 하지 않으면서 불자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죠. 행동하는 신행이 없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생각만으로는 아무런 힘도 없고 능력도 생길 수 없어요. 칠지공양은 일상생활 속에서 반드시 습관적으로 행해야 되는 수행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Q 칠지 공양의 첫 번째는 무엇인가요?
칠지공양의 첫 번째는 예경입니다. 우리가 조석예불이라고 하는 것, 그것입니다. 모든 스승들께 예경하는 것입니다. 절에서는 물론이고 재가 자들도 아침에 한 번은 꼭 예경을 올려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숭유배불을 거치면서 집에 불상 모시는 것을 금 기시하고 꺼리는 경향이 생겼죠. 집에 불상을 모시면 귀신이 붙는다는 등 부담스럽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불교국가 어디에도, 전 세계 불자들 가운데 불단을 모시지 않는 가정이 있는지 한 번 보세요. 우 리만 500년 동안 탄압당하면서 이상하게 변질된 거예요.
예경을 하는 것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밑바탕입니다. 불법승 삼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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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존경 없이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습니까? 매일 아침 부모님께 문 안 인사를 올리는 것처럼 불법승 삼보께 인사를 올린다고 생각하면 됩니 다. 세속에서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지심귀명례, 지극한 마음으로 예를 올 립니다, 삼계의 도사이시고 사생의 자부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절합니 다, 목표점이 어디에 있는지 보세요. 존경하지 않는 스승을 어떻게 따라 가겠어요? 부모나 학교 선생님도 존경하지 않으면 따르기가 쉽지 않잖 아요. 존경하는 마음이 우러나야 그 말씀을 배우고 따를 마음이 나겠죠.
예경은 스승과 가까워지기 위한 나의 노력입니다. 스승과 멀어지지 않기 위한 노력이죠. 그렇기 때문에 아침에 스승에게 차를 한 잔 올리고 불을 밝혀드리고 향을 올리면서 아침 인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당신을 존경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요?
Q 칠지공양의 두 번째 공양은 무엇일까요?
우리나라에서 육법 공양이라고 해서 올리는 공양물들이 있죠. 이와 같이 예경할 때 초, 향, 차 등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처님 께 사시에 공양을 올리죠. 부처님께서는 하루에 한 끼만 잡수셨고 일종 식이라고 해서 한 가지 종류밖에 안 드셨기 때문에 사시에 쌀 또는 쌀밥 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구들에게 올리는 공양물은 27개입니다. 가사, 발우, 좌복, 약, 그리고 생활하는 데 필요한 물품들입니다. 공양 올리는 의식 자체가 절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양하는 것입니다. 불교 전통에서는 스님들이 재 물을 소유할 수 없고 이익을 위해 직업을 갖거나 장사를 할 수 없기 때문 에 재가자들이 이러한 공양물을 올리는 거예요. 이것이 공양입니다. 쌀 은 물론이고 과일, 간식, 양말, 신발, 이런 것까지 모두 공양 올리는 것입 니다. 이러한 공양의 전통은 선방에서 잘 유지되고 있죠. 이와 같이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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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있지 않게 적절하게 공양 올려드 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승들이 공부하는 데 전력할 수 있고 우리의 수행을 바르게 이끌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공양을 형식이나 허례허식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공양은 사찰에 경제 적 공급을 해드리는 것이며 법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갈 수 있게 실질적으로 돕는 것입니다.
Q 세 번째 공양은 무엇인가요?
참회가 세 번째 공양입니다. 스승 앞에서는 언제든지 거울을 보는 것 과 같이 내가 잘못 살고 있는 부분을 정확하게 들여다봐야 합니다. 우리 가 잘못 살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승려들도 재가자들도 다들 자기가 최고라고 하는 거예요. 법거량 한다고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죠. 그것 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에요. 자신을 성찰하고 잘못을 인지하고 정확하게 참회하지 않으면 수행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부분은 백팔참회와 같이 부처님 명 호를 외우면서 하는 것은 참회문이 아니라 예경문입니다. 참회의 기본은 십악참회입니다. 스승 앞에서 거울을 본 듯이 참회하는 것입니다. 어디가 잘못됐는지 보려고 거울을 보듯이 스승이 사는 모습을 보고 내가 잘못 하는 부분을 알아차리고 참회하는 것입니다.
참회하는 것이 공양의 하나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참회하지 않는 제 자에게는 사실상 스승이 가르칠 수도 없고 가르칠 생각도 나지 않아요. 참회한다는 것은 마음을 비우고 깨끗이 한다는 뜻이죠. 그래야 스승의 가르침을 믿고 배우고 따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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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참회 다음, 네 번째 공양은 무엇일까요?
수희입니다. 기쁨으로 따른다는 뜻이죠. 수희찬탄과 수희동참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수희찬탄은 부처님 법에 따라 중생들이 행복해지게 하는 일들에 대 해 기쁜 마음으로 찬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준은 중생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가에 달려 있어요.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을 보 면 항상 기쁜 마음으로 찬탄해야 합니다.
누군가 불사를 하는데 이기적인 이유나 불손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찬탄할 수 없죠. 나쁜 짓을 하면 잘 한다고 할 수 없듯이 불법을 이용해 나쁜 짓을 하는데 찬탄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 진심으로 중생을 위해 좋은 일을 할 때 찬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경쟁의식이 있고 시기 질투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잘 하고 있는 일 앞에서도 기꺼이 칭찬하 는 것이 쉽게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생을 이익 되게 하겠다는 생각이 분명하게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찬탄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수희찬탄에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수희동참이 됩니다. 중생구제를 위 해 하는 훌륭한 일에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겠다는 마음으로 함께 하는 것이 수희동참입니다. 그 일이 잘 될 수 있게 동참하는 거죠. 수희동참과 수희찬탄은 법을 융창하게 하고 스승과 제자 사이에 법 이 유통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희를 공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Q 다섯 번째 공양은 스님께서 평소 강조하는 부분인데요.
맞습니다. 칠지공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청법입니다. 삼귀의에 서 스승과 법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공양에서도 청법이 가장 중요합니 다. 법을 청해야 합니다. 예경을 부지런히 하고 공양을 부지런히 올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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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하고 수희했다고 하더라도 법을 청하지 않으면 그러한 공양은 아무 런 의미가 없어요.
대학에서 입학식을 하고 수업이 없다면, 그래서 4년 내내 놀다가 졸 업장 하나, 자격증 하나만 준다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실력이 없잖아요.
어느 날 달라이 라마께서 인도 남부 데붕이라는 사찰에서 주위의 작 은 암자의 스님들을 불러놓고 각 절에서 지금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물으시더군요. 한 절의 스님이 기도를 하고 있다고 하니까 법문은 누가 하고 있는지 물었어요. 스승이 오지 못해 법문은 듣지 못하고 기도만 하 고 있다고 하니까 달라이 라마께서 그러면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 고요. 법이 이야기되지 않는 기도는 미신이 되기 쉽다는 거죠. 법을 유통 하고 법을 증장시키기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이지 법문을 공부하는 시간이 없는 기도는 의미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크게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법문도, 기도도, 모두 법의 유통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는 거 예요. 제자가 스승을 가장 중히 여기는 것이 법석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 입니다. 스승이 가장 빛날 때가 바른 법을 일러줄 때 아닙니까? 스승이 중생을 가장 위하는 자리가 법의 자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는 스님 을 만나서 차 한 잔 마시고 좋은 이야기 잘 듣고 왔다고 하는데 그것으 로 그치면 안 됩니다. 좋은 법담을 들었다면 그 좋은 이야기를 반드시 남 들과 같이 들을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서 한 명이라도 두 명이라도 더 발 심하게 하고 수행하게 해야 합니다. 이러한 청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가 않으니까 법의 수레바퀴가 굴러가지 않고 전법이 잘 안 되는 거예요.
Q 청법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부처님께서도 깨달음을 성취하고 처음에는 당신이 직접 나서서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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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으라 하면서 가르침을 펴셨어요. 하지만 차츰 제자들이 생기고 계속해 서 법문의 자리가 마련되면서 『금강경』에서 수보리 존자가 일어나 오늘 은 어떤 법을 말씀해 주실 것입니까, 하고 물었죠.
청법에 무슨 복잡한 절차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가자 든 출가자든 할 것 없이 몇 명이 되었든 정기적으로 모여서 공부할 테니 법을 말씀해주십시오, 하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생일이나 결혼식을 할 때 도 한 마디 해달라고 청하면 그것이 청법입니다. 장례식도, 49재도 염불 만 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미얀마에는 삼장법사들이 5천 명이 넘게 계시더군요. 그 분들이 마을 을 돌아가면서 법을 설해주는데요. 신행단체들이 공양 올리고 법을 청해 법문을 듣는 칠지공양이 어김없이 실행되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 었습니다. 이처럼 청법과 법문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청법을 하는 사람에게는 중생을 위하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묻고 말겠다고 하지 말고 여러 사람이 스승의 이러 한 좋은 가르침을 함께 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 좋은 부 처님의 가르침을 한 사람이라도 같이 들어서 더 널리 전하고 더 많은 사 람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Q 청법에 이어지는 여섯 번째 공양은 무엇인가요?
오래 살면 좋겠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우스운 일이겠죠. 사회에 온 갖 해악을 끼치는 이들이 오래 사는 것은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닐 거예 요. 하지만 이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래 계셔주 시면 좋죠. 그런 분이 바로 스승입니다. 욕심이 없어서 뵙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공부가 되고, 우리가 고통스럽지 않게 하는 방법을 한 마디라도 일러주시고 행복한 길로 이끌어주시는 분들은 조금이라도 더 우리 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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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셔주시기를 바라게 되잖아요. 곁에 계셔서 계속해서 가르침을 배우고 싶다는 그 바람이 주세 공양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법을 물어보러 갈 곳이 있는 거 예요. 언제든 법을 물을 스승이 있다는 것은 즐겁고 안심되는 일이죠. 제 자들이 할 일은 정진을 부지런히 하면서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가서 묻 는 것이고 스승의 역할은 때에 맞게 권선해서 잘 정진할 수 있도록 길을 일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스승이 오래 계시면 좋겠다고 청 하는 거죠.
티베트에서 달라이 라마 장수 기도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데 이것은 장수 기도라고 번역하면 맞지 않고 주세 기도입니다. 더 계셔달라고 제자들이 요청하는 것입니다.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주세 공 양을 하지 않아서 나중에 다른 제자들에게 비판을 받았잖아요. 우리의 스승께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무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펼 쳐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주세 공양입니다.
Q 마지막 일곱 번째 공양은 무엇인가요? 지금까지 설명한 여섯 가지 공양이 나만을 위한 것이면 안 되겠죠. 예 경하고 참회하고 수희하고 법을 청하고 주세한 공양이 모두 잘 이루어 졌다고 하더라도 이 공양의 좋은 결과를 전부 중생에게 회향하는 것입니 다. 불교는 마지막에 회향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돈이 되었든 행동이 되었든 법이 되었든 모든 것이 중생의 행복을 위 해서 하는 것이지 나를 위해 하는 것이라면 바른 수행이 될 수 없어요. 처 음부터 끝까지 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 중생을 위 해 회향하는 거죠. 중생에게 회향하지 않는 수행이란 사실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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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칠지공양을 통해 공양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됩니다.
공양이라는 말을 과일 올리고 떡 올리는 협소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 세요. 내가 수행하기 위해서, 스승과 법과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 하는 일 체의 총체적인 노력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스승을 가까이 하고 법을 전해 받고자 하는 공양의 의미를 알고 절에서는 물론이고 일상 속에서 도 생활이 되고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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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선정수행
선정수행에 대해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선정은 본수행이므로 아주 중요합니다. 사마타와 위파사나가 본수행 입니다. 선정과 지혜로 마음속의 번뇌를 끊어나가는 수행입니다.
Q 육바라밀 공부할 때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은 예비수행이라고 하셨죠.
불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마음을 다룬다는 점입니다. 대다수 다 른 종교들은 신이나 조상신 등 다른 존재를 다루지만 불교는 마음을 다루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모든 것이 마음으로부터 출발하고 그 마 음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죠. 다른 종교에서도 부 분적으로 마음의 문제를 다루지만 본격적으로 마음을 다루고 해결한 종교는 불교뿐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나요? 우리의 몸은 계율로 절제 하거나 구속할 수 있지만 마음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쉽지 않죠. 겉은 점잖고 통제하는 것 같아도 마음속까지 절제하고 나쁜 습관들이 끊어지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거든요. 하지만 마음 을 다스리지 못하고서는 마음으로부터 출발되어진 번뇌를 제어하기가 힘들죠.
선정, 즉 사마타는 마음을 집중해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수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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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하나로 집중시키는 거예요. 집중되지 않는 마 음이 산란심이죠. 집중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이 선을 하는 방법들 입니다. 마음을 잡는 데는 선정수행을 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마음 을 잡고자 생각한다고 해서 마음이 잡히는 것은 아니죠. 행동을 억제한 다고 해도 마음이 잡히지 않습니다.
마음을 집중해 하나로 만들어서 오락가락하는 번뇌를 없어지게 하 는 것이 사마타입니다. 집중되면 모든 것이 반듯하게 바로 되어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정수(正受)라고도 하는데요. 집중하면 모 든 것이 흐리지 않고 반듯하게 바로 됩니다. 거울을 닦는 것과 같은 이 치입니다.
불상은 대부분 앉아있는 모습이죠. 열반상 외에 불상의 대다수가 앉아있는 모습인 것은 선정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바르게 앉아서 집 중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을 가부좌한 불상에서도 그 대로 알 수 있습니다.
Q 부처님께서도 출가해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고 그 밑에서 수행하셨 잖아요. 부처님께서 실제로 어떻게 수행하여 깨달으셨는지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당시 뛰어나다고 하는 스승을 찾아가 공부하셨고 그 안 에서 최고의 경지에 올랐지만 나중에 깨닫고 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 방법으로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금하신 거예요. 부처님 께서는 6년 고행을 하셨지만 고행을 해서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6년을 고행했지만 그것이 길이 아님을 알고 선정에 들어 깨달으신 거예요. 그래 서 고행도 하지 말라고 중도를 말씀하셨죠.
부처님 당시 대다수의 종교에서는 무언가 불변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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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어요. 창조한 신이 있다거나 브라흐만 신이 있다고 생각했고 거기에서 떨어져 나온 아트만도 영원성을 가지고 있어서 이 세상으로 내려왔다가 수행을 통해 몸이 다하면 다시 그 영원한 세계로 올라간다고 생각했죠. 그것을 윤회라고 했고요. 그 전에는 자연 속에 정령이 있다고 생각했어 요. 나무에는 목신이 있고 물에는 수신이 있고 부엌에는 조왕신이 있다 는 식으로 무언가 근원적인 존재가 있고 그러한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 을 종교의 의미로 삼았죠.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런 것은 있지도 않고 옳지도 않다고 하셨어 요. 고행을 해서 이 몸을 학대하는 것으로는 궁극의 번뇌를 없앨 수 없다 는 것을 아셨고, 고요히 앉아 있는 순간에만 번뇌를 사라지게 하는 것 또 한 바른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죠. 번뇌가 없어지는 방법을 가장 완벽 하게 체득하고 발견하여 제시한 분이 부처님입니다.
고행이 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세속적인 욕심을 내려놓기 위해 생활을 절제하거나 수행에 전념하기 위해 방만한 생활을 금하는 것이지 고행이 목적이 아닙니다. 보리심과 선정력을 증장하기 위 해 용맹정진을 하고 무문관을 하는 것이지 장좌불와를 하고 몇 안거를 성만하는 것 자체가 수행의 증명일 수도 없습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고 요하고 바로 섰으며 그 습이 어떻게 바뀌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요즘 명상이 유행처럼 확산되고 있지만 잠시 조용히 가라앉 히거나 불 피워놓고 물 바라보면서 멍하게 있는 것들은 근본적인 길이 아 니에요. 잠시 가라앉는 데는 효과가 있지만 번뇌가 끊어지는 것은 아니 죠. 현대인들이 워낙 복잡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명상이 여러 가지 도움 이 되고 효능이 있기는 하지만 불교의 수행은 명상이 아니라 선입니다. 선 나(禪那)에서 유래된 말로서 번뇌가 사라져 평화롭게 됐다는 뜻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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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부처님 이전의 수행법으로는 번뇌를 끊을 수 없었다는 말씀인데요.
도교 같은 경우도 조용히 가라앉히기만 하죠. 극단적인 단식이나 육체 적인 고행을 통해 나중에 신선이 된다고 하지만 그것이 되지 않잖아요. 부 처님도 고행을 하고 당시의 선정수행법을 다 해봤지만 몸이 회복되거나 선 정에서 깨어나면 다시 아가 올라오고 번뇌가 일어난다는 것을 아셨어요. 가라앉히는 것만으로는 혼침일 뿐 아가 끊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부처님께서는 아에 집착해 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는 사 실을 정확하게 간파하신 것입니다. 번뇌가 완전히 끊어지는 경계가 아니 고서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아신 거죠. 그래서 깨닫고 난 뒤 고와 락에도 빠지지 말고 고행과 선정에도 빠지지 말라고 중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Q 쉼 없이 날뛰는 원숭이에 비유될 만큼 수시로 바뀌는 이 마음을 어떻게 가라앉혀야 하는지 선정수행의 방법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첫 번째는 호흡법입니다. 수식관이라고 하죠. 이 수행법은 남방불교 국가에 전승이 잘 되어 있어요. 아주 훌륭한 수행법이고 효과도 빠르게 볼 수 있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분들이 남방에 가서 수식관을 직접 배우는 분들이 많은데요. 잠깐 가서 앉기만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계율을 지키 고 정견을 배운 다음 그 바탕에서 사마타와 위파사나를 닦아야 합니다.
호흡이란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서 처음 호흡을 시작한 이래 로 한 번도 멈춘 적 없이 죽을 때까지 하죠. 이 호흡의 들숨과 날숨에 마 음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호흡은 쉬거나 끊어지지 않습니다. 집중하는 내 마음만 끊어집니다. 이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는 수식관은 부처님께서 처 음 다섯 비구에게 가르치신 수행법이고 모든 아라한들에게 가르친 수행 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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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부처님께서 대승에서 가르치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염불입니다. 부처님과 불보살님의 명호나 다라니와 진언 등을 외우면서 마음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계속 해서 염불할 때 스스로 소리를 내고 그 소리를 들으면서 집중하는 것입 니다. 그렇게 내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염불법입니다. 불보살님 명호를 외우는 염불과 천수 대비주나 진언을 외우는 주력은 모두 염불 수행법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관상법이 있습니다. 티베 트 같은 곳에서는 관세음보살 육자주 진언을 하면서도 관상법을 같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부처님의 상이나 만다라를 관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상이나 만다라 앞에 앉아서 그 모습이 내 마음에 드러날 수 있게 마음을 집중하는 거죠.
여기에서 나온 한 갈래라고 보이는데 티베트의 닝마파에서는 한 점에 집중하는 수행법을 하더군요. 바닥에서 약 40cm 정도 앞에 점을 그려놓 고 그 점에 집중하며 관상하는 방식으로, 이는 집중력과 마음의 고요함 을 기르기 위한 수행입니다. 이러한 수행법은 초기 불교의 사마타(삼매) 수행과 유사한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닝마파 전통에서 더 체계적으로 발전된 방식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구루 린포체를 중심으로 닝마파 전승 안에서 발전된 실천법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창시한 수행법이 화두법이죠. 간화선은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는 않았어요. 중국에서 개발되어졌지만 그 정신은 부처 님의 가르침과 수행법을 근원으로 합니다. 호흡법, 염불법, 관상법에서 집중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만 그 집중하는 소의처를 화두라고 하는 것 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수행법이 호흡법, 염불법, 관상법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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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의 닝마파에서 일점법, 중국에서 화두법으로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소의처입니다. 집중할 수 있도록 마음의 대상 내 지 의지처를 두는 것이죠. 불교 수행과 외도 수행의 차이는 소의처가 있 느냐 여부입니다.
Q 번뇌를 그치기 위해 무언가 집중해야 할 대상을 소의처라고 하셨는 데요.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세요.
우리가 몸이 피곤하면 의자에 의지하고 침대에 의지하죠. 그런데 마 음은 의지처가 분명하지 않아요. 집중을 하려고 해도 쉽게 바뀝니다. 여 기에 의지했다가 다시 저기에 의지하고 계속 왔다 갔다 합니다. 그것은 나의 이익에 따라 바뀌는 거예요. 나의 이익이라고 하는 것도 착각이고 고집이죠. 이익이 된다 싶으면 좋다거나 갖고 싶다는 쪽으로 마음이 움 직이고 손해가 된다 싶으면 싫다거나 멀리하고 싶다는 쪽으로 마음이 움 직입니다. 이러한 두 경계를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반복하는 것이 마음입니다. 이러한 양 극단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소의처를 두 고 거기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호흡에 집중하거나 부처님 명호에 집중하거나 부처님의 모습에 집중 하거나 화두에 집중하는 것이 모두 마음을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집중을 해야 할까요? 소의처를 두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 일까요? 소의처를 두지 않고 그냥 앉아있기만 하면 도교나 브라흐만교 의 선정처럼 침몰해버려요. 혼침이 오죠. 가만히 가라앉히기만 하면 조용 한 것만 올 뿐이에요. 인간에게는 지적인 능력이 있는데 아무 생각 없이 그 저 앉아있기만 하면 그러한 인식능력이 사라집니다. 하지만 소의처를 두 면 집중한 그 마음은 그대로 살아있어요. 마치 화로 속에 불씨를 살려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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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것과 같아서 옆으로 불이 붙어서 번지는 것은 다 껐지만 그 안에 불씨 는 살아있어서 정신은 성성하게 살아있게 하고 번뇌만 사라지게 하는 것 입니다. 이것이 소의처를 두는 이유입니다.
Q 요즘 많은 사람들이 불멍, 물멍과 같은 방법으로 마음을 쉬곤 하는 데요. 멍하니 있으면 마음이 잠시 조용해질 수는 있지만 그 멍한 상태는 번뇌가 꺼진 상태는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번뇌가 꺼지지도 않지만 계속 멍 때리고 있을 수도 없잖아요. 물론 세 상이 워낙 복잡하고 번거로우니까 그런 시간이 필요할 수는 있겠지만 근 원적인 해결책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복잡하게 사니까 복잡한 것을 쉬려고 하는 것이지 복잡한 원인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죠. 물고기가 잠시 수면 위로 나와 뻐끔뻐끔 산소를 마시며 숨을 쉬는 것과 같고 환자 가 통증이 심할 때 진통제 하나 먹은 정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기 나름대로 명상을 하면 틀리기가 쉬워요. 정확하게 소 의처에 집중하는 방식을 배워서 하나하나 익혀나가면 처음에는 조금 서 툴고 낯설고 하기 싫을 때도 있겠지만 하루에 한두 시간씩 2~3년 매일 꾸준하게 하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Q 첫 번째 소의처인 호흡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모든 수행법이 다 그렇겠습니다만, 짧은 시간에 말씀드리는 것으로 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운동선수가 전문 코치에게 트레이닝을 받는 것처럼 실제로 실행을 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전문적이고 세밀한 지도가 필요합니다. 특히 보이지 않는 마음을 다루고, 수행 여하에 따라 여러 방향으로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훈련되어진 수행 전문가의 지도 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하면 고생만 하고 성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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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수 있어요. 호흡법도 반드시 좋은 스승에게 지도받고 실제 해나가 면서 수시로 점검받고 도움을 받으며 해나가야 합니다.
기본적인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앉을 때의 자세가 중요 합니다. 보통 가부좌하고 정좌해서 앉는데요. 비로자나 칠자세를 갖추면 좋습니다.
우선 하단전에 기운을 가라앉혀야 합니다. 하단전에 기운을 가라앉 히지 않으면 상기되어 머리가 아프기 쉬워요. 호흡은 인위적으로 조절하 지 말고 자연호흡으로 해야 합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시간을 정해 서 숫자를 세면서 조절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내장 기관은 자율신경계로서 의식을 가지고 조율하면 나중에 병이 들어왔을 때 고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숨을 조절하려 고 하지 말고 자연호흡으로 편안하게 해야 합니다. 다만 그 호흡에 집중 해야 합니다. 조용히 앉아서 호흡에 집중하고 차츰 마음이 가라앉고 몸 이 가라앉아서 집중이 되면 호흡은 저절로 자연스럽게 늘어납니다. 들이 쉬고 내쉬는 호흡에 내 마음을 집중할 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스스로 공부를 해보지도 않고 시시비비만 따지는 것은 제발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점입니다. 호흡법은 깨닫지 못하고 화두법만이 깨달을 수 있다거나, 화두법은 부처님께서 말 씀하신 것이 아니니 호흡법만이 옳다거나, 관상법은 헛것 보는 것이라거 나, 염불법은 차원이 낮은 사람들이 하는 수행법이라고 하면서 분별하고 비판하고 쟁론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수행법은 모두 원리가 똑같습니다. 다 됩니다. 집중하는 원리가 똑같고 마음을 하나로 만드는 원리가 똑같 아요. 소의처만 다를 뿐입니다.
육조 혜능스님이 법에는 높고 낮음이 없지만 사람에 따라 근기의 차 이가 있을 뿐이라고 했듯이 하근기가 화두 든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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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기가 염불 한다고 안 되는 것도 아니죠. 사람의 근기에 따라 다른 것이 지 수행법의 근본 원리는 같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 방법 론을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말만 하지 말고 하나라도 제대로 배워서 제 대로 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Q 호흡법은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을 집중해서 바라보기만 하면 되나요?
그렇습니다. 들숨과 날숨을 바라보면서 집중해서 마음이 끊어지지 않 게 하는 것입니다. 혼침이나 산란심이 오지 않도록 호흡에 집중하는 것 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기본만 말씀드린 것이고 반드 시 호흡법을 깊게 수행하신 분의 지도를 받기 바랍니다.
Q 우리 불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염불수행법에 대해서 설명 부탁드립니다.
불자님들이 염불수행을 가장 많이 한다고 하는데 진짜 바르게 하는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어요. 복이 된다고 염불하는 것은 아닌지 먼저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관세음보살 염불도 하고 지장보살 염불도 하고 천수다라니가 좋다고 하면 천수다라니를 외우고 광명진언이 좋다고 하면 광명진언을 하는데 하나만 오롯이 집중해서 하 는 게 좋습니다. 결과는 똑같으니까 자꾸 바꿔가며 하지 말고 두루두루 다 한다고 하지 마세요. 하나를 정해서 꾸준하게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염불을 하거나 주력을 할 때는 반드시 소리를 내서 해주세요. 반문문성이라고 하죠. 염불소리를 스스로 듣는 게 중요합니다. 입으로는 소리를 내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을 때가 많잖아요. 소리를 낸 것을 자신이 들음으로써 염불하는 소리와 염불하는 순간에 집중하는 거죠.
처음에 시작할 때는 반드시 조용한 곳에서 시간을 정해놓고 해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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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에 만념 정도씩 하면 좋습니다. 그렇게 하면 힘이 붙기 시작해 일념 이 되면 마음이 하나 되고 산만했던 마음들이 많이 줄어들 거예요. 기복 으로라도 열심히 하는 분을 뵈었는데 삼매가 되니까 돌아가실 때도 주력 하면서 평온하게 가시는 것을 보고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염불 수행은 집중의 힘이 있습니다.
Q 호흡은 숨이 들고나는 것을 보라고 하셨고 염불은 소리 내 외우면서 그 소리를 집중해서 들으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관상법의 소의처는 어떻게 되나요?
부처님의 상이 있죠. 티베트는 그래서 탱화를 아주 정확하게 격식에 맞게 그리는데요. 관상을 할 때 눈높이 정도 앞에 불상이 놓이는 게 좋 아요. 그렇게 앉아서 부처님상을 직접 한 번 본 다음 부처님께서 지금 여 기에 와 계시다 생각하고 그 모습을 그대로 떠올리는 것입니다. 이미지 트레이닝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관상을 해보면 마음이 흔들릴 때는 그 상들이 사라지거든요. 상이 보 였다 안 보였다 해요. 달라이 라마께 여쭤보니 티베트에서 관상수행을 하시는 분들 가운데는 30분에서 한 시간 이상 그대로 상을 떠올리는 사 람들이 꽤 많다고 들었습니다. 관상수행을 꾸준히 하다보면 불상이나 탱 화가 없는 곳에서도 그대로 떠올려서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처님께서 항상 와 계신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렇게 집중하면 불보살의 보신을 볼 수 있는 힘이 생기기도 합니다. 관상 수행은 그러한 공덕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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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어서 간화선 수행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참선에서 중요한 것은 화두이겠죠?
어느 선객이 조주스님께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죠. 부 처님께서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으니 이렇게 물은 거예요. 그런 데 조주스님은 없다고 답했어요. 그럴 때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모든 중 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조주스님은 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했 을까, 의문이 생기죠. 있다, 없다, 이것으로 답을 찾기가 아주 어려워지잖 아요. 그렇게 딱, 하고 그대로 의문이 되게 만들어준 것이 화두입니다. 제 자들이 의심을 갖도록 한 거죠. 그냥 외우거나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전면적으로 의심하도록 만들어준 것입니다. 1,700공안이 모두 그렇게 해 서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화두는 머리로써, 이론으로써 답이 나오지 않 는 명제예요.
그렇게 아무리 생각해봐도 쉽게 답이 나올 수 없는 명제에 집중하고 집중하면 화두에 하나가 됩니다. 그때 어떤 상황이 벌어지냐 하면 그 대 답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번뇌가 떨어지는 결과가 옵니다.
화두란 말의 머리라는 의미죠. 생각의 이전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공안이라고 하는데요. 공안이란 비밀 편지, 비밀 문서라는 뜻입니다. 윗사 람이 비밀 편지를 가져다주라고 하면 갖고 가는 사람은 자신을 죽이라 고 써놨어도 알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것과 같아요. 화두를 지어나갈 때 는 앞이 완전히 막혀요. 그 의심을 붙들고 있으면 앞뒤로 콱 막혀서 왔다 갔다 하는 생각이 다 떨어져버려요. 이러한 번뇌 망상이 완벽하게 떨어져 버렸을 때 견도에 다다르는 거죠. 그것을 화두타파라고 합니다.
화두를 보면 하나같이 이론적으로 대답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이런 것 같다, 저런 것 같다, 해석을 해보기는 하지만 그런 해석은 단지 이리저리 가늠해보는 것뿐이지 답이 될 수 없죠. 스스로 화두를 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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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고 오직 화두와 하나 되었을 때 번뇌가 딱 떨어져버린 상태가 되면, 아 이거구나, 하는 순간이 오는 것입니다.
앞서 조주스님께 개에게도 불성이 있냐고 물었던 선객이 8년 만에 스 님을 찾아가서 다시 물었어요. 조주스님이 없다고 하니까 이 선객이 이 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어요. 이제는 깨달았다는 거 죠. 나의 의문을 없애주기 위해 스승이 법을 베풀어주셨으니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화두 공안은 이론적인 대답이 다 막히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테면 만법은 하나로 돌아간다, 그러면 그 하나는 어디로 갔는가, 이렇게 물으면 답이 나옵니까? 누군가 0에서 나왔다고 해봅시다. 그렇다고 번 뇌가 떨어졌나요? 아니잖아요. 머리로 답을 찾으려고 해서도 안 되고 서 둘러서 급하게 답을 내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오직 스스로 깊이 참구해 봐야 합니다.
Q 호흡법, 염불법, 관상법은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수행법이지만 간화 선은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수행법이 아니라고 하셨는데요. 그럼 에도 많은 수행자들이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있고 화두참선을 열심히 하는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간화선의 뛰어난 점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간화선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죠. 달마스님이 간화선을 시작했다고 하 는데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달마스님은 『이입사행론』에서 알 수 있듯이 사마타와 위파사나를 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달마스님으로 부터 이어져서 육조 혜능스님도 간화선을 하신 것은 아니에요. 육조 혜 능스님 이후 오종칠가가 나오면서 대혜 종고스님 때 간화선이 확립되었 어요. 이때부터 어마어마한 논의들이 나왔죠. 그리고 여산 동림사의 혜 원스님은 염불선을 닦았는데 이 문하에서도 도인이 많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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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선은 상당히 파워풀합니다. 굉장히 뛰어나요. 중국과 한국에 도 인이 많이 나온 것은 화두선에 그러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Q 보시, 지계, 인욕, 정진바라밀 외에 선정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를 어떻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수행은 예비수행과 본수행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예 비수행은 본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닦는다는 의미에서 예비수행이기도 하 지만 본수행을 닦을 때 장애가 없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욕심이 많다면 참선을 해도 진척이 없어요. 당장 욕심 부리 러 다니고 싶은 마음에 진득하게 참선을 할 수 있겠어요? 장애가 많이 일 어나게 되겠죠. 그러므로 베푸는 수행을 통해 욕심을 많이 줄여놓아야 참선수행에 제대로 진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축구, 야구, 배드민턴, 양궁 등 모든 운동선수가 기술을 배우기 전에 하는 게 뭐예요? 체력훈련이죠. 기초 체력을 탄탄하게 닦아놔야 기술을 배우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과 같아요. 보시, 지계, 인욕, 정진바라밀을 다 갖추지 않고 선정수행에 바로 들어가려고 하면 잘 믿지도 못할 것이 고 본수행을 할 때도 장애가 너무 많이 일어나서 제대로 할 수가 없어요.
예비 수행단계에서 복 짓는 것만 해도 그래요. 복 지은 게 그믐날 이지 러진 달 조각만큼도 없다고 하면 정진을 하려고 해도 먹고 살 게 없어서 매일 매일 허덕거리게 돼요. 나쁜 일을 많이 하면 몸이 자꾸 아프거나 남들이 무시하고 천대하는 일들이 생겨요. 물론 그런 가운데에서도 바른 스승을 만나서 치고 올라가 도인이 되는 분도 계시지만 대다수는 그렇게 안 되죠.
그래서 예비 수행이 중요합니다. 중요하지만 보시만 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도움은 됩니다. 많이 베풀면 욕심이 떨어져 나 가고 많이 인욕하면 아상이 떨어져 나가니까 예비 수행도 잘 닦아야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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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리고 본수행을 해야죠. 예비 수행으로 복만 받겠다 하면 그것으 로 그쳐도 되겠지만 번뇌 망상을 완전히 끊고 니르바나에 도달하고자 하 면 반드시 선정과 지혜바라밀을 닦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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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공성과
사마타, 위파사나
Q 사마타와 위파사나 수행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사마타와 위파사나를 지관(止觀)수행이라고 합니다. 보통은 지가 먼 저 되고 뒤에 관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맞는 말은 아니에요. 전등을 켰을 때 밝은 것과 따뜻해지는 것은 동시에 나오죠. 따뜻해진 다음에 밝아지 거나 밝아진 다음에 따뜻해지는 것은 아니죠.
불교의 사마타 수행은 소의처를 분명하게 두어야 합니다. 소의처에 정신이 살아있으므로 관이 됩니다. 소의처에 집중하면서 사마타가 되고 정신이 살아있기 때문에 대상을 관하게 되죠. 사마타와 위파사나가 동시 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고요히 앉아있기만 하면 어두워지고 혼침이 올 수 있는 것을 소의처로 깨어나게 하고 그 깨어난 정신으로 대상을 대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위파사나를 문자로만 배우고 생각만으로 한다면 학문적으로 흐르기 쉽고 마음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에 사마타에 의해 사유하고 확인 해야 합니다. 경전을 보고 법문을 들어 이해하게 된 내용을 진실로 그렇 다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사마타입니다.
이처럼 사마타와 위파사나는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좋은 점을 뒷받침하여 동시에 일어나게 하고 더 잘 될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을 쌍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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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조(雙遮雙照)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수심 결』에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사마타와 위파사나가 따로 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소의처를 들고 분명하게 하면 사마타가 이루어질 때 대상을 바라보면서 분명하게 바로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리는 경지가 일어나니까 직접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금강경』의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이 게 송이 관법입니다. 일체의 모든 상을 다 버렸을 때 세상이 꿈과 같고 환과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관하려면 경 전을 공부하여 정견을 갖고 무엇이 바른 것인지 알아차리는 정지가 확보 되어야 합니다. 일체 모든 것이 자아가 없이 흘러가며 실재가 있지 않으 니 허망하다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일체 모든 현상은 인연 따라 이루어 지고 인연 따라 흘러가는, 실체가 없는 일시적인 현상임을 뚜렷하게 아는 것이 위파사나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600부 반야경이 모두 위파사나라고 할 수 있어 요. 부처님께서 위파사나에 드신 경지에서 존재와 세상의 본질을 말씀하 신 것입니다.
Q 모든 것이 허망하다고 표현하셨지만 그 말은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말씀이지요?
그럼요. 허무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다면 변 화는 없겠죠.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없어요. 그것을 붙들고 사니까 허 무하다고 말하는 거예요. 전부 다 변화한다는 것이 연기법입니다. 실체가 없고 변화하니까 무상하고 허망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변화 하는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거예요. 집착하지 않고 인연 따 라 살아가는 것이 연기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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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핵심은 ‘내가 어떻게 부처의 모습으로 변 화시킬 수 있는가’입니다. 실재하거나 실존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변화하 는 내 삶을 그렇다면 어떻게 바꿀 것인가, 이것이 핵심이죠.
Q 여기에서 공성이라고 하는 개념이 나오겠군요.
공성을 없다는 무와 혼동하면 안 돼요. 무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 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공성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연기로 서 존재하는데 그것이 고정되어진 것이 없이 계속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항아리에 비유하셨어요. 흙을 가지 고 항아리를 만들었을 때 항아리는 연기되어져서 존재합니다. 하지만 깨 지면 항아리는 아니죠.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처럼 공성이란 실재하 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초전법륜에서는 무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아는 생명체에 국한해 서 설명한 것입니다. 어떤 것이 나인가, 하면 실체를 찾을 수 없죠. 아무 것도 없는 빈 항아리와 같습니다. 무아를 다시 설명하는 것이 무상입니 다. 변화하는 속성에 의해 실체가 없죠. 무아와 무상을 용수보살은 용어 를 달리해 공이라고 했어요. 자성이 없고 영원성이 없기 때문에 공입니 다. 용수보살의 『중론』 첫 구절이 ‘무자성이므로 공’입니다. 모두가 자 체의 영원한 성질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비었다고 한 거예요.
비었다는 말의 뉘앙스 때문에 자꾸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지 만 고정불변한 존재가 없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의미입니다. 나라는 것 이 연기로서 인연 맺어 이루어져 있는데 그 안에 영원한 나는 없다는 거 죠. 방이 있을 때 그 안이 비어있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니잖아요. 자성이 없기 때문에 어떤 조건이 되었을 때 화합하여 존재하고 어떤 조건이 사 라졌을 때는 그 상황이 사라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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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입니다. 이것이 있는 까닭에 저 것이 존재하고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집니다. 인간도, 생명도, 우주의 모든 물질도 이러한 원리에 의해 존재합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얼마 안 된 시대를 아비달마 시대라고 합니다. 논의 시대라고도 하는데요. 『아비달마구사론』 등에서는 우리를 형성하 고 있는 지수화풍이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물질이라고 했어요. 고전물 리학에서도 원자가 최소의 물질이고 더 이상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 했지만 지금은 그 생각이 완전히 깨져버렸죠. 그렇듯이 뭔가 고정불변의 아주 작은 물질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거예요.
이후 유식학에서는 지수화풍과 같은 물질은 모두 변하고 깨지지만 아뢰야식만은 자성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것도 증명이 되지 않 죠. 그래서 자립논증을 통해 마명스님 등이 진여자성이 있지 않을까 주 장했지만 이 역시 증명도 되지 않고 사실도 아니었죠. 이때 결론을 지은 분이 용수보살입니다. 이것은 모두 관념이 만들어진 허구로서 영원히 존 재하는 것은 증명할 수도 없고 있지도 않다고 했어요. 영원한 존재가 있 다면 연기는 틀린 개념이라고 하신 거예요.
불교가 처음부터 끝까지 설하고 있는 가르침이자 불교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무아이고 공성입니다.
Q 공성이라는 말의 의미를 좀 더 짚어주시겠어요?
공의 성질을 띠었다고 해서 공성이라고 하는데요. 공성은 인간을 포 함한 모든 생명체와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들의 공통된 성질입니다. 자 성이 없이 서로 의지해서 존재해 비어있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뜻이죠. 여 기서 공성이라고 하는 것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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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초전도체가 -270℃ 아래로 내려가면 전기가 통과하는 데 아무런 저항이 없다고 합니다. 무저항이 되고 반자성이 되어 자석에 저 항이 일어납니다. 붙지 않는다는 말이죠. 물질이 –270℃ 이하로 내려갔 을 때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생명체도 상황과 조건에 따라 서 그러한 성질을 띌 뿐이지 영원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Q 무아, 무상, 공을 같은 의미로 이해하라고 하셨어요.
같은 의미입니다. 무아는 생명에 적용한 개념이고 공은 생명체 뿐 아 니라 무기물까지 포함하여 모든 존재가 자성이 없다는 개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아를 장작불에 비유해서 설명하셨습니다. 장작불이 타고 있다면 원래부터 불이 있었던 것인가요? 불을 붙였기 때문에 불이 타고 있는 거죠. 장작불을 껐을 때 불은 어디로 갔나요? 완전히 사라진 것인가요? 다시 불이라고 하는 조건을 만나면 다시 타겠죠. 여기에서 불 은 자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장작이란 조건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불 이라는 것이 장작에 본래 있지 않죠.
여기 성냥이 있습니다. 이 성냥에 불이 있나요? 없죠? 그런데 없다고 하면 불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죠. 하지만 불을 켜면 불이 켜지잖아요. 그 렇다고 지금 불이 있다고 하면 맞나요? 있다고 한다면 불이 꺼지지 않아 야 하는데 훅 하고 불면 꺼지잖아요.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본래부터 있다, 없다, 말할 수 없습니 다. 영원히 있다, 없다, 이렇게도 말할 수 없죠. 성냥은 끄트머리에 유황 이 붙어있고 나무개피는 탄소와 석회로 구성되어 있어요. 여기에 어떤 조 건이 주어졌을 때 불이 발생하는 것이고 다 타버리면 재만 남겠죠. 본래 부터 있었다면 계속해서 불이 붙어있어야 맞을 거예요.
우리에게는 불성이 있다고 하는데요. 본래부터 불성이 있다고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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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정진할 필요가 있나요? 본래 불성이 있다고 하면 정진하지 않고도 바로 알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성냥에 유황을 없애거나 나무개피를 잘게 잘라 없애버리면 불이 붙을 수 없겠죠. 조건이 달라지니까 다른 성 냥들은 불이 붙었는데 이 성냥은 불이 붙지 않는 거예요. 조건이 달라졌 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부처 될 조건을 만들지 않고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습니까? 본래 부처라는 말은 깨닫고 나서 보니까 그렇다는 것이 지 가만히 있어도 된다거나 어딘가에 불성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그것 을 찾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Q 수행 없이는 안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럼요. 수행 없이 절대 될 수 없어요. 장작개비나 성냥과 같이 불 피 울 재료가 있어야 불을 피울 수 있잖아요. 장작개비나 성냥이 있더라도 비가 와서 다 젖어버렸다면 불을 켤 수 없죠. 조건이 맞지 않으면 안 되 는 거예요. 본래부터 있던 것도 아니고 본래부터 없던 것도 아닙니다. 인 연에 따라 생겨나고 인연에 따라 멸하죠. 원인과 조건에 의해 발생하고 원인과 조건에 의해 사라집니다.
태어나고 죽는 것도 인연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반야심경』의 ‘불생불멸’이 인연 따라 일어나고 인연 따라 사라진다고 한 것입니다. 나 고 죽은 어떤 것이 있지 않다는 뜻이죠. 잘 모르는 분들은 ‘불생불멸’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고 하면서 영원한 불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그래서 불성이라는 놈이 다 보고 듣고 한다면서 이 영원한 불 성만 깨달으면 된다고 하죠. 눈이 보고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불 성이 보고 듣고 하니까 그것만 깨달으면 된다고 하는 것이 유아론입니 다. 무아가 아닌 거죠. 그러므로 있다고 해도 맞지 않고 없다고 해도 맞 지 않습니다. 인연 따라 있고 인연 따라 사라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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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런데 스님, 성냥의 예를 들어주시면서 여기에서 불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만, 성냥개비는 있지 않습니까?
성냥개비도 있다고 말할 수 없죠. 이것을 잘게 잘라보면 성냥개비라고 할 수 없고 그냥 나무 조각일 뿐입니다. 더 잘게 부수면 톱밥이 되겠죠.
Q 성냥개비도, 불을 붙일 수 있는 성냥갑도 모두 조건이라고 말하면 맞을까요?
맞습니다. 조건일 뿐이에요. 모든 것은 조건들이 모인 거예요. 자동차 하나가 완성되는 데도 몇 천 개의 부품이 들어가죠. 오랫동안 사용한 다 음에는 분해가 되고 사라지겠죠. 현상계의 인연이란 이처럼 생멸을 계속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경전 어디에서도 영원한 무엇이 있다고 말씀하시 지 않았어요. 이것이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불성이 영원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Q 일체중생 실유불성, 즉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 러면 이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인슈타인이 모든 존재는 에너지가 있다고 한 것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존재는 에너지가 있다는 말은 에너지를 어떻게 발 현하고 어떻게 변화시키느냐에 따라 물질이 달라진다는 말이잖아요. 우 라늄을 예로 들어보면 이것은 하나의 금속일 뿐이에요. 성분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온도를 어떻게 가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죠. 우라늄이 그냥 돌멩이로 되어 있을 때는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공기놀 이를 해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원자력 발전소에서 전기를 발생 시키기도 하고 핵폭탄을 만들기도 하죠. 어떤 조건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와 같이 누구에게나 부처가 될 성향이 있고 가능성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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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이것을 어떻게 발생시키느냐에 달린 것이죠.
수소를 한 번 볼까요? 우주에 물질이 생길 때 수소가 제일 먼저 생겼 다고 하죠. 수소 두 개와 산소가 만나면 물이 되잖아요. 두 개를 분리시 켜놓고 물이라고 할 수 없죠. 이것이 연기입니다. 원인과 조건에 따라 결 과가 달라지는 것이죠. 모든 과학에서도 연기와 인과의 법칙에서 벗어나 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도, 본래부터 그런 사람이란 없어요. 스승을 만나고 법을 만나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냥과 유황이 있을 때 동일한 원인과 동일한 조건 을 만들어놓으면 반드시 불이 붙는 것처럼 부처가 되겠다는 보리심을 발 하면 그 길로 나아가게 되고 궁극에는 부처를 성취하게 되는 거예요. 일 체 중생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그 생각이 그런 말과 행동으로 구체화되 고 마침내 부처가 되는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 가운데 하나라도 조건 이 맞지 않으면 그 결과를 가져올 수 없어요.
이 말은 불법수행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서는 부처가 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부처되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 교학이니까 부처가 되고자 한 다면 교학을 명료하게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Q 그렇다면 우리가 공성을 알고 체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공성을 알고 체득한다고 해서 날아다닐 수 있는 건 아니고 눈이 더 잘 보이거나 손발이 무슨 특별한 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죠. 그러면 공 성을 이해하고 체험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우선, 되지도 않을 것에 집착하는 착각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살아서 는 돈과 명예와 권력 등 영원하지 않은 세속적 욕망을 쫓으며 살고 죽은 뒤에는 천국이나 브라흐만천에 태어나고 싶다는 애착과 착각을 부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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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욕심과 어리석음이 생겨납니다. 공성을 이해하기만 해도 이러한 헛 짓을 하면 허망하다는 것을 대번에 알게 되죠. 그러면 많이 괴롭지 않아 요. 아프고 괴로운 일이 많이 줄어듭니다.
공성을 체험하는 것이 견성입니다. 사마타와 위파사나 수행을 통해 일념이 되고 공성체험을 해 견성하면 마음 자체도 영원한 것이 아니고 순 간적으로 왔다 순간적으로 사라진다는 것을 확연히 알게 됩니다. 흔히 마음을 비운다고 하는데, 나라고 고집했던 그 마음들이 싹 비워지죠. 그 렇게 아가 사라지고 욕심과 집착이 사라지면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됩니 다. 그것이 도인이죠.
부처님을 여래여거(如來如去)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오고 이와 같이 가셨다, 이 말은 삶과 죽음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삶도 잘 살 고 죽음도 잘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생과 사가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는 올 때도 아무 것도 모르고 오고, 갈 때도 안 가려고 허둥 대고 발버둥 치면서 정신없이 가잖아요. 그래서 부처님을 잘 오고 잘 가 신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Q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상에서 벗어나는 것인가요?
『금강경』에서 6상에서 벗어나라고 했죠. 핵심은 아상과 법상입니다. 아상은 영원한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법상은 영원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창조주가 있다거나 절대자가 있다거나 그런 것을 상정하는 것입니다.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내가 있다는 생각, 영원 한 무언가나 절대자가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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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공성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이해하고 체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이 수행입니다. 공성 체험을 통해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대해탈 이고 대자유입니다. 공성수행의 핵심은 사마타와 위파사나입니다. 병이 낫거나 긴장이 완화되거나 마음이 편안해지려고 선을 하는 것이 아닙니 다. 물론 선을 하면 마음이 이완되고 평온해지기는 하지만 궁극의 목표 는 생사를 벗어나는 것이죠. 생사를 벗어난다고 하면 다시 또 영원히 사 는 그런 길을 찾는다고 오해하는데 죽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워진다는 의미입니다. 사실은, 살려고 하니까 죽는 데 얽혀버리는 거예요. 안 죽으 려고 하니까 아등바등해지잖아요. 누구도 안 갈 수 없는데요. 잘 왔다 잘 가지는 못할망정 못 왔다 못 가고 게다가 추하게 있다가 추하게 가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Q 공성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불성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셨는데요. 본래 부처라는 말을 그동안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가 고픈 상태에서 잤을 때 꿈에서 밥을 먹는다고 굶주림이 면해지 지는 않죠. 본래 부처라는 말도 되뇌기만 하고 말로 떠든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과 우리가 근본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지만 한 가 지 다른 것이 있어요. 우리는 집착을 하고 부처는 집착에서 벗어나 있습 니다. 그렇게 보면 부처님과 우리는 너무나 다르죠. 한 가지만 다르지만 그로 인해 살아가는 모습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내려놓지 않으면 결코 부처님처럼 살 수 없어요.
그런 점에서 이 공성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수행을 통해 공성을 깊숙 이 체험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위대한 일입니다. 가장 수승한 일이고 가 장 뛰어난 일입니다. 인간으로서 최고의 자유와 행복을 맛볼 수 있으니 이처럼 위대한 일이 세상이 어디 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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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도 행복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공성을 이해하고 체 험하면 행복해질까요?
니르바나란 바다 위에 바람이 불어서 파도가 치다가 바람이 꺼져서 파도가 잠잠해지는 것이라고 비유했습니다. 바다는 원래 잠잠했어요. 즉 괴로울 일을 스스로 만들어놓고는 스스로 고통을 받고 괴로워하는 것이 중생입니다. 그 일들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모두 착각이 에요.
이것이 행복이다, 한 마디로 규정 지을 수는 없죠. 반대로 괴로울 일을 하지 않으면 행복입니다. 니르바나라는 말도 보면, 무언가 명확한 어떤 모습을 그려놓지 않고 바람이 꺼졌다, 바람이 사라졌다고 했잖아요. 조 용해지면 편안한 것이고 그러면 행복한 것 아닌가요? 자연의 섭리에 벗 어나지 않고 순리대로 잘 사는 것이 행복 아닙니까?
그러므로 고통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러한 원인과 조건 을 하나씩 없애나가면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길에 필요한 것이 무아와 연기와 공성의 지혜입니다.
Q 공성을 이해하고 체험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평소 수행을 열심히 하는 것이 답이겠군요.
성냥을 하나 만드는 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공정을 거쳐 만들죠. 요즘 음악 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재능이 있는 사람도 어려서부터 전공 하고 10년, 20년씩 해도 알려지지 않아 힘들어하던데요. 노래를 너무너 무 잘 하고 연주와 작사 작곡 등 실력이 어마어마한데도 잘 안 되는 경 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승부를 보겠다고 한다면 될 수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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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여러분 스스로가 고통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인데 왜 그것을 스스로 깨지 못하고 오히려 구속되고 노예가 되려고 합니까? 신의 노예가 되고 군주의 노예가 되고 상사의 노예가 되고 가정 속에서는 가부장의 노예가 되어 살아서야 되겠 습니까? 가정도 회사도 국가와 사회도 영원한 실체가 없어요.
따라서 스스로 노력해야 합니다.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 쉽고 간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서 노력해야 하는 거죠. 내 마음을 살피 고 ‘내가 어떻게 바뀌어 갈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합니 다. 빌어서 오는 것 같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빌어서는 아무 것도 오 지 않습니다. 내가 그렇게 마음먹고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지 는 것입니다.
Q 공성이 곧 반야라고 봐도 되겠지요?
공성을 체험해서 욕심이 다 사라진 의식이 반야입니다. 부처님께서 도 인이 되셔서 600부 반야를 말씀하셨는데 그 지혜를 한 마디로 말하면 반 야입니다. 공성을 통해 반야가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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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반야심경』에 대하여
Q 『반야심경』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부터 들려주시겠어요? 유교의 공자 말씀은 『논어』가 있고, 도교의 노자 말씀은 『도덕경』 하 나이고, 기독교의 『성경』은 4복음서이고, 불교는 경전이 워낙 방대합니 다. 얼마나 많으면 8만 4천이라고 하겠습니까? 여기에 주석서까지 하면 보통 많은 게 아니죠.
경전을 분류하면, 스리랑카, 미얀마 등 남방불교 국가에 전승되어온 팔리어 경전이 48장경으로 내려오고 있고, 산스크리트어로 전승되어온 대승경전이 간다라 지방과 중국, 한국, 일본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대승 경전 가운데 『유마경』을 위시한 방등부가 있고 반야부가 있고 유식학이 있는데 이 중에서 반야부가 대승불교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 해석하기로는 부처님께서 반야부의 가르침을 21년 동안 설 법하셨다고 하죠. 반야지혜에 대하여 광범위하게 설명해놓은 반야부는 『대품반야경』 등 600부가 넘습니다. 수적으로도 반야부 경전은 가장 방 대합니다. 우리가 대체적으로 접하는 경이 『금강반야바라밀경』과 『반야 심경』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반야의 공성을 바탕으로 실현되는 보 살행을 설한 것이 법화부와 화엄부입니다.
반야부는 부처님께서 가장 오랜 시간 설법하셨으며 그 범위가 가장 넓다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반야심경』은 공성을 가장 철학적이 고 명확하면서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해놓은 경전입니다. 그런 점에서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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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경』을 깊숙이 이해하면 부처님께서 21년 동안 말씀하신 반야부의 내 용을 이해하고 되고 일체 중생을 건지고자 하는 대승의 보살행을 이해하 게 될 것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법회나 행사를 할 때면 반드시 『반야심경』을 독송하 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어, 팔리어, 티베트어, 중국어, 한국어 등 『반야심 경』을 독송하지 않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불자라면 누구나 외우고 있을 정도로 핵심적이고 중요한 반야 지혜를 담고 있으니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Q 부처님 가르침의 진수가 담겨 있다는 말씀이군요.
물리학을 공부하려고 하면 아인슈타인의 ‘에너지 불변의 법칙’을 공 부해야 하듯이 불교를 공부하려고 하면 불교사상의 핵심인 무아와 공성 을 이해해야 합니다. 『반야심경』만큼 무아와 공성을 정확하게 말씀해 놓 은 경전이 없다고 할 수 있어요. 우리도 출가하면 제일 먼저 『반야심경』 부터 외웠어요. 불자들도 대부분 그럴 거예요. 뜻도 모르면서 일단 외우 기부터 하잖아요. 모든 의식에서도 『반야심경』은 빠지지 않고 독송하는 경전입니다. 『반야심경』만큼 자주 외우는 경전도 없을 거예요. 그만큼 그 내용을 항상 주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러므로 정확하 게 이해한다면 불법의 핵심을 늘 잊지 않게 됩니다.
Q 『반야심경』은 600권에 달하는 『대반야경』의 핵심을 정리한 것이라고 하셨는데요. 『대반야경』은 어떤 경전인가요?
『대반야경』을 대품반야라고 합니다. 대품반야는 불교 철학의 전반을 설명하고 있는데요. 공성 체험을 통해 비추어진 지혜의 내용을 설명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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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대품반야 600부 가운데 대표적인 경전 가운데 하나가 『금강경』이지요?
『금강반야바라밀경』은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서 설법하신 가르침입 니다. 부처님께서 대중과 함께 탁발 다녀오시고 공양 드시고 대중들이 오늘은 부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해주실까,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법단에 앉으셔서 고요히 선정에 들어계셨죠. 여기서 중요한 것이 수보리가 질문 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수보리가 일어나 부처님께 질문했죠. 대표질 문입니다. 보리심을 낸 이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무엇을 항복받고 무 엇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그렇게 물으면서 문답이 시작됩니다. 수 보리와의 문답으로 반야를 설명하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법상, 비법상의 6상을 설명하면서 자성이 없다는 사실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셨 습니다. 그 내용은 『반야심경』과 같이 무아와 공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Q 반야부의 위상에 대해 잠깐 짚어주시겠어요?
티베트의 경우 강원에서 아비달마불교, 유식불교, 반야부를 가르친 다음에 중관불교를 가르칩니다. 반야부와 중관을 이해해야 불교철학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형식을 지니고 있더라도 무아와 공성에서 빗나 가면 불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여타 종교와 철학과 구분 되는 것이 무아와 공성입니다. 공성 체험을 통해 나오는 지혜가 반야입니다.
반야부는 불교의 핵심 철학입니다. 설사 반야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갖 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식일 뿐이고 실제 공성 체험이 되어야 합니 다. 공성 체험이 없다면 실제 그렇게 된 게 아니에요. 공성 체험이 되어졌 을 때 번뇌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반야부는 불교의 핵심 철학이고 이러한 철학이 전제되지 않은 보살 행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반야가 전제되지 않는 불교 수행은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반야를 안다고 하는 것은 불교의 핵심을 꿰뚫어 볼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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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입니다. 그러므로 반야의 지혜는 수행의 결과입니다.
깨달았다, 그것이 반야입니다. 깨달은 사람의 생각이 반야죠. 부처님 의 생각이고 모든 조사스님과 대보살의 말씀이 반야입니다. 『반야심경』 에 진실불허(眞實不虛)라고 했듯이 그대로가 모두 사실이고 진실입니다.
Q 경전을 요의경과 불요의경으로 나누지요?
불요의란 상대적인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불요의경의 대표적인 예가 앞에서 언급한 부처님께서 아자타삿투에게 설한 말씀이죠. 빔비사라왕을 쫓아내고 왕이 되어 아버지를 죽인 아자타삿투가 후에 너무 괴로워 매일 밤 울부짖는 소리가 도시를 가득 메웠다고 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위 로의 말씀도 해주시고 참회하라고 하면서 앞으로 백성들을 아버지와 어 머니로 여기고 받들라는 가르침을 주셨어요. 부처님 말씀을 듣고 아자타 삿투는 정신을 차리고 국가를 다시 잘 이끌어나갔는데요. 이때 부처님께 서 해주신 말씀은 상대적인 가르침입니다.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이고 이 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여 왕이 정신차리고 나라를 잘 이끌 어가도록 한 거예요. 아자타삿투에게는 맞는 말이지만 이때 설한 부처님 의 가르침이 누구에게나 타당한 가르침은 아니죠.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 적이라는 뜻입니다. 그 상황에서는 맞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맞지 않죠. 참고할 수는 있지만 보편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경전에는 이러한 내용이 많습니다. 이러한 불요의경을 부처님의 최상의 법문이라고 할 수 는 없어요. 대기설법이나 비유설법으로 근기에 맞게 법문해주신 것이라 고 이해하면 됩니다.
이에 반해 사마타와 위파사나를 통해 깨침을 이룬 반야 지혜의 내용 이 요의경입니다. 상대적인 가르침이 아니고 핵심을 있는 그대로 설한 것 입니다. 이것은 모든 중생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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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설명은 이렇게 저렇게 달리 할 수 있어도 그 안의 내용은 하나도 바뀌지 않습니다.
『반야심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존재는 자성이 없다고 일관되게 설명하고 있어요. 요의 가운데 요의입니다.
『반야심경』을 매일 외우기는 하는데 솔직히 내용은 확실하게 잘 모르 겠다, 하는 분들 많으실 겁니다. 요의 가운데 요의인데 내용을 정확하게 알기가 쉽겠습니까? 쉽게 알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우선 지식으로라도 정 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자들이 다 외우고 있으니까 앞으로 는 그 안의 내용을 완전히 아는 것이 너무나 소중한 일입니다.
외우는 건 오래 걸리지 않죠. 그런데 그 뜻을 알기가 보통 어려운 일 이 아니에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내가 정진한 만큼 알아집니다. 외울 때 마다 다가오는 내용이 다릅니다. 마음 안으로 들어오는 깊이가 달라져 요. 그러니까 여러분께서도 그 내용을 아는 데 주력해주시면 좋겠습니다.
Q 경전은 보통 서분, 정종분, 유통분으로 나눠집니다.
저는 경전을 읽으면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이, 모든 경전에는 서두에 법회가 열린 인연을 설명해놓았다는 점입니다. 『금강경』에도 「법 회인유분」이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이 법회가 왜 열렸는지, 누가 부처님 께 법문을 청했는지, 그때 어떤 대중들이 얼마나 와 있었는지, 그때 누가 어떤 질문을 했는지 자세히 설명해놨어요.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누가 질문했는지를 보면 어떤 주제로 법이 설해질지 짐작할 수 있죠.
『논어』도 어디에서 언제 누구와 이야기했는지, 그때 모인 대중이 얼 마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내용이 없어요. ‘자왈(子曰)’, 대부분 공 자가 이야기하고 가끔 제자들이 묻는 정도의 내용만 있어요. 노자의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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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경』도 그러한 내용이 없기 때문에 실제 노자가 한 이야기인지조차 정 확하지 않은 점도 많거든요.
그런데 불교의 경전은 서분에서 법회가 열린 인연과 상황을 구체적으 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근거가 분명하죠. 부처님께서 어디에서 하신 말씀이고 그때 대중은 누가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정종분은 본론입니다. 그 경의 핵심 사상이 들어 있는 부분이죠. 그리고 본론을 마치면 마지막에 잘 받들어 행했다는 내용의 유통분으로 마무리 됩니다. 이 부분도 의미가 있습니다. 앞에서 부처님께서 충분히 설명했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대중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었다면, 혹은 동의하지 못하고 나가버렸다면, 그 가르침이 유통될 수가 없겠죠. 그 자리에 있었던 대중들이 환희심을 내고 그 말씀대로 받들어 행하고 대중들을 위해 널리 설하겠다고 마음 내는 게 법을 설한 이유이고 법을 들은 성과잖아요. 이번에 부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데 너무 좋은 말씀을 하셔서 잘 기억하고 앞으로 전 하겠다 마음먹어야 그 자리가 의미가 있는 거죠. 경전을 오랫동안 공부 해보니 유통분도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법을 들은 제 자들이 느끼고 깨친 만큼 부처님의 그 가르침이 널리 퍼져가기 때문입니다.
Q 그런데 『반야심경』은 서분, 정종분, 유통분의 구조가 아닙니다.
『반야심경』도 서분, 정종분, 유통분이 있습니다. 다만 번역하신 분들 이 서분과 유통분을 생략하고 정종분만 번역한 『반야심경』을 우리가 많 이 봐왔기 때문에 서분과 유통분이 없는 줄 알고 있죠. 누구나 외울 수 있게 하려고 간략하게 정리해 독송하기 쉽도록 만든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한역은 대략 8종이 있습니다. 『반야심경』을 최초로 번역 하신 분은 구마라집스님입니다. 지금 우리가 널리 독송하고 있는 『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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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은 현장스님이 번역하신 것입니다. 구마라집스님, 현장스님, 의정스님이 정종분만 번역했고 서분과 유통분까지 번역한 분이 다섯 분 정도 됩니다.
우리나라는 정종분만 유통되어 서분과 유통분의 내용을 아예 모르 고 있는데요. 서분을 이해하는 것도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반야심경』 이 어디에서 설해지고 그때 어떤 대중이 설법을 들었는지 우리는 잘 모 르죠. 독송은 본론 내용만 하더라도 이번 기회에 전체적인 내용을 다 이 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Q 『반야심경』을 공부할 때 참고할만한 해설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반야심경』 원본은 산스크리트어로 있고요. 한문 번역본은 8종이 있 습니다. 한문 번역본은 본론을 번역해놓은 것이 3종, 광역본을 번역해놓 은 것이 5종 있으니까 인터넷으로 찾아서 참고해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독송하는 『반야심경』은 현장스님이 번역했습니다. 그리 고 이것을 한문권에서 최초로 해설해놓은 것은 우리나라 원측스님의 『불 설반야바라밀다심경찬』입니다. 그리고 근래에는 산스크리트 원본을 언 어학적으로 해석한 정병조 교수가 해설해놓은 『반야심경의 세계』 등이 있습니다.
Q 『반야심경』 한역본을 약본과 광본으로 나눈다고 하셨죠?
정종분만 번역해놓은 것을 약본 혹은 소본이라고 합니다. 구마라집, 현장, 의정이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서분과 유통분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 는 광본은 반야와 이언, 마갈제국의 법월, 지혜륜, 동천축국의 법월, 시호 가 번역한 5종이 있습니다.
8종의 반야심경을 비교해보면 지금 우리가 독송하고 있는 현장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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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반야심경』이 가장 명쾌하게 번역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마 라집스님의 번역도 용어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내용이 크게 다 르지는 않습니다. 시호스님의 번역도 본문 내용은 비슷합니다. 오늘날 현 장스님의 번역본이 유통이 가장 잘 되는 이유는 그만큼 정확하고 명쾌 하게 번역했기 때문이겠죠.
서분과 유통분은 번역자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공통이 되 는 기본적인 내용을 짚어보고 정종분은 현장스님의 번역본으로 공부하 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말 반야심경은 조계종에서 정리한 『한글 반야심경』이 번역이 아주 잘 되어 있습니다.
Q 『반야심경』을 공부할 때 유의할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많은 분들이 『반야심경』을 술술 외우면서도 내용을 잘 모르겠다고 할 겁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아주 당연합니다. 처음부터 소설 읽듯이 읽어지고 쉽게 이해가 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600부 반야의 핵심 내용인 데 그렇게 간단하게 알아지겠습니까? 그만큼 노력이 필요하겠죠.
『반야심경』은 부처님 진리의 핵심이니까 완벽하게 알려면 사마타를 통해 견도에 들었을 때 깊은 이해가 가능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우선 지 식으로 알아가고 체험에 따라 조금 더 경험되어지는 과정을 거듭해야 합 니다. 그러니 이 공부는 이생에 공부하고 다음 생에 또 공부하고 다음 생 에 거듭해야 하는 공부로 생각해야 합니다.
급하게 해서 될 일도 아닙니다. 우물에서 숭늉 내놓으라고 하듯이 서 두르면 안 되고 일상에서 의식할 때 외우고 사경하고 강의 듣고 독송하 고 계속 해야 합니다. 중간에 모르는 것이 있더라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좀 덮어두고 아는 것은 아는 대로 이해하면서 중단하지 말고, 포기 하지 말고, 꾸준하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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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자성이 없다, 이것이 처음에는 도대체 무슨 얘기인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하더라도 실생활에서 적용해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 인내심을 가지고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어렵다고 해서 그럼 우리는 다음 생에나 합시다, 이렇게 하면 곤란합 니다. 『반야심경』을 이해하기만 해도 인류가 발생한 이래로 가장 위대한 대도인이신 부처님과 생각이 같아지는 거예요.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보 통 일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포기하면 안 되겠지요.
Q 강의를 들으면서 선정수행도 같이 하면 좋겠군요.
불교공부는 마치 거울과 비슷합니다. 거울면이 깨끗하지 않거나 반듯 하지 않으면 사물이 잘 보이지 않잖아요. 수행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오 락가락해서 이건가 저건가 자꾸 흐려지고 흔들립니다. 경전 해설의 내용 을 듣고 독송하고 사경하면서 사마타 수행이 되어야 나의 것이 됩니다. ‘결정코 그렇다’고 받아들여야 진짜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이렇게 대충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반듯하고 깨끗한 거울에 사물이 있 는 그대로 비치듯이 부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그대로 비치게 해야 합 니다. 사마타는 그렇게 흐릿하고 오락가락하고 왔다 갔다 하는 생각을 없애줍니다.
참으로 이 세상은 자성이 없구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결정코 무상 하구나, 이렇게 되어야지 무상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면 안 되 잖아요. 사마타 수행이 받침이 안 되면 그러기 쉬우니 사마타 수행을 꼭 같이 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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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반야심경』 서분
『반야심경』의 원제목인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뜻부터 알려주세요.
모든 불경과 논전에는 제목이 있게 마련인데 제목만 잘 살펴봐도 그 안에 어떤 철학적 내용이 들어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마하(mahā)란 크다는 뜻입니다. 다음 단어인 반야를 수식하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크다는 말은 작은 것보다 크다는 상대적인 개 념이 아니에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과 같은 개념입니다. 더 이상 위가 없고 더 이상 비교할 것이 없는 최상의 바른 깨침입니다.
번뇌가 완전히 사라진 바른 깨침이기 때문에 마하라고 한 것입니다. 깊어지기는 깊어졌는데 다시 또 번뇌가 되살아나 윤회를 되풀이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이죠. 요의(了義)로서 크다는 뜻입니다. 공 성에 관한 가르침으로서 이 이상이 있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번뇌가 다한 큰마음을 말합니다.
저는 과학이나 철학과 종교 그 어떤 분야에서도 이 이상의 지혜는 나 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크다, 작다, 이러한 비교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건데요. 우주의 경우도 지구가 굉장히 큰 줄 알지만 태양계 전체를 보면 별 것 아니죠. 태양계도 은하계에서 보면 아 무 것도 아니잖아요. 은하도 제임스 웹 망원경으로 보니까 엄청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이처럼 큰 것에 비하면 작아지는 상대적인 개념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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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 진리로서 절대성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작다, 크다, 이러한 비교에 서 벗어난 이야기죠. 공성을 이해하고 체험하는 데 있어서 더 이상의 것 이 나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반야(prajñā)는 지혜입니다. 무아이고 무상이고 공성이라고 하는 지혜이니 그 이상이 나올 수 없지요. 마하반야입니다. 반야는 절대 적인 지혜이자 진리를 가리킵니다.
바라밀다(pāramitā)는 도피안이라고 번역합니다. 저 언덕으로 건너가다, 도착하다,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비유죠. 이 언덕은 중생계이고 저 언덕은 니르바나입니다. 반야라고 하는 절대적인 진리를 통하여 윤회하는 이 세상 에서 윤회에서 벗어나는 저 언덕으로 완전히 건너간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언덕, 저 언덕, 이렇게 표현되어 있는 자구에 매달려서 어딘 가 그런 곳이 멀리 따로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 다. 니르바나는 번뇌가 다한 곳이기 때문에 장소가 따로 있지도 않고 나 를 따로 둘 필요도 없습니다. 극락도 마찬가지죠. 우주의 어디를 찾아봐 도 극락이라는 공간이 존재하지는 않을 거예요. 가야할 곳이 아니라 지 금 이 곳에서, 내가 이루는 것입니다. 극락도 우리들 마음 안에 존재할 것 이고 니르바나도 마음 안의 경계이니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다음 심(心)입니다. 범어 흐리다얌(hṛdayam)은 심장이라는 말인데 중국에서 번역할 때 ‘마음 심’으로 번역했어요. 옛날에는 마음이 심장에 있다고 생각했죠. 설레어도 불안해도 화가 나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니까 마음이 심장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심이라고 번역했고 이에 따라 마음의 경전, 마음에 관한 경전이라고 설명하지만 정확한 해석은 아닙니 다. 경전 중에 마음에 관한 말씀이 아닌 것이 있나요? 여기서 심장이라 했을 때는 핵심이라는 의미입니다. 심장이 없으면 생명이 살 수 없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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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범어 수트라(sūtra)를 경으로 번역했어요. 유교에는 사서삼경이 있고 도교에는 『도덕경』이 있죠. 인도에서 수트라라는 말은 성인의 말씀 이라는 뜻이에요. 성인의 말씀이 일반인들의 말과 다른 점은 거짓이 없 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여래께서 절대적인 지혜로서 하신 말씀이니 일체 왈가왈부할 것이 없는 성인의 말씀이라는 뜻이죠. 큰 지혜로서 고통의 세계를 건너서 저 피안에 이르는 핵심적인 성인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Q 반야를 지혜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음역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역경 할 때 어려운 부분이 각각의 단어가 갖고 있는 철학적 개념이나 종교적 개념에 딱 맞는 단어가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범어로 된 경전을 중국에서 번역할 때도 뜻이 맞는 단어가 없으면 음역을 하기도 하고 비슷한 개념이 있을 때는 의역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의역을 했을 때는 뜻이 달라져버리는 경우가 많 죠. 그래서 진언이나 다라니는 아예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음사해서 독 송하기도 했고, 몇몇 주요 단어들은 본래의 뜻이 손상되지 않도록 범어 를 음역해서 사용하기도 했어요.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는 마하나 반야는 그대로 음역했지만 뜻으로 의역하기도 합니다. 즉 정확히 상응하는 개념이 없거나 의미가 달 라질 수 있을 때는 원어 그대로 살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프라즈냐(prajñā)를 지혜라고 의역하지 않고 음역하여 반야라고 하 는 용어로 사용하게 된 것은 당시 중국에서 지혜라는 말의 쓰임이 조금 다르기도 했고 부처님 말씀을 지혜라고 사용하기에는 격이 맞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당시 지혜라는 말은 지식이라는 의미로 쓰였고 공자 나 노자의 말씀을 지혜롭다고 했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을 같은 단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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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하면 공자와 노자의 말씀과 뜻이 혼동될 것을 염려하여 반야로 썼 던 것 같습니다.
Q 『반야심경』도 광본에는 서분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반야심경』도 서분에서 법회가 열린 인연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전 첫머리에는 정형화된 문구가 있죠. 여시아문, 이와 같이 내가 들 었습니다, 이 구절을 넣게 된 연유부터 설명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난 직후 부처님의 제자들이 칠엽굴에 모여 경 전을 결집할 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하나하나 재현한 분이 부처님의 사촌동생이자 25년간 부처님을 시봉한 아난 존자였습니다. 그런데 아난 존자는 얼굴도 체격도 부처님과 많이 비슷했다고 합니다. 멀리서 보면 부 처님과 헷갈릴 정도였다고 해요. 얼마나 비슷하면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나서 아난 존자를 본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께서 다시 돌아 오셨나 오해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경전을 결집하면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 을 여시아문, 내가 이렇게 들었다, 하고 밝힌 것입니다. 부처님으로 오해 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집과정을 보면 500명의 아라한이 한 자리에 모여 부처님께서 말씀 하신 내용을 같이 상기하고 검토하고 동의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때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나는 이렇게 들었다, 하고 제시하 면 여기에 대해 수정과 보완과정을 밟았죠. 그래서 이후 이어지는 내용 들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여시아문, 이 문구로 경은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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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서분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내용을 육성취라고 하지요. 일반 기사문 에서 6하 원칙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까요?
비슷하기는 해도 똑같지는 않습니다. 6하 원칙은 보통 기자들이 기사 를 쓸 때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이렇게 여섯 가지 내용을 기본으로 하여 허위가 아니라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잖아요.
경전의 서분에서는 언제, 어디서 법이 설해졌는지 기록한 다음 설법하 신 분을 명확하게 밝힙니다. 설법하신 분은 대부분 부처님이셨죠. 그리고 그 법문을 어떤 사람들과 얼마나 많은 대중들이 들었는지 자세하고 정 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육성취란 이렇습니다. 이와 같이, 이것을 신성취라고 하고, 내가 들었 다, 이것을 문성취라고 하며, 일시에, 이것이 시성취이고, 설법자이신 부 처님이 주성취, 설법이 이루어진 장소를 처성취, 법을 들은 대중을 중성 취라고 합니다. 이것은 경전 내용에 대한 신뢰성을 높여주고 서지학적으 로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으며 경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갖게 했죠. 불교 경전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육 성취로써 증명됩니다.
인도성지순례에 가면 경전 서분에 있는 내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되죠. 저도 성지순례 가서 부처님께서 『법화경』 등을 설법하신 왕사성 영 축산과 설법하셨던 자리를 직접 보고 『금강경』을 설하셨던 기원정사에 가 서 부처님이 기거하셨던 여래향실을 보니까 눈물이 나더군요. 여기에 부처 님께서 계셨겠구나, 탁발하고 돌아오셔서 여기에서 고요히 앉아 계셨겠구 나, 여기에서 이 위대한 말씀들을 하셨겠구나, 이런 마음이 드니까 울컥 하 기도 하고 신심과 환희심이 나잖아요. 경전에 설해진 그대로의 모습을 확 인하니 너무 생생하더군요. 역사적 유적을 돌아보면서 경전에서 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니 경전이 신뢰 있게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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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육성취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이와 같이, 이 구절은 믿음과 신뢰를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아난 존 자가 500명의 아라한 앞에서 당시 부처님 옆에서 들은 내용을 암송하고 대중들도 그때 같이 들었던 내용이니까 맞는 부분과 잘못된 부분을 모 두 확인하고 동의하는 절차를 거쳤습니다. 그러므로 믿을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신성취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들었다, 이 구절은 들은 주체를 이야기합니다. 대표적으로는 아 난 존자이지만 경으로서 최종적으로 실린 것은 500명의 대중이 다 같이 들었다고 확인된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일시(一時)입니다. 우리말로는 한 때, 이렇 게 해석됩니다. 요즘 같으면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 이렇게 하면 확실할 것 같은데 서분에는 하나같이 ‘한 때’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한 때란 어 느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법회가 열려서 스승과 제자가 정신적 으로 하나가 되는 순간을 말합니다. 특정한 시기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 의 법이 상응하고 상통하는 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서분에서 제가 오랫동안 깊이 생각해봤던 부분이 ‘한 때’입니다.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에 모였다, 이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법 을 전달하는 쪽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시간은 원래 자성이 없는 것이고 계속 변화하는 선상에 있잖아요. 그렇다면 스승이 법을 전하고 제자가 그 법을 받드는 그 순간이 중요한 것 아닐까요? 스승과 제자가 정신적 으로 일치점을 이루는 그 순간이 가장 중요하겠죠. 중국의 주석서에 이 렇게 해석해놓은 부분이 있어서 저도 크게 공감했는데요. 그것이 바로 이 심전심이죠.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시간을 바로 한 때라고 한 것이 아닌 가 합니다.
연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몇 년 몇 월 며칠인가가 중요하겠지만 진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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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스승의 설법을 듣고 제자들이 환희하고 받아들이 는 그 순간이 의미 있는 것 아니겠어요? 시성취의 ‘한 때’를 그렇게 이해 하면 경을 보는 지금 이 순간도 바로 그 ‘한 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 법문하신 분은 당연히 부처님이시죠. 그 법회의 법주가 누구 인가, 이것을 밝혀놓은 것입니다. 이것도 중요합니다. 누가 하신 말씀인 가가 중요하죠. 경이라고 이름이 붙으려면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자기가 한 것처럼 말하면 안 되겠죠. 그 렇기 때문에 이 가르침을 설해주신 분은 부처님이라고 밝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경전을 해석한 글은 논이라고 하고 논을 해석한 글 은 소, 소를 해석한 글은 초라고 구분합니다. 용수보살의 『중론』을 경이 라고 하지 않고 논이라고 하듯이 불교의 모든 글은 이렇게 구분합니다.
다음으로, 법문이 설해진 장소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밀교 의 칼라차크라를 전수하실 때도 전수하신 장소가 있고 전수받은 제자가 24명이라고 합니다. 칼라차크라 법맥을 전수할 제자가 24명밖에 안 됐 다는 거죠. 『화엄경』은 7처9회에서 설해졌다고 합니다. 이처럼 경이 어디 에서 설해졌는지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경전을 보면 설해진 장소가 몇 군데로 좁혀집니다. 『반야심경』은 영 축산 왕사성 죽림정사에서 설해졌어요. 영축산을 영취산이라고 번역하 는 분들도 있는데 그것은 맞지 않습니다. 축은 독수리 축, 취는 매 취인 데 그 곳은 풍장을 하는 곳이므로 독수리가 있는 곳이에요. 그곳에 매는 없어요. 그러니까 영축산이 맞아요. 부처님께서는 영축산 산상에서 『법 화경』도 설하셨습니다. 빔비사라왕과 아자타삿투왕의 이야기도 여기서 등장하죠. 부처님 당시 초기에 교단이 형성되었던 곳이 바로 이 영축산 입니다.
앞으로는 영축산에 가시면 『법화경』과 함께 『반야심경』이 설해졌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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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이라는 사실을 알고 성지순례를 하면 더 뜻 깊겠지요. 순례자들이 그 자리에서 다 같이 『반야심경』을 독송하면 감회가 다를 것입니다.
장소 다음에는 그 자리에 어떤 대중이 함께 했는지 기록됩니다. 부처 님께서 법문을 하셨을 때 누가 들었는지도 중요합니다. 말을 한 사람이 있으면 들은 사람이 있어야 맞죠. 당시 부처님 곁에는 항상 함께 하는 대 중이 1,250명이 있었습니다. 『금강경』에도 1,250명의 비구가 있었다고 되 어 있죠. 『반야심경』에도 1,250명의 대비구들이 있었으며 이들과 함께 7 만이 넘는 보살들이 운집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과 함께 다니는 상 수제자들 뿐 아니라 법회가 열리면 그 지역에 있는 비구스님과 비구니 스 님들, 그리고 재가불자들도 모여 들었겠죠.
달라이 라마께서 칼라차크라 법회를 하실 때 보면 법회 때마다 함께 하는 비구스님이 20만 명 정도 되더군요. 이 분들은 달라이 라마 존자의 법문을 놓치지 않고 들으려고 법회가 열리면 늘 동참합니다. 그리고 다 른 대중들까지 하면 60만 명이 운집하곤 하는데 부처님 당시에도 그랬겠 구나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Q 『금강경』에는 부처님께서 탁발을 다녀오셔서 발을 씻으시고 자리를 정돈하시는 등 당시 모습을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마치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상상하면서 읽게 됩니다.
범어의 문법 자체가 원래 좀 자세한 부분이 있다고 해요. 자세하게 기 록하고 조금씩 문장을 달리하면서 거듭 설명하는 방식이에요. 그만큼 경 전에는 당시의 상황을 아주 세밀하게 기록해놓고 있습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서 상상해보면, 부처님께서는 탁발을 나가시는데 보통 2km 정도를 걸어가신 것으로 보입니다. 성 안으로 들어가시면 차 제걸식을 하셨죠. 부잣집인지 가난한 집인지 따지지 않고 차례대로 탁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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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고 음식을 받을 때도 가리는 것 없이 주는 대로 받아 오셨습니다. 그 런 다음 숲이나 사원으로 돌아오셔서 입구에 있는 걸인과 동물들, 그리 고 환자들에게 각각 1/4씩 나눠주고 나머지 1/4을 본인이 공양합니다.
공양을 마치면 손발을 깨끗이 씻으시고 발우를 씻고 가사를 정돈한 다음 양치하고 법상에 오르셔서 조용히 명상에 잠기셨습니다. 대중들도 자리에 앉아 조용히 명상하면서 오늘은 무슨 말씀을 해주실까 기다렸죠. 이 모습을 그려보면 법회를 통해 가르침을 주고받는 여법한 장면이 펼쳐 지는 것 같습니다.
Q 법회를 볼 때 청법가를 하고 스님의 법문을 듣기 전에 입정에 드는 데요. 그 모습과 비슷하리라 생각됩니다.
부처님께서 법문을 설하기에 앞서 부처님께서 법상에 올라 삼매에 들 어계시고 대중들이 조용히 앉아 기다리고 있는 이 모습에서 입정이 유래 됐으리라 생각해볼 수 있겠죠.
경전을 잘 살펴보면 부처님께서 삼매에 드셨을 때 몸에서 메시지가 나타났어요. 오늘 법회에서 어떤 내용의 법문을 하실지 몸으로 빛을 보 여주셨는데요. 머리와 미간에 빛이 환하게 났다면 그날은 주로 지혜에 관한 말씀을 해주셨고 가슴으로부터 빛이 났다면 주로 자비에 관한 말 씀을 해주셨어요. 그때그때 삼매에 드셔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해주 실지 정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부처님께서 삼매에 드신 그 모습이 지금 우리가 입정 하는 모습과는 겉모양은 같지만 내용이야 같겠습니까? 부처님께서 그렇 게 깊은 삼매에 들어계시고 아라한들이 그 곁에서 같이 고요히 앉아 계 시는 모습이 얼마나 거룩했을까요? 마음도 요동치지 않았을 것이고 주 변도 아무 소리 없이 요동치지 않았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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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럼 이제 서분의 내용 살펴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부처님께서는 왕사성 영축산에서
셀 수 없이 많은 큰 비구 대중과
십지의 동자의 모습을 한 보살 마하살들과 함께 계셨다.
여기에서도 육성취가 나옵니다. 육성취는 부처님 말씀에 대한 신뢰도 를 높여줍니다. 역사적인 신뢰도와 믿음의 신뢰도를 높인 것이죠. 『반야 심경』에서도 여시아문, 일시에, 부처님께서, 이 구절은 같습니다. 그리고 설하신 곳은 왕사성 영축산입니다.
Q 『반야심경』이 설해진 곳은 왕사성 영축산입니다. 불교 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곳이 왕사성이지요?
라자그리하라고 하는 왕사성은 불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입니다.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이 부처님을 받들어 가르침 을 배웠고 그 후 반역을 일으킨 아자타삿투왕도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 의 교화를 따랐던 곳입니다. 최초의 절이 생긴 곳이 왕사성의 죽림정사입 니다. 왕사성에서 한 2km 외곽에 있죠. 그리고 최초의 경전 결집이 이루 어진 칠엽굴도 이곳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 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잊지 말고 후대에 전해주기 위해 500명의 대중이 모여 1차 결집을 한 이후 2차, 3차 결집이 이루어진 역사적 장소 입니다. 그리고 왕사성 성곽 바깥에 산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차타산입 니다. 산 중턱에 있는 독수리봉이 당시에 풍장했던 곳인데 부처님께서 여 기에서 설법을 많이 하셨어요. 지금도 영축산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그 위 에 설법단이 그대로 조성되어 있죠. 그 자리에서 『아함경』, 『법화경』, 『반 야심경』 등이 설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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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반야부 등 많은 경전이 설해진 곳이 기원정사입니다. 부처님 당시 가장 강력한 국가가 코살라국이었죠. 부처님께서는 역사적으로 보면 중 인도 지역의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면서 설법하셨거든요. 국경과 관계없 이 여러 나라의 왕들이 부처님께 귀의했는데 코살라국도 그 중 하나죠.
25년 안거를 지내신 기원정사는 수자타 장자가 친구를 만나러 갔는 데 친구가 부처님께 공양 올릴 준비를 하느라 바쁘다고 하여 같이 뵙게 됐어요. 부처님께서는 전생을 훤히 아시니까 누가 오면 선래비구여, 이렇 게 첫마디가 잘 왔다는 말씀이었거든요. 수자타 장자에게도 부처님께서 선래장자여, 잘 왔다, 장자여, 했어요. 전생부터 부처님 하시는 일을 많이 도왔는지 수자타 장자는 대부자였죠. 기타 태자의 동산이 엄청 넓다고 하는데 그의 놀이터였다고도 해요. 지대가 살짝 높아서 비가 많이 와도 물이 잠기지 않고 숲이 많은 곳인데요. 부처님을 뵙고 크게 감화 받은 수 자타 장자가 기타 태자에게 이곳을 사서 이곳에 부처님이 기거하실 정사 를 지었죠. 그것이 기원정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곳에서 약 25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안거하고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치셨어요. 그때 제자들에 게 법을 설한 내용이 경전으로 정리된 것입니다.
Q 경전에 보면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대중을 보통 1,250명으로 표현합니다.
그 분들을 상수제자라고 합니다. 부처님과 늘 함께 한 제자들입니다. 부처님과 같이 걸식하고 같이 안거하고 부처님께서 다른 지역으로 유행 하시면 모두 같이 옮겨 다니며 부처님을 따르고 공부하고 수행하신 분들 입니다.
Q 그런데 『반야심경』 서분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비구대중과 함께 보살 마하살이 계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대중들을 말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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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는 비구스님들만 계신 것이 아니고 보살들이 여러 모습으로 나투어 여래의 설법에 참여했 다는 사실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특이하게도 이때 청중으로 자리한 대중이 셀 수 없 이 많은 큰 비구대중과 함께 보살마하살들이 계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이 법회에 참석한 십지보살은 비구대중이나 우리들과 는 차원이 다른 존재입니다. 발원에 따라 윤회하면서 공덕신을 나투신 분들입니다. 어떤 번역에서는 7만의 보살대중이 참여했다고 했고 어떤 번역에서는 동자승의 모습으로 계셨다고 했어요. 보살 전체가 동자승이 라는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살은 대승의 보살로서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을 거 쳐 마침내 십지에 다다른 보살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다양한 보살들이 부처님 설법의 자리에는 함께 하셨던 거죠.
Q 십지에 다다른 보살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투셨다고 했는데요. 그 가운데 동자의 모습을 한 보살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화엄경』에 보살수행의 단계가 설해져 있습니다. 80권 『화엄경』 가운 데 40권이 「입법계품」입니다. 여기에서 설해지는 단계가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입니다.
십신은 열 가지 믿음의 단계, 십주는 열 가지 의지를 다지는 단계, 십 행은 열 가지 실천의 단계, 십회향은 열 가지 회향의 단계로서 여기까지 는 예비 수행의 단계입니다. 그 다음 십지, 초지부터 십지까지의 단계를 지상보살(地上菩薩)이라고 하는데 번뇌가 끊어진 도인의 경지에 들어가 는 경계입니다. 초지 환희지부터 십지 법운지까지, 이 보살 십지를 넘어서 면 중생이 원할 때 32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응신, 혹은 보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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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32응신 가운데 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뜻이죠. 우리 나라에도 그런 사례가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문수보살이 아이의 모습 으로 많이 나타나는데요. 대표적으로 오대산 상원사에 전해오는 이야기 가 있습니다. 세조가 피부병을 앓으면서 참회기도를 하고 냇가에서 몸을 씻고 있는데 호위병들이 있고 장막이 쳐진 사이로 어딘가에서 동자가 나 타나 세조의 몸을 씻겨주었죠. 그때 세조가 앞으로 다른 데 가서 왕을 봤 다고 얘기하지 말라고 하니까 동자도 왕께서도 문수보살을 봤다고 얘기 하지 말라고 했다는데요. 그때 세조가 뵌 문수보살상을 조각하게 한 것 이 상원사에 그대로 남아있고 복장 속에도 그런 흔적들이 기록과 유물 로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단순히 설화나 전설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자리에는 1,250명의 상수 비구대중 이 계셨고 그밖에 다른 비구스님들도 계셨고 수많은 보살들이 그 자리 에 와 계셨던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 존자의 법회에서 보면 어린 린포체 들이 단정하게 앉아서 법문 듣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요. 부처님 당시 법 회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어린 린포체들이 법단 옆 상석에 나란히 앉아서 졸지도 않고 눈을 말갛게 뜨고 진지하게 법문을 듣는 모습을 보 면 부처님 당시 보살들이 동자의 모습으로 와서 들었다면 아마도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혼자 상상하곤 합니다.
Q 예전에 열반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아라한의 열반과 보살의 열반에 대해 말씀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한 보살들이 부처님 설법하시는 자리에 오셨다는 말씀이군요.
보살은 말 그대로 중생 구제의 원력을 갖고 다시 태어나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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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초지가 되면 공성 체험이 되고 열반이 이뤄진 것이에요. 그런데 보살은 아라한의 열반을 이룬 후 거기에 머물지 않고 중생을 건지겠다는 보리심 을 일으킵니다. 나의 번뇌를 끊었으니까 이제 이 세상에 나오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건지고 해탈 열반의 길로 이끌겠 다는 원력으로 윤회를 자처한 분들이에요. 보디사트바(bodhisattva)란, 깨달음과 중생이 합해진 말이죠. 보디히는 아라한을 이루었다는 뜻이고, 사트바는 윤회한다는 뜻이에요. 이것을 음역하여 보리살타라 하고 줄여 서 보살이라고 하죠. 뜻으로 번역할 때는 각유정(覺有情), 즉 깨달은 중 생이라는 뜻입니다. 윤회를 하지만 업으로 윤회하는 중생이 아니라 원력 으로 윤회하는 보살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보살들이 중생구제의 보살행을 하시다가 부처님의 설법이 펼 쳐지는 자리에 함께 했던 것입니다.
Q 앞서서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의 보살의 단계를 설명해주셨 는데요. 『반야심경』 서분에서는 보살마하살을 묘사하면서 십지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십지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세요.
십지는 보살의 완성 단계입니다. 앞서서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은 예 비수행의 단계라고 말씀드렸죠. 십지부터는 지상보살로서 아라한과를 이뤄 번뇌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입니다. 의식적으로 일어나는 번뇌는 이 미 다 떨어진 사람들입니다. 욕심이 완벽하게 사라진 거죠.
『화엄경』 「십지품」에 이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옵니다. 그 열 단계 는 환희지, 이구지, 발광지, 염혜지, 난승지, 현전지, 원행지, 부동지, 선혜 지, 법운지입니다. 보통 십지보살이라고 하면 열 단계 가운데 마지막 법 운지를 가리킵니다. 법운지란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모두 법이라는 뜻이에요. 일체 중생을 건지고 윤회하는 모든 행위들이 법이라는 말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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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구름처럼 법이 가득하다고 표현했죠. 자기 욕심을 부리는 것이 하나 도 없으니 거의 부처님에 가까워진 분들입니다.
십지보살의 대표적인 분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 살입니다. 이 분들은 등각, 묘각, 부처님이라고 하는 마지막 성불까지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지만 그것을 미룬 분들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항상 ‘중 생을 어여삐 여기사 열반에 들지 마시옵고 우리 곁으로 와 주십시오.’ 하 고 발원하는 것입니다. 열반에 들 수 있지만 중생을 위하여 지옥에서부 터 천상까지 중생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태어나서 다시 이끌어드리 고 다시 이끌어드리는 것이 보살의 삶이고 보살의 원력이고 보살의 수행 입니다.
Q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설하는 영축산에 십지 보살이 동자의 모습으로 와 계셨다는 말씀이네요.
그럼요. 부처님이 설법하시는 자리에는 십지보살들이 다 와 계시죠. 다만 성문대중들은 보신이 와 계신 것을 보지 못해요. 육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죠. 부처님만 보실 수 있어요. 부처님은 오안이 열려 있기 때 문에 다 보시고 다 아시죠. 부처님의 법문은 다 보시고 다 아시고 하시는 말씀들입니다.
열반하실 때도 당시 비구들은 그 자리에 천신이 와 있는 줄 몰랐어요. 그때 부처님께서 부채를 부치는 시자들에게 자리를 비켜주라고 했죠. 천 신들도 여래가 무여열반에 드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잘 볼 수 있도록 한 거예요.
이처럼 부처님은 천안이 있기 때문에 다 보실 수 있어요. 그 자리에 동참한 십지보살들이 관자재보살을 뵙고, 무슨 수행을 하셨기에 저렇게 훌륭한 분이 계신가, 궁금해 하고 환희스러워 하니까 부처님께서 관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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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에게 그대가 어떤 수행을 했는지 대중들에게 말하라고 하신 거예요. 부처님께서 직접 설법하신 게 아니고 관자재보살에게 대신 하라고 허락 하신 거죠. 관자재보살이 보살지에 오르게 된 핵심적인 내용을 부처님 대 신 설명한 것이 『반야심경』입니다.
Q 앞서 세조가 문수보살을 친견한 이야기도 해주셨고요. 역사적으로 자장스님, 의상스님 등 많은 분들이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을 친견 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역사적인 사실인지 아니면 불자들을 교화하기 위해 들려주신 이야기인지 의문을 갖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중생심은 대체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만 믿고 살죠. 그마저도 사실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한계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더 들어 가서 생각해보면 믿고 싶은 만큼만 믿고, 알고 싶은 만큼만 알고, 믿고 싶은 대로만 믿고, 알고 싶은대로만 알아요.
『화엄경』에서 믿음이 모든 공덕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이야 기하는 이유는 『화엄경』이나 『반야경』 등 요의경의 가르침은 어느 부분 까지는 이론적으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믿음이 없이는 들어가기 어려운 단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 다고 강조하고 있는데요. 신해행증에서도 믿음을 바탕으로 이해하고 닦 아나가야 한다고 하죠.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깨달은 경지를 말로써 설명하는 것에 한계가 있 다는 것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하지만 설명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해 설명하셨어요. 그리고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믿음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유사』에 그러한 기록이 많이 있죠. 우리나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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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중국, 일본, 스리랑카, 티베트 등 여러 곳에서 불보살님을 친견했 다는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지 못한다 면 경전에 실려 있는 무수한 불보살님들의 서원과 중생구제행과 가피를 믿지 못하게 되겠지요.
Q 보살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는 경전이 『반야심경』 서분 외에 또 있나요?
『금강경』의 경우 티베트 번역본에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1,250명의 비구와 보살마하살이 계셨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이렇듯 『반야심경』과 『금강경』 공히 보살대중이 함께 있었다고 기록돼 있는 것입니다. 원본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만 우리가 친숙하게 접하는 한역본에 그러한 내용 이 없다보니 낯설게 느껴지는 것뿐입니다.
Q 그러게요. 그런 구절을 본 적이 없어서 긴가민가하게 됩니다.
가피가 무엇입니까? 보살은 중생을 이끌어주기 위해 항상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가 원할 때 우리 곁에 와 주시죠.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기복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간절하게 기도해서 관세음보살님을 불렀어요. 그래서 관세음보살님이 오셨지만 정작 우리는 믿고 있지 않아 서 곁에 오셨는데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해요. 불러놓고도 헛되이 부 른 거죠.
중생이 도와달라고 할 때 도와주시는 분이 보살님들입니다. 물론 살생 하고 도둑질하는 사람이 도와달라고 하면 못 도와주시죠. 그러나 그릇 된 일을 하지 않고 바른 길로 가고자, 중생을 위하고자, 니르바나에 도달 하고자 도와달라고 하면 언제나 그대들 곁에 있겠다고 하는 분이 보살님 들입니다. 다 해줄 수는 없지만 도와줄 수는 있어요. 우리가 눈이 어두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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뵙지 못하지만 우리들 곁에 항상 계십니다. 그것을 명훈가피라고 하죠.
눈이 어둡고 천안이 열리지 않아서 뵙지 못하지만 내 곁에 항상 계시 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에요. 어디를 가더라도 뜻하지 않게 위험하고 어려운 순간을 겪을 수 있잖아요. 그럴 때, 지켜주십시오, 하면 우리가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 들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수행이 깊어지면 불보살님이 꿈에 선명하게 나타 납니다. 꿈이라는 것이 보통은 아주 산란스럽지만 기도를 열심히 하여 순일해지면 예지몽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죠. 그때 불보살님이 설법을 해준다거나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는 가피를 줍니다. 그것이 몽중가피예요.
그다음 바로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현전가피입니다. 불보살님이 보 신으로서 몸을 나투실 때는 그만큼 나에게도 초지 이상의 안목이 있어 야 하고 선정력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장스님이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문수보살의 사리와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를 모시 고 와서 통도사에 봉안했죠. 그때 신라 백성의 대다수가 믿음이 크게 일 어나고 수계를 하고 결국에는 삼국 통일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Q 경이 설해지는 자리에 여러 보살대중이 와 있었지만 스님들이나 일반 불자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거군요.
우리 눈은 3차원적이에요. 우리의 감각이란 육체를 유지하는 정도의 센서 밖에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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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렇다면 불보살님에 대한 믿음이 이웃 종교의 신에 대한 믿음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이웃 종교에서는 전지전능한 신이 전부 해준다고 하죠. 하지만 해줄 수 없어요. 죄를 사해준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다만 어린 아 이를 키울 때 아이가 자라면 스스로 할 수 있는 힘이 커지지만 그러기 전 까지는 옆에서 도와주고 챙겨줄 일들이 있잖아요. 부모가 도와줄 일이 많으냐 적으냐 그 차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불보살님이 우리 곁에 오시기를 원한다면 이렇게 발원해야 합니다. ‘불보살님, 이타적으로 살겠습니다.’ ‘이타행으로 가는 길에 장애가 있 으면 잘 헤쳐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저도 잘 헤쳐 나가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해나가야 합니다.
Q『반야심경』의 서분, 이어지는 내용 살펴보겠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곧 매우 심오한 광명으로 바른 법을 선설하는
삼마지에 들어계셨다.
우리도 법회를 시작할 때 입정을 하죠. 산만한 마음을 집중하기 위한 것인데 경전을 보면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던 전통이 아닐까 해요.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볼까요? 아침에 걸식하시고 돌아오셔서 손발 다 닦으시고 가사를 털어서 가지런히 걸쳐 놓습니다. 부처님 뿐 아니라 모든 대중이 고요한 가운데 이렇게 하셨을 거예요. 그런 다음 약간 높게 해놓은 설법단을 중심으로 대중들이 둘러 앉았겠죠. 이때 부처님께서는 항상 가부좌하시고 삼매에 들어계셨어요. 이때 삼매를 나투는 모습이 경전마다 조금씩 다르게 표현됩니다. 어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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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눈썹 사이의 미간 백호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고 어떤 때는 가슴에서 광명을 보이고 또 어떤 때는 몸 전체에서 광명을 보이셨다고 합니다. 설 법하실 내용을 광명으로 표현한 거죠.
미간 백호에서 광명을 비추실 때는 주로 반야 지혜에 관한 말씀을 하 시고 가슴으로 광명을 놓으실 때는 자비에 관한 말씀을 주로 하시고 몸 전체로부터 광명을 발하실 때는 계율과 행동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번뇌가 없으니까 일상에서도 삼매의 상태에 들어 계시지만 법문을 할 때는 보다 깊은 삼매에 드시는 모습으로 광명을 비 춰주신 것입니다.
삼매란 번뇌 없이 집중되어진 상태입니다. 제자들 앞에서 고요하고 평온한 모습으로 앉아계시면 제자들도 주위에서 조용히 선정에 들어 법 문을 기다렸겠죠. 제자들은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면서 오늘은 무슨 말씀을 해주실까 기대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을 거예요. 부처님 께서 삼매에 드신 모습은 아마도 깨침의 핵심을 보여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불상은 대부분 부처님께서 가부좌 자세로 앉아계시는 모습 이죠. 앉아서 마음을 집중시키는 모습이 대다수잖아요. 설법하실 때도 서 서 하지 않으셨어요.
Q 법회 때 법문을 듣기에 앞서 입정의 시간을 갖는데요. 부처님께서 설법하시기 전에 고요하게 삼매에 들어계시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부처님께서 삼매에 드신 모습은 경전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그 러한 모습만으로도 청중들은 오락가락하는 잡념들을 정리할 수 있는 시 간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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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계속해서 다음 내용입니다.
마침 관자재보살마하살이
그 부처님의 모임 가운데 있었는데
이 보살마하살은 이미
매우 심오한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여
5온의 자성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관찰하여 깨달았다.
관세음보살(Avalokiteśvara)은 일체 중생을 위하겠다는 마음과 모든 중생을 건지겠다는 마음이 한량없이 큰 분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소리를 모두 관한다는 뜻으로 관세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중생의 고통을 관 찰하고 건지는 능력이 자유자재한 분이에요. 그래서 관자재보살이라고 도 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했습니다.
이러한 광대한 원력과 자유자재한 능력을 표현한 것이 천수천안입니 다. 눈이 천 개라는 것은 중생의 고통을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이 셀 수 없 이 많다는 뜻이고, 손이 천 개라는 것은 건질 수 있는 방편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뜻이죠. 십일면관세음보살 역시 동서남북과 그 사이 간방, 그리고 상하와 중앙, 이렇게 11면 어느 방향에서도 중생들이 괴로워하고 간절히 부르면 언제든지 응하여 달려가겠다는 뜻을 표현한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 처음 발심하게 된 연원은 이렇습니다. 8~9세 정도 되는 어린 형제가 해안가 절벽에 있는 보타락가라고 하는 산에 버려졌다고 합 니다. 형제 둘은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고립무원의 절벽에서 서로를 꼭 끌어안고 지내다 결국 죽게 되었죠. 이때 원을 세웠는데요. ‘우리와 같이 고통을 받는 이가 있다면 세세생생 나의 이름만 부르면 달려가 도와주리 라.’ 그 원력이 다음 생으로, 다음 생으로, 세세생생 이어지면서 부처님을 만나 뵙고 십지보살에 이른 것입니다. 이때의 형이 대세지보살, 동생이 관세음보살입니다. 그래서 극락전에는 아미타부처님을 가운데에 모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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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십니다. 인로왕이 되어 아미타 부 처님이 계시는 극락세계로 중생을 이끌겠다는 원력을 가진 분입니다.
『반야심경』은 관세음보살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십지보살에 이르게 되었는지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관자재보살 이 보신을 나투셨고 대중들 가운데 사리자가 대표 질문을 한 거예요. 어 떻게 해서 저런 훌륭한 분이 우리 눈앞에 나타났습니까, 어떤 수행을 해 서 그런 경지에 다다랐습니까, 묻는 거죠. 그러자 부처님께서 관자재보살 에게 ‘그대가 무슨 수행을 했는지 이야기하라’ 하신 거예요. 그대의 이 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같다고 해주신 것입니다.
그때 관자재보살이 오온이 공한 이치를 말씀하셨죠. 관자재보살의 이타심도 나라는 것이 사라지지 않으면 불가능하거든요. 내가 있다면 나 와 남이 나눠지기 때문에 진정한 이타심이 나올 수 없어요. 남을 위한다 는 것은 나의 욕심을 해체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절을 크게 짓고 선 행을 조금 하는 것이 보살행이 아니에요. 영원한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 을 정확하게 확인하고 자기 수행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이타심입니다. 나에 대한 욕심과 집착이 완전히 사라져야 합니다. 욕심을 버리는 데 있 어서 핵심은 내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돈도 권력도, 그리고 우리가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이 몸도 영원성을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남에게 줄 수 있죠. 그렇지 않으면 남에게 주지 못해요. 주더라도 내가 줬다는 아상이 일어나죠.
우주가 자성이 없고 영원성이 없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내 욕심이 떨 어지지는 않아요. 대상에 대한 착각은 떨어지겠지만 욕심을 버리지는 못 해요. 욕심을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재하는 나라는 것이 없다는 사 실을 정확하게 아는 거예요. 인연으로 잠시 왔다가 잠시 있으면 간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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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알아야 남을 돕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이 생각을 갖는 것이 욕심 을 버리고 보살행을 하고 부처로 나아가는 핵심입니다.
Q 사리자가 가르침을 청하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때 존자 사리자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관자재보살마하살 앞에 나아가 물었다.
여기에서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었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달마스님이 혜가스님에게 전법하고 오조 홍인스님이 육조 혜능스님 에게 전법했듯이 이 사람이 법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으니 나의 이야기 와 다를 게 없다고 하신 거예요.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인정해주셨다는 뜻 입니다. 관자재보살이 십지보살이고 법운지를 이룬 분이니 부처님의 이 야기와 다를 바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Q질문자이자 청법자로 등장하는 사리불존자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사리불(Śāriputra)이라는 이름에서 사리라는 말은 영롱한 눈빛이라 는 뜻이에요. 박물관에 모셔진 사리불존자 모습을 보면 눈빛이 유난히 반짝반짝하게 표현되어 있어요. 푸트라는 아들이라는 뜻이에요. 즉 눈빛 이 반짝반짝한 여인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이라 는 뜻이겠죠. 십대제자 가운데 사리불존자는 지혜제일로 불렸어요. 불교 의 지혜에 깊이 통달해있었고 부처님과 법을 논할 수 있는 법제자였죠.
대단히 뛰어난 부처님의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후대에 가장 손꼽히 는 열 분의 제자를 뽑아놓은 것이 십대제자입니다. 1,250명의 아라한과 셀 수 없는 보살대중이 모여 법회를 봤다는 것은 환희심 나는 일이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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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사리불 존자가 관자재보살에게 묻는 내용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만약 선남자와 선여인이
매우 심오한 이 반야바라밀다의 법문에서
닦고 배우기를 즐거워하려면
마땅히 어떻게 배워야만 합니까?
부처님께 질문하듯이 여기에서는 사리푸트라가 관자재보살에게 질문한 거예요. 부처님께서 관자재보살에게 대신 설법하라고 하시고 부처님께서 는 증명으로 앉아 계시는 거죠. 관자재보살이 공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일체 중생을 위해 나를 버리는 행을 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우 리는 반야바라밀다를 어떻게 닦아야 합니까, 물었습니다. 『금강경』에서 수보리가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한 이가 어떻게 마음에 머물러야 하 고 어떻게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 하고 물은 것과 같은 질문이에요.
당신의 그런 훌륭한 모습을 보고 또한 부처님께서 증명하시는 모습 을 보고는 그러면 우리가 공부를 해나감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냐고 물은 거죠. 보살행에 들어가는 방식을 물은 것입니다.
Q여기서 부처님의 십대제자에 대해 간단하게라도 설명해주시겠어요?
부처님 당시 가장 뛰어난 열 분의 제자를 후대에 꼽은 것인데요. 그 가운데 부처님 곁에서 부처님의 뜻을 펼치고 교단을 이끌어갔던 두 분이 사리푸트라와 목갈라나입니다. 나란다 대학이 있는 곳이 사리푸트라와 목갈라나의 고향이에요. 이 두 분은 한 바라문의 제자이자 절친한 친구 였어요. 그 바라문이 돌아가시면서 같이 공부했던 제자들이 모두 흩어지 게 되었죠. 헤어지면서 두 분은 좋은 스승을 만나면 서로 연락해서 다시 만나자고 했는데 부처님을 만나 같이 출가한 것입니다. 사리불은 공성에 대한 체험이 깊은 분이고 목건련은 신통력이 뛰어난 분이었죠. 부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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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큰 수행자입니다.
그리고 마하가섭 존자가 있지요. 부처님 제자들 가운데는 가섭이라 는 이름이 많았는데요. 우선 우루빌라 촌에 세 명의 가섭 형제가 있었습 니다. 가장 나이 많은 가섭은 당시 나이가 120세였다고 하죠. 세 명의 가 섭은 당시 배화교라고 하는 조로아스터교의 거두들이었어요. 그 나라의 왕사들로서 명성이 높았지만 부처님을 뵙고는 부처님이 번뇌가 다한 누 진통까지 다다랐다는 것을 알고 부처님으로부터 번뇌를 다하는 법을 배 웠습니다. 이때 가섭 형제는 그들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부처님의 법을 따 르고자 하는 사람은 같이 가도 좋다고 하여 큰 가섭의 제자가 500여 명, 둘째 가섭의 제자가 250여 명, 셋째 가섭의 제자가 250여 명이었는데 모 두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분들이 천 명이에요.
두타제일이라 불리는 마하가섭은 다른 분입니다. 마하가섭은 부처님 보다 연세가 많은 분이었어요. 이 분은 계행에 철저해 시체를 화장하는 시타림 근처에서 기거하면서 하루에 한 끼만 공양했으며 옷도 시신을 덮 었던 옷을 깨끗이 빨아 입으셨죠. 두타행에서는 부처님 제자 가운데 이 분을 따라 가실만한 분이 안 계셨어요. 영축산에 가보면 가섭 존자의 굴 이 독수리봉 바로 밑에 있어요.
부처님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대중들과 함께 있지 않고 혼자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부처님께서 허용하신 분이 마하가섭 존자예요. 부처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제자라고 해서 선종에서는 마하가섭 존자가 부처님의 법을 전승받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삼처전심이죠. 석가모 니 부처님 상을 모신 전각에 보면 아난 존자와 나란히 모시고 있습니다.
아난 존자는 부처님 사촌동생으로 부처님과 외모도 너무 비슷해서 멀리서 보면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고 해요. 25년간 부처님을 시봉했죠. 다만 부처님 당시 아라한과를 이루지 못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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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깨달음을 이루셨습니다. 그때 정진하신 굴이 지금도 칠엽굴 아래 왕 사성 안에 있습니다. 그곳에 한 발로 서서 선정에 들었던 자리가 있어요. 부처님 가르침이 후대에 전해지게 한 데에는 아난 존자의 공이 크죠.
그리고 지계제일 우팔리 존자는 이발사 출신입니다. 부처님 당시 카 필라성에서 왕족들을 이발해준 분인데 부처님 설법을 듣고 왕자들이 출 가하려고 하자 먼저 출가한 분이에요.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율을 철저 히 배우고 지킨 분으로, 계율에 관해서는 모두 이 분께 물었어요. 부처님 열반 후 1차 결집 때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는 아난 존자가 정리하고 계 율에 관해서는 우팔리 존자가 정리했죠.
그리고 공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제자가 수보리 존자입니다. 해공제일 이라 불리죠. 『금강경』에서 부처님과 문답을 나눈 분이 수보리 존자입니 다. 부처님께서 바른 법을 설하실 수 있도록 적절한 질문을 하기도 하고 부처님께서 물으시면 잘못된 답을 하는 등 부처님이 설하고자 하는 바 를 말씀하실 수 있도록 한 지혜로운 분입니다. 공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 부처님과 대화 상대가 되었던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전연 존자는 논의제일이라고 불렸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 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하여 여러 의견에 적절하게 답을 준 분입니 다. 당시 다양한 종교집단에서 논쟁을 요청할 때 조목조목 논리로써 모 순과 허점을 타파했던 분입니다. 훗날 아비달마 시대가 논의 시대였는데 요. 불교의 논설이 발달할 수 있는 근간이 가전연 존자에서 비롯되지 않 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설법제일 부루나 존자가 있죠. 요즘에도 연설을 잘 해서 대중 을 사로잡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처럼 말씀을 조리 있게 하고 설득력 있게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선설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아난 존자처럼 부처님 사촌인데 출가한 아나율 존자가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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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하지만 출가에는 큰 뜻이 없었던 터라 출가 후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어요. 공부에 게으름을 부리니까 부처님께서 크게 꾸지람을 하셨죠. 공개적으로 혼이 나자 분심을 내 잠을 안 자고 공부해서 눈이 멀어버렸 어요. 어쩌면 상기가 되어 그런지도 모르죠. 부처님께서 눈을 치료하라고 했지만 정진을 그치지 않았던 건데요. 그때 부처님께서는 그대가 육안을 잃었지만 심안이 열릴 것이라고 했어요. 천안이 열린 거죠.
십대제자 가운데 마지막으로 라훌라 존자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아 들이 태어났을 때 부처님께서는 ‘장애’라고 탄식했어요. 혈육은 출가하 려는 마음을 흔드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겠죠. 어쨌든 부처님은 아들마 저 출가시켰습니다. 라훌라는 출가해서 처음에는 나이도 어리고 하니까 장난도 치고 거짓말도 하는 등 말썽을 부렸다고 해요. 하지만 마음을 다 잡고부터는 수행에 매진했는데 그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고 했다고 합 니다. 그래서 밀행제일이라는 별칭이 붙었죠.
십대제자 한 분 한 분이 불교교단에서 중요한 분들입니다. 부처님의 철학과 사상에 있어서 저마다 꼭짓점을 이룬 분들입니다.
Q 『반야심경』 서분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그동안 우리는 『반야심경』의 정종분만 독송해왔기 때문에 서분과 유 통분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분들이 많았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경 이 어디에서 설법되어졌고 어떤 인연으로 그러한 말씀이 나오게 됐는지 잘 몰랐죠. 『반야심경』이 왕사성 영축산에서 설해졌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고 관자재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모습을 나투어 반야바라밀다 를 어떻게 닦고 배웠는지 설했다는 것을 앎으로써 불자 여러분의 믿음이 더 크게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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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반야심경』 정종분
Q『반야심경』 정종분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겠습니다.
이제부터가 본문입니다. 철학적 내용과 신행적 내용이 모두 들어있는 부분입니다. 이제부터는 깊이 있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아주 세밀한 이야 기가 나옵니다. 범어가 갖고 있는 논리적 사고 체계가 반복적으로 나오 고 이것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개념전달이 불명확한 부분도 있어서 이 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이 점 유념하여 좀 더 집중해서 공부해주 시면 고맙겠습니다.
Q 첫 구절입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너느니라.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한다, 어떤 의미인가요?
반야바라밀이 핵심입니다. 반야바라밀은, 모든 존재는 자성이 없다는 공성에서 출발합니다.
존재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라는 존재, 또 하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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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이라는 존재입니다. 나를 아(我)라고 하고 대상을 법(法)이라고 합니 다. 불교에서 법은 여러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인데 여기에서는 나를 상 대로 하는 대상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나와 대상은 모두 자성이 없다는 것이 무아이고 무상이고 공 성입니다. 달리 말하면 연기하는 변화로서만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무 아와 무상과 공성을 깊이 관찰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입니다. 모든 것은 서로 인연 지어져 변화한다는 것을 깊이 관찰하면 대상도, 나도 집착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죠.
공성에 대한 깊은 관찰이 반야바라밀이고 그 반야바라밀을 깊이 관찰하는 것을 행심반야바라밀이라고 한 거예요. 깊이 관찰한다는 것은 사마타로 집중하여 흐트러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건가 저런 건가 좌고 우면하지 않고 그대로 그렇게 흔들림 없이 바로 보는 것입니다. 사마타 라고 하는 집중과 삼매에 들지 않으면 깊이 있게 볼 수 없어요. 관자재보 살이 깊은 삼매로 흔들림 없이 반야바라밀에 들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러 한 인식을 가지면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Q 조견, 비추어 본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인가요?
행심(行深)이 깊이 관찰한다는 의미인 것처럼 조견(照見)도 비추어본 다는 뜻으로, 반야바라밀을 깊이 통찰한다는 뜻이니까 있는 그대로 보 는 것입니다.
누구나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냐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사실, 있 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견해로 보기 때문이죠. 똑같은 대상을 보고도 누군가는 예쁘다고 하고 누군가는 별로라고 합니다. 맛 있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싫어하는 사람도 있죠.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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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을 바라볼 때도 아름답다고 하는가 하면 쓸쓸하다, 허무하다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실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것은 굉장히 어 려운 문제입니다.
모두가 영원성을 갖고 있지 못하고 변하지 않는 자체 성질을 갖고 있 지 못하다는 것으로 보면 실재를 보는 거죠. 변화를 보면 사실대로 보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제 모습이 없 고 그대로 사라진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태어나고 죽는 생명의 실상 을 보면 사실대로 본 것이지만 무엇인가를 믿어서 죽어서도 영원히 산다 거나 어디 다른 곳에 간다거나 이렇게 생각하면 있는 그대로 본 것이 아 니죠. 생로병사, 생자필멸, 이것을 우리가 모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너 무나도 확실하고 변함없는 이 사실을 자신의 문제 앞에서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욕심을 떠나지 않고 집착을 떠나지 않으면 있는 사실대로 보이지 않 습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줄 알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있어요. 이 안경을 벗지 않고서는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색안경을 벗는 것이 불교 공부이고 수행입니다. 속지 않는 것이 깨달음이죠.
물론 있는 그대로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부 아를 가지고 보 기 때문에 대상을 바라볼 때 나를 투영해서 봅니다. 나를 투영해서 보면 저것이 나에게 좋은가 안 좋은가 이렇게 보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래 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이름과 모양뿐이라고 하셨어요. 소나무라고 하면 소나무라는 이름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죠. 모양도 다 다릅 니다. 인도 소나무, 히말라야 소나무, 우리나라 소나무, 종류도 다르고 이름도 다르잖아요. 이름도 개념 지어진 것뿐이고 모양도 실재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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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죠. 자성이 없습니다. 인연 따라 일어난 현상일 뿐이에요.
이처럼 인연 따라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나라 는 것을 비우고 볼 때 가능합니다. 자성이 없고 이름과 모양뿐이어서 전 부 변화한다고 보는 것이 잘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Q 오온개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온의 개념에 대해 알아야 하겠죠?
여기서 먼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앞서 대상을 법이라고 했지요. 그 대상은 우주도 되고 지구도 되고 하늘도 되고 땅도 됩니다. 또한 법의 다른 의미는 인간의 사고 체계와 철학 체계를 가리키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대상이 공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 요. 아가 공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아가 공한 것을 알면 대상도 공 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온조차 공한데, 인간인 나라는 것조차 자성 이 없는데 대상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 말입니다.
대상에 대한 집착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은 창조주 내지는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내 안의 철학이나 신념 같은 것도 영원성이 있 다고 착각하죠. 이런 것들이 모두 법집입니다. 그런데 가장 소중하게 생 각하는 나조차도 아가 없으니 대상이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대상에 앞서 오온이 공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온은 사람을 설명하는 개념입니다. 고대 분석학적으로 설명한 것인 데요. 크게 나누면 정신과 물질입니다. 두 가지 온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스 철학에서 4이데아를 이야기하고 중국 철학에서 오행을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설명방식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온(蘊)이란 쌓였다, 무더기, 덩어리, 이런 뜻입니다. 하지만 다섯 가지가 각각 완전히 나눠지고 분리되어 있다고 보기보다는 다섯 부류가 유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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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연계되어 있고 화합되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오온은 사람을 지칭하 는 것입니다. 사람을 분석해보니 색수상행식, 이렇게 이루어져있다는 거죠.
색(色)이란 빛이라는 뜻도 있고 성적인 대상이라는 뜻도 있지만 여기 에서는 몸을 가리킵니다. 정신적인 것을 배제한 육체를 말합니다. 육체도 물질이죠. 그것을 지수화풍 사대로 나눴어요. 생물학적인 구성요소이자 구성 원리로서의 이데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地)는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가지 견고한 물질들입니다. 현대과학으로 이야기한다면 석회, 칼슘과 같은 물질이라고 할 수 있겠 죠. 수(水)는 우리 몸의 유화적 물질들로서 혈액과 수분 등입니다. 화(火) 는 에너지예요. 단백질, 탄수화물, 당, 이런 것들이 화에 포함되겠죠. 풍 (風)은 움직이는 성질을 갖고 있는 것으로서 해부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신 경 조직과 뇌 조직에 해당됩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우리의 몸이 색온(色 蘊)입니다.
색, 그러니까 우리의 몸이 없으면 정신적인 것을 담을 수 없죠. 지수 화풍이 토대가 되어 정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계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볼까요? 세상과 연결되 는 첫 번째 통로는 감각기관입니다. 안이비설신, 눈, 귀, 코, 혀, 피부라고 하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대상을 받아들이죠. 이 다섯 개의 감각 기관이 대상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을 느끼면서 대상을 받 아들이고 소통하는 것을 수온이라고 합니다. 대상과 접촉한다는 의미에 서 수온(受蘊)입니다. 수온을 느낌, 감수라고 번역하죠. 감각 기능을 통 해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각각의 감각기관은 한정된 역할만 해요. 눈은 빛밖에 못 보고 소리는 못 듣죠. 다른 감각기관도 고유의 역할만 하고 다른 기능은 못 해요. 이렇게 각기 다른 기능과 작용을 받아들여서 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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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달하는 것을 오감이라고 합니다. 눈으로 보고 빨간색이라고 느끼는 것 은 안식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상온(想蘊)입니다. 눈으로 받아들여 알고, 다른 감각기관도 저마다 그런 방식으로 사물을 인식합니다. 직감 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뇌가 발전하면서 통합적 의식이 생겨 생 각을 형성합니다.
빨간 색을 보고 향을 맡고 먹어보고 먹을 때의 소리와 만져본 기능을 모두 종합해 의식에 전달하면 예를 들어 사과라는 대상에 대한 의식이 생기죠. 맛있다, 같이 먹었던 어느 날의 기억, 비타민을 채워야 한다 등등 의 생각들이 일어납니다. 여기까지가 상온이에요. 그러면 그러한 의식에 따라 먹고 싶다, 사와야겠다, 씻어야겠다, 의지가 생기겠죠. 그것이 행온 (行蘊)입니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의지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일어나는 작용이 식(識)의 작용입니다. 나의 GPS가 생기기 시 작하는 거예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하는 것이 모두 나에게 좋고 나쁨 으로 분류가 돼요. 좋다, 싫다, 이도저도 아니다, 이런 것으로 나눠지죠. 이 단계에서 분별하는 의식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한 의식이 제7식 마나식입니다. 그리고 좋다, 나쁘다, 하고 싶다, 하기 싫다, 이러한 생각과 행동이 오랜 시간 반복되어 뇌 속에 깊이 기억되고 저장되는 것이 제8식 아뢰야식입니다. 기본적인 의식부터 7식, 8식이 식온(識蘊)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정리하면 색온 은 우리의 몸으로서 지수화풍 4대, 수는 감각기관으로써 대상경계를 받 아들이는 느낌작용, 상온은 받아들이면서 생각을 일으키는 것, 행온은 생각을 종합해 행동을 일으키는 의지작용, 식온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의 6식과 7식, 8식입니다.
오온은 인간을 인식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유식학이 아주 자세히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해심밀경』부터 『성유식론』 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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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의식이 형성되는 과정과 인간의 심리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어 유식 학은 현대 서양 심리학 분야에 많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Q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오온이 공하다고 했습니다.
오온개공이 『반야심경』 전체를 통괄하는 말입니다. 오온으로 이루어 진 그 어느 것도 불변의 자성을 갖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지수화풍 4대 가 불변의 자성이 있나요? 『아비달마구사론』에서는 불변의 자성으로서 지수화풍 4대가 있다고 했어요. 하지만 유식학파에 의해 깨졌습니다. 고 전물리학에서 깨지지 않는 원자가 있다고 했지만 훗날 다 깨져버린 것과 비슷해요. 지수화풍이 불변의 자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과학에서 증명되었죠. 물질적인 것 가운데 불변의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은 아무 것 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유식학에서는 물질은 끝내 변하고 사라지지만 인간에게 마지막까지 깨지지 않는 것이 있다고 봤어요. 그것이 아뢰야식이라고 했죠. 이것도 용수보살의 중관학파에 의해 논파되었어요.
불교학자들도 무언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 거죠. 예를 들 어 부처님의 사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유골이기 때문에 귀하 게 여기는 것뿐이죠. 이 세상에 불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지수화 풍 4대가 자성이 없고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무상하고 변화 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색온도 자성이 없고 수상행식 역시 그 안에 자성이 없어요. 눈을 예로 들면 눈이라고 하는 기관도 변하지 않는 자성이 없고 대상이 라고 하는 빛도 자성이 없으니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식한 내용도 자성이 없겠죠. 단지 상응해서 일어난 것일 뿐이에요. 오온이 공하다는 것은 색 수상행식 모두 자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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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 다음 구절, 도일체고액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아주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고통은 전부 집착하는 데서 일어납니다. 영원한 내가 있다는 생각에서 영원을 추구하고 그것이 안 되면 죽어서라 도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게 일반적인 종교의 논리잖아요. 무엇이 되었 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집착하게 되고 욕심을 부리게 되죠. 살아서는 이 몸이 오래 유지되어야 하고,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잘 나야 되고 많이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죽은 뒤에도 어디 좋은 곳으로 가야 한다 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0.1%도 없어요. 다 물 거품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이에요.
좋은 것만 그런가요? 고통이라고 하더라도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고 통이 영원하다면 어떻게 살겠어요? 반면에 행복이 영원하다 그러면 하나 도 행복하지 않을 거예요. 고통과 행복이 왔다 갔다 하니까 이것이 행복 이구나 알게 되고 감사할 줄 알고 즐거움도 크겠죠.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하고 실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느끼면 집착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집착해서 일어나는 것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면 집착으로 인한 고통이 사라지겠죠.
제가 한 번은 강력 본드를 사용하다가 손에 붙어버린 적이 있어요. 급 하게 떼어봤지만 본드가 묻었던 피부 일부가 같이 떨어지더군요. 우리의 아가 바로 그래요. 집착이 세서 딱 하고 붙으면 떼려고 해도 잘 안 떨어 지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게 돼요. 여기에 비해 물풀 같은 것은 떼기 쉽잖아요.
이 세상의 고통과 액난이란 집착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 문에 나라는 것조차 공하다고 느끼고 깊이 관찰하면 다 지나가는 바람 과 같은 것들이라는 것을 확연히 알게 되죠. 그것을 붙들고 아파하고 원 망하고 시비 걸 일이 하나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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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온이 공한 줄 잘 알면 고통과 액난은 다 지나가는 것이라는 사실 을 알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길 을 발견하신 거예요.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부 처님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건지셨습니다. 지혜로써 우리의 고통을 구제 하셨고 지혜로써 우리를 바른 길로 이끄셨어요. 꿈과 같은 고통 속에 빠 져 있는 것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하시며 착각과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말 씀하시고 거기에서 건져주신 거예요.
Q 다음 구절입니다.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수상행식도 그러하니라.
『반야심경』은 부처님께서 관자재보살에게 설명하라고 부촉하고 증 명해주셨어요. 사리자가 질문한 것이 무엇인가요? 선남자 선여인이 심오 한 반야바라밀다의 법문을 닦고 배우기를 즐거워하려면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 물었죠.
보살을 『법화경』에서는 여래사(如來使)라고 했어요. 국가에서 다른 나라에 외교관으로 파견한 사람을 대사라고 하죠. 대사는 대통령의 대 리로서 국가의 정책을 그 나라에 설명하는 업무를 합니다. 그와 마찬가 지로 여래사라는 것은 부처님을 대신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어요. 여기에 서도 관자재보살이 여래사로서 부처님을 대신하여 공에 관해 설명해주 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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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앞서 오온이 공하다고 한 다음 그 내용을 보다 자세히 설명하는 내용 인데요. 공이라고 하는 한자와 무라는 한자는 혼동하기 쉬운 것 같 습니다.
공(空)과 무(無)는 혼용해서 사용하기 쉽죠. 하지만 경전에서 공과 무 는 엄연히 다르게 사용됩니다. 수학에서 플러스 기호나 마이너스 기호는 같을 수 없죠. 공과 무도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공을 무라고 하거나 무 를 공이라고 하면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공이라고 하면 무조건 허무하다고 받아들이고 무라고 하면 비었다고 이해하는데 이는 모두 철학적으로 명쾌하지 못한 해석들입니다.
공이란 수학의 제로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로 라고 하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제로는 1의 바로 아래이고 -1의 바로 위입니다. 제로에서 1과 –1이 발생하죠. 모든 수의 출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제로에서 1이 되고–1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숫자가 무한수로 플러스로 나가고 마이너스로 나가더라도 모두 제로에서 출발합니다. 무한수 곱하기 제로는 제로죠. 그러므로 제로는 없는 수가 아니고 그렇다고 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1과 –1은 있는 것이 되죠. 그러나 제로는 +1과 –1 이전의 일입니다.
공성이란 영원한 성질을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이지 없는 것이 아니에 요. 무엇으로 있느냐 하면 연기로서 있어요. 변화하는 것으로서 있습니 다. 다만 영원한 자성은 없습니다.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에 연기로서 존 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만약 수소가 영원한 것이라면 산소와 절대 결합이 안 되죠. 물이 안 됩니다. 또한 산소가 영원한 것이라고 해도 수소와 결합할 수 없죠. 이렇 게 수없는 변화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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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공을 제로에 비유하니까 이해하기가 조금 더 쉬운 것 같습니다.
제로라는 개념이 인도에서 발생했다고 하죠. 그네들도 브라흐만 신 을 믿으면서 모든 것은 하나에서 출발했어요. 그 하나 이전이 뭐냐고 하 면 신에 대한 부정이 되거든요. 이것을 극복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는데 우 파니샤드 시대가 되면서 많은 신흥 종교와 철학이 등장하고 사문들이 나 오면서 그런 사유를 하기 시작한 거예요. 당시의 새로운 사상들은 부처 님의 탄생에도 큰 영향을 끼쳤죠. 그렇게 하여 공이라는 개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Q 그러면 무는 어떻게 다른가요?
이것은 없는 거예요. 『반야심경』에서 무안이비설신의, 이런 구절이 나 오죠. 눈, 귀, 코, 입, 몸, 뜻, 이런 것이 본래부터 있지 않았잖아요. 본래부 터 있지 않는 것을 무라고 하고 공성은 그로부터 모든 것이 발생한다는 뜻이에요.
우주학에서 이 세상은 빅뱅 이전에 무엇이었을까 했을 때 수학적으 로는 답이 가능해요. 공입니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우주가 발생한 거예 요. 수학적으로 제로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는 태어나기 이전에 무엇이었을까요? 태어나기 전에는 눈도 손 발도 있지 않았겠죠.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간화선에서는 부모님 뱃 속에 들어가기 이전에는 무엇이었는지 묻고 있잖아요. 그것은 말로써, 머 리로써 답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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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러면 한 구절 한 구절 공부해보겠습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의 의 미를 풀어주십시오.
바로 앞구절에서 전제하기를 색수상행식 오온이 모두 공하다고 했습 니다. 색은 우리의 몸이고 지수화풍 4대라고 했죠. 색불이공, 즉 색이 공 과 다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지수화풍 4대는 자성이 없이 공성이에요. 하 지만 지수화풍 4대가 있기는 하잖아요. 그래서 불이(不異), 다르지 않다 고 한 거예요. 지수화풍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지수화풍과 다르지 않 다고 했어요.
그리고 바로 다음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했죠.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 이 말은 지수화풍이 원래부터 자성이 없기 때문에 변하 지 않는 것이 없이 연기한다는 이야기에요.
Q 같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겠지요? 1이 제로에서 출발했지만 제로와 같지는 않죠. 지수화풍이 공성이기 는 하지만 없는 것은 아니잖아요. 연기해서 있으니까 공성과 완전히 같지 는 않아요. 아예 없는 것이라면 같은 것이 되겠지만 없는 것은 아니고 발 생을 했으니까 다르지 않다고 표현한 거예요. 여기에서 공성 또한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성질일 뿐이죠. 초전도체의 예를 들어 볼게요.
초전도체는 –270℃ 정도로 내려가면 전기 저항이 아예 없어져버린다고 합니다. 물질이란 자석과 같이 당기고 밀어내는 힘이 발생하는데 이 상태가 되면 제로와 같은 상태가 되죠. 그 러면 이것은 물질과는 다른 하나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와 같 이 공성이라고 하면 지수화풍 4대는 자성이 없을 뿐이지 서로 다른 존재 로서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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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색불이공 다음에 공불이색을 설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색이 현상으로서 존재하고 연기로서 존재하지만 자성은 공입니다. 색 이 소멸해 다른 것으로 변화할 때 공성이 작동합니다. 그러면 공성으로 서 다시 색이 되죠. 그렇기 때문에 공과 색은 선후가 서로 뒤바뀔 뿐이지 계속 반복되는 현상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자성이 공하고 자성이 공하기 때문에 전부 공으로 돌아갑니다. 공으로 돌아가니까 다시 변화가 일어나죠. 공하지 않으면 다시 색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색이 공 이고 공이 색입니다.
인연 따라 화합했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이러한 끊임없는 변화 는 모든 존재가 비어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Q 색과 공이 불이라고 한 바로 다음에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라고 했습니다. 즉의 개념을 같다는 개념으로 봐도 될까요?
불이(不異)는 다르지 않다는 의미이고 즉(卽)은 속해있다는 의미입니 다. 즉이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즉이라는 개념을 수학의 벤다이어그램 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두 개의 원이 서로 겹쳐지는 교집합처 럼 이것이 저것에 속해져있다는 뜻입니다. 물질과 공성이 같다고 할 수는 없죠. 물론 포함돼있다고 해도 정확하지는 않은데요. 서로 존재하는 상 대적 방식이라고 보면 더 정확할 거예요.
한자가 지니고 있는 다의어의 특색 때문에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 지만 세밀하고 정확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 은 각각의 의미에 대해 스스로 깊이 사유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진리의 내용은 언어로써 완벽하게 전달될 수 없기 때문에 남이 이야기해주는 것 만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사유하는 힘이 있어야 그 내용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즉의 개념에 대해서도 깊이 사유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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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보다 다르게 다가올 것입니다.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인 이유는 이렇습니다. 지수화풍 4대가 존 재하는 것은 공성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공성이 없이는 지수화풍이 존 재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공성 또한 지수화풍 없이는 형성될 수 없어 요. 사람에게 자성이 있다면 각자 다른 사람이 생겨날 수 없을 거예요. 각 자 다 다르게 생겨났다는 것은 자성이 없기 때문이죠. 색과 공은 이러한 관계에 있습니다.
Q 이 구절을 색과 공에 치우치지 말라고 해석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 해석은 너무 멀리 나간 해석인데요. 결과적으로는 있다고 하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하고, 많은 경우 공을 잘못 이해해 무유애에 치닫는 것을 경계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자세한 설명 없이 말해버리면 색과 공의 중간을 취하라는 것처럼 들릴 수 있죠. 불교의 중도를 거리의 중간이나 숫자의 중간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불교의 중도는 파사현정입니다. 삿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중도이지 적당한 중간이 아닙니다. 중도가 연기법이고 공성입니다. 공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중도 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음속에서 분별망상인 양극단이 없어진 것을 중 도라고 하고 그래서 번뇌가 사라졌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Q 공을 해석할 때 허무주의에 빠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을 아예 없는 것이라 생각해서 허무주의에 빠집니 다. 공은 자성이 없다는 얘기죠. 자성이 없으니까 변화합니다. 불교 철학 은 철저히 이것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변화하기 때문에 ‘어 떻게 변화할 것인가’가 중요하고 이것이 수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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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면 허무주의가 될 수 없어요. 공을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허무가 되는 거예요. 허무에 빠지지 말라고 얘기하는 것 자 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도저히 허무주의에 빠질 수 없는 사상입니다. 만 약에 아가 있다면 아에 집착하겠죠. 하지만 아가 없으니까 내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변화하려고 노력하게 되니까 사실은 더 적 극적으로 돼요.
그런데 처음부터 부처가 있고 본래 부처라고 하면 우리가 부처로 변 화하려고 할 이유가 없잖아요. 가만히 놔둬도 부처가 된다는 논리가 되 죠. 불성이라고 하는 것도 본래 있고 변하지 않는 것이라면 무언가 변하 지 않는 어떤 것을 찾기만 한다는 논리가 되죠. 그렇기 때문에 발아뇩다 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자는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 인가,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연기법과 공성을 따로 놓고 보면 공은 허무가 되고 연기는 변화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잘못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수행 은 양 극단으로 가게 되죠. 공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조합니다.
138억 년 전 빅뱅으로 물질과 생명이 형성되어 지금에 이르는 것도 공 으로부터 발생한 것입니다. 수많은 행성이 생기고 또한 항성들이 끊임없 이 소멸해 백색왜성으로 사라져가는 성주괴공이 우주 속에서도 계속되 고 있어요. 물리학이나 우주과학의 원리도 공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죠.
정확하게 알면 불교가 가장 적극적인 철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 다. 허무하다거나 숙명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불교는 ‘내가 어 떻게 변할 것인가’ 하는 것을 자각하게 하는 종교입니다.
Q 오온이 공하다는 사실을 한 구절 한 구절 설명하고 있는데요. 색불 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에 이어서 수상행식 역부여시,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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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식도 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수상행식도 앞의 공식인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 다는 의미죠. 수불이공 공불이수, 수즉시공 공즉시수, 우리가 받아들이 는 감각도 주체가 있지 않고 자성이 공합니다. 수온, 즉 받아들이는 감각 작용도 따로 고정된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발생한 것이죠. 자성이 없습니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감각이 발생하죠. 받아들이는 감각 그 자체가 공성이고 공성 그 자체가 받아들이는 감각입니다. 두 개 는 따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예요.
마찬가지로 상불이공 공불이상, 상즉시공 공즉시상입니다. 생각도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잖아요. 무엇을 보고 듣고 감각으로 느껴서 생각이 일어나죠. 생각이 곧 공성이고 공성이 곧 생각입니다.
그다음 행도 똑같은 원리예요. 의지도 공성과 다르지 않고 공성이므 로 의지가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윤봉길의사도 처음부터 독립의 의지를 갖고 있었던 건 아니잖아요. 여러 상황을 만나면서 독립이라는 의지를 갖 게 된 거죠. 원래부터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독립이라는 의지를 낼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러므로 의지도 공성과 다르지 않고 공성이기 때문에 의 지가 발생하며 따라서 의지는 공과 즉해있고 공은 의지와 즉해있습니다.
색수상행, 나를 구성하고 있는 그 어디에서 자성이 없고 불변하지 않 아요. 그러므로 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죠.
그리고 오온의 마지막인 식도 그렇습니다. 안다, 인식한다는 의미의 식은 일반적인 의식인 분별식과 제7식 마나식, 제8식 아뢰야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가톨릭 때문에 심리학이 발전하지 못했지만 불 교에서는 유식학 등으로 인간의식에 대한 연구가 발전해왔기 때문에 이 것이 현대 심리학에도 많은 영감을 주고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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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흐만교에서 아트만이 있어서 이것이 다 보고 듣는다고 하거나 신을 믿는 종교에서 어떤 영혼이 보고 듣는 주체라고 하지만 의식 역시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죠. 대뇌가 생기면서 발생한 거예요. 진화하면서 의식기능도 발전해온 것입니다. 고대 인류가 발생한 것이 250만 년 전이 고 호모 사피엔스가 시작된 것이 20만 년 전이라고 하죠. 그런 인류학적 인 발전과정에서 대뇌의 발전과 함께 의식이라는 영역이 커진 것입니다.
의식도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전5식에서 받아들여져 발생되죠. 의식 안에 본래부터 아가 있었다면 새로운 의식들은 발생할 수 없잖아 요. 대뇌가 있건 없건 그냥 알겠죠. 의식도 자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치면서 의식이 형성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도 공성과 다르지 않고 공성이라는 것도 의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제8식 아뢰야식입니다. 유식학에서는 이 것이 영원한 것이라고 여겨 장식(藏識)이라고도 하고 여래장(如來藏)이 라고도 했어요. 현대 심리학 용어로 보면 무의식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본래부터 있지 않습니다. 이미 다 만들어져 있다면 무엇도 더 할 것이 없겠죠.
아뢰야식도 이렇게 봐야 합니다. 우리가 계속 무엇인가를 반복하는데 그것이 바로 업입니다. 업을 반복하니까 관성에 의해 에너지가 차곡차곡 쌓이고 깊숙이 저장됩니다. 오랜 기억이고 축적되어 저장된 기억입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어떤 업을 계속하느냐에 따라 바뀌죠.
생물학적으로 진화를 하는 데 DNA가 필요하잖아요. 아뢰야식은 정 신적인 DNA라고 생각하면 맞을 겁니다. 물질적 DNA도 고정불변한 정보 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변하죠.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적 DNA라 할 수 있는 무의식도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따라서 아뢰야식도 자성을 갖고 있지 않죠. 그러므로 아뢰야식도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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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아뢰야식이 존재합니다. 아뢰야식은 공에 속해 있고 공은 아뢰야 식 안에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색수상행식은 모두 자성이 없기 때문에 오온개공이에요. 집착 하고 애착하는 것들이 다 사라진 상태가 니르바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모르면 니르바나가 되지 않아요. 잠시 조용해지는 것으로는 니르바나라고 할 수 없어요.
Q 불이는 둘이 아니라고 하셨고, 즉은 속해있다고 하셨습니다. 공하기 때문에 연기로서 속해있다는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반야심경』은 시작하자마자 바로 핵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 로 오온개공입니다. 여기서 핵심이 공이죠. 사람들은 공을 따로 얘기하 고 연기를 따로 얘기하지만 그것은 같은 거예요. 종이를 한 장 들고 이쪽 면과 저쪽 면을 분리해서 설명하지만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연기와 공은 같은 개념입니다.
용수보살께서 『중론』에서 명확하게 말씀하셨죠. 무자성인 고로 공이며, 공인 고로 연기라고 했어요. 공을 설명하기 위해 연기를 설명하고 연기를 설명하기 위해 공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을 허무로 받아들이고 연기를 현상으로만 이해하면 양극단이 됩니다. 공이 바로 연기입니다.
Q 오온이 공하고 공이 곧 연기임을 안다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자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것을 알게 되겠죠. 변 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 삶의 태도가 어떻게 될까요?
만약에 아기를 낳았는데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이 아기가 변하지 않고 평생 그대로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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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겠어요? 그렇게 바란다고 그렇게 되지도 않죠. 이렇게까지 어리석지는 않지만 많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사랑을 주고 보살피면서 그 안에 이와 같은 집착이 있는 경우가 많아요. 모든 것은 자성이 없이 변화한다는 것 을 인식하면 과거의 애착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좋게 변화 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어요. 그 어떤 것이든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 은 고집일 뿐이에요.
따라서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변화를 수용합니다. 여기서 수용이라고 하는 것도 비주체적으로 가만히 받아들이는 것에 머물지 않 아요. 어떤 변화를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에 부처의 길로, 보살의 길로, 아라한의 길로 변화하게 됩니다. 스스로 그 길 을 찾아가게 되죠. 그것이 니르바나의 길이라는 것을 알면 그렇게 가려 고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반야심경』에서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오온개공 도일체고액입니다. 오온개공이 안 되면 도일체고액이 안 돼요. 공함을 알지 못하면 고통에 서 건져지지 않습니다. 건지는 것도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에요. 스스로 자각하여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집착으로부터 놓아주는 것입니다.
Q 계속해서 제법이 공한 모습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좀 어려운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반야심경』 전체 가 어려운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부처님의 오도송과 같은 내용이고 차제 법문의 불요의경이 아니라 요의경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저도 최선을 다해 설명해 드 릴 테니 여러분께서도 찬찬히 잘 살펴봐주시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여러 번 반복해서 보고 듣고 깊이 사유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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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다음 구절입니다.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여! 모든 법은 공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반야심경』에서는 공을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이렇게 여섯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공의 철학을 가장 완벽하게 정리한 용수보살은 팔 불중도로 설명했어요. 여러 번 말했지만 용수보살은 중도에 대해 무자성 인 고로 공이고 공이 곧 중도라고 명확하게 설명했습니다. 『반야심경』의 육불중도와 용수보살의 팔불중도를 이해하면 중도와 공성을 보다 잘 이 해하게 됩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은 공에 대한 설명이자 중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자체의 자 성과 영원성을 갖고 있지 않고 전부 다 변화하고 연기합니다. 이것이 공 성이고 중도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생과 멸, 더러움과 깨끗함, 늘거나 줄어드는 여섯 가지를 부정함으로써 공성과 중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공성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고 『금강경』은 이러한 공성 과 중도를 기반으로 이상적인 인간상을 설명해놓은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설하고 있는 공성 이론은 물리학과 과학의 영역에서 도 연구의 토대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학과도 결코 멀어지지 않는 이야기라고 봐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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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공이 곧 중도와 통하는 개념이라고 하시네요?
공성이란 그 안에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자성이 있지 않다는 말입니 다. 본래부터 자성이 없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양 극단이 사라졌다는 이야기죠. 물리학으로 이야기하면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사라진 것입니 다.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사라지면 중성자도 사라지거든요. 양극이 사라 졌으니 중도죠. 수학적인 중간이라든가 길이적인 중간을 이야기하는 것 이 아니라 양극단이 사라진 것이 중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성이 곧 중도입니다. 사람의 마음에서도 번뇌인 양극단이 사라진 것을 견성이라 고 하고 이것이 중도의 상태입니다.
Q 중도는 『아함경』 등 초기경전에서도 자주 만나는 개념인데요.
『아함경』 전체가 중도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삼법인 (三法印)입니다. 마치 도장을 찍어놓은 것처럼 세상이 존재하는 변하지 않는 원리라는 의미에서 법인이라고 했죠. 물리학에서 에너지 불변의 법칙 이라든지 양자 역학의 원리처럼 변하지 않는 존재의 원리는 세 가지입니다.
삼법인의 핵심은 제법무아(諸法無我)입니다. 모든 존재는 영원성을 갖고 있는 아가 없습니다. 영원한 나는 없어요.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이 말은 어떤 영원한 절대적 인 권능으로 생명을 만들어내거나 움직이게 하는 창조자도, 주재자도 있 지 않다는 뜻입니다. 아트만이나 영혼이나 실재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 리의 착각된 믿음일 뿐이죠.
중도, 무아, 공성이 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공성과 중도는 대승의 가르 침이고 무아는 초전법륜의 가르침이라고 하지만 용어가 다를 뿐 같은 의미 입니다. 모든 것은 자성이 없고 연기하여 변화한다는 것은 같은 이야기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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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교진여 등 다섯 비구에서 처음으로 법을 설하실 때는 먼 저 고행과 선정과 쾌락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어요. 당시 인도의 수행풍토 는 고행주의가 팽배했죠. 먹는 것, 자는 것 등 일상생활을 극도로 제한하 고 온갖 방식으로 육체를 학대하는 고행을 통해 아트만을 해탈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죠. 또 하나는 지극한 선정에 몰입하는 수행풍토가 있었죠. 선정을 통해 마음을 완전히 없는 상태로 가라앉히는 것이 아를 해탈시키는 길이라고 여겼어요.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해서 해탈 시킬 아라고 하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끝없는 고행으로 해탈시킬 아 가 없으며 지극한 선정으로 해탈시킬 아는 없다고 하셨죠. 그러한 방법 으로는 고가 사라질 수 없다고 한 거예요.
그리고 당시 풍미했던 또 하나의 풍조가 환락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 이었어요. 환각된 상태를 즐거움이라고 여겼고 니르바나라고 생각했어 요. 지금도 일부 서양에서는 그런 것을 통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는 것 같은데요. 비단 종교적인 추구가 아니더라도 왕이 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좋은 음식과 유희를 즐기는 환락이 행복이 라고 생각했죠. 행복이라는 것을 이런 데서 찾으려고 했지만 이것을 통 해서도 행복할 수 없잖아요.
부처님께서도 출가 초기에는 당시의 수행풍토에 따라 선정도 닦으셨 고 고행도 하셨죠. 6년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고행을 하셨지 만 그것으로 열반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고행을 접으 셨습니다. 그래서 그때 같이 고행하며 따랐던 다섯 명의 비구는 부처님이 고행을 포기했다고 타락한 사람이라고 멀리했죠. 그래서 그들은 부처님 께서 깨달음을 이룬 후 다섯 비구가 있는 녹야원에 왔을 때 맞아들이려 고 하지도 않았잖아요. 하지만 부처님의 위의와 평화롭고 환한 모습에 저절로 절을 올리고 자리를 내어주며 설법을 들었죠. 이때 부처님께서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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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하신 것이 고락중도입니다.
고행은 행하면 행할수록 생에 대한 애착이 강해지며 쾌락은 즐기면 즐길수록 피폐해지고 후회가 커지니 이것은 바른 길이 아니라고 하셨죠. 그러한 잘못된 길을 하나하나 깨부수면서 바른 길을 찾으신 거예요. 그 길은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아에 대한 고집을 없애 니르바나를 이룩한 다고 하셨어요. 당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잘못된 수행의 극단을 지적한 것이 고락중도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아직도 고행이 곧 깨달음이라고 착각하고 그것만이 수승한 길이라고 여기는 풍토는 반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부처님께서는 6년 고행으로 깨달으신 것이 아니에요. 그것이 바른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당신만의 선정과 사유로 진리를 꿰뚫어보셨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Q 시제법공상, 어떻게 해석하면 될까요?
제법(諸法)이란 모든 존재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법 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제법공상은 삼법인과 그대로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앞에서 오온이 공하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이제부터는 자성이 없을 때의 공한 상태를 존재론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성이 없는 공의 모습, 즉 모든 존재의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다른 철학이나 종교에서 본래 변하지 않는 자성이 있다거나 아트만을 갖고 있다거나 창조한 신이 있다거나 우연히 생겼다거나 운명 적으로 생겼다고 하는 모든 논리적 모순을 극복하고 자성이 없다고 했 을 때 그러면 공성이란 어떤 원리를 갖고 있는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것은 수학의 공식과 같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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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자성이 없는 공의 성질,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불생 불멸입니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어떤 의미일까요?
경전을 번역할 때 적절한 용어를 선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도 티베트 장경을 번역하려고 용어 사전을 만들고 있는데요. 티베트와 우리 나라의 사상적, 문화적, 언어적 차이가 크기 때문에 적합한 개념을 찾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그런 점에서 구마라집스님과 현장스님의 번역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아주 적합한 용어로 정확하게 번역했어요.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근원적으로 보면 윤회를 하지 않는다는 니르바나와 정확하게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어요.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영원한 무엇이 또 있다고 생 각하죠. 영원한 내가 있으니까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고 이해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렇다고 비생비멸이라고 해도 정확하지 않아요. 구마라집스님과 현 장스님이 모두 아니 불이라고 번역하여 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 니라고 했는데 이것이 가장 정확한 번역 같습니다.
불교 안에 팽배해있는 인식 가운데 하나가 영원한 불성이 있어서 나 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고 하죠. 그래서 영원한 그것만 깨달으면 나지 도 않고 죽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 다. 이것은 부처님의 무아와 공성에 배치되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 법이 냐 부처님 법이 아니냐의 판단 기준은 무아와 공성입니다. 일념이 되어 생과 사의 분별이 사라진 중도의 상태가 공성 체험입니다.
Q 바로 그 점입니다. 인연에 따라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왜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고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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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정확하게 풀어본다면, 나는 것이라고 해도 맞지 않고 죽는 것 이라고 해도 맞지 않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저도 출가해서 처음에 『반야심경』을 외우고 공부하면서 어딘가 콱 막 히는 느낌이 있었어요. 오온개공, 오온이 모두 공하다고 하면, 있는데 왜 없다고 하는지 이해가 잘 안 됐어요. 그러나 달라이 라마의 법문을 들으 니 확연하게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나조차도 자성이 없으니 공하다는 가르침이 사마타와 위파사나를 닦을수록 차츰차츰 받아들여지고 뚜렷 해지더군요.
불생불멸을 이해하기 위해 비유를 하나 들어볼게요. 바람이 불어서 바다에 파도가 일었어요. 그리고 바람이 다하면 파도는 사라집니다. 그 것이 공이에요. 바람이라고 하는 에너지에 의해 파도가 발생했다가 바람 이라고 하는 에너지가 사라지면 파도도 사라집니다. 하지만 파도가 일어 도 바닷물이고 파도가 사라져도 바닷물이에요. 파도는 인연에 의해 발 생되어지는 현상일 뿐이죠.
그것을 우리의 생과 비교해보면 어떤가요? 꿈과 같죠. 파도가 사라지 듯이 생도 사라지게 되잖아요. 파도에 자성이 있어서 사라지지 않겠다고 한다면 언제나 떠있겠죠. 사람도 아무리 안 죽겠다고 해도 안 되잖아요.
그러므로 태어났다고 해도 생을 떠났고, 사라졌다고 해도 사를 떠났 죠. 이것이 연기법의 핵심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자성에 의해서 생겨났다 면 흑인, 백인, 황인, 이런 것도 있을 수 없을 거예요. 남자, 여자로도 나 눠질 수 없죠. 불변의 자성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전부 기계에서 찍어 낸 것처럼 똑같겠죠.
생명은 모두 업의 힘에 의해 발생되었다가 업의 힘이 다함으로써 사 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제각각이죠. 생사를 여러 가지로 비유하 는데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다고도 합니다. 우리의 생이라는 것은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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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를 당겨 화살이 하늘로 솟구쳐 멀리 날아가다가도 힘이 다 하면 떨 어지는 것과 같아요.
불생불멸을 영원성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면 힌두교와 다를 게 없어 요. 영원히 살거나 영원히 죽는다고 한다면 한 번 잘못해서 지옥에 떨어 지면 평생 못 나오죠. 모든 것은 인연의 힘, 업의 힘에 의해 발생되어지고 사라지는 것이니 생이라고 말해도 맞지 않고 죽음이라고 말해도 맞지 않 다, 이렇게 해석하면 좀 더 뜻이 분명해집니다. 이것이 윤회입니다. 부처 님께서 말씀하신 윤회는 연기법과 무아법이 기본이에요. 영원히 변치 않 는 고정불변의 아트만이 있어 이곳으로 왔다가 저 브라흐만천으로 돌아 가는 그런 윤회는 없다고 하셨죠.
Q 불생불멸을 생이라고 해도 맞지 않고 멸이라고 해도 맞지 않다, 이 렇게 해석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렇게 이해하면 훨씬 정확할 거예요. 저는 오온개공이라는 구절도 오온조차 공한데 다른 것은 따질 게 어디 있겠느냐, 이렇게 해석하니까 이해가 훨씬 잘 되더라고요. 내가 좋아하고 고집하는 나조차 자성이 없 는데 다른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없다고 하면 공성에 대하여 완전히 이해 가 되잖아요. 수미산이건 히말라야 산이건 그 어디에 자성이 있겠어요?
Q 공의 첫 번째 성질이 불생불멸입니다. 난다고 해도 맞지 않고 멸한 다고 해도 맞지 않다고 하니 불생불멸이라는 구절이 좀 더 이해됩니다.
공의 성질을 설명하거나 번역할 때 적절한 용어를 찾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겁니다. 말로 설명하는 순간 어그러지기 쉬운 부분이 있거든요. 그 런데다 적절한 설명이고 번역임에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 분도 큰 것 같습니다. 없다고 하는데 자꾸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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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글자를 따라가게 되거든요.
그런 점에서 보면, 생과 사가 없다는 말은 상당히 적절합니다. 내 마 음속에서 생이라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양 극단이잖아요. 선적인 경지에서 이 두 가지 생각이 다 사라져 일념이 됐을 때는 생사가 없다는 말이 가장 정확해요.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인식 의 한계에서는 오해의 소지도 있을 수 있죠.
서산 휴정스님께서 『선가귀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에게 한 물건이 있으니 이름과 모양으로도 말할 수 없음이라. 어둡기로는 칠흑같이 어둡고 밝기로는 태양처럼 밝다. 나에게 한 물건이 있으니 이것이 무엇인가?’ 이렇게 화두로 던졌을 때는 맞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이것을 잘못 받아 들여서 한 물건이 있다고 하니까 다시 또 아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죠. 언 어의 한계 때문에 그런 오해가 생기는 거예요. 아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Q 이어서, 불구부정,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고 했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더럽다, 깨끗하다, 이것도 상대적인 이야기입니다. 절대적인 더러움이 어디 있고 절대적인 깨끗함이 어디 있습니까? 상대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고 상대적으로 보이는 것이죠.
옛날에는 화장실에 벌레들이 많았잖아요. 우리는 더럽다고 하지만 벌 레들에게는 그곳이 더러운 곳이 아니죠. 비단보다 좋은 이불이고 맛있는 먹이이고 생명의 텃밭이죠. 우리는 음식을 먹고 배출을 하는데 박테리아 나 이런 존재들은 그것을 양식으로 받아들이고 배출합니다. 지렁이가 있 는 곳이 더럽다고 해서 깨끗하고 따뜻한 곳으로 옮겨주면 살아갈 수 있 나요? 이것은 자연 순환의 고리일 뿐이죠. 그러니 절대적으로 더럽고 절 대적으로 깨끗한 것은 있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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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처한 현실에서 대상을 바라보면서 다르게 느끼는 것뿐입니다. 그에 따라 좋고 싫은 감정과 번뇌를 일으킬 뿐이죠. 인문학적으로 보면 인종차별도 더럽고 깨끗하다는 이 생각에서 나온 거예요. 인류학적으로 봐도 같은 조상에서 나온 한 뿌리인데도 우리는 이러한 기준으로 서로 를 규정하죠.
자성이 없기 때문에 더럽고 깨끗하다는 개념은 있지 않아요. 분별심 이라고 하는 것은 아에 의해서 발생하는 현상일 뿐이에요. 공성에서 바 라보면 더럽고 깨끗함이 없습니다. 음식과 배설물의 차이도 내장기관을 지나갔다는 차이밖에 없잖아요. 단지 분별심을 일으켜서 더럽다, 깨끗하 다, 혹은 선하다, 악하다, 규정짓고 대립하면서 싸울 뿐이죠. 절대적인 깨 끗함도 없고 절대적인 더러움도 없습니다. 더럽고 깨끗하다는 것은 모두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현상적인 분별 속에서 살기 때문에 더럽고 깨끗함 속에서 살지만 중도에 이르면 더럽고 깨끗함 을 떠나서 산다는 뜻입니다.
Q 부증불감,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 어떤 의미죠?
이것은 이미 과학계에서 에너지 총량 불변의 법칙으로 증명됐어요. 우 주에는 수많은 은하가 있고 행성과 항성, 백색왜성들이 있지만 모두 온 도나 조건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뿐이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가장 많은 에너지를 받고 있는 것은 태양 에너지입니다. 감자를 먹고 쌀 을 먹고 토마토를 먹는 것은 모두 태양 에너지예요. 모습이 변하고 소모 되고 유지하는 양이 바뀌지만 에너지의 총량은 변함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더하고 덜할 것이 없다고 하신 거예요. 바다에 파도가 쳐서 철썩거리고 포말이 부서지고 하더라도 바닷물이 줄어드는 게 아니죠. 또한 기온의 변화에 따라 수증기로 올라갔다고 해서 물이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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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게 아니잖아요. 이처럼 이 세상의 모든 변화하는 것들은 연기하여 변화하는 것뿐이죠. 조건과 상황에 따라서 바뀐 것처럼 보이고 줄거나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변화된 것이 없어요.
물이 액체 상태로 있다가 기체와 고체로 형태는 바뀌지만 물이라고 하는 성질이나 입자나 에너지 총량에 있어서는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 드는 것도 없어요. 자성이 없는 공성을 이해하면 모든 물질에 대해 정확 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여기에 창조론이 들어설 자리가 있나요? 증감이 없다는 것은 이 현상계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의 정신세계도 여여부동의 상태를 여래라고 하는 것입니다.
Q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자성이 없음을 설명한 거예요. 과거에 브라흐만 신이나 창조신에 의 해 창조되었다고 했던 때에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겠죠. 아트만이 있고 영혼이 있다고 믿으면 나고 죽는 게 있고 더럽고 깨끗한 게 있다고 믿게 됩니다. 모든 것이 자성이 없이 인연 따라 발생했다고 하는 생각에 의해 서 평등하다는 생각도 나오는 거예요. 자성이 없이 인연 따라 발생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다 아름다운 거죠.
부처님과 우리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요? 인간이라는 점에서 공통 점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점이 훨씬 많다고 할 수 있겠죠. 그렇다고 완전 히 다르냐 하면 완전히 다르지도 않아요. 같다고 할 수도 없고 다르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하나인가 하면 하나가 아닙니다. 하지만 다르냐 하면 완전히 다르지도 않아요. 자성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변화하 여 생성되고 각자의 업에 따라 달라지고 발전되는 거예요. 우주 가운데 지구라는 행성에서 60만 종에 달하는 생명이 태어나고 인간 역시 다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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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으로 살게 된 것은 조건에 따라 변화해서 나온 것이죠.
그러한 변화와 인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고 한 것입니다. 다르다 고 차별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똑같다고 하면서 차이와 개성을 무시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존재는 화엄의 말처럼 같음 속에서 다릅니다.
Q 『반야심경』에서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으로 제법공상의 모 습을 설명하고 있는데요. 용수보살은 이것을 여덟 가지로 설명했다고 하셨죠?
불교의 론(論)의 과정은 크게 네 단계로 나눠집니다. 가장 먼저 아비 달마 시대가 있었어요. 이때는 20개 부파가 교학적으로 다양하게 해석하 고 무엇이 옳은가 논쟁했죠. 그 가운데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구사론』 이 존재론에 관한 유론으로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 논서는 초전법 륜의 경전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존재론과 논쟁한 학파가 유식학파예요. 유식학파는 『해심밀 경』을 중심으로 설명했어요. 유식학파에서는 『구사론』에서 주장한 존재 의 자성을 부정했지만 여전히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변하지 않는 자성이 있다고 봤기 때문에 유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식학파 이후 새롭게 등장한 학파가 자립논증파입니다. 마명스님 등이 진여연기를 주장했어요. 아뢰야식에도 불변의 자성이 없다면 무엇이 존재하는가 했을 때 진여가 존재하고 그 진여로써 연기한다고 한 거죠.
그리고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 용수보살에 의해 논파되었습니다. 구 사론부터 유식학파, 자립논증파에서 주장하는 것은 모두 부처님께서 말 씀하신 무아와 공성에 벗어난다고 했죠. 공에 관하여 철저하게 논쟁하면 서 하나하나 완벽하게 깨나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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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논쟁에서 펴낸 여러 논서 가운데 공성에 관해 쓴 대표적인 저 서가 『중론』입니다. 중도론이라고 할 수 있겠죠. 『중론』의 첫 구절이 ‘무 자성이므로 공’입니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이라고 결론 내렸어요. 그 리고 『반야심경』처럼 중도에 관한 내용을 여덟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용수보살은 『반야심경』과 같이 공성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불생불 멸을 이야기했고, 그 다음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 래불거(不來不去)라고 설명했어요. 『반야심경』에서도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등으로 무자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용수보살의 팔불중도를 이해하면 『반야심경』의 육불중도를 좀 더 확장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Q 불생불멸은 앞서서 공부했으니까요, 이어지는 내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불상부단, 어떤 내용인가요?
여기에서는 상과 단을 먼저 이해해야 하겠죠. 상(常)은 항상하다, 영 원하다, 계속된다, 이런 뜻이고 단(斷)은 끊어진다, 단절된다, 이런 뜻이 에요. 연기론의 입장에서 봤을 때 영원한 것은 없죠. 모든 것이 변화하니 까 같은 것은 단 하나도 없어요. 예를 들어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은 아 버지와 어머니의 영원성을 받아서 태어나지 않고 변화해서 태어난 거죠. 아버지와 어머니의 특성을 절반씩 닮았을 테고 그 위로 올라가면 외할머 니와 외할아버지,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를 각각 25%씩 받았겠죠. 그 위 로 올라가면 또 나눠지고요. 이렇게 계속해서 변화해서 형성되는 거예요. 영원히 그대로 이어지는 것은 없어요.
이처럼 모든 것은 변화하잖아요. 그렇지만 누구와 완전히 닮은 부분 도 있어요. 세대를 건너뛰어서도 그 모습이 보이죠. 그렇기 때문에 끊임 없이 변화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딱 끊어지는 것도 없어요. 그것이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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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과 부단입니다. 중도 역시 영원하다는 상견과 끝이라는 단견, 이 두 가 지 극단의 견해가 사라진 경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주도 끊임없이 변화하죠. 은하에 있는 수십억 개의 별이 오랜 세월 부딪치고 깨지고 가루가 되고 다시 형성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수축되고 터지는 과정을 반복해요. 그렇게 우주의 먼지가 되어 날아가서 다시 다 른 행성을 형성하고 항성을 형성하죠.
이처럼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그 변화에 있어서 영원히 똑 같은 것으로 이어지지도 않고 완전히 끊어져서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조 건과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죠. 그런 점에서 생명과 인류의 발전과정만 떼 어놓고 보면 진화론이 설명을 상당 부분 정확하게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를테면 다윈의 연구업적 가운데 하나인 갈라파고스의 거북이 이야 기가 있잖아요. 한 섬에 있던 거북이가 화산의 지각 변동으로 섬이 갈라 지면서 거북이도 사는 곳이 두 개의 섬으로 나눠지게 되었어요.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흘러서 보니까 두 섬에 살고 있는 거북이의 모습이 달라졌 습니다. 한 쪽 섬에 있는 거북이는 먹이가 주로 땅바닥에 있어서 거북이 목이 움츠려들어 있고 다른 한 쪽 섬에 있는 거북이는 선인장 등 먹이가 주로 위로 자라있어서 거북이 목이 위로 향해 있어요. 환경에 적응하면 서 진화한 거죠. 그런 점에서 부분적으로는 진화론도 중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고 우주물리학은 사실상 불교의 중도사상과 거의 같아요.
따라서 영원히 이어져 똑같이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며 완전히 끊 어져서 새롭게 존재하는 것도 없어요.
Q 그래서 상견과 단견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거군요.
그렇죠. 상견이란 아가 있어서 영원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 요. 흔히 불성이 영원하다고 하는 것도 상견이죠. 또한 마음은 변화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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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하다고 하는 것도 상견입니다. 마음이 변화가 없이 영원하다거나 부 처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고집일 뿐이에요. 변화를 하니까 부처가 되지 변화가 없다면 부처도 될 수 없고 수행도 할 필요가 없죠. 부 처 자체도 중생을 상대로 일어난 현상일 뿐이죠. 상견의 대표적인 예가 성선설, 성악설입니다. 본래부터 악하다거나 본래부터 선하다고 하면 교 육이나 변화를 부정하는 게 되잖아요.
단견은 이 세상에는 본래부터 아무 것도 없고 앞으로도 아무 것도 없 을 것이라고 보는 거예요. 죽어서도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고 하죠. 인과 가 없고 모든 것은 단지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앙 굴리말라의 스승이 주장한 것이 대표적인 단견이에요. 도덕부정론, 인과 부정론, 유물론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상견과 단견은 둘 다 매우 위험합니다. 둘 다 변화를 거부하고 고집 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위험한 거예요.
Q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성장이자 수행 이겠지요?
그럼요.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유형을 네 가지로 나눠서 설명하셨어요. 어두운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가는 사람,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가 는 사람,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가는 사람, 밝은 곳에서 밝은 곳으 로 가는 사람. 이것은 모두 무아를 전제로 합니다. 변화를 전제로 합니 다.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 이고 노력이겠죠.
불상이고 부단입니다. 영원하다고 말해도 맞지 않고 완전히 끊어졌 다고 말해도 맞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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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 다음 불일불이입니다. 하나라고 할 수도 없고 다르다고 할 수도 없다, 이렇게 풀어볼 수 있는데요.
여기서 불이(不異)는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 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것도 아니고 저것 도 아니라고 적당히 생각한다면 그것은 불이를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사회가 하나의 철학과 하나의 사상을 강요 하는 것 아닌가요? 히틀러와 같이 인류가 하나여야 된다는 사고는 너무 나 위험하죠. 독재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거잖아요. 그 하나에 속하지 않거나 동의하지 않으면 부정하고 말살하는 전체주의로 나아간 사례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의 사상과 하나의 철학으로 몰아 가면 사회는 경직되고 위험한 사회로 치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일 수 없어요. 그렇다고 다 다르다고 할 수 도 없습니다. 연관성을 갖고 인연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가족, 친구, 회사 동료, 그리고 국가와 지구촌까지 모두 인연과 조건에 따라 만남이 이루어지죠. 어떤 사람을 만나서 어떤 생각을 갖게 되는가 하는 것은 모두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잖아요. 더 좋아지고 성숙해지는 것도, 더 나빠지고 악해지는 것도 인연과 조건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사람과 사람 뿐 아니라 사람과 자연, 사람과 우주의 관계성도 다르 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처음에 우주가 발생했을 때 제일 먼저 생긴 물질 이 수소이고 이후에 탄소에 의해 생명체가 발생했어요. 그러면 탄소가 나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죠. 하지만 내 속에 탄소라고 하는 물질이 들어 있어요. 그러니까 탄소와 나는 완전히 같은 존재도 아니지만 완전히 다 른 존재도 아니죠. 백억 광년 바깥에 있는 원소와 내 몸 속에 있는 원소 가 이렇게 연결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그와 나는 다르지 않아요. 그도 나도 우주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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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도 나의 일부이고요. 떨어져서 살 수 없어요. 그렇다고 하나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제가 인도 라다크에 갔을 때 4천미터가 넘는 고개를 넘어가니까 산소 가 부족해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겠더라고요. 저는 어지러워서 주 저앉아 있는데 그 곳의 아이들은 거기에서 축구하면서 뛰어 놀아요. 산 소는 이렇게 우리 몸속에 함께 있죠. 농도에 차이가 있고 적응에도 차이 가 있지만 산소가 없이 우리는 움직이지 못해요. 하나인가 하면 하나는 아니고 다른가 하면 다르지도 않아요. 부모와 자식이 하나냐고 하면 하 나는 아니죠. 그렇지만 많은 부분에서 닮았어요. 모든 관계가 이렇습니 다. 선에서는 우리 마음속에 같고 다름의 분별을 떠나 있다는 뜻입니다. 그 속에서 같고 다름을 잘 구별할 뿐이죠.
Q 유마거사의 불이법문에 대해서도 조금 더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유마거사의 불이법문도 중도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진실은 선과 악이 아니에요. 우리는 선을 진실이라고 하지만 선도 악에 의해 발생된 개념일 뿐이에요. 상대적이죠. 선과 악이 사라질 때 거기에서 진실이 드러납니다. 둘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하나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즉 분별 이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면 일념이 되어져요. 생각이 다른 것으로 해서 두 극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불이(不二)입니다.
Q 다름을 강조하거나 같음을 요구하는 것 모두 경계해야겠군요.
같다고 하는 것과 다르다고 하는 것은 근본의 자리에서 보면 같은 이 야기입니다. 서로의 생각을 인정해줄 때 하나가 될 수 있어요. 서로를 인 정해줄 때 인식의 폭이 넓어져서 하나가 되지 자꾸 좁히면 바늘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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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아져요. 양 극단의 생각을 없애고 넓혀줘야 수많은 다양한 생각들이 마음껏 펼쳐지지 바늘 끝보다 좁혀놓으면 세상은 다 갈라지게 됩니다. 양 극단의 생각을 없애고 넓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를 추구하면 독재가 되고 전체주의가 되기 쉬워요. 사람의 생각 과 문학, 예술, 종교도 자유로움에서 나옵니다. 상대의 이야기가 틀린 것 이 아니고 다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입니다. 그래야 비 판도 할 수 있고 비판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발전이 됩니다. 민주주의란 공통분모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Q 중도의 가르침이 과학적으로도 설명되고, 철학적으로도 설명되고, 게다가 사회과학적으로도 설명된다는 점이 참 재미있고 신기합니다.
달라이 라마께서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만, 불교는 과학의 시대 에 과학과 함께 갈 수 있는 유일한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과학과 불교는 사상적으로 마찰이 일어날 부분이 별로 없어요.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불교사상이 증명되고 과학적 성과가 불교를 설명하는 데에도 유용하죠. 더구나 과학의 발전수준을 높이는데 불교가 많은 보탬이 되고 영감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반야의 공사상은 물리학과 우주학에 영향을 주고 있어요. 유식 학은 심리학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죠. 그리고 이제는 죽음 이후에 발생 하는 바르도의 상태에 대해 연구하는 흐름도 형성되고 있어요. 불교가 과학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과학도 불교 발전에 영향을 크게 줄 수 있 다고 생각합니다.
Q 팔불중도의 마지막 불래불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어떤 의미 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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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지금의 힌두교인 브라흐만교 때문에 나온 말이에요. 브라흐 만교에서는 저 브라흐만 하늘의 브라흐만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 아트만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아트만이 다시 브라흐만천으로 나려면 고 행을 닦거나 선정을 닦아야 한다고 했죠. 아트만이 떨어져 나와 부모의 뱃속으로 들어가 탄생했고 살아가면서 고행도 하고 선정도 하다가 죽은 다음에는 아트만이 몸을 빠져나와서 브라흐만천으로 올라간다고 했어 요. 여기에서는 이렇게, 가고 오는 것이 있잖아요. 하늘에서 왔고 다시 하 늘로 가죠.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가고 오는 아트만이 없다고 했 어요. 이것이 무아입니다. 아트만이 없으니까 가고 오는 것도 없죠.
파도를 보면 이해하기가 쉬워요. 파도가 어디 다른 곳에서 온 게 아 니죠. 어디 저 멀리 히말라야 산에서 파도가 온 것도 아니고 파도가 갈 때도 다시 저 멀리 히말라야 산으로 가는 게 아니잖아요. 파도가 일었다 가 사라지는 것은 업의 바람에 의해서 그 자리에서 발생했다가 업의 힘 이 다하면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끝이 라고 표현하지 않고 돌아갔다고 하잖아요. 존댓말로 사용하고 있는 말 이지만 돌아갔다고 하는 것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는 뜻이죠.
그러니 오고 갈 것이 따로 있지 않아요. 육조 혜능스님이 돌아가시려 고 할 때 제자들이 울며 슬퍼하니까 제자들을 나무랐죠. 내가 어디로 갈 줄 몰라서 우느냐고 하시고는 다시 공성에 대해 법문하셨어요. 그 자리 에서 파도가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처럼 천상에 가고 이런 것이 따로 있 지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오니까 좋고 가는 것은 싫다는 분별 심이 사라지는 것을 오고 감이 없다는 말로 설명한 것입니다.
Q 『반야심경』의 육불중도와 용수보살의 팔불중도를 설명해주셨는데요. 스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중도를 적당한 중간이나 가운데로 이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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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쉬운 것 같습니다.
중도를 그렇게 잘못 아는 경우가 너무나 많죠. 이도 저도 아닌 중간 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용수보살께서 중도를 정확하 게 이야기하기를 파사현정이라고 했어요. 삿된 생각을 깨는 거예요. 그러 면 바름이 드러납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0이 될 때도 있고 그 반대의 무 한수일 때도 있어요. 거리의 중간, 숫자의 중간, 생각의 중간, 물질의 가 운데, 이것이 중도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밥을 못 먹어 금방 죽을 것 같은 사람이 있고 배가 아주 부른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럴 때 중도를 실천한다고 하면서 밥을 똑같이 나눠서 배고픈 사람에게도 밥 한 그릇을 주고 배부른 사람 에게도 밥 한 그릇을 주는 게 옳을까요? 배부른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고 배고픈 사람에게 두 그릇을 주는 것이 중도죠.
평등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평균에 맞춰서 똑같이 나누는 것이 아 니잖아요.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실패한 것도 똑같은 물품을 똑같은 수 량으로 나누는 산술적인 배분을 평등이라고 생각한 요인이 크다고 보는 데요. 평등도 중도도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죠. 다시 이야기하지만 중도는 상대적인 양 극단의 생각에서 벗어난 것이 고, 그 중심은 아라고 하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Q 그래서 스님께서는 공성과 중도가 같은 개념이라고 하셨죠.
물리학에서 보면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사라지면 중성자도 사라져요. 그것이 물리학의 기본입니다. 중성자가 영원하다거나 플러스가 영원성을 띤다거나 마이너스가 영원하다면 어느 것도 사라질 수 없어요. 플러스가 생기면 마이너스가 바로 생기고 중성자가 바로 생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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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사라지면 중성자가 사라지는 것처럼 모든 것이 사라져서 제로 상태가 된 것이 중도예요. 그것이 공성입니다. 중도와 공 성이라는 말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쓰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지칭하는 것 은 같은 내용이에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들이죠. 손가락 끝은 같아요.
이러한 기본 바탕이 있어야 불교를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깨치는 것은 그 다음 문제이고 우선 불교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아와 공성과 중도를 이해할 때 무엇을 목표로 공부해나가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Q 『반야심경』의 내용도 그렇고 공성이나 중도의 개념도 역시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공성에 관한 이야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물리학이나 상대성 이 론 같은 것도 쉽지 않잖아요. 양자역학의 경우에는 과학을 전공하는 사 람들도 들으면 들을수록 모른다고 할 정도에요. 그러니 불교의 철학 가 운데 가장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고 깨달음의 핵심이 공사상인데 쉬울 리는 없죠. 그러므로 여러 번 반복해서 공부하고 꾸준하게 독송하면서 스스로 깊이 사유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Q 그래서 저도 여전히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을 여쭤볼까 합니다. 불생 불멸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것은 중도를 이해하는 것이에요. 중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불교를 이해했다고 보기가 어려워요. 불교의 핵 심이 중도이고 중도사상의 핵심이 공성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느 것도 영원성을 띄고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여 기에 예외는 없습니다. 변화하지 않는 존재는 없죠. 모두 다 변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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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연기법입니다.
변화를 다른 말로 하면 윤회예요. 우리의 몸도 마음도 계속 바뀌죠. 몸도 마음도 고정된 것이 없이 변화합니다. 자성이라는 것이 영원성입니 다. 그러한 영원성이 없기 때문에 생이다, 사다, 말할 수 없는 거예요.
파도의 예처럼 바람이 불어서 파도가 일고 바람이 꺼져서 파도가 사 라져도 다 물이죠. 영원성을 갖고 있는 것은 없어요. 변화하기 때문에 생 이라고 말해도 틀리고 멸이라고 말해도 틀립니다. 생이라고 말하면 영원 성을 부여하게 되고 멸이라고 말하면 단멸성을 부여하게 됩니다. 상과 단을 말하면 연기법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 불생불멸을 전혀 잘못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요. 영원한 불성이 있기 때문에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영원하다고 하는 것은 상 견입니다. 반대로 윤회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죠. 그것은 변 화하는 것이 없다는 이야기에요. 단견이죠.
물리학적으로 보더라도 산소와 수소가 합해져서 물이 되고 산소와 수소가 분리됐을 때 각각 산소와 수소가 되죠. 그것이 변화입니다. 그것 이 윤회예요. 생명의 윤회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설명되는 부분이 있기 는 하지만 근본으로 보면 같은 이야기입니다. 생명의 윤회는 짧은 시간 에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 경전의 말씀과 주석서들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최종 수행인 본수행에서 우리 마음이 생멸의 마음 을 떠나는 것을 깨침이라고 합니다.
Q 영원한 무언가가 있다고 하는 상견도, 윤회가 없다고 하는 단견도 그릇된 견해라고 하셨는데요. 윤회에 대해서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윤회가 없다면 불교를 왜 믿죠? 불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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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공부하고 실천하고 체득하려는 것은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 아닌가요? 부처님께서 ‘윤회가 없다’고 한 부분은 브라흐만교에서 이야 기하는, 즉 브라흐만천에서 아트만이 하나 떨어져 나와서 몸을 받고 다 시 브라흐만천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그러한 윤회는 없다’고 하신 거예 요. 그렇게 윤회하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윤회는 변화로서의 윤회입니다. 변화하기 때문 에 윤회하는 거예요. 영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윤회가 아니죠. 그냥 그대로 지속되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도, 도인들도 윤회 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난, 나머 지가 없는 무여열반을 말씀하셨죠.
사마타, 위파사나, 육바라밀 수행 모두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 이에요. 윤회가 없다면 굳이 이러한 수행을 알아야 필요도 없고 실천할 이유도 없죠. 윤회가 괴로움의 원천이기 때문에 윤회를 끊고자 하는 것 입니다.
Q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윤회라고 하셨는데요. 그럼에도 육체가 계속 해서 나고 죽고 하려면 윤회하는 주체가 있어야 하지 않나요? 그러면 다시 또 아를 이야기하게 되는 건가요?
윤회하는 주체는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물이라는 것이 변화하지 않는 어떤 주체가 있다면 물이 될 수 없겠죠. 수소와 산소가 변하지 않는다면 물이 될 수 없어요. 수소와 산소 분자의 구조가 변하지 않는다면 둘을 합쳐놓아도 물이 안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시간과 에너지와 그 공간 속에서 변화하죠. 고 정불변한 것이 있으면 변화가 일어날 수 없어요. 달라이 라마께 주체가 없는데 어떻게 윤회하느냐고 물으니 주체가 없기 때문에 윤회가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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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셨어요. 연기란 서로 의지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독단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독단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우주도, 물질세계도,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에도 일체 없어요. 모두가 거듭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변 화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어떤 착각을 하느냐 하면 거듭 변화하지 않는 아를 찾 으려고 해요. 처음에는 변하지 않는 지수화풍이라고 하는 근원적인 물질 이 있다고 봤고 그것이 모두 부정되면서 마음 안에는 무언가 하나 변하 지 않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했죠. 그것이 아뢰야식이라고 했다가 진여 라는 자성이 있을 것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것을 논증하지 못했어요. 용수보살에 의해 그러한 자성은 없다는 것으로 결론 났어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아, 불이, 공성만이 진리입니다. 그 어떤 것도 영원성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변화하고 윤회하는 거예요. 본래 있 지 않기 때문에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는 거죠. 이것을 깊이 있게 이 해하지 못하면 유아론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그런 점에서 불성도 영원하 다거나 불변의 어떤 것이 아니에요. 불성은 자각할 수 있는 마음이죠.
무상과 무아와 열반적정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핵심이고 이것이 공 성이고 연기법입니다.
Q 그렇다면 업이 윤회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연기의 주체를 설명할 때 아뢰야식 연기, 진여연기, 업감연기라고 했어 요. 무엇이 다음 생으로 연결해주는가, 이 문제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이 야기할 때 DNA라고 하는 유전정보가 있잖아요. 이 유전정보도 불변하 지 않죠. 변화하기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양 쪽의 유전자를 다 가지고 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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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감을 정신적 에너지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유전정보도 불변이 아 니듯이 우리의 정신적인 에너지도 불변하지 않아요. 업의 에너지가 DNA 처럼 뭉쳐 있다가 그다음 삶을 깨워놓고 사라진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 습니다. 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힉스 입자가 우주 발생의 초기에 물질에 적용되었다가 사라지면서 물질적 질량이 생기는 것과 같은 현상일 것이 라고 생각합니다.
경전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제가 물리학의 이론을 보니 까 원리가 이와 같다고 생각되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업이 다음 생을 깨워놓고 사라지는 거죠. 전생의 업이라고 하는 것 도 다음 생을 깨워놓고 사라지는 것이지 영원히 유지되는 것은 아니에요. 물질이나 우리의 육신이나 같다고 생각합니다.
Q 윤회를 과학의 다른 예로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진화론도 있죠. 생명의 변화를 보면 창조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 이 너무나 많잖아요. 만약 창조되었다면 그 현상은 고정적일 수밖에 없어 요. 지금 유전공학에서는 식물에 있는 DNA가 사람에게도 있다고 하거든 요. 그러면 창조론이 부정될 수밖에 없죠. 고정불변으로서 원래부터 있던 것이고 변화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러한 현상들이 설명될 수 없잖아요.
끊임없이 조건에 의해 변화하는데 그것을 깊이 들여다보면 조건에 의 해 업이 바뀌면서 변화하는 거예요. 진화론이나 유전공학은 불교의 연기 론과 인과론을 상당 부분 설명해주고 있어요. 우리는 인과를 도덕적 인 과에 국한해서 생각하지만 그렇게 좁혀서 볼 게 아니에요. 이를테면 척박 한 곳에 식물을 심으면 잘 자라지 못하는데 그때 식물은 씨앗을 더 빨리 열어서 다른 곳에 뿌리려고 하는 습성이 생기거든요. 이런 것들이 모두 업감연기와 연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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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업으로 이루어지는 생명의 윤회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주시면 좋겠 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아기는 단지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분열만 한 다고 보기 어려워요. 줄기세포가 될 때는 전기 충격과도 같은 충격이 있 어요. 그때 보통 태몽을 꾸게 되죠. 업의 에너지가 잉태되어 줄기세포로 분화하는 것입니다. 업에 따라서 줄기세포를 확대시키고 깨워내죠.
제가 볼 때는 줄기세포로 분화할 때 업의 에너지에 따라 어떤 쪽이 더 강하게 에너지를 받고 어떤 쪽이 더 약하게 에너지를 받는가에 따라 그 사 람의 성격과 재능과 육체적, 정신적 특징들이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래서 사람마다 다 다른 거죠. 전생의 업을 전달받는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 니다. 유전자에 의해 신체 조건이 전달되어지는 것과 거의 같죠. 정신적인 부분도 상당 부분 이렇게 전달된다고 보입니다. 그래서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이 나오고 현생만으로 그 원인을 찾기 어려운 경우도 나오는 겁니다.
Q 고정 불변의 실체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윤회하는데 업이 그 다음 생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씀이지요?
업이 반드시 영향을 미치죠. 그것이 고정 불변이라면 영향을 미칠 수 없을 거예요. 전생에 있어서도 똑같고 이생에 있어서도 변화 없이 그대로 있다면 다음 생에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겠어요? 변화하기 때문에 다시 새로운 것이 탄생하고 다시 사라지는 것을 계속 반복하는 겁니다.
저는 업을 정신적인 DNA라고 표현합니다만, 다음 생의 몸과 정신을 깨워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몸과 정신에 다 영향을 끼친다고 할 수 있 습니다. 정신적, 육체적 결함이나 유전병 등은 그런 영향이 많을 것입니 다. 앞으로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생명의 윤회에 대해서는 좀 더 확인 하고 증명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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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무언가 있기 때문에 다음 생으로 전달된다고 생각하게 되는데요. 그래서 윤회에 대해서는 설왕설래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을 보더라도 산소도 있고 수소도 있어야 하죠. 산소와 수소도 본 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생성된 것이고요. 그것들이 거듭 만나면서 변 화하는 것이지 똑같은 것으로서 영원히 있지 않다는 뜻이에요. 조건과 온도 등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는 이야기이죠.
Q 앞서서 윤회는 없다는 견해는 단견이라고 하셨고요. 부처님께서 부정한 것은 아트만의 윤회라고 하셨어요.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주세요.
부처님께서는 무아를 말씀하셨어요. 그러므로 아트만으로서 브라흐 만천에서 내려오고 다시 브라흐만천으로 올라가는 반복은 없다는 말입 니다. 그래서 브라만들의 고행이나 선정주의 수행체계는 그 전제가 틀렸 기 때문에 성립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한 아도 없고 그러한 윤회도 없 다고 하신 거예요.
그리고 부처님께서 무여열반에 드신다고 한 것은 윤회를 마감했다는 의미입니다. 윤회를 끝냈다고 하신 말씀을 윤회가 없다는 말로 이해하면 잘못 받아들인 거죠. 윤회에서 완벽하게 벗어났다는 이야기를 윤회가 없 다는 이야기로 혼동하면 안 됩니다.
Q 브라흐만교에서 이야기하는 아트만의 윤회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론적인 윤회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군요. 그리고 부처님 께서는 윤회를 마감하셨다고 표현하셨고 일반적으로는 윤회에서 벗어 난다는 표현도 많이 합니다. 그렇다면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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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목적이죠. 초기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아라한의 수행4과도 윤 회를 벗어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부처가 완성된 것을 부처님께서는 무 여열반에 들었다고 하셨거든요. 나머지가 없다고 하셨어요. 보살의 열반 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스스로 윤회를 선택했지만 부처님께서는 그것 마저 마감했다는 뜻입니다.
윤회가 없다고 하면 보살도 있을 수 없어요. 거듭 윤회하여 중생을 건 지고자 하는 원력과 육도윤회를 반복하면서 중생을 건지는 실천행이 성 립되지 않습니다.
생사라는 말이 곧 윤회입니다. 중생심의 분별심이죠. 윤회는 아에 집 착하고 욕망을 부려서 반복되는 현상입니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 행하는 거죠.
Q 그런데 보살은 윤회에서 벗어나는 데 그치지 않고 중생구제의 원력 으로 윤회를 자처한다고 하는데요.
윤회의 수레바퀴에 몸소 들어가는 것입니다. 보디사트바(bodhisattva) 를 보리살타로 음역했고 줄여서 보살이라고 하죠. 공성을 체험한 깨달 음을 성취했지만 일체 중생을 건지겠다는 생각으로 육도 윤회를 하면서 모든 중생을 건지겠다는 원력으로 스스로 윤회합니다. 스스로 원해서 윤 회하기 때문에 보살의 윤회를 원생(願生)이라고 합니다.
인간세상은 물론이고 천상과 지옥까지 모든 세상에서 보디사트바들 이 우리를 이끌어주시기 위해 원생으로 태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분 들은 아라한에도 머물지 않고 선정에도 머물지 않고 윤회합니다. 하지만 윤회를 한다고 해서 중생은 아니죠. 번뇌가 있고 욕심이 많아서 윤회하 는 것이 아니고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깨달음과 중생이라는 말을 합해서 각유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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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렇다면 육도 윤회는 마음이 빚어내는 것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모든 일의 시작은 마음입니다. 만약 도둑질할 마음을 일으켰다고 하 면 한 번 일으켰다고 해서 도둑질을 하지는 않죠. 몇 백 번, 몇 천 번, 이 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반복해서 생각하면서 도둑질을 하게 되겠죠. 마 음 한 번 가져서 되는 것은 없어요. 악한 마음도 선한 마음도 한 번 낸 것 으로는 바로 되지 않아요. 말도 잘 안 나오잖아요. 거듭 해야 행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아주 작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 중생을 위해 살겠다고 하는 것도 마음에서 나오는 일이에요.
이 몸이 생겨나는 것도 마음이 지어낸 업력에 의해서입니다. 마음으로 뭉쳐있던 업이 다시 거칠게 발현되어진 것이 몸이에요. 아주 자비스러운 마음을 많이 내는 사람은 얼굴이 자비스럽게 태어나지고 앞으로도 계속 자비스러워지잖아요. 웃는 것도 마음 작용이죠. 결혼하는 것도 마음이 움직여서 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그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가 중요한 문제죠. 윤회하는 것도 내 마음이 지어낸 업력에 의해서 내가 생성시킨 또 다른 세계인 거예요. 그 렇기 때문에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마음먹은 대로 된 것입니다. 자신 이 마음먹은 대로 된 것인데 사람들은 마음먹은 대로 안 된다고 이야기 하죠. 왜 그런가 하면 행복해지려고 하면서 마음은 자꾸 행복해질 수 없 는 마음을 일으켜서 그래요. 마음먹은 대로 안 된다고 하고 바라는 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스스로 낸 마음대로 그대로 된 거예요.
예를 들어 부자가 되려고 하면 나와 인연 있는 사람들이 잘 살게 만 들어줘야 돼요. 그런데 자신과 인연 있는 사람들을 뜯어먹으려고 하면 잘 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자기 마음먹은 대로 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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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떤 마음을 갖고 행동해야 행복해질 것인지 어떤 마음을 먹고 행동하면 불행해질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불행해질 마음을 먹고 불 행해질 행동을 하면서 행복해질 거라고 착각할 뿐이지 실제는 전부 다 마 음먹은 대로 되었어요.
Q 처음의 마음 하나가 쌓이고 쌓여서 업이 되고 그 업에 따라 변화하 면서 살아가고 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갖는 이 마음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밭에 잡초도 뽑고 경운기로 갈아서 닦달을 해놓잖아요. 여기에 제일 먼저 무슨 씨가 날아오는지 아세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도 민들레 씨가 가장 먼저 날아와 꽂혀요. 다른 모종을 심기도 전에 민들레 씨가 심 어졌으니 가만히 놔두면 어느 날엔가 민들레 밭이 되겠죠.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나는 그런 마음을 먹은 적이 없다고 하는데 언 젠가 그런 마음을 일으켰던 거예요. 나도 모르게 민들레 씨앗처럼 그런 마음을 살포시 일으켰던 거죠. 한 생각 일으키는 것이 영겁의 결과로 옵 니다. 한 생각 일으킨 것이 나중에 어마어마한 결과를 가져와요.
그래서 보살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까지, 그것이 단 한 번이라고 해도 참회하라고 하는 거예요. 수행자는 마음을 가지고 이야기하지 법적 으로 따지고 증거니 물질적으로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 하지 않아요. 수행자는 마음을 살피는 사람이에요.
Q 윤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우리의 삶에는 어떤 영향을 줄까요?
우리가 평소 윤회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다 생각하고 살고 있어요. 대부분의 부모가 아이가 몇 년 뒤에는 대학을 가 니까 아이를 위해서 돈을 벌고 저축을 하고 보험을 들어야겠다 생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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잖아요. 미래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해 살잖아요. 지금보 다 나아진 삶을 살려는 자세가 윤회를 생각하고 사는 거예요.
만약 영원한 것이 있다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죠. 영원한 것이 있다면 우리가 업을 바꿀 필요가 없을 거예요. 이미 다 정해져 있다면 그대로 가 만히 있으면 되죠. 언제 어떻게 될 것이라고 하는 정해진 운명이 있다면 무엇을 할 필요가 없어지잖아요. 다음 생이 없고 윤회가 없다고 하면 노 력할 필요가 없죠.
그러나 이 세상은 그렇게 되지 않아요. 전부 다 변화해요. 그 변화는 내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 고, 최소한 나와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안 좋은 일은 하지 않겠다, 이렇 게 마음먹고 사는 게 선업이죠. 그리고 조금 더 이타적으로 살겠다고 마 음 내야 합니다. 그 마음을 내서 이타적으로 살기 시작하면 지금은 작지 만 그 작은 마음으로 오랜 시간 반복되면 어마어마한 일이 됩니다. 누가 처음부터 부처가 되나요? 부처님께서도 처음에 연등부처님을 뵙고 너무 훌륭해서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될 수 있는지 물었죠. 그때 연등부처님이 제일 먼저 보리심을 발하여 보시행을 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보시행을 하려고 하니까 처음에는 아주 작은 풀 하나도 남을 주려니까 손이 떨리 더라고 했어요. 그렇게 시작해서 수많은 생을 거듭해서 수행한 거예요.
불교를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연기의 법칙, 인과의 법칙은 예외가 없어요. 윤회를 믿고 인과를 믿는다면 다음 생을 생각하면서 나 아가야 하죠. 다음 생은 지금 생보다 나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금강 경』에도 그런 말씀이 있죠. 부처님의 가르침이 유통되고 그것을 믿는 사 람이 있는 곳이 불탑이 있는 것과 똑같고 그 곳이 바로 불세계가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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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계속해서 공부합니다.
시고 공중무색
是故 空中無色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시고, 그러므로, 그런 까닭에, 이렇게 해석됩니다. 앞에서 색즉시공 공 즉시색이고 수상행식 역부여시라고 했죠. 그리고 제법공상이 불생불멸 하고 불구부정하며 부증불감이라고 했어요. 이와 같이 공한 모습을 설 명한 다음, 그런 까닭에, 이렇게 이야기했으니까 자성이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면, 이런 뜻이 됩니다. 모든 생명체와 유기물, 무기물이 자성이 없이 발생하기 이전을 본다면, 이런 의미입니다.
공중이란 원초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공성 가운데, 즉 아무 것도 발생하기 이전의 공 가운데, 이렇게 설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간 이라고 하는 생명은 약 250만 년 전에 발생했죠. 지금의 호모 사피엔스는 약 20만 년 전이라고 하니까 공중이란 그렇게 생명이 발생하기 이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오온이 공한 모습을 설명했고 제법이 공한 모습을 설명했잖 아요. 그런데 공중이라고 했을 때는 모든 것이 발생하기 이전의 공 가운 데, 라고 해석하면 맞습니다.
Q 공중무색, 모든 것이 발생하기 이전의 공 가운데에는 색이 없다 했 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색은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되는 다의어라고 했지요. 빛이라는 의미 로도 쓰이고 이성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여기에서 색은 오온의 색을 이야 기합니다. 오온의 색이란 지수화풍, 즉 우리의 몸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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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몸이라는 것도 발생하기 전에는 없었죠. 만약 몸이라는 것이 본래부터 있었다면 아주 오래 전 그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하겠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본래부터 있었던 몸이라는 것은 없어요. 그러므로 무 색입니다.
몸이라고 하는 것이 본래부터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지수화풍 4대로 이루어진 몸은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 문에 80년, 90년 끌고 다니면 눈앞에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지수화풍은 몸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이자 이데아입니다. 원래부터 있 었던 것은 없어요. 하지만 원래부터 있었다고 본 것이 브라흐만의 하늘 신이라든가 전지전능한 신을 주장한 사람들이죠. 그러기에 창조주도 본 래 있었고 나도 본래부터 있어서 믿기만 하면 영원히 산다고 믿었고 심지 어는 창조주가 만든 이 몸도 영원할 것이라는 부활을 믿게 되는 우를 범 했죠. 그런 견해에 의하면 원래부터 있었던 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존재 이전에 색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고 한 것입 니다. 몸이 존재하기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가 하면 없는 게 맞잖아요. 몸 도 본래 있었던 게 아니듯이 우리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도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죠. 모든 것은 변화하고 영원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다 시 짚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은 몸에 집착할 게 없죠. 단지 공부하는 데 잘 부려먹고 갈 뿐이에요. 몸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합니까? 본래부터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면 그동안 유지하려고 애쓰고 집착했던 것 들이 하나도 이루어질 수 없잖아요. 단 하나도 남지 않죠. 화장터에 있으 면 생생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야말로 산산이 흩어져버리는 게 사실이고 진실이죠. 무상한 이 몸이 본래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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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하고 집착하는 것이 줄어 들겠죠.
Q 이어서 보겠습니다.
무수상행식
無受想行識
수상행식도 없으며
『반야심경』 첫 구절이 ‘오온개공’입니다. 여기에서도 존재 이전의 모 습을 오온으로 다시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몸을 구성하고 있는 지수화풍 4대인 색에 이어 대상을 받아들이는 감각작용이 있죠. 그 것이 육근입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눈, 귀, 코, 혀, 피부, 의식입니다. 눈으로는 빛을 받아들이고 귀로는 소리를 받아들이는데 눈은 소리를 못 듣고 귀는 빛을 받아들이지 못해요. 센서가 완전히 달라요. 코는 향기를 맡고 입은 맛을 보며 피부는 촉감을 받아들여 각각 뇌에 전달합니다. 뇌 에서는 그런 내용들을 종합하고 정리하죠.
감각기관도 본래 있었던 것이 없고 감각기관이 받아들이는 내용도 본 래 있었던 것이 없어요. 눈을 감아버리면 빛이 없는 것처럼 되죠. 본래 있 었던 대상도 없고 느낌이나 감정도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에요. 빛으로 보고 소리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감촉으로 받아들여서 무슨 꽃이야, 무 슨 과일이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니까 생각도 그 이전에는 없었던 거죠. 만약 생각이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라면 이것이 벚꽃이다, 유자다, 이런 생 각들이 머릿속에 항상 있어야 하겠죠. 하지만 활짝 핀 꽃망울을 보고 벚 꽃이라고 생각하고 유자향을 맡으니까 유자라고 생각하죠.
그러면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어요. 머릿속에 벚꽃이나 유자라고 하는 개념이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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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부처님께서는 그것은 단지 기억일 뿐이라고 정확하게 말씀하셨 어요. 그러므로 무수상(無受想)입니다.
받아들이는 감각작용도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생각도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왜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일일이 설명할까요? 원 래 범어의 논리구조가 하나하나 짚어주고 반복하는 언어구조를 갖고 있 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워낙 착각을 하기 때문입 니다. 자꾸 뭔가 본래부터 있는 게 있을 거야,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다음, 행도 본래부터 있지 않아요. 대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 을 하면서 우리는 무언가를 하겠다 생각합니다. 꽃을 하나 꺾어야지, 씨 앗을 심어야지, 이런 의지가 생기죠. 그러한 의지로 행동을 하게 되고요. 하지만 이러한 의지도 이전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대상을 만나고 뇌 와 마음에 어떤 작용이 일어나면서 생긴 거예요.
윤봉길 의사나 안중근 의사가 처음부터, 어릴 때부터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구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죠. 여러 만남과 인연이 계기가 되어 차 츰차츰 독립의식이 싹트고 목숨까지 바칠 행동을 하게 된 거잖아요. 그 런 면에서 보면 어떤 만남을 갖느냐 하는 것이 너무 소중합니다. 부처님 을 만나면 부처가 되는 거예요. 원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부처님을 만 나 존경하고 좋아하면서 부처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죠. 그래서 인 연이 소중하다고 하는 겁니다.
의지도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어떤 원인과 어떤 조건에 의해 만나면서 발생되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고 수행을 하는 것도 발 생되어진 것이니까 그것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보리심을 내는 것도 중요하고 보리심을 발한 다음 부처가 될 때까지 잃 지 않기 위해 거듭 기도하고 거듭 정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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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이 식입니다. 식, 이것이 제일 문제예요. 식이란 알아차린다는 의미죠. 뇌가 하는 종합적인 작용인데요. 식은 단계별로 크게 나누면 의 식, 분별식, 아뢰야식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육근과 육경이 만나 형성 된 육식이 의식이고 이러한 의식들이 개념화되고 체계화되어 사물을 판 단하고 평가하는 분별식을 형성하며 이것이 깊이 저장되어 무의식이라고 불리는 저장의식을 형성합니다. 종합 컴퓨터와 같이 인간은 이러한 인식 작용을 쉼 없이 계속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들도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죠. 감각 기관이 생기고 대상이 생기고 이것이 상호 만나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의식이 발생합니다. 그러면서 차츰 나라고 하는 의식이 생기고 나에게 좋다, 나 쁘다, 분별하고 반복하면서 저장식이 생기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의식의 GPS이고 내비게이션입니다.
이러한 의식들 가운데 본래부터 있었던 것은 없어요. 의식도, 분별식도, 아뢰야식도, 본래부터 있었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색이고 무수상행식이에요. 자성이 없기 때문이죠. 인연 따라 일어난 것이기 때문입 니다. 그리고 이 말은 색수상행식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Q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공중무색은 같은 의미가 되겠군요.
다 같은 이야기죠. 색즉시공, 지수화풍 그 자체는 자성이 없고, 공즉 시색, 그렇기 때문에 연기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연기하기 이전에 공 가 운데에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 변화해서 생기는 것이다, 공중무 색, 공 가운데에는 색이라고 하는 것이 본래 있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있 지 않았기 때문에 연기로서 발생하죠. 그러므로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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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공 가운데는 색수상행식이 모두 본래 없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 런데 우리가 가장 착각하기 쉬운 게 식이라고 하셨어요. 의식이나 견해, 혹은 무의식과 같은 것이 본래부터 있다고 착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몸이 본래부터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앞으로 계속 있 을 것이라는 착각은 많이 합니다. 수명이 있고 언젠가 아프고 죽을 것이 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수시로 잊어버리죠. 그래서 병 들 거나 죽음이 눈앞에 닥치면 도저히 놓지를 못하잖아요.
생각에 대해서도 우리는 착각하고 집착합니다. 그것을 부처님께서는 법집이라고 하셨어요. 생각을 아라고 여기는 것이 법집입니다. 내가 일으 킨 생각이 곧 나라고 여기는 거죠. 내 생각을 부정하면 굉장히 화가 나고 나를 무시하고 부정하는 것 같아서 견디지 못하잖아요. 생각이라고 하는 것도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일으키고 발생한 것인데 그것을 나라고 생 각해서 집착하고 아집하고 법집 하는 겁니다. 아뢰야식이 영원하다거나 불성이 영원하다거나 내가 생각한 것이 절대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 두 법집이에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의 몸은 아무래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 아요. 다른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알고 자신의 몸이 늙고 병들고 허물어 져가는 것을 보면서 어쩔 수 없더라도 받아들이게 되잖아요. 하지만 이 안에 있는 무언가 하나는 영원한 게 있어야 할 것 같고 그러기를 바라게 되죠. 나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없어지고 사라지는 게 싫은 거잖아요.
마지막까지 뭐 하나라도 영원한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것 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처님께서는 그런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하신 거예요. 모두가 발생되어진 것이고 발생된 것은 사라진다고 하셨어 요. 나라고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생각도, 의식도, 심지어 진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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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까지도 집착일 뿐이니 법집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죽은 뒤에도 아무 것도 없으니 집착할 것이 단 하나도 없다고 하셨죠. 죽은 뒤 에 어디 좋은 곳으로 갈 것이라는 집착도 욕심이라고 하여 무유애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완벽하고 철저하게 공사상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 영원한 것을 바랄까요? 본래부터 있지 않 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속에는 뭔 가 하나 영원한 게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지 못해요. 영원 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니까 수긍은 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 전히 미련을 갖고 있는 거죠.
그것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영원하다면 영원한 것을 바라지 않을 거예요. 영원하지 않으니까 영원하기를 바라는 모순이 일어나는 거 죠.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하기를 바라는 중생의 심리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께서는 그런 착각을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러면 착각하고 집착 하는 그대만 괴로울 것이라고 하셨죠. 까딱 잘못하면 잘못된 곳으로, 어 두운 곳으로 자신을 끌고 가기 쉬우니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라고 하신 거예요. 그대의 삶에서 지금 이 순간순간이 중요하고 깨어있는 순간이 가장 소중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다음에 죽어서 어디 갈 거라고 지금을 희생시키지 말고, 이 몸 외에 다른 무언가가 있어서 나를 이끌어줄 것이라고 몸을 학대하지도 말라는 것이 부처님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우리들을 착각으로부터 벗 어나게 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지 거짓이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변한다 는 것에 거짓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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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다음 구절 살펴보겠습니다.
무안이비설신의
無眼耳鼻舌身意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갓 태어난 어린 아기를 보면 처음에는 눈도 안 뜨고 나오죠. 눈을 떠 도 처음에는 사물이 잘 안 보인다고 해요. 더 들어가 생각해보면 줄기세 포가 아직 분화하기 전에는 눈이라는 게 있었겠어요? 정자와 난자가 만 나서 세포가 수정되었을 때도 눈은 없었죠. DNA 안에 눈을 만들 수 있 는 정보가 있었다 해도 그것은 정보일 뿐이지 눈은 아니에요. 유전자 정 보에 눈이라는 유전 정보가 있더라도 그것은 모두 태어난 이후에 하나 하나 모습을 갖춥니다. 자라면서도 계속해서 변하잖아요. 그러니까 그 이전에는 사대가 없었을 뿐 아니라 감각기관이 없었어요.
『능엄경』에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네 눈으로 네 눈이 보이는지 물었 습니다. 이 이야기와도 연관됩니다. 보는 놈이 따로 있고 듣는 놈이 따로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따로 있지 않아요. 물론 이 말은 자아를 떨어트려놓고 들여다보라는 의미일 겁니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육안으 로 보는 것 말고 깨달아서 보면 달라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사물도 보는 시각이나 시야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죠. 이런 의미인데 따로 보 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 어디에서 따로 보 거나 따로 듣는 그 무언가는 없습니다.
착각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발생하기 전, 공 가운데에는 눈도, 귀도, 코도, 혀도, 피부도, 뇌도 있지 않았고 다만 인연 따라 발생한 도구 일 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잠시 사용하다 갈 일이지 영원성을 갖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집착하지 말라고 하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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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앞서 색수상행식에 이어 안이비설신의 모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도 우리가 착각하기 때문이겠죠?
유한하니까 우리들은 자꾸 무언가 무한한 것이 하나는 있을 것이라 고 착각합니다. 유한하기 때문에 무한함을 지어서 만들죠. 그래서 1에서 부터 6까지 차례대로 모두 짚어서 그것이 본래 없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이것이 부처님의 논법이자 범어의 논법이기도 합니다. 치밀하고 세밀하 게 반복해서 설명하신 것이죠.
본래부터 존재했던 것은 없어요. 자성이 없죠. 이것을 모르면 착각하 기 쉽습니다. 있지도 않은 영원성을 자꾸 부여하려고 합니다. 실재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면 나라고 하는 이 도구를 가장 잘 아낄 수 있어요. 정진하고 중생 구제하는 게 적절하게 쓸 수 있게 됩니다.
실체가 없다, 나라는 것이 본래 없다, 집착할 것이 없다, 이 생각을 확 실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분별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Q 안이비설신의에 이어 색성향미촉법도 없다고 했습니다.
무색성향미촉법
無色聲香味觸法
색성향미촉법도 없으며
이것이 오온 12처 18계입니다. 앞에서 오온이 공하다는 사실을 설명 했고 안이비설신의 감각기관이 본래 없다는 것을 설명한 다음 감각기관 이 인식하는 대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감각기관이 인식하는 대상 을 육경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색성향미촉법이에요.
여기에서의 색은 빛입니다. 앞서 오온에서 색은 물질, 대상이라고 했 죠. 여기에서는 눈이 바라보는 대상인 빛이에요. 그런데 빛도 실체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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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입자들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다양한 색깔이 나 오죠. 우주의 99% 이상은 어둠이라고 합니다. 태양의 반대편은 어둡잖 아요. 따라서 빛이라는 것도 실체가 있거나 영원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 니고 에너지의 발산일 뿐입니다.
소리도 실체가 없어요. 실체가 있다면 계속 들려야 맞겠죠. 북을 치고 피리를 부는 그때만 에너지의 파장에 의해서 들리는 거예요. 실체가 없기 때문에 발생하고 사라집니다. 어디 숨어 있다가 나오는 게 아니죠.
향도, 맛도, 마찬가지입니다. 맛이 영원하지 않으니까 식당이 흥하기 도 하고 망하기도 하죠. 촉감도 그래요. 아주 부드러운 비단도 갓 태어 난 아기에게는 사포처럼 거칠고 아프게 느껴진다고 해요. 영원성을 갖고 있거나 변함없는 것은 없어요.
법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왜 그렇게 다를까요? 실체가 없기 때문에 다르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뿐 아니라 한 사람만 놓고 봐도 생각이 수시로 바뀌잖아요.
이처럼 실체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생동감이 있고 새로움을 만들 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성이 없이 공성이라는 것을 6근 6경 6식으로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Q 지금 공부하고 있는 부분이 육근, 육경, 육식에 해당하는 내용이지요?
부처님께서는 세계를 인식하는 인간의 의식을 중심으로 말씀하셨습 니다. 어차피 이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주체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 간이 어떻게 주체적으로 파악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죠.
인간에게는 외부와 대상경계와 소통할 수 있는 감각기관이 있는데 이 것이 안, 이, 비, 설, 신, 그리고 이 정보를 종합하는 기관인 의, 이것이 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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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입니다. 밖의 대상 경계는 눈이 빛을 인지하고 귀가 소리를 인식하는 것으로서 색, 성, 향, 미, 촉, 법으로 나눠집니다. 이것을 육경이라고 하죠. 감각기관인 육근과 대상 경계인 육경이 만나 인식이 생깁니다. 이것이 안 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으로서 육식입니다.
대상과 인간의 인식작용을 설명한 색수상행식을 5온이라고 하고 육 근, 육경, 육식을 12처 18계라고 합니다. 5온 12처 18계는 인식론적인 차 원에서 설명한 교리입니다.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과정을 이 18가지 체계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에 보더라도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대상과 인식기관과 의식으로 나눠놓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인도의 논리체계를 기반으로 하여 부처님께서 아주 정확하고 논리적 으로 분석해놓으신 거죠. 부처님의 안목은 직관적이지만 그것을 설명함 에 있어서는 하나하나 검증할 수 있도록 정확하고 논리정연하게 정리하 셨어요.
부처님 이전만 해도 브라흐만교에서는 변하지 않는 아트만이라고 하 는 주체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눈이 있어도 대상과 관계없고 대상 역시 눈과 관계가 없다고 봤어요. 눈도 인식하는 주체가 따로 있을 것이라고 봤죠. 그렇다면 눈을 감아도 볼 수 있어야 하고 대상이 사라져 도 보여야 하는 논리적 모순이 생깁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인식은 허 구라고 한 거예요. 눈은 빛을 통해서 보고 귀는 소리를 통해서 듣게 되어 있는 실제적인 현상을 현대 해부학처럼 분석한 것입니다.
Q 마음이 생기고 작동하는 과정이라고 봐도 되겠군요.
생명체의 역사로 보면 인간은 막내라고 할 수 있어요. 몇 억 년 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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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작은 식물인 플랑크톤에서부터 시작하여 원인류에서 약 2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했죠. 생명체가 인간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특징은 인식의 세계가 굉장히 넓고 다양하고 깊다는 점이에요. 폭넓 은 사고를 하고 깊이 사유할 수 있는 것은 대뇌의 역할이 결정적입니다. 생명체 진화의 마지막 단계가 인간의 대뇌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지구 상에 생명체가 태어난 이래로 인류는 수적으로도 지배적이고 지적인 능 력으로써 자연과 다른 생명체를 좌지우지하고 있죠. 넓고 풍부한 정신세 계가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생명으로서 정신적으로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2,600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하는 성자가 태어나면서 그 길을 정확하게 발견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브라흐 만 신이나 창조신, 혹은 토테미즘과 같은 외적인 영적 체계가 아니라 인 간의 내면의 문제, 마음의 문제를 정확하고 분석하여 영원하고도 분명한 행복의 길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마음에 관한 분석과 그 마음을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에 관한 방법론을 제시함에 있어서 불교가 가장 깊고 정확 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Q 의식이 형성되기까지 안식부터 신식이 어떤 과정을 밟는지 볼까요?
식(識)이란 정신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는 작용이에요. 여기서 식이 라는 개념이 중요한데요. 눈으로 대상을 바라봤는데 뇌사상태에 있다면 인식을 하지 못하죠. 마음이 안 일어납니다. 눈으로 대상을 보고 그렇게 본 것을 신경을 통해 뇌에 전달하여 안식이 일어나는 거죠. 눈으로 보고 서 알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알지 못한다면 보는 것도, 듣는 것도, 그 자체로는 별다른 의미가 없잖아요. 아는 작용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주목 해 그것을 식이라고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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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도 그렇잖아요. 어떤 소리를 들었을 때 부드러운 소리, 거친 소 리, 화난 소리 등 아는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 정신 작용이죠. 냄새도, 맛 도, 감촉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감각기관들이 각각 다섯 가지의 아는 작용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전 5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는 것만 있고 듣는 것만 있다면 인식은 따로따로 흩어질 뿐 이죠. 이것을 종합하는 기능이 대뇌에 의해서 생겼습니다. 대뇌는 인간의 모든 신체구조에서도 가장 늦게 진화한 기관입니다. 가장 중요한 신경조 직이기 때문에 몸의 제일 위에 있고 가장 잘 감싸 있죠. 감각기관도 감촉 을 담당하는 피부를 제외하면 눈, 귀, 코, 혀가 모두 얼굴에 모여 있잖아 요. 소중하기도 하고 신경조직이 가까이 모여 있어서 정보 처리를 빠르 고 정확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의식이 일어나는 작용을 식작용이라고 합니다. 대뇌에서 이루 어지는 이러한 인간의 의식 기능은 지구상에서 진화해온 모든 생명체 가 운데 가장 발달된 진화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Q 의학과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밝혀진 내용들을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이렇게 단계별로 정확하게 설명해주셨을까요?
부처님께서는 하나하나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고 반증하여 당시 인간 에 대한 갖가지 오해들을 모두 털어냈습니다. 인간이 브라흐만이라고 하 는 창조신에 의해 탄생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님을 명확하게 아셨죠. 뇌 의 구조와 작동에 대해서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밝혀진 사실보다 여전히 미지의 내용이 훨씬 많잖아요.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해부학이나 의학이 아니라 직관으로 꿰뚫어 아신 거예요.
부처님께서는 인간을 분석하고 그 안에 업이 작동하는 원리를 찾아 행복해지는 방법론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분석과 방법론이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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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정확하여 오류도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인류사에 있어서 매우 큰 성 과이고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지혜와 보탬을 줄 수 있는 일입니다.
Q 전 5식을 바탕으로 제6식이 만들어지게 되는데요. 이것이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다음에 나오는 의식입니다.
생명체의 진화를 보면 처음에 단세포로 시작해 여러 개의 세포가 형 성되면서 세포와 세포가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신경조직이 생깁니다. 신 경조직은 하나로 연결되기도 하지만 옆으로 번져 온 몸으로 퍼져나가죠. 이러한 신경조직이 감각한 내용을 종합하고 분석하고 처리하는 중추기 관이 뇌입니다. 뇌는 운동을 비롯해 기억, 판단, 감정, 창의 등 담당하는 영역이 나눠져 있습니다. 오늘날 로봇과 인공지능을 만들고 있지만 아직 까지도 인간이라고 하는 생명체를 따라오지 못하는 것은 대뇌의 역할을 대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의식이라고 하는 면에서 보면 우리 인간은 가장 완벽한 생명체로 진화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Q 전 5식과 6식인 의식에 대해 설명해주셨는데요. 『반야심경』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고
안계부터 의식계까지 없다,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본래부터 있었던 것 이 아니라 인연 따라 조건 지어졌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건가요?
『반야심경』에서 공(空), 불(不), 무(無), 이 세 글자의 뜻을 유심히 살펴 봐야 합니다. 잘못하면 공이 무이고 무가 공이고 불이 무이고 무가 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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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혼동하기 쉬워요. 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없는 거죠. 불 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존재하지만 무엇무엇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 다. 공은 존재하는데 영원성이 없다는 뜻이에요. 이렇게 단어의 뜻이 다 르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구절에서는 자성이 없다는 것이고 불생불멸, 이 구절에서는 나고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여 기에서는 본래 없다는 것입니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본 의식이라 고 하는 것이 본래부터 있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이야기한 이유는 대상과 상관없이 보는 놈이 따로 있다고 생각 했기 때문입니다. 아트만으로서 보는 주체가 따로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 이에요. 눈을 감으면 볼 수 없고 불을 끄면 볼 수 없는데도 브라흐만 신 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아트만이라고 하는 존재가 다 보고 다 안다고 착 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잘못된 논리를 깨기 위해서 이렇게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식체계 그 어떤 것도 그 자체로 본래부터 있었던 의식이란 없습니다. 5온 12처 18계의 상호작용에 의해 일어난 인식체계일 뿐입니다. 의식이 본래부터 있었다면 진달래를 보다 가 개나리를 봐도 진달래를 보고 있어야 하겠죠. 본래부터 있다고 하면 불변이니까요. 하지만 눈이라는 센서는 진달래를 보다가 개나리를 보면 바로 바뀌잖아요. 그러므로 안계에서부터 의식계까지 본래부터 존재했 던 것은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식의 대상인 사물과 세계도 그렇 고, 그것을 보고 듣고 인식하는 의식의 세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꿈을 꿀 때도 그래요. 한국 사람들은 꿈에 저승사자를 보면 갓을 쓰고 검은 도포를 쓴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인디언들은 깃털을 달 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해요. 꿈도 우리의 인식 체계 안에서 나오 는 것이기 때문이죠. 각각의 기억과 경험과 잠재의식에 의해서 그려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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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지 실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Q 6식이 표면적인 의식이라면 좀 더 깊은 의식으로서 7식과 8식이라고 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전 5식에서 받아들인 것을 종합하여 의식이 형성됩니다. 눈으로는 빨 간색을 받아들였고 귀로는 주위에 벌이 날아다니는 소리를 들었고 냄새 는 진달래 향기가 나고 그것을 따서 먹어보니까 달달한 꿀이 있고 만져 보니까 꽃잎이 있어서 이것을 종합해 진달래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름도 있고 개념도 있고 본인의 기억까지 종합해서 도출한 결론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누가 본 것인가요? 내가 봤어요. 어떤 때는 스쳐지나 갈 것이고 어떤 때는 그 옛날 진달래를 봤던 봄을 떠올릴 것이고 또 어떤 때는 여행 가서 사진 찍었던 일들을 떠올리겠죠. 그러면서 나와 연결하고 나의 기억과 추억과 연결하게 됩니다. 전라도에서 자주 하는 말이 ‘나가 말이여’ ‘나가 말이세’인데요. 나라는 주어가 생기는 거예요. 내가 밥을 먹고, 내가 일을 하고, 내가 잠을 자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이렇게 ‘나’라고 하는 GPS가 생기는 거죠.
이것이 ‘아(我)’이고 나를 고집하고 집착하는 것을 아집이라고 합니 다. 내가 있고 내가 실재하며 내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브라흐 만교에서는 이것을 아트만이라고 하여 아예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까지 한 거예요.
흔히 하는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이 말은 현대인들이 너무 정신 없이 살고 있고 자신의 생각이 아닌 남들이 만들어놓은 가치관과 이미지 에 휩쓸려가는 것을 반성하자는 뜻이겠지만 우리는 자아를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오히려 자아를 너무 집착하고 있어서 문제죠. 실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을 꽉 붙들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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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나를 집착하고 아집이 굳어지면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아의식이 강하면 강할수록 내 몸, 내 집, 내 자리, 내 명예, 내 생각, 온 통 내 것, 내 것, 하면서 살죠. 그런데 여기에 원래 내 것이 있습니까? 아 가 없는데 내 것이 있나요? 나라는 생각, 내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수많 은 복잡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진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착각이라고 생 각하는데요. 이러한 나에 대한 집착이 고통의 씨앗인 거예요.
그렇게 아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분별이 시작됩니다. 그것을 제7식 말 라식(mānas-vijñāna)이라고 합니다. 분별식이라고도 하죠. 아가 생기면 어떻게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냐 하면 나한테 좋은가 나쁜가 하는 구분 이 생깁니다. 나한테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내 욕심에 좋은가 나쁜가 하 는 거죠. 내 욕심을 기준으로 분별이 일어납니다. 내 욕심이 곧 아의 변형 이죠. 나에게 좋으면 애착이 일어나고 나에게 싫으면 미워하는 마음이 일 어나죠. 이 두 가지 마음 때문에 계속해서 시비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승찬스님께서 『신심명』에서 지도무난 유혐간택 단막증애 통 연명백(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 으니 오직 분별하고 취사선택하는 마음만 버리면 된다, 싫어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으면 툭 트여 명백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지극한 도는 하나도 어려울 게 없어요. 무수한 도인들께서 싫고 좋은 생각만 버 리라고 하셨죠.
의식에 의해 아가 형성되면서 말라식이라고 하는 제7식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별식도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죠. 아가 발생하면서 생긴 거예요. 제6식 의식이 변화한 식입니다.
그 다음, 인간 의식이 어떻게 진행되나요? 나에게 좋은 일은 계속 하 려고 합니다. 밥 먹는 것만 봐도 하루에 세 끼를 매일 먹는데 이것을 제 대로 못하면 보통 불만이 아니죠. 무슨 일이든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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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계속 반복하려는 의지가 생깁니다. 그렇게 계속 반복하는 것을 업이 라고 하고 그 업에 힘이 붙죠. 그것을 업력이라고 합니다. 자동차도 달리 다 보면 가속이 붙잖아요. 무엇이든 반복하면 업에 그러한 힘이 생깁니 다. 그것이 대뇌의 아주 깊은 무의식 속에 기억되고 잠재하게 됩니다. 좋 은 것 뿐 아니라 아주 싫은 것도 대뇌에서는 깊이 인식되어 무의식에 저 장됩니다. 생존적인 욕구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것이 제8식 아뢰야 식(ālāya-vijñāna)입니다. 요즘 심리학 용어로는 무의식이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했다고 할 때는 깊은 인식 속에 업이 그렇게 저 장되어 있어서 그런 거예요. 무의식에 업이 저장되면 어떠한 현상을 만나 면 바로 작동합니다. 요즘 아주 어린 나이인데도 노래를 너무나 잘 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전생의 업이 아니면 어떻 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죠. 무의식 속에 깊이 잠재되어 있 던 의식이 그런 상황을 만나 폭발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아뢰야식은 잠재의식 속에 깊이 저장되어 있다고 해서 감추어져 있다, 가둬져 있다는 의미로 장식(藏識)이라고도 합니다. 아주 깊은 무의식의 세계예요.
Q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이 구절에서는 우리의 인식기관과 인식대상, 그리고 여기에서 파생되는 모든 의식 들이 고정불변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지요?
우리의 의식 세계까지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되어진 것이고 사 라진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고집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고집할 것 이 하나도 없습니다. 색부터 수상행식 어느 것도 고집할 것이 없어요. 고 집해야 할 것도 없고 생사를 걸어야 될 것도 없죠.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아집과 법집인데요. 『반야심경』 전체를 꿰뚫 는 것이 아집을 깨라는 것입니다. 첫머리에 오온개공이라고 했잖아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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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오온부터 12처 18계를 구체적으로 열거하면서 본래부터 있었던 것 이 하나도 없으며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자성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가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 고 하신 거예요. 지금 보고 듣고 일어나는 일에 나를 개입시켜 집착하지 말라고 하신 거죠. 선사들께서 조고각하(照顧脚下), 발걸음을 뗄 때 바로 자신의 발밑을 보라고 한 것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반야심경』의 가르침만큼 우리가 아를 버리고 집착을 버리는 데 유 효한 약은 없습니다.
Q 다음은 12연기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설법을 법수로서 말씀하셨습니다. 육바라밀은 보 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순으로 차례대로 설명하셨죠. 교학과 수 행의 측면에서 이러한 순서는 중요합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차례대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제가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이 구절은 무명에서부터 노사까지 12연기를 설명하신 거예요. 12연기 의 열두 개 항목을 모두 나열하지 않고 내지라고 한 것은 12연기의 시작 인 무명에서부터 12연기의 마지막 노사를 대표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앞에서는 나를 구성하고 있는 오온이 공한 것을 설명하셨고, 그 다음 인 식대상과 인식기관과 그로 인해 형성되는 의식도 모두 본래 있는 것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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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라고 설명한 다음, 이제 12연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Q 12연기는 무엇을 설명하기 위한 교리인가요?
연기법과 무아법과 공성이 다 같은 개념이라고 했지요. 자성이 없기 때문에 무아이고 연기하고 공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에 집착 하기 때문에 영원한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죠. 그런데 영원 성이 있다면 변화하지 못합니다. 만약에 우주가 빅뱅이 일어나기 전에 불 변의 고정체였다면 우주는 발생하지 않았겠죠. 만약에 부모가 불변의 고 정체를 갖고 있다면 유전자를 나눠가진 자식이 탄생하지 않겠죠. 이처럼 모든 것은 자성이 없이 공하기 때문에 모두 다 변화하고 발생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뭔가 영원한 것이 있다거나 창조되어진 것이 있다고 주장하 면 변화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실제 일어나는 변화를 설명할 수도 없습 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몸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각은 고정불변의 아트 만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변화하지 않는 아트만은 그러므로 나와는 아 무 관계가 없어요. 나와 관계가 있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이야기가 됩니 다.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결과가 만들어지고 그 결과가 다시 원 인이 되고 다른 조건을 만나 또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하죠.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이 우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소 우주인 인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이 연기되 어지는 모양을 설명하는 거죠. 부처님께서는 연기를 5지, 7지, 9지, 12지 로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지는 가지라는 뜻이니까 다섯 가지, 일곱 가지, 이런 의미입니다. 가장 길게 설명한 것이 12연기입니다. 이것은 생명이 윤 회하는 과정이에요. 12연기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자 생명이 잉 태되어 생사를 겪고 윤회하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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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12연기의 무명, 행, 식, 명색, 육처,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차례 대로 설명 부탁드립니다.
제일 먼저 무명(無明, avidyā)입니다. 여기서 vidyā는 빛, 밝다, 즉 지 혜라는 뜻이에요. 앞에 a라는 부정접두사가 붙어서 밝지 않다, 어둡다, 지혜가 없다, 이런 뜻이 됩니다. 아에 집착하고 탐진치에 집착해서 어두 워지고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무명을 근본무명(根本無明)과 지말무명(枝末無明)으로 나누는데요. 생명체는 왜 태어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왜 살려고 하는지도 설명하지 못 합니다. 이유도 모르고 답도 모르면서도 무조건 살려고 하죠. 심장도 무 조건 뛰잖아요. 아주 조그마한 단세포 생물도 무조건 살려고 하죠. 이것 이 어둠입니다. 무조건 살고자 하는 욕구가 근본무명입니다. 지말무명은 살아가면서 발현하는 욕심 때문에 계속 어두운 쪽으로 나아가고 욕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근본무명은 무의식적 본능이라고 할 수 있고, 지말무명은 일어날 때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인식할 수 있는 본 능과 욕심이에요.
한편으로 보면 무조건 살고자 하는 무의식적 본능인 근본무명이 생 물을 진화시켜오기는 했어요. 환경에 적응하고 적자생존으로 종을 유지, 변화, 발전시키면서 지금까지 진화해왔죠. 이것이 인간을 포함해 모든 생 명에게 있는 깊은 업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다 깨치셨지만 마지막에 이러한 생명에 대한 무의식적인 본능인 근본무명까지 소멸하 는 대반열반을 나머지가 하나도 없는 무여열반이라고 했죠.
무명 다음에 행(行)이 생깁니다. 무조건 살려고 하는 생각에서 움직이 는 거예요. 삶을 움직이는 힘이자 원동력입니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것 이 식(識)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의식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명(名)과 색(色)이 일어나죠. 이름과 모양이 형성됩니다. 성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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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신분, 외모 다 명색에 해당됩니다. 나의 삶이 이것이다, 하고 규정 하고 있는 것들이죠. 여기에서 받아들이는 여섯 가지 대상인 육처(六處) 가 생깁니다. 명과 색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촉(觸)입니다. 대상 과 접촉하는 거죠.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수작용이 수(受)입니다. 감수작용은 사람마다 처지마다 다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부모 입장이 다 르고 자식 입장이 다르고 상황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욕망에 따라 좋아하고 싫어하는 취사선택의 마음이 일어나죠. 그것이 애 (愛)입니다. 취사선택의 마음이 반복해서 일어나면서 애착하는 것은 가지 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가지려고 애를 쓰겠죠. 그것이 취(取)입니다.
그러면 유(有)가 생겨납니다. 있다고 했는데 이러한 삶의 형태가 생긴 다는 뜻입니다. 업의 형태가 생긴다는 의미죠. 그리고 생(生)과 노사(老 死)가 이어집니다. 이것이 일생이고 무명의 업식에 의해 윤회하는 것입니 다. 한 생을 하나로 나열해놓은 것이자 무명과 애착심에 의해 태에 입태 하여 태어나고 생사윤회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입니다.
Q 12연기를 무명에서부터 노사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노사에서 무명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무슨 차이가 있나요?
연기법을 관찰하는 방법인데요. 지금 이야기했듯이 무명에서부터 생, 노사까지 관찰할 때는 윤회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고 거꾸로 생, 노 사에서부터 역으로 관찰해 무명까지 사라지는 과정을 살필 수도 있습니 다. 도를 닦는 사람은 이것을 모두 사라지게 한다는 관점에서 볼 수 있 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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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런데 무무명, 무명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무명은 없어요. 어두움이라는 것도 영원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보조국사 지눌스님께서 천 년의 동굴 속에 있는 어두움도 불 을 켜면 순식간에 밝아진다고 했어요. 어두움에 자성이 있고 시간에 자 성이 있다면 천 년 동안 어두웠던 동굴을 밝히려면 천 년 동안 빛을 줘야 어두움이 없어지겠죠. 하지만 자성을 갖고 있지 않으니까 불을 밝히는 순간 환해지는 것입니다.
무명은 없습니다. 실재하지 않죠. 밝지 않을 뿐이에요. 밝음이 없을 뿐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원래부터 죄를 짓고 나왔다면 살면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잖아요. 죄가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천수경』에서 이야기했듯이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 역망(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時罪亦亡), 죄라는 것도 본래부터 자성을 갖고 있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 마음이 소멸하면 다 소멸되는 거예요. 자성을 갖고 있지 않으니까 참회할 수 있는 거죠. 자 성이 있다면 참회할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원죄가 있고 영원한 죄가 있다면 받지도 않을 거예요. 자성이 있다면 그것 을 내가 어떻게 받겠어요? 만약에 약을 먹었는데 이것이 녹지 않고 소화가 안 된다면 아무런 역할도 못하고 그냥 배설물로 나오는 것과 같은 거죠.
이처럼 무명이라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을 밝히지 않았 을 뿐이에요. 무무명입니다.
Q 그리고 역무무명진, 무명이 다함도 없다, 어떤 의미인가요?
무무명(無無明)인데 그에 반해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입니다. 어둠 이 다할 때도 없다고 했어요. 이 말을 원래부터 불성이 있다느니 원래부 터 부처였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전혀 맞지 않는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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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태어나는 것 자체가 무명이기 때문에 생명이 있다는 것은 무 명을 전제로 합니다. TV에서 보니까 캥거루인가 곰인가 태어났는데 눈 도 못 뜨고 손가락 두 마디 정도밖에 안 된 녀석이 엄마 배를 타고 젖꼭 지를 찾아 올라가더라고요. 본능적으로 살려고 하는 거죠. 무명이 본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생명이 있는 한 무명이 다함도 있지 않아요.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빛이 있는 한 그림자가 없을 수 없어 요. 그러니까 이것은 윤회와 연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무명이라는 것 은 공성이어서 본래 있지 않지만 생명이 존재하는 한 무명으로부터 시작 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부처일 수 없다, 이 말입니다.
Q 무무명을 영원히 무명에 머물지 않는다, 이렇게 이해해도 될까요?
무명도 자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영원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명도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니까 더 나 아가면 무명에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고 해도 맞는 말이 되죠.
결국에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어두운 생각을 했을 때는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이고 밝은 생각으로 바뀌면 그것 으로 바로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선사들은 사흘 전의 일을 물어보지 말 라고 했습니다. 어제까지는 이 생각을 했는데 이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완전히 버려버렸다면 그것은 없는 거예요. 물론 업이 있어서 조금 연장이 될 수 있더라도 내 마음 속에서 사라지면 그 잘못된 생각은 사라진 거죠.
Q 무명도, 무명이 다함도 없다고 한 다음 내지, 라는 말을 통해 행부터 생까지 열 개 항목도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해석해아 하겠지요?
모든 생명체가 살려고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본능이라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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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이 말에는 본래부터 있다는 뉘앙스가 강하죠. 하지만 근본부터 있었 다고 하기는 어려워요. 다만 생명체가 태어나면 그렇게 움직이는 거죠.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부처가 되겠다고 생각하거나, 뱃속에서부터 부처가 되는 경우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행도 자성이 있지 않으나 생명이 태어 났을 때는 행 없이 생명이 이어질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12연기의 각각은 자성이 없으나 그것이 있어야 생명이 이 어지고 그런 가운데 깨침으로 들어간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Q 이어서 무노사 역무노사진, 설명 부탁드립니다.
앞에서 불생불멸이라고 했어요. 늙고 죽음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성을 갖고 있지 않다고 했죠. 그렇게 변해가는 것뿐이에요. 무노사, 늙고 죽음도 실재가 없습니다. 하지만 역무노사진, 태어나면 모두 죽는 거예요. 다함 또한 없습니다.
『반야심경』은 있는 사실 그대로를 바로 설한 경전입니다. 조금 가리 거나 돌려서 이야기하는 것이 일체 없어요. 직선적으로 바로 다 이야기했 기 때문에 반야이고 그것도 마하반야, 큰 지혜입니다. 거리낌 없이 직선 적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애착과 집착의 우매함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 는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Q 무명에서부터 노사에 이르는 12연기가 본래 있는 것도 아니고 다함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은 생명의 본질과 윤회에 대해 설명한 것이군요.
『반야심경』의 첫머리를 그래서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대전제입니다. 오온이 공하다, 이것을 전제로 하여 어떻게 연기로서 변화 하는가를 설명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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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12연기에 대한 구절에서도 불변의 독립된 자성이 없다는 것을 기억 하면 될까요?
『반야심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인간입니다. 인간이 가장 소중하 게 생각하는 자신도 영원한 자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하나하나 설 명하고 있는 거예요. 오온으로 설명하고 6근 6경 6식으로 설명하고 12연 기로 설명한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 대하여 전반적이면서도 핵심적인 공 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Q 정리해보면, 무명에서부터 노사에 이르는 연기의 과정에서 그조차도 자성이 없으나 생명이 존재하는 한 무명에서부터 노사까지 겪을 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래서 우리의 삶을 생로병사라고 하지요. 생로병사에서 벗어나는 것 이 없습니다. 『삼국유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뱀복이(사복)의 어 머니가 돌아가시자 원효스님께 시다림 법문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원효 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태어나지 말지어다, 죽기 괴로우니, 죽지 말지어다, 태어나기 괴로우니. 그러자 뱀복이가 뭘 그렇게 길게 이야기 하 냐면서 생사고해라, 나고 죽는 것이 다 괴로움이니라, 했어요. 태어나면 죽게 되어 있고 그런데 다시 또 태어나는 윤회를 하잖아요. 이렇게 계속 윤회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최종적으로 멈추는 것이 부처님 법입니다.
Q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이 구절을 이해한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간단합니다. 우선 실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아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이 세상은 잠시도 쉼 없이 흘러가고 있습 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릅니다.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어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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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과 공간을 초월해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인생의 큰 흐름에서 보면 크 게 바뀐 게 없는 것 같아도 잠깐 잠깐의 지금 이 순간도 계속해서 변화하 고 흘러가고 있거든요.
영원한 것이 있다고 믿는 순간, 그것이 대상이 되었건 내 안에 있는 무 엇이 되었건 영원하다고 믿는 순간, 삶을 실패하기가 쉬워요. 삶이 끊임 없이 변해가는 과정이라고 하는 사실을 철저하게 알면 내가 어떻게 변화 할 것인가에 대하여 질문하게 됩니다. 이것이 불교의 모든 것이에요. 부 처님께서는 이 변화의 원리를 밝히셨고 우리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길 을 제시해놓으셨죠.
콩밭을 만들려고 하면 콩을 심어야 합니다. 콩밭을 만드는데 팥을 심 을 수는 없잖아요. 우리 어머님은 시골 마을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제일 꼭대기 찬물이 나오는 자그마한 논에는 찹쌀을 심으셨어요. 왜 찹쌀을 심으시는지 여쭈니 찬물 나는 곳은 맑고 깨끗하니까 제사 때 올리려고 하신다고 하셨어요. 거름도 안 쓰고 농약도 안 치고 찹쌀농사를 지으셨 는데요. 논에 찹쌀 하나를 심을 때도 그 결과를 알고 농사를 짓습니다.
막연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자나 부처님께서 알아서 다 해주 시겠지, 이렇게 막연한 생각을 갖고 살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은 변하는데 그 변화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에요. 내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하죠. 마음도 고정되어진 것이 없기 때문에 어떤 마음을 일으킬 것인 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보리심도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면 일으킬 필요가 없고 일으킬 수도 없겠지만 지금 마음을 그렇게 일으켜서 그렇게 되고 그 다음에 진전해서 나가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를 연기법으로, 인과법으 로 다 생각할 수 있는 거잖아요.
불교의 삶이란 나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변화는 무엇으로부터 시작하나요? 변화는 마음으로부터 시작하죠. 마음으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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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 생각이 나오고 의지가 나와야 바뀝니다. 삶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정 신을 차리고 살 것인가, 이것이 불교 가르침의 전부예요.
12연기도 이렇게 보면 됩니다. 무명 때문에 내가 그동안 삶을 이렇게 선택해왔구나, 하고 자각이 일어나면 행이 달라지고, 그러면 그 삶의 내 용이 다 달라집니다. 보는 시야도 달라지고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이러 한 자각은 『반야심경』을 통해 충분히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부모가 알아서 해주겠지 하지만 부모가 해줄 수 없는 게 너무 많잖아요. 선생이 알아서 해주겠지 하지만 선생도 보조자일 뿐이죠. 국가가 해주겠지 하는데 국가는 전쟁을 막는다거나 재산을 보호해주는 큰 것밖에 못해요. 그런 것은 모두 삶의 조건일 뿐이지 삶을 이루는 주체도 나이고 변하는 주체는 나입니다. 그 리고 그러한 변화는 바로 나의 마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영원한 자성이 없다는 깊은 인식과 그렇기 때문에 고집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여기에 일체 중생을 위해서 살 겠다는 보리심을 낸다면 삶이 정말 아름답게 변해가죠.
저는 농부가 인과를 가장 안다고 생각합니다. 5~6월이면 모내기를 하 거든요. 모를 심고 때맞춰 피를 뽑고 하면 가을에 쌀을 거둔다는 것을 분 명히 알아요. 사과를 심으면 사과를 수확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죠. 이것 이 인과법이잖아요. 사과나무를 심지 않고 부처님께 빈다고 사과가 열리 겠어요? 인과법을 아는 것 말고 삶을 순탄하고 바르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 습니까?
인과법을 아는 것 외에 삶을 더 나아지고 상향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인과법을 모르면 삶이 어두워집니다. 이것이 『반야심경』 에서 이야기하는 12연기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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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12연기에 이어 사성제도 없다고 합니다.
무고집멸도
無苦集滅道
고집멸도도 없으며
공성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신 분이 2세기 경 용수보살이거든요. 용 수보살은 『중론』에서 반야부 600부의 내용을 요약해서 말씀하셨는데 오 류를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설명이 잘 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을 중심 으로 무고집멸도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Q 먼저 사성제에 대해 짚어주세요.
아시다시피 사성제는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초전법륜을 굴리실 때 하신 말씀이지요. 이것은 인도 베다의 의학적 논리를 빌려온 철학입니다. 환자가 있다면 지금 어떤 통증과 어떤 증상을 겪고 있는지 살펴보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진단한 다음 치료할 수 있는지 판단하고 거기에 맞는 치료방법을 찾는 것이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방식이지요. 부처님께서 는 깨닫고 나서 이러한 일반적인 논리로써 인간의 고통과 해결방법을 설 명하셨습니다.
만약 중생에게 고통이 없다면 종교가 필요하지 않았겠죠. 어쩌면 인류의 문화적, 과학적, 의학적 발전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고통은 반드시 있잖아요. 인간이 태어났을 때부터 시작해 누구나 겪는 근본적이고 보편 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태어나는 고통으로부터 시작하여 늙고 병들고 죽 는 고통이죠.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싫어하는 사람과 같이 있어야 하고, 구부득고(求不得苦), 갖고자 하지만 얻어지지 않고, 오음성고(五蘊 盛苦), 몸에 밸런스가 안 맞아서 장애가 일어나는 등등의 고통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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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모두 병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고(苦)’라고 정리하셨어요.
그러면 원인을 찾아야 하겠죠. 생로병사는 우리가 생명을 받고 몸을 받아서 태어나면 필연적으로 오는 고통입니다. 좋아하는 게 있으면 싫어 하는 게 있고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상대적인 고통도 필연적인 고 통입니다. 이것이 집제(集諦)입니다.
그렇다면 고통을 없앨 수 있을까요? 만약 부처님께서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살펴보셨지만 고통을 없앨 방법이 없다고 했다면, 불교는 없었겠 죠.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고통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을 완벽하게 터득하 셨습니다. 그 방법이 도제(道諦)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고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어 이루게 하셨죠. 부처가 실현된 것, 즉 니르바나가 멸제입니다.
만약 중생들이 고통스럽지 않다면 행복해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겠 죠. 하지만 현실은 고통스럽잖아요. 그랬을 때 고통의 원인을 찾고 고통 을 없애는 방법을 찾아야죠. 그런데 살펴보니까 중생들은 행복이라고 생 각하며 추구하는 것들이 오히려 고통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여래가 발견 하셨어요. 여래가 발견한 고통을 없애는 방법이 사성제입니다. 고통의 현 상과 원인, 그리고 고통을 여읜 결과와 방법을 알기 쉽게 설명한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이 사성제에 대한 공성적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Q 사성제는 초전법륜에서부터 대승에 이르기까지 가장 기본이 되는 교리 이지요?
초전법륜, 중전법륜 대승, 상전법륜 밀교, 그리고 중국의 선종에서도 모두 관통하는 교리입니다. 만약에 고(苦)가 없다면 대승도 필요 없고 선 도 필요 없겠죠. 고통스럽지 않은데 불교의 여러 가르침이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즉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불교의 목표입니다. 고통을 해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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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목표에 다다르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 사성제입니다. 사성제는 『아함경』에서 무수히 등장하고 대승에 있어서는 『화엄경』에서 보다 구 체적이고 발전된 내용으로 설명됩니다. 밀교 안에서도 사성제에 대해 따 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성제를 초전법륜에 국한된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불교사상의 기본이자 뿌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Q 불교의 가장 기본이 되는 교리인 사성제를 『반야심경』에서는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다시 무의 의미를 새겨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반야심경』을 비롯해 부처님의 모든 말씀은 고통을 없애기 위한 방 법론입니다. 『금강경』에서 뗏목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죠. 강을 건너기 위해 뗏목이 필요하지 뗏목 자체가 절대적인 가치를 갖고 있지는 않잖아요. 사성제라고 하는 논리적인 방식도 절대적인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설명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성제 역시 고통을 없애는 데 이용하는 것이지 절대적인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부처님께 서 말씀하신 것 가운데 이것을 깨면 절대 안 된다고 하는 절대적 가치이 고 절대적 진리는 절대 없어요. 사성제도 원래부터 있었던 어떤 절대적인 논리가 아니에요. 그러므로 무고집멸도란, 사성제는 단지 중생의 고통을 없애기 위한 가르침이고 그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일반적인 논리를 가져 다 쓴 방편이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Q 그러면 사성제의 내용 하나하나에 대하여 살펴볼까요?
여기서부터는 아주 중요합니다. 눈 번쩍 뜨고 살펴봐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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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가 없다고 했습니다. 고통이 있는데 왜 없다고 하지요?
사실 고통이 ‘있다’고 하면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언 어의 모순인데요. ‘있다’의 전제는 영원하다, 고정불변하다는 것을 깔고 있어요. 그런데 고통이 영원하고 변할 수 없다면 고통을 없애려고 하는 부처님의 말씀은 성립이 안 되죠. 허구가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지었다는 논리예요. 브라흐 만천에서 아트만으로서 내려왔지만 내려오는 순간 타락했다고 하는 논 리나 인간에게 원죄가 있다는 논리는 모두 죄를 없앨 수 없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게 됩니다. 그래서 고행을 이야기하고 회개를 이야기하지만 죄 를 없애주는 것은 절대자에게 달려있죠. 그러한 논리대로 하면 죄에 의해 서 지옥에 가면 영원히 나오지 못해요. 나올 수 있는 길이 없어요.
이에 대해 우리는 『천수경』에서 배웠습니다.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 시죄역망(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是罪亦忘). 죄도 무자성입니다. 영원성 을 갖고 있지 않죠. 마음 따라서, 업 따라서 일어난 것뿐이에요. 그러므 로 그 죄를 일으키는 그 마음이 없어지면 죄 또한 사라집니다. 그러면 고 통 또한 사라지지요.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영원한 죄를 지었으니 영 원히 지옥에 있다거나 영원한 선을 지었으니 영원히 천상에 있다고 하지 않아요. 끊임없이 윤회하는 거예요.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일을 하면 좋은 모습으로 변하고 나쁜 생각 을 하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모습으로 변하겠죠. 윤회가 없고 변화가 없 다면 좋은 생각을 했으면 영원히 좋은 생각만 해야 하고 나쁜 생각을 했 으면 영원히 나쁜 생각만 해야 하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제가 자주 이야기하지만 밭에 깨를 심으면 깨밭이 되고 콩을 심으면 콩밭이 되고 아무 것도 심지 않으면 잡초 밭이 되는 것과 똑같아요. 어떤 씨앗을 심느냐에 따라 밭이 변하는 거죠. 결과가 달라지는 거예요.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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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달라진다는 말은 고통이라는 것도, 죄라는 것도, 정해져 있지 않다는 증거예요. 원래부터 있는 고통이나 죄는 없습니다.
산티데바의 『입보리행론』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고통이 나에게 왔다 해도 고통은 자성이 없어서 영원하지 않으니 내가 지은 업만큼 왔 다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그대여 기다리라. 그대가 좋아하고 기뻐하는 일도 자성이 있지 않으니 지은 복만큼 왔다가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 대들이 영원히 행복할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세속적인 복은 연기처럼, 안개처럼 사라질 것이다.’
이처럼 고란 자성이 없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없다 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원래부터 있던 것이라면 영원히 멸할 수 없겠죠. 인연 따라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없앨 수 있는 것입니다. 불성이나 진여 자성도 같은 논리로 봐야 합니다. 영원하다거나 그것만 발견하면 된다고 하면 무명과 반야, 중생과 부처는 끝끝내 이원적으로 평행선을 가야 하 는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만날 수 있는 길이 영영 없어요.
일으키면 발생합니다. 밭에 씨앗을 뿌리면 알곡을 맺듯이 보리심을 내면 결실을 맺는 거예요. 보리심을 내지 않고 육바라밀 수행을 한다면 그것은 씨앗을 심지 않고 퇴비를 주는 것과 같아요. 복은 될지언정 공덕 은 되지 않아요. 그래서 달마대사가 양무제에게 소무공덕(所無功德)이라 고 한 거예요.
그러므로 고는 없습니다. 인연 따라 일어나고 인연 따라 사라집니다. 고통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면 낙담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고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겠죠. 세속적인 행복도 인연 따라 발생했다 인연 따라 사라집니다. 그러면 행복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고 거 기에 취하지도 않겠죠.
달라이 라마께 직접 들은 말씀이 있습니다. 중국이 티베트인을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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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명을 죽였어요. 인구의 1/3을 죽인 거예요. 처참할 정도로 핍박받았으 니 고통스럽지 않은지 여쭤봤습니다. 그때 존자님께서는 아프지만 그렇 다고 중국 국민의 고통과 아픔도 원치 않는다고 하시면서 어느 생인가 티베트가 중국에 고통을 줬기 때문에 얻어지는 고통이라고 하셨어요. 이 고통의 업이 풀리면 언젠가는 바로 잡히고 중국 사람들도 우리의 좋은 벗이 되지 않겠냐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티베트의 비폭력, 무저항, 평화주 의의 내면에는 아주 깊은 인과와 공성의 가르침이 들어있습니다.
Q 그 어느 것도 머물러 있지 않지만 우리들은 고통은 어서 가기를 바라고 기쁨과 행복은 계속하기를 바랍니다.
그게 마음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고통은 없기를 바라고 즐거움 은 계속되기를 바라는 게 지극히 당연하지만 그 바람이 지나치면 잘못되 기 쉬워요. 정치하는 사람은 독재가 되기 쉽죠. 그것이 무명입니다. 영원 하지 않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니까 집착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우리도 잘 알아요. 돈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통장 에 넣어놓고 꽁꽁 감추는 거예요. 영원하다면 감출 필요가 없죠. 돈을 아 껴 쓰라고 하는 것도 이것이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을 아니까 하는 이야 기 아니겠어요? 끝날 때가 있다는 것을 아니까 아끼고 모으고 하죠. 권 력을 가진 사람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오래 권력을 가 지려고 무리한 일들을 벌이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알기는 아는데 착각 을 하고 스스로 최면을 걸 뿐이죠.
사실 종교가 출현하고 발전하게 된 데에도 모든 것이 얼마 못가고 유 한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 아닐까요? 살면서는 물론이고 죽 은 뒤에라도 뭔가 잘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지요. 하지만 불교는 살 아서는 물론이고 죽은 뒤에도 그런 것은 없다고 처음부터 명확하게 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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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어놓았어요.
Q 고(苦)가 자성이 없이 영원하지 않듯이 집(集)도 자성이 없고 영원하지 않겠지요?
사람도 7~80년이면 다 흩어집니다. 살면서 귀하다고 여기는 온갖 물 질도 영원한 건 없어요. 나라고 생각하고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 가운 데 영원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떤 것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 집착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스승의 사리를 모시는 것도 그것이 영원하거나 신비로워서 봉안 하는 게 아니잖아요. 스승의 몸의 일부이니까 스승이 돌아가신 뒤에도 스승을 모시듯이 스승을 생각하면서 그 뜻을 이어받아 정진하겠다는 뜻이죠. 우리가 아(我)라고 집착했던 것도 허망한 것이고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의 몸도 시간이 다하면 가겠죠. 가지 않으려고 집착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영원한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고통의 원인도 없는 것입니다.
Q 고와 집이 원래 없는 것이라는 말씀은 이해가 됩니다만, 우리가 추구 하는 멸(滅)을 없다고 한 이유는 조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고통이 사라지는 멸의 세계마저 없다고 하면 수행을 하고자 하는 마음도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것 가운데 하나가 악은 없애야 하는 것이지만 선은 좋은 것이고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하지만 악이 없다 면 선이라고 하는 것이 필요할까요? 세상에 악이 다 사라진다면 선해지 자고 할 필요가 없겠죠. 선도 악도 본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기 심과 욕심에 의해 악이 일어나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선도 생겨난 거예 요. 대치 개념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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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 혜능스님께서 그러셨어요. ‘도란 무엇인가, 불사선 불사악(不思 善 不思惡)이다.’ 선과 악이 사라질 때 그것이 지극한 도라고 했어요. 악 이 사라져 선해야 된다는 생각마저 없어진 것이 도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악을 본래부터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대립하 는 것으로 세워놓으면 선은 또 하나의 절대가 되고 집착이 됩니다. 악을 본래 있는 것이라고 하고 선을 대척점으로 세워놓으면 선을 지극한 진리 로 여기게 되죠. 그러면 선을 행하는 사람들은 선민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착하고 너희는 악하다는 분별이 강화되어 극한 대립 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것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벌어지는 내분과 전쟁과 살상이에요.
불교의 이상인 니르바나는 중생의 이러한 착각을 극복한 경계입니다. 고통을 일으키고 착각과 욕망이 다한 것이 니르바나죠. 열반이 따로 있 는 게 아니라 단지 고통이 없어져 버린 거예요. 예를 들어 환자가 아파서 병원에 가고 치료를 해서 나았다면 나은 것이 따로 뭐가 있나요? 그냥 병이 나았을 뿐이고 아프지 않을 뿐이죠. 병이 사라진 상태잖아요. 그냥 정상으로 된 거예요. 열반이라는 것은 지극히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 자꾸 있다고 주장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 까? 계속 열반을 추구만 하지 실제로 번뇌가 사라지는 일은 하지 않아 요. 본래 불성이 있고 깨달음이라고 하는 어떤 영원한 것이 있다고 생각 하면 불성을 발현하고 깨달음에 이를 일들을 하지 않고 지금을 그대로 둔 채 그것만 추구하고 찾아다니는 일이 벌어져요. 이것은 매우 심각한 수행적 모순입니다.
이를 테면 치아가 아팠을 때 치아가 아픈 상태를 그대로 두고 다른 편안한 상태를 찾아서는 결코 편안함에 다다를 수 없어요. 다른 편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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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제 아무리 추구하고 닦는다 해도 치아는 계속 아픈 상태죠. 이와 비 슷합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것도 영원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번 뇌가 있으니까 이것을 없애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상태인 거예요.
니르바나(nirvāṇa)라는 말에도 그런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vāṇa는 바람이라는 말이고 nir는 부정접두어예요. 바람이 꺼졌다는 의미입니다. 바람이 꺼졌다는 것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이 사라져 조용하다, 편안하다는 이야기죠. 그러므로 니르바나, 열반, 멸이라고 하는 것도 실 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번뇌와 고통이 사라졌을 뿐이에요. 따라서 니르 바나의 영원성을 주장하면 그 영원한 것을 얻으려고만 하지 스스로 니르 바나에 들기 위한 실제적인 노력은 하지 않게 됩니다.
니르바나도 번뇌가 다 한 경계일 뿐 자성이 없습니다. 고향으로 돌아 간 것과 같아요.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수심결』에서 말씀하신 ‘천 년의 어두움도 한 순간에 밝아진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가 전등을 켜서 밝다면 여기에 어두움이 있나요? 어둡다고 하면 밝음이 없는 거죠. 어둠 이라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밝으면 어둠은 사라집니다. 니르바나의 밝음 이 이루어지면 어두운 상태가 사라져버린 거예요.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 는 것은 0.00001초도 차이가 없어요. 바로 순간입니다. 반야지혜를 깨치 는 순간도 이렇게 한 순간이지요.
Q 사성제의 마지막인 도(道)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도(道)란 니르바나에 이르는 방법이고 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고정 불변하고 영원하다면 우리가 그것을 활용할 수가 없어요. 수행방법론이 절대적인 가치로서 존재한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을 포함한 과거칠불과 미 래의 부처님인 미륵부처님의 교화가 똑같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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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에 미륵부처님이 오실 때는 사람들이 복이 많은 때라 타락하기 쉬운 세상이라고 해요. 그래서 계율로써 구제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수행방 법론도, 구제방법도 다 달라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절대적인 방법론이라 고 한다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해놓으신 그대로 미륵 부처님도 하 게 되고 많은 조사스님도 그대로 하게 되겠죠.
멸에 이르는 수행방법으로서 제시된 것이 육바라밀, 팔정도, 사마타, 위파사나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은 모두 영원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모두에게 무조건적으로 적용되는 것들도 아닙니다. 번뇌를 끊기 위한 여 러 가지 방법들은 병에 따라서 약을 주는 응병여약(應病與藥)입니다. 그 어떠한 방법론도 절대성을 갖고 있지 않아요.
의사가 약을 투약할 때는 부작용을 같이 봐야 합니다. 부작용이 있으 면 약을 줄이든지 다른 약으로 대체한다든지 하죠. 부처님께서도 사람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근기에 따라서 방법을 일러주고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 보완법을 설명했기 때문에 부처님 법문이 8만4천 법문이 된 거예요.
Q 앞서서 『금강경』의 뗏목의 비유도 말씀해주셨습니다만, 사성제 역시 하나의 방편이라는 말씀을 들으니 법집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받아 들여집니다.
부처님께서는 공을 두 가지로 설명하셨어요. 오온이 공하다고 하는 것은 아공(我空)을 말씀하신 거예요. 『반야심경』의 핵심이 아공입니다. 나라는 것도 영원성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이 법공(法空)입니다. 법이란 넓혀서 보면 모든 진리와 개념들 이고 좁혀서 보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이에요. 부처님께서는 당 신이 말씀하신 것조차 강을 건너는 뗏목에 불과하고 의사의 처방전에 불 과하다고 하셨어요. 이렇게도 비유하셨죠. 물을 먹이기 위해 소를 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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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는 끌고 갈 수 있지만 먹고 먹지 않는 것은 소에게 달려 있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러한 방법들은 모두 열반으로 이끌어주는 방법들이지 절 대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만약 부처님께서 당 신이 절대성을 갖고 있다고 하셨거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한 구절도 바꾸지 말고 더하거나 빼지도 말라고 했다면 중국에서 화두선이 나올 수 없었겠죠. 중국에서 위대한 화두선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방편 이 절대성을 갖고 있지 않고 상대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부처님의 가르침 에서 비롯된 거예요.
모든 중생을 부처로 여기고 모든 도인들의 방법론을 인정하는 것, 이 것이 불교의 위대성입니다.
Q 앞서서 무고집멸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용수보살의 『중론』을 공부 하면 좋다고 하셨는데요.
한국 불교학계에서 용수보살의 『중론』과 이를 해석한 월칭보살의 『입중론』 등을 많이 연구하고 가르쳤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하면 공성에 관한 설명이 보다 완벽하게 드러나고 일부에서 영원성을 주장하면서 부 처님께서 말씀하신 공성과 무아사상을 어긋나게 설명하는 일이 줄어들 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론』 「관사제품」에는 『반야심경』의 이 한 구절이 40개의 항목으로 아주 자세하고 정확하게 정리되어 있으니까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중 론』은 공성을 가장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는 논서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중론』에 대한 강의나 저술을 꼭 공부해보시기 바랍니다.
Q 영원한 자성이 없고, 모든 것은 변한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반대로 영원한 것이 있다고 생각해보면 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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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것이 있는지 찾아보면 아마 찾을 수 없을 거예요. 인류가 지금 껏 창조주, 절대자, 영혼 등 갖가지로 영원한 것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인 류 역사상 이것이 증명된 것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따라서 제일 쉬운 것은 있는 사실대로 아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인에 게 창조의 근거를 알려달라고 하면 대부분 그냥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거죠.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중에 큰 집을 하나 주 겠다고 한다고 믿을 수 있나요? 지금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하는 말 은 믿기 어렵죠. 사람의 마음이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안 믿는 거예요.
글쎄요. 영원한 것이 있을까요? 아직까지 발견된 것도 없고 증명된 것 도 없습니다. 과학적으로도 입증이 안 됐어요. 광자, 에너지, 에너지의 파 장까지 파고들어갔지만 그 가운데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어요.
자성 없이 인연 따라 발생하고 인연 따라 사라집니다. 이것이 있음으 로써 저것이 있고 저것이 사라짐으로써 이것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 세 상의 모든 것이 이름과 모양뿐이라고 하는 거죠. 이름과 모양 외에 실재 하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 세상이 모두 다 연기한다는 것을 잘 알 면 사는 데 있어서 틀린 것이 없습니다.
Q 이어지는 구절입니다.
무지 역무득
無智 亦無得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무지, 지혜가 없다, 어떤 의미인가요?
부처님께서는 그 어떤 것에도 특수성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반야 지혜라고 하는 것도 고정되어진 지혜가 없어요. 영원성이 없죠. 자성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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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때문에 공이고 무아입니다. 여기에 예외는 없습니다. 반야에 절대성이 있거나 고정되어진 어떤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반야가 아닙니다. 영원성 을 갖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부처님 말씀에 위배되죠.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일까요? 욕심이 사라져서 세상이 밝아졌을 때 의 인식체계가 반야 지혜입니다. 고정되어진 것이 없기 때문에 유동적입 니다. 절대성을 갖고 있지 않아요. 어떤 것이 지혜라고 특정하여 말할 수 없죠. 만약에 지혜라는 것이 절대성을 갖고 있어서 고정불변의 지혜가 있 다면 부처님께서 600부나 되는 반야부의 그 방대한 말씀을 하시지 않았 을 거예요. 단지 욕심이 사라지고 아가 사라진 상태에서 실상을 그대로 보고 듣는 것을 지혜라고 하지 다른 고정되어진 지혜는 있지 않아요.
지식과 지혜는 다르죠. 지식은 상대적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할 때는 항상 상대적인 것을 두고 인식합니다. 선은 악을 상대해서 인식하 죠. 어떤 사람을 선하다고 칭송하는 것은 그 사회가 많이 악하다는 반증 이에요. 모두가 선하다면 선함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흑을 설명하기 위해 백을 이야기 하고 하늘을 이야기하기 위해 땅을 이야기하죠. 이처럼 대 상을 파악할 때 비교하고 판단하는 것이 지식입니다.
지혜는 그렇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가 사라지면서 왜곡됨 없이 사실 그대로 볼 수 있고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있 는 그대로를 말씀하신 것이지 거기에 어떠한 욕심도 개입되지 않았어요. 욕망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가상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곳에 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일체 없습니다. 아가 사라지고 아의 욕심이 사라지면 배 고프면 밥 먹고 아프면 치료하는 것처럼 사실 그대로가 이루어집니다. 모 두 변한다는 것을 알면 그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면 그 어느 것에도 집착 하지 않아요.
지혜는 본래 있거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한 것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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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을 뿐이에요. 집착이 없어졌을 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을 흐르는 물과 같다고 하죠. 골짜기를 만나면 굽이쳐서 흐르고 폭포를 만나면 아 래로 떨어지듯이 세상과 인간 세상을 있는 그대로, 실상 그대로, 사실 그 대로 보고 속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당신의 가르침이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이니 무조건 따르라고 하지 않았어요.
Q 비우고 덜어냄으로써 지혜가 생긴다고 하는데요.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덜어내야 할까요?
우리가 시장에서 채소를 잔뜩 사왔다면 무엇부터 해야 하나요? 냉장 고를 비워야 하겠죠. 안을 비우지 않으면 새로운 재료들을 넣지 못합니 다. 행복감과 충만감은 어디에서 올까요? 욕심을 비우는 데서 옵니다. 냉 장고가 가득 차 있는데 시장을 봐와서 또 집어넣는다면 들어갈 수도 없 거니와 냉장고 안에 있는 내용물이 부패하거나 냉장고가 고장이 나겠죠.
아에 집착하고 욕심 부리고 착각하는 데서 고통이 오고 그것이 나를 고통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을 알면 비우게 됩니다. 무소유라고 하죠. 소 유하지 않겠다는 건데요. 사실 소유할 수 있는데 소유하지 않는 게 아니 라 그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어요.
물질이나 재산은 물론이고 가장 소중하고 아끼는 이 몸도 내 것이 아 니고 내 마음대로 안 돼요. 그런 점에서 보면 이 몸은 활용대상이지 소유 대상이 아니에요. 이 몸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같이 살아가는 것뿐이 지 따지고 보면 언제든지 나를 버리고 도망갈 놈이거든요.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재우고 심심하다고 그러면 영화도 보여주고 다 해줘도 언젠가 흩어지잖아요. 언젠가 나를 배신하고 갈 놈이니까 밥 한 끼 먹이면 그 보 답을 받아 내리라 하고 놀리지 말고 열심히 부려먹어야 해요. 공부해야 죠. 수행해야죠. 몸이라는 녀석이 얼마나 영악한지 놀리기만 하면 게을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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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서 수행 좀 하려고 하면 떼를 부리고 심지어 못된 자식이 어깃장 부리 듯이 죽어버리겠다고 병이 들어서 애를 먹여요. 지금은 일해야 하고 공 부해야 하니까 고쳐주기는 하는데 어깃장 부리는 거 못 봐준다, 하고 쳐 내야 합니다. 안 그러면 계속 몸이 하자는 대로 끌려가게 돼요. 그러니 돈 이나 다른 물질적인 것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죠. 내 것이라는 소유의 식과 욕망에 한없이 끌려가는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법정스님께서 ‘텅 빈 충만’이라고 하셨어요. 표현이 참 멋지고 아름 답죠. 그것이 바로 소유하지 않는 만족감입니다. 자식을 얻어서 1이 행복 하다면 힘든 것은 9죠.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비우고 내려놓지 않으면 충만감, 지복감은 맛볼 수 없어요.
Q 지혜가 없다는 말씀에 이어 지혜를 구함도 없다고 했습니다.
지혜도 또한 얻을 게 없다는 말입니다. 힌두교 철학자 크리슈나무르 티가 예전에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책을 펴냈는데요. 지식으로 부터의 자유란 지혜를 추구하라는 말이죠. 지식이란 상대적이고 분별하 는 앎입니다. 지식을 많이 쌓았다고 행복이 오나요? 지금 미국 사회 같 은 경우가 지식을 추구하는 사회죠. 전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을 선발해서 박사학위 주면서 연구하게 하여 구글, 유튜브와 같은 것을 만 들어서 전 세계 지식 플랫폼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고도의 지식사 회를 갖춘다고 행복이 왔습니까? 지식은 배워서 얻어지는 것이지만 지혜 는 집착을 버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Q 영원한 지혜도 없고 영원히 얻을 것도 없다, 이렇게 해석하는 게 맞겠 군요.
지혜를 얻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거예요. 지혜는 순간순간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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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되는 것이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또한 얻을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는 것이 지혜롭다면 배부른 사람에게는 밥을 주는 게 아니라 운동을 하게 하는 것이 지혜롭 죠. 그러니까 지혜는 결정되어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그것을 알면 집 착할 것이 아무 것도 없죠.
Q 그 말씀을 들으니 『금강경』의 불가득이라는 구절도 생각납니다.
같은 말입니다. 불가득(不可得),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 다. 쌓아서 되는 것이 아니고 지식적으로 얻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시행을 한다고 했을 때도 나를 비우는 작업이죠. 비워서 오는 충족 감입니다. 보시행은 물질이건 법이건 비우는 거예요. 계율행도 그렇습니 다. 내 욕심을 채우지 않고 상대를 이해하겠다는 뜻이죠. 그것도 비우는 거예요. 인욕행도 자존심을 세우지 않고 나를 버리는 것이니까 비우는 수 행입니다. 사마타와 위파사나도 그렇습니다. 내 마음 속에서 수많은 양 극단의 생각이 일어나죠.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불리한지 따져서 불리한 것은 피하고 이익인 것은 챙기려고 하는 마음을 일념이 되게 하는 것이니 까 분별심을 비우는 것입니다.
비우지 않고는 충만감이 오지 않습니다. 마음을 비웠다는 것은 욕심 을 비웠다는 것이고 아와 집착을 버리는 것입니다.
Q 집착이나 욕심을 비우라는 말씀은 이해가 갑니다만, 그렇다고 공부 하고 수행하면서 무언가 얻고자 하는 그 마음도 비워야 하나요?
수행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비우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음까지 모두 비우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불가능하죠. 김치를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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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려고 장독을 가져와야 하는데 장독마저 깨버리면 김치를 담을 수 없잖 아요. 공부를 다 했을 때는 공부한다는 생각도 비워야 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비워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비워서는 안 됩니다. 얻고자 하는 마 음을 비우라고 해서 공부하고 수행하겠다는 마음마저 비워버리면 황당 해지겠죠.
Q 그러면 공부와 수행을 통해 어떤 결과를 얻겠다는 마음은 가져도 되나요?
목표가 정확하다면 그것은 맞지만 정확한 목적지가 아니라면 그것은 틀리게 됩니다. 성불이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보리심을 일으켜서 육바라 밀을 행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맞죠. 그것이 원력입니다.
Q 부처님의 가르침은 공부와 수행으로 얻는 결과가 따로 없기 때문에 무득, 얻을 것이 없다고 한 것일까요?
다시 생각해보면 수행을 통해서는 욕망적인 것은 얻어지는 것이 없습 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나를 중심으로 하는 욕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의미에요. 아를 중심으로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내 것을 얻거나 내 욕심을 부리거나 해서 얻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불교 는 나의 아집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Q 양무제에게 달마대사가 해준 말씀도 그런 의미이겠군요.
맞아요. 양무제가 절을 짓고 경전을 펴내고 공양을 올리는 등 많은 일을 했어요. 그래서 인도에서 달마스님이라고 하는 훌륭한 분이 왔다고 하니까 바로 모셔서 자신의 공덕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죠. 그때 달마대 사가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했어요. 소무공덕, 공덕이 하나도 없다고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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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세 번을 물었는데 세 번 다 공덕이 없다고 했어요.
이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황제로서 공양 올리고 하는 모든 것이 복은 되겠지만 그것은 모두 자기 욕심을 위해서 한 거잖아요. 보리심을 발한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버리고 일체 중생을 위하겠다고 생각한 것 도 아니에요. 오히려 자랑하려고 한 것이 더 강할지도 모르죠. 그러니 복 이야 조금은 되겠지만 번뇌를 버린 공덕은 안 된다고 한 거예요. 공덕이 란 욕심을 버린 상태가 되어야 생깁니다. 아가 있느냐 없느냐가 공덕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기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욕심의 유무가 공덕의 유무가 되는 거예요.
보리심을 일으켜서 계속해서 아를 해체하는 작업을 하느냐 안 하느 냐에 따라 공덕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생깁니다. 우리가 불상을 모시고 다른 여러 불사를 하고 공양을 올리는 것도 일체 중생을 위해서 희생하 고 헌신하는 것이라면 공덕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기가 살려고 집 짓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핵심은 아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Q 선가에서 이야기하는 부처도 찾지 말라는 말과도 통하는 면이 있어 보입니다.
그 말은 오해를 살 소지가 상당히 있어서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합니 다. 부처도 찾지 말라고 하는 것은 최종적인 이야기입니다. 부처도 따로 구하지 말라는 것은 최종적인 결과예요.
예를 들어 제가 여수에서 서울로 갈 때 여수에서 출발할 때부터 서울도 생각하지 말고 가라고 하면 어디를 갈지 방향을 잡을 수 없겠죠. 아무런 목표와 도착지가 없다면 대전에 가 있을지 전주에 가 있을지 부산에 가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러니 처음에 출발할 때는 반드시 보리심을 일으켜 야 합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 성불의 길로 가겠다는 생각을 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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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울에 와서도 서울에 가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말이 안 되죠. 서 울에 와서는 더 이상 서울을 구하지 말라는 얘기에요. 다른 예를 든다면 학교 다니는 사람이 나는 학교 가는 마음도 다 비웠다고 하면서 책가방 이고 뭐고 다 던져버리고 놀면 되겠어요? 초등학교 6학년 과정이 다 끝 났다면 이제 끝이구나, 하면서 초등학교 책가방을 내려놓는 것이 옳죠.
부처를 찾지 말라는 말을 그렇게 이해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 후를 따지지 않고 뒤에서 생각해야 할 것을 앞에서 벌써 그런 양 생각하 고 행동하면 그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말이라는 것이 적절한 때가 있고 아직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때가 있어요. 수행하는 사람이 수행할 생 각을 하지 않으면 어디 가서 무엇을 하겠어요?
Q 다음 구절입니다.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문수보살은 반야를 중심으로 보살십지에 오른 분입니다. 그러므로 반야를 공부함에 있어 첫 번째로 의지해야 하는 분이에요. 반야란 아(我) 를 버린 공성의 마음입니다. 나라는 것이 본래 있지 않으니 아를 버리고 일체 중생을 위하겠다는 생각을 내고 키워 가신 분이죠. 내 안의 아를 해 체하지 않고는 보살이 될 수 없습니다.
아가 있는 상태에서는 중생을 위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내가 했 다거나 내 공덕이라거나 내가 능력이 있어서 그렇다거나 나의 위신력이 라고 생각해서는 중생을 위할 수 없습니다. 전혀 할 수가 없어요. 반야바 라밀을 의지하지 않은 보살은 없습니다. 공성을 정학하게 알고 나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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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시키면서 일체 중생을 위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보살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얻을 것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소유할 수 있 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죠. 보살은 철저하게 압니다. 무소유의 법 을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알아요. 그러니까 보살은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 지 않습니다. 스승으로서 부처님을 의지하고 공성이라는 법에 의지하는 것 외에는 나머지는 하나도 얻을 것이 없어요.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일 체 중생을 위해서 나아가는 힘이 생깁니다.
중생을 위하는 힘이 다른 데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공성과 반야 지 혜에서 나오죠.
Q 다음 구절입니다.
고심무가애
故心無罣碍
그러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습니다. 재미있 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거리에 걸인이 있어요. 옷은 남루하고 흙도 묻어있고 때도 끼어있고 아주 엉망이에요. 그 옆에 비단 옷을 입은 선비 가 어깨 빳빳이 세우고 지나가요. 그런데 두 사람이 시비가 붙어서 싸운 다면 누가 이기겠어요? 걸인이 이길 거예요. 선비는 이 옷이 얼마짜리인 데, 당나라에서 온 비단인데 하면서 옷이 찢어질까, 갓이 찌그러질까 피 하겠죠. 또한 체면을 생각해서 주저주저할 거예요.
이처럼 보살은 내 것이 없고 나조차 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중생 을 구제하는 데 있어서 어느 것 하나라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요. 마음에 걸림이 없죠. 그래서 깨달은 분을 대자유인이라고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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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예요.
부처님께서 『아함경』에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홀로 가라고 하셨어요. 바람이 그물에 걸리지 않듯이 마음이 비어있으면 무가애(無罣 碍), 그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습니다.
걸리지 않는다는 말은 욕심에 걸리 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욕심을 버렸기 때문에 걸릴 게 없어요. 걸릴 게 없다는 것을 제 멋대로 하는 자유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데요. 미국에서는 70년대에 히피 문화가 있었죠. 자기 마음대로 아무렇게 나 하는 게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세속적인 욕망을 모두 벗어던지는 출가가 걸릴 것 없는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욕망에 걸리지 않아서 자유로운 것이죠.
옛날에 구정스님 같은 경우도 장에서 비단을 팔다가 한 스님을 만났 어요. 스님이 추워서 벌벌 떠는 걸 보고 좋은 옷을 한 벌 드렸어요. 스님 이 아무 말 안 하고 받아서는 바로 옆에 따라오는 걸인을 주는 거예요. 아주 좋은 옷이고 추워하면서도 스스럼없이 주는 것을 보면서 비단 장 수는 그 길로 그 스님을 따라 출가했죠. 이처럼 자신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에 걸림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Q 이어지는 구절입니다.
무가애고 무유공포
無罣碍故 無有恐怖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걸림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부처님 전생담 가운데 『금강 경』에 나오는 인욕행 이야기가 있지요. 거칠고 폭력적인 폭군 가리왕이 있었습니다. 시녀들을 데리고 숲에서 놀다가 잠깐 잠든 사이에 시녀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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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수행자를 둘러싸고 법문을 듣고 있었어요. 잠에서 깬 왕이 그 모습을 보고 질투가 나서 수행자를 죽이려고 했죠. 수행자에게 무엇을 하는 자 인지 물으니 인욕행을 한다고 했어요. 그러자 인욕행을 한다니 어디 얼 마나 인욕 하는지 보자며 손가락을 하나 잘라버렸어요. 그러면 당연히 고통스럽다고 하거나 살려달라고 하거나 도망가거나 저 사람을 죽여야 겠다거나 원망하고 분노하는 마음이 들겠죠.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왕이 손목을 잘라버렸어요. 그때도 수행자 는 아이고, 되었다, 원망하는 마음이 안 일어나는 것이 이제 정말 되었구 나, 감사하다, 나의 인욕행을 시험해줄 사람이 없었는데 당신이 역행보살 이 되어서 시험을 해줬으니 감사하다고 하면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걸림이 없으니까 두려움도 사라진 것입니다. 죽으면 어떻게 하나, 내 몸이 사라지면 어떻게 하나, 내 돈도 어떻게 하나, 이런 욕심이나 미련이 있으면 걸리는데 이런 것이 없으니까 걸릴 것도 없고 공포도 없죠. 보살 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마음속 양극단의 번뇌를 떠나 부동의 마음이 이 루어졌기 때문이죠.
Q 사실 공포와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도 실체가 없긴 한데요.
실체가 없는데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죠. 권력을 가진 사람은 권 력을 놓지 않으려고 벌벌 떨고 돈이 있는 사람은 재물이 사라질까 싶어 서 달달 떨죠. 실체가 있고 내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집착하고 고민 하고 두려움이 생기는 거예요.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면 욕심은 사라지 게 됩니다. 욕심을 갖고 있으면 공포가 사라지지 않아요. 잃을까 싶어서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죠.
가슴 아픈 예이기는 하지만 계백 장군 같은 이는 전쟁에 나가면서 가 족을 죽였잖아요. 전쟁에서 후퇴하지 않기 위해서 배수의 진을 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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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대한 애착 때문에 살고자 하고 적 앞에서 후퇴할까봐 이렇게까 지 한 거예요. 마지막 남은 애착이 없어야 전쟁에서 두려움이 없다는 것 을 안 거죠. 가진 것이 있으면 두려워요.
가진 것이 없으면 두려울 일이 없죠. 두려 움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을까봐 일어나는 생각입니다. 몸을 잃을까봐, 돈을 잃을까봐, 권력을 잃을까봐 두려운 거죠.
Q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면 욕심과 욕망을 조금씩이라도 내려놓아야 하 겠군요.
예전에 나무를 해보면요, 지게에 가득 나무를 짊어지고 산을 내려왔 을 때 받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나무 한두 개비만 살짝 내려줘도 얼마나 가벼운지 모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욕심도 끝 간 데 없이 부리면 욕심 부린 그만큼 불안합니다. 한두 개비라도 조금씩 조금씩 내려놓으면 나중 에는 빈 지게가 되겠죠.
Q 지금 메고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해서 무거운 데도 짊어지고 있지만 스님 말씀처럼 한 개 두 개 내려놨을 때의 기쁨을 알아간다면 언젠간 다 내려놓을 수 있겠네요.
그런데요, 나중에 억지로 내려놓아야 할 때는 잘 안 돼요. 어쩔 수 없 어서 억지로 내려놓아야 하는 경우도 많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려놓아야 할 때 내려놓아야 합니다. 빨리 내려놓으 면 더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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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공부한 내용 다시 한 번 짚어볼까요?
무지역무득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다.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한다.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그러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다.
중생은 끊임없이 무엇인가에 애착하고 집착합니다. 두려움은 여기에 서 비롯되죠. 자신의 것을 잃을까봐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몸에서부터 재산, 직장, 국가까지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던 것을 잃는 데에 대한 두려 움은 굉장히 큽니다. 두려움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나와 내 것이 사라지 는 것에 대한 불안이 전제인 거예요.
우리들의 이러한 마음과는 별개로 사실을 보면 영원한 것이 없어요.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들이에요.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나 이외의 것뿐 아니라 나라고 하는 것도 그렇죠.
그렇게 보면 근원적으로 두려움 속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에 영원히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몸이나 물질은 물 론이고 생각이라는 것도 영원히 가질 수 없죠. 세상 사람들은 소유할 수 있는데 소유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리 소유하려고 해도 소유할 수 없어요.
그러므로 두려움을 없앤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고, 있는 그대로 따르는 거예요. 물론 따르지 않을 방법이 있느냐 하면 그러 한 방법도 없어요. 아침에 해가 동쪽에서 떴다가 서쪽으로 지는 것을 막 을 방법이 없잖아요. 아침이 되면 아침을 그대로 맞이하고 저녁이 되면 저녁을 그대로 맞이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서운해도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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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고 싫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무소유, 소유할 수 없다는 말이잖아요.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소유할 수 없는 거예요. 아무리 많이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소유 할 수 없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할 수 있어요. 소유할 수 없으니 잃을 이 유가 없습니다. 잃을 이유가 없으니 두려울 것이 없죠.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첫 구절에서 오온이 공하다고 했어요. 가장 아끼고, 나라고 생각하고, 나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온조차 영원 성을 갖고 있지 못하고 인연 따라 변하는데 다른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 가 없지 않겠습니까? 돈도 그래요. 내가 영원히 돈을 갖는다면 쓸 수가 없잖아요. 돈이라는 것도 내 손을 벗어나 다른 가치로 대치되는 것이니 까 그것도 변화하는 것이죠. 이처럼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아무리 가지고자 한다 해도 잠시도 내 손 안에 머물지 않아요. 그것을 안다면 잃을까봐 두려운 것이 무엇이 있겠어요? 아무 것도 없습 니다. 무가애입니다. 걸리고 막히는 것이 없어요. 애착하는 데에서 걸리 고, 집착하는 데에서 막힙니다.
아픈 현실이기는 하지만 독립운동 했던 분들이 해방되고 나서 다시 우리나라에 돌아와서도 잘 못 사셨죠. 가족과 후손들도 어렵게 사는 분 들이 많으시잖아요. 그렇지만 독립운동하시는 그 분들이 가족에 걸렸다 면 독립운동을 하지 못했을 거예요. 가족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본인마 저 희생시키면서 독립운동을 하신 거죠. 그러니까 훌륭하다고 하는 거죠.
모든 수행은 버리는 데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지혜도 절대적 지상과제가 아니에요. 지혜라는 것은 어 둠이 없어졌을 뿐이지 고정되어진 지혜는 있지 않아요. 어두운 생각이 없 어졌을 뿐이죠. 도둑질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도둑질하는 어두운 생각이 없어지면 밝은 사람이에요. 밝은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죠. 이렇게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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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야 부처님 진리에 가까워집니다. 불교 수행은 모두 버리는 데 있어요.
이삿짐을 쌀 때도 이래서 못 버리고 저래서 못 버리고 하나도 버리지 못하면 새로운 집으로 이사 와서도 꽉 다 차버리죠. 보통 이사를 할 때 는 그동안 쌓아두고 묵혀뒀던 것들을 그 참에 정리하잖아요. 낡은 물건 들을 버리고 가기 때문에 새 집이 생기는 거죠.
이와 같이 수행자는 아를 비우고 욕망을 비우고 아집과 법집을 다 해 소하여 밝은 본바탕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Q 공성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해주셨습니다.
모든 괴로움은 집착에서 시작됩니다. 버리지 못하면 정말 고생하죠. 잔뜩 먹고 화장실을 못 가면 큰일 나잖아요. 아이들을 키울 때도 잘 먹 고 화장실 잘 가는 게 중요하죠. 그러면 건강한 거예요. 우리도 버리지 못 하면 고생합니다.
예전에 강력 접착제를 쓰다가 잘못 해서 손가락에 달라붙은 적이 있 어요. 뗀다고 떼는데도 결국 피부가 같이 떼어져 버렸거든요. 애착이 강 력하면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아파요. 애착은 일으키면 일으킬수 록 본인만 괴로워요. 안 아프게 살려면 순리대로 살아야 합니다.
절에는 대문이 없죠. 문만 세워놓고 문짝도 없고 잠그는 것도 없어요. 법당도 문을 닫아놓을 뿐 자물쇠를 채워놓지 않잖아요. 자유롭게 드나 들라는 의미죠.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 것도 오고 가는 것이 순리대로 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부처님법이 필요한 사람은 언제든지 오고 못하겠다는 사람은 언제든지 가도 된다는 거죠.
애착하고 집착하면 본인만 고생합니다. 도인들이 돌아가실 때도 왜 자유롭게 가느냐 하면 몸에 대한 집착이 없기 때문입니다. 갈 때도 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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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 가는 거예요. 안 가려고 하면 괴롭죠. 가지 않을 수도 없지만 이것 이 놓고 가는 방법이거든요.
우리가 『반야심경』을 수없이 독송하고 있지만 그 뜻을 정확하게 이 해하는 것도 어렵고 그것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 가르침을 실제 그대로 자기화하고 실천하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해하는 만큼 실제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Q 이어지는 구절 공부하겠습니다.
원리 전도몽상
遠離 顚倒夢想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뒤바뀌고 헛된 생각이란 무엇일까요?
전도란 거꾸로 되었다는 뜻입니다. 차가 교통사고 나서 뒤집어졌을 때 전복되었다고 하잖아요. 이처럼 뒤집어졌다, 뒤바뀌었다는 뜻입니다. 몽상이란 사실이 아닌 것을 이야기합니다. 생각으로만 있는 것이죠. 내가 로또에 당첨되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것이 몽상입니다.
부처가 되어 바로 된 생각을 진심이라고 하고 직심이라고 합니다. 그 런데 중생은 이와 반대로 거꾸로 된 생각을 하죠. 영원하지도 않은데 영원 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거꾸로 된 생각을 합니다. 세상만물이 창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연기와 인과에서 벗어난 거꾸로 된 생각이죠.
세속에서 하는 거꾸로 된 생각을 예로 들어보면 도둑질을 하면서 잘 살겠다고 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콩을 심어놓고 팥이 달리기를 바라는 것과 똑같죠. 인과에 맞지 않는 생각이잖아요. 완전히 뒤집어진 생각이 죠. 이처럼 거꾸로 된 생각을 갖고 있으면 그로 인해 고생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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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까 하나도 없으면 얼마나 허망 하겠어요? 돈을 많이 벌어서 영원히 부자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부도가 나면 괴로워지죠. 생로병사라는 말을 너무나 익히 들어서 잘 알 고 있고 주위에서 늙고 아프고 죽는 것을 봐왔음에도 그렇지만 자신은 금방 늙지 않을 거라고 착각하고 병이 들지 않을 거라고 착각하고 금방 죽지는 않을 거라고 착각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거꾸로 된 생각이에요.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그 인연이 다하면 헤어지고, 아무리 건강 한 사람도 언젠가는 병이 나고, 아무리 오래 살려고 해도 수명이 다하면 끝이 납니다. 그런데도 거꾸로 된 생각들을 하기 때문에 바른 결과가 나 오지 않아요.
그러면 바른 결과란 무엇일까요? 거꾸로 된 생각을 하지 않으면 오래 살까요? 거꾸로 된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노병사의 결과는 같아요. 과학 자들이 분석하기로는 지구가 50억 년 뒤에는 백색 왜성이 되어 끝이 난 다고 하죠. 그 사실을 알고 그렇게 생각한다고 지구가 끝이 안 나나요? 그렇지 않죠.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갈릴레오 사건을 보더라도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사 실을 발견해서 종교재판에서 살기 위해 자신의 말을 부정했다고 하지만, 지구가 돈다, 안 돈다, 어떻게 말하든, 세계 70억 인구가 어떻게 생각하 든, 지구가 도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건 저렇게 생각하건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거꾸로 된 생각에서 벗어난다면 착각으로 인해 얻은 고통 들은 받지 않을 수 있어요. 전도된 생각만 없으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생각은 전도된 생각이 하나도 없으니까 잘못된 결과가 나 오지 않아요. 과학이나 수학을 할 때도 공식대로 하면 계산은 잘못되지 않죠. 불교는 그런 점에서 아주 과학적입니다. 불교의 인과는 가장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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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철학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배워서 거꾸로 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정견을 이루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세속에서 갖고 있는 헛된 생각들은 너무나도 많죠. 극단적인 예를 든 다면 마약을 하면서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생각인 가요? 절대 행복해질 수 없죠. 요즘에는 하도 술을 많이 먹는데요. 술을 먹어서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헛된 생각이죠. 담 배도 마찬가지예요. 담배를 피워서 행복한 것은 불가능하잖아요. 이것이 모두 몽상입니다.
원인과 조건이 부합하지 않는데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믿는 것 이 몽상이에요. 원인이 옳지 않고 조건이 옳지 않으면 좋은 결과는 나올 수 없어요. 일도 안 하고 집에 누워서 천장만 보면서 돈이 어디에서 굴러 들어올까 하는 몽상에서부터 전쟁을 일으켜서 나라가 부강해질 것이라 고 하는 몽상까지 모두 원인과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 결과를 생각하는 뜬구름 같은 생각이죠. 맞지 않습니다.
Q 그러한 전도와 몽상에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팔정도의 정견과 상통 하는 이야기 같습니다.
바르게 생각하는 것은 거꾸로 된 생각과 헛된 생각이 다 사라진 것입 니다. 육조 혜능스님께서 사래정도(邪來正度)라고 하셨습니다. 삿된 것이 오면 바른 것으로 제도한다고 했어요. 삿된 것과 바른 것은 양립할 수 있 는 것이 아니에요. 어둠과 밝음도 한 공간에서 같은 시간대에 같이 있을 수 없어요. 삿된 것과 바른 것도 양립할 수 없습니다. 전도몽상과 바른 지혜가 같이 있을 수 없죠. 삿된 것이 사라지고 전도몽상이 사라지면 그 것이 반야입니다.
오온조차 공하다, 나라고 하는 색수상행식의 오온조차 자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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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안다면 자신에 대한 삿된 생각이 싹 다 사라집니다. 다 사라지면 그것이 정견이고 정사유입니다.
Q 원인과 조건과 변화라고 하는 연기법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전도 몽상에서 벗어나는 것이겠지요?
자성이 없으므로 연기합니다.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인 연 따라 발생하고 인연 따라 소멸합니다. 자성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연기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공성을 설명하려고 하면 반드시 연기 가 설명되어야 하고 연기를 설명하려면 반드시 공성이 설명되어야 합니 다. 연기와 공성은 같은 이야기입니다.
Q 앞의 구절과 같이 보겠습니다.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면 걸림도 없고 공포에서도 벗어나며 전도몽상도 떠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구경 열반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구경열반
究竟涅槃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열반에는 세 가지 열반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이러한 열반 이 있고 이러한 경지에서는 이러한 열반이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경계에 따라서 가능한 열반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8년 동안 초전법륜을 굴리신 법문 안에서 수행하면 아라 한의 열반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보통 열반이라고 하면 이러한 열반을 가리킵니다.
그 다음 보살의 열반은 아라한의 열반을 이루었지만 거기에 머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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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 중생을 위해서 다시 스스로 윤회하는 것입니다. 열반에도 머물지 않고 윤회에도 머물지 않는 경지죠. 깨달았지만 중생을 위해 윤회하기 때 문에 보디사트바, 보살이라고 합니다. 보살의 열반을 무주처열반이라고 합니다. 열반에 머물지 않는다는 의미죠. 윤회를 하지만 중생은 아닙니 다. 세세생생 중생을 위해 성불을 미룬 분들이죠. 관세음보살님, 문수보 살님, 지장보살님, 준제보살님, 이런 분들이 십지에 이른 보살들입니다. 미륵부처님도 지금은 미륵보살로서 중생을 위해 윤회하고 계시지만 미 래세 용화세계에 부처가 되리라고 했죠.
석가모니 부처님은 35세에 깨달음을 이루고 여든에 열반에 드실 때 이 몸까지 다 사라져서 나머지가 없는 니르바나를 이루셨습니다. 무여열반 입니다. 오랜 생을 보살로서 거듭 구도와 중생구제행을 실천했지만 이제는 일을 다 마쳤으므로 중생을 위해 다시 세상에 나오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마침내 부처의 열반인 무여열반에 이르는 것이 구경열반입니다. 최종 적으로 이르는 열반이죠. 나머지가 없는 구경의 열반, 부처의 열반에 어 떻게 이를 수 있느냐 하면 반야바라밀이 핵심입니다. 보시바라밀, 지계바 라밀, 인욕바라밀, 정진바라밀로써는 부처가 되지 않아요. 밑받침이 되기 는 하지만 부처가 되는 것은 반야바라밀입니다.
반야의 표상인 분이 문수보살입니다. 문수사리자의 수행이 지혜에 있 어서는 핵심입니다. 여기에 관세음보살님의 자비, 보현보살님의 행원, 지 장보살님의 대비심으로 완성되어 이루어지는데 핵은 반야의 체험, 공성 의 체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Q 수행의 목표를 열반이라고 하면 맞을까요?
열반이라는 말이 도인의 죽음이라는 말로 쓰이다보니까 다소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수행의 목표는 열반입니다. 니르바나란 바람이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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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다는 의미라고 했죠. 바람이란 번뇌입니다. 업의 바람이죠. 업의 바람 이 사라지는 것이 니르바나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가지는 목적은 무엇인가요? 괴로움을 없애기 위한 것 이죠. 괴로움은 번뇌 때문에 오고 아집 때문에 옵니다. 번뇌와 아집을 버 리면 괴로움은 자연히 사라집니다. 모든 것이 자성이 없다는 것을 전제해 야 아와 욕심이 끊어집니다. 잠깐 가라앉히는 것으로는 끊어지지 않습니 다. 잠깐 가라앉았다가 다시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 듯이 되살아납니다.
요즘 경제가 발전하고 복지가 잘 된 나라들을 보면 종교가 점차 쇠퇴 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수명도 길어지고 국가와 사회에서 빈곤과 병고의 문제도 많은 부분 해결하니까 종교를 찾는 이들이 줄어 들죠. 종교를 찾고 종교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크게 줄어드는 것이 현대사회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늙고 아프고 죽는 근원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요. 특히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는 종교는 효용성이 없습니다.
Q 행복과 열반은 어떤 관계일까요?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행복은 상대적인 행복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자식을 기다려서 아기를 얻었을 때 행복하다고 하지만 나중에 그 아들딸 이 속을 썩이면 불행하다고 하면서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하죠. 자동차 를 얼마짜리를 사서 불고 닦고 좋다고 하다가 어디 부딪치거나 사고가 나면 말할 수 없이 속상해합니다. 이처럼 세속의 행복은 반 조각의 행복 입니다. 행복이라고 알지만 반대의 모습이 늘 함께 하죠.
그렇게 착각했던 것들이 다 사라진 것이 니르바나입니다. 이것은 행 복이라고 말하기에도 어딘가 부족합니다.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이상하 다고 할 정도로 편안한 상태입니다. 고통이 일어나지 않을 뿐 행복을 추 구하지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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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출가수행자는 세속의 그러한 행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세속에서 바라는 그런 행복을 다 버리고 니르바나를 추구합니다. 번뇌와 욕심과 착각으로 인한 바람이 다 사라져버리고 평온한 마음의 행복을 추구하죠. 아와 분별로 인한 마음의 갈등이 없는 상태를 추구합니다.
행복이 따로 있는 게 아니죠. 심하게 아파서 병원에 가서 치료해서 나 았다면 병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거잖아요. 거기에 특별한 행복이 따로 있나요? 아프지 않으면 그것으로 행복한 거죠. 고통에서 벗어나면 그 뿐 입니다. 이처럼 번뇌가 사라지고 편안한 상태가 행복이고 니르바나이고 그것이 수행의 목표입니다.
Q 다음 구절입니다.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먼저 삼세제불에 대해 보겠습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한 분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데요.
부처님이 한 분이면 저도 불교를 믿지 않았을 거예요. 유일하다면 보편 적이지 않지요. 당신만 영원히 구제받은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구제될 수 없다는 얘기가 되잖아요. 인간만이 성불할 수 있다고 해도 문제죠. 보디사 트바는 인간세상이 아닌 아귀와 지옥에 가서도 성불할 수 있도록 돕잖아 요. 법당에 부처님도 여러 분이고 보살님도 여러 분인 것이 저는 좋아요. 혼 자만이 모든 것을 독점한다면 그것은 다른 대상자를 소외시키는 거잖아요.
어떤 사람은 불교를 다원주의라고 이야기하는데 다원주의는 아닙니 다. 한 분 한 분 모두가 완벽한 성불자입니다.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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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보편적인 사상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성불시켜주겠다는 것이 아니 고 그대들이 그대 스스로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절대자가 구 원해주고 해탈해주고 성불하게 해준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대가 성불할 수 있다, 그대 스스로 성불할 수 있다, 이 얼마나 멋진 사상입니까? 모두를 그 자체로 존중해주는 사상이죠. 우리가 여자 신도 님들을 보살이라고 칭하는 것도 그대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보살로서, 수행자로서 존중해주는 것이거든요. 법명을 주는 것도 부처될 수 있다는 존중이고 격려입니다.
불교인은 부처님의 노예가 아닙니다. 조사스님 등 스승의 노예도 아 니에요. 그 누구도 종속된 존재가 아니죠. 수직의 관계가 아닙니다. 다만 업의 차이가 있을 뿐 평등한 존재입니다.
부처님께서 탄생의 첫 일성으로 하신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 말씀도 요즘 세상 사람들이 오해하듯이 나 혼자 잘났다는 의미가 아니죠. 브라 흐만이라고 하는 창조주에 종속되는 것도 아니고, 신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 가운데서도 왕이나 높은 신분의 누군가에 의해 좌지 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자체로 존귀하다고 하신 거 예요. 그대가 최고이다, 그대가 부처 될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2,600여 년 전에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부처님께서 인간의 보편적인 인 권과 평등을 기초로 성불이라고 하는 인간의 해방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두가 성불할 수 있고, 성불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다시 또 불성이 상주체로서 원래부터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 것은 아닙니다. 불성 또한 수행으로써 발현되도록 계발하는 것입니다. 그 런 점에서 불교만큼 평등, 인권, 개인의 자유와 역량을 존중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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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삼세제불이란 말 그대로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이지요?
시간이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로 시간을 나누지만 이것도 단독적으로, 그리고 영원성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독립된 자성이 없이 그냥 흘러가는 것뿐인데 우리가 설명을 하기 위해 구분할 뿐이죠. 그 어느 순간도 멈출 수 없습니다. 삼세인과라고 하 는 것도 과거에 한 것으로 지금이 존재하고 지금 한 것으로 미래가 있다 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 역시 한 분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처음이고 유일한 부처로 보일 수 있겠지만 부처님 께서는 당신이 첫 부처가 아니라고 하셨어요. 그럴 수 있겠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기억하기로 그 이전에 여섯 분의 부처님이 계셨다 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곱 부처님이 똑같이 하신 가르침을 칠불통게라고 하죠. 모 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 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공통된 가르침이라고 했습니다. 과거에도 부처님이 계셨고 앞으로도 수많은 부처님이 나오실 것이라는 것이 불교 의 입장입니다. 심지어 현겁에 천 분의 부처님이 나오신다고 했어요. 현겁 이라고 하면 현재의 인류가 살아가는 기간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다음 세상에는 미륵부처님이 오신다고 했어요. 당신 혼자만이 절대적이고 최 고라고 하지 않으신 거예요.
과거칠불은 비바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가 섭불, 그리고 석가모니불입니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미래에 부 처가 될 것이라고 수기해주신 미륵 부처님이 계시죠. 용화세계에 미륵 부 처님이 다시 또 수기하여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과거에도 부처님이 여섯 분 계셨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일곱 번째 부처님이시고 미래세에 미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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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오신다는 이야기는 무엇을 전제로 하는 것인가 하면 세상의 모 든 중생이 다 어느 때인가는 반드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전에 어느 분이 절에는 왜 이렇게 부처님이 많냐고 묻기에 저는 더 많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도 있고 비로자 나 부처님을 모신 비로전도 있고 미륵 부처님을 모신 용화전도 있는데 부처님을 모실 전각이 모자랄 정도로 수천 수만 분의 부처님이 출현하면 좋겠습니다. 당신도 부처 될 수 있다, 얼마나 소중한 가치입니까?
Q 수기란 미래에 부처가 될 것이라고 약속을 받는 거잖아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과거세에 연등부처님께 서원을 세우고 수기를 받으셨지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삼생을 다 기억하시니까 당신이 처음 발심하신 때를 말씀해주셨어요. 그것이 연등부처님께 꽃 공양을 올린 칠경화 이야 기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일반 수행자일 때 연등부처님의 법문을 듣게 되었죠. 연등부처님의 법문과 위의에 감동해 꽃공양을 올리려고 했 어요. 꽃을 파는 곳에 갔더니 일곱 송이만 남았죠. 남은 꽃을 모두 사려 하자 꽃을 파는 아가씨가 다섯 송이는 수행자의 몫으로 하고 두 송이는 자신의 몫으로 공양 올려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 여인이 훗날 야소다라 입니다. 여기에서 비롯되어 불교에서는 결혼식을 화혼식이라 하고 신랑 신부가 일곱 송이의 꽃을 올리는 것입니다.
꽃을 공양올린 다음 연등부처님께 이렇게 여쭸습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위대한 성자가 될 수 있습니까?’ 질문이 너무 훌륭하죠. 연등 부처님을 뵈니까 너무 위대하고 너무 뛰어나고 생전 처음 들어본 말씀을 하시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때 연등 부처님께서 처음에 일체 중생을 위해 보리심을 발했고 육바라밀, 사섭법, 사무량심 등 3아승지겁에 걸쳐 보리심을 행하여 보리심을 완성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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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설명해주셨습니다. 그 이후 석가모니 부처님은 여래가 오실 때마다 공 양 올리는 인연을 놓치지 않은 것을 비롯해 수많은 전생의 수행이야기가 팔리어 48장경의 부처님 본생담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본생담이란 부처님께서 전생에 발심해서 3아승지겁 동안 수행하신 이 야기입니다. 부처님께서 3아승지겁 동안 닦은 보살행이 본생담에 다 들 어있습니다. 그 가운데 예를 하나 든다면 부처님께서는 500생에 걸쳐 보 시행을 닦으셨는데 마지막에는 당신의 목숨을 보시하는 것으로 보시행 을 완성하셨어요. 보시행이 완성하기까지 500생이 걸렸습니다.
처음 발심한 석가모니 부처님께 연등부처님께서 수기를 주셨죠. 그대 가 이러한 마음으로 발심해 공부하고 수행하면 나중에 사바세계라는 세 상에서 교주가 되어 샤카족의 성자가 될 것이라고 수기를 주셨어요.
Q 발심과 서원이 그처럼 중요하다는 말씀인데요.
그냥 정진만 하면 되지 않느냐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 가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밭에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무슨 밭이 될지 달 라집니다. 깨를 심으면 깨밭이 되고 콩을 심으면 콩밭이 되겠죠. 우리들 의 마음 밭에도 무슨 마음을 내서 살 것인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마음 밭 에 처음에 무슨 씨앗을 심어야 할까요? 만약에 도둑질 할 생각을 하면 이 몸과 마음이 도둑으로 바뀔 거예요.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어야 겠다 그러면 그런 쪽으로 몸도 바뀌고 마음도 바뀌겠죠.
결국 어떤 마음을 먹느냐가 가장 중요한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일체 중생이 윤회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니 이러한 중생을 안고 중생과 함께 성불의 길로 가겠다고 마음먹은 것입니다. 나 혼자 성불하겠다고 하지 않 고 중생들을 모두 모시고 보살행을 한 거예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중 생들의 번뇌와 고통이 다 사라질 때까지 수행하겠다고 맹세한 것, 이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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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 그렇게 하여 3아승지겁 동안 보살행을 닦 았습니다. 중생들의 번뇌가 다 사라질 때까지 보살행을 쉬지 않았어요.
어떻게 보면 연등부처님께서 수기를 주시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요? 밭에 콩을 심었으니 콩밭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죠. 몇 개월이 지나면 콩 을 딸 수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잖아요. 연등부처님께서도 어떤 마 음을 냈는지 보시고, 그 마음으로 그렇게 수행하면 어느 때에 가서 반드 시 성불할 것이라고 충분히 보실 수 있었죠. 연등부처님이 없는 이야기를 했거나 특별한 말씀을 한 게 아니에요. 그대가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면 그 마음이 참으로 장하다고 하시고 그러니 반드시 성불할 것이라고 하 신 거예요.
우리도 이러한 발심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수기라는 것이 물론 스승 께서 삼세를 다 보시고 하신 말씀이기는 하지만 평범한 우리의 눈으로 봐도 이러한 서원이라면 성불하리라고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내용이기 도 합니다. 불자라고 할 때는 이러한 발심이 전제입니다. 보리심을 발해 서 중생을 위해 살겠다는 마음을 내기 때문에 불자라고 하는 거예요. 내 안의 번뇌를 버리고 일체 중생을 위해 정진하겠다고 서원하고 실천하는 사람을 불자라고 하지 그냥 절에만 다닌다고 불자는 아니죠.
부자도 그렇습니다. 열심히 벌어서 나는 적게 먹고 어려운 사람을 돕 겠다고 해야 다음 생에 부자가 되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 내 돈 내가 벌어서 내가 쓰는데 당신들이 무슨 상관이냐, 이런다면 지금 당장은 그 렇게 살지는 몰라도 다음은 점점 힘들어집니다. 인과에서 벗어날 수 없죠.
Q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부처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요. 그렇 다면 시공간을 떠나 어디에나 부처님이 계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어디에나 부처님이 계시다는 이야기가 좀 막연할 수 있습니다.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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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보살이라고 하는 존재는 중생을 건지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보살 행을 하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님, 지장보살님, 이런 분들이 보살 십지 에 이른 분들입니다. 이 분들이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천상의 육도에 다 계시죠. 그런 점에서 불보살님이 육도에 아 니 계신 곳 없다는 말은 두 가지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분들의 원력에 의해서 어느 곳에나 다 계시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분들을 원하 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그 곳이 어디이든 가피로서 다 계시다는 뜻이 기도 합니다.
Q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부처님께서 깨침을 이루는 것은 공성 체험이 기본이 됩니다. 그 렇지 않으면 집착이 생겨서 절대 부처를 이룰 수 없어요. 아집과 법집이 있어서는 부처를 이룰 수 없죠. 과거의 연등부처님부터 미래에 오실 미륵 부처님까지 공성 체험이 전제가 됩니다. 공성 체험이 되지 않으면 자기 욕 심을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我)를 버릴 수 없어요. 아를 버리지 않 은 부처님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습니다.
반야란 공성 체험입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에 의하지 않고는 성 불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세제불이 반야바라밀을 의지하는 까 닭에 부처를 이룬 것입니다.
초전법륜, 중전법륜, 상전법륜은 모두 공성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용어가 다르고 초점이 조금씩 다를 수는 있어도 핵심은 공성입니다. 처 음부터 끝까지 똑같아요. 초전법륜에서는 무아라고 했는데 이것은 인간 중심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것을 대승에서는 공성이라고 했죠. 모든 존 재에 대해 영원한 자성이 없다고 설명한 거예요. 이것을 의상스님은 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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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라고 하셨습니다. 존재의 본질은 두 가지 모습이 아니라고 했어요. 두 가지 상이 아니라는 것은 양 극단이 모두 지 워졌다는 것이니까 비었다는 이야기와 같죠. 밀교의 차크라도 공성에 관 한 이야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불교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공성이라고 알면 됩니다. 정법과 외도를 구분하는 기준도 무아와 공성, 그리고 불이라는 것을 알면 됩니다. 그러 니 영원한 내가 있고 영원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불교가 아 닙니다. 그러므로 삼세제불이 모두 반야바라밀을 의지해서 부처가 된다 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Q 그런 점에서 예경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오는데요. 절대자나 구원자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먼저 실천하고 먼저 깨달음을 이루신 분들께 지극한 존경의 마음을 표한다고 봐야 하겠죠?
『치문』에 보면 팔일성해탈문(八溢聖解脫門)이라는 가르침이 있습니 다. 해탈에 이르는 여덟 가지 실행방법입니다. 여기에서 예불이란 경불지 덕(敬佛之德)이라고 했어요. 부처님은 스승으로서 깨달음을 이루신 분이 고 중생을 구제하고자 널리 구제행을 펼치신 분이잖아요. 그러한 부처님 을 우리는 스승으로서 그 덕을 존중해서 절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절 대자로서 절을 한다거나 무엇을 빌기 위해 절을 하면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에게 복을 빌고 소원을 비는 것을 아마 가장 싫어 하실 거예요. 만약 부처님께서 오신다면 그렇게 엎드려 비는 사람에게 그 대 스스로를 거지로 만들지 말라고 하지 않을까요? 그대 스스로가 주인 이고 주체적인 존재인데 왜 빌고 다니냐고 했을 거예요. 그대 스스로가 부처이고 그대 스스로가 부처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부처님은 최고의 명의로서 그 길을 가르쳐주고 이끌어주고 권유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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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입니다. 이 점이 불교가 가장 특별하고 위대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 다. 누구에게 해달라고 하거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루어 나 갈 수 있다는 종교는 불교 외에는 없는 것 같아요. 그대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대 스스로 해탈자가 되고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종 교는 불교 외에는 없습니다.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기쁜 일 아닙니까? 스스로 해탈할 수 있 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환희스러운 일입니까? 절대로 남에게 의지하면 안 됩니다. 모를 때는 잠시 의지할 수 있지만 자의성과 자립성을 잃어서 는 안 되죠.
불보살님도 우리는 스승이라고 합니다. 먼저 이 길을 가신 스승으로 서 예우하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께 이것을 해주세요, 하고 바 라는 것은 불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유교에서는 선생이라고 하죠. 선생 이라는 말은 먼저 이 세상에 오셔서 먼저 경험한 사람으로서 세상사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의미예요. 우리는 스승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가야 할 바른 길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선생이라고 하든 스승이라고 하든 결국 그 길을 가는 것은 스스로입니다.
Q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이 구절을 통해 반야의 공성지혜에 의지 하지 않으면 부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문수보살을 꼭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좋은 법문을 계속 듣고 부처님의 생각과 나의 생 각이 다르지 않음을 거듭 확인해주세요. 내 생각이 부처님의 생각과 같 다면, 물론 아직 완전히 그렇게 되지도 않았고 욕심도 다 버리지 못했지 만, 그 가르침에 동의한다면, 견해는 바로 섰잖아요. 그러면 무엇이 바른 길인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게 됩니다. 욕심을 버리는 것이 맞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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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알고 인과를 알면 말도 안 되는 기도와 바람은 하지 않겠죠.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은 잘못된 것을 아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바 르게 아는 인간의 정지능력을 전제로 수행체계를 만들어놓으셨어요.
제가 불자들을 만나면 항상 공부하라고 하는데요. 그런데 이 공부는 학교 다닐 때 지식을 배우는 것과는 다른 공부입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는 살아남는 방법,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면 부처님의 가르 침은 삶의 질이 달라지는 공부죠. 삶의 질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삶의 질 을 높이는 데 있어서 핵심은 마음을 제어하고 마음을 잘 쓰는 것이잖아 요. 바른 삶에 대해 설해놓은 부처님 말씀을 기준으로 삼으면 삶은 내용 도 질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전에 어떤 분이 오셔서 불교가 너무 어려워서 공부를 못 하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얼마나 공부했는지 여쭈니 법문을 대여섯 번 들었는데 어렵다고 하시더군요. 어린 아기가 태어나서 앉기까지도 6~7개월이 걸리 는데 몇 번 하고 어렵다고 포기하면 되겠습니까? 적어도 한 10년은 기초 를 다지고 정진하겠다고 생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Q 다음 구절입니다.
고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
故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앞 구절과 이어서 이해해야 하겠죠?
그렇죠. 연결되죠. 앞에서 삼세제불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다고 했 습니다. 삼세제불이란 모든 부처님을 가리킵니다. 과거의 부처님도, 지금 의 부처님도, 그리고 앞으로 오실 부처님도 모두 반야바라밀을 의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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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는 부처가 될 수 없다는 전제예요. 부처라는 존재의 핵심은 반야바 라밀이고 반야바라밀은 무아를 증득한 것이며 공성을 체험한 것이에요. 아(我)가 사라지고 탐진치가 사라지지 않으면 부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내용의 대다수가 반야의 가르침입니다. 반야바라밀 을 의지하지 않은 부처님은 이 세상에 없고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지 않고 는 보살행을 할 수 없어요.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한 보살행이란 복 짓는 정도밖에 안 되죠. 반야바라밀이 부처를 탄생시키는 핵심 요인입니다.
그렇게 반야바라밀을 의지하여 고득, 마침내 얻는다, 이렇게 설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얻는다는 것은 무엇이 있어서 얻는 것이 아니고 번뇌가 다 사라져 평온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얻는다고 하면 다시 또 무엇인가 따로 있어서 그것을 추구하고 갖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 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서 그러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아를 버리고 탐진치를 모두 버린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우리가 탐진치를 버린다고 하지만 사실 은 탐욕심을 부려서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가능성도 없어요. 그럴 수 없다 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욕심처럼, 욕망대 로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전부 놓는 것이 반야의 핵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얻은 바 없이 얻었다고 하는 거예요. 아뇩다라삼먁삼 보리를 얻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얻을 것이 있어서 얻는 것이 아니고 욕심 이 다해서 그런 경계에 도달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옛 선사들은 그것을 아주 직선적으로 표현했죠. 일상사 다반사, 일상의 차 마시고 밥 먹는 일 이 그대로 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차 마시고 밥 먹는 일상의 일을 빼놓고 그 경계가 달리 특별한 데 있지 않습니다. 고득 아뇩다라삼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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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득이라고 표현했지만 얻은 바 없이 얻은 경계입니다. 욕심을 버려 서 편안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Q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최상의 지혜를 뜻하는 말이지요?
범어를 그대로 음사한 단어입니다. 뜻으로 풀지 않고 음역하여 아뇩 다라삼먁삼보리라고 했고 다른 경전에서는 뜻을 풀어서 무상정등정각 이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무상(無上), 더 이상의 것은 없다는 뜻이고, 정등(正等), 더 이상 비교 할 것도 없다는 뜻이며, 정각(正覺), 가장 바른 깨우침이라는 뜻입니다. 중생이 고통을 일으키는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바르고 정확한 깨달 음이라는 뜻이죠. 번뇌를 없애고 고통을 없애는 데 작은 경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변화할 수 있는 경계도 있고 천상에 날 수 있는 경계도 있 어요. 하지만 그러한 경계는 궁극의 것이 아닙니다. 번뇌를 완벽하게 없 애는 마지막 이치는 안 되죠. 즉 번뇌를 완벽하게 없앨 수 있는 가장 최 고이자 최상의 완벽한 지혜입니다. 완전한 깨어있음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줄여서 보리심이라고 하고 그 마음을 내라고 하는 것이 발보리심입니다. 우리는 이것도 줄여서 발심하라고 하죠. 발 심에 대하여 쓴 가장 대표적인 논서가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입니다. 출가하면 가장 먼저 배우는 『초발심자경문』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 이 아주 좋습니다. 발심의 목표가 무엇이며 발심이 안 되는 이유는 무엇 이고 수행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아주 간결하게 설명했 기 때문에 여러분께서도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Q 더 이상 높은 것이 없고 비교할 수 없는 가장 바른 깨침이라고 풀어 주셨는데요. 바른 깨침이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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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깨침이란 매우 간단합니다. 인간이 종교를 찾는 것은 괴로움 때 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괴로움은 죽음의 문제입니다. 죽음에 관한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면 종교의 핵심이 빠진 것이죠. 따라서 최고 의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것은 생사의 문제를 해결한 거예요. 바른 깨달 음이란 나고 죽는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그것이 해결이 안 되고 극복 이 안 되면 윤회는 반복됩니다. 그러므로 정각이란 생사의 문제가 해결 된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는 일대사인연이라고 했어요. 이생에 오셔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인 생사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일대사 인연을 이루었다고 하신 거죠.
그런데 생사를 벗어났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는 것을 영원 히 죽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죽고 사는 문제의 괴로움 자 체를 해결했다는 뜻이에요.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오고 갔다는 이야 기입니다.
과거 인도에 숱한 신흥종교들이 나타났지만 생사의 문제가 극복이 안 됐어요.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던 가섭 3형제를 교화한 이야기에서도 부처님께서 이 부분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때 나제가섭이 나이가 120세였 고 부처님은 35세였어요. 부처님께서 큰 가섭에게, 그대는 오신통까지 도 달했지만 누진통을 증득했는가 물었죠. 생사의 문제를 해결했냐고 물은 거예요. 큰 가섭은 깜짝 놀랐죠. 그동안 수행하여 높은 경지에 올랐지만 마지막 그 경계에는 이르지 못했기에 생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부처님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3가섭을 교화한 것입니다.
이처럼 생사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한 것이 정각입니다. 바른 깨침이 라고 했을 때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생사의 문제를 해결한 것을 말하지 여타의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바로 이것을 깨 치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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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이란 앞에서 본 구경열반과도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겠죠?
같은 의미죠. 구경열반이란 마침내 열반에 이르렀다는 의미입니다. 수 많은 생을 아라한과 보살로서 수행을 거쳐 마침내 부처가 되었다는 의미 이니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에 다다른 것입니다. 구경열반, 무여열반 모 두 같은 의미입니다.
Q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 것, 즉 발보리심이 수행의 시작 이지요?
제가 여러 번 비유를 들었지만 농사를 지을 때 벼를 심으면 벼논이 되 겠구나, 고구마를 심으면 고구마밭이 되겠구나, 콩을 심으면 콩밭이 되 겠구나, 그것을 알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밭에 어떤 마음을 일 으키느냐에 따라 바뀌는 법이죠. 우리의 몸과 말과 마음은 마음을 일으 킨 대로 변화합니다. 도둑질할 생각을 일으키면 말도 도둑의 말이 되고 행위도 도둑의 행이 됩니다. 아라한의 생각을 일으키면 아라한이 되고 보 살의 생각을 일으키면 보살이 되겠죠.
보리심은 부처가 되려는 마음입니다. 부처가 되려는 생각을 일으키면 도둑이 될 리가 없잖아요. 제가 안 믿는 말이 하나 있는데요. 마음은 안 그랬는데 이렇게 됐다는 말이에요. 자세히 놓고 보면 사실은 마음이 그 랬어요. 물론 과정이 잘못되어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있지 만 대부분은 그런 마음이 있었어요. 의식을 못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생 각할 뿐이죠. 콩을 심었는데 중간 과정이 잘못 되었다고 해서 팥이 되지 는 않죠. 콩은 콩인데 그 안에서 뭔가 달라졌을 뿐이죠. 인과는 마음작 동에서 그대로 적용됩니다. 모든 일은 마음을 먹은 대로 된 거예요. 마음 먹은 대로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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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런데 스님, 선한 의도가 꼭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잖아요.
선인지 아닌지 정확하게 판단해야 하겠지만 선한 마음은 반드시 선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선한 마음을 내고 선한 일을 행했을 때 다만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서 마찰이 일어날 수는 있어도 결과는 따르게 되어 있어 요. 사과나무를 심었는데 탱자가 열리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전생의 업 으로 인해 안 좋은 인연을 만나고 조건이 안 좋아서 좀 작고 못생긴 쭉 쟁이가 될 수는 있어도 사과가 열리지 탱자가 열리지는 않아요. 열매를 다 맺지 못하고 떨어지더라도 사과가 떨어지지 탱자가 떨어지지 않죠.
그처럼 부처되려고 마음을 냈는데 조건이 안 좋고 수행을 안 해서 좀 약하게 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부처되려고 마음 낸 사람이 악인이 되 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보 리심을 찬탄하는 것부터가 부처되는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되는 씨 앗을 심고 가꾸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발심하라, 발심하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발심하라, 부처 될 생각을 내라는 소리죠. 개인적이고 이기적으로 살지 말고, 영원하지도 않은 욕심을 갖고 살려고 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모든 중생을 끌어안고 이타적으로 살라는 말입니 다. 모든 사람을 부처될 길로 안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권선이죠.
이렇게 좋은 몸을 받아서 이렇게 좋은 세상에 태어났는데 부처 될 마 음을 안 낸다면 그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좋은 밭에 탱자나 무를 심는 것입니다. 탱자나무를 심어서 가시밭길 가고 탱자는 먹지도 못 하고 그렇게 되고 마는 거예요. 불교를 믿는 사람을 불자라고 하죠. 부 처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낳아서 아들이 아니죠. 부처 될 마음을 발현 시켜 부처님의 생각이 커간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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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수행의 출발점이 보리심이니까 어떤 마음을 내는지가 가장 중요하 겠군요.
우리가 삭발하고 염의하는 것도 세속적인 것, 이기적인 것을 버리고 부처의 길로 가겠다는 선언이잖아요. 비구계를 받았으면 설사 내가 죽을 수 있는 상황이 되어도 내가 죽지 남을 죽이지 않겠다는 생각을 갖는 거 예요. 부처되는 길에 장애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일관된 생각이 출가 수행자의 생각입니다.
Q 발보리심을 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우리나라에는 발보리심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이 많이 전 해지지 않아서 결함된 부분이 있어요. 이 부분은 저도 출가생활을 하면 서 뼈저리게 느껴 왔던 부분인데요. 나란다의 전승이 잘 전달되어져 있는 티베트 쪽을 가서 보니까 이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부분 이 있어요.
나란다 대학에서도 7~8세기에는 공성만 수행하다보니 허무주의에 빠져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경전에 보리심이라는 말은 있지만 보리심 수 행에 대한 가르침이 부족하고 실제로 보리심을 발하고 실천하는 수행법 이 부족하다보니 여러 문제가 나타났어요. 그때 보리심 수행의 스승을 찾다가 인도네시아에서 스승을 만나 그곳에서 10년 넘게 수행법을 배워 다시 나란다 대학에서 보리심 수행을 하면서 허무주의가 극복되었어요. 그 뒤에 나온 논전이 산티데바의 『입보리행론』입니다.
보리심이란 기도와 발원을 통해 철저히 일체 중생을 위해 이타적으로 살고 일체 중생을 성불로 이끌고 가겠다고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지금 도 티베트에서는 자신과 가족을 위해 기도하지 않아요. 오로지 일체 중 생을 위해 살겠다, 일체 중생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기도의 공덕이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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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도 있다면 중생에게 회향하겠다고 기도합니다. 승단 자체가 이타 중 생의 마음으로 경을 보고 논서를 보고 논쟁을 하고 기도를 하면서 이 마 음을 키워 나갑니다. 달라이 라마께서도 말씀하시기를 개인이 아니고 일 체 중생을 위해 살겠다는 보리심이 완전하게 된 것은 50세가 넘어서야 가 능했다고 하시더군요. 매일 『입보리행론』을 읽고 강의하고 설명하면서 그 마음이 이루어졌다고 하시면서 50세 이후로는 밥을 먹는 순간까지도 중생을 위해 힘 있게 하기 위한 마음이 되더라고 하셨어요. 이것이 보리 심 수행입니다.
Q 보리심에도 단계가 있다고 하셨지요?
『입보리행론』과 『보리도등론』에 의하면 보리심은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처음에 그 마음을 내는 단계가 있겠죠. 이기적으로 살아서는 도저히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이구나, 그러한 행복이라는 것은 오는 듯 하 다가 금방 사라지는 것이구나, 이것을 알고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마음 내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이 그러한 윤회 속에서 살지 않게 그들을 건지 자 마음 내는 것이죠. 그럼 누구부터 해야 되느냐, 내가 그렇게 되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이 발보리심입니다. 보리심이라고 하는 마음을 냈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건 아니죠. 우리 가 어디를 가려고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고 해서 자동차가 굴러가는 건 아니잖아요. 운전을 해야 앞으로 가죠. 운전을 하려면 연료도 있어야 하 고 운전도 해야 하고 차선도 보고 신호도 보면서 조심도 해야 합니다. 여 러 가지 조건이 붙죠. 이렇게 실행해가는 과정을 행보리심이라고 합니다. 그 핵심은 육바라밀입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여섯 가 지가 열반으로 건널 수 있는 다리입니다. 남도 이롭고 나도 이롭게 닦아 나가는 거죠. 나의 욕심을 줄여서 궁핍하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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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도와서 다 같이 행복하게 사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육바라밀과 함께 보살의 마음으로 제시되는 것이 사무량심입니다. 자 애의 마음, 연민의 마음, 기뻐하는 마음, 나를 버리는 마음, 자비희사입니 다. 이러한 것들이 행보리심입니다. 보리심을 실천한다는 뜻이죠.
이렇게 실행을 해나가야 보리심이 증장됩니다. 나를 버리고 내 욕심 을 버리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종교조차 집단이기주의화 되면 그 종 교 밖의 대상은 물론이고 그 종교 안의 구성원도 모두 피해자가 됩니다. 그러한 폐해는 지금도 너무나 많이 볼 수 있죠. 교단이 존재하고 승려가 공부를 하는 목적은 일체 중생을 위해 나의 욕망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중생들에게 끼치는 피해는 단순히 물질적 피해에 그치지 않습니다. 심성적으로 해를 끼치는 것은 물론이고 삶을 잘못된 길 로 이끄는 것이니 죄악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행에서 핵심은 보리심을 키워나가는 행보리심이고 그 핵심은 육바 라밀입니다. 저도 수행을 해보니까 이것이 길이라고 하는 것을 매순간 느 낍니다. 보시행을 하지 않는 수행이란 거짓말이에요. 법보시를 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이죠. 두려워하는 이들의 의지처가 되어주는 무외시를 실천 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이고 가식입니다. 육바라밀의 단계 단계가 수행의 길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행보리심은 보리심을 확장시키는 데 너 무너무 중요합니다.
관세음보살님 등 우리가 표상으로 삼을 수 있는 십지보살은 보리심 의 마음을 내고 그것을 실천하신 분들입니다. 그렇게 행보리심을 거듭 실 천해 보리심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을 승의보리심(勝義菩提心)이라고 합니다. 보리심이 완성되었다는 뜻이죠. 부처님께서 전생에 연등부처님 앞에서 발보리심하고 3아승지겁 동안 행보리심을 실천하였는데 처음에는 남에게 배추 시래기 하나 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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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떨렸다고 합니다. 그 보시행 하나를 완성하는 데 5백 생이 걸렸다고 해요. 마침내는 자신의 몸까지 내줄 수 있게 보시행이 완성되었죠. 지계 행도, 인욕행도, 정진행도, 선정과 지혜도 각각 5백 생이 걸렸다고 합니 다. 합하면 3천 생이 되죠. 3아승지겁이란 이처럼 이 세상에 3천 생을 와 서 육바라밀을 완성하고 보살십지가 되어 등각, 묘각, 그리고 마지막에 성불에 이른 것입니다.
이 단계가 『화엄경』에 자세히 설해져 있습니다. 열 가지 믿음의 단계 인 십신으로 시작하여 행보리심을 실천하면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까지 단계별로 완성되어 승의보리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Q 승의보리심이란 공성의 지혜를 바르게 인식한 것이라고 보면 되겠군요.
공성을 바르게 인식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그렇게 된 것입니다. 공 성이 이루어지면 무아가 됩니다. 그것이 보살초지에 이른 것이죠. 그렇게 되면 그 어떤 것도 내 것이라 여기지 않고 집착과 애착을 끊어버리니까 머무는 바 없는 무주처보시가 되고 상이 없는 무주상보시가 됩니다. 공 성을 바탕으로 하여 일체 중생을 위하는 자비행을 해나가게 되죠. 불교 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하잖아요. 지혜란 공성이고 자비란 일체중생 을 위하는 행입니다. 이 두 가지가 같이 합하여 이루어지고 동시에 이루 어지는 것입니다.
Q 우리는 그동안 보리심을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으로 이해해왔습니다. 그래서 중생과 함께 간다는 개념보다는 자신의 깨달음에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깨달음을 강조해왔던 게 사실입니다. 이는 보리심에 대한 깊은 이해 와 간절한 고민이 극히 적었던 데에서 기인했다고 보는데요. 자비심을 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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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은 채 깨달음만 외치고 공성만 생각하니까 제대로 안 된 거죠. 공성의 지혜와 보리심의 자비가 수레의 양 바퀴처럼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어그 러진 것입니다.
원효스님께서 『발심수행장』에서 말씀하셨어요. 행지구비 여거이륜(行 智具備 如車二輪), 행과 지혜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고 했어요. 지혜가 공성이고 행이 자비행입니다. 우리는 지금 수레의 한 바퀴를 가지고 앞 으로 가려고 하고 있어요. 그러면 수레는 갈 수 없죠. 추동력이 없습니다. 참선을 하고 공성 체험을 하기 위해 노력할 때 전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항상 외우는 사홍서원의 중생무변서원도예요. 그 다음이 번뇌를 끊는 것 입니다.
중생을 위하려고 보니까 중생이 고통스러운 게 보이죠. 중생이 왜 고 통스러운가 살펴보니 착각하고 애착해서 그런 거예요. 그렇다면 이것을 끊어야 행복하다는 것을 알죠. 그렇다면 번뇌를 끊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내 스스로 먼저 확인해야 하겠다 하고 수행을 하는 거예요. 부처님 께서도 그렇게 해서 출가하고 수행하신 거예요.
Q 지금 말씀을 듣고 보니까 수행의 목적이 개인의 깨달음에 맞춰져 있 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정혜결사를 일으키셨죠. 정이란 사마타 수행으 로서 공성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혜는 위파사나로서 지혜입니다. 지혜는 일체 중생을 위하는 전제가 없으면 이룰 수 없어요. 현상은 모두 인연법이죠. 인연법은 자비로 설명됩니다. 공성만 가지고는 설명이 안 돼요.
Q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금강경』에서도 중요하게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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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심은 『반야심경』, 『금강경』을 비롯해서 모든 경전에서 강조하는 개념입니다. 모든 경전에 다 나오지만 다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 지, 어떻게 발현되고 어떻게 증장하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Q 『금강경』 「제7분 무득무설분」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무유정법 이라고 했습니다.
무유정법이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따로 무언가 있는 것이라고 보 면 안 됩니다. 이 법은 결정되어진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 세계에 들어가 는 방법론으로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번뇌가 다 해서 오는 경계일 뿐입니다. 상황일 뿐이에요. 우리가 방에 있는 물건들 을 모두 다 비우고 나면 그것을 빈 방이라고 하잖아요. 빈 방이 따로 있 는 게 아니라 물건이 없으면 빈 방이죠. 그런데 자꾸 빈 방이라고 하는 또 다른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는 것과 같아요.
이 세상에 결정되어진 법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 상황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죠. 물리학 등 과학에서도 세상의 이치를 계속 설명 하는 것이지 어떤 결정되어 있는 법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우 주와 물질의 원리를 보니까 이렇게 구성되어 있고 이렇게 움직이더라 찾 아나가는 거잖아요. 결정되어져 있는 법은 없습니다. 깨달음이란 특별한 모양을 띄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집과 법집이 있지 않은 상태일 뿐입니다.
Q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한 설명을 통해 어떤 마음을 내고 어떻게 실천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러한 일을 하게 된 동기가 무 엇인지가 중요하죠. 부처님께서는 업을 의도라고 하셨습니다. 의도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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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합니다. 우리가 절에 다니고 기도하고 봉사도 하고 그러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동기를 가지고 있는가입니다. 시험 합격 때문에 절에 다닌다면 시험 끝나면 다니지 않겠죠. 동기가 그것밖에 안 되면 실천도 딱 그 정도밖에 안 돼요.
동기가 매우 중요합니다. 동기가 잘못되면 조건이 아무리 좋다 해도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어요. 최소한 내 가족과 내 이웃이 번뇌가 떨어져 서 편안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불교를 믿는 것은 인과법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이 생각을 했으면 이 생각의 결과밖에 올 리가 없잖아요. 일체 중생의 괴로움을 건져야 되겠 다, 모든 중생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 면 중생이 행복하기 위해 나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어떤 삶 을 살 것인가, 삶의 방향이 잡히겠죠.
이처럼 중생을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겠다는 생각에서 출 발하면 모든 수행의 절차들이 잘 들어맞을 거예요.
Q 이번에 살펴볼 부분입니다.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며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다.
여기서 고지라고 한 것은 그러므로 알아라, 이 법문의 중요성을 이야 기하는 것입니다. 맨 처음 오온개공으로 시작해 그동안 설명해놓은 내용 모두가 중요한 말인 줄 알아야 한다고 한 거죠. 지금까지 설한 본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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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부처가 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은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을 반야검이라고 합니다. 번뇌를 단칼에 베는 것을 상징하죠. 왜 반 야의 칼이라고 할까요? 마음의 작용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거기에서 잘 못된 것을 단번에 끊어버리는 힘은 지혜에서 나옵니다. 문수보살은 이러 한 반야지혜에 의해 보살십지를 이루신 분이에요.
Q 이 구절에서는 주(呪)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란 무엇인가요?
주(呪)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말이기도 해요. 우리 한국 사람의 주는 무엇일까 생각해봤거든요. 한국 사람에 대해 인문학적 으로, 지정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여러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겠죠. 한반 도라고 하는 지정학적인 위치에서 역사적으로는 어떤 과정을 거쳤고 한 글이며 오랜 침략이며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이것은 다 이론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6.25 때 제주도 포로수용소에서 공산주의다 자유주의다 해서 죽고 죽이는 혼란을 겪으며 제3의 중립국으로 간 사람들이 있어요. 인 도, 브라질, 칠레 등등 여러 나라로 갔다고 합니다. 한 번은 어떤 PD가 그 분들 중에 인도에서 살고 있는 분을 찾아가서 인터뷰했어요. 그 분들은 한국이 너무너무 싫어서 잊어버리려고 애를 썼고 세월이 흐르면서 한국 말도 다 잊어버리고 살았어요. 그런데 이 PD가 아리랑을 부르니까 따라 부르더군요. 따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저는 이것이 한국 사 람들에게 있어서는 주문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언이죠. 우리의 DNA에 깊숙이 박혀있고 각인되어 있는 것이 아리랑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종교도 그렇잖아요.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면도 있지만 감성적으로 접 근하는 면도 있죠. 공성, 연기 등등은 불교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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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불교를 감성적으로 바라본다고 했을 때는 진언 또는 주(呪)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야바라밀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한국인에게 있어서 아리 랑과 같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핵심이 주(呪)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예로 들어보면 과거 전생에 대세지보살과 형제였고 해안절처 보타락가산에 버 려져 죽음이 닥쳤을 때 어떤 서원을 세웠고 세세생생 어떤 보살행을 닦 아 중생을 어떻게 구제하고 있는지 설명할 수 있죠. 그런데 이를 테면 관 세음보살의 육자대명왕진언 옴마니반메훔은 다른 이론적인 설명이 없어 도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면이 있잖아요. 이것을 관세음보살 보호주라 고 합니다. 옴마니반메훔을 풀어보면 마니(mani), 보석과 같고 반메 (padme), 연꽃과 같은 관세음보살님이라는 뜻이에요. 우리는 이 옴마니 반메훔 진언만 들으면 그대로 관세음보살님이 떠오르죠. 한없이 자비한 그 마음과 끝없이 자재한 그 가피력이 바로 전해집니다.
관세음보살님은 내 이름을 한 번만 떠올리더라도 그대 곁에 가서 돕 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님은 진언 뿐 아니라 당신의 명호도 보호주가 된 거예요. 신묘장구대다라니는 관세음보살님이 세세생생 정진 하면서 이룬 공덕의 말씀입니다. 중생이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고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마치 멧돼지처럼 저돌적으로 뛰어들겠다고 하는 등 엄청난 서원을 세운 내용들이 그 안에 실려 있습니다. 한국 사람이 머나먼 나라에 가거나 오랜 세월 떠나있거나 혹은 나라를 잃어버렸을 때에도 아리랑을 외우면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는 것처럼 명호나 주를 염 송함으로써 관세음보살님을 느끼는 거예요. 그것이 주 또는 진언입니다.
반야바라밀은 부처님의 주입니다. 부처님의 진언이에요. 반야로써 지 혜로써 깨달음에 들어가게 하는 부처님의 주가 바로 반야바라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는 대부분 범어를 그대로 음역합니다. 철학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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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인 것은 번역해서 자세히 설명해야 하지만 주는 오히려 번역하는 것이 불필요하고 부자연스럽죠. 진언이나 다라니를 한글로 풀어놓는다 면 싱겁다고 느낄 수도 있을 거예요. TV에서도 때로는 수많은 설명이나 문자보다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한 장면만으로 모든 것을 느끼는 경우 가 많잖아요. 이와 마찬가지로 번역을 하면 그 의미가 반감되기 때문에 대부분 소리 나는 대로 그대로 음역해서 경전에 실어 놓은 것입니다. 범 어 그대로의 감성적인 언어를 통해 부처님과 대보살의 진실된 말씀을 마 음에서 마음으로 그대로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Q 주, 만트라, 진언, 다라니, 다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말이지요?
용어라는 것은 시대마다 조금씩 달라질 수 있죠. 같은 개념도 여러 용 어로 쓰일 수 있고요. 범어로는 만트라인데 중국에서 이것을 주라고 번 역했고 가장 참된 말씀이라는 의미에서 진언이라고도 번역했죠. 범어 그 대로 사용하기도 하고 번역해서 사용하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그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애를 썼다고 보면 됩니다.
붓다(Buddha)라는 말도 처음에 번역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죠. 그래 서 중국에서는 글자를 새로 만들었어요. 사람 인(亻) 변에 아니 불(弗) 자 를 썼어요. 부처를 한자로 불(佛)이라고 새롭게 만든 거예요. 사람은 사 람인데 사람이 아니라고 한 것은 사람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한 거죠.
Q 보통은 긴 주문을 다라니라고 하고 짧은 주문을 진언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만, 주 또는 주문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신비한 힘이 있죠. 일제 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일제가 우리의 궁을 동물원으로 만들어버린 창경원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창경원에 구경 왔던 관람객 중에 한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호랑이를 구경하고 있다가 창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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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로 아기의 얼굴이 쏙 들어가 버린 거예요. 호랑이 우리에 있는 창살이 얇거나 약하지 않았겠죠. 그런데 호랑이가 점차 다가오니까 아기 엄마가 쇠로 된 그 두꺼운 창살을 휘어서 아기를 빼냈다고 합니다. 신비한 일이 죠. 어머니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괴력이 나온 거예요. 어머니도 자기가 어 떻게 그 두껍고 단단한 창살을 휘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될 거예요.
진언의 힘이라는 것이 이런 거죠. 60년대 70년대 독일에 간호사로 가 고 광부로 갔던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위문공연을 가면 마지막에는 하 나같이 아리랑을 부르잖아요. 아리랑이 한국 사람을 단결시키고 한국인 의 감성 밑바닥에 있는 진한 동질성 같은 것을 느끼게 하듯이 관세음보 살님의 진언을 염송하면 나도 모르게 관세음보살님과 같은 동질성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변화시키는 어마어마한 힘이 있어요. 이 것은 우리가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힘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어린 아기를 자장자장 재우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 안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모성애는 상상을 초월하 는 힘이 있죠. 종교의 감성도 그와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한국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관세음보살님을 믿는 힘이 더 크지 않을까 할 정도인데요.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고 원하 는 것이 있을 때 이러한 우리 중생들의 마음을 관세음보살님이시라면 다 들어주고 이해해주고 이끌어주시리라 하는 강력한 믿음이 깔려 있잖아 요. 그러니까 힘이 큽니다. 관세음보살님의 보호주 속에는 관세음보살님 의 지혜와 자비심이 들어있기 때문에 독송하고 염송하면서 관세음보살 님을 닮아가고자 내 마음을 계발해나간다면 그 힘은 아주 큽니다.
Q 주문을 외울 때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요?
나 혼자 책 좀 보겠다고 내 방 안에 작은 등잔불 하나 켜는 것과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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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넘어지지 말라고 마당에 전등불을 하나 켜는 것 은 차이가 있지요. 진언을 하나 외우더라도 일체 중생을 위하겠다는 생 각을 가지면 그 진언의 힘이 굉장히 강력해집니다. 그렇게 중생을 위하고 자 하는 생각이 거듭 발현되어 갈수록 힘은 커집니다.
성악가들은 노래를 부를 때 하단전에 힘을 주고 시선을 저 관중석 끝에 두고 마음을 홀 전체에 두어 소리를 뿜어낸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웬 만한 규모의 홀에서는 마이크 없이도 앞좌석과 뒷좌석에 큰 차이 없이 모든 청중들에게 소리가 그대로 전달된다고 하더군요. 관세음보살님도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힘이 아주 강력하기 때문에 우리도 그 힘을 같 이 낸다면 거리와 시간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한정하면 그 힘은 나라고 하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극히 협소해지고 힘도 아주 약해집니다.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겠다 생각하면 그 힘이 뻗쳐나가지만 그런 생각을 내지 못하고 혼자만 생각하 면 그 에너지는 그렇게밖에 머물지 못합니다. 일체 중생을 위하겠다 생각 하면 모두에게 이익이 되게 힘이 퍼져갑니다. 그런 점에서 진언은 그러한 힘을 내게 하는 아주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종교성이라고 생각합니다.
Q 반야바라밀이란 어떤 주인지 하나하나 보겠습니다. 대신주, 가장 신 비한 주문이라고 했습니다.
신비한 주문이라고 하면 오히려 저는 별로 신비하다는 느낌이 안 들 어요. 여기서 대신이란 정신적으로 크게 자유로워진다는 의미입니다. 우 리의 정신을 보세요. 욕심 때문에 걸리고 분노 때문에 막히잖아요. 아가 있으면 사사건건 시비하고 걸리적거려요. 욕심이 있거나 화가 나도 한없 이 좁아져서 걸려버리고 넘어지고 앞뒤가 콱 막혀버립니다. 어리석어도 콩인지 팥인지 구분이 안 되니까 좁아지고 걸려버리죠. 생각이 걸리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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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걸리고 행동도 걸려서 숱한 장애가 옵니다.
따라서 공성이라고 하는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일체는 내가 없고 모 든 것은 인연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알면 붙들 것도 없고 걸릴 것도 없어 지죠. 그러면 정신적으로 아주 자유로워집니다. 우리가 무언가에 크게 걸 리고 막히고 앞이 깜깜한 것은 모두 아에 의한 욕심이라는 것을 알고 공 성 체험을 해서 바로 안다면 걸리고 막힐 일이 전혀 없잖아요.
그러니 반야바라밀은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참된 말씀입니다.
Q 다음으로 대명주, 가장 밝은 주문이라고 했습니다.
전등이 밝고 태양이 밝다고 하지만 지혜로우면 밝아집니다. 사실을 다 아니까 밝은 거예요. 세상을 훤히 알죠.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으면 부도날 일이 없어요. 도인들은 왜 부도날 일이 없을까요? 가진 것을 널리 베풀면 부도가 안 납니다. 다음 생에도 그 다음 생에도 부도가 안 난단 말입니다. 꽉 쥐고 있으니까 부도가 나 는 거예요. 반야바라밀을 알면 세상의 원리를 훤히 압니다. 삶과 죽음의 이치를 알고 윤회와 연기와 인과의 이치를 알 수 있으니 환하죠. 이만큼 밝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태양을 수백 개 가져다 놓은 것보다 더 밝아요.
Q 이어서 무상주, 최고의 주문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발견한 그 어떤 사상이나 철학이나 종교 가운데 이 이상으로 진전시킬 수 있는 것은 없을 거예요. 지금 제임스웹 망원경이 나와서 우주의 끝을 보고 있잖아요. 그렇게 과학이 발전하고 기술이 세 밀해졌지만 과학의 원리라는 것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서 크게 벗 어난 것이 없어요. 게다가 제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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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해도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크게 바뀌지 않잖아요. 예나 지금이나 번 뇌가 일어나고 괴로운 것은 별로 바뀐 게 없죠.
그러므로 번뇌가 다하는 방법은 공성을 인식하고 공성을 체험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인 반야바라밀 외에 아직까지 다 른 방법이 제시되지 못했어요. 최고입니다.
Q 그래서 무등등주,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라고 한 거겠죠?
광주에 가면 무등산이 있어요. 무등산, 산 이름이 참 좋죠. 비교할 산 이 없다는 뜻이에요. 물론 무등산보다 더 높고 더 멋있는 산이 있겠죠. 하지만 무등산과 비교할 만한 산이 없다고 스스로 자신감을 가지고 있 는 거예요. 광주 사람들의 기상을 산에 빗대 이야기한 거죠.
모든 것은 자성이 없고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가르침은 번뇌를 없애 는 법으로서 단연 최고 아닌가요? 이런 엄청난 말씀을 부처님께서는 어 떻게 2,600여 년 전에 깨달을 수 있었고 어떻게 그렇게 한 치의 오차도 없 이 정확하게 가르쳐주실 수 있었을까요? 생각해보면 놀랍고 경외스러울 뿐입니다. 우리가 번뇌를 없애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길을 분명하게 제시 한 가르침이 다른 데 어디에 또 있을까요?
Q 반야바라밀이 지혜를 열어주고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뜻이 되겠지요?
우리가 무엇인가에 집착해서 아주 갑갑한 상황에 놓여있을 때 모든 것은 다 변하는 법이야, 언제든 다 사라지겠지, 이 사실을 조금만 인식해 도 숨구멍이 트입니다. 그런데 반야의 본질을 완전하게 안다면 그야말로 걸릴 게 없죠. 힘들 것도 별로 없어요. 『반야심경』을 비롯해 반야부 경전 은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볼 수 있고 왜곡 없이, 집착 없이 볼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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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Q 염불과 진언의 신비한 힘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요. 스스로 헤쳐 나가는 자력신앙과 불보살님의 가피를 바라는 타력신앙의 관계에 대 해서도 말씀 듣고 싶습니다.
아기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태아는 100%가 어머니의 보호를 받 아야 합니다. 태어나서도 거의 대부분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죠. 하지 만 차츰차츰 자라면서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 자립하게 됩니다. 기어 다 니기 시작하면 엄마 쪽이 아니라 다른 곳을 향해 돌아다니려고 하죠. 말을 배워도 처음에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싫다는 말이잖아요. 자기 뜻대로 하 겠다는 거죠. 사춘기가 되면 문을 닫고 나오지도 않으려고 하고 마주 앉 아 대화도 잘 안 하려고 해요. 그때는 무슨 말을 해도 알아서 하겠다고 합 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고 성장한다는 것은 곧 자립도가 높아지는 거죠.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의존한다면 문제잖아요.
자력과 타력도 이렇게 보면 됩니다. 내가 신행이 허약할 때는 의지하 는 비중이 크고 믿음과 이해가 높아져서 점점 부처님과 가까워지면 내 스 스로 하는 비중이 커집니다. 자력과 타력은 믿음과 선근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이지 처음부터 자력으로 수행할 수도 없고 끝까지 타력으로 신행 생활을 해서도 안 됩니다.
수행의 근본은 자력이지만 타력도 필요합니다. 스승이 이끌어주는 것 이 필요하죠. 개인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때 관세음보살님께 간절 하게 도와 달라고 기도하면 관세음보살님이 도와주십니다. 물론 나쁜 일 을 하는 사람이 도와 달라고 기도하면 나쁜 일을 하지 못하도록 역으로 도와주실 거예요. 육조 혜능스님이 사냥꾼을 따라다니면서 교화한 이야 기 해드렸죠. 사냥꾼이 사냥을 하려고 하면 새끼 가진 것 같다고 하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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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다친 것 같다고 하면서 사냥을 못하게 했어요. 그런 끝에 살생 의 업에 대해 가르쳐주고 살생을 그만두게 했죠. 이처럼 좋은 일을 하면 더 빨리 도와줄 것이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일이 안 되게 해서 그를 도 와줄 거예요.
Q 걸음마부터 해서 성장하는 아이를 비유로 들어주시니 이해가 되었 는데요. 우리가 기도를 할 때도 스스로 직면하고 헤쳐 나가겠다는 의지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요. 무엇을 하든 그 안에는 항상 작더라도 내가 한다는 것이 전 제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습니다. 자력신 앙이나 타력신앙은 대립하거나 논쟁할 사안이 아닙니다. 어쩌면 대보살 님들은 이미 다 판단하고 계시리라 생각해요.
Q 여러 진언과 다라니 가운데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누구나 가장 쉽고 친숙하게 할 수 있는 것이 관세음보살 육자진언이 라고 할 수 있겠죠. 다른 불보살님 명호와 진언들도 좋은 것이 많습니다. 다만 한 가지에 집중해서 하십시오. 이것저것 뒤섞어서 하거나 이것 했다 가 저것 하면서 자꾸 바꾸지 마세요. 관세음보살님, 문수보살님, 지장보 살님, 다 너무나 훌륭한 십지보살이시니 한 분을 택해서 독송하되 그 분 의 사상과 철학과 원력을 새기면서 오랫동안 꾸준히 주력하시면 수행에 큰 힘을 얻고 도움을 받으실 겁니다.
Q 경전을 공부할 때와 주(呪)를 염송할 때의 마음은 어떻게 다를까요?
경전을 공부할 때는 기억과 이해가 중요합니다. 주를 염송할 때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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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과 감성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아도 경 전을 깊이 있게 이해하면 주에 대한 이해도 깊어집니다. 이를테면 아리랑 을 부를 때도 한글도 잘 알고 한복이나 김치와 같은 전통문화에 익숙하 다면 한국이라고 하는 정체성도 강해지고 아리랑에 대한 감성이나 애정 도 훨씬 깊겠죠. 그와 똑같습니다. 경전을 공부하면 정견을 갖게 하고 인 식을 깊게 해주고 신행이 기복이나 미신이 되지 않게 합니다. 또한 주를 염송하면 머리로 이해한 것들이 마음으로 체화되고 왔다갔다 흔들리는 마음을 털어내 주고 집중하는 힘을 길러줌으로써 신심과 수행력이 깊어 집니다.
경전 이해와 염송은 이처럼 상호보완해 주기 때문에 같이 하면 아주 좋습니다.
Q 이어서 살펴봅니다.
능제일체고
能除一切苦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뜻부터 풀어보면 능히 일체의 모든 괴로움을 제거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글자 하나하나를 좀 더 중요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능 이라고 하는 한자가 특히 중요한데요. 부처님을 칭하는 명호 가운데 능 인(能仁)이 있습니다. 여기서 능이란 스스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대 상이 나를 좌지우지하거나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아주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능제일체고라고 했을 때는, 이 반야바라밀은 나에 의해서 자각되고 나에 의해서 수행되어 스스로 일으킨 번뇌를 스스로 제거한다 는 의미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다른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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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것이죠. 이것이 불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 포인트입니다.
부처님의 탄생선언인 천상천하 유아독존 일체개고 아당안지, 여기에 서도 아(我)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아는 아트만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나 스스로를 뜻합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인도에서는 브라흐만 이라고 하는 창조신이나 어떤 절대신이 모든 것을 관장한다고 믿었어요. 수천 개가 넘는 다신의 신들이 복을 관장한다고 지금도 믿고 있잖아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행복도 불행도 스스로 능히 바꿔갈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다음 고(苦)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만약 사람들에게 고가 없다면 종교도 필요 없을 것이고 행복을 추구하지도 않을 거예요. 사람 의 권익이나 인권도 삶의 권리가 침해되고 핍박을 받기 때문에 그것을 찾 고자 하는 거잖아요. 고통을 느끼고 그 문제를 들여다보려는 것은 매우 중요하죠. 고통을 인식하는 것이 고통을 제거하려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을 제거하는 데 있어서 다른 어떤 누구의 힘이 아 니라 스스로 제거하겠다는 생각이 중요하죠.
이것이 불교의 핵심입니다. 타의에 의해서 되는 것은 없어요. 설사 부 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다고 하더라도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 습니다. 내가 듣고 내가 실천하여 내가 이루는 것이지 남에 의해서 이루 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물론 먼저 깨달은 이들이 이끌어주고 도와주기는 하겠죠.
내가 한다는 것, 그리고 세상 만물은 영원한 것이 없이 변화한다는 것, 이것은 불교의 처음부터 끝까지 기본 원칙이고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능히 일체의 고통을 스스로 제거한다고 한 것입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이를 통해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부처가 됐다는 것은 반야바라밀을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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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모든 고통을 스스로 제거했다는 의미죠. 그래서 고지반야바라밀다 능 제일체고라고 한 거예요. 예비수행으로는 능제일체고가 되지 않습니다. 선정바라밀이라고 하더라도 번뇌를 벗어나는 데 도와주는 것이지 오직 반야바라밀만이 능제일체고 할 수 있는 거예요.
Q 능제일체고, 이 구절에서는 ‘능히’의 의미와 ‘고’의 의미에 대해 깊이 사유해봐야 하겠군요.
모든 생명은 왜 끊임없이 윤회하면서 고통을 받을까, 이것이 석가모 니 부처님의 화두였습니다. 주 명제죠. 당시 뛰어나다고 하는 모든 종교 수행을 닦아서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고 하는 가장 높은 단계까지 도달하셨지만 그러한 선정에서 깨어났을 때 번뇌가 다시 일어 난다는 것을 보셨어요. 6년간 고행도 하셨죠. 누구도 따라올 수 없고 흉 내 낼 수도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마음 속 번뇌 를 완전히 소멸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핵심은 고통을 사라지게 하는 데 있습니다. 행복이란 고통이 사라지 면 오는 것이잖아요. 생사윤회하는 인간의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고통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을 꿰뚫어 아신 거죠. 이 길이 아니면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으신 거예요. 『반야심경』의 목표가 도일체고액이고 능제일체고입니다. 고통을 벗어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목표로 삼으면 됩니다. 『반야심경』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가리키는 곳은 도일체고액이고 능제일체고라고 하는 달이에요.
Q 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고에 대해서 알아야 하겠죠? 고는 무엇 으로부터 생기는지 다시금 생각해볼까요?
신을 믿는다면 신이 고통을 준다고 생각하겠죠. 다른 종교에서는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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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있다거나 아트만이 죄를 지어서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죄를 사해야 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그것은 고행이나 신에 대한 믿음과 용서로써 죄를 없애고 고통을 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신 이 고통을 준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신에게 복종하는 길밖 에 없죠. 그렇게 하면 어느 때인가 브라흐만천이나 천국에 태어나리라 생 각하겠죠.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전지전능한 신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고 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아(我)가 영원하다고 착각하고 고집하여 일어난다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오온이 모두 공하 다, 나를 형성하고 있는 색수상행식 모든 것에 영원한 자성이 없기 때문 에 도일체고액,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처음부터 이야기했잖아요. 오온이 공함을 알아서 일체의 고액에서 벗어나고 반야바라밀에 의지해 서 능히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설한 것입니다. 핵심은 아에 대한 착각을 없애는 거죠. 아에 대한 착각을 없애는 것은 반야 외에는 없습니 다. 무아와 공성에 위배되는 철학과 가르침은 불교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고를 생로병사와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음성 고로 설명하셨죠. 이것은 모두 내가 영원하다고 착각하거나 영원하고자 하는 모든 행위가 고통을 불러일으킨다고 하신 거예요. 내 것이라고 생 각하고 내 것이 있다고 고집하고 내 것으로 만들려고 집착하는데 그러한 것들이 어느 새인가 사라지니까 괴로운 거죠. 이 몸도 늙고 병들어가면 서 사라져버리잖아요. 그래서 힘들고 괴로운 거죠. 그러나 이것은 모두 연기에 의해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영원한 자성이 있지 않고 변화하는 상황이고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는 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아를 제거하고 약화시켜 착각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반야바라밀입니다. 무아와 공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반야바라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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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불교가 주체적이고 자력적인 종교라는 것을 능제일체고, 이 구절을 통해서도 다시 알게 됩니다.
불교사상이 그렇지만 세상 사는 이치도 사실은 타의적인 것은 없어 요. 예를 들어 배우자 때문에 괴롭다, 자식 때문에 힘들다고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고통을 당하는 사람도 나이고 고통이라고 느끼고 힘들어하 는 사람도 나입니다. 고통스러운 것도 깊숙이 들여다보면 내가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출발은 나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아내 와 남편도, 자식도 내 삶의 조건이지 주체가 아니에요. 우리는 자꾸 주체 와 조건을 착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로 인해서 일어납니다. 나로 인해 서 일어나고 나로 연해서 발생합니다. 나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 입니다. 모두가 남 때문에 일어나고 환경이 문제라고 하지만 잘 들여다 보면 내가 그렇게 인식하고 내가 그렇게 집착하고 내가 그래서 괴로워하 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꿀 수 있는 것도 나 자신이죠. 남이 바꿔줄 수 없 어요. 타의에 의해 변화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워요. 죄를 지은 사람들 을 교도소에 가둬놓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지 못하잖아요. 교도소에 들어가신 분이 스스로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구나, 이렇게 살면 안 되겠 구나, 마음 하나 바꾸면 교도소는 다 허물어집니다. 나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는 것이 불교의 핵심이자 요점입니다.
Q 다음 구절입니다.
진실불허
眞實不虛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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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하고 허망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번뇌를 사 라지게 하여 행복하게 해주니까 진실하죠. 다른 것은 진실하지 않습니다. 다른 것들은 일시적으로는 행복하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행복이 되지 않아요. 헛되죠.
번뇌를 없애주는 핵심은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자성 이나 주체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변화하고 나조차도 그러한 변화에 있을 뿐이죠.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여 처방을 내릴 때 이 약을 일주일만 먹으면 낫는다고 하는 것은 많은 실험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기 때문이죠. 이 병에는 이것만큼 좋은 약이 없다는 것이 진실이죠. 공사상이 그렇기 때문에 가장 진실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을 허무하다고 받아들이는데요. 실체가 공성이라서 영원성을 갖고 있는 것이 없지만 그 변화의 주체는 바로 나입니다. 허무 한 것만 보면 중국의 도교처럼 됩니다. 우리나라도 중국의 도교 영향을 받아서 불교에 허무주의가 상당히 유입되어 혼동이 되지만 변화 속에서 변화를 이끌어가는 주체적인 자신을 잊으면 안 됩니다.
달라이 라마께 영원한 내가 없다면 달라이 라마란 어떤 존재인지 여 쭌 적이 있어요. 그때 존자께서는 간단하게 말씀하시더군요. 달라이 라 마는 연기로서 존재하는 이름일 뿐이고 모양일 뿐이라고 하셨어요. 우리 는 모두 인연으로서 존재하는 나일뿐입니다. 영원성을 갖고 있는 것은 없 습니다. 실재하는 무엇이 있다고 하는 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헛되지 않다고 하는 것은 공성을 허무주의로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 한 거예요. 허망하다, 헛것이다, 이렇게만 이야기하면서 실제로 변화하는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못하는 것을 경계한 것 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지혜와 자비를 이야기합니다. 지혜 공성만 이야기 하면 안 됩니다. 자비는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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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가 흔히 믿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들 가운데 진실하지 않고 헛된 관념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간단하게 예를 들어볼게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죠. 그래서 훗날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비석 에 이름을 새겨놓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돌에 새겨져 있는 그 이름이 그 사람인가요? 그야말로 이름일 뿐이죠. 실제 그 사람은 아니잖아요. 세속 에서는 출세해라, 성공해라, 이런 말들을 많이 하죠. 그 소리는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서 권세를 부리라는 건데요. 그것들이 모두 얼마 나 허망한지 우리는 늘 눈으로 보고 있고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불자라면 무엇이 진실하고 무엇이 허망한 것인지 구별할 수 있는 지 혜가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보니까 수염을 길게 기 르고 커다란 지팡이를 들고 말발타 살발타 외우고는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으로 도인을 표현했던데 도란 그런 것이 아니죠. 도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관한 바른 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바른 길을 가 르쳐 놓으셨어요. 이렇게 살면 행복한 그 길을 가르쳐 놓으신 것이 도입 니다. 육바라밀, 팔정도가 모두 바른 길이라는 의미잖아요. 사람이 살아 가는 바른 방식과 방법이지요.
Q 다음 내용입니다.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이제 반야바라밀다주를 말하리라
앞에서 주(呪)에 대해 설명해드렸죠. 『반야심경』에서 공성에 대해 철 학적으로, 종교적으로 다 설명한 다음 이제 이것을 실천하는 구호가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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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가 제시하는 것입니다. 아리랑처럼 평소 반야바라밀다를 가슴 속에서 떠 나지 않게 하고 늘 새기면서 실행할 수 있게 이끌어줄 수 있는 진언이 무 엇일까 하고 제시한 것이 이 주입니다. 아제 아제, 첫 구절만 들어도 가슴 을 울리고 반야바라밀다를 추동할 수 있는 동력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Q 그 진언은 이렇습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이 구절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구절입니다. 이 진언은 원래 산스크 리트어로, 중국에서 소리 나는 대로 음역한 것입니다. 이 음역된 한문을 우리는 읽게 되었고, 한문의 음을 따라 읽다 보니 범어 원음과는 많이 다 르게 들립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의 범어 원 음을 우리말로 읽으면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삼가떼 보디히 스와하’ 가 됩니다.
해석하면 가자, 가자, 어서 가자, 어서 빨리 가자, 깨달음의 완성으로, 보리심의 완성으로, 이렇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단순한 말이죠. 우 리 모두 불교 수행을 열심히 해서 번뇌가 다한 저 깨달음의 완성으로 우 리 어서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Q 흔히 차안과 피안이라고 하지요. 여기는 어디이고 가야할 곳은 어디 일까요?
이곳과 저곳, 차안과 피안, 상대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궁극적으 로는 둘이 아닙니다. 일단 이곳은 중생계입니다. 차안(此岸)은 착각해서 살고 있는 이 세상이죠. 그리고 피안(彼岸)은 그러한 착각에서 벗어나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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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없는 세상입니다. 표현은 이곳과 저곳, 이 언덕과 저 언덕이라고 했 지만 이쪽 공간이 따로 있고 저쪽 공간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 간적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유 심정토죠. 마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이동 하여 가는 곳이 아닙니다. 가자, 가자, 한다고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가거 나 몇 십 억 년 뒤에 불국정토에 간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수행하자, 수행하자, 어서 빨리 수행하자, 더 빨리 가행하자, 저 니르 바나의 진정한 행복을 향해서 우리 전부 함께 가자, 이것이 『반야심경』을 설하신 주목적입니다.
Q 이 구절을 수행의 다섯 단계로 설명하기도 하던데요.
그것은 나란다의 전승입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반야심경』을 주석 하면서 이 진언을 수행의 다섯 단계인 수행5위로 설명합니다. 수행의 과정 과 단계를 정확하게 제시하여 수행을 독려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가자, 첫 시작은 수행의 시작인 자량도(資糧道)입니다. 무작정 가면 안 되잖아요.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이고요. 그 첫걸음은 선행입니다. 선 행부터 닦아야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수행으로 나아가려면 열 가지 선 행을 닦아야 합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삼악도에 떨어질 가능성이 아 주 높아요. 적어도 수행을 하려고 하면 최소한 인간으로는 태어나야 하 는데 인간 이하로 떨어지면 안 되잖아요. 인간으로 태어나는 기본이 십 선행입니다. 그것이 살생, 투도, 사음, 망어, 기어, 양설, 악구, 탐진치를 하 지 않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차례대로 아라한과를 향해 가는 가행도(加行道), 번뇌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견도(見道), 육바라밀행을 닦는 수도(修道), 마지막 보살십지와 등각, 묘각, 부처의 깨달음에 이르소서, 이렇게 이해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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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이러한 단계를 밟아서 차근차근 열심히 수행하라고 일러주는 것 입니다.
Q 가자, 가자, 이 말씀은 마치 우리를 다독여주는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일 년 동안 열심히 가르치고 만약 내일이 수능시 험이라면 칠판에 수학공식이며 잔뜩 쓴 다음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그 동안 수고 많았다, 내일 우리 차분하게 해보자, 이 소리와 같습니다. 그 동안 배운 대로 마음 편하게 최선을 다해라, 이 이야기와 같은 거예요.
어떻게 보면 부처님께서 최종적으로 격려를 해주신 것이고 용기를 북 돋아주신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키우면서 나중에 커서 잘 살아야 한 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너는 고생 안 하고 잘 살아야 한다, 이 말이 부모의 염원 이고 사랑이고 정이 담긴 말인데 부모가 가르치고 바라는 바를 바르게 알지 못하면 영 엉뚱하게 갈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가라고 정성을 다해 총력을 기울여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내용을 잘 알고 수행 하라고 하신 전제를 기억해야 합니다.
Q 스님께서도 불자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주신다면요?
저는 그러한 격려의 말씀을 해드릴 위치에는 있지 않습니다. 다만 『반 야심경』의 이 구호를 사람들이 자꾸 부적처럼 여기는 것은 안타깝습니 다. 비밀주라고 하니까 이것을 외우면 시험을 잘 보거나 돈을 잘 버는 것 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죠. 우리가 아리랑을 부르는 것은 우리의 정 체성을 잊지 않고 민족의 동질성을 가슴에 새기는 것 아니겠어요? 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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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하는 것은 오온이 개 공하니 욕심 부리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는 그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해 하는 거예요.
여러분, 공부합시다, 이러이러한 단계를 거쳐서 깨달음으로 나아갑시 다, 열심히 합시다, 이 말씀입니다.
Q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열심히 수행하겠습니다, 이러한 발원을 담 아서 『반야심경』을 독송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번뇌를 없애고 괴로움을 없애려면 적어도 이러한 단계를 거쳐 서 공부해야 하는구나, 그리고 내가 해야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가지셔 야 합니다. 이렇게 하시면 하는 만큼 알아지고 하는 만큼 행복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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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14 『반야심경』 유통분
우리가 흔히 외우는 『반야심경』의 내용이 정종분이고 원래는 서분과 유통분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경전의 서분은 부처님 설법에 대한 역사적 증거가 됩니다. 서분을 통 해 법이 설해진 장소와 설법하신 분, 설법을 들은 청중 등 육성취가 담겨 있어 법회가 열리게 된 연유와 주제를 알 수 있죠.
마찬가지로 『반야심경』도 서분이 있고,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삼 가떼 보디히 스와하, 여기까지가 정종분에 해당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 하시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죠. 그 다음 유통분에서는 대중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어떻게 유통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담 겨 있습니다.
『능엄경』의 경우에는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를 깨치게 하기 위해 마음 에 대하여 하나하나 설명하고 공성의 본질을 일러주셨지만 아난 존자는 끝내 깨치지 못했어요. 책 한 권이 되도록 마음의 본질과 속성에 대해 이 렇게도 설명하고 저렇게도 설명했지만 그때 법을 듣는 아난 존자가 도무 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능엄경』은 대중들이 환희심을 일으키고 신수 봉행했다는 내용이 없이 법을 듣고 헤어졌다고 간단하게 마무리 되어 있 습니다. 그러니까 대중들이 환희했다, 받들어 모셨다, 이러한 문구가 결 코 의례적이거나 상투적인 것이 아닙니다. 실제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대 중이 감동하고 공명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유통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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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어떻게 실천하고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Q 『반야심경』의 유통분 살펴보겠습니다.
그때 세존께서 삼매에서 깨어나
관자재보살마하살을 찬탄해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선남자여.
네가 말한 것과 같이 그러하니라. 정말 그러하니라.
반야바라밀다를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 하리니
이것이 곧 가장 으뜸가는 구경의 경지이며
모든 여래들도 다 따라 기뻐하시는 것이니라.
『반야심경』은 부처님께서 삼매에 들어계시고 관자재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허공중에 나타나 부처님을 대신하여 설법하신 거예요. 부처님 께서 직접 설명하지 않고 십지보살인 관자재보살이 체득한 공성에 관한 내용을 말씀하신 것은 관자재보살이 부처님의 여래사(如來使)이기 때문 입니다. 부처님을 대신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신 거죠. 그렇기 때 문에 부처님의 말씀과 다르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 빛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십지보살인 관자재보살이 나의 제자이고 나의 여래사이고 앞으로 이 세상을 제도해 주실 분이라고 선언해주신 것 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인가해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십지보살의 제 자를 여래와 동등하게 대하고 인정하는 이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반야심경』 유통분에서는 관자재보살의 설법을 부처님께서 인정해주 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뒤에서 조용히 삼매에 들어계시는 상황에서 관자재보살이 오온이 공함을 차례대로 설명해주셨죠. 관세음보살의 설 법이 끝나자 부처님께서 잘했다, 훌륭하다, 나의 생각과 하나도 다른 것 이 없다, 이렇게 대중들에게 선언해주신 것입니다. 나는 교주이고 그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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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나의 제자일 뿐이니 말할 자격이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여래와 동등 하게 대접하고 설법하게 하고 그대가 공성에 대해 설명을 훌륭하게 했다 고 칭찬해주시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까? 칭찬하고 증명이 되어주신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스승의 인가를 받은 제자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요? 십지보살은 법운지(法雲地)의 경지이므로 부처님의 법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불가에서 많이 이루어져야 법답게 사 는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수많은 비구 대중과 십지의 동자 등 수많은 보 살마하살이 함께 있었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이 아름다운 모습을 다 같 이 지켜보고 있었던 거예요. 3차원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몸이 있 는 것밖에 안 보이죠. 색신밖에 볼 수 없어요. 그래서 비구대중과 일반 재 가자들밖에 보이지 않지만 부처님 법문의 자리에는 여러 천신과 호법의 신들이 모여 있었어요. 법회에 부처님이 설법하신다고 하면 부처님의 법 을 듣고자 다 찾아왔겠죠. 우리는 안 보이니까 그런 게 어디 있냐고 생각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영산회상도를 보면 부처님을 중심으로 가섭 존 자와 아난 존자, 4대보살, 천신들이 계시잖아요. 그분들이 법회가 열리면 당연히 오시지 않았겠어요?
그러니까 초지에서부터 십지에 이르는 수많은 보살들이 『반야심경』 이 설해지는 자리에 계셨고 비구대중과 건달바, 아수라, 천신 등 수없는 대중들이 모여 계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공양 올리고 기도 할 때도 부처님을 중심으로 만다라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 니다. 부처님을 중심으로 신장, 보살, 비구 등 법회 동참자 모두 계시다 는 것을 인식하고 법회에 동참하고 기도하고 공양 올리면 우리의 신행이 훨씬 여법하고 뜻 깊어지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이 자리에는 삼악도 중생은 없습니다. 어느 경전에도 지옥 중생, 아귀 중생, 축생 중생이 있었다는 내용은 없어요. 설사 그 자리에 축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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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더라도 알아듣지는 못합니다. 지옥과 아귀 중생은 그런 법이 있는지 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회가 끝나면 법회의 공덕과 위의의 광명으 로 삼악도 중생이 건져지기를 발원하는 것입니다. 삼악도 중생에게 회향 하는 거예요.
수행5위의 첫 번째인 자량도에서 십선도를 행하라고 하는 것은 삼악 도에 떨어지지 않기 위함입니다. 삼악도에 떨어지면 부처님법을 만날 기 회도 없기 때문이죠. 지옥은 고통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기간이 너 무 길어서 거기에서 빠져나오기가 너무 어려워요. 아귀도 고통스럽고 시 간이 오래 걸리죠. 축생의 경우에는 한 생의 시간은 짧지만 축생계를 빠 져나올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살생으로 살아가야 하고 선행을 할 수 있 는 기회도 없고 지혜를 갖출 계기가 너무 없어요.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는 업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렵기 때문에 삼악도를 계속 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고 법회 보고 수행한 공덕으로 삼악도의 모든 중생들이 고통을 면하기를 발원하고 회향해야 합니다.
Q 유통분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해 마치시니
관자재보살마하살과 여러 비구에서부터
나아가 세간의 하늘 사람, 아수라, 건달바 등
모든 대중들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다 크게 기뻐하시면서
믿어 받아들이고 받들어 행하였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지만 삼악도 중생들은 그 위의와 공덕은 받아들 일 수 있지만 법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사실은 천상과 수라의 중 생도 법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요. 천상의 중생은 복이 너무 많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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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히 즐거워서 법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수라는 힘이 세고 싸우느라 이 해가 잘 안 돼요. 육도의 중생 가운데 사람이 가장 가르침을 배울 역량 이 됩니다. 인간으로 있을 때가 부처님법을 배우고 실천할 가장 좋은 기 회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관자재보살의 말씀을 들은 대중들은 마음이 어땠을까요? 법문을 들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법문을 듣는 내 마음이 그 법문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법의 내용과 나의 마음이 하나로 일치하여 기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중요하죠. 돈을 추구하는 사람은 돈이 한 다발 떨어지면 순간적으로 좋다는 마음이 확 일어나잖 아요. 법을 희구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갈망하던 진리의 가르침을 접 하면 희열의 마음이 일어나죠. 우리가 스승을 공경하고 땅에 이마를 대 고 지극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릴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법을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장스님이 무려 16년을 생사를 걸고 법을 구하려고 인도에 간 것도 이 좋은 법문을 번역해 국민들에게도 이익이 되도록 하겠다는 마음 아닌 가요? 법에 대한 믿음과 환희심이 없으면 목숨을 걸고 구법순례를 하지 못하죠.
그렇기 때문에 법에 대한 환희심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억 하는 힘도 있어야 해요. 외우고 기억하는 힘이 있어야 평소 혼자서 수행 하다가도 법문을 떠올려 반조하고 되새기면서 수행을 이어갈 수 있죠.
『초발심자경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설법을 들을 때는 마치 살 얼음을 밟고 가듯이 간절히 눈과 귀를 기울여 깊고 깊은 진리의 소리를 들어야 하며, 마음을 가다듬어 그 깊은 이치를 음미하고, 법사가 당에서 내려가면 묵묵히 앉아서 관하되 의심되는 게 있거든 선지식에게 널리 물 을 것이며, 아침저녁으로 생각하고 물어서 털끝만큼이라도 흘려보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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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없어야 한다고 했어요. 공부할 때도 집중하지만 그 내용을 거듭 외 우고 기억하여 생활 속에서 그것을 적용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 고 제가 항상 강조하지만 이해해야 합니다. 구절을 단순히 외우기만 해 서는 일상생활에 적용하고 평소 수행을 이어올 수 없습니다. 내용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결정코 실행해야 합니다. 법문을 듣고 읽고 이해하고 기억하고 외우는 것은 모두 실행하기 위함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이해하고 기억했 다면 실행해야 하죠. 그것이 신수봉행입니다. 잘 받들어 행하는 것입니다.
믿음만 강조하면 미신이 되기 쉽습니다. 불교의 수행은 신해행증(信 解行證)입니다. 믿고 이해하고 실행하여 실제로 자신이 체험하는 거예요. 그래서 불교는 신앙이라고 하지 않고 신행이라고 합니다. 믿고 이해하고 실행하여 스스로 체험하면 그것으로 수행적 이익을 얻습니다. 그래야 경 이 유통되죠.
사람을 모으고 교화할 때 핵심은 법입니다. 사람을 많이 모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라도 법으로 설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 처님의 말씀을 근거로 차근차근 설명하고 스스로 수행한 내용을 가지고 토론하는 것이 법이 유통되는 과정입니다.
Q 모든 경전의 마지막 구절이 신수봉행입니다. 믿고 받아들여 받들어 행하는 것, 우리가 경전을 공부하는 이유이자 경전을 공부한 후 해야 할 일이라고 해야 하겠죠?
『금강경』 유통분에 수지독송(受持讀誦) 서사(書寫) 위타인설(爲他人 說)이라고 설해져 있습니다. 이해하고 받아들여 항상 읽고 외우고 인쇄 하거나 글로 써서 남이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남을 위해 수지독송하고 서사하는 것이 경을 유통시키는 데 있어 중요합니다. 옛날에는 인쇄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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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하지 않았으니까 사경사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대부분 글을 모르니 까 마을에 가서 경을 읽어주는 법사들이 있었어요. 이것이 변해서 판소리 가 된 거예요. 예전에는 그런 방식으로 경을 유통 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깨우치고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을 보다 많 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법보시입니 다. 이제는 디지털 AI시대니까 기술의 변화에 맞춰서 법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기술력은 전 세계적으로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잖아요. 그렇 게 발전한 기술력과 문명의 이기를 부처님 법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써야 합니다. 뒤쳐지면 안 돼요.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절에 가고 법당에 앉아서 오랫동안 듣는 것이 잘 안 되는 세대예요. 젊은 사람들이 부처님 법을 접하고 깊이 공부할 수 있으려면 동영상 매체 등을 잘 활용해야 할 뿐 아니라 젊은 사람들의 언 어와 감각으로 전달해야 합니다.
Q 『반야심경』을 공부할 때 참고할만한 논서는 무엇이 있을까요?
부처님께서 21년간 설법하신 600부 반야부에 『반야심경』의 내용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반야의 핵심을 가장 핵심적으로 드러내신 분이 용수보살입니다. 공성에 관한 용수보살의 가르침을 정리한 것이 『중론』 이고 『중론』을 가장 잘 해석한 것이 월칭보살의 『입중론』입니다. 『반야 심경』의 내용을 가장 잘 설명해놓은 논서이니 참고하면 『반야심경』의 가 르침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Q 『반야심경』에 대한 공부를 마치면서 마지막 당부 말씀 부탁드립니다.
마음을 내서 수행합시다. 그래야 삶의 길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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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5년 2월 7일
발행처 티벳대장경역경원
저자 진옥 텐진 로셀
편집 김소정
출판 송림그라픽스(松林出版社)
전남 여수시 시청서1길 8-8ⅠT. 061-686-5543
ISBN 979-11-93423-08-0 (03220)
ⓒ 진옥 텐진 로셀,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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