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말 스승과 법에 귀의합니다.
저는 행운아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성자의 법을 만났고, 이 시대의 붓 다이신 대보살 달라이 라마 존자님과 동시대에 태어나 만날 수 있었습니 다. 21년 전 인도 다람살라에서 있었던 성자와의 만남은 저를 차원을 달 리하는 불교의 세계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저는 청법을 하였고, 존자님께서는 곧바로 응하여 주셔서 매년 법회가 성스럽게 열렸고 한국 대중 400여 명과 세계 사부대중 6천여 명이 법비 를 맞았습니다.
존자님으로부터 『반야심경』, 『금강경』, 『입중론』, 『입보리행론』, 『보리 도등론』, 『람림』 등의 법문을 들었고, 티베트의 성자 톡메 상뽀 스님이 저술한 『보살 37 수행』을 듣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논은 대승 수행법을 체계적으로 요약 정리하여 후에 제자들에게 수 행의 길을 열어 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내용이 매우 체계적이어서 수행자에게 요긴하고 특히 한국 요가행자들에게 길이 될 것 같아 존자 님께 들은 내용과 한국 불교의 내용들을 첨가하여 대중들에게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 실력이 저자에 미치지 못합니다. 또한 존자님의 뜻과 여래의 법 신에 누가될까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강설한 것을 신도님들이 채록하여 책으로 엮어서 법보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글 자랑이나 이익을 위한 것은 조금도 없으며 오로지 모든 분들의 수행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공덕으로 모든 중생들이 성불하시기를 발원합니다.
2022년 1월
텐진 로셀 진옥 합장
『보살 37수행법』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보살 37수행법』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보살의 명칭에 대해 잠깐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소승 불교 수행자는 비구로서 아라한이 되는 것이 수행의 최종 목적이고, 대승 불 교 수행자는 보살로서 부처가 되는 것이 수행의 최종 목적입니다. 중국 선종에서는 수행자를 조사라 불렀으나 부처님 당시에는 사실 그런 명칭 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비구와 보살이 수행자의 핵심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대승 수행자인 보살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에게 복을 주는 신과 비슷한 존재를 보살이라고 부르고 있 습니다. 이렇게 부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수행해서 보살처럼 된다는 생 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이해입니다. 비구계를 받고 보리심을 내어 대승의 가르침을 수행하면 비구 보살이고, 세속에서 보 살계를 받고 수행하면 재가 보살입니다. 이렇게 나눠서 부르더라도 모 두 보살 수행자입니다. 둘째, 절에 다니는 여성 신도를 보살이라고 하 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 사회에서 보살을 인식하는 통칭이 되어 버렸 습니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대승 불교를 실천하는 한국 불교의 입장에서는 하루 빨리 시정되어야 할 부분이라 생각됩니 다. 재가자를 보살 대신 선남자와 선여인, 우바이와 우바새 등으로 바 꾸어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보살 37수행법』은 겔쌔 울추 톡메 상뽀 뺄(Gyal sras ’ul chu thogs med bzang po dpal, 1295-1369)이라는 스님이 쓰신 글입니다. 이 스 님은 이름이 긴데, 그분의 출가 수행적 삶이 그대로 이름에 드러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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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 우리나라 서산 대사도 말년에 묘향산에서 사셨다 해서 서산이라 는 별호가 붙은 것 같습니다. 활동하신 시기는 겔룩파(dGe lugs pa)가 생기기 이전입니다. 겔룩파를 창시하신 쫑카빠(Tshong kha pa, 1357 1419) 스님보다 조금 일찍 태어나셨습니다. 스님 본명은 꾄촉 상뽀 (dKon mchog bzang po)입니다. 아버지는 꾄촉 뺄(dKon mchog dpal) 이고, 어머니는 붐된(’Bum sgron)입니다. 세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2년 후에 아버지도 돌아가셨습니다. 출가해서 수행자가 되고 보살이 되어 중생을 구제하고자 이 세상에 오는 분들은 대부분 세속 인연이 없는 편입니다. 일찍 부모를 여읜 꾄촉 상뽀를 친척들이 돌봐 주었습니다.
스님은 9살 때 고향을 떠나 쌈링(gSam gling)사원으로 출가하셨습니다. 처음 받은 법명이 뙨빠 린첸 따시(sTon pa rin chen bkra shis)였습니다. 여기서 글자를 읽고 쓰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옛날 티베트에는 학교 가 없었습니다. 사원이 초등 교육 기관이었기 때문에 글자를 배우기 위 해서는 사원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스님은 14살 때 사미계를 받았습 니다. 이때 받은 법명이 상뽀 뺄(bZang po dpal)입니다. 구족계는 30살에 받았습니다.
15살 때에 상뽀 뺄스님은 보동에왐링(Bo dong e wam gling) 대승원 에 들어가서 『아비달마집론』, 『현관장엄론』을 포함한 미륵의 5부 논서, 『중론』 등 용수의 6부 논서 등을 배웠습니다. 이를 통해 대승 불교의 핵심적인 교학을 배웠습니다. 아비달마를 공부하고 시험을 치는데 얼마나 훌륭했는지, 과거 무착(無着) 보살의 화신이라고 여겨 무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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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이름을 따라 ‘톡메 상뽀’라고 불렸고, 보살의 다른 이름인 ‘겔 쌔’덕분에 ‘부처님의 아들’이란 칭호를 얻었습니다.
21살부터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또 한편으로는 싸꺄(Sa skya) 사원에서 법칭의 7부 논리학서를 토대로 논리학에 대한 공부를 이어갔 습니다. 23세에 짱(Tsang)에서 열린 대법석에 참석하여 불교 논리학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대중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32세에 보동에 (Bo dong e)사원의 주지가 되어 9년 동안 주지직을 수행했고, 사임하고는 울취 최종(Ngul chu’i chos rd zong)으로 수행처를 옮겨 린첸 푹(Rin chen phug)이란 동굴에서 여생 동안 오로지 수행에만 집중했습니다.
스님이 남긴 저술로는 적천 보살의 『입보리행론』, 무착 보살의 『집학론』, 미륵 보살의 『장엄경론』, 『보성론』 등 논에 관한 주석서가 있습니다. 『보살 37 수행법』은 보살의 수행에 아주 요긴한 내용을 간략하게 서술 하고 있습니다. 37 게송으로 보살의 수행을 설명하고 있지만 진심으로 보 살행을 실천하는 수행자의 마음이 느껴지는 글입니다. 이런 책들은 보면 볼수록 정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보살 37 수행법』을 읽으면서 그 의미를 기억하고,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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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의
관자재보살께 귀의합니다.
모든 존재가 오고 감이 없음을 보시지만
오로지 뭇 생명을 이롭게 하시는
최고의 스승이고 보호자이신 관세음보살께
항상 몸과 말과 뜻으로 공경하여 절합니다.
일반적으로 귀의라고 하면 삼귀의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 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승님께 귀의합니다.’- 를 가리킵 니다. 하지만 『보살 37 수행법』의 경우에는 보살의 행법에 대한 가르침 을 담고 있기 때문에 자비행의 표상인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는 것입니다. 자비의 표상은 관세음보살이고, 지혜의 표상은 문수보살이고, 지옥에 떨어진 중생을 교화하는 분은 지장보살이고, 큰 행원을 일으켜 교화하 는 분은 보현보살입니다. 『보살 37수행법』은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는 수행에 관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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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모 로께 스바라야’에서 ‘나모’는 ‘귀의한다’는 뜻이고, ‘로께 스바라야’는 ‘세상에 자유자재한’입니다. ‘세상에 자유자재한 분’이 관자재보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자재보살께 귀의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諸法]가 오고 감이 없는 것은 『반야심경』에서 불생불멸 (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感)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고 감이 없음을 보신다는 첫마디가 공성(空性)에 관한 것으로, 존재의 본질이 공성임을 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 면 생사가 없다는 중도의 뜻입니다. ‘나’라는 불변의 자성이 있어야 오고 감이 있을 텐데, ‘나’의 자성이 없기 때문에 오고 감이 없습니다.
인연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물거품처럼 모든 것이 환이기 때문에 오고 감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을 켰을 때 인연 따라 일어났다 사라질 뿐, 성냥불이 원래부터 있었거나 어디에서 와서 불이 붙는 것은 아닙니다. 관세음보살은 공성을 체득함으로써 나와 남의 구분이 없어졌기 때문에 일체중생을 위한 자비행을 펼칠 수 있습니다. 아집을 넘어서지 못하면 무엇을 하더라도 전부 자신을 위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관자재보살은 이미 모든 존재가 오고 감이 없음을 다 확인하시고 오로지 중생만을 위하십니다. 그래서 최고의 스승이자 보호자가 되신 관자재보살님을 거룩하다고 합니다. 나의 스승이신 관자재보살님께 항상 몸과 말과 생각[身口意]의 세 문으로,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합니 다. 법을 모르거나 수행하지 않으면 제대로 절을 할 수 없습니다. 보통 은 몸으로만 절을 하는데 그것은 완벽한 절이 아닙니다. 말로만 ‘절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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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는 것은 입으로만 절하는 것입니다. 생각으로만 절하는 것도 절하 는 것이 아닙니다. ‘절합니다’하면서 절할 때에는 몸의 동작 하나[一門] 만 해서는 안 되고 몸과 말과 생각 세 문으로 절을 해야 합니다. 이마 가 땅에 닿도록 절하는 것이 정례(頂禮)입니다. 마음으로는 일체중생이 자신과 함께 절한다고 관상합니다. 입으로 ‘나모 구루베, 나모 붓다 야, 나모 달마야, 나모 상가야’ 하며 귀의문을 외웁니다. 이와 같이 세 문 으로 절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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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 세
이익과 행복의 근원을 구족하신 부처님도
바른 가르침을 수행한 데서 나오셨으니
그것은 수행을 아는 것에 달려 있기 때문에
보살의 수행에 대해 알아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에게 이익과 행복을 주는 가르침입니다. 이익은 자량 공덕의 이익이고, 행복은 궁극적인 행복입니다. 일시적인 이익은 내생 에 사람의 몸을 얻는 것과 같은 것이고, 궁극적인 행복은 완전한 깨달 음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을 “이익과 행복의 근원” 이 라고 합니다. 부처님을 이익과 행복의 근원인 줄 알고, 부처님의 말씀 을 의지해야 합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키울 때 “우물가에서 놀지 마라.”, “불 앞에서 놀지 마 라.”라고 합니다. 그곳이 위험한 줄 알기 때문입니다. 부모 말을 들으 면 이익과 행복을 얻을 텐데 아이들은 부모 말을 잘 새겨듣지 않습니 다. 그렇듯이 이익과 행복의 근원이신 부처님의 말씀을 중생들은 잘 듣 지 않습니다. 뉴스를 보니까 오늘도 비가 많이 온다고 합니다. 비가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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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는 것은 한반도의 기후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20세 기 100년 동안 지구의 기온이 1.8℃ 상승했는데 최근 20년 동안 1.6℃ 가 올라갔다고 하니 기후 변화가 점점 빨리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 상도 모두 욕망 때문입니다. 욕망을 줄이라는 부처님 법이 행복의 근원 이 되는데도 우리는 욕망을 못 줄이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 로 알고 정견(正見)을 세우면 이익과 행복을 얻습니다.
부처님께서 올바른 가르침을 수행하여 부처가 되셨습니다. 콩을 심어 서 팥을 수확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운명론자, 숙명론자, 창조 주를 믿는 자들은 콩을 심어서 팥을 얻으려 합니다. 『금강경』에서 “모 든 부처님의 보리법이 다 이 경에서 나왔다.”라고 했습니다. 이 가르침 을 수행해서 안락을 찾고 열반을 얻었기 때문에 삼천 대천세계에 칠보 를 가득 쌓아 부처님께 공양을 하는 것보다 이 게송 하나를 잘 이해하 여 남에게 일러 주는 공덕이 훨씬 크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부처님께서 보살행이 중생에게 이롭지 않다고 하셨다면 말할 필요도 없고, 따라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가르침이 모든 중생에게 이익이 됩니다. 보살의 수행법을 알아서 정진하면 안락을 이룰 수 있고, 고통이 사라지는 경계가 오고,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자들이 보살 수행을 하려면 몸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몸에 집착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가진 이 몸이 얼마나 소중 한가를 알라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는 몸을 가진 생명이 60만 종이 있는데, 그 중에 한 종이 사람입니다. 개체 수가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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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않습니다. 개미보다 훨씬 적습니다. 60만 종 가운데 하나인 사람 이 되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중생들이 윤회하는 욕계·색계·무색 계, 보이는 곳과 안 보이는 곳, 천상까지 다 합해 놓고 보아도 사람의 몸을 받아서 수행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천상 세계는 너무 즐 거워서 수행이 안 되고, 수라 세계는 싸우느라 수행이 안 되고, 아귀 세 계는 항상 허기가 채워지지 않아서 수행이 안 되고, 축생 세계는 놀라고 아둔해서 수행이 안 되고, 지옥세계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수행이 안 됩 니다. 인간만이 수행할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인간도 다 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은 얼 마 되지 않습니다. 인연이 맞지 않거나 조건이 안 되거나 선근(善根) 이 약하면 인간의 몸을 가지고도 수행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의 몸을 얻었습니다. 참 신기한 몸입니다. 찬물 을 마시면 찬 줄 알고 더운 걸 먹으면 더운 줄 압니다. 아버지, 어머니 도 알고 자식들도 알고 아이들도 알고 이웃들도 압니다. 사유도 할 수 있고, 반성도 할 줄 압니다. 사실상 엄청난 업에 의해 이 몸이 생긴 것 이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사난득 (四難得)이라 하셨습니다. 첫째, 육도 중생 가운데 사람으로 태어나 기 어렵습니다. 둘째, 사람으로 태어나도 장부가 되기 어렵습니다. 장 부란 출격장부(出格丈夫)라, 여자건 남자건 상관없이 신심이 있어서 세 상 고통으로부터 한번 벗어나 도인이 되겠다는 사람을 말합니다. 셋째, 가르침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넷째, 가르침을 만났다손 치더라도 깨닫 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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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도를 윤회하는 가운데 사람으로 태어났고, 감각 기관을 잘 갖췄고,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그렇게 어렵지 않다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 이상 뭘 더 바라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잡은 이 기 회를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나는 여자라서’, ‘몸이 아파서’, ‘돈 이 없어서’하는 핑계를 대고 신세를 탓한다면 탈출구를 찾지 못하게 됩 니다. 우리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돌다가 나들목으로 나갈 수 있는 기 회를 지금 잡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수행자들이 그 몸을 잃어버릴 때 가 곧 오니까, 언제 잃어버릴지 모르니까, 빨리 수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걸식을 하고 기원정사로 돌아오는 길에 집 짓는 노인을 만났습니다. 부처님께서 보니 노인이 낼 모레 죽을 것 같아서, “어르신, 내 얘기 좀 들어보시오.” 라고 하니까, “부처님! 지금 제가 바빠서 집 다 짓고 들을게요.”라고 했답니다. “그게 아니고,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니 지금 좀 들어보 시오.”라고 해도, 바쁘다면서 집 자랑만 하더랍니다. 부처님께서 기원정 사에서 설법하시다 아난에게 그 노인에게 가 보고 오라고 하시니 죽었다 고 했답니다. 이틀 후 죽을 것도 모르면서 오래 살겠다고 집을 짓는 그 노인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몸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면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생명 연장의 기술이 아무리 발전을 해도 세포 분열이 120년 이상 가지 않아요. 요가를 하는 사람들, 신선도하는 사람들도 결 국에는 죽습니다. 몇 년 더 살지는 몰라도 죽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이 몸을 받았을 때 소중한 가치로 알아 허비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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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워서, 추운 지옥은 추워서 끊임없이 고통을 받습니다. ② 아귀에 떨어지 지 않은 것입니다. 배고픈 귀신인 아귀는 목마름과 배고픔의 고통 때문 에 수행할 수 없습니다. ③ 축생에 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소로 태어 나면 무슨 정신으로 공부하겠습니까? 남에게 평생 부려지다가 결국은 잡아 먹힙니다. 사자로 태어나도 총 맞아 죽기 쉽고, 개미가 되면 밟혀서 죽기 쉽습니다. 이런 몸을 가지고 어떻게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④ 수 명이 긴 하늘에 태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다 해야 좀 급해 지는데 수명이 긴 하늘에 태어나면 하도 오래 살아서 급한 마음을 내지 않아서 수행을 하지 못합니다. ⑤ 변방에 태어나 불법을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해지지 않은 변방에 태어나면 수행할 수 없습니다. 사부대중의 모습을 보고 있어도 수행을 하겠다는 마음을 일 으켜 수행하기 쉽지 않은데, 변방에 태어나 부처님의 형상도 보지 못하 고, 수행자의 모습도 보지 못하고, 부처님의 가르침 한 구절도 접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수행할 마음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⑥ 사람으로 태 어났는데 육체적인 장애가 있으면 수행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요즘에 는 지체 장애인들이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가 잘 갖추 어져서 그나마 낫지만, 그래도 보지 못하거나 듣지 못하는 장애가 있으 면 수행하는 데 여러 가지 제약이 있어 수행하기가 어렵습니다. ⑦ 몸에 장애가 없더라도 잘못된 견해, 즉 사견을 가지지 않은 것입니다. 잘못된 견해를 가지게 되면 올바른 바른 법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불법승 삼 보를 인정하지 않는다든지, 전생과 후생, 인과응보를 인정하지 않는 삿 된 견해를 가지게 되면 수행할 수 없습니다. ⑧ 여덟째는 부처님의 가르 침이 전해지지 않을 때 태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티베트에는 달라이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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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 계시고, 남방에도 훌륭한 수행자들이 계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때 태어난 것만 해도 참 다행입니다. 어디에서 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을 수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상의 여 덟 가지 어려운 곳의 반대가 ‘여덟 가지 기회가 있음’입니다.
열 가지 원만한 조건은 다섯 가지 ‘나’의 원만한 조건과 다섯 가지 ‘남’의 원만한 조건입니다. 다섯 가지 ‘나’의 원만한 조건은 여덟 가지 기회가 있음과 중복되는 부분도 있는데, ① 사람인 것 ② 중앙에 태어 난 것 ③ 감관을 갖춘 것 ④ 극단적인 행위에 떨어지지 않는 것 ⑤ 삼장 을 믿는 것입니다. 다섯 가지 ‘남’의 원만한 조건은 ① 부처님께서 오신 것 ② 올바른 가르침을 설명하신 것 ③ 설명하신 것이 머무는 것 ④ 그 것을 실행하는 것 ⑤ 남을 위해 연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몸을 받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해지고 있는 곳에 태어났습니다. 몸이 온전하여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삿된 견해가 없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 이해할 수 있고, 앉아서 명상할 수 있고, 남을 위해 베풀 수 있습니다. 또 부모 를 죽였거나 스승을 죽였거나 아라한을 죽였거나, 무간지옥에 떨어질 업을 짓지도 않았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사유하고, 수행할 수 있습니다. 윤회하는 과정 속에서 이렇게 소중한 기회와 원만한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이 소중한 가치를 생각하면 잡담하면서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다 허망하게 마감 시간이 다 되면 사람으로 태어난 게 무 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생만 살다 간다면 그렇다 치더라도 다음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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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생을 수없이 살아가야 한다면, 지금 생을 잘 살지 않는데 다음 생을 어떻게 잘 살겠습니까? 뼈가 아프도록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큰 배와 같은 몸을 얻었고 주변의 중요한 조건들이 다 갖춰진 이때, ‘나’와 함께 ‘남’도 태워서 거센 강물을 건너 피안으로 건너갈 생각을 내야 합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나태함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치 문(緇門)』에 옛날 어떤 스님은 밤만 되면 하루가 지나갔다는 것을 알고 다리 뻗고 울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죽음으로 다가 가는 중이지 사는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시계가 있어서 눈 금이 80개라고 합시다. 그 시계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뜨끔뜨끔하지 않 겠습니까?
밤낮으로 나태함에 빠지지 않고 듣고 생각하고 수행하는 것이 보살 의 수행입니다. 자주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듣고, 들은 가르침을 기억 하여 깊이 사유하고, 그렇게 되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달라이 라마는 39세에 공성을 체험했고, 70세 정도에 일체중생을 위한 보리심이 간절하게 일어났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분이 하루도 경전을 보지 않는 날이 없다고 하십니다. 듣고 생각하고 수행하는 것을 거듭 반복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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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게송
고향을 등짐
친한 이에게는 애착의 물결이 출렁이고
적에게는 분노가 불처럼 타오르니
가질 것과 버릴 것을 혼란스러운 어리석음의 고향을
버리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친구에게는 집착을, 적에게는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 니다. 우리들은 진짜로 ‘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나’에 의해 탐욕 이 생깁니다. 내가 있으니 내 것을 만들려고 하고, 자연스럽게 탐욕과 집착이 생깁니다. 탐욕에 맞으면 좋고, 맞지 않으면 싫어 취사선택을 합 니다. 하루 종일 이것은 좋고 저것은 싫다면서 분별심을 일으킵니다. 욕 심에 따라 취사선택을 반복하면서 윤회합니다. 다음 생에 태어날 때 지 금의 부모가 원수가 될 수도 있고, 지금의 자식이 전생에 원수였을 수 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수없이 뒤바뀌는 것이 중생살이입니다. 얼마나 괴로운 일이 많습니까? 자기한테 잘하면 친하게 지내고, 싫어지면 욕하 고 싸웁니다. 모두 자기 때문입니다. 자기 때문에 그런 줄 모르고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속에 살더라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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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인연 따라 일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내 것도 인연에 따라 일어납니 다. 내 것이 될 인연이 없으면 욕심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가질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내가 좋아하 는 내 친구도 적처럼 나를 괴롭힐 수 있습니다. 친구가 좋다는 분별심 도 버려야 합니다. 반대로 적이 친구도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중생을 평등하게 보는 평등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일반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 시비를 걸고 싸워서 얻으려고 합니다. 세 세생생 해 온 그 습관을 보면 어떤 때는 무섭습니다. 취사선택을 할 때 옆에서 누가 말해도 듣지 않습니다. 자기 고집이 솟구쳐 분노가 일면 그 만두라 해도 듣지 않습니다.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보살은 출 가하면 세속을 떠납니다. 세속을 떠나지 않으면 세속에서 취사선택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가족도 떠나야 합니다. 가끔 절집에 속가 가족을 데려다 놓고 절 일을 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바람직한 현상이 아닙니다. 수행자가 되고 난 다음에도 가족에 자꾸 연연하면 진정한 수행자가 되 기 어렵습니다. 친한 사람과 친하지 않은 사람을 떠나 가족과 일체중생 을 평등하게 봐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출가도 아니고 수행도 아닙니다. 불평등심을 버리고 일체중생을 나의 어머니로 생각해야 합니 다. 『화엄경』에서도 “두두물물개오사(頭頭物物皆吾師)”이라 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가 스승 아닌 분이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 람은 나에게 역행하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나에게 순행하는 것으로 나 타나지만, 나의 스승이 아닌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 기 때문에 잘못된 분별심을 일으켜 취사선택하는 캄캄한 어리석음의 고 행을 버리는 것이 보살의 수행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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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게송
외딴 곳을 의지함
세속을 버림으로써 번뇌가 점점 줄어들고
산란함이 없어 선행이 절로 늘어나며
마음이 맑아 가르침에 확신이 생기니
외딴 곳에 머무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원효 스님 말씀처럼 수행자는 산속에 깃드는 게 좋습니다. 『발심수행 장』에 “인수불욕귀산수도(人誰不欲歸山修道)이리요마는 이위부진(而 爲不進)은 애욕소전(愛慾消纏)이라.”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이면 다 산으로 들어가 수행하고 싶어 하지만 세상의 애욕에 얽혀 있기 때문 에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쁜 곳이란 술집, 가게, 정육점, 춤추고 노래하 는 곳 등을 가리킵니다. 욕망을 부추기는 세속을 말합니다.
이런 데서는 도를 닦기 어렵습니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욕망을 부추기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간 혹 한국 절들은 왜 산중에 있냐고 묻습니다. 번잡한 곳을 떠나서 욕망 을 버리고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산에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고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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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에 살아야 시끄러운 마음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고요한 곳에서 비 로소 계정혜 삼학을 기초를 이룰 수 있습니다. 고요한 곳에서는 성냄이 줄고 애착이 줄어듭니다. 시시비비할 일이 없고, 시비를 따지지 않기 때 문입니다. 옛날부터 스님들이 절에 들어가면 공부가 깊어질 때까지 일 정 기간 동안 절 밖으로 못 나가게 했습니다. 절 안에서는 나쁜 일을 할 게 없기 때문에 절에 오래 살다 보면 세속의 땟국이 빠지게 돼 있습니 다. 매일 게으름 피우지 않고 예불하고, 공양하고, 참회하고, 법문을 듣 고, 사마타 수행을 계속 하면 마음을 집중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악행 이 줄어들고 산란한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마음이 맑아지면 ‘이렇게 하 면 되겠다.’하는 확신이 생깁니다. 그래서 적정처(寂靜處) 즉 외딴곳에 머무는 것이 보살의 중요한 수행입니다.
티베트 스님들 경우에는 사원에서 대중 생활을 하다가 일정 기간 동 안 외딴 토굴에서 정진을 합니다. 산속 동굴에서 최소한의 음식을 먹고 수행합니다. 아예 거처를 토굴로 정해서 수행하는 수행자들도 많습니 다. 다람살라에도 산속에 토굴을 짓고 그곳에서 수행하는 수행자들도 많습니다. 이런 토굴을 아란야라고 부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밀라레빠와 같은 수행자도 오랫동안 외딴곳에서 풀만 먹고 수행했습니 다. 쫑카빠께서도 몇 명의 제자들과 함께 외딴곳에서 수행을 했습니다. 본 수행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많은 대중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피해 수행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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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게송
세속적인 일생을 버림
오랫동안 사귄 친구와 헤어지고
애써 모은 재물도 남겨 두고
의식이라는 손님이 몸이라는 숙소를 버리니
세속적인 일생을 버리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출가는 낳아서 길러 준 부모를 떠나 세속의 인연을 끊는 일입니다. 저도 부모님이 19년 동안 길러 주셨지만 출가를 했습니다. 오랫동안 사귄 친구 나 친척들과도 헤어졌습니다. 간혹 어릴적 친구를 만나도 부처님의 가르침 에 대해 말을 하지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가족과 재물을 두고 떠난 사람이 죽을 것이 두려워 절절매면서도 공부할 생각은 하지 않는 사람들에 게 가르침이 아닌 의미 없는 말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행을 하는 손님이 하룻밤 머문 숙소를 미련 없이 떠나는 것처럼, 의 식이 육신을 버리는 것처럼 세속의 삶을 버리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 다. 보살 수행을 할 때는 이 한 생은 안 태어난 것으로 쳐야 합니다. 한 생 안 태어난 걸로 생각하고 죽음 앞에서 의식이 떠나는 것처럼 세속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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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든 인연들을 훌훌 털고 나가 중생을 위해 위법망구(爲法忘軀)하는 모 습을 보여야 합니다.
달라이 라마를 따라 넘어온 티베트 스님들을 보고 그런 걸 느꼈습니다. ‘아! 이분들은 한 생 안 난 셈 치는구나.’ 거기에 있으면 농토도 있고 절도 있고 먹고 사는 건 상관 없겠지만 가르침을 위해 다 버리고 떠나 망명 생활 을 합니다. 난민이라 외국 나갈 때도 난민증을 갖고 나가고 인도로 들어올 때도 비자를 받아야 합니다. 입출국도 어렵지만 인도에서 사는 것도 고생 스럽습니다. 시주로 살아가는데 다들 난민이라서 시주자가 없으니 가난합 니다. 아침 식사로 빵 한 조각에 버터차 한 잔을 마십니다. 토굴에 사는 스 님은, 우리나라 같으면 염소도 안 먹을, 사과 3개를 부처님 앞에 올렸다가 반씩 쪼개서 1주일을 드시면서 공부합니다. 이 생을 안 나온 것처럼, 가르침 을 위해 몸을 잊고 수행을 합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모습입니다. 그런 수행 자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너무 잘 먹고 사는구나 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듭 니다. 그분들은 이런 고생을 감수하고 스승과 법을 따라와서 정진합니다.
한 생마다 안 난 셈치고 수행해야 합니다. 저도 마흔 댓쯤에 그런 생 각을 했습니다. 한 평생 사는 것이 잠깐이지 않습니까? 70년을 살아도, 80년을 살아도 뒤돌아보면 잠깐입니다. 경전에서 비유하는 것처럼 가 파른 폭포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쉴 새 없이 흘러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딴생 각하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만 생각해도 한 평생이 짧은데, 딴생각하 며 살 상황이 아닙니다. 안 난 셈 치고 죽자 살자 수행해야 합니다. 안 난 셈치고 수행하는 것밖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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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게송
나쁜 친구를 버림
나쁜 친구와 사귀면 탐진치의 독이 커지고
듣고, 사유하고, 수습하는 삶이 무너지니
사랑과 연민을 없애기 위해
나쁜 친구를 버리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기초 수행을 하는 요가행자에게 나쁜 친구는 선지식이 아닌 악지식입니 다. 선지식은 번뇌를 끊고, 자비심을 키우고, 지혜를 밝히도록 끊임없이 돕지만 악지식인 나쁜 친구는 그와 반대입니다. 나쁜 친구와 사귈수록 탐욕・성냄・어리석음의 세 가지 독이 점점 커집니다. 세 가지 독을 없애기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사유하고, 수습해야 하는데 이것을 하도 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마군처럼 끊임없이 옆에서 방해합니다. 문사수 수행을 못하면 자비와 연민의 마음을 키울 수 없습니다. 나쁜 친구와 사 귀면 그 친구를 점점 닮아 갑니다.
나쁜 친구를 닮으면 내생에 좋은 세상보다는 나쁜 세상에 태어나기 쉽습니다. 나쁜 친구를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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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을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나쁜 친구를 멀리 해야 합니다. 저도 간 혹 세속 친구나 동창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친구들 중에서 제가 술을 안 마시고 담배 안 피우는 것을 알아주는 친구가 제일 반갑습니 다. 사귀는데 있어 술 마시자고, 노래방 가자고 하는 친구하고는 애초 에 만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아주 먼 세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스님, 세속 생활 하려면 그렇게 해야 됩 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수행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 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사귀면 삼독이 늘어나고, 듣고 생각하고 수 행하는 실천은 줄어듭니다. 그렇게 살다가는 늙어서 몸에 여러 가지 질 병이 생깁니다. 현생에도 내생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듣고 생 각하고 수행하여 사랑과 연민을 키우고 일체중생을 위해 자비심을 내는 것이 보살입니다. 하지만 나쁜 친구는 이런 공덕을 부숴 버립니다. 그러 니 나쁜 친구를 멀리하는 것이 보살의 중요한 수행입니다. 그대로 곁에 두고서 물들면 수행이 되질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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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게송
훌륭한 스승을 의지함
의지하면 잘못이 없고
공덕은 달이 차오르듯 커지는
훌륭한 선지식을 자신의 몸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스승을 의지하면 허물인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줄어듭니다. 듣고 생각하고 수행하는 것과 자비심과 보리심 등은 달이 차오르는 것처럼 점점 원만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스승을 의지해야 합니다. 훌 륭한 스승을 의지할 때에는 자신의 몸보다 스승을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승은 깨달음으로 가는 귀한 가르침을 주시기 때문 입니다.
그 귀한 가르침으로 윤회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른 스승에 의지하면 번뇌가 줄어들고 바른 생각을 하게 되고 나쁜 친구를 떠나 수행을 하게 됩니다. 간혹 스승을 삿되게 이용하려는 사람 들이 있습니다. 이건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스승을 가르침으로만 의지 해야 합니다. 스승이 가르쳐 준 대로, 잘못된 행위를 하나하나 고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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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게 살게 되고, 바르게 살면 그 사람은 한 걸음 한 걸음 행복으로 나 아가게 됩니다. 조그만 허물마저 제거하고 보리심을 일으키면 일체중생 을 위하는 마음이 늘어나 차츰차츰 공덕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참 된 스승을 항상 내 몸보다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더 오래 계시길 원 하고, 더 오래 계시도록 해 드려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스승 귀한 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금을 많이 갖 고 있다고 합시다. 그 금으로 쟁기를 만들었다면 논 두 마지기 갈고 나 면 다 닳아 없어질 겁니다. 스승은 금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 스승 을 가르침을 전하는 존재로만 여겨야지 다른 것을 위해 이용하면 안 됩 니다. 스승에게 가장 큰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제자가 와서 공부하다 가 생긴 의문점을 묻고, 수행하다가 장애되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이렇 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공부하 지 않는 사람입니다. 또 한 부류는 조금 아는 것으로 아는 척만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정중하게 와서 예를 갖추어 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본인에게 이익이 됩니다. 그래야 가르침을 듣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른 스승에 의지하면 허물은 없어지고 공덕은 늘어납니다. 왜냐하 면 바른 스승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행동하기 때문 입니다. 스승을 의지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스승을 공양합니 다. 스승이 필요한 것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공양은 스승의 말 씀을 어기지 않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연적 으로 허물이 없어지고 공덕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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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자신의 몸보다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스승을 언제든지 머 리에 이고 모시겠다고 발원해야 합니다. 관세음보살님은 항상 아미타 부처님을 머리에 모시고 계십니다. 그렇게 수행을 해 나가야 나중에 큰 보살이 됩니다. 조금이라도 아만이 있으면 수행이 안 됩니다. 세속의 무 리들과 자꾸 같이하려는 생각이 남아 있어도 안 됩니다. 발심을 하면서 염리심을 점점 키워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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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게송
세 보배에 귀의함
자신 역시도 윤회의 감옥에 갇혀 있는
세간의 신들이 누구를 구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귀의할 곳은 거짓 없는 세 보배
그들께 귀의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불교에서는 절대적인 창조주가 없다고 했지, 신들이 없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신들 역시 여섯 세상을 윤회하는 중생 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신들도 우리와 똑같은 중생입니다. 천상 세계의 신들은 굉장히 복이 많고 아주 오래 삽니다. 신들의 수명 기준으로 우 리 인간의 수명을 보면 하루살이처럼 보일 겁니다. 우리는 신들이 사는 세상을 유토피아라고 생각하겠지만 신들조차도 모두 윤회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윤회하지 않는 생명체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중생은 다 윤회하면서 생사를 반복하기 때문에 ‘중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 람들은 그 중에 영원성과 절대성을 가진 창조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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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그런 창조자는 없습니다. 천상에서 오래 살긴 하지만 복진타락(福 盡墮落)이라고 하여, 자기의 복이 다 했을 때는 아래 세상으로 떨어집 니다. 그것이 신의 모습입니다. 윤회의 감옥 속에 갇혀 있는 그들에게 구원을 요청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열반경』을 보면 부처님께 서 이 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으시고 마지막 대반열반에 드실 때 신들이 그곳에 다 내려왔다고 합니다. 이제껏 대반열반에 드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보기 위해 신들이 내려 왔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 에 세간의 신들은 우리 불자들이 궁극적으로 귀의할 대상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야 하겠습니까? 의지해야 할 대상은 불법승의 세 보배입니다. 보배는 우리 중생들을 윤회에서 구해 줄 수 있 는 힘이 있습니다. 부처님께는 중생들의 두려움을 없애 줄 수 있는 방 편의 힘이 있습니다. 지혜의 힘이 있습니다. 세간의 신들에게는 이런 힘 이 없습니다. 가르침과 승가 역시 힘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윤 회에서 벗어나는 길을 보여 줍니다. 승가는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무 리들입니다. 거룩한 존재들입니다. 이와 같은 세 보배를 진심으로 의지 하는 것이 귀의입니다. 진심으로 귀의할 때 참된 불자가 되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한다고 귀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삼 보의 공덕을 분명하게 알고서 진심으로 귀의해야 합니다. 이렇게 귀의 할 때 삼귀의는 수행이 됩니다. 공덕이 됩니다. 보통 불자들이 삼귀의를 의식의 일부 즈음으로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매일 일 상생활 속에서 귀의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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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의한다는 것은 귀의하는 대상을 절대자나 창조주처럼 믿고 의지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 한국 불교처럼 기복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귀의해야 합니까? 스승으로서 부처님께 귀의하고, 스승으로서 그 성취자들에게 귀의하고, 또 스승께서 말씀해 주신 해탈의 방법에 따라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삼보에 귀의하는 것입 니다. 불교를 신앙하는 것도 수준 낮게 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가 아닌 신행을 하면서 불교라는 그릇 속에 담는다면 그것은 마치 그릇에 쓰 레기를 담는 격입니다. 진짜 알맹이는 다 버리고 쓰레기나 그릇에 담 아 놓는 식의 불교를 해서는 안 됩니다. 보살 수행자들은 언제나 스승 께 법으로 의지합니다. 현세의 스승들이 도반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그 분들과 같이 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수행해야지, 그 외에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을 잘 아셔야 합니다. 신들도 윤회의 감옥 에 갇혀 있는데 우리에게 어떻게 해탈을 일러줄 수 있겠습니까? 그리 고 마침내 자성의 부처가 법과 승에 귀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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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게송
나쁜 행위를 하지 않음
견디기 어려운 나쁜 세상의 괴로움은
나쁜 행위의 결과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목숨을 버릴지라도
결코 나쁜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보살의 수행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은 나쁜 세상에 떨어질 죄를 짓 지 않는 것입니다. 나쁜 세상은 지옥, 아귀, 축생을 가리킵니다. 윤회계 에서도 깊은 감옥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나쁜 세상에 떨어지면 자 신의 행위를 자각하고 수행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 수 행을 하는 이들은 삼악도의 나쁜 세상에 떨어질 악행을 해서는 안 됩니 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보시는 부처님께서 나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악한 행위의 결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는 것처럼 목련 존자 어머니가 평소에 나쁜 행위를 많이 해 그 인과로 지옥에 태 어났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나쁜 세상이든 좋은 세상 이든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앞서는 법입니다. 그 원인이 우리들의 행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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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주로 살생 때문입니다. 살생을 하거나 큰 잘못 된 행위를 지속적으로 하면 지옥에 태어납니다. 아귀에 떨어지는 것은 욕심때문입니다. 남을 해치면서 돈을 벌고 자기만을 위해 쓰는 사람은 아귀로 태어납니다. 축생은 매우 우매한 짓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본 능적인 욕망만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음 생에 축생이 되 기 쉽습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과보는 그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에 자신의 업을 자 각하기조차 힘듭니다. 당장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생각 자체도 하기 힘들고, 벗어나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우리 눈 앞에 있는 개, 소, 염 소가 ‘내가 선업을 닦아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겠다.’하는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지옥은 고통 때문에, 아귀는 욕망 때문에, 축생은 우매함 때문에 수행을 하겠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 행을 한다면서 나쁜 세상에 떨어질 잘못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 다. 이생에 내가 목숨을 버리더라도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 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말로는 보리심을 일으킨다고 하고, 육바라밀을 닦는다고 하면서 술 먹고, 살생을 하면 나쁜 세상에 떨어집니다. 그건 보살행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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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게송
해탈을 추구함
삼계의 즐거움은 풀잎의 이슬과 같아
순식간에 사라지는 속성을 가졌다.
번뇌가 다하여 다시 일어나지 않는 해탈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삼계란 욕망의 세계, 물질의 세계, 비물질의 세계를 말합니다. 육도윤 회와 같은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세 세계와 여섯 세상을 살면서 즐거 움을 탐닉하는 모습을 실감나게 비유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 이 코끼리에 쫓겨 벌판에서 도망을 가고 있습니다. 가시에 찔리고 옷은 찢겨지고 겁을 먹고 도망가다가 우물을 발견합니다. 우물을 내려다보 니 등나무 줄기가 그 속으로 뻗어 있는 겁니다. 코끼리를 피하려고 그 것을 잡고서 우물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우물 밑바닥에는 독룡 한 마리가 입을 쩌억 벌리고 있습니다. 줄기를 잡은 팔이 아파서 발로 우물 벽을 딛으려 하니 그곳에는 네 마리의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 습니다. 그래서 올라가려고 위를 보니 코끼리가 우물 속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줄 같이 잡고 있는 등나무 줄기를 흰 쥐와 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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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두 마리가 양쪽에서 갉아먹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이마에 끈적한 것이 떨어져서 입안으로 흘러 들어옵니다. 맛을 보니 꿀입니다. 나무 위 벌집에서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단맛을 본 순간 자신이 매달려 있다는 것, 우물 밑에 독룡이 있다는 것, 옆에 뱀이 있다는 것, 위에 코끼리가 내 려다본다는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비유경(譬喻經)』에 나오는 안수정등(岸樹井藤)의 비유 입니다. 코끼리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언제나 죽음은 자신을 쫓아오는 데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기가 힘듭니다. 우물에 들어갔다는 것은 삶 의 관습 속으로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때가 되면 결혼하고, 자식 낳고, 그냥 그렇게 사는 세상의 관습 속으로 숨는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 세 속 살림살이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관습 속으로 들어가도 우물 밑에는 독룡이 한 마리 있어서 언제든지 나락으로 떨어지면 우리를 해칠려고 합니다. 잠시 쉬려고 하면 네 마리 독사가 우물 옆면 돌 틈 사이에 있어 서 지수화풍의 부조화 때문에 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그리고 흰 쥐와 검 은 쥐는 밤낮을 비유합니다. 시간이 우리 명줄을 잡고 있습니다. 흰쥐, 검은 쥐가 갉아먹고 있는 줄은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비유한 것입니다.
우리는 윤회를 하면서 행복을 추구합니다. 맛있는 것도 먹고, 음악 도 듣고, 연극이나 영화도 보고 놀러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천 상의 안락함과 즐거움이 거기에 있다하더라도 그 자체는 순간적인 것 입니다. 한 방울 한 방울 머리 위로 떨어지는 꿀의 단맛을 보면서 순 간순간 고통을 잊는 것에 불과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현실에 눈 을 감아 버립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금강경』에서 “일체유위법(一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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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요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 다.”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유위법은 꿈과 같고, 마술과 같고, 물거품 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풀끝에 맺힌 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은 것 입니다. 유위법이란 인연 따라 생멸하는 법입니다.
세상의 안락함도 유위법입니다. 지옥 같은 곳은 그나마 안락함도 없 이 심한 고통을 오래 받다가 아주 잠깐 그 고통이 사라질 때가 있다고 합니다. 췌장암 환자들의 경우 엄청난 통증을 느낀다고 합니다. 견딜 수 없는 통증에 시달리다 30분 정도 통증이 사라질 때가 있는데 아마 이 와 같은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한 삶을 추구하고 그것이 행복이 라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정말 속고 사는 것입니다. 한순간 아주 잠깐 마술처럼 왔다가 곧바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돈이 수천 억 원이 있더라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우리 도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이러한 삶을 살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보 살의 수행입니다. 힘들게 얻은 이 몸을 그런 것에 투자하고, 죽자 살자 그것만 추구하며 산다면 얼마나 허망한 일입니까?
삼계의 즐거움을 풀잎의 이슬에 비유했습니다. 순간 생겼다가 허망하 게, 진짜 환(幻) 같이 사라집니다. 어릴 때 아버지께서 여름날 아침에 논 한 바퀴 돌고 오시면 바짓단이 다 젖고 고무신에 물이 철벅철벅합니다. 소 꼴을 베려고 나가면, 어른들이 “이슬이 다 걷히거든 가라.”라고 하 셨습니다. 이슬이 풀끝에 맺혀 있을 때 풀을 베면 옷이 다 젖습니다. 하 지만 바람이 불고 해가 뜨면 풀 끝에 맺힌 이슬은 언제 있었느냐는 듯 이 다 사라지고 맙니다. 인생의 즐거움은 풀 끝에 맺힌 이슬과 같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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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런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겪는 고생과 누리고 난 뒤에 오는 고 통을 ‘세락후고(世樂後苦)’라 했습니다. 세상의 즐거움은 뒤에는 반드 시 고통이 따릅니다.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보살의 염리심(厭離心)입니다. 세 상의 얽힘에 염증을 느끼고 거기서 떠나 불변의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얽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것이 보살 입니다. 보살은 지금 잠깐잠깐 누리는 세상의 즐거움이 전부 풀 끝에 맺힌 이슬과 같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서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맹세 합니다. 그리고 삶의 목표를 바꾸어 해탈을 추구합니다. 지금 받은 이 몸의 소중함을 알아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수행합니다. 번뇌가 사라져 서 죽음의 문 앞에서도 즐겁게 갈 수 있는, 일일시호일(一日是好日)이 되어야 보살입니다. 그것을 추구해야 보살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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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게송
보리심을 일으킴
아주 먼 과거부터 나를 사랑하신
어머니들이 고통을 받는다면
나의 즐거움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그러므로 가없는 중생을 구하기 위해
보리심을 내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모든 중생을 다생 겁의 어머니로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윤회했고, 우리가 태어날 때에는 반드시 낳아 준 어머 니가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윤회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낳아 준 어머니가 얼마나 많은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 든 중생이 과거의 ‘나의 어머니’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 다.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니까 자꾸 남으로 보입니다. 일체중생을 어머 니로 생각하는 마음이 분명해지지 않으면 일체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일 으킬 수 없고, 결국에는 보리심을 일으키기 어렵습니다. 일체중생은 오 랜 생 동안 나의 어머니였고, 나의 아버지, 나의 형제, 나의 친구였습니 다. 그렇기 때문에 옷깃만 스쳐도 오백생의 인연이 있다고 하는데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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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할 정도면 육백 생, 칠백 생을 만난 인연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 니까? 그렇기 때문에 인연이 있는 뭇 생명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요즘에는 타인을 어머니로 여기기는 커녕 제 부모도 잘 안 모십니다. 세상이 참 허망해졌습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누구를 만나더라도 ‘아, 나에게 은혜를 베푼 어머니다.’ 하는 생각을 일으키십시오. 만약 이렇게 하지 못하면 보살의 마음인 보리심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일체중생을 어머니로 보면서 가깝고 먼 마음이 없는 평등한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대승 불교는 인류에게 참으로 유용한 가르침입니다. 이 세상에 자신과 인연 있는 사람들이 전생에 자신의 어머니였고 자신의 형 제였고, 그런 그들이 고통을 받아서 힘들어 한다면 지금 내가 즐거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보리심을 내는 것이 보 살의 수행입니다. 보리심은 ‘일체중생을 윤회의 고통에서 구하기 위해 부처님의 깨달음을 성취하겠습니다.’하는 마음입니다. 중생들의 고통 을 보고 자비심을 일으키고 중생들을 구하고자 깨달음을 성취하겠다 는 마음이 보리심입니다. 보리심에는 원하는 마음과 행하는 마음이 있 습니다. 원하는 마음은 말 그대로 발심이고, 행하는 마음은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은 저 어머니들과 아버지들, 저 가 족들을 모두 구제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관상(觀想) 을 할 때, 이마에는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고, 양 어깨에는 관세음보살 님과 대세지보살님을 모시고, 오른손에는 친가의 사람들을, 왼손에는 외가의 사람들을, 허리에는 일반 중생을, 저 아래로는 삼악도 중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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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고서 “갑시다, 갑시다, 어서 갑시다, 저 깨달음의 나라로(gate gate pāragate pārasaṃgate bodhi svāhā)”라고 해야 합니다.
혼자 벌어먹고 사는 일은 누구나 다 합니다. 혼자 벌어먹고 사는 것 이 뭐 그리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평생 돈을 벌어서 무엇을 했습니까? 평생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이런 자각 없이 우리가 어떻게 불교 수행을 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한 중생이라도 건지기 위해서, 자신이 세 세생생 윤회한다고 해도 중생 하나를 구제하기 위해 애를 태우는 것이 보살입니다. 사후의 길을 안내하는 분이 인로왕보살이고 중생의 고통 을 다 관찰하는 분이 관세음보살입니다. 보현보살은 모든 이를 구제하 기 위해서 바로 행동을 하는 분이고, 문수보살은 지혜로 번뇌를 끊어 공성을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분입니다. 본인이 안 할 수 없도 록 옆에서 돕는 이가 보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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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게송
나와 남을 바꿈
모든 괴로움은 나의 즐거움을 원하는 데서 생기고
원만하신 부처님은 남을 이롭게 하는 마음에서 출현하셨다.
그러므로 나의 즐거움과 남의 괴로움을
바르게 바꾸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모든 괴로움은 자신의 욕심에서 생깁니다. ‘나’에게 집착하는 이기심 에서 생긴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 때문에 모든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이 모든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기심으로 자신의 즐거움을 구하는 데 서 괴로움이 생기니까 이기심을 이타심으로 바꾸는 것이 그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이 됩니다. 이것이 대승 불교의 본뜻입니다. 한국 불교도 대 승 불교의 본바탕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매일 읽는 경전에 는 전부 중생을 구하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전부 복을 달라고 하는 수 준입니다. 불교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래도 불교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복을 달라고 하는 것은 그저 본인 만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이지 중생들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본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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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괴로움은 나의 편안함을 위해 욕심을 부리는 데서 생깁니다. 부 처님은 이타심으로 가득한 분입니다. 이기심으로 부처가 되었다는 사람 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보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는 자신만 잘되고 싶어 합니다. 이기심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 다. 어느 종교학자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요즘 한국 불교는 전반적으로 수준이 매우 낮다고 지적했습니다. 저도 동의합니 다. 왜냐하면 우리들 마음속에는 ‘나’만 잘되자고 하는 이기심으로 가 득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불교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 다. 나의 즐거움과 남의 괴로움을 진심으로 바꾸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 니다. 그것을 티베트 말로 똥렌(gtong len) 수행이라고 합니다. 모든 중 생이 다 즐겁기를 원하고,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자신이 다 받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남’의 괴로움과 ‘나’의 즐거움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나의 즐거움은 절대 침해 받기 싫고, 여유가 좀 있으면 조금 도와주겠 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이기적인 마음입니다. 그래서 똥렌 수행이 중요 합니다. 똥렌 수행은 보리심 수행의 결정체입니다. 일체중생의 괴로움 을 내가 대신 다 받겠다는 수행입니다. 그 대표적인 분이 준제 보살, 따 라 보살입니다. 일체중생이 내뿜는 고통의 기운을 다 마셔서 얼굴이 퍼 렇게 된 분이죠. 따라 보살에는 백색 따라, 녹색 따라 두 분이 있는데, 녹색 따라는 중생의 모든 고통을 빨아들여서 자신이 다 받겠다는 관상 을 하는 분이고, 백색 따라는 자신의 밝고 좋은 공덕을 다 나눠 주겠다 는 관상을 하는 분입니다. 이런 보살들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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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지 반성을 하게 됩니다. 남의 괴로움을 대신하려면 항상 자신을 바꿔 야 합니다. ‘내가 빈털털이가 되겠다.’, ‘당신이 겪는 어려움을 내가 다 겪겠다.’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 키기 위해서 십자가를 자신이 대신 짊어지고 가겠다며 죽었습니다. 이렇 게 자신의 즐거움과 타인의 괴로움을 진심으로 바꾸는 것이 보살의 수 행인 똥렌 수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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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게송
빼앗김에 대한 수행
누군가 탐욕에 빠져
내 재산을 전부 빼앗거나 남을 시켜 빼앗게 하더라도
몸과 재물과 삼세의 착한 행위까지도
그에게 되돌려 주겠다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누군가 자신의 재산을 약탈해 가더라도 그 사람을 원망하는 것이 아 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주겠다는 생각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몸과 재물 과 같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힘들게 어렵게 쌓은 삼세의 모든 착한 행위까지도 그 사람에게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세상 에 그럴 사람이 어디 있느냐 하겠지만 다람살라에서는 그런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공산 치하에서 태어나 티베트에서 인도로 넘어온 티베트 아이 가 있었는데 도덕관념도 약하고 불교에 대한 신심도 없었습니다.
인도로 넘어와서 힘들게 살다가 다람살라에서 공부하는 한국 사람의 방에 들어와 컴퓨터를 훔쳐 갔습니다. 그 아이를 잡아야 한다는 여론 이 분분해지자 도둑을 맞은 사람이 큰스님한테 가서 어떻게 했으면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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겠냐고 여쭤보았습니다. 큰스님께서는 “그 아이를 다시 보면 나에게 오 라고 해라. 도둑질 할 것 없이 필요한 것은 내가 다 주겠다고 해라. 그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겠느냐.”라고 하셨답니다.
세간에서는 남의 재물을 빼앗거나 훔치면 당연히 그 대가를 치릅니 다. 손해를 입히면 배상을 하게 하고, 가지고 간 것을 돌려주게 합니다. 그러나 보살은 다릅니다. 보살은 자신이 재물을 잃거나 빼앗기면 전생 에 그와 같은 결과를 낳는 원인을 자신이 저지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전생에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가져가 힘들게 했기 때문에 내 재물 을 가져간 사람에게 내가 가진 다른 것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물질적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수행한 공덕과 같은 소중한 것도 그 사람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이런 가르침 을 들으면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연합니다. 그 러나 보살행의 깊이가 점점 깊어지면 지금 당장은 안 되더라도 점점 그 렇게 됩니다. 보살의 수행을 성취한 모든 분들이 다 그렇게 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그렇게 하셨고 관세음보살님, 문수보살님, 대세지보 살님, 지장보살님도 다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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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게송
원수에 대해 수행하기
나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누군가가 나의 목을 벤다면
연민하는 마음으로 그 죄 값을
내가 대신 받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가둘 수 없는 영혼』이라는 책을 쓴 빨댄 갸쵸(dPal ldan rgya mtsho) 노스님의 이야기입니다. 중국이 1959년에 티베트를 강제 점령 하고 200만의 티베트인이 수감되었습니다. 스님은 감옥에 갇혀 31년 동 안 감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나 달라이 라마를 뵙기 위해 인도로 온 분 입니다. 28세에 수감이 되었다 60세가 다 되어 석방이 되었습니다. 몇 년은 족쇄와 수갑을 찬 채로 지내기도 하고, 강제 노역을 하고, 정신 교 육도 받고, 당신의 스승을 스파이로 지명하라는 압력도 받았습니다. 견 디기 힘든 고문 때문에 같이 들어갔던 20명 중에 19명은 죽고 스님 혼 자 살아남았습니다.
얼마나 고문을 심하게 당하셨느냐 하면, 전자봉을 입에 넣어 스위치 를 켜는 바람에 이가 부러지고 다 빠져버렸습니다. 고통이 심해서 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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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가 깨어나면 스님은 항상 기도했답니다. “저에게 일체중생을 위하 는 보리심을 잃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저들이 나를 고문 하더라도 나로 인해 저들이 지옥에 가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내가 대신 지옥에 가더라 도 저들이 지옥에 가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나는 저들이 지옥에 가는 것 이 세상에서 제일 두렵고, 내가 그래서 보리심을 잃는 것이 가장 두렵습 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들은 아마도 “불교 너무 어려워서 못하 겠다.”라고 하실 겁니다. 이 스님처럼 정말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 에서 보리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신 티베트 스님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에게도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달라이 라마께서도 “중국 사람들이 지 금 잘못 생각하고 있지만 우리의 독립을 위해서 중국이 고통 받는 것은 원치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보살의 모습 아닐까요?
보살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때리더라도, 자신을 죽이더라도 그 사 람들을 용서합니다. 그 사람들이 그런 잘못된 행위를 하는 것은 전생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된 행위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 라 마치 정신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자신의 행위를 조절하지 못하는 것 과 같다고 봅니다. 보살은 이렇게 생각하면 그런 잘못된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연민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습 니다. 연민과 사랑을 일으키면 잘못된 행위를 한 이들이 괴로운 과보를 받지 않도록 기도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한 걸 음 더 나아가 그 사람들의 괴로움을 자신이 대신 받겠다는 마음도 생 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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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게송
비방함에 대해 수행하기
어떤 이가 나를 비방하는 말들을
삼천 대천세계에 퍼뜨리더라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히려 '
그의 선행을 말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누가 나를 비방할 때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입보리행론』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를 비방하는 사람이 있다면
칭찬하더라도 좋아할 것이 무엇인가?
나를 칭찬하는 사람이 있다면
비방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의미가 없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비방해도, 칭찬해도, 좋아할 필요도 없고 싫어할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남이 자신을 칭찬하면 우쭐하고, 남 이 자신을 비방하면 싫어합니다. 그러나 보살은 이 두 경우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특히 비방하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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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마음으로 감쌉니다.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이 적이 아니라 수행을 돕는 친구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은 인욕을 돕는 선지식입니다. 이런 사람이 없으면 우리는 인욕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런 일을 겪습니다. 불사를 할 때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그냥 말한 사람 본인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단지 제가 안타까운 건, 그렇게 험담을 하는 그 사람들의 구업입니다. 저하고는 아 무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보 다도 제가 제일 잘 알지 않습니까?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로 나쁜 소문 을 내며 비방하더라도 그 사람을 나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의 선 행을 말할 수 있는 마음의 용기를 가진 이가 보살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 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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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게송
모함함에 대해 수행하기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떤 이가 나의 잘못을 들춰내어 욕하더라도
그를 스승으로 생각하여
공경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우리는 누가 칭찬하면 좋아하고 욕을 하면 싫어합니다. 그런 행이 일 견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욕을 하는 그 상대를 스승으로 공경할 수 있 어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데바닷타가 얼마나 부처님을 욕하고 힘 들게 했습니까? 욕을 해도 안 되니까 결국에는 갖은 방법으로 부처님 을 해치려고까지 했습니다.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부처님을 해치려고 했 고, 영축산에서 돌을 굴려 부처님 발톱이 깨지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손톱 끝에 코브라 독을 발라 스라바스티에서 부처님을 죽이려고 쫓아 가다가 엎어져서 결국 자기 손톱에 찔려 죽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부처님은 “그는 역행 보살(逆行 菩薩)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참 어려 운 일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데바닷타가 아니면 여래의 인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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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완성되었는지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역행 보살 이라고 한 것입니다.
『법화경』의 「데바닷다품」에서 부처님은 데바닷다가 오랜 겁을 지나 여래가 될 것이라고 수기를 하십니다. 앞서 데바닷다와의 인연을 말씀 하시는데, 어느 생에 데바닷다가 부처님에게 대승법을 가르쳐준 스승이 었답니다. 대승법을 들은 기쁨에 물을 긷고, 밥도 짓고, 과일도 따오고 심지어는 앉으시라고 몸을 의자로 받치면서 천 년 동안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이런 과거 일을 훤히 보시기 때문에 데바닷 다가 이생에 당신을 해치려고 해도 그를 보살이라 부른 것입니다. 부처 님의 인욕은 아만을 벗어난 데서 나온 것이지만 무조건 참는다고 인욕 이 되지는 않습니다. 게송 한 구절을 듣고 바로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초보자들도 이런 마음을 내고 살다 보면 점점 달라집니다. 그 래서 오랜 생을 닦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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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게송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에
대해 수행하기
자식처럼 사랑하며 돌보던 사람이
나를 원수처럼 여기더라도
병든 자식을 대하는 어머니처럼
더욱 가엾게 여기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세상을 살면서 힘든 일이 많습니다. 전에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상담할 게 있다면서 찾아오셨습니다. 할머니는 자식 자랑으로 이야기를 시작했 습니다. 큰 아들은 미국에서 의사를 하고 있고, 둘째가 딸인데 서울에 서 치과 의사를 하고 있고, 셋째인 아들은 화학을 전공하고 어디 공장 에서 부장으로 근무한다면서, 아들딸 자랑을 엄청 하셨어요. 그래서 제 가 “밥은 누가 해서 드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밥은 본인이 해 드신 다고 했습니다. 미국에 사는 아들과 며느리가 밥을 해 줄 수는 없고, 서 울 사는 딸은 시집가서 자기 살림하느라고 부모에게 밥 한 끼 해 줄 수 가 없고, 가까이 사는 아들은 며느리가 마음이 넉넉하지 못해서 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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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해 주고 있었습니다. 삼 남매가 박사 학위를 받도록 뒷바라지를 했 지만 밥을 해 먹기 힘든 처지가 되었는데도 한 자식도 본인을 거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파트에 혼자 살면서 너무 괴롭고 힘들어서 나 혼 자 이럴려고 살았던가 싶고, 아들이 원망스럽고 딸이 원망스럽다고 했 습니다. 2시간 정도 이야기하다가 마지막에 눈물을 흘리면서 아들, 딸 말이라 누구에게도 할 수 없고 스님께 말씀드린다고 하면서 가셨습니 다. 이렇게 보면 우리들에게 큰 고통을 주는 이는 바로 가까운 사람입 니다. 가장 가깝고 이해관계가 깊은 사람일수록 괴로움을 줍니다.
보살이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보살피고 가르쳐서 다 키워 놓은 자식이, 정말 믿고서 같이 했던 사람이 나를 배 신했을 때 참으로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내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데 나에게 그럴 수 있냐고 하겠지만 보살은 그러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인욕을 가르치기 위해서 저러는구나 생각합니다. 그를 미워하지 않고, 나를 떠나더라도 행복하기를 빌어 줍니다. 그 누구에게도 원망과 미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안 된다면 진정한 수행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원수는 절대 나하고 무관한 사 람이 아닙니다. 내가 괴로운 것은 전부 내가 믿고 크게 베풀었던 사람이 실망을 주고 나를 힘들게 만들어서 그렇습니다. 흔히 우리는 그런 사람 들을 배신자라고 하면서 화를 내지만 그들을 용서하고 보듬고, 오히려 그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달라이 라마께서도 중국 사람들을 절대 나쁜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친구가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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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잘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하십니다.
나에게 역행하는 이가 사실은 나를 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 람을 미워하지 말고 나를 위해 역행하는 역할을 맡은 보살이라고 생각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있기 때문에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나에게 거슬리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내 욕심에 부응하지 못 하면 싫어하고. 나를 떠나면 싫어합니다. 그것은 모두 다 아집 때문입니 다. 그래서 보살 수행을 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심을 일 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스스로를 살펴보면 서 ‘아! 내 욕심대로 이 사람들을 끌고 가려고 난리를 쳤구나, 내 욕심 대로 판단을 했구나.’하고 자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깊이 자각하지 못 하고 내 욕심대로 끌고 간다면 누구든 나와 적이 되어 서로 불편한 상 황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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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게송
멸시하는 것에 대해 수행하기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못한 이들이
자만심으로 나를 업신여기더라도
스승처럼 공경하여
자신의 정수리로 떠 받드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나보다 나은 사람이나 나와 비슷한 사람이 나를 욕하면 그것도 기 분이 나쁘지만, 나보다 못한 사람이 나를 업신여기면 어떻겠습니까? 이 런 문제는 절에서 공부를 하는 도반들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세속에서 살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항상 있습니다. 전에 차를 타고 고속도로 를 가는데 크고 좋은 차가 우리 차를 추월해서 지나가니까 씩씩대면서 조그만 차를 가지고 기어코 그 차를 앞질러 버립니다. 우리 일상생활에 이런 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보통 돈이나 학벌로 자신보다 좀 낫다거 나 못하다거나 하잖습니까?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나는 서울 대학 을 나왔는데, 그 자식은 지방 대학밖에 안 나온 놈이 말이야.” 하는 말 입니다. 걸핏하면 자기들끼리 어느 대학은 좋은 대학이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우습게 봅니다. 지적인 능력을 높이는 학력은 중요하지만,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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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 위주로 사회가 돌아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뽑는 데도 학벌 을 기준 삼아 어디 학교를 나오면 뽑고, 그 사람들로 엘리트 그룹이 형 성되고, 그들이 기득권을 다 차지하는 상황이 된다면 이건 정말 잘못된 겁니다. 임진왜란 때 해전을 지휘한 이순신 장군은 8,000명의 부하들을 지휘하면서 능력 있는 사람이면 천민이라도 승진할 수 있도록 했습니 다. 천민들도 승진할 수 있게 만들고 난 다음에 능력별로 사람을 배치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결국 자신의 것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딩크 감독도 지도력이 탁월한 감독이었습 니다. 선수들을 능력으로 선발하고 절대 연줄로 뽑지 않았기 때문에 우 리나라 대표팀이 월드컵 4강까지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공평하게 능력 으로 대우 받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입니다. 이런 건강한 사회에서는 남 을 무시하지 않고, 무시 당하지 않습니다.
잘났다고 남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남이 나를 무시하고, 멸 시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게송에서는 외모나 재산, 사회적 지위가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못한 사람이 나를 무시하고 비방할 때에도 그 사람에게 화를 내지 말고 그 사람을 훌륭한 스승으로 생각하여 존경하 라고 합니다. 만약 상대방이 나를 무시한다고 대적하여 싸우면 상대방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손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비방하고 무시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화를 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을 훌륭 한 스승으로 생각하여 신구의 세 문으로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보살 수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나를 칭찬하는 사람보다 나를 비방하는 사람 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어야 우리의 수행심을 견고하게 유지 할 수 있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우리가 정말로 존경하는 부 처님과 같다고 생각할 때 보살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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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게송
고난에 대해 수행하기
가난하고, 항상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중병에 걸리거나 귀신에게 시달릴지라도
모든 중생의 죄와 괴로움을 내가 다 받아도
움츠러들지 않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만약에 자신이 가난하고 사람들에게 천대받고 지병이 있고 게다가 귀 신에게 시달린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중생의 고통을 자신이 다 받겠다는 마음이 들겠습니까? 이중삼중고를 겪고 있다면, ‘가난하고 병들고 힘든데 누구를 위하겠느냐.’ 하며 자포자기를 하게 됩니다. 그러 나 힘든 고통을 겪고 있다 하더라도 움츠러들지 않는 것이 보살의 수행 입니다.
다람살라에 계시는 네충 스님께서 한국에 오셨을 때, 암으로 돌아가 시려는 한 스님을 병문안했습니다. 그분은 암에 걸려 있으면서도 자기 가 죽을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진옥 스님, 내가 병이 나 으면 진옥 스님 절에 한번 갈게요.”라고 했습니다. 네충 스님께서 그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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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에게 “내가 죽음 앞에 이르러서도, 일체중생이 모두 죽음의 괴로움을 겪을 텐데, 내 죽음의 결과로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의 고통이 사라지기 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만약에 극복할 수 없는 병에 걸렸다면 ‘아! 세상 사람들은 이런 병에 걸려 굉장히 힘들겠 구나. 나와 같은 병에 걸린 모든 사람들이 이런 고통으로부터 멀어졌으 면 좋겠다. 내가 그 고통을 대신 다 받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몸이 건강하고 모든 상황이 좋을 때에는 수행하는 마음도 바르게 일 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궁핍해지고, 사람들에게 무시당 하고, 여러 가지 병마에 시달리고, 마군의 장난에 휘둘려 고통 받을 때 에는 자칫하면 수행하는 마음을 잃기 쉽습니다. 평상시에는 견고한 보 리심을 일으키려고 노력하던 사람도 불치의 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이 되었을 때에는 견고한 마음이 동요하기 쉽습니다. 힘든 일이 생길 경우 에도 ‘지금 이 힘든 일은 전생에 내가 행한 잘못된 행위의 결과로 이번 생에 받는다.’고 생각하고서 회피하기보다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 야 합니다. 언제가는 받아야 한다면 지금 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번 받으면 더 이상 받을 것이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 다. 절대로 움츠려들지 말고 더 견고한 보리심을 키우는 것이 보살의 수 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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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게송
명리를 헛것으로 보는 수행
명성을 얻고, 많은 사람들이 공경하고
다문천왕과 같은 재물을 얻었더라도
세속의 부귀영화 모두를 헛것으로 보아서
잘난 체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큰 명예를 얻어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람들 보고, 큰 부를 얻 은 사람을 보더라도 모두 환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천왕 중에서 다 문천왕이 재산이 제일 많은데, 창고에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이 하나도 없 다고 합니다. 재산이 많거나 명예를 얻은 이를 보면 사람들은 “대단하 십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라고 하며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할 겁니 다. 그렇지만 수행하는 보살은 모두 환으로 또는 헛것이라 봅니다.
또는 명예나 재산을 모았더라도 그 상을 내면 수행자라고 할 수 없 습니다. “내가 돈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데”, “우리 절이 큰데”, “우리 가 신도가 얼마고 재산이 얼만데” 하는 이런 말을 한다면 매우 위험합 니다. 그것은 자신을 일으켜 세우기 때문입니다. 명예나 재산은 번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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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고, 아침 이슬과 같고, 마술과 같아 금방 사라지고 맙니다. 덧없는 줄 뼈저리게 알아서 조금이라도 교만한 마음을 내서는 안 됩니다.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달라이 라마께서 말씀 하시는 것처럼 “학식이 높다거나 재산이 많거나 명예가 높더라도 전부 다 중생을 더 복되게 하는 데 쓸 일”이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조금 도 써서는 안 됩니다. 돈과 명예를 얻으면 좋아하고, 남보다 뛰어나다 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오히려 자신을 천박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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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게송
성냄에 대해 수행하기
내 안의 성냄이라는 적을 다스리지 못하면
바깥의 적을 물리치더라도 늘어만 간다.
사랑과 연민의 군대로
자신을 길들이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보살의 마음속에는 군대가 있습니다. 자신을 보호하고 일체중생을 보 호하는 강력한 군대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연민의 군대인 자비심 입니다. 이 자비심이 성냄의 불을 끄기 때문입니다. 바깥에 있는 적은 형 체가 있어서 맞서 싸울 수 있지만 내면에 있는 성냄이라는 적은 형체가 없어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고, 언제 공격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 문에 바깥의 적을 물리쳐 없앴더라도 내면의 성냄을 없애지 못하면 적 은 여전히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의 수행을 하는 사 람들은 철저하게 자기를 관찰하여 마음 안에 있는 성냄이라는 적을 없 애야 합니다. 성냄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더 이상 보살이 아닙니다. 그래 서 자비심의 군대로 자신의 성냄을 굴복시키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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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도 인욕수행이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금강경』에 가리왕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리왕은 분노를 잘 일으키는 자, 극악무도한 자라 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전생에 보살로서 인욕을 닦을 때 가리왕에게 할절신체(割截身體) 즉 몸 마디마디를 토막 내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때 인욕을 실천하는 보살은 피를 흘리면서도 가리왕을 향해 조금의 분노심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내가 그때 아 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다면 응생진한(應生嗔恨), 분노를 일으 키고 한을 품었을 테지만 그때 나는 어떤 상도 없었다.”라고 하셨습니 다. 만약에 조그만 분노심이라도 일어났다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 상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인욕행을 완성시킨 보살이라고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욕바라밀은 결코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한두 생에 완 성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화는 나에게 가장 큰 적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는 것과 똑같습니다. 화를 내면 몸 안에 있는 모 든 장기에 문제가 생깁니다. 혈압이 높아지고, 몸을 파괴하는 염증 물 질들이 나오고, 중추 신경이 흥분하고, 몸의 여러 곳이 긴장을 합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분노를 자주 일으키는 사람은 암에 걸릴 가능성 도 높습니다. 결국 분노는 자기를 죽이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분노심 을 없애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분노를 일으키는 것은 습관입니다. 이 기심이 일으키는 습관이고, 그럴수록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티베트는 중국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침략자와 그 후손인 마오쩌둥, 시진핑, 덩샤오핑 이런 사람들은 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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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에 차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라를 잃은 달라 이 라마 존자님은 항상 웃고 계십니다. 그 사람들은 바깥의 적을 무찌 르는데 집중하여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안의 성냄과 같은 적을 없애지 못했습니다. 달라이 라마 존자님의 경우 에는 안의 성냄과 치른 전쟁에서 승리한 분입니다. 마음속의 분노를 게 송에서 ‘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분노는 삼독의 하나로, 탐진치 삼독 은 모든 사람에게 적이 됩니다. 지옥의 사자가 와서 나를 고통스럽게 하겠습니까? 아니면 창조주가 나를 고통에 빠뜨리겠습니까? 고통에 빠 뜨리는 것은 바로 나의 탐진치입니다. 이것을 없애지 않는다면 보살행 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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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게송
애착의 대상을 수행하기
욕망은 소금물과 같아
마실수록 갈애만 늘어가니
애착을 일으키는 사물들을
즉시 버리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바다에서 조난당했을 때 제일 큰 문제는 마실 물을 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닷물은 소금물이기 때문에 마시면 몸에서 소금을 배출하 기 위해 더 갈증을 일으킵니다. 욕망은 소금물과 같아서 즐기면 즐길수 록 더 강한 자극을 부릅니다. 돈 1억이 있는 사람은 2억을 갖고 싶고, 2 억 있는 사람은 10억을 갖고 싶고, 10억 가진 사람은 100억을 갖고 싶 어 합니다. 100억을 가진 사람도 항상 돈이 없다고 합니다. 거지나 100 억 가진 사람이나 돈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심리적으로는 똑같은 거지들입니다.
이솝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슴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 다. 이 사슴에게는 고민거리와 자랑거리가 있었습니다. 자랑거리는 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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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습니다. 뿔이 크게 솟아오를수록 힘이 세져서 뽐을 내고 다녔습니 다. 고민거리는 가장 보기 싫은 가느다란 다리였습니다. 그래서 맨날 뿔 을 좋아하고 다리를 미워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사냥꾼에게 쫓기 게 되었습니다. 죽도록 도망을 가고 나서 한숨 돌리고 보니까 뿔은 나 뭇가지에 걸려서 다 빠져 버리고, 다리가 자신을 살렸습니다. 명예욕이 든, 물욕이든 우리가 즐기고자 하는 욕망은 결국 사슴뿔과 같은 것입 니다.
보살은 명예에 관심이 없고, 돈이 많은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편한 생활을 누리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돈이든, 명예든, 사람이든, 어디든 집착합니다. 자신이 집착하는 것들을 살펴보면 자신의 욕망이 거기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착이 가는 것을 보는 순 간, 그것의 허망함을 보아야 합니다. 모두 인연 따라 사라질 것들인데, 허망하게 나를 옭아맨다고 생각하고 끊어야 합니다. 끊지 못하면 보살 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집착이 가는 대상들을 버리지 못하 면 결국은 그 대상에 구속되어 꼼짝달싹 못하고 거기에서 무너지게 됩 니다. 아무리 물이 먹고 싶어도 바다의 짠물을 마시면 오히려 물을 안 먹는 것보다 더 빨리 죽습니다. 매 순간 집착을 살펴보면서 끊어 나가 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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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게송
희론을 떠남을 수행하기
나타나는 현상은 자신의 마음이고
마음은 본래 희론의 극단을 떠난 것이니
이를 알고서 주객의 구별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다고 하여 일체유심조(一切 唯心造)라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 펼쳐진 삼라만상은 모두 마음이 만 들어낸 것입니다. 마음 밖에 별도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 다. 그렇기 때문에 바깥에 있는 사물에 집착하고 끌려 다닐 필요가 없 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안의 마음도 어떤 자성도 없습니다. 마음이 영 원한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마음은 생각을 일으키고, 생각을 지우고, 생각을 정리하여 어떤 철학들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이나 철학을 불교에서는 희론(戱論)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색(色)이다’, ‘공(空)이다’ 하는 희론을 일으키고, 희론을 바탕으로 이 런저런 망상과 갖은 법칙들을 전개합니다. 그러나 ‘마음’도 자성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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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본래 공성이기 때문에 다 희론의 경계를 벗어나 있습니다. 이렇다 저렇다 할 철학적 생각들 자체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희론이란 모든 철학적 사조를 말하는데 마음에서 비롯된 다양한 형상일 뿐입니 다. 절대자가 있다거나 없다는 주장, 유물론과 관념론, 성선설과 성악설 등은 마음에서 일으킨 생각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철 학적 사조를 볼 때, 그저 어떤 사람이 일으킨 희론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철학적 사조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한 적이 없습니다. 자본주의가 먹는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지만 지금도 지구의 반이 굶 어 죽어 가고 있습니다. 무슨 무슨 주의나 철학적 사조라고 하는 것은 전부 마음이 일으킨 하나의 관념에 불과합니다.
희론에 속하는 종교나 철학은 실제 인간의 고통을 본질적으로 파악 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을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고, 그런 다음 어떻게 해야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행복해질 수 있는가를 확인해서 실제 그렇 게 되도록 해야 진정한 가르침인데, 그렇게 한 적이 없습니다. 근대에 들 어 종교는 과학과의 싸움에서 졌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앞에서 종교는 더욱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얼마나 오래 가 겠습니까? 미국의 자본주의가 얼마나 오래 갈 것 같습니까? 한국의 자 본주의는 얼마나 오래 갈 것 같습니까? 과학의 발달과 자본주의를 통 해서 인류가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게 뭐가 있습니까? 부분적으로는 있 습니다. 의학의 발달로 병이 낫는다든지, 몇 년 더 살게 됐다든지, 이런 것들은 가능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근원적 행복, 니르바나가 완성 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러한 주의, 주장들을 모두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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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일어난 망상일 뿐이고 희론일 뿐이라며 경계한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처방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만약에 술을 먹어서 속이 불편하 고 고통스러우면 부처님께서는 매우 간단하게 “술을 먹지 마라.”라는 가 르침을 내립니다. 술을 끊음으로 인해서 고통스러운 상태를 벗어나게 하 는 것입니다.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대상들, 대표적인 법집의 대상을 꼽자면 창조 주 브라흐만 신이 있습니다. 영원한 나, 아트만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우주 전체를 놓고 일으킨 거대한 망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산 에는 산신, 물에는 용왕, 부엌에는 조왕신, 숲속에 정령 등등. 산신이고 용왕이고 모두 사람들이 지어낸 생각일 뿐입니다. 생각은 신들이 지어 내 놓고 거기에 매달리는 이중적 행동을 보입니다. 다 자기 착각 속에 빠져 살고 있는 것입니다. 꿈도 대다수가 자가발전입니다. 자기 뇌에서 일어난 영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하고 이 것들이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다양한 영상일 뿐임을 알아서 객관의 대상들을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신이 있다 해도, 있든지 말든지 마음 에 그런 관념을 짓지 않습니다. 자기가 일으킨 마음에 자기가 속아서는 절대 안 됩니다. 자기 최면일 뿐입니다. 보살은 자기가 만들어 낸 관념 에 속지 않습니다. 객관 대상이 실제로 있다고 착각하지 않고, 따라서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마음에 두지 않고 전부 털어 버립니다. 그래서 상 대적 존재의 현상을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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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게송
애착의 대상에 대한 수행
아름다운 대상을 만나면
여름날 무지개처럼 아름답더라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고
집착을 버리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잘 생겼더라도 엑스레 이로 찍어 놓으면 아름답겠습니까? 여러분이 예전에 좋아했던 사람의 뼈를 한 조각씩 주면서 집에다 두라고 하면 할 수 있겠습니까? 화장해 서 뼈만 남았으면 좀 낫겠지만, 아직 덜 부패한 시신이면 얼마나 끔찍하 겠습니까? 냄새는 또 얼마나 지독하겠습니까?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몸의 아홉 구멍에서 오물이 흘러나오고, 하루만 목욕을 안 하면 몸에서 냄새가 납니다. 그러다 죽으면 콧구멍, 입 등을 막고 불에다 집어 넣습니다. 여기에 아름다움이 있습니까? 다 허상에 속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실체도 없거 니와 그 자체도 아름다울 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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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을 “무지개처럼 아름답다.”라고 하는 것은 중생심에서 하 는 소리입니다. 아름다운 것이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산에 가면 예쁜 버 섯은 전부 독버섯입니다. 잘 생긴 사람도 독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 다. 그 사람의 몸이 썩어 없어져 뼈만 남아 길바닥에서 굴러다닌다고 생 각해 보십시오. 눈이 파이고 거기에 벌레가 기어 다닌다고 상상해 보십 시오. “예쁘다.” 하고 데려 갈 사람이 있겠습니까? 만약 사람들 눈이 엑 스선으로 되어 있다면, 사람들이 전부 다 뼈들로만 보일 것이 아닙니 까? 사람을 볼 때 투시하듯 해골바가지로 봐야 합니다. 소장은 밥주머 니, 대장은 똥주머니, 신장은 오줌주머니로 생각해 봅시다. 해골바가지, 오줌주머니, 똥주머니를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할 건 없지 않습니까? 해 골이 된 마당에 머리를 파마하고 드라이할 필요도 없잖습니까? 고운 사람을 보아도 해골인 줄 알면 집착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집착 을 버리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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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게송
성냄의 대상이 실체가 없음을 수행하기
꿈속에서 자식이 죽는 것처럼
여러 가지 괴로움을 진실로 여겨 계속 지치니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할 때마다
헛것으로 보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모든 것은 헛것[幻]입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괴로운 것이든 즐 거운 것이든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든 것은 변하는,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실재하는 것이 없습니다. 고통을 당할 때도 변하지 않는 괴로움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원인이 있고, 조건이 있고, 원인과 조건에 따라 결과가 생길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인이 바뀌거나 조건이 바뀌면 그 결과도 바뀝니다. 괴로움뿐만 아니라 이 세상 전체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 라 모두 꿈같이 지나가는 것일 뿐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닥쳐온 괴로움이 실재하는 것이고, 영원한 것이고, 바뀔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괴로움 을 극복할 생각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괴 로움 자체도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는 변합니다. 모두가 변하는 환영 같은 것임을 잘 관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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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살아온 것만 보더라도 꿈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냥 지나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도 꿈과 같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실체가 없기 때 문에 그런 겁니다. 여러분이 괴로움을 겪고 있을 때에 꿈이고, 실재하지 않는다고 깊이 관찰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꿈속에서 자식이 죽은 것에 비유했는데, 꿈속에서 자식이 죽으면 꿈에서는 괴롭고 힘들겠지만 그러 나 꿈을 깨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면한 힘 든 일들을 꿈처럼 보지 못해서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절 망에 빠집니다. 국가적인 일이나 개인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부처님도 제행무상(諸 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를 말씀하셨듯이 모든 것은 다 변하고 모든 것은 다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괴로움과 즐거움이 모두 환 과 같다고 볼 수 있으면 번뇌가 사라집니다. 번뇌가 꺼진 상태가 니르 바나입니다. 그러나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실체가 있다고 착각하고 그 착각을 계속 반복한다면 진짜처럼 괴로움이 다가와서 괴롭게 됩니다. 반면에 꿈과 같은 것임을 알면 일생이 꿈과 같이 지나갑니다. 걸인이 됐 든, 부자가 됐든 지나고 보면 다 꿈입니다. 아무리 잘 생기고 아무리 한 세상 거들먹거리고 살았다손 치더라도 꿈일 뿐입니다.
보살은 항상 수많은 괴로움이 닥쳐오더라도 꿈과 같은 것이라고 관 찰합니다. 고통은 지나갈 것이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고통을 당할 때도 적용되지만 즐거움을 만날 때도 적용됩니다. 다 른 일들도 모두 다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돌아가시기 직전인 분들을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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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나 봤는데, 한결같이 하시는 말씀이, 꿈 같이 지나갔다고 합니다. 현실적으로 눈앞에 벌어진 것은 굉장히 힘들고 뭔가가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꿈 같은 것이라고 보살은 관찰합니다. 꿈속에서 아들이 죽었 다고 많이 울었겠지만 깨어 보면 전혀 울 일이 아닙니다. 그건 꿈이었습 니다. 보살은 일체를 이렇게 관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꿈인 줄 알지 못하고 항상 실재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즐거움이 오면 지속 되기를 바라고 괴로움이 오면 빨리 끝나기를 바라지만, 그것도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는 유위법이기 때문에 시간이 길어지기도 하고 짧 아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의 길고 짧음도 역시 실재가 아니고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입니다. 보살이 수행할 때는 이렇게 관찰합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고 여로역여전(如 露亦如電)이라고. 유위법은 생주이멸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생겨났 다가 잠시 머물다가 변하고 사라집니다. 보살은 허망하게 지나가는 것 을 항상 관찰합니다. 모든 것이 환과 같고 그림자 같고 물거품 같다고 볼 수 있어야 보살이 됩니다.
항상 모든 것을 꿈처럼 환처럼 보아야 합니다. 『금강경』 끝머리에 비 유를 해놨어요. 모든 유위법은 꿈 같고, 물거품 같고, 풀끝의 이슬 같고 번갯불 같으니, 이렇게 살피라고 합니다. 그 어디에 실체가 있습니까? 그래서 괴로운 일이 닥쳐왔을 때도 절대 거기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영 화 한 편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쁨과 괴로움의 상관없이 얼 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것들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나’ 라는 존재는 꿈과 같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도 꿈속에서 살겠다고 우긴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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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 속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의 온탕, 냉탕을 반복할 것입니다. 착각을 깨지 않고서는 ‘괴로움이다, 즐거움이다’ 하는 것에서 벗어나지를 못합 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집착하고, 자신 앞에 서 사라지면 괴로워합니다. 이게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도를 닦는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꿈 깨라는 이야기입니다. 헛것을 찾지 말고, 어떤 것 도 붙들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것이든 집착하면 허상에 떨어집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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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를 수행하기
깨달음을 위해 몸까지도 버려야 한다면
바깥 사물들은 말할 필요가 없으니
보답과 과보를 바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깨달음을 위해서는 몸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순치 황제 의 “百年三萬六千日 不及僧家半日閑” 게송을 좋아합니다. 삼만 육천 일이란 우리 일평생을 말합니다. 세속에서 백 년을 사는 것이 절에 들어 와서 깨닫고 반나절 사는 것만도 못하다는 겁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아침에 도를 알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합니다. 번뇌가 끊어진 상태에서 잠시만이라도 그것을 느껴 볼 수 있다면, 그 경계가 왔다면, 자신이 속지 않고 산다면,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그렇게 된 상태를 도(道)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여러 가 지에 얽혀서 살아갑니다. 몸이나 사물을 실재로 착각하고 집착해서 거 기에 매이게 됩니다. 『반야심경』에서 오온개공(五蘊皆空) 이라고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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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도 여전히 우리는 이 몸뚱이를 ‘나’라고 착각합니다. 인연 따라 갈 것 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몸이 영원한 것이나 되는 양 생각합니다. 그래 서 가족들과 재산에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자식이나 재산이 사라지면 자신이 사라진 것처럼 괴로워합니다.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아는 공성은 영원히 실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체험하라는 말입니다. ‘나’라는 것도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으 로 이루어진 것이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야심경』에서도 오온이 모두 공하다고 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대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 히 나와 같이 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식이, 몸뚱 이가 영원히 같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이나 권력이 영원히 같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 인연 따라 잠시 왔다 인연 따라 사라질 것들입니다. 이 점을 뼛속 깊이 새기지 않으면 착각 속에서 살게 됩니다. 착각하면 본인만 괴롭습니다. 내 자식이 죽거나, 나를 배신하거나, 나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잘 알아야 합 니다.
보답과 과보를 바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우리 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줄 때, 나도 실체가 없고 대상도 실체가 없다 고 생각해 봅시다. 내가 없는데 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대상도 실체가 아니라면 받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의 실체가 없는데 오간 물건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 가지는 인연 따라서 움직일 뿐입니다. 인간은 굉장히 똑똑한 것 같으면서도 어리석습니다. ‘내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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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생각 때문에 준 내가 있고, 내 것이 있기 때문에 내 것을 주었고, 내가 있기에 또 남이 있고, 남이 있기에 받은 그가 있고, 내가 남에게 주 었기 때문에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빚으로 주고 빚을 받는 관계가 되고, 생사를 걸고 뺏고 뺏기는 관계가 되기도 합니다. 저는 지 금의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더욱 이런 관계로 몰아넣는다고 봅니다. 자 본주의는 개인의 욕망을 부추깁니다. 개인을 강조하다 보니 너와 나의 구별이 분명해지고, 네 것과 내 것 사이에 경계가 분명합니다. 빈부 격차 가 생겨서 개인 간에 도둑질이 일어나고, 뺏기 위해서 나라 간에 전쟁이 반복됩니다. 이것이 전부 ‘나’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불교를 제대로 수행하는 곳에서는 도둑질이나 강도질, 뺏고 뺏기는 관계나 빈 부 격차가 적습니다. 보살은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생긴 것이라 영원한 ‘나’가 없음을 압니다. ‘나’가 없기에 나의 것을 만들어야 할 필요도 없 고 지켜야 할 필요도 없고 싸워야 할 필요도 없고 주고 보상받아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게 보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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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게송
지계를 수행하기
계를 지키지 않아 자신의 이익도 이루지 못하는데
남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즐거움을 바라지 않고
계를 지키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보살행을 할 때 많은 장애가 일어납니다. 장애가 일어나는 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계율을 지키지 않아서이고, 다른 하나 는 공성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성에 대한 이해가 깊으 면 모든 것에 장애가 없어서 죽음에서도 자유롭습니다.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장애가 계속 일어납니다. 거짓말을 하면 남이 내 말을 믿지 않 고, 남의 물건을 훔치면 베풀려고 해도 베풀 수 있는 것이 없어집니다. 살생을 하면 누구든지 나를 죽이려고 대들 뿐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 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개미 한 마리도 내 삶에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계율을 지키지 않은 데서 생기는 인과입니다. 그래서 보살 은 계율을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도 재가자로서 오계(五戒)를 꼭 지키셔야 합니다.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아무리 염불을 해도 장애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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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지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장애는 계율을 지키지 않는 데서 오는 겁니 다. 도둑질을 하는 사람의 말을 누가 신뢰하고, 누가 그 사람이 하는 일 을 도와주겠습니까? 누가 이런 말을 말했습니다. “나는 이생에 도둑질 을 한 적도 없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아마 전생에 도둑질을 했을 겁니다. 그래서 장애가 계속 생기는 것일 겁니다. 비구, 비구니도 계를 받고서 철저하게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계를 지키는 것이 일상이 되고 그것이 여러 중생에게 이익이 되면, 도와 달라고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 돕습니다.
자신이 계를 지키지 않고 남을 도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본인이 구덩이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건질 수 있겠습니까? 먼저 본인이 구덩이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같이 빠져 있으면 남을 어떻게 건지겠습니까? 예를 들어, 자신이 타인을 구제하기 위해 술을 같이 먹 는다면, 구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같이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말 겁니 다. 보살들은 전부 본인이 계를 지키면서 타인을 구제합니다. 이것은 마 치 배와 같습니다. 자기 배에 물이 새지 않아야 다른 사람들을 건질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새는 배로 어떻게 다른 사람을 구하겠습니까? 보 살은 보살계를 받아야 합니다. 재가자들은 오계를 받고 보살계를 받아 야 하며, 출가자들은 비구계·비구니계를 받고 보살계를 받아야 합니 다. 받은 계는 어기지 말고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 사람도 구제할 힘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들도 따라오지 않습니다. 살생한 사 람을, 도둑질 한 사람을, 술 먹는 사람을 누가 따르겠습니까? 유교에서 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했습니다. 자기 몸을 닦는다는 것은 지혜와 도덕을 갖추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자타 를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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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게송
인욕을 수행하기
착한 것을 쌓으려는 보살에게
욕됨이 오는 것은 귀한 보물과 같아서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인욕을 닦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보살이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것이 역행이라는 대상입니다. 보살이 인 욕을 닦을 때 역행을 하는 상대가 없으면 수행이 되지 않습니다. 보통 소인배들은 역행하는 사람을 자신의 적으로 간주합니다. 예를 들어, 보 살이 보시를 하려는데 가난한 사람이 자신 앞에 없다면 어떻게 베풀 수 있겠습니까? 주변에 부자만 많으면 보시할 대상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 다. 인욕을 하려는 데 자신에게 욕보이는 사람이 없다면 어디에서 참는 힘이 생기겠습니까? 보살이 태어날 곳은 잘 먹고 잘 사는 곳이 아닙니다.
보살의 수행처는 편안하지 않은 곳입니다. 열악하고 힘들고 자신을 욕보이는 어려운 일들이 있는 곳이 보살의 수행처가 되는 겁니다. 지장 보살은 항상 지옥에 계십니다. 관세음보살은 항상 중생이 지옥, 아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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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생 삼악도에 빠지지 않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아름 다운 곳에서 깨끗하게 발을 씻고, 부드러운 옷을 입고, 편안하게 책이 나 읽고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보살이 아 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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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게송
정진을 수행하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성문과 독각마저도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정진하는데
모든 중생을 위해 공덕의 근원이 되는
정진에 애쓰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성문이나 독각들도 정진할 때는 생사를 걸어 놓고 합니다. 그런데 한 국에서 정진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급한 마음이 없습니다. 경을 읽어도 띄엄띄엄, 잊어버릴 만하면 읽고 생각나면 한번 보고, 참선을 해도 적당 하게 하루에 한 시간 앉아 보는 정도입니다. 절하는 사람도 만 번 하라 하면 쩔쩔매고 좀 줄여 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니 제대로 정진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세세생생 자기 욕심만 가지고 산만하게 살 았으니 염불 좀 하려고 해도 집중이 잘 안됩니다. 안 되는데 대충 넘어 갑니다. 죽자 살자 해도 될까 말까한 일들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 런데 하루 8∼9시간 자고 싶은 대로 자고, 밥 먹고 놀러 다니는 시간 다 빼고 나면 24시간 가운데 1시간 정도, 그것도 되니 안 되니 하니 무슨 수행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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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자신이 탄 차가 45° 정도 되는 비탈길을 오르고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여기서 액셀을 세게 밟지 않으면 뒤로 그냥 밀려 내려옵니다. 개인의 수행에 몰입하는 성문과 독각들도 죽자 살자 앉아서 집중합니 다. 집중하는 심도도 중요하지만 시간도 중요합니다. 계속 액셀을 밟아 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간절한 마음을 내지 않고 1시간이나 30분 정 도 천수경을 읽고 끝냅니다. 그래서야 정진에 무슨 힘이 붙겠습니까? “스님, 정진을 하려니 장애가 많아서 못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 도 있습니다. 장애야 당연히 있습니다. 여태까지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본인들이 해야 될 일이지, 누가 해 주겠습니까?
성문과 독각마저도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정진을 합니다. 제가 항 상 강조하는 것처럼, 여러분이나 저나 내일까지 살아 있을 것이라고 장 담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목숨은 호흡에 달렸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하루 적당하게 보내면서 지낼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은 형편도 괜찮고 먹고 살만하고 기운도 있으니까 이것도 해야 하고 저 것도 해야 하고 이것도 해 보고 싶고 저것도 해 보고 싶을 테지만, 그렇 게해서 무슨 진척이 있겠습니까? 공부 방법을 정확하게 알았다면 시간 을 억지로라도 쪼개서 해야 합니다. 자기 혼자 수행해서 번뇌를 좀 떨어 야겠다고 출발한 성문과 독각도 죽자 살자 수행하는데 일체중생을 건 지겠다는 사람들이 머리에 불 끄듯이 하지 않고 그냥 적당히 쉬어 가면 서 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불교는 무리를 많이 늘리는 것을 능사로 삼지 않습니다. 사람 많이 모아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공부하는 사람 아니면 천 명, 만 명 모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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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의미 없습니다. 보리심을 내서 중생을 구하겠다고 서원한 사람이라 면 현실과 타협해서 적당하게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적당히 세월 보 내다가 이 허망한 진구(塵垢)를 벗어 던질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 분이나 저나 다 부서져 가는 수레입니다. 눈이 어두워서 안경을 쓰고, 무릎도 삐걱삐걱하고 허리도 아프고 머리도 안 돌아가고 입맛도 없습니 다. 여러분이 저의 제자가 되고, 신도가 되고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 습니다. 정진을 안 하면 저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보리심을 일으 켜서 공부를 하니까 인연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공부를 안 하는 것 은 의사가 약을 지어 줬는데 안 먹는 것과 똑같습니다. 정진하겠다는 발 심을 자꾸 크게 일으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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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게송
선정을 수행하기
사마타를 갖춘 비파사나로
번뇌를 완전히 끊는 것을 알고서
정신 세계의 4선정[四無色定]을 완전히 벗어난
선정을 닦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앞서 『수습차제 중편』을 공부할 때도 말씀드렸지만 사마타를 닦아 야 합니다. 호흡관을 하든, 주력을 하든,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마음을 집중하는 사마타 수행을 해야 합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지 않고 “일체 유위법이 여몽환포영”이라고 관찰하면 그것은 지식이 되어 버립니다. 지혜가 되려면 사마타를 먼저 닦아야 합니다. 사마타는 집중한 상태를 말하는데 하나의 소의처에 고요하게 머문다 해서 지(止)라고 합니다.
적당히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깊게 들어가는 겁니다. 처음에는 집중이 되든 안 되든 애를 써서 자꾸자꾸 연습을 해야 합니다. 애써서 하지 않으면 흩어집니다. 산만하게 10∼20번 하는 것 보다 애를 써서 한 번 하는 게 났습니다. 되고 안 되고는 무조건 마음을 하나로 만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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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있습니다. 일념이 되면 30분이건 1시간이건 염불이나 주력을 하면서 오롯이 집중해야 합니다. 이것이 생사를 건너는 힘이 됩니다. 마치 강을 건널 때 배가 중심을 잘 잡으면 안 뒤집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큰 배에 는 무게 중심을 유지하기 위해 바닥에 평형수를 채워 넣습니다. 그래서 배가 기울지 않습니다. 사마타는 생사를 건너는 데 평형수와 같은 역할 을 합니다. 앉아서 염불을 만 번 했다면 길을 가면서도 계속 해야 합니 다. 자꾸 해서 집중이 되어야 선정의 힘이 생기고 사마타에 힘이 붙습니 다. 점점 깊이 들어가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자꾸 애를 쓰는 것 말 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대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오신다 해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앞에서도 계속 말씀드렸지만, 사마타를 닦을 때는 이것저것 섞어서 하 지 말고 호흡관을 하는 경우에는 호흡관을, 염불을 하는 경우에는 염 불을, 태양관을 하는 경우에는 태양관을 죽자 살자 하십시오. 화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마타는 자신의 산만함과 싸우는 것입니다. 사마타 수행을 할 때는 스승께 거듭 물어보면서 해야 합니다. 안 하는 사람은 물어보지도 못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르니까 그렇습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려면 그전에 듣고 배우고 해서 부처님의 바른 견해를 얻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정견을 얻어야 바로 비파사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비 파사나를 관(觀)이라고 하는데 ‘잘 본다.’는 뜻입니다. 사마타와 비파 사나가 동시에 되어야 번뇌를 없앨 수 있습니다. 사마타를 가지고 삼매 가 이루어지면 비파사나가 되는 것이지, 비파사나만 따로 형성되지 않 습니다. 비파사나만 있으면 자기 것이 안 됩니다. 번뇌는 사마타에서 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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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것이 아니라 사마타를 갖춘 비파사나에서 깨집니다.
게송에서 사마타를 갖춘 비파사나가 번뇌를 없애는 줄 알아서 사무 색정을 벗어난 선정을 닦는다고 했는데, 여기서 사무색정은 무색계의 네 가지 선정을 말합니다. 욕계, 색계, 무색계에서 모두 선정을 닦는데 기본적으로 선정만 있는 최고의 단계가 사무색정입니다. 최고의 단계라 해도 그것은 아직 삼계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 선정입니다. 그것마저 초월한 선정은 사마타를 닦음으로써 비파사나가 이루어지고 비파사나 가 형성됨으로써 번뇌가 깨진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마타를 갖 춘 비파사나를 통해서 번뇌가 깨져 버린 상태가 되는 것을 보살의 수행 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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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게송
지혜를 수행하기
지혜가 없다면 다섯 바라밀로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니
방편을 갖추어 세 가지[三輪]를 분별하지 않는
지혜를 닦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바라밀이 없으면 안 됩니다. 보시하지 않으면 계를 지킬 수 없습니다. 남에게 베푸는 마음 없이 인색 하면 계를 지킬 수 없습니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계를 지키지 않으면 인 욕할 수 없습니다. 계율의 대부분은 남을 해치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아야 합니다. 참지 못하면 정진할 수 없습니다. 정진하지 않으면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사마타가 불가능 합니다. 사마타를 닦지 않으면 비파사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 문에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을 닦아 사마타에 들어가고, 사마타를 통해 비파사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비파사나를 통해 지혜를 성취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입니다. 반야바라밀이 없으면 공덕을 쌓을 수는 있지만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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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정등각,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합니다. 부처가 될 수 없다는 말입 니다. 그러니까 보시, 지계, 인욕, 정진에 선정을 더해 다섯 바라밀이 됩 니다. 이 다섯 바라밀을 갖추어도 만약에 지혜바라밀이 없으면 정각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게송에서 “방편을 갖추어 세 가지[三輪]를 분별하지 않는 지혜를 닦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라고 했는데, “세 가지를 분별하지 않는 지혜”는 몸 과 말과 뜻이 각자 놀지 않고 법이 이루어져 무분별지가 되는 것을 말합 니다. 그래서 안과 밖이 모두 같아서 도가 이루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무 분별지와 바른 말과 행이 서로 모순되지 않게 법이 이루어진 것을 말합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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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게송
자신의 잘못을 살펴서 없앰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살피지 않으면
수행자의 모습으로 가르침과 어긋난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잘못을 살펴서
끊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자신의 허물을 타인이 살펴주는 것이 아닙니다. 유교에서도 일일삼성 오신(一日三省吾身)이라 해서, 하루에 자신을 3번 이상 잘 살펴보라고 합니다. 객관적으로 충고해 줄 수 있는 친구를 사귀고,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스승의 말씀을 잘 따르는 것으로 자신의 잘못을 성찰하고 고 칠 수 있는 중요한 가르침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는지 스스로 아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여섯 세상을 윤회하는 중생들 가운데 인간만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 한 가지가 있습니다. 도구를 사용한다는 점이 아니라 성찰을 한다는 점 입니다. 예전에는 동물들은 도구를 사용할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만 제 인 구달과 같은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침팬지도 도구를 사용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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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는 바다의 해달도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고 합니다. 해달은 바다 에서 조개를 주워 와서는 자기 배 위에 얹어 놓고 돌로 깨서 먹습니다. 특 히 인간과 가장 가깝다는 침팬지나 마운틴 고릴라, 오랑우탄과 같은 유 인원들도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직 인간만 큼 진화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대뇌가 스스로의 잘못을 알아차 리지 못하는 점입니다. 잘못을 아는 마음이 형성되는 것을 도덕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인간 밖에 없습니다. 많은 철학과 종교에서 이 문제를 다 루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살핀다.’는 정견(正 見)이 전제되어야 가능하고, 정견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니라 정견을 밑받 침하는 바른 기억이 있어야 됩니다. 부처님 말씀을 정확히 기억해야 자 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문사수(聞思修) 수 행을 꼭 하라는 겁니다. 법을 잘 듣고, 들은 법을 깊이 사유하고, 배운 대 로 실천하는 가운데 무엇을 잘못하고 무엇을 잘 하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허물을 잘 살피지 않으면 수행자의 외형을 하고는 법 이 아닌 것을 행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의 외형이라 함은 가사를 입었 다거나, 머리를 깎은 것을 말합니다. 신도들은 방장, 주지라는 자리 또 는 유명세에 따라 법이라 착각하며 따르기도 합니다. 실제로 법이라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아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말씀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알아야 그 법에 비추어 자신의 잘 못을 안다는 것입니다. 길고 짧은 것을 재볼 때 쓰는 자를 척도라고 하 는 것처럼 우리의 잘잘못을 재는 바로미터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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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입니다. 정견이 생기지 않으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 없습니 다. 문사수 수행은 스승에게 법을 잘 듣고 정확히 기억해서 실천하는 것 으로 수행의 바로미터가 됩니다. 보조국사의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 人文)』에도 “하당후묵좌관지(下堂後黙坐觀之)”라는 말이 나옵니다. 법 문을 듣고 내려왔을 때 그것을 잘 관찰하고 깊이 사유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문사수 수행이 매우 중요합니다.
부처님 말씀을 바로미터로 삼으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서 고칠 기회가 생깁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많은 잘못을 합니다. 그래서 매 순간 자신의 허물을 알아차려야 하는데, 이것을 정지(正知)라고 합니다. 매 순간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지 모르면 한참 뒤에 알거나 잊어버릴 수도 있고 그러면 고칠 수가 없습니다. 자기 고집을 계속 부릴 수 있으므로 그 순간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순간 알 아차릴 정도로 공부가 된 사람은 절대 큰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알아 차린 순간 멈추게 됩니다. 우리가 운전을 하다가 길을 잘못 들면 브레 이크를 밟고 빨리 후진해서 바른 길을 찾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런 것처럼 잘못을 알았을 때 후진할 길이 생기는 것이지 잘못을 모를 때는 길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 순간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고 끊는 것이 보살의 아주 중요한 수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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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게송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기
번뇌로 인해 다른 보살의 허물을 말한다면
자신이 퇴보하기 때문에
대승에 들어간 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보리심을 일으켜 대승에 들어간 보살에게 조그만 허물이 있다고 해서 비난하면 안 됩니다. 보살행은 이타행입니다. 보살행이 추구하는 궁극 적인 목표는 보리심을 일으켜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고, 모든 중생이 행복해지는 데 자신이 도 움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갖기 시작한 사람을 부족하다고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보살의 업이 크게 익어지지 않아서, 아직 방편이 약해서 서툰 점도 있고 역량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과거의 왕 세자들이 현재 왕은 아니지만 반드시 미래에 왕이 되어서 선정을 베푸 는 것처럼, 보리심을 내서 일체중생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하 는 사람이라면 지금 부족하다 할지라도 나중에 반드시 훌륭하게 됩니 다. 부단히 개선해서 덜 된 부분을 거듭 채워 나가는 사람에게 허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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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이익이나 욕심을 위해서 움직이는 사 람이면 그게 다 허물이 되니까 지적을 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일체중생 을 위해서 살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 무슨 허물이 있겠습니까?
깨를 밭에 심었을 때 아직 깨가 덜 자랐고 잡초가 있더라도 그 밭을 깨밭이라고 하지 잡초밭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밭을 깨밭이라며 소 중히 여깁니다. 보리심이 발현되었다면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그 앞에 서 무릎을 꿇고 삼배를 합니다. 왜냐하면 숭고한 정신을 가졌기 때문입 니다. 자기 욕심껏 사는 사람들을 숭고하다고 생각하거나 소중하게 여 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지, 보살행은 상상을 초월 합니다. 여러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 니다. 한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 힘든 고통을 선택하기 도 합니다. 일반인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합니다. 이렇게 보살행을 실천하며 알려진 분들도 있지만 알려지지도 않은 분들도 수 없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리심을 발해서 일체중생을 위하겠다고 하는 사람을 자신의 얕은 견해로 비난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진심으로 보리심을 발하고 성인들 앞에서 굳게 다진 사람은 그 마음 을 낸 것만으로도 존중 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 대다수가 자기 욕망을 따라 살거나 종교라는 외피를 입고 탈속을 말하지만 그것이 또 하나의 법집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보리심을 일으켜 부처가 되 겠다고 하는 사람은 모든 욕망을 포기하고 모든 업을 정화시키기 때문 에 칭찬받아도 마땅합니다. 보리심을 낸 사람은 깨닫건 깨닫지 못했건, 십신에 머물건,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그 어느 단계에 머물건 간에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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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심을 발한 것 자체만으로도 존중 받아야 하고 작은 소견으로 비판해 서는 안 됩니다. 『화엄경』 「미가 장자품」을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 다. 미가 장자는 누구라도 오기만 하면 “당신은 발보리심을 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제가 부처가 되고자 일체중생을 위한 길을 지금부터 걷겠습니다.”라고 하면, 미가 장자가 의자에 앉아 있다가 쫓아 내려와 서 먼저 앉혀 놓고 절을 했답니다. 그만큼 소중한 정신이기 때문에 그 렇게 한 것입니다. 무가치하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인연으로 생겼다 사라질 이 몸을 있다고 고집하면서 그저 자신의 욕망이나 채우고 사는 것을 가치 있다고 해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살면서 보리심을 낸 보살을 안 좋게 생각하고 허물을 잡는다면 본인의 퇴보만 가져올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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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게송
재물과 명예에 대한 집착을 버림
재물과 명예 때문에 서로 다투면
듣고 사유하고 수습하는 행이 퇴보하니
사랑하는 가족과 시주 가정에 대한
집착을 끊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재물과 명예를 위해 서로 다투면 수행하는 힘이 약해집니다. 제일 천 박한 것이 재물 때문에 다투는 겁니다. 보리심을 일으키고서 재물을 탐 닉하는 것은 천박한 일입니다. 호랑이는 배가 고파 죽어도 도토리를 주 워 먹지 않습니다. 호랑이가 도토리 주워 먹는 것을 봤습니까? 도토리 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아도 별 볼 일 없다 하고 안 먹습니다. 보살은 재 물을 탐하지도 않고 이름을 남기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시주들의 가정에 대한 집착을 끊는 것이 보살의 수 행입니다. 집착은 끊지 못해 연연해 하는 마음입니다. 전에 북인도 스피 티(Spiti)라는 지역에 갔는데 저를 거기까지 실어다 준 네충 절 스님 한 분의 사연입니다. 마날리(Manali)를 넘어서 라다크(Radhak)로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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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갈래 길에서 갈려서 스피티에 있는 따보(Tabo)라는 절에 갔는데 스 피티 출신인 스님은 저를 데려다 주고는 속가로 갔습니다. 그런데 스님 의 어머님께서 하루 저녁 주무시고 가라고 하지 않고, 출가했으니까 절 에 가서 주무시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밥만 한 끼 먹고 제가 부탁 한 꿀만 한 단지 갖고 그냥 왔습니다. 올 때 서운하지 않았냐고 물었더 니 “우리 어머니는 보살이시라 세속에 와서 살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게 끔 딱 끊어주셨다.”라고 했습니다. 이게 출가한 사람을 대하는 티베트 어머니들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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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게송
거친 말을 하지 않기
거친 말은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보살행의 실천을 퇴보시키니
다른 사람이 좋아하지 않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거친 말을 하면 듣는 이의 마음이 불편하고 보살의 실천이 기울게 됩 니다. 거친 말이란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를 가리 킵니다. 망어는 사실이 아닌 거짓말이고, 기어는 꾸며서 하는 말이나 잡 담이고, 양설은 이간질이고, 악구는 폭언입니다. 폭언을 하면 상대가 방 어 기전을 일으켜서 진실한 대화를 못할 것이고, 거짓말을 하면 사기꾼 말이니까 상대를 안 할 것이고, 잡담은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고, 이간 질을 하면 다툼이 일어날 것이니 피할 것입니다. 이런 말들이 오가는 속 에서는 자신이나 상대나 다 불편할 것입니다. 따라서 보살의 실천 자체 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보살은 사실만 얘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듣는 이가 불편할 수 있는 말을 끊어야 보살의 수행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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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게송
번뇌를 잘라버림
번뇌에 물들면 대처하여 없애기 어려우니
바른 알아차림으로 대치의 칼을 들고
집착의 번뇌가 생기자 마자
잘라 버리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번뇌도 습관입니다. 번뇌는 탐진치를 가리키는데, 탐욕을 부리고 자꾸 성질을 내고 어리석은 생각을 반복할수록 힘들고 끊기가 매우 어렵습 니다. 탐진치의 습관이 점점 강해지면 보살행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번 뇌가 일어날 때는 정념의 칼을 써야 합니다. 사마타가 된 상태는 예리 한 칼날과 같습니다. 잘 갈아 놓은 칼은 번뇌를 깨뜨리는 데 아주 유용 합니다. 이 칼을 써서 잘 깨고, 잘 자르는 것이 비파사나입니다. 정확하 게 관찰하는 것입니다. 번뇌가 일어날 때마다 ‘아!’ 하고 알아차리는 겁 니다. 알아차리면 다스릴 수 있고 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탐욕이 일 어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탐욕이 일어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 기도 합니다. 평소 습관이 그렇게 들었으니까요. 그리고 부처님 말씀에 대한 정견이 없으니까 끊을 생각도 안 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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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게송
바른 알아차림으로 남의 이익을 성취함
요약하면 언제 어디서 어떤 행동을 하건
자신의 마음 상태를 잘 살피고
매 순간 떠올림과 알아차림을 챙겨
남의 이익을 성취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앞에 나온 게송들을 요약한 내용이니 이게 핵심입니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처해 있건, 물건을 사건, 병원을 갔건, 등산을 하건, 밥을 먹건, 인도에 갔건, 한국에 있건, 지금 몇 년도를 살건 상관이 전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더라도 마음 상태를 먼저 잘 살피라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 상태를 살피는 것인가? 지금 염념 보리심이 되고 있는가, 지 금 욕심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일체중생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 하고 있는가? 이런 것을 살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데도 쓸 데 가 없는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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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게송
보살의 회향
이와 같이 애써 지은 모든 선업들
수많은 중생의 괴로움 없애기 위해
세 가지 청정한 지혜로
깨달음으로 되돌리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여기서는 회향을 말합니다. 자신이 지은 공덕이 있다면 모두 일체중 생을 위해서 회향하겠다는 것입니다. 재보시를 했거나 일곱 가지 공양 을 올렸거나 육바라밀을 했거나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했다면 법으로 회향하여 중생을 위해야 합니다. 중생을 위한 것이 아닐 때에는 불교라 고 할 수 없습니다. 불교가 7세기경에 들어온 티베트도 13세기 초에 와 서 계율도 쇠퇴하고 경을 보는 것도 쇠퇴하고 전부 차크라 수행에 경도 되면서 대승의 법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참선만 하면 끝이라고 생각 하는 지금 우리 불교처럼 돼 버린 것입니다.
그러다가 15세기 초에 쫑카빠 스님이 대승을 제대로 공부해서 ‘겔룩 파’라는 종파를 설립하고 불교를 혁신했습니다. 그분이 『람림』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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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쓰셨는데, 배우고 가르치는 방법이 아주 체계적입니다. 불교의 핵 심은 선종에 있지도 않고, 율종에 있지도 않고, 교종에 있지도 않습니 다. 일체중생을 위하는 ‘대승’에 있습니다. 대승은 이타심이 전제가 되 어야 하고 그 이타심은 성불을 전제해야 합니다. 최고의 정점이 깨달음 입니다. 이타심을 실행해서 보리심이 최고의 상태가 되는 것을 승의보 리심(勝義菩提心)이라 하는데, 이것이 이타심의 최고 경지입니다.
수행에서는 회향이 전부입니다. 부처님께서도 평생 쌓은 공덕을 법으 로 정리해서 45년 동안 다 회향하셨습니다. 작은 것도 회향하지 않고 ‘나의 것’이라 생각하면 인생이 전부 다 죄악이 됩니다. 수행하는 것도 그렇지만 조그만 살림살이를 해도 회향이 중요합니다. 법문을 듣고 있 는 여러분도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을 해보세요. 지금 제가 두 번, 세 번 자세하게 가르치고 있지만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을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처음엔 입이 안 떨어지고 말이 막히고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남 을 위할 때 설명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수행하는 힘이 커집니다. 같이 증장합니다. 그래서 『금강경』에 “수지독송서사 위타인설(受持讀誦書寫 爲他人說)”을 마지막에 넣어 놓은 것입니다. 중생을 위하는 마음이 커 지면 기억력도 강해지고 사유도 깊어지고 말솜씨도 늘기 시작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부처님께서는 법문을 하시 고 나서 그것을 기억하기 좋게 게송으로 정리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경 전을 보면 산문이 나오고 뒤에 게송이 붙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시면 산문 부분은 이해를 하고 나서 나중에 외우겠지만 게 송 부분은 바로 외웁니다. 그때는 한 번 듣고 외우는 사람이 많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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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부처님께서 『반야심경』 법문을 하시면 『반야심경』을 그대로 외 워서 그날 법문을 듣지 못한 사람에게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 셨다.”라고 하며 전했다는 겁니다. “오늘 스승께서는 ‘관자재보살이 깊 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고 모든 고난이 다 사라졌다…’하고 말씀하셨네.”라고 일러주는 것입니다. 다 알아들 은 사람도 있을 테고 못 알아들은 사람도 있을 테고 다음에 듣겠다는 사람도 있을 테고, 이렇게 법이 쭉쭉 전해졌을 겁니다. 모른다고 하던 사람이 남을 위해서 설명해 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더 주의 깊 게 듣고 책을 펼쳐 확인하고 다시 물어 찾게 됩니다. 중생무변서원도의 자세로 다시 시작한다면 삼사년, 사오년이면 남을 위해서 경전 내용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만 생각이 머물러 있으니까 안 되는 겁니 다. 자신에게만 머물러 있지 말고 끝까지 모든 것을 회향해야 합니다. 물질적인 것부터 시간을 내는 것, 몸을 쓰는 것 또는 공덕이 조금 생기 면 회향해서 모든 중생이 다 성불하기를 바란다는 큰마음을 내는 것, 그 것을 대승이라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대승 보살의 37가지 수행법을 말씀드렸는데, 이것은 톡메 상뽀 스님께서 당신이 공부한 견해로 정리하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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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는 게송
현교와 밀교의 경전에서 말씀하신 의미를 훌륭한 분의 말씀을 근거로 보살의 서른일곱 가지 수행법을 보살의 길을 익히는 이들을 위해 정리했습니다.
지혜가 없고 배운 것이 적어서 아는 이들을 기쁘게 할 문장은 아니지만 경전과 훌륭한 분들의 말씀에 근거했기 때문에 보살의 수행에 잘못된 점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폭넓은 보살의 수행법을 저처럼 모자란 지혜로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에 모순되거나 관련이 없는 등의 허물을 훌륭한 분들께서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생긴 선법으로 모든 중생이 진리와 세속의 보리심으로 윤회와 적멸의 두 극단에 머물지 않는 보호주 관세음보살처럼 되소서.
수행자 비구 톡메 상뽀가 자타를 유익하게 하고자 티베트 율추 동굴에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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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교와 밀교의 경과 논을 설한 성인들의 가르침을 토대로 삼아 보살 행을 닦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보살의 37수행법을 엮었다는 말씀입니 다. 대승의 현교와 밀교 양쪽의 말씀을 다 보고 당신의 견해로 수행의 요체가 되는 말씀을 정리해서 참고가 되라고 적어 놓은 것입니다. 모든 보살은 “내가 다 배웠다.” “지혜가 다 트였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배움이 적고 지혜가 옅으며 현자들께서 감탄할 만한 문장력 또 한 갖추지 못했지만, 저의 독단이 아니라 성인들의 말씀을 토대로 정리 했기 때문에 이 보살의 수행법에는 큰 오류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보살의 행은 매우 광대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저같이 부족한 이 가 전부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니 혹여 잘못된 것이 있다면 성현들께서 너그럽게 헤아려주시길 바랍니다.”라고 하는 마음으로 게송을 맺으셨 을 것입니다. 아마 톡메 상뽀 스님보다 더 깊이 공부하신 분들은 조금 미진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만 마지막에 회향하는 이 게송이 진 짜 보살다운 말씀입니다. 이 게송을 지어서 얻은 선업을 모든 중생에게 회향하고, 모든 중생이 보리심을 얻어 윤회와 해탈의 경계에 안주하지 않는 보호주 관세음보살님과 같기를 바라며 회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큰 수행자의 37수행법에 대해 설명을 했습니다. 처음에 “관세 음보살님께 귀의합니다.”로 시작해서 무량중생을 위한 회향으로 끝났 습니다. 이 37게송은 보리심 가운데서도 주로 자비심의 핵심을 잘 정리 한 내용으로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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